에고 모드의 의식이 마지막 붕괴 단계에 접어들면서 남녀 관계는 인류가 지금 처한 위기 상태를 고대로 보여준다.
사람들이 점점 더 자기 마인드와 동일시됨에 따라 인간관계 대부분이 <존재>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그렇기 때문에 고통의 원천으로 바뀌면서 각종 문제와 갈등에 지배되고 있다.
혼자서 행복할 수 있는 사람만이 다른 이들과도 행복할 수 있다
사람들은 서로에게 끌리고 소통하며 관계를 맺고 싶어 하지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한테서 사랑받고 인정받고 존중받기를 필요로 해요.
이건 다 정상적이고 자연스러운 모습입니다.
그러나 진정 행복한 인간관계가 왜 그리도 드문가요?
대다수 사람들한테 행복과 기쁨과 사랑의 순간들은 어째서 그렇게 드물며, 그런 순간들조차 또 왜 아주 쉽게 아픔이나 분노, 짜증, 서운함, 불쾌함으로 바뀌는 건가요?
왜냐하면, 자신의 <참된 나>에 머물러서 다른 이들을 대하는 사람들이 아주 적기 때문이에요.
모든 인간관계는 기본적으로…
<거짓된 나>들의 접촉이고 어울림입니다.
이건 둘이나 그 이상의 <에고>가 만나는 거예요. 에고들이 접하는 곳에서는…
고통이 따르게 마련이에요.
에크하르트 톨레는 인간관계가 오늘날처럼 아픔과 갈등으로 가득한 적은 없었다고 말합니다. 이건 인류가 처한 크나큰 위기를 반영하는 것입니다. 이 위기는 기존의 정치와 경제, 사회 구조를 생성한 에고 모드의 의식이 결국엔 붕괴되고 만다는 증명이기도 합니다.
인류가 계속 존재하려면 인간의 의식이 바뀌어야 해요.
인류가 진화할 수 있는 유일한 방향은…
영적 동면 상태에서 벗어나 깨어 있는 의식 상태를 높이는 것밖에 없습니다.
행복하기를 꿈꾸면서 맺는 관계들이 어찌하여 끝에 가서는 큰 아픔을 안기는 것인가요?
왜냐하면, 대다수 사람들이 다른 사람과 관계를 추구하면서 거짓된(잘못된) 동기를 지침으로 삼기 때문이에요. 그들은 인간관계가 없으면 헛헛하거나 비참하거나 불행하다고 느낍니다. 자신이 온전하지 못하거나 쓸모없는 것처럼 느껴요. 그래서 자기네 삶에 다른 사람이 나타나서 그 부족한 온전함을 채우고 행복을 안겨 주리라 기대해요.
바로 여기에 오류가… 그 뒤에 발생하는 모든 문제의 뿌리가 있어요.
진정한 행복은 바로 우리 각자의 내면에 있잖아요?
그걸 다른 이들한테서 기대할 필요가 없고, 기대해서도 안 되는데 말입니다.
만약 지금 여기에 혼자 있으면서 행복하다고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다른 이들하고 있어도 행복하지 못할 것이다.
다른 누군가가 다가와서 행복하게 해주기를 기대하다 보면, 지금 이 순간에서 벗어나게 돼요.
혹시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르죠.
‘음, 나한테 지금 어떤 문제가 있어도 시간이 해결해 줄 거야. 백마 탄 왕자만 만나기를 기다려야지…’
하지만, 이것도 착각이에요.
시간은 문제를 절대 해결해 주지 않을 뿐 아니라…
외려 새로운 문제를 자꾸 양산하기만 합니다.
시간이라는 미망에서 벗어나고 현재 순간과 결합되어야만 (그래서 현재에 충실해야만), 파트너가 있든 없든,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이, 자유롭고 행복하다고 느낄 수 있어요.
그리고 그런 독자적인 상태에 들어설 때, 진정 행복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기회가 비로소 생길 겁니다.
왜냐하면, 독자적일 때…
즉, 곁에 누가 있고 없고 상관없이 행복함을 느낄 때…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지 않게 될 테니까요.
인간관계에서 빚어지는 모든 갈등과 불화와 아픔이며, 애정이 증오로 변하는 모든 경우는 파트너들이 서로에게 집착하고 중독됐다는 사실과 관련됩니다.
