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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덩의 악마들  

The Devils of Loudun 

 

올더스 헉슬리 저

(번역, 주석, 해설 – 김성호)

 

올더스 헉슬리 사진

 


 

  일본 임제선 창시의 주요 인물인 남포소명은 이렇게 설파한다. 

  「눈먼 자들을 끌어들이려는 마음에서 부처가 자신의 황금 입술에서 단어들을 농담조로 흘렸다. 그 뒤로 하늘과 땅이 뒤얽힌 말 덤불로 가득 찼다.」 

  이 덤불들이 극동에서만 자란 것은 결코 아니다.  

 

  만약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평화가 아니라 칼을 가지고’ 왔다면, 그건 그분과 그분 후계자들이 그들 통찰력을 말로써 구체화하는 것 외에 달리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른 모든 말들처럼, 기독교적 언급들은 때론 너무 공격적이고 때론 너무 개괄적이고 불분명하다. 그런 까닭에 늘 구구한 해석의 여지를 많이 허용한다. 

  이런 가르침이 작업가설로 활용될 때… 즉, 인간이 존재의 고통을 수습하도록 돕는 지혜의 원천으로 활용될 때, 기독교적 명제들은 거대한 가치를 지녀 왔다. 한데, 그 명제들이 교리요 우상으로 바뀌면서, 그것들은 신학적 증오나 종교전쟁, 교회 제국주의 같은 거대한 악을 낳았다. 이 악에는 루덩에서 벌어진 광란의 향연과 수렝의 자기암시로 인한 광기 같은 부차적인 참사들도 포함된다. 

 

  모럴리스트들은 정욕을 통제해야 한다고 자주 읊어댄다. 물론 옳은 말씀이다. 한데 불행히도 그들 중 대다수는 그에 못지않게 본질적 의무인 말과 말에 근거하는 사유 형태를 통제하지 못한다

  정욕의 범죄는 뜨거운 피에서만 자행되고, 피는 가끔 뜨거워질 뿐이다. 그러나 말은 늘 우리와 함께 있고, 말은 주문과 마법 공식 같은 것도 황당하지 않다고 여기게 만들 정도로 암시적인 힘을 지닌다.  

 

  정욕의 범죄보다 훨씬 더 위험한 것은 이상주의의 범죄. 이는 바로 신성시 된 말로 쏘삭거리고 조장하고 설교하여 생기는 범죄. 이런 범죄는 맥박이 정상일 때 계획되고 피가 차가운 상태에서 다년간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실행된다. 

  과거에는 이상주의 범죄를 강요한 말들이 주로 종교적인 것이었다면, 오늘날 그런 말들은 대부분 정치적인 것이다. 도그마들은 이제 추상적인 것에서 벗어나 현실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것이 됐다

 

  유일하게 변치 않은 것은 각종 도그마를 신봉하는 사람들의 맹신이요 조직적 광기요 악마 같은 흉포함이며, 그들은 그런 흉포함을 가지고 저희 믿음을 행한다. 

  실험실과 서재에서 쓰는 작업가설 개념을 이제 교회와 의사당, 정부에서도 이해하고 수용할 때, 인류는 집단 광기에서 벗어나고 대량 학살과 대량 자살이라는 고질적 충동에서 해방될 수 있으리라. 

 

  인류의 주된 문제는 바로 환경. 사람들은 물질 수준부터 영적 수준까지 모든 수준에서 우주와 어떻게 어울려 사는지를 배워야 한다. 생물학적 종으로서 우리는 제한된 규모와 자원을 소유한 행성 위에서 거대하고 급속히 늘어나는 인구가 만족스럽게 계속 존재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그 자원 중 많은 것은 결코 재현될 수 없는 소모적 자산이 아닌가. 

  개개인으로서 우리는 우리가 습관적으로 떨어져 있다고 상상하는 무한한 정신과 만족스러운 관계를 어떻게 맺을지 찾아내야 한다. 우리는 datum과 donum (받지만 말고 주기도 하는) 원칙에 입각함으로써 서로 만족스럽게 지내는 방법을 키우게 될 것이다.[각주:1] 

 

  이런 말이 있다. “먼저 하나님 나라를 찾으라, 그러면 나머지는 다 저절로 따라붙을 것이다.”[각주:2] 

  그러나 우리는 거꾸로 행동한다. 먼저 ‘나머지 다’를 찾으려고 기를 쓴다. 즉, 이기적인 돌진과 말의 힘에 대한 맹신에서 생긴, 지나치게 인간적인 사리사욕을 챙기려고 든다. 그 결과 우리네 기본 환경 문제는 해결되지 못하고 해결될 수 없는 것으로 남는다. 정치 유희에 지나치게 집중하다 보면, 조직화된 사회가 지구와 좋은 관계를 증진시키기 힘들게 된다

