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젊어서 아주 예뻤고, 그래서 기쁘고 행복하다고 느꼈어요. 그러나 노년기에 아름다움이 사라지면서 기쁨과 행복감도 사라졌고, 그러자 자신이 아주 불행하다고 여기다가 결국 은둔자가 되고 말았어요.
하지만 그녀가 자신을 자기 외모와 동일시하지 않고 내면의 영원한 삶과 동일시했다면…
자신의 노화를 차분하고 평온하게 지켜볼 뿐 아니라 내면의 진정한 영적 아름다움을 발할 수도 있었을 거예요. 그리고 이 내면의 아름다움은 바깥 껍질을 통해 한층 더 빛났을 것이며, 그 결과 외적 형태의 (육체의) 노화 과정이 더 늦춰질 수 있었겠지요.
한마디로, 에고가 열심히 쫓아다니는 행복은 지속적일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은 이 행복에 뒤이어 그 반대되는 것이 늘 따라붙게끔 설계돼 있어요. 즉, 만약 오늘 뭔가를 얻어서 행복하다면, 그것이 언젠가는 없어질 테고 그러면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상승 뒤에는 늘 하강이 뒤따르고, 그러다가 또 상승하고 또…
세상살이가 실제 그렇지 않나요? 여기에는 영구한 것이 전혀 없습니다.
행복이 오면 그 뒤에는 늘 그와 전혀 다른 것이 찾아오기 마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행복을 추구할 때…
즉, 외적인 뭔가로 이뤄지거나 얻는 행복을 추구할 때…
사실은 환상을 좇고 있는 겁니다.
그런 행복은 어차피 사라지며 정반대의 것으로 바뀔 텐데, 그걸 얻기 위해 힘과 에너지를 많이 허비하고 있는 겁니다.
에크하르트 톨레는 행복과 불행은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라고 결론을 내립니다.
행복이 불행이 되는 것은… 단지 시간문제일 뿐. 그러나 (우리가 이미 알게 됐다시피) 시간이 환상이기 때문에 행복과 불행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행복과 불행이 같은 것이라고? 저런, 무섭고 끔찍해라!” 이런 느낌이 드나요?
하지만 더 알고 나면, 여기에 나쁘거나 무섭거나 끔찍한 것은 전혀 없습니다. 인생은 돌고 도는 것이며 Up과 Down이 있어요. 꽃이 피면 지고 달이 차면 기울 듯이 인생도 그래요. 이게 자연스럽고 정상이에요. 이런 자연적인 과정을 우리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이 대목에서 노파심이 좀 드는군요. 혹시…
‘흠, 그렇다면, 어차피 사라질 것이며, 어차피 안정된 진짜 행복을 주지도 못하는 외적인 뭔가를 얻고 이루려고 온힘을 쏟을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드나요?
지금 우리 얘기가 세상사에 무관심이나 반감, 무노동, 무위도식 혹은 나아가 부정적인 태도를 부추기자는 건 물론 아닙니다. 진짜 행복의 원천은 바로 우리 안에 있다는 얘기를 하는 겁니다.
이 원천은 우리 안에 살고 있는 <존재>요 우리의 <참된 나>입니다.
이건 그 무엇에도 전혀 좌우되지 않는 행복의 원천이에요. 마르지 않는 행복 샘이에요.
현재 순간과 연결되고 내면의 <존재>에 들어서면, 우리는 바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상관없이 평온하고 행복하게 느낄 수 있어요. 우리가 알다시피, 이건 바깥세상을 피해 움츠러드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에요. 내면에 머무름으로써 우리는 바깥세상에서 최대한 효율적으로 살고 행동하는 힘과 가능성을 가외로 얻게 됩니다.
바깥세상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외부 환경에 더 이상 매달리지 않는 것… 이건 불필요한 목표에 힘을 허비하지 않고, 정말 필요한 것만 얻으면서, <에고>가 아니라 <참된 나>에게 필요한 것을 취하면서, 걱정근심 없이 차분하고 행복하게 살기 시작한다는 뜻이다.
실습 43
이 실습을 통해 자신의 몸을 포함하여 모든 물리적 형태와의 동일시에서 더 쉽게 벗어날 수 있습니다.
누워서 눈 감고 자신의 <내면의 몸체>로 가라앉으십시오.
그 에너지를 느끼세요.
이 내면의 <에너지 몸체>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자신의 <참된 나>와 연결합니다.
이 <나>를 에너지처럼 느끼세요.
즉, 형체가 없고 나이도 이름도 사회적 역할도 없는 무엇인가로 느껴 보십시오.
자기 몸을 <내면의 목격자> 눈으로 인식하세요.
이 몸이 녹는다고 상상하세요.
몸이 한층 더 가볍고 투명해져요. 형태를 잃고 공간과 하나 되어 완전히 무게를 잃습니다.
이때 당신의 <나>는 간직됩니다. 즉, 당신은 그 어디로도 사라지지 않아요.
당신이 공간이 되고 공허가 되지만… <진정한 나>로서는 사라지지 않으며, 내면에 깊이 뿌리 내린 상태는 없어지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