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교회는 네 가지 테스트를 제시한다. 언어 테스트, 초자연적 물리력 테스트, 공중부양 테스트, 투시력과 예지 테스트.
만약 어떤 사람이 정상 상태에서는 전혀 모르는 언어를 특별한 경우에 이해하거나 말할 수 있다면, 만약 공중부양이라는 물리적 기적을 명백히 보이거나 놀라운 괴력을 발휘할 수 있다면, 만약 미래를 확실하게 예견하거나 멀리서 일어나는 사건을 정확히 묘사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악마에 사로잡혔다고 볼 수 있다.
(혹은, 그게 아니라면, 특별한 은혜를 받은 사람이라고 볼 수도 있다. 왜냐하면, 많은 경우에 신이 내린 기적과 악마의 기적은 불행히도 겉보기에는 똑같으니까. 성자처럼 무아지경에 빠진 이들의 공중부양은 황홀경에 빠진 귀신들린 자들의 공중부양과 전혀 다르지 않다. 만약 다르다면, 그건 오로지 그들의 도덕적 경력과 그 행위의 결말이다.
한데 어떤 사람이 고귀한 모티브를 갖고 있는지 아니면 악마 같은 생각을 하는지 알아보기란 그리 쉽지 않다. 그렇다 보니, 가장 깨끗한 이들조차 ESP와 PK[각주:1] 능력을 선보였다가 악마주의라고 비난받은 경우가 더러 있었다.)
공식적이고 시대상으로 본 마귀 들림 범주는 그러하다. 이 초감각적 능력이며 염동과 관련된 현상들은 예전에 완벽하게 여겼던 영혼 개념이 충분치 못한 것이었음을 우리 현대인들에게 증명한다. 우리네 의식적 자아 너머에 광활한 무의식 영역이 있는데, 이 무의식은 우리 에고보다 더 좋고 현명할 때도 있고 더 나쁘고 우둔할 때도 있다.
무의식의 가장자리 어딘가에서 인간 영혼이 외부 심령 매개와 결합하는 지대가 시작되고, 이 매개를 통해 모든 영혼이 서로 소통하고 우주정신과 직접 교류할 수 있다. 이 무의식적 수준들 중 하나에서 정신이 에너지와 접하는데, 이 접촉은 육체 안에서만이 아니라 (숱한 증언과 통계가 증명하듯이) 육체 바깥에서도 이뤄진다.
우리가 살펴본 대로, 이전 시대의 심리학은 독단적 정의 때문에 무의식의 작업을 무시할 수밖에 없으며, 설명되지 않는 현상들과 부닥치게 되면 모든 것을 악마의 간계로 돌려야 했다.
우리는 잠깐 엑소시스트들과 그 동시대인들 입장에 서도록 해 보자. 마귀 들림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기준이 확실한 것이라 가정하고, 수녀들이 악마에 들씌웠으며 주임신부를 마법사라고 공표한 근거를 검증해 보자. 적용하기 가장 쉽기 때문에 실제로 가장 자주 쓰이는 테스트, 곧 언어 테스트로 시작하겠다.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방언 말하기’는 성령이 베푼 각별한 은사요 무상의 선물이지만, 동시에 (우주 본질이 묘하게도 다의적이듯이) 악마에 들씌웠다는 확실한 증상이기도 했다. 대부분 경우 소위 방언이란 지금까지 모르던 언어를 실수 없이 정확하게 구사한다는 뜻이 아니다. 흔히 그건 웬만큼은 똑똑히 발음되고 웬만큼은 조리가 있는 횡설수설로서 어떤 전통적 스피치 형태와 비슷한 듯싶기에, 호의를 지닌 청자들한테는 친근했던 어떤 언어로 조금 불분명하게 말하는 것처럼 해석될 수도 있다.
혹자가 의식 상태에서는 몰랐던 언어를 트랜스 상태에서 술술 말하는 경우를 두고 연구한 결과 대체로 이런 사실이 드러났다. 즉, 그 사람은 머나먼 유년기에 그 언어로 말하다가 그 후 까맣게 잊었거나, 아니면 예전에 그 언어를 듣고 단어 의미를 모르면서도 그 어음들과 무의식적으로 친근해졌다가 이제 재현하게 됐다는 것.
F. W. H. 마이어스의 말대로라면, 기타 모든 경우에서 「새로운 언어나 이전에 모르던 수학 지식 같은 지적 정보를 특별한 연구도 없이 실제로 잔뜩 얻을 수 있다는 증거는 거의 없다. 텔레파시 경우는 좀 다르지만.」
심령술과 자동기술(automatic writing) 연구를 포함해 현대 심리학을 고려할 때 귀신들렸다고 추정된 사람이 방언 테스트를 아주 깨끗하게 통과한 적이 있는지 의심스럽다. 확실한 것은, 완전한 실패로 기록된 경우는 아주 많은 반면에 성공했다는 기록은 대개 편파적이고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점. 마귀에 들렸다고 주장하는 협잡꾼들을 까발리는 데 교회 조사관들이 언어 테스트를 가끔 효과적으로 활용했다.
예를 들어, 1598년 마르테 브로시에라는 여성이 악마에 들씌운 증상을 여럿 내보임으로써 유명해졌다. 그 한 증상은 아주 전통적이고 정통적인 것으로, 그녀한테 라틴어 기도문이나 엑소시즘 문구를 읽어 줄 때마다 발작을 일으켰다. (알려지다시피, 악마들은 하나님과 교회를 증오하기 때문에 성서나 기도서의 거룩한 단어를 접하면 격노한다.)