 

  맹신적으로 숭배된 언어 체계에 지나치게 쏠리다 보면, 존재의 ‘원초적 사실’과 좋은 관계를 증진시키기 힘들어진다. 먼저 이차적인 ‘나머지 다’를 찾아다니다가 우리는 그것을 잃을 뿐 아니라 하나님 나라마저 잃으며, 또 그 왕국이 도래할 수 있는 유일한 지구도 잃는다

 

  수렝의 경우, 어떤 명제들을 부동의 도그마로 믿게끔 배운 바람에 공포와 절망에 억눌려서 정신이 나갈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다행히도 다른 명제들이, 똑같이 독단적이지만 더 용기를 북돋운 명제들이 있었다

 

  1655년 10월 12일 (이맘때 수렝이 복귀한) 보르도 칼리지에서 한 수도사가 그의 고해를 듣고 영성체를 준비시키기 위해 방으로 찾아왔다. 병자가 자책할 수 있는 유일한 중죄는 아주 사악하게 처신하지 못했다는 점뿐이었다. 왜냐하면, 신께서 이미 저주를 내린 이상 모든 악에서 뒹굶으로써 그 저주에 합당하게 살아야 할 텐데, 실제로는 늘 고결한 사람이 되고자 애를 썼으니 말이다.  

  「기독교인이 선을 행하는 문제에서 자책을 느껴야 한다고 말하면, 즉 자신의 죄가 충분치 못해 괴롭다 한다면, 독자는 터무니없는 소리라고 웃을지 모르겠다. 이제 내 보기에도 그렇다.」 

 

   이 대목을 1663년도에 썼다. 1655년에도 수렝은 자신을 ‘길 잃은 영혼’이라 여기면서 그에 걸맞게 행동해야 한다고 느꼈다. 하지만 그런 의무감에도 불구하고 그는 도덕적으로 경건하게 처신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점에서 자살보다 훨씬 더 중한 죄를 범한 것이라고 확신했다. (적어도 그에겐 그렇게 보였다.

 

  바로 이 죄를 그가 ‘아직 희망을 갖고 지상에 사는 사람이 아니라 저주받은 자들 중 하나로서’ 고해사제에게 고백했다. 고해사제는 필경 어질고 지혜로운 이로서 수렝의 과대망상 성향을 잘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가 참회하는 죄인에게 보증했다. 

  난 이런 일을 잘 모르지만 결국 모든 게 잘 되리라는 인상을 종종 강하게 느꼈다오. 그걸 계시라 불러도 좋아요. “당신은 자신의 오류를 인식하고, 다른 사람들처럼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고, 평화롭게 숨을 거둘 것이외다.” 

 

  이 말이 수렝의 마음에 엄청난 인상을 불러일으켰고, 그 순간부터 공포와 비참함으로 숨 막히게 하던 구름이 걷히게 됐다. 하나님이 그에게서 돌아서지 않았다. 아직 희망이 있었다. 이 세상에서 질병이 회복된다는 희망, 다음 세상에서 구원을 얻는다는 희망이

  희망과 더불어 건강도 조금씩 회복됐다. 신체 활동 억제와 마비 증세가 차례로 사라졌다. 글을 쓸 수 없던 상태가 먼저 사라졌다. 십팔 년 동안 강요된 병리적 문맹 상태 끝에 1657년 어느 날 그가 펜을 쥐고 영적 생활에 대한 숙고를 세 페이지 끼적일 수 있었다. 철자들이 ‘거의 읽기 힘들 만큼 볼품없지만’ 그게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손이 마침내 말을 듣기 시작한 점, 비록 마음먹은 대로 따르지는 않는다 해도.  

 

  세 해가 지나 보행 능력이 회복됐다. 이건 시골 친구 집에 묵을 때였다. 처음에는 일꾼 둘이 그를 들어 침실에서 식당으로 옮겨 다녔다. 「왜냐면 지독한 통증 없이는 한 발짝도 뗄 수 없었으니까. 이건 마비 환자들이 겪는 통증 같은 게 아니었다. 위가 수축되고 경련을 일으키는 듯한 통증이었으며, 그때마다 난 창자가 뒤집히는 것을 느끼곤 했다.」

 

  1660년 10월 27일 한 친척이 그를 보러 왔다. 떠날 시간이 됐을 때 수렝이 배웅하려고 문까지 고통스럽게 발을 질질 끌고 갔다. 거기 서서 손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정원으로 눈길을 돌리고는 갑자기 「모든 사물을 아주 또렷하게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그건 극도의 신경쇠약 때문에 지난 십오 년 동안 전혀 해 보지 못한 일이었다.」 

 

  익숙한 통증 대신 ‘어떤 생기’를 느끼면서 계단을 대여섯 개 내려가 정원에 들어서서 제법 오랜 시간 주변을 둘러보았다. 