한데, 만약 내 행복의 원천이 다른 사람이라고 여긴다면, 그 사람에게 의존하지 않기가 어렵지요! 자기도 모르게 매달리고 집착하게 돼요. 그러면… 어떡하든 상대를 붙잡으려 애쓸 터이며, 쩍하면 질투하고 의심하고 비난하고, 내 기대에 부응하라고 상대에게 요구하겠지요. 그러면… 상대는 저항하게 되고, 결국 두 사람은 충돌을 피할 수 없게 되잖아요? 서로 아끼고 서로에게 힘이 되기는커녕, 서로에게 아픔과 고통만 키우는 악순환에 빠지는 거예요.
이런 악순환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단 하나…
내 행복의 원천을 다른 사람한테서 볼 게 아니라 자신에게서 찾는 것!
그러면 우리는 자유로워질 거예요. 그때 우리는 다른 사람을 그냥 사랑할 수 있을 거예요. 순수하고 사심 없고 진정 성스러운 사랑으로 말이죠! 그때 우리는 상대가 곁에 있어 주어 고맙다고 할 것이며, 혹여 그 상대가 우리 인생에서 사라진다 해도, 행복의 원천은 우리한테 여전히 남아 있음을 알게 될 거예요.
행복의 원천이… 우리 내면에 있는 한, 그걸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우리한테서 빼앗을 수 없다.
실습 47
눈을 감고 <지금> 순간으로 들어서서, <내면의 몸체>와 연결하고, <참된 나>에 뿌리를 내리세요.
당신은 내면 공간에서 에너지를 느낍니다.
이건 생생한 삶의 에너지에요.
이건 <존재>가 만들어 냈으며 일정한 형태가 없고 시간을 초월한 삶이에요.
이것이 그저 삶의 에너지가 아니라 사랑의 에너지라고 상상하세요.
이제 당신 내면은 사랑의 에너지로 가득 채워졌어요.
이 에너지는 <존재>라는 영원무궁한 원천에서 나와요. 이 원천은 마르는 법이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당신을 가득 채우는 사랑도 결코 메마르지 않을 거예요.
만약 이것이 그냥 에너지가 아니라 사랑의 에너지임을 절실히 깨닫는다면, 사랑의 에너지가 원천에서 한층 더 강하게 나올 거예요.
이건 그야말로 순수하고 그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으며 그 어떤 조건도 내걸지 않는, 신성한 사랑이에요. 당신이 무엇을 하고 어떻게 행동하고 어떤 사람이든 간에… 이 사랑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당신한테서 멀어질 수 없어요. 그 원천이 당신 안에 있는 걸요!
사랑의 원천에 깊숙이 뿌리 뻗어 거기서 단단히 뿌리 내린다고 상상하세요.
이 원천이 늘 당신과 함께 있다는 점을 확실하게 인식하세요.
이 원천이 당신에게 사랑 에너지를 끊임없이 공급해요.
당신은 이제 사랑을 어딘가 바깥에서 찾을 필요가 없어요.
언제든 내면의 원천에 눈길 돌리기만 하면, 사랑이 충만한 상태를 누릴 수 있어요.
당신 자신이 곧 사랑의 원천임을 늘 분명하게 의식한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덜 기대하고 덜 집착하게 될 것이며, 그럼으로써 그들과 더 건강하고 더 조화롭고 더 자유롭고 더 행복한 관계를 맺을 것이 분명합니다.
마인드가 과거로 미래로 잡아끌면서 우리를 착각과 망상에 빠뜨린다는 얘기가 지금까지 여러 번 나왔습니다. 하지만 그런 마인드도 구체적인 과제를 해결하는 데는 유용합니다.
에크하르트 톨레는 마인드를 창의적으로 활용하는 방법을 이렇게 제시합니다.
즉, 마인드를 우리 <내면의 고요>와 결합하고 <참된 나>와 동일시할 때!
알다시피, <참된 나>와 하나가 되면서 동시에 생각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 두 과정은 양립할 수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만약 어떤 과제를 해결해야 한다면, 생각이 (일절) 없는 상태와 사유 과정 양쪽을 번갈아 왔다 갔다 할 필요가 있어요. (소위 말하는 ‘멍 때리기’가 그래서 필요해요.)
