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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더스 헉슬리 

 

연애 대위법 

 

 

Aldous Huxley


POINT COUNTER POINT

 

(https://www.behance.net/gallery/19685649/Custom-cover-Point-Counter-Point 자료 인용)

 

 

 

그가 지하철역으로 들어갔다. 입구에서 한 사내가 석간신문을 팔고 있었다.

사회주의의 강탈적 계획. 1 독회.

 

언뜻 눈에 들어온 기사 제목. 월터가 잡념을 떨칠 요량으로 신문을 한 부 샀다. 자유 노동당 내각이 제출한 광산 국유화 법안이 첫 번째 독회에서 통상적인 다수표로 통과됐다. 월터가 뿌듯한 마음으로 그 기사를 읽었다. 그의 정치적 견해는 진보적이었다. 그러나 석간신문 경영자의 견해는 달랐다. 주요 기사는 아주 폭력적인 논조로 쓰였다.

 

불한당들.’ 기사를 읽으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기사가 공격하는 모든 것에 공감과 열정이 치솟는 것을 느꼈다. 자본가들과 수구 세력에 반가운 증오심이 일었다. 그가 폐거하고 있는 담장이 일순간에 무너지고 복잡한 개인사들이 사라졌다. 정치적 투쟁의 기쁨에 사로잡혀 자신의 경계를 넘어섰고, 이른바 본연의 보다 더 크고 단순한 사람이 됐다.

불한당들.’ 그가 압제자들과 독점 자본가들을 생각하며 한 번 더 중얼거렸다.

 

캠든 타운 역에서 키가 작고 얼굴 쪼글쪼글한 사람이 곁에 앉았다. 목에 빨간 스카프를 두르고 있었다. 늙은이의 담배 파이프에서 나는 악취가 얼마나 심한지 월터가 다른 빈자리가 있나 객차 안을 두리번거렸다. 빈자리가 있었지만, 좀 더 생각하고는 그냥 앉아 있기로 했다. 괜히 상대를 기분 나쁘게 만들어 시비가 붙을지도 몰라. 매캐한 담배 연기가 목구멍을 자극하는 바람에 기침이 나왔다.

 

사람은 자기 취향과 본능에 충실해야 하네.” 필립 퀄즈는 그렇게 말하곤 했다. “우리네 감정을 합리적으로 설명하는 게 주된 전제가 아니라면 철학이 무슨 의미가 있겠나? 만약 자네에게 종교적 체험이 없다면, 신을 믿는다는 것은 바보짓일세. 그건 역겨움을 느끼지 않고는 굴을 먹을 수 없으면서도 굴이 좋다고 믿는 것과 매한가지야.”

 

퀴퀴한 땀내가 니코틴 연기에 뒤섞여 월터의 콧구멍까지 침입했다. 기사를 계속 읽었다. 사회주의자들은 이걸 국유화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들이 제시하는 것에 우리는 더 짧고 흔한 명칭을 붙일 수 있으니, 바로 도둑질이다.」 하지만 적어도 그건 도적들한테서 다시 훔치는 것이요, 그 도적들로 인해 피해 본 사람들에게 이로운 것이었다.

체수 작은 늙은이가 상체를 숙이더니 쩍 벌린 두 다리 사이로 조심스레 수직으로 침을 뱉었다. 침을 구두 뒤축으로 비볐다. 월터가 눈길을 돌렸다. 그는 억눌리는 이들에 대한 애정과 박해자들에 대한 증오를 절절히 느끼고 싶었다. 사람은 자기 취향과 본능에 충실해야 한다. 그러나 취향과 본능은 어쩌다 생긴 것이었다. 불변의 원칙들이 있었다. 한데 그 자명한 원칙들이 당신의 주된 전제가 되지 못했다면?옛날 기억이 불쑥 떠올랐다.

 

 

그는 아홉 살이었고, 가텐든 인근 들판을 엄마와 함께 걷고 있었다. 각각 앵초를 한 다발씩 들고 있었다. 분명 배츠 코너 쪽으로 걸었을 거야. 인근에서 앵초가 자라는 곳은 거기밖에 없으니까. 엄마가 말했다.