  시커먼 이끼며 녹색으로 반짝이는 회양목 울타리를 보고, 풀밭과 갯개미취들과 가지가 뒤엉킨 서어나무 오솔길을 보았다. 더 멀리 창백한 창공 엷은 은색 햇빛 속에 부드러운 갈색 가을 나무들이 서 있는 낮은 구릉들을 보았다. 

 

  바람 한 점 없고 거대한 수정 같은 적막이 깔렸는데, 떠오르는 갖가지 색채와 확연한 형상들과 무수한 선들이 기적 같은 광경을 펼치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동시에 움직이지 않았다. 그가 영원의 존재를 느꼈으니까.  

 

갖가지 색채와 확연한 형상들이 나타나는 자연에서 영원의 존재를 느끼다

 

  다음날 그 동안 거의 망각하고 있던 세상으로 다시 외출을 감행했다. 날이 갈수록 탐사가 과감해져서 한번은 우물 있는 데까지 갔다. 우물을 보고도 뛰어들고픈 충동이 일지 않았다. 정원을 벗어나서 수도원 너머 작은 숲으로 들어가 발목까지 차는 낙엽을 밟으며 걸었다.  

 

  장 조셉 수렝이… 치유됐다. 

 

  그는 ‘극심한 신경쇠약’ 때문에 바깥세계를 인식하지 못했노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 쇠약 때문에 신학적 개념들이며 그 개념들이 일으킨 환상에 집중하지 못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자연계에서 그렇게나 비참하게 단절된 것은, 사실은 그가 그런 이미지들이며 추상 관념에 병적으로 몰입한 탓이었다. 그를 삶에서 떼어놓은 질병이 시작되기 훨씬 전에, 그는 말과 거기서 파생된 것들이 사물과 생명보다 더 중요한 세계에서, 주어진 사실들로부터 떨어져 살게끔 자신을 몰아쳤던 것이다

 

  랄망은 믿음의 경계를 모르는 사람의 숭고한 무모함을 가지고 이렇게 가르쳤다. 「우리는 이 지상에서 성체 이외에 그 어떤 것도 보거나 거기에 경탄해서는 안 된다. 만약 신이 경탄할 수 있다면, 그분은 이 신비와 부활에만 경탄했을 것이다. 신이 인간 모습으로 나타난 이후 우리는 그 무엇에도 놀랄 일이 없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에서 그 무엇을 보지도 않고 경탄하지도 않는다는 면에서 수렝은 그저 스승의 금지 명령을 따르기만 했다. 그저 주기(donum)만 꿈꾸면서 아무 것도 받기(datum)를 원치 않았다. 

  그러나 신께서 주시는 최고 선물은 주어진 것으로 이뤄진다. 하나님 왕국은 이 세상에 임해야 하고, 그렇게 되려면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기적인 갈망과 증오로써 일그러진 의지며 도그마들로써 왜곡된 지성에 나타나는 세상을 지각할 게 아니라

 

  수렝은 타락한 세상이 완전히 부패했다고 확신한 엄격주의 신학자였기에 랄망을 좇아 자연에는 바라보거나 경탄할 만한 게 전혀 없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의 이론은 그가 직접 겪은 경험과 일치하지 않았다. <영적 교리 문답>에서 이렇게 쓴다. 

  「간혹 성령은 영혼을 꾸준히 점차적으로 일깨운다. 이를 위해 성령께서는 동물이며 나무, 꽃, 기타 모든 피조물 등 인간이 지각할 수 있는 것은 죄다 활용한다. 그리하여 영혼에게 하나님을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 넌지시 이르며 위대한 진리를 알려 주신다.」 

  같은 맥락의 구절이 하나 더 있다. 

  「하나님은 당신께서 갖고 계신 지혜와 선의를 모두 꽃송이에서, 미물에서, 영혼들에게 환히 드러내신다. 영혼에 사랑의 불길을 일으키기 위해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자신에 관해 이렇게 기록한다. 