어떤 과제를 해결할 때, 이런 사고 형태가 가장 효과적입니다.
왜냐구요?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생각하는 것을 내면의 지혜와 <존재>의 이성으로써 검증하고 수정하게 되니까요.
우리네 마인드는 아주 쉽게 속아 넘어가고, 논리는 우리를 실패로 이끄는 경우가 많다. <존재>의 이성은 우리를 속이는 법이 없어. 하지만 만약 어떤 논리적 과제를 해결해야 한다면, 내면의 지혜만으로는 충분치 못할 수 있다. 이때는 우리네 평범한 마인드와 <존재>의 이성이 공조함으로써 가능해진다.
실습 46
현실적으로 가장 먼저 해결하고 싶은 과제를 생각하세요.
혹은, 어떤 의문점에 대해 찾고 싶은 답이라도 좋아요, 그걸 생각하세요.
이 과제나 의문점을 마음속에서 요약하세요.
다음에 주의를 자기 내면으로 돌리고 <내면의 몸체>와 연결하세요.
이제 우리는 평정 상태로 들어서면서, 갖가지 잡념이 사라질 거예요.
그렇다고 해서 의식의 작동이 멈춘다는 뜻은 아닙니다.
자신의 내면으로 1~2분 그렇게 몰입하면 충분해요.
다음에 평소의 사고하는 방식으로 돌아오세요.
이제 생각이 더 밝고 선명하고 창의적이 된다는 점을 알아차릴 거예요.
과제에 대해 머릿속에 먼저 떠오르는 생각들을 기억해 두세요. 적어 두면 더 좋습니다.
다음에 다시 <참된 나>와 결합한 상태에서 내면 깊숙이 몇 분 동안 침잠했다가, 다시 보통 생각으로 돌아오세요. 이때 여러 생각이 이리저리 헤매는 게 아니라 과제를 숙고하는 데 집중된다는 게 중요해요.
그렇게 일반적인 생각 모드에서 내면의 평정으로 몇 번 오가다 보면, 사유 과정에 새로운 특성이 생기는 것을 알게 될 거예요.
이 상태에서 우리는 마인드로만 (머리로만) 생각하는 게 아니라, 우리 존재 전체로 생각하게 됩니다. 마인드와 내면의 지혜와 몸과 에너지가 다 사유 과정에 포함되어 작동하지요.
이렇게 사유한 결과는 보통 생각 모드 때보다 훨씬 더 유용할 겁니다.
이렇게 작업하면서 떠오르는 생각을 죄다 적어 두세요.
그 가운데 해결책을 몇 가지 적으세요.
거기서 가장 좋아 보이는 것을 나중에 고를 수 있을 거예요.
현재 순간을 믿고 받아들이고 내면의 지혜를 따름으로써, 우리는 <에고>가 극적인 사건들을 더 이상 일으키지 않는 생활 방식으로 들어서게 됩니다.
우리 삶에서 크고 작은 사건들을 일으키는 것은 바로 우리네 <에고>인데…
이 에고는 일상의 상황들을 구체적으로 보기를 꺼려하고, 과거의 모든 문제며 미래에 겁내는 것을 죄다 이 일상 상황에 붙들어 맵니다. 그 결과, 현실적인 것이든 상상의 것이든 두려움이나 재앙이나 불행 따위가 들어섬으로써 행복해질 수 있는 가능성을 모조리 가로막습니다.
반면에 에고가 아니라 <참된 나>와 결합하면…
극적인 사건들이란 없으며 실제 삶만 있음을 알게 돼요. 실제 삶이란 있는 그대로의 삶이며, 있는 그대로를 우리가 받아들이면서 바꾸고 싶은 것은 바꾸라고 요구한다는 점을 알게 됩니다.
<에고>는 우리 삶의 여건을 부정적인 것 아니면 긍정적인 것으로 나누고 바꿉니다.
한데, 생활 여건이란 사실 부정적인 것도 아니고 긍정적인 것도 아니에요.
그건 그냥 있는 그대로의 것일 뿐인데요.
동의하기 어렵다구요? 현재 순간에 들어선다면…
고개를 끄덕이게 될 거예요.
어디 그뿐이겠어요. 현재 순간에 들어서면, 좋고 나쁘다고 하는 것을 전부 자신의 지복으로 바꿀 수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됩니다.
