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노”라고 말한다면… 자신의 <참된 나>가 그렇게 말하게 해야 돼요. 깨어 있는 의식 상태를 잃지 말고, 부정적인 감정이나 자동으로 튀어나오는 반응에 빠지지 않아야 해요.
자신이 행하고 말하는 것 속에 전적으로 존재해야 돼요. 즉, 충실해야 합니다.
그러면 마음에도 없는 말을 ‘열 받아서’ 마구 늘어놓지 않게 되며, 실수를 저지르지 않으며, 감지하는 것만 정확하게 표현하게 될 거예요.
상대에 대한 자신의 태도며 자기감정, 자신의 바람, 상대에게 동의 여부 등을 표현할 수 있고 해야 돼요.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이… 참기 어려운 것을 참으며 용인한다는 뜻이 결코 아니라는 점을, 우리가 이미 여러 번 얘기 나눴지요?
상황이 실제로 어떠한지를 분명히 의식하세요.
어떤 관계들이 내 방향이나 조건에 맞지 않는다면… 현실이 무엇이며 형세가 어떤지를 살펴보세요.
단, <거짓된 나>의 왜곡된 프리즘을 통해 볼 게 아니라 <내면의 목격자>의 눈으로 보아야 해요. 그때 우리는 그 사안과 관련해 실제로 생각하고 느끼는 것을 말할 수 있을 거예요.
다른 사람에 대한 질책이나 비난을 섞지 않고 자기감정 드러내는 법을 익힐 필요가 있다. 이건 우리의 감정이라는 점을 의식하고, 또 자기감정에 책임질 줄 알아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을 탓하기 시작한다는 뜻은 아니야. 나에게 어떤 부정적인 감정이 있다 해도, 그것이 다른 누군가의 잘못 때문이라고 여기지는 말아야 한다는 뜻일 뿐이다.
실습 51
가까운 사람에게 어떤 불만이 있다면, 그걸 혼자 조용히 알도록 하세요.
현재 순간에 들어서서 자신의 <참된 나>와 연결한 뒤, 이 불만을 <내면의 목격자> 눈으로 바라보세요.
이 불만과 연결된 감정이 무엇인지를 의식합니다.
혹시… ‘이 감정은 내 <고통의 몸체>에서 파생된 것은 아닌가, 이 가까운 사람의 행동은 그저 ‘방아쇠’가 됐을 뿐이고.’
하여튼 이 감정들을 깨어 있는 의식 상태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나름대로 분류해 보세요.
‘내가 느끼는 것은 구체적으로 뭐지? 모욕감이야? 노여움? 과소평가되고 무시당했다는? 아니면 또 다른 무엇인가?’
그렇게 해서 이 감정들을 인식하고 이해했을 때, 이 감정을 두고 가까운 사람과 얘기할 기회를 찾으십시오. 물론, 적절한 시점을 찾고 그 사람이 내 말을 제대로 들을 준비가 돼 있는지, 먼저 확인해야겠지요.
확인해야 할 게 또(!) 있습니다.
‘지금 난 차분한 상태에 있고, 내 <고통의 몸체>가 이 순간 꿈틀거리지는 않나?’
주의와 눈길 일부를 내면에 유지하면서 거기에 (내 안에) 고요와 평정이 간직돼 있는지 살펴보세요.
이렇게 준비가 다 됐을 때, 자신의 감정이며 심적 체험을 그 가까운 사람한테 차분하게 말하면 됩니다. 단, 단어 하나하나에, 심지어 억양에도, 질책이나 비난의 기미가 전혀 없게끔 말해야겠지요.
부정이 담긴 말을 해야 할 때는 ‘나’라는 대명사로 어구를 시작하세요.
“넌/당신은 날 사랑하지 않아.” (X)
“나는 당신의 그런 행동에서 내가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껴” (O)
지금 당신은 자기감정에 관해서만 얘기하고 있다는 점을 기억하세요.
이런 공식은 상대의 공격을 예방합니다. 즉, 상대방 <고통의 몸체>가 활성화되면서 대응하여 공격하는 일이 없을 겁니다. 그럼으로써 두 사람은 관계를 차분하게 거론하고 평화롭게 서로 이해할 기회를 얻게 될 거예요.