  「많은 경우에 내 영혼은 이런 찬미의 상태로 덮였고, 그러면 햇빛이 평소보다 말할 수 없이 더 밝아지는 듯한데, 그러면서도 아주 부드럽고 견딜 만한 것이, 자연광이 아니라 마치 더 드높은 시원에서 나오는 듯싶은 것이다. 한번은 그런 상태에 잠겨서 보르도에 있는 우리 칼리지 정원으로 나갔다. 그런데 그 빛이 어찌나 기적 같은지, 내가 마치 낙원에서 걷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모든 색채가 평상시보다 더 ‘선명하고 아름다웠으며’ 모든 형상이 더 우아하고 눈부시게 보였다. 우연한 축복 덕분에 그는 무한하고 영원한 세계의 문으로 자연스레 들어섰다. 그 세계는 만약 블레이크의 말대로 ‘지각의 문들이 깨끗이 닦여 있다면’ 우리가 매 시간 거주할 곳이다.[각주:3]

  그러나 찬미의 상태는 오래가지 않고, 병고를 겪는 여러 해 내내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아름다움과 웅장함이라는 면에서 내가 이 세상에서 경험한 모든 것을 압도하는, 아주 강렬한 기억 외에 내게는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일순간이나마 지상에서 하나님 왕국을 접한 이 사람이 그럼에도 엄격주의자이기에 이 징표를 지각하지 않고 창조의 결실을 다 거부해야 했던 까닭은 단순한 말과 추상적 개념들에 지나치게 의존한 탓이다

  그는 자연에서 하나님을 경험했다. 

  그러나 트러헌이 <명상의 시대>에서 한 것처럼 이 경험을 체계적으로 정성들여 활용하는 대신, 그는 신이 창조한 그 무엇도 보거나 경탄하기를 거부하는 예전 비정상적 정신 상태로 되돌아가곤 했다. 그러고는 자기 신조에서 더 암울한 명제들과, 그 명제들에 대한 자신만의 감정과 상상에, 온 생각을 쏟아 부었다. 하나님의 무한한 영광과 아름다움을 스스로 내던지기에 이보다 더 확실한 길도 없었으리라. 

 

  안타이오스[각주:4]는 땅에 닿을 때마다 새로운 위력을 얻었다. 그렇기 때문에 헤라클레스는 이 거인을 들어 올려 허공에서 교살해야 했다. 

  거인이자 동시에 영웅인 수렝은 자연과 접촉하여 치유되는 경험도 했고 의지력 하나로 자신을 지상에서 들어 올려 제 목을 죄기도 했다. 그는 해방을 열망했다. 그러나 성자와 합일을 잘못 해석했다. 그에게는 이 합일이 자연에 깃든 신성을 부정하는 뜻으로 보였다. 그렇기 때문에 분명한 세상과 떨어져서 영혼이 성부와 합일하는, 또 갖가지 심리적 체험에서 성령과 합일하는 부분적 깨달음만 얻었다

 

  (초기 단계에서 수렝의 치유는 암흑으로부터 ‘행복하고 건강한 의식’으로 이동하는 데 있지 않았다. 이 건강한 의식은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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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라틴어 datum은 '주다'라는 동사 dare의 과거분사로서 '주어진'이란 뜻. 즉, 받은 것. donum은 '선물, 기증, 인간에게 강림한 하느님 은총' 등의 뜻. 성 보나벤투라에 의하면, 다툼과 도눔은 1) datum이 동사의 과거분사로서 시간을 포함하기 때문에 하느님께 덜 고유한 성질인 반면에 2) donum은 대범함과 규모에서 datum을 훨씬 더 능가한다고. [본문으로]
  2. "But seek ye first the Kingdom, and all the rest shall be added." "다만 그의 왕국을 구하라, 그러면 다른 것은 다 더해지리니." (누가복음 12:31) [본문으로]
  3. If the doors of perception were cleansed, every thing would appear to man as it is, infinite. "지각의 문들이 깨끗이 닦여 있다면, 만물이 사람에게 있는 그대로, 무한하게 드러날 것이야." 영국의 시인, 판화 제작자 윌리엄 블레이크가 1790-1793년 어간에 완성한 책 <천국과 지옥의 혼인>에 실려 있다. 올더스 헉슬리는 자신의 가장 유명한 작품들 중 하나의 제목을 이 구절에서 차용해 <지각의 문>(1954)이라 했다. [본문으로]</지각의></천국과>
  4. Antaios - 그리스와 베르베르 신화에서, 힘이 센 거인. 바다의 신 포세이돈과 땅의 여신 가이아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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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덩의 악마들  

The Devils of Loudun 

 

 

 

올더스 헉슬리 저

(번역, 주석, 해설 – 김성호)



올더스 헉슬리, 아내와 함께

 


 

  16-17세기 작가들과 극작가들이 가장 즐겨 취한 주제들 중 하나는 정신 멀쩡한 사람을 미쳤다고 공표하고 갖가지 모욕과 조롱을 안기는 것. 예를 들어, 말볼리오[각주:1]가 그렇고, 혹은 그림멜하우젠의 <짐플리치시무스>[각주:2]에 나오는 비참한 희생자를 떠올릴 수 있다. 한데 실생활에서 벌어진 사실들은 픽션에서 다룬 것보다 한층 더 불쾌한 것이었다. 