우리, 가엾은 웨더링턴 집에 잠깐 들를까. 그 사람이 몹시 아프단다.”

 

엄마가 오두막 문을 두드렸다. 웨더링턴은 월터네 저택에서 정원사 조수로 일했는데, 지난 한 달 동안은 보이지 않았다. 월터 기억에, 그는 창백하고 말랐으며 해수를 달고 다니면서 다른 사람들과 접촉도 별로 없었다. 월터는 그 사람한테 별로 관심이 없었다. 여자가 문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웨더링턴 부인.”

 

두 사람을 안으로 안내했다. 웨더링턴이 쿠션에 떠받혀 침대에 누워 있었다.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커다란 두 눈에 확대된 동공이 움푹 팬 눈구멍에서 내다봤다. 튀어나온 뼈들을 덮은 피부는 핏기 하나 없이 땀에 젖었다. 그러나 얼굴보다 더 참혹한 인상을 준 것은 목믿기 어려울 정도로 앙상한 목이었다. 잠옷 소매에서 가느다란 막대기 두 개가 삐죽 튀어나왔는데, 그게 손이었다. 뼈만 남은 손가락들이 달린 손은 영락없는 갈퀴였다. 또 병자의 방에서 풍기는 냄새란! 창문이 죄다 꼭꼭 닫혔는데, 작은 벽난로에서는 불길이 타올랐다. 답답한 공기에는 병든 몸이 발산하는 체취와 퀴퀴한 숨 냄새가 가득했어. 그 후텁지근하고 폐쇄된 방안에서 오랫동안 갇힌 탓에 달달한 듯하면서 구역질 일으키는 썩은 냄새. 세상 그 어떤 냄새도, 아무리 혐오스러운 것일지라도, 그것보다는 덜 끔찍했을 거야. 병자가 누운 방의 그 냄새가 특히 견디기 힘든 건, 통풍이 전혀 되지 않아 구석구석 배면서 들쩍지근하게 썩었기 때문이야. 그걸 생각하면 지금도 몸서리가 쳤다.

그가 기억을 소독하기 위해 궐련초에 불을 붙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매일 몸을 씻고 창문 열어 환기하도록 배웠다. 아직 어린애인 그를 처음 교회에 데려갔을 때, 사람들 몸내 때문에 속이 몹시 메스꺼웠다. 급히 데리고 나가야 했다. 엄마는 그를 두 번 다시 교회에 데려가지 않았다.

우리를 지나치게 위생적이고 무균 상태로 자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 모임에서 구토 증세를 보이는 양육이 과연 괜찮을 수 있을까? 그는 그 사람들을 좋아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연인에게 통제되지 않는 혐오감과 구토를 유발하는 분위기에서는 사랑이 꽃필 수 없어.

 

웨더링턴이라는 병자의 방안에서는 연민조차 꽃피우기 힘들었다. 죽어가는 사람이며 그 아내와 어머니가 얘기 나누는 동안 그는 최면에 걸린 듯 앉아서 침대 위 피골상접한 사람을 끔찍한 심경으로 훑어보며 앵초 묶음 사이로 후텁지근하고 구역질 나는 공기를 들이켰다. 신선하고 기막힌 앵초 향기에도 방안 퀴퀴한 냄새가 배 있었다. 그는 연민이 아니라 공포와 혐오를 느꼈다. 웨더링턴 부인이 병자에게 보이지 않으려고 고개 돌리고 눈물 흘릴 때도, 연민보다는 거북함과 답답함을 느꼈다. 여인의 비탄은 이 끔찍한 방에서 얼른 밖으로, 한없이 맑은 공기와 햇볕이 있는 곳으로, 달아나고 싶은 마음을 키우기만 했다.

 

그 당시 자신의 감정을 떠올리면서,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때 그렇게 느꼈었고, 이제 또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사람은 자기 본능에 충실해야 하네.” 아니야, 다 그렇지는 않아, 나쁜 취향과 본능은 아니야, 그런 것에는 맞서야 해. 그러나 그것을 극복하기란 쉽지 않았다.