그녀는 젊어서 아주 예뻤고, 그래서 기쁘고 행복하다고 느꼈어요. 그러나 노년기에 아름다움이 사라지면서 기쁨과 행복감도 사라졌고, 그러자 자신이 아주 불행하다고 여기다가 결국 은둔자가 되고 말았어요.
하지만 그녀가 자신을 자기 외모와 동일시하지 않고 내면의 영원한 삶과 동일시했다면…
자신의 노화를 차분하고 평온하게 지켜볼 뿐 아니라 내면의 진정한 영적 아름다움을 발할 수도 있었을 거예요. 그리고 이 내면의 아름다움은 바깥 껍질을 통해 한층 더 빛났을 것이며, 그 결과 외적 형태의 (육체의) 노화 과정이 더 늦춰질 수 있었겠지요.
한마디로, 에고가 열심히 쫓아다니는 행복은 지속적일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은 이 행복에 뒤이어 그 반대되는 것이 늘 따라붙게끔 설계돼 있어요. 즉, 만약 오늘 뭔가를 얻어서 행복하다면, 그것이 언젠가는 없어질 테고 그러면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상승 뒤에는 늘 하강이 뒤따르고, 그러다가 또 상승하고 또…
세상살이가 실제 그렇지 않나요? 여기에는 영구한 것이 전혀 없습니다.
행복이 오면 그 뒤에는 늘 그와 전혀 다른 것이 찾아오기 마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행복을 추구할 때…
즉, 외적인 뭔가로 이뤄지거나 얻는 행복을 추구할 때…
사실은 환상을 좇고 있는 겁니다.
그런 행복은 어차피 사라지며 정반대의 것으로 바뀔 텐데, 그걸 얻기 위해 힘과 에너지를 많이 허비하고 있는 겁니다.
에크하르트 톨레는 행복과 불행은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라고 결론을 내립니다.
행복이 불행이 되는 것은… 단지 시간문제일 뿐. 그러나 (우리가 이미 알게 됐다시피) 시간이 환상이기 때문에 행복과 불행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행복과 불행이 같은 것이라고? 저런, 무섭고 끔찍해라!” 이런 느낌이 드나요?
하지만 더 알고 나면, 여기에 나쁘거나 무섭거나 끔찍한 것은 전혀 없습니다. 인생은 돌고 도는 것이며 Up과 Down이 있어요. 꽃이 피면 지고 달이 차면 기울 듯이 인생도 그래요. 이게 자연스럽고 정상이에요. 이런 자연적인 과정을 우리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이 대목에서 노파심이 좀 드는군요. 혹시…
‘흠, 그렇다면, 어차피 사라질 것이며, 어차피 안정된 진짜 행복을 주지도 못하는 외적인 뭔가를 얻고 이루려고 온힘을 쏟을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드나요?
지금 우리 얘기가 세상사에 무관심이나 반감, 무노동, 무위도식 혹은 나아가 부정적인 태도를 부추기자는 건 물론 아닙니다. 진짜 행복의 원천은 바로 우리 안에 있다는 얘기를 하는 겁니다.
이 원천은 우리 안에 살고 있는 <존재>요 우리의 <참된 나>입니다.
이건 그 무엇에도 전혀 좌우되지 않는 행복의 원천이에요. 마르지 않는 행복 샘이에요.
현재 순간과 연결되고 내면의 <존재>에 들어서면, 우리는 바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상관없이 평온하고 행복하게 느낄 수 있어요. 우리가 알다시피, 이건 바깥세상을 피해 움츠러드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에요. 내면에 머무름으로써 우리는 바깥세상에서 최대한 효율적으로 살고 행동하는 힘과 가능성을 가외로 얻게 됩니다.
바깥세상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외부 환경에 더 이상 매달리지 않는 것… 이건 불필요한 목표에 힘을 허비하지 않고, 정말 필요한 것만 얻으면서, <에고>가 아니라 <참된 나>에게 필요한 것을 취하면서, 걱정근심 없이 차분하고 행복하게 살기 시작한다는 뜻이다.
실습 43
이 실습을 통해 자신의 몸을 포함하여 모든 물리적 형태와의 동일시에서 더 쉽게 벗어날 수 있습니다.
누워서 눈 감고 자신의 <내면의 몸체>로 가라앉으십시오.
그 에너지를 느끼세요.