 

  루이즈 트롱셰가 파리에 있는 살페트리에 정신병원에서 어떻게 보냈는지 회고록을 남겼다. 거리에서 아무렇게나 소리치고 혼자 깔깔대고 다니다가 1674년 병원에 수용됐다. 한데, 그렇게 돌아다닐 때 왜 그런지 떠돌이 고양이들이 그녀를 엄청나게 따라 다니는 바람에 단순한 미치광이가 아니라 마녀가 분명하다는 의심을 샀다. 

 

  병원에서 그녀는 쇠사슬에 묶인 채 철창에 갇혀서 많은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됐다. 구경꾼들이 쇠창살 사이로 지팡이를 집어넣어 쿡쿡 찌르고, 고양이처럼 야옹거리며 놀리고, 마녀는 이런 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지껄였다. 더러운 짚단 위에 누워 있는 그녀를 보고 구경꾼들이 수군거렸다. 이 미치광이가 처형될 때 불길이 얼마나 멋지게 타오르겠어! 두어 주일에 한 번씩 새 짚단이 제공되고 더러운 것은 마당에서 불태웠다. 루이즈는 마당에 끌려나와 그 불길을 보면서 사람들이 신나서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마녀를 불길에 처넣어라! 처넣어!” 

 

  어느 주일날 억지로 설교를 듣게 됐는데, 그녀 자신이 설교 주제였다. 성직자가 그녀를 가리키면서 회중에게 말했다. 

  보시오, 하나님은 죄를 이런 식으로 무섭게 벌하신다오! 이 세상에서는 죄인이 살페트리에 철창에 갇혀 있지만 다음 세상에서는 지옥에 떨어지게 될 것이오! 

  그리고 비참한 제물이 어깨 들썩이며 흐느끼는 동안에도 설교자는 불구덩이 고통이며 유황 냄새며 펄펄 끓는 기름, 벌겋게 달군 쇠줄로 매질하기 따위를 흥미진진하게 소상히 얘기했다. 그것도 한 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영원히 계속되는 것입니다. 아멘. 

 

  이런 여건에서 루이즈의 상태가 갈수록 더 나빠진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녀가 완전히 회복된 것은 한 사람의 평범한 호의 덕분이었다. 그녀한테 친절하게 대하고 기도 방법을 가르친 방문 성직자

 

  수렝한테도 그 비슷한 일이 생겼다. 사실, 그는 공중 정신병원에 갇혀 정신과 육체의 고문을 당하는 일은 면했다. 그러나 예수회 칼리지 진료소에 있다 해도, 교육 수준 높은 학자이며 헌신적 기독교인인 동료들 가운데 있다 해도, 거기에도 공포는 차고 넘쳤다.

  예를 들어, 그를 돌보라고 붙인 수련수사는 무지막지하게 폭행을 가했다. 어린 학생들은 미친 수도사가 눈에 띄기만 하면 휘파람 불며 야유했다. 그런 젊은이들의 그런 행위는 예상됐던 것일 뿐. 한데 그의 형제요 동료인 엄숙한 신부들과 수도사들이 하는 짓은 의외였다. 알고 보니 그들은 참으로 무신경한데다가 측은지심 따위가 눈곱만치도 없었다

 

  개중에는 허세 부리고 활달한 사람들, 이른바 ‘근육적 기독교인'들[각주:3]도 있어서, 그들은 수렝에게 장담했다. 당신한테 잘못된 것은 하나 없으니까 주눅들 필요 없소. 그리고 그가 해내기에 불가능한 일들을 시킨 뒤 그가 고통에 겨워 비명을 지르면 좋아라 웃으면서 덧붙였다. 아, 그 통증은 당신 상상일 뿐이오. 

  거기엔 악의적인 모럴리스트들도 있었다. 그들은 그를 찾아와 곁에 앉아서 장황한 설교를 흐뭇하게 늘어놓았다. 형제여, 당신 시련은 스스로 벌어들인 것이라오. 거기엔 호기심 채우려고 찾아온 성직자들도 있었다. 그들은 그를 어린애나 백치처럼 여기며 갖은 허튼소리를 다 늘어놓았다. 또 그가 말을 할 수 없으니 이해할 수도 없다고 지레짐작하여 조롱하거나 뻔뻔하게 굴면서 싸구려 유머감각과 위트를 과시한 자들도 있었다. 