재앙과 불행 뒤에서도 빛을 볼 수 있어요.
어떤 재앙들을 겪으면서도 내면 깊숙한 곳에서는 늘 행복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어요.
행복이니 불행이니 하는 것을 비롯해 바깥세상의 것은 다 환상적이며 덧없는 것이라는 점을 기억하는 게 중요하다. 진정한 행복은 우리 안에만 있다. 이 내면의 행복 상태에 의거하여 산다면, 그 어떤 재앙도 우리를 건드릴 수 없다.
그녀는 젊어서 아주 예뻤고, 그래서 기쁘고 행복하다고 느꼈어요. 그러나 노년기에 아름다움이 사라지면서 기쁨과 행복감도 사라졌고, 그러자 자신이 아주 불행하다고 여기다가 결국 은둔자가 되고 말았어요.
하지만 그녀가 자신을 자기 외모와 동일시하지 않고 내면의 영원한 삶과 동일시했다면…
자신의 노화를 차분하고 평온하게 지켜볼 뿐 아니라 내면의 진정한 영적 아름다움을 발할 수도 있었을 거예요. 그리고 이 내면의 아름다움은 바깥 껍질을 통해 한층 더 빛났을 것이며, 그 결과 외적 형태의 (육체의) 노화 과정이 더 늦춰질 수 있었겠지요.
한마디로, 에고가 열심히 쫓아다니는 행복은 지속적일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은 이 행복에 뒤이어 그 반대되는 것이 늘 따라붙게끔 설계돼 있어요. 즉, 만약 오늘 뭔가를 얻어서 행복하다면, 그것이 언젠가는 없어질 테고 그러면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상승 뒤에는 늘 하강이 뒤따르고, 그러다가 또 상승하고 또…
세상살이가 실제 그렇지 않나요? 여기에는 영구한 것이 전혀 없습니다.
행복이 오면 그 뒤에는 늘 그와 전혀 다른 것이 찾아오기 마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행복을 추구할 때…
즉, 외적인 뭔가로 이뤄지거나 얻는 행복을 추구할 때…
사실은 환상을 좇고 있는 겁니다.
그런 행복은 어차피 사라지며 정반대의 것으로 바뀔 텐데, 그걸 얻기 위해 힘과 에너지를 많이 허비하고 있는 겁니다.
에크하르트 톨레는 행복과 불행은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라고 결론을 내립니다.
행복이 불행이 되는 것은… 단지 시간문제일 뿐. 그러나 (우리가 이미 알게 됐다시피) 시간이 환상이기 때문에 행복과 불행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행복과 불행이 같은 것이라고? 저런, 무섭고 끔찍해라!” 이런 느낌이 드나요?
하지만 더 알고 나면, 여기에 나쁘거나 무섭거나 끔찍한 것은 전혀 없습니다. 인생은 돌고 도는 것이며 Up과 Down이 있어요. 꽃이 피면 지고 달이 차면 기울 듯이 인생도 그래요. 이게 자연스럽고 정상이에요. 이런 자연적인 과정을 우리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이 대목에서 노파심이 좀 드는군요. 혹시…
‘흠, 그렇다면, 어차피 사라질 것이며, 어차피 안정된 진짜 행복을 주지도 못하는 외적인 뭔가를 얻고 이루려고 온힘을 쏟을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드나요?
지금 우리 얘기가 세상사에 무관심이나 반감, 무노동, 무위도식 혹은 나아가 부정적인 태도를 부추기자는 건 물론 아닙니다. 진짜 행복의 원천은 바로 우리 안에 있다는 얘기를 하는 겁니다.
이 원천은 우리 안에 살고 있는 <존재>요 우리의 <참된 나>입니다.
이건 그 무엇에도 전혀 좌우되지 않는 행복의 원천이에요. 마르지 않는 행복 샘이에요.
현재 순간과 연결되고 내면의 <존재>에 들어서면, 우리는 바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상관없이 평온하고 행복하게 느낄 수 있어요. 우리가 알다시피, 이건 바깥세상을 피해 움츠러드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에요. 내면에 머무름으로써 우리는 바깥세상에서 최대한 효율적으로 살고 행동하는 힘과 가능성을 가외로 얻게 됩니다.