 

곁에 앉은 노인이 다시 파이프에 불을 붙였다. 월터가 그때 썩은 공기를 최대한 덜 들이쉬려고 애쓰면서 최대한 오래 숨을 참았던 기억을 떠올렸다. 앵초 묶음에 코를 대고 깊이 숨을 들이쉰 뒤, 마흔까지 세고 숨을 내뱉은 뒤 다시 들이쉬기. 늙은이가 다시 고개를 숙이고 침을 뱉었다.

국유화로 노동자들 복지가 향상된다는 생각은 전적으로 옳지 않다. 지난 몇 해 동안 납세자들은 관료적 통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쓰디쓴 경험으로 확인했다. 만약 노동자들이 상상하기를…」

 

월터가 눈을 감고 병자의 방을 보았다. 작별 시간이 되자 그가 뼈만 남은 손을 쥐었다. 그 손은 이부자리 위에 맥없이 늘어져 있었다. 그가 다 죽어가는 앙상한 손가락들 밑으로 자기 손을 넣어서 잠깐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그건 차갑고 눅눅했다. 그리고 몸을 돌려 자기 코트 자락에 손바닥을 슬그머니 문질렀다. 오래 참았던 숨을 거칠게 내뿜고 역겨운 공기를 다시 들이켰다. 다행히 그게 마지막 할 일이었다. 엄마가 이미 문 쪽으로 가고 있었으니까. 엄마가 예뻐하는 페키니즈가 왈왈 짖으며 주변에서 껑충껑충 뛰었다.

 

얌전히, 티앙(T’ang)!” 엄마가 또렷하고 예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월터가 회상하기에, 티앙이라는 이름에서 아포스트로피 음가를 제대로 내는 사람은 영국에서 어머니가 유일했을 듯싶다.

두 사람이 들판에 난 소로를 따라 집으로 돌아왔다. 작은 중국 용처럼 환상적이고 황당한 티앙이 자기한테는 거대해 보이는 장애물들을 가볍게 뛰어넘으며 앞서 달렸다. 꼬리털이 바람에 흩날렸다. 가끔 아주 키 큰 풀줄기들이 나타날 때면 티앙은 각설탕을 달라고 할 때처럼 작고 펑퍼짐한 엉덩이를 깔고 앉아서 높이를 가늠이라도 하듯이 퉁방울눈으로 덤불을 응시했다.

 

흰 조각구름 드리운 청명한 하늘 아래서 월터는 자신이 집행 유예된 죄수처럼 느껴졌다. 냅다 달리면서 소리를 내질렀다. 어머니는 말없이 천천히 걸었어. 간간이 발길을 멈추고 눈을 감았어. 마음의 동요가 심할 때 나오는 습관이었다. 어머니는 자주 심란해하셨어, 월터가 가느다란 미소를 지으며 떠올렸다. 불쌍한 웨더링턴 때문에 마음이 몹시 편치 않은 모양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어머니가 얼마나 자주 발길을 멈추었는지, 그는 기억했다.

 

엄마, 빨리 가요!” 그가 소리치며 재촉했다. “차 마실 시간에 늦겠어.”

요리사가 차와 함께 먹을 과자를 구워냈고, 또 어제 크림 넣어 만든 파이와 막 병뚜껑을 딴 버찌 잼이 있었다.

 

사람은 자기 취향과 본능에 충실해야 해.”

그러나 출생이라는 우연한 사건이 그에게 그런 것들을 결정해 놓았다. 정의는 불변이고, 늙은이의 파이프와 웨더링턴의 병실에도 불구하고 동정심과 형제애는 아름다웠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런 것 덕분에 아름다웠다. 기차가 속력을 늦췄다. 레스터 스퀘어. 플랫폼으로 나와서 승강기 쪽으로 향했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주된 전제는 부정하기 어렵고, 개인적이지 않은 주된 전제는 아무리 훌륭하다 해도 믿기 어려워. 성실과 정조, 다 좋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지금 철학의 개인적이고 주된 전제로는 루시 탄타마운트가 가장 아름답고 가장 갈망하는

 

표들을 내십시오!”