 

  한번은 「제법 지위 있는 성직자가 나 혼자 있는 병실로 왔다. 내 침대에 쭈그리고 앉아 나를 한참 동안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내가 그에게 나쁜 짓을 전혀 하지 않았고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도 내 뺨에 불이 나도록 귀싸대기를 올려붙이고는 일어나 나갔다.」 

 

  수렝은 이 모든 잔혹 행위를 제 영혼에 좋게 돌리려고 무진 애를 썼다. 신께서 바라시는 일이야, 내가 미치광이가 되어 굴욕을 겪고 사회에서 추방된 자처럼 취급받기를 원하시는 게야, 나한테는 다른 이들의 존중은커녕 동정심마저 살 권리가 없어. 그가 돌아가는 상황에 순종했다. 나아가 자신의 비하를 적극적으로 갈구했다. 그러나 운명에 자신을 맞추려는 이 의식적인 노력은 그 자체로는 치유를 얻기에 충분치 못했다. 루이즈 트롱셰의 경우처럼 치유 동인은 다른 사람의 친절이었다

 

  1648년 바스티드 수사가 생트 칼리지 학장에 임명됐다. 동료 수도사들 가운데서 유일하게 수렝이 완전히 미치지 않았다고 일관되게 주장한 사람. 그가 병자를 데리고 있게 해 달라 요청했고, 승인이 났다. 

  생트에서 십년 만에 처음으로 수렝이 연민과 배려를 받게 됐다. 하나님 손에서 징벌을 겪고, 그렇기 때문에 인간들 손에서 더 많은 벌을 받아 마땅한 무슨 죄인이 아니라 영적 시련을 겪는 병자로서 말이다. 그렇다 해도 그가 제 감옥인 쪽방을 떠나서 바깥세계와 소통하기는 아직 불가능했다. 그러나 이제 세상이 그에게 훨씬 더 큰 호의를 보이며 다가들고 그와 소통하느라 애썼다. 

 

  이 새로운 대우에 대한 첫 번째 반응을 병자는 육신에서 드러냈다. 여러 해 동안 만성적 불안감이 호흡을 얕게 만드는 바람에 그는 거의 늘 질식 상태 직전에 있는 사람 같았었다. 한데 이제 거의 갑작스레 횡격막이 자유로이 움직이게 됐다. 생명 불어넣는 공기를 심호흡하여 폐에 가득 채울 수 있었다

  「내 근육은 전부 죔쇠들로 조인 듯 단단히 닫혀 있었다. 한데 이제 죔쇠가 하나씩 풀렸다. 난 믿기 힘든 안도감을 느꼈다.」 

 

  영적 해방 같은 것을 육신이 경험하고 있었다. 천식이나 건초열로 고생해 본 사람들은 우주 환경에서 물리적으로 단절된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우며, 회복되어 그것을 되찾는 것이 얼마나 큰 환희인지 알고 있다. 

  영적 수준에서 수많은 사람들은 천식 같은 것 때문에 시달리지만, ‘산소’ 결핍으로 만성적 질식 상태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아는 이들은 극히 적다. 하지만 그런 결핍을 느낄 줄 아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그들은 공기를 필사적으로 갈망한다. 그러다가 어떡하든 폐를 채우게 되면, 필설로 형용할 수 없는 행복을 맛본다. 

 

  기이한 삶을 이어가는 동안 수렝은 억눌리기도 하고 풀려나기도 하고, 또 숨 막히는 어둠에 갇히기도 하고 햇빛 아래 산꼭대기에 오르기도 했다. 그의 폐가 그의 영혼 상태를 반영했으니, 영혼이 억눌릴 때면 폐가 경련을 일으켜 딱딱해지고 영혼이 숨을 쉬면 폐도 부드럽게 늘어났다

  그의 글들에서는 ‘구속된, 억눌린, 얽매인’ 같은 단어만이 아니라 그 안티테제인 ‘해방된, 팽창된, 되살아난’ 같은 단어도 수없이 마주친다. 그 단어들은 그의 경험의 주된 사실을 표현한다. 바로, 긴장과 이완이라는 양극단 사이에서 발생하는 격렬한 진동, 자신보다 더 작아짐과 더 충만한 삶으로 들어섬 사이에서 일어나는 격렬한 진동

 

  수렝의 경우 심리적으로 해방되면서 흉곽도 상당히 커졌다. 무아지경으로 자신을 내어맡기는 묵상 시기 중에 한번은 구두처럼 앞에서 끈으로 묶는 가죽조끼가 오륙 인치나 늘어난 것을 발견했다. (성 필립 네리[각주:4]는 젊은 시절 무아지경에서 흉곽이 어찌나 격하게 확장됐든지 가슴이 영구적으로 늘어나고 갈비뼈 두 대가 부러질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렇기 때문에, 마지막까지 왕성하게 일하면서 팔순까지 살았다.) 

 

  호흡과 스피릿 간에는 단순한 어원학적 관계뿐 아니라 실질적 관계도 있다는 점을 수렝은 늘 인식했다. 그는 네 가지 호흡 타입을 열거한다. 악마의 호흡, 본성의 호흡, 은혜의 호흡, 찬미의 호흡. 그리고 그 각각의 호흡을 다 겪어 봤다고 우리한테 단언한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 얘기를 상세히 하지 않는 바람에, 그가 프라나야나[각주:5] 분야에서 실제로 무엇을 습득했는지 우리는 모른다. 