바깥세상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외부 환경에 더 이상 매달리지 않는 것… 이건 불필요한 목표에 힘을 허비하지 않고, 정말 필요한 것만 얻으면서, <에고>가 아니라 <참된 나>에게 필요한 것을 취하면서, 걱정근심 없이 차분하고 행복하게 살기 시작한다는 뜻이다.
실습 43
이 실습을 통해 자신의 몸을 포함하여 모든 물리적 형태와의 동일시에서 더 쉽게 벗어날 수 있습니다.
누워서 눈 감고 자신의 <내면의 몸체>로 가라앉으십시오.
그 에너지를 느끼세요.
이 내면의 <에너지 몸체>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자신의 <참된 나>와 연결합니다.
이 <나>를 에너지처럼 느끼세요.
즉, 형체가 없고 나이도 이름도 사회적 역할도 없는 무엇인가로 느껴 보십시오.
자기 몸을 <내면의 목격자> 눈으로 인식하세요.
이 몸이 녹는다고 상상하세요.
몸이 한층 더 가볍고 투명해져요. 형태를 잃고 공간과 하나 되어 완전히 무게를 잃습니다.
이때 당신의 <나>는 간직됩니다. 즉, 당신은 그 어디로도 사라지지 않아요.
당신이 공간이 되고 공허가 되지만… <진정한 나>로서는 사라지지 않으며, 내면에 깊이 뿌리 내린 상태는 없어지지 않습니다.
2) 불안이나 걱정, 긴장, 압박감, 고심 등 모든 형태의 두려움은 다… 미래가 너무 많고 현재가 충분치 못하기 때문에 생긴다.
3) 죄책감이나 후회, 분노, 불만, 슬픔, 낙담, 괴로움, 갖가지 불용(不容) 등은… 과거가 지나치게 많고 현재가 충분치 못하기 때문에 생긴다.
부정적인 감정 때문에 왜 <지금> 순간에 들어서지 못하나
앞의 여러 단계를 거치면서 우리는 <지금> 순간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았습니다.
하지만, 아직은 현재 순간에 늘 몰입하여 침잠하기가 쉽지는 않을 겁니다.
그렇다고 겁낼 필요는 전혀 없어요. 뭔가를 익히는 단계에서 이건 정상적이고 자연스러울 뿐 아니라 당연한 현상이기도 합니다.
처음에 현재 순간에 몰입하지 못해서 두세 번 시도해도 안 되는 이들이 많아요.
그들은 내면에서 어떤 저항이 일어나는 것을 느낍니다. 즉, <내면의 몸체>에 가라앉은 다음 그 상태를 통해서 <지금> 순간에 몰입하려 들면, 뭔가가 들여보내지 않거나 심지어 내쫓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 것이지요. 현재 순간에 대한 이 저항에 메스꺼움이나 현기증 같이 불쾌한 신체 증상이 수반되는 경우도 더러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일이 생겼다 해도 <지금> 순간에 뿌리내리려는 노력을 포기해선 안 됩니다.
오히려 한층 더 공들이는 계기로 삼아야겠지요.
중도에 어떤 장애물이 생겼다 해도 우린 극복할 수 있어요. 그럴 깜냥이 충분합니다.
그럼, 그런 저항이 왜 생기는지 살펴보지요.
당신이 느끼는 저항은 당신 안에 있는 특정 에너지가 만드는 것입니다.
바로 부정적인 감정의 에너지인데, 그런 감정에 익숙해지면 그것이 있다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합니다. 과거의 기억과 미래의 기대라는 함정에 빠져 살 때, 그런 감정은 정상적이고 자연스러워 보이니까 그렇습니다.
당신이 ‘심리적 시간’을 멈추고 <지금> 순간으로 옮겨가 살기로 마음먹을 때…
이 감정이 내면에서 저항하는 것이지요.
아, 그렇다고 당황하거나 화내기보다는 기쁘게 여기세요.
그런 감정이 모습을 드러낸 만큼, 거기서 벗어날 때가 됐다는 뜻이니까요.
만약 <지금> 순간에 침잠하려는데 내면의 뭔가가 저항한다고 느꼈다면… 우울해하는 대신 기뻐하라. 이건 자신의 부정적인 감정을 인식하고 거기서 벗어날 계기이다.