내면의 격론이 다시 들썩이려 들었다. 그걸 그가 의식적으로 억눌렀고, 안내원이 문을 쾅 닫았다. 승강기가 올라갔다. 거리에서 월터가 택시를 잡았다.

펠멜 거리, 탄타마운트 하우스로 갑시다.”

 

(CHAPTER 1 끝)

 

"팩트란 무시한다고 해서 없어지는 게 아니야." - 올더스 헉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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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의 메아리  

 

 

 - 올더스 헉슬리 소개와 

<루덩의 악마들> 해설 (2) 

 

 

악마들&#44; 올리버 리드&#44; 켄 러셀&#44;

 

 

3

 

 

대학 졸업하던 해부터 네 해에 걸쳐 시집을 네 권 냈다. 그 배경에 깔린 비탄이며 신랄함, 냉소주의, 또 거기서 벗어나려는 역설적 품위는 나중에 그가 몰입하게 되는 신비주의며 영적 삶에 대한 전조라 할 수 있겠다. 사실, 청소년기에 겪은 세 가지 사건의 정신적 외상은 (모친이 암으로 사망, 자신의 실명 상태, 작은형의 자살 같은 육체적 고통에 노출된 경험은) 그의 많은 소설에서 종종 인간 정신과 육신의 갈등으로 표출된다. 

 

단편집 <림보>도 발표했지만, 작가로서 이름을 알린 것은 1921년 첫 번째 장편 <크롬 옐로우>. 이건 바로 오톨라인 모렐 부인의 저택과 거기 드나드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 눈부신 대화와 기지 넘치는 세태 비평과 냉소주의가 결합된 문체로 인해 그는 10년 어간에 가장 인기 있는 문학 활동가 축에 든다는 평판을 얻었다. 

 

20년대는 그에게 가장 생산적인 기간일 뿐 아니라 평생 창작과 사상의 정초가 형성된 시기이기도 했다. 시력 때문에 1차 대전 전선에 나가지 못했지만, 많은 동시대인들처럼 전쟁이 야기한 분위기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분위기의 주된 정서는 일정하게 흐르던 시간이 단절된 느낌, 불과 얼마 전까지도 확고하고 영원한 듯 보이던 가치며 토대가 붕괴된 느낌. 전쟁은 경제와 정치, 학문, 문화 등에서 본질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지금 시대와 지나간 시대 사이에 경계가 뚜렷하게 설정되고, 인간과 문명에 대해 지난 시대에 다듬어진 관념들을 더 이상 유지하기 어렵게 됐음을 많은 이들이 분명히 알게 됐다.

 

그 결과, 다른 세계의 장면을 만들고, 철학이며 미학의 측면에서 새로운 현실에 적절한 의미를 부여하는 방법들을 찾고자 하는 갈망이 나온다. 바로 이 때문에 유럽 문화에서 1920년대는 실험 시대가 된 것. 

M. 프루스트J. 조이스의 소설, T. S. 엘리엇과 마야코프스키의 시, 피카소와 K. 말레비치의 그림, 이젠슈테인의 필름 등이 저마다 가장 중요한 존재 특성이라 본 것을 새로운 예술 언어로 이야기했다. 

 

당대 많은 영국인들처럼 헉슬리에게 새로운 역사 시대의 도래는 무엇보다도 산업 발달과 물질적 번영, 정치적 자유를 이룩한 빅토리아 시대의 종말과 연관됐다. 

 

그렇다면 새 시대는 어떤 것이며, 새 시대의 가능성과 전망은?

 

이런 물음에 대한 대답이 바로 그의 작품들. 헉슬리는 세태 묘사와 풍자라는 전통에서 머물지 않고, 사회 근간이 무너질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도 함께 내보였다. 

그것은 그가 20년대 사상과 관념의 미학적 전투에서 상당히 빨리 제 자리를 찾은 결과이기도 하다. 그의 생각에… 문필은 사회생활의 일부여야 하고, 예술가의 과제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며, 가능한 한 거기에 영향을 미치는 것. 