이 내면의 <에너지 몸체>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자신의 <참된 나>와 연결합니다.
이 <나>를 에너지처럼 느끼세요.
즉, 형체가 없고 나이도 이름도 사회적 역할도 없는 무엇인가로 느껴 보십시오.
자기 몸을 <내면의 목격자> 눈으로 인식하세요.
이 몸이 녹는다고 상상하세요.
몸이 한층 더 가볍고 투명해져요. 형태를 잃고 공간과 하나 되어 완전히 무게를 잃습니다.
이때 당신의 <나>는 간직됩니다. 즉, 당신은 그 어디로도 사라지지 않아요.
당신이 공간이 되고 공허가 되지만… <진정한 나>로서는 사라지지 않으며, 내면에 깊이 뿌리 내린 상태는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통의 몸체는 우리로 하여금 불만이나 모욕감, 적의, 짜증, 초조함, 우울함, 나쁜 기분 등을 갖도록 자꾸 자극하고 도발합니다. 자기가 크기 위해 필요하니까요.
만약 달라는 대로 먹이를 준다면…
고통의 몸체는 거대해져서 우리 삶에 아픔과 고통을 더 많이 초래하겠지요.
아픔에서는 아픔만 나오지 않겠어요? 거기서 기쁨이나 행복, 성공이 나오는 법은 절대 없습니다.
고통의 몸체가 원하는 자양분을 주지 않을 수 없는 경우가 있기도 해요. 하지만 잠시도 방심하지 말고 그러지 않도록 애써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늘 현재 순간에 머물면서 <에고>가 아니라 <참된 나>와 자신을 동일시한다면, 그 어떤 도발에도 굴하지 않고 부정적 감정들이 날뛰게 놔두지 않을 수 있어요.
그렇게 하려면 어떤 상황에서 고통의 몸체가 도발하는지 면밀히 관찰하고 추적해야겠지요.
우리 삶에서 발생하는 상황들뿐 아니라 밖에서 들어오는 모든 정보 역시 우리한테 도발이 될 수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예를 들면, 매스컴이나 서적, 영화 같은 것도 그렇습니다.
현대의 대중문화는 많은 이들의 <고통의 몸체>에 먹이를 주는 경우가 아주 잦습니다.
황색 언론과 티브이는 있는 그대로의 뉴스를 전하는 게 아니라 때때로 뉴스라는 형태로 부정적인 감정들만 전하는데, 그것이 바로 고통의 몸체한테 자양분이 됩니다.
(*이런 점을 알게 모르게 느끼고 감지하는 이들이 뉴스 시청을 자연스레 거부하게 됩니다.)
그런 ‘문화’를 만드는 사람들 자신이 고통의 몸체에 지배받고 있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새로운 자양분을 자꾸 공급하는 것이지요. 이 때문에, 우리 의식에 무엇이 들어오는지 살피고 의식을 깨끗하게 유지하려고 애쓰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에크하르트 톨레는 개인적인 고통의 몸체뿐 아니라 집단적인 고통의 몸체도 우리에게 아주 종종 영향을 끼친다고 말해요.
고통은 모든 인류의 집단 심리에 들어 있어요.
수많은 전쟁과 노예제, 탄압, 갖가지 폭력 등의 유산이고 잔재입니다.
인류의 힘겨운 역사 때문에 지상의 갓난애들은 다 이미 고통의 몸체를 웬만큼 갖고 태어납니다.
인간의 고통은 유전적으로 대물림됩니다.
모든 민족, 모든 국가, 모든 인종에게는 나름의 집단적인 고통의 몸체가 있습니다.
남자들에게도 여자들에게도 나름의 아픔덩어리가가 있습니다.
집단적인 고통의 몸체는 종종 매스컴이나 인터넷, 대중문화, 대중예술을 통해 우리에게 작용해요.
진정한 예술은 언제나 빛과 진실을 가져다줘요.
그러나 집단적 고통의 몸체에 먹이를 대주기만 하는 대리인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한테 들어오는 정보를 다 정신 바짝 차리고 대해야 합니다.
그러면 집단적 고통의 몸체에서도 빠져나올 수 있어요. 그것이 우리한테 끼치는 영향을 의식하기 시작한다면 말이죠.