먼저, 이런 감정이 나타나는 원인을 기억해 볼까요.
우리가 알게 됐다시피, 감정이란 전부…
주변에서 일어나는 것에 대한 어떤 생각이나 판단, 평가, 해석 등을 두고 우리네 몸이 보이는 반응입니다.
한데, 생각이나 판단, 평가, 해석 등은 우리가 <지금> 순간에서 떨어져 나갈 때 생겨요.
이 때문에, 감정은 우리가 현재 순간 밖에서 ‘심리적 시간’에 빠질 때만 생길 수 있어요.
이 감정이 우리를 현재 순간 바깥에 잡아두기 원하여 거기로 들여보내지 않습니다.
현재 순간에 대한 저항을 때론 불쾌한 신체 증상 형태로 드러내기까지 하면서 말이죠.
에크하르트 톨레는 모든 부정적인 감정이 오로지 현재 순간을 부정할 때만 생긴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불안이나 걱정, 긴장, 두려움 따위는 현재보다 미래를 더 많이 그리며 살 때 나타납니다.
또, 죄책감이나 불만, 회한, 분개, 침울, 비통, 불용서 같은 감정은 현재보다 과거에 더 매달려 살 때 나타납니다.
“아니, 부정적인인 감정이 전혀 없이 과연 살 수 있단 말이야?!”
그런 의문을 갖는 이들이 많아요.
그러나 부정적인 감정이나 생각, 태도 등이 다 (과거나 미래라는) 시간에 집착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일 뿐임을 이해한다면…
그런 삶이 불가능한 건 전혀 아닙니다.
(과거나 미래라는) 시간에 빠지지 않는다는 것은… 부정적인 감정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다.
이미 알다시피, 바로 이 감정들이 우리로 하여금 과거와 미래를 버리지 못하게 하잖아요?
우리는 정말 이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과거와 미래) 시간을 두 가지 측면에서 동시에 끊기만 하면 됩니다.
첫째, 현재 순간으로 이동하면서 시간을 내던지기.
둘째, 부정적 감정 자체를 떨치면서 과거와 미래의 시간을 내던지기.
그러나 부정적인 감정을 떨치려 한다면, 그것이 우리한테 있다는 것을 먼저 알아야겠지요.
한데, 이 사실을 <에고>는 부정할 겁니다. 에고는
‘너한테 부정적인 감정 같은 건 전혀 없어’
하고 속삭일 거예요. 이것 역시 과거와 미래에서 현재 순간으로 옮겨오려는 우리네 열망에 에고가 저항하는 수법이에요. 하지만 우리는 <거짓된 나>의 이런 어깃장을 이겨내고 실제 상태가 어떤지 알 수 있습니다.
더 과감해지세요, 사실을 겁내지 말아요!
거짓은 우리를 노예로 만들지만, 진실은 (진리는)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사실을 직시하는 것은… 부정적인 감정이 있음을 인지하는 것은, 곧 그걸 떨쳐낸다는 뜻 아니겠어요?
자신에게 부정적인 감정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한, 우리는 그것과 동일시되기 쉽습니다. 그걸 인식하면, 즉시 거기서 분리되고 그것이 되기를 멈춥니다.
실습 27
혼자 조용한 곳에서 이렇게 자문하세요.
‘지금 이 순간, 난 마음 편하고 즐겁고 만족스럽게 느끼나?’
만약, 진심으로 “네”라고 답할 수 없다면, ‘아, 내 안에 부정적인 감정이나 생각이 있구나’ 여겨도 틀리지 않을 거예요.
그렇다고 자신을 탓하지는 말아요.
부정적인 감정을 갖고 있다 해서 나쁜 사람이라는 뜻은 아니니까요.
다만, 현재 순간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마인드의 농간에 빠져 있다는 뜻일 뿐이에요.
또 자문해 보세요.
‘난 왜 행복하다고 느끼지 못하나? 내 안에 어떤 부정적인 감정이 있나?’
이 물음에 대답을 생각하면서, 예리하고 객관적이고 공정한 관찰자가 되어 여러 감정을 그냥 살피기만 하세요. 당신을 썩 행복하게 만들지 않는 것이 아주 사소한 징후라 해도, 여러 감정 상태와 안에서 꿈틀대는 에너지에 주목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