 

  바스티드 수사가 베푼 친절 덕분에 수렝이 다시 인류의 한 멤버라는 감각을 회복하게 됐다. 그러나 바스티드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말할 수 있었지만 신을 위해서는, 최소한 수렝이 믿은 하나님을 위해서는 말할 수 없었다. 어제의 병자가 다시 호흡하게 됐지만, 글을 읽고 쓰거나 미사 집전할 능력은 복구되지 않았다. 걷거나 음식 먹고 옷을 입고 벗는 게 불편하고 때론 날카로운 통증을 느꼈다. 그런 무기력과 장애로 인해 자신이 저주받았다는 확신을 지울 수 없게 됐다. 

  그것은 공포와 절망의 시원이었고, 거기서 잠시나마 마음을 돌리는 방법은 오직 통증과 날카로운 불쾌감을 겪는 것밖에 없었다. 정신적으로 더 좋게 느끼려면 육체적으로 더 나쁘게 느껴야 했다.[각주:6

 

  수렝을 괴롭힌 질환의 아주 이상한 특징은 정신 상태 일부가 결코 병들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읽고 쓰는 능력을 잃고, 기력을 앗아가는 지독한 통증 없이는 간단한 동작조차 할 수 없으며, 제 영혼의 파멸적 숙명을 확신하고, 자살과 신성 모독과 불순한 행위와 이단에 대한 충동에 사로잡히면서도 (어떤 순간에 그는 확신에 찬 칼뱅파였고 또 어떤 순간에는 믿고 실행하는 마니교도이기도 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그 오랜 고난과 시련 중에도 상하지 않은 문학 창작력을 지니고 있었다

 

  정신이 나간 처음 십년은 주로 운문을 지었다. 세간에 널리 퍼진 가락들에 새 노랫말을 붙이면서 수많은 발라드와 향연의 노래를 기독교 찬송가로 바꾸어 놓았다. 하지만 그의 운문은 빈약한 편인데, 그것은 건강 때문이 아니라 재능 부족 때문이었다. 수렝의 시가는 정신이 나갔을 때나 멀쩡할 때나 똑같이 빈약했다. 

 

  그의 재능은 (그것도 상당히 큰 재능은) 작시가 아니라 산문에 있었다. 주제를 명료하고 철저하게 드러내는 솜씨가 뛰어났다. 병으로 고생하던 시기 후반부에 실제로 행한 게 바로 산문 작업. 머릿속에서 구성하고 매일 저녁 필사생에게 구술하면서 1651년부터 1655년 어간에 자신의 가장 뛰어난 저술 <영적 교리 문답 Le Catechisme Spirituel>을 만들어냈다. 

 

  이 저술은 심오함과 본질적 가치 면에서 수렝과 동시대를 산 영국인 어거스틴 베이커[각주:7]의 <거룩한 지혜>에 비견될 수 있다. 사륙판으로 천 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에도 불구하고 <교리 문답>은 아주 읽을 만한 책으로 남아 있다. 사실 텍스트 질감은 다소 흥미를 떨어뜨리는 면도 있지만, 이는 수렝의 잘못이 아니다. 그의 유쾌한 구식 문체는 이후 거듭된 출판에서 수정됐다. 

  이미 19세기 한 편집자는 수렝의 원고를 ‘우정 어린 손으로 다듬었다’고 무의식적으로 놀린다. 다행히도 이 ‘우정 어린 손’은 저자가 가장 미묘하고 숭고한 자료들을 다루면서 동원한 소박함과 명료함을 망가뜨리지 않았다. 

 

  <교리 문답>을 쓸 때 수렝은 참고 서적들이나 예전에 써둔 원고마저 들여다볼 수 없었다. 그럼에도 다른 저자들에 대한 참조와 인용이 대단히 풍부하고 적절하며 저작의 구성 자체가 놀라울 정도로 단단하다. 그는 똑같은 주제들로 계속 돌아가면서도 그것을 다양한 관점에서 살피며 공들여 다듬는다. 그런 핸디캡 아래서 그런 저술을 지으려면 엄청난 기억력과 놀라운 집중력을 지녀야 했다. 이 책을 쓰던 때 최악의 광기 상태는 지나갔지만 주변 사람들은 여전히 그를 미치광이로 여겼다. (근거가 없지도 않았다.) 