 

그는 어떤 정치적이나 미학적 운동에 얽매이지 않았으며 그가 평생 접한 동아리의 스펙트럼은 아주 넓었다. 예를 들어, 문인 친구들 중에는 앙리 바르뷔스가 세운 <클라르테 그룹>의 멤버들, T. S. 엘리엇과 버지니아 울프 같은 모더니즘의 기둥들, <신사는 금발을 좋아해>의 니타 루스 등이 있고, 또 런던 인근 블룸스버리 지역에 살던 당대 지성인, 작가, 화가들의 엘리트 그룹에도 들었다. 여기서 예술비평가 클라이브 벨, 역사가요 전기 작가인 스트레이치 리튼, 소설가 에드워드 포스터, 경제학자 케인즈 등과 교류했다. 

 

1928년 출간된 <연애 대위법>은 헉슬리의 가장 복잡한 소설들 중 하나. 전형적 관념 소설인 이 작품으로 헉슬리는 독일식 철학소설과는 또 다르며 토마스 만의 표현을 빌자면 이른바 ‘지성 소설’이라는 장르의 개척자가 됐다. 

 

20년대 후반 이탈리아에 살면서 친구 같은 선배 D. H. 로렌스와 자주 만났다. 삶에 대한 로렌스의 관점을 아주 높이 샀고, <연애 대위법>에서 가장 이상적인 인물로 묘사한 램피언의 모델이 로렌스였다. 1930년 로렌스가 죽자 그의 편지들을 모아 책으로 내고 나중에 전기를 쓰기도 했다.

 

테크놀로지의 발달로 기계문명이 판치는 현대사회의 문제점들을… 로렌스가 본능적이고 직관적인 통찰을 통해 대안을 제시하고자 했다면, 헉슬리는 그런 문제들에 대한 진지한 반성과 비판을 작품의 주제로 삼으면서 인간의 본능보다는 지성으로 접근했다. 

 

즉, 현대의 과학기술 문명을 비판하면서도 19세기 전통적 세계관에 대한 맹신으로 퇴행한다거나 안이한 해결책을 제시함으로써 섣부른 낙관주의로 전락하지만은 않는 균형감각을 보여 주었다. 

  

4

 

30년대 초 지중해 연안 툴롱 인근으로 거처를 옮겨서 쓰고 1932년에 출간돼 헉슬리를 베스트셀러 작가로 굳혔으며 20세기 최고의 미래 소설이 된 <멋진 신세계>는 그의 다섯 번째 장편이요 첫 번째 디스토피아 소설. H. G. 웰스가 <현대 유토피아>, <사람들은 신들을 좋아해> 같은 유토피아 소설에서 과학적 낙관론을 희망차게 제시함에 대한 패러디… 

당시 널리 인기 끄는 낙관적 유토피아 소설들과 달리 헉슬리는 소름끼치는 미래상을 제시하려 했다. 여기 등장하는 미개인 청년의 원형은 마거릿 미드의 <사아의 성>서 힌트를 얻었다. 

 

과학과 의학과 기술을 현대인들이 맹목적으로 신뢰하고 그 발전에 의존하다 보면 어떤 끔찍한 결과가 초래되는지를 생생하게 보이고자 했다. 

인공 수정으로 동일한 인간을 시험관에서 대량 생산하는 미래 사회를 그림으로써 현대 사회가 암묵적으로 지향하는 관리 사회, 통제국가의 무시무시한 비극적 종말을 예언했는데… 

시험관 아기나 유전자 복제를 비롯해 오늘날 의학과 생명공학의 경이적인 성취를 우리가 목격할 때, 그의 예언이 결코 근거 없는 환상이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

 

올더스 헉슬리는, 과연 예언자인가?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을, 우리는 십년 전 타계한 미국의 미디어 이론가요 문화비평가 닐 포스트먼이 1985년에 내놓은, 우리 시대 미디어 생태 환경에 관해 가장 중요한 텍스트들 중 하나인 <죽는 줄 모르고 즐기는 사람들 Amusing ourselves to death>에서 보게 된다. 