당신의 아픔덩어리가 외부 정보나 자극으로 인해 잠을 깬다 해도 자신을 탓하지는 마십시오.
그저 늘 조심하세요. 그러면 그 영향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자각 상태에서 그런 선동적인 작용을 알아차리고, 거기에 자신의 주의를 기울여 변화시키기만 하면 됩니다.
실습 35
어떤 종류의 외부 영향이 당신의 아픔덩어리를 잠 깨우는지 추적해 보십시오.
어떤 뉴스나 영화, 글 등을 대할 때 부정적인 감정을 맛보게 되나요?
무엇이 당신을 초조함이나 울적함, 좌절 상태에 빠뜨리나요?
어쩌면, 인터넷 소통, 혹은 누군가와 전화 통화, 혹은 직접 관련되지는 않는 것 같으면서도 기분을 망가뜨리고 상태를 나쁘게 만드는 듯한 뭔가가 있나요?
당신 고통의 몸체를 활성화하는 사건들이며 정보를 다 작성하세요.
개중에 무엇을 지금 당장 거부할 수 있는지 정하고, 그렇게 하세요.
만약 뭔가를 거부할 수 없다면 (예를 들어, 뭔가를 듣거나 읽어야 하는데, 그것이 당신에게 부정적으로 작용한다면), 그것을 현재 순간에 완전히 머물면서 <내면의 목격자> 상태에서 받아들이는 방법을 배우세요.
동정심과 연민 때문이라 여기면서 다른 이들의 부정적인 감정에 함께 끌려들어가는 상황을 특히 잘 살펴보세요.
당신의 연민이 그들에게 전혀 도움 되지 않는다는 점을 알아두세요.
외려, 그 사람의 고통에 자신의 고통을 보탬으로써 고통을 배가하는 것이 되기가 쉽습니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것을 <지금> 순간에서 인식하고 부정적인 감정으로 흐려지지 않은 객관적 장면을 본다면,
그게 더 큰 이로움을 안기는 거예요.
그런 경우, <존재>의 빛과 힘이 담긴 눈길과 주의를 광선처럼 거기에 돌림으로써 다른 이들의 고통을 줄일 수 있어요.
이 퇴적된 아픔이 우리 몸과 마인드를 점령하고 있는 부정적 에너지장이다. 이것이 바로 감정의 아픔덩어리, 혹은 고통의 몸체이다.
과거의 아픔이 몸에 만든 부정적 에너지장 감지
깨달음 상태에 있지 못하는 동안에는…
즉, 마인드나 에고나 <거짓된 나>가 아니라 <존재>며 <참된 나>와 하나가 되지 못하는 동안에는…
아픔과 고통을 어떻게든 스스로 만들어 낼 수밖에 없어요. 때로는 아무 이유나 근거도 없이 마인드가 그냥 고통을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아주 평온하고 쾌적한 상황에 있을 수 있는데…
하지만 갑자기 어떤 불안한 생각이 머릿속에 들어와요. 우리 생각에 앞으로 일어날 수 있거나 과거에 일어난 일 때문에 전전긍긍하기 시작해요. 전자도 후자도 현실이나 실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잊은 겁니다.
과거는 이미 없고 미래는 아직 없으니…
걱정거리가 전혀 안 돼요!
그런데도 우리는 전전긍긍하고, 그러면서 부정적인 감정뿐 아니라 아픔과 고통의 에너지까지 만들어내고, 그 에너지가 우리 몸에 자리를 잡습니다.
에크하르트 톨레는 우리네 몸에 나름의 지혜가 있다고 말합니다.
달리 말해, 몸은 합리적이에요.
그러나 또 뭔가를 아주 쉽게 믿기도 해요. 그래서 실제 상황을 생각하는 상황과 구분하지 못해요.
우리 몸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 마치 실제인 양 반응합니다.
심지어 따뜻한 침대에 편하고 안전하게 누워 있으면서도
‘흠, 뭔가가 나를 위협할 수 있어’ 하고 생각한다면…
몸은 실제로 위협당하는 것처럼 반응해요.
그래서 심장 박동 수가 늘어나고 호흡이 불규칙하게 바뀌며 근육이 긴장해요.
그렇게 해서 몸은 에너지를 추가로 더 만드는데…
하지만 이 에너지는 그 어디로도 나갈 데가 없어요. 위협이 실제 벌어진 게 아니라 가상이고 허구니까!