  명석한 정신과 지적 기능을 고스란히 지닌 채 미치광이가 된다는 것은 분명히 가장 악몽 같은 경험이리라. 손상되지 않은 이성은 무기력하게 보인 반면에, 상상과 감성과 자율신경계는 범죄적 미치광이 패거리처럼 행동하며 그를 파멸로 몰아갔다. 결론적으로 보자면, 그것은 적극적인 사람과 자기암시의 희생자 사이에서 벌어진 고투, 실질적 사실들에만 의거하는 리얼리스트 수렝과 단어들을 괴물 같은 유사 리얼리티로 바꾸는 미문가 수렝 간의 고투였고, 그런 고투에서는 응당 공포와 절망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장 조셉 수렝의 고투는 인간이 보편적으로 부닥치는 곤경의 극단적인 경우였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나니.” 이 언명은 인류 역사에 관한 한 딱 맞는 말이다. 언어란 인간이 동물 상태에서 벗어나도록 도운 도구

  그러나 언어는 인간이 동물적 순수함과 만물의 본성에 일치함에서 벗어나 광기와 마성으로 접어들게 하는 원인이기도 하다. 말이란 소통에 불가결한 것이면서 그 자체에 숙명적인 위험을 안고 있다

 

  작업가설로 취급되는, 세상에 관한 명제들은 우리가 세상을 점진적으로 인식할 수 있게 하는 도구이다. 하지만, 액면 그대로 믿어야 하는 교리들이며 숭배해야 하는 우상 같이 절대 진리로 취급되는, 세상에 관한 명제들은 우리로 하여금 실제를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하고 우리를 갖가지 오류와 범죄로 몰아간다.  

 

  (일본 임제선 창시의 주요 인물인 남포소명은 이렇게 설파한다. 

  「눈먼 자들을 끌어들이려는 마음에서 부처가 자신의 황금 입술에서 단어들을 농담조로 흘렸다. 그 뒤로 하늘과 땅이 뒤얽힌 말 덤불로 가득 ... <계속> 

(알림)  Voice Training에 관심 있는 분들은 여기를 참조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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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Mavolio - 셰익스피어의 코미디 <십이야>(1602)에서 올리비아 집안의 집사. [본문으로]</십이야>
  2. Hans Grimmelshausen (1625-1676) - 게르마니아의 작가. 농민의 아들로 삼십년전쟁에 병사로 참전. 1648 전쟁 끝나자 유럽을 편력. 파멸적인 30년 전쟁 시기 게르마니아의 삶을 묘사한 장편소설 <짐플리치시무스의 모험>(1668)이 널리 인기를 끌었다. [본문으로]</짐플리치시무스의>
  3. Muscular Christianity - 근육적 기독교. 리버럴한 크리스트교의 한 형태로서 격심한 활동과 건강한 생활을 강조, 19세기에서 20세기 초까지 널리 퍼졌다. YMCA가 스포츠와 체조 프로그램들을 채택하는 것도 그 일환. 이 운동의 근거는 빌립보서 3:14, 고린도전서 6: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느님께 받은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 몸은 너희의 것이 아니니.” [본문으로]
  4. St. Philip Neri (1515-1595) - 이탈리아의 성직자, 오라토리오 수도회라 불린 세속 성직자 모임을 설립. ‘로마의 사도’. 많은 이적을 행한 것으로 알려져. 시신을 해부했을 때 갈비뼈 두 대가 부러져 있었다고 한다. 이는 1545년경 카타콤에서 열심히 기도하는 중에 흉곽이 확장되면서 일어난 사건. 그의 시성을 승인한 교황 베네딕트 14세는 가슴 확장이 동맥벽이 약해진 탓에 동맥이 확장돼 발생한 것으로 결정했다. [본문으로]
  5. pranayana - ‘프라나 혹은 호흡의 확장’ 혹은 ‘생명력 확장’이라는 의미의 산스크리트어 Prāṇāyāma에서. 요가에서 말하는 이 호흡법의 기원은 힌두이즘에 있다. [본문으로]
  6. 수렝과 같은 상태를 의사 Leon Vannier가 (Paris, 1950)에서 잘 묘사하고 있다. “블랙 코호시에 약한 사람은 제 머리를 두터운 구름이 감싸고 있다는 느낌을 갖는다. 보고 듣는 게 신통치 못하고, 그의 주변과 내면은 온통 뒤죽박죽이다. 병자는 미치는 게 아닐까 겁을 낸다. 아주 묘하게도, 신체 어떤 부위에든 통증이 나타나면, 기분은 더 좋아진다. 병자가 통증을 느낄 때, 정신 상태가 향상된다.” - 저자 주. [본문으로]
  7. Augustine Baker (1575–1641) - 베네딕트회 수사, 신비주의와 금욕주의 등 주로 영적 문제에 관해 많은 글을 썼다. (1657), 익명의 작자가 쓴 <무지의 구름>의 주석서인 .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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