 

죽는 줄 모르고 즐기는 사람들&#44; 닐 포스트먼

 

「우리는 1984에 주목해 왔다. 그 해가 닥쳤지만 예언은 실현되지 않았고 생각 있는 미국인들은 나직이 흥얼대며 안도했다. 
봐, 자유민주주의의 뿌리가 뽑히지 않았네! 테러 같은 것이 있기는 해도 오웰의 악몽이 찾아들지는 않았어! 

그러나 오웰의 어두운 예언과 더불어 또 다른 예언이, 똑같이 으스스한 전망이, 있음을 우리는 잊고 있었다. 바로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교양인들도 자칫 간과하기 쉬운데, 헉슬리와 오웰의 어두운 미래 전망은 같은 게 아니었다. 오웰은 우리가 외부 폭압에 억눌릴 것이라 경고한다. 그러나 헉슬리가 예견하기에는… 독재자 때문에 사람들이 자율과 성숙과 역사를 박탈당하지 않는다. 그가 내다본 것처럼… 사람들은 외려 통제받기 좋아하고 테크놀로지를 떠받들며, 그 결과 사유 능력을 잃게 될 것이다.」 

 

오웰과 헉슬리의 예언을 포스트먼이 조목조목 비교하여 결론을 낸다.

 

「오웰은 서적을 금지할까 두려워했지만, 헉슬리는 서적을 금할 까닭이 없게 될 것을 우려했다. 왜? 왜냐하면 책을 읽으려는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될 테니. 

오웰은 우리한테서 정보를 박탈할까 두려워했지만, 헉슬리는 우리가 아예 무감각하게 허투루 대할 만큼 정보가 차고 넘칠 것을 우려했다. 

오웰은 (독재자가) 진실을 우리한테 숨길까 두려워했지만, 헉슬리는 무의미한 정보의 바다에 진실이 파묻힐 것을 우려했다. 

오웰은 우리 문화가 선택의 자유를 빼앗을까 두려워했지만, 헉슬리는 우리 문화가 허접한 필름과 난잡한 파티, 관능적 유희 따위로 채워져 지질해질 것을 우려했다.  

<멋진 신세계>에서 지적하듯이, 시민적 자유를 옹호하는 이들과 합리주의자들은 늘 긴장하여 독재와 폭정에 맞서면서도... “인간에게 재미와 오락에 거의 죽는 줄 모르고 빠져드는 속성이 있다는 점은 감안하지 못했다.” 

헉슬리가 또 말하길, 사람들이 <1984>에서는 가해지는 고통에 의해 통제되지만 <멋진 신세계>에서는 제공되는 즐거움에 지배된다. 
간단히 말해… 오웰은 우리가 싫어하는 것이 우리를 멸망시킬까 두려워했고, 헉슬리는 우리가 탐닉하는 것이 우리를 멸망시킬까 우려했다.」   

 

닐 포스트먼은 티브이가 자잘한 즐거움인 연예오락을 주지만 교육이나 주요 이슈에 관해 의미 있는 토론은 제공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그가 미국 사회의 미래라는 토론의 틀을 잡기 위해 오웰과 헉슬리의 소설을 동원한 까닭은... 현대 사회가 헉슬리의 끔찍한 예언대로 얼마나 충실하게 좇아가고 있는지에 사람들 눈길을 돌리기 위함이었다

 

티브이는 1906년 이래 사람들이 생각 없이 사는 데 크게 이바지해 왔어.