출구를 찾지 못한 이 에너지는 독성을 띠고 신체에 축적되어 정상적인 신체 기능을 방해하게 돼요. 여기서 그치는 게 아니라, 계속 불안한 생각을 만들어 내고 긴장을 키워요.
안 좋은 일이 실제로 발생했다 해도 고통과 아픔의 에너지를 만들어 내지 않을 수 있어요.
이 독성 에너지는 주변에서 벌어지는 것을 우리 마인드가 ‘나쁘다’고 평가하는 경우에만 생성됩니다.
그러나 <존재>에게는 이 세상에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전혀 없잖아요?
우리의 <참된 나>와 <내면의 목격자>한테 그런 게 없듯이 말이죠.
오로지 있는 것이 있을 뿐이며, “좋네, 나쁘네” 하는 판단은 우리네 마인드가 일삼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에고>의 삶이 아니라 <참된 나>의 삶을 산다면,
모든 것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어요. 심지어 마인드가 나쁘다고 여기는 것에서도 그렇습니다.
사실, 세상에 머무는 동안 최고의 목표들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어떤 경험이든 다 필요하며 유용하고 ‘좋은’ 것이 아니겠어요? 그리고 그 목표들 중 하나가 (과거와 미래에 연연하지 않고 생각과 감정의 혼란 속에서 헤매지 않으며 지금 이 순간의 체험에 초점을 맞추어 의식하는) 자각 상태의 제고라 하겠습니다.
이걸 깨달을 때… 인생에서 아픔과 고통을 더 이상 자초하지 않을 수 있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아픔은 여전히 남아 있어요.
부정적인 감정이나 아픔, 고통 따위는… 쉽게 사라지고 증발될 수 없는 에너지임을 기억해 둬야겠어요. 이 에너지는 몸 안에 쌓여서 완전한 에너지 구성체를 만드는데, 이걸 에크하르트 톨레는 <고통의 몸체> 혹은 아픔덩어리라 부릅니다.
고통의 몸체란… 부정적으로 충전된 에너지장으로서, 우리 심신을 점령할 수 있다.
고통의 몸체는 두 가지 형태로 존재합니다.
휴면 상태와 활동 상태.
그것이 늘 활동 상태에 있다면, 그 사람은 평생 고통스럽게 살기 때문에 세상에서 가장 불행할 수밖에 없어요. 그런 사람들 가운데서 범죄자나 자살자가 나와요. 필사적인 영웅이나 진실과 정의를 위한 투사도 이 부류에 든다고 할 수 있어요. 또 알코올중독자나 마약중독자, 거지, 노숙자처럼 인생 밑바닥으로 떨어진 사람들도 고통의 몸체에 늘 시달리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아요.
잠자지 않는 고통의 몸체가 겉으로 드러나게 되면…
행복이나 삶의 만족, 진정한 자기실현 등에 대한 희망을 늘 모조리 앗아갑니다. 그러나 줄곧 깨어서 활동 상태에 있는 <고통의 몸체>는 그리 흔치 않습니다. 대다수 사람들한테서 그건 잠자고 있다가 눈을 뜨고 또 졸기도 해요.
고통의 몸체가 눈뜰 때…
아주 다정하던 사람이 갑자기 불쾌하고 못된 사람으로 바뀌거나, 혹은 낙천적인 줄 알았던 사람이 우울하고 비관적인 불평분자로, 혹은 조용하던 사람이 시끄럽고 히스테릭한 사람으로 바뀔 수 있어요.
고통의 몸체가 깨어났다는 징후는 다른 사람들을 관찰하면서 잘 볼 수 있어요.
그러나 정작 자기 자신은 바깥에서 명료하게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우리 고통의 몸체가 잠깨는 순간을 추적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당사자는 알아차리지 못할 수 있으나 그 순간에 그 사람은 본연의 자신이 아니라 다른 어떤 사람으로 변합니다. 헐크처럼 말이죠.
알아차리고 의식하고 추적하고 관찰하기… 오직 이 방법으로만 <고통의 몸체>를 다루어서 그것의 횡포를 막을 수 있다.