 

(계속)  

 

관련 포스트: 

역사의 메아리 (올더스 헉슬리 소개와 작품 해설 4. 끝)

역사의 메아리 (올더스 헉슬리 소개와 작품 해설 3)

사의 메아리 (올더스 헉슬리 소개와 작품 해설 1)

루덩의 악마들 11편 6 (최종)

루덩의 악마들 10편 5

루덩의 악마들 9편 6

루덩의 악마들 8편 6

루덩의 악마들 7-2편 4

루덩의 악마들 6편 4

루덩의 악마들 5편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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샐린저 <호밀밭의 파수꾼>, 흥미로운 사실 10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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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쓰는 '말'에 관한 약간의 정보

자녀와 소통, 어떻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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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덩의 악마들  

  (The Devils of Loudun)  

 

 

올더스 헉슬리 저

(번역, 주석, 해설 – Chimin)

 

 

올더스 헉슬리 루덩의 악마들

 


 

역사의 메아리

 - 올더스 헉슬리 소개와 <루덩의 악마들> 해설

 

 

1   

 

 

1952년 <루덩의 악마들>이 출간되자 헉슬리의 팬들이 상당히 놀랐다. 왜냐하면, 그는 <크롬 옐로우>, <조커의 댄스>, <연애 대위법> 같은 작품을 잇달아 내놓으면서 다니엘 데포(Defoe)와 스몰레트부터 당대에 이르기까지 영국 문학의 세태 묘사 소설이라는 거대한 전통에서 적법한 계승자로 각인됐으며 유럽에서 작가의 위치를 확고하게 굳혔는데… 이제 내놓은 것이 역사적 사건에 대한, 방대한 논픽션이니 말이다.  

노년을 앞두고 작가의 소명을 잊은 것인가? 

 

더욱 놀라운 것은, 그의 트레이드마크라 할 수 있는 예리한 풍자와 공정한 웃음이 <루덩의 악마들>에는 별로 많지 않다는 점. 거꾸로 여기엔… 섬뜩한 종교적 광기, 억압된 성적 욕구, 난잡한 집단 히스테리, 무지와 맹신, 떠들썩한 엑소시즘, 마녀 사냥, 정치 권력의 집요한 음모, 고문과 사법 살인과 화형 따위가 줄거리를 이루고 있다. 

 

이 모든 이야기의 출발과 계기는... 17세기 중엽 프랑스 소도시 루덩의 한 수녀원에서 발생한, 전대미문의 불가사의한 사건. 

 

이 책을 두고 주요 언론의 반응은 이러했다. 

 

“헉슬리는 17세기 마녀 사냥 전성기에서 가장 소름 끼치는 사건들 중 하나를 기교와 박식과 공포를 가지고 재구성했다. <루덩의 악마들>에는 매력과 박식과 직관과 지적 활기가 차고 넘친다.” - 타임 

 

행위의 모티브 분석과 무의식적인 원인들 설명, 왜곡된 종교적 감정의 폭로, 악마 숭배, 집단 광기, 성적 억압 등에 관한 이 이야기에는 그의 글쓰기에 애초부터 담겨 있는 광채가 모조리 녹아 있다.” - 스펙테이터 

 

“이 책은 헉슬리 최고 작품으로 꼽아도 손색이 없다.” - 가디언 

 

“여태껏 나온 영성 관련 서적들 중 가장 흥미로운 책일지도 모르겠다. 알지도 못하는 성직자를 산 채로 화형에 처하는 데 한 몫을 한 수녀들과 17세기 수녀원의 괴이쩍고 외설한 실제 이야기에서… 헉슬리는 신비주의와 무의식에 관한 정보를 깊고 폭넓게 술술 전달한다.” - 워싱턴 포스트  

 

 

2

 

 

올더스 헉슬리는 조선반도에서 동학농민운동이 불붙던 해 런던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쯤 떨어진 써리 주 고달밍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를 셋째 아들로 본 집안은 그즈음 영국 사회에서 새로이 떠오르는 ‘지적 귀족’. 부계로도 모계로도 저명한 과학자와 작가, 화가들이 있었다. 

 

동물학자인 조부 토마스 헉슬리는 다윈의 동료요 진화론 옹호자로서 영국 교양 계급에 비상한 영향을 끼치며 과학 대중화의 선구자로 명성을 떨쳤다. 셋째 손자를 보고 이듬해에 타계한 그는 그 삼십여 년 전 창조론 옹호자들과 벌인 논쟁에서 멋진 승리를 거뒀다. 

“진실을 두려워하는 인간이기보다는 차라리 두 원숭이의 자손이 되는 편이 더 낫겠소!” 

그 뒤로 그에겐 ‘다윈의 불독’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부친 레너드는 교사, 저술가, 저널 편집인, 모친 줄리아는 교양 높은 여성으로서 기숙학교를 설립했다.   

올더스 헉슬리의 외증조부 토마스 아놀드는 영국 교육체계 확립에 크기 기여한 교육가요 <현대사 강의> 같은 저술을 내놓은 역사가, 영국 국교회의 ‘광교회’ 운동을 주도한 교회 활동가이기도 했다. 

또 빅토리아 시대에 두드러진 문학비평가요 문화학자, 시인, 에세이스트인 매튜 아놀드가 헉슬리의 종조부. 

빅토리아 시대 후반 소설가들 중 1인자인 험프리 워드 부인이 헉슬리의 큰 이모이다. 

 

과학과 문학을 결합하는 이 대물림은 성장기 올더스에게 거대한 자부심과 사명감의 원천이 됐다. (마지막 에세이 <문학과 과학>에서 두 영역 간의 이해를 호소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미 유년기에 기대와 촉망을 한 몸에 받았다. 그림에 재주 있고, 자연과학에 관심 크며, 시를 지었다.

부친 서재에서 자기형성이 시작됐고, 그의 첫 선생은 어머니였다. 하지만 그 기간은 오래 못 갔다. 의학을 공부하려고 이튼스쿨에 들어가던 해인 열네 살 때 어머니를 암으로 여의었다. 그 이태 뒤 점상각막염에 걸려 18개월 동안 사실상 맹인으로 살았으며, 가문의 전통인 자연과학자나 의사가 되려던 꿈을 접어야 했다. 

 

(일곱 살 많은 큰형 줄리안은 나중에 우생학자로서 20세기 중반 진화론적 종합 이론에서 선도적 인물이 되고, 유네스코 초대 사무총장을 지낸다. 또 이복아우 앤드루는 1963년 생리의학 부문에서 노벨상을 받는다.) 

 

 

올더스 헉슬리&#44;지각의 문.
"알려진 것들이 있고 미지의 것들이 있는데, 그 사이에 지각의 문이 있다."

 

 

특수 안경을 착용하고 겨우 보이게 된 한쪽 눈으로 책을 읽고 루이 브라유의 점자도 익혔다. 시력 문제에도 불구하고, 1차 대전이 발발하기 한 해 전, 옥스퍼드대학 베일리얼 칼리지에 입학해 영문학을 전공. 

손상된 시력을 극복하려는 노력은 이 시기에 가히 초인적이었다. (1942년에 쓴 에세이 <The Art of Seeing>에서 베이츠의 시력 강화법을 열렬히 옹호하는데, 그건 다 직접 경험에서 나온 것.) 치명적인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대학 시절 주변에서는 그를, 특히 지력과 창의력 면에서, 다들 천재로 간주했다. 

 

1916년 22세에 대학을 마친 뒤 부친에게 더 이상 신세지지 않으려고 몇 해 동안 몇몇 가지 일을 했다. 런던 국방부에서 근무하고, 이튼스쿨에서 한 해 프랑스어를 가르쳤다. (에릭 블레어라는 학생은 나중에 조지 오웰이라는 필명으로 이름을 떨친다.) 

1차 대전 중 많은 시간을 보낸, 오톨라인 모렐 부인의 가싱턴 농장에서 노동자로 일하며 부인의 친구가 됐다. 이 저택에 D. H. 로렌스, 버트런드 러셀, T. S. 엘리엇 등이 모여 담소 나누고 글을 쓰기도 했다. 미술 평론가 클라이브 벨, 화가 마크 거틀러 등 블룸스버리 멤버들 뿐 아니라 벨기에 망명인 마리 니스도 이 농장에서 만났다. 1919년 그의 아내가 됐다. 

몇몇 매거진과 저널에서 편집과 건축, 음악, 연극, 회화, 서적 비평을 담당했다. 첼시 독서클럽 사서로 일했다. 하지만 이런 일들은 다 오래 못 갔다. 20년대 초 문필과 문학이 그의 소명이 됐으니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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