이른바 분노조절장애도 바로 이 고통의 몸체가 심하게 횡포 부릴 때 나타나는 징후인데, 이걸 막는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에요. 고통의 몸체는 자신이 발견되거나 노출되기를 아주 꺼리니까요. 그건 그림자처럼 빛을 겁내요. 그건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을 우리가 깨닫지 못하게 하려고 몰래 숨어 있거나 위장을 해요.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용기를 내서 그걸 직시할 필요가 있어요.
우리 각자의 내면에 웅크리고 있는 고통의 몸체를 깨우는 게 무엇인지 깨닫는다면, 그것이 언제 돌출할지 알아내기가 더 쉽지 않겠어요? 결국, 그것이 제 스스로 그냥 잠을 깨는 게 아니라 어떤 ‘방아쇠’가 작동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니까요.
과거에 아픔을 야기한 뭔가가 떠오르게 하는 상황이 전부 이 ‘방아쇠’ 역할을 해요.
예를 들어,
1) 부모가 생활비 같은 돈 문제로 자주 다투던 가정에서 성장한 사람은 경제적 문제와 관련된 얘기나 암시가 나오면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고통을 겪을 수 있어요. 혹은,
2) 어려서 부모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은 버림받는 것을 아주 두려워하기 때문에, 이를테면 친구가 약속 시간에 겨우 5분 늦은 걸 두고도 그 사람의 아픔덩어리가 밖으로 튀어나올 수 있어요.
누구한테나 있는 이 고통의 몸체가 무엇에 반응하여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아차린다면, 그것을 감지하여 다스리기가 더 쉬워질 겁니다.
실습 32
당신의 아픔덩어리가 어떤 상황에서 잠을 깨는지 알아차리는 것부터 시작해야겠어요.
어떤 부정적인 감정이 든다거나 그 비슷한 기미라도 나타나게 된다면…
고통의 몸체가 잠을 깬다는 신호이자 반증입니다.
갑자기 불만이나 짜증이 생기거나 화가 나거나 반감이나 혐오가 들거나 울적함을 맛본 적이 있나요?
자기도 모르게 기분 나빠진 적이 있나요?
그런 것이 때로는 뚜렷한 이유가 없어 보이는데 생기기도 해요.
또 때로는 어떤 외부 원인 때문에 그런 상태에 빠지는 듯싶기도 해요.
예를 들어, 누군가가 한 말에 기분이 상한 경우. 혹은 무슨 일이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아서 화가 난 경우.
그런데… 그 외부 원인이란
우리 내면의 ‘방아쇠’를 당기는 계기일 뿐이라는 점을 분명히 알아둬야겠습니다.
실제로, 같은 입장에서 같은 말을 듣거나 같은 실패를 겪었어도 기분 상하거나 화내지 않는 사람이 분명 있을 거예요. 그런 일 때문에 당겨질 ‘방아쇠’가 그에게 없다면… 안 그렇겠어요?
외부 상황이 우리 상처를 건드립니다.
과거에 우리한테 아픔이나 마음고생, 고통 겪게 한 무엇인가를 떠올리게 합니다.
외부 상황이 당신한테 과거의 무엇을 떠올리게 했는지 정확히 기억해 내려고 애쓰세요.
그렇게 하느라고 마음속에서 과거로 이동하여 거기 한참 머무르거나 갇힐 필요는 없어요.
이야말로 과거 경험을 도움 삼아 현재에서 뭔가를 좋은 쪽으로 바꾸는 경우에요.
이런 상황에서는 회상이 유용해요.
다만, 한 가지 조건을 지키는 것이 중요해요.
즉, 자신의 감정과 그 감정을 야기한 과거 상황을 <내면의 목격자> 눈으로 들여다봐야 합니다. 그러면 현재 순간에서 벗어나지 않으며 자신의 판단과 감정적 반응으로 흐려지지 않은 장면을 객관적으로 보게 될 겁니다.
‘내 안에서 어떤 감정들이 가장 자주 일어나며 어떤 방아쇠로 촉발되는지’ 끊임없이 추적할 때, 우리는 <고통의 몸체>를 더 경계하고 조심하게 됩니다.
이건 자신과의 싸움에서 완전한 승리를 거두는 데 가장 중요한 단계입니다.
주의를 기울이고 경각심을 가지면, 고통의 몸체가 당신을 지배하는 힘이 금방 몇 배 더 약해질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