이 무식한 여인이 라틴어를 도대체 어떻게 아는 것일까 시험하기 위해 오를레앙의 주교가 페트로니우스[각주:2]의 책을 펼치고 <에페수스의 과부>라는 아주 비교훈적이며 좀 지저분한 대목을 장엄한 어조로 읽었다. 효과는 정말 마술 같았다. 첫 구절이 낭랑하게 다 울리기도 전에 마르테가 마룻바닥에 엎어져 뒹굴면서 신성한(!) 말씀을 들려주어 자신을 고통스럽게 만든다고 주교한테 욕설을 퍼부었다.
한데 이 테스트 불합격에도 불구하고 마귀 들린 여인이라는 명성에 종지부가 찍히기는커녕 마르테가 계속 인기를 누렸다는 점에 주목할 만하다. 그녀는 주교를 피해 달아나서 카푸친회 수사들의 보호를 받았다. 그들은 그녀가 부당하게 박해받았다고 선언하고, 저들 엑소시즘에 엄청나게 많은 군중을 끌어들이는 데 그녀를 이용했다.
내가 아는 한, 루덩의 수녀들은 ‘페트로니우스 테스트’ 같은 것을 전혀 거치지 않았다. 사실, 참관하러 온 한 귀족이 그와 비슷한 실험을 하긴 했다. 그는 엑소시스트에게 상자를 하나 건네면서, 아주 귀한 성유물이 들어 있다고 귀띔했다. 그 상자를 수도사가 한 수녀 머리 위에 올리자 그녀가 금방 견디기 힘든 통증 때문에 파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탁발수사가 몹시 흐뭇해하며 상자를 주인에게 돌려주자, 주인이 상자 뚜껑을 열어 주변 사람들에게 보였다.
그 안에는 숯덩이 두어 조각 외에 아무 것도 없었다.
“아아, 나리, 우리한테 왜 이런 장난을 하시는 겁니까?”
엑소시스트가 화가 나서 소리쳤다. 귀족이 응수했다.
“수도사여, 그대야말로 우리한테 왜 이런 장난을 하는 게요?”
루덩에서는 단순한 방언 테스트를 종종 시도했지만, 결과가 늘 신통치 못했다. 수녀들이 마귀에 들렸다고 굳게 믿은 니옹이 기록한 에피소드가 여기 있다.
님(Nimes)의 주교가 클레어 수녀에게 가서 묵주를 가져와 아베마리아 기도문을 읽으라고 그리스어로 지시한다. 그 말을 듣고 클레어 수녀가 처음엔 머리핀을 가져오고 이어서 아니스 씨 같은 것을 가져온다. 그러나 주교의 못마땅한 표정을 보고서 “아아, 뭔가 다른 것을 원하셨군요” 하고 능청 떨면서 결국 묵주를 가져오고 필요한 기도문을 읽었다. 이 일을 순진한 니옹은 기적 같은 사건으로 여겼다.
기적이라 불린 방언 테스트 대부분은 설득력이 더 떨어져 보였다. 라틴어를 모르는 수녀들이 역시 라틴어를 모르는 악마들에 들씌웠다. 이 이상한 사실을 해명하기 위해 프란체스코회의 한 엑소시스트는 설교단에서 악마들 중에는 배운 자도 있고 못 배운 자도 있다고 공표했다.
루덩에서 유일하게 교육받은 악마들은 원장수녀에게 파고든 자들이었다. 그러나 이 배웠다는 악마들조차 라틴어 문법은 형편없었다. 세리제 치안판사가 배석한 가운데 1632년 11월 24일 진행된 신문 기록의 일부를 여기 소개한다.
「바레가 악마에게 묻는다. “Quem adoras?”
대답: Jesus Christus.
그러나 법정 관리가 큰 소리로 말한다. “이 악마가 하는 말은 뭔가 안 맞소.”
그러자 엑소시스트가 질문을 바꾸었다. “Quis est iste quen adoras?”
그녀가 대답했다. “Jesu Christie.”
그 대답에 몇몇이 지적했다. “라틴어가 틀렸어!”
그러나 엑소시스트는 그들이 잘 듣지 못했으며 수녀원장이 “Adoro te, Jesu Christe” 하고 말한 것이라고 우겼다.
그러고 나서 키 작은 수녀가 달려와서 깔깔대며 “그랑디에, 그랑디에!” 하고 외쳤다. 또 보조 수녀 클레어가 말 울음소리를 내며 들어왔다」[각주:3]
가엾은 잔느! 그녀는 주격이며 대격, 호격 같은 복잡한 격변화를 이해할 만큼 라틴어를 충분히 공부하지 못한 것이다. Jesus Christus, Jesu Christe… 기억할 수 있는 건 다 입에 올렸지만, 그래도 저들은 틀린 라틴어라고 하다니!
그러자 세리제가 선언했다. “만약 수녀원장이 내 질문 두세 가지에 시원스레 대답한다면” 나도 그녀가 정말 악마에 들씌웠다고 믿어 보겠소. 그러나 질문이 나왔지만 대답이 없었다. 완전히 당황한 잔느는 결국 발작을 일으키고 희미하게 울부짖음으로써 궁지에서 벗어나야 했다.
이 설득력 떨어지는 시연을 벌인 다음날 바레가 세리제를 찾아가서 자신은 정말이지 순수하게 행동했으며 악의 같은 건 전혀 없었다고 강변했다.
「그가 성합을 머리에 올리고 맹세하기를, 이 모든 일에서 수녀들한테 그 어떤 비행이나 속임수, 강압 따위를 썼다면 자신이 저주 받을 것이라고 했다. 그가 말을 마치자 카르멜회 수도원장이 앞으로 나와서 비슷한 주장과 저주를 운운했다. 그 역시 성합을 머리 위에 올리고 이 사건에서 자신이 죄를 범했거나 오류를 저질렀다면 다단과 아비람의[각주:4] 저주를 받을 것이라 했다.」
아마도 바레와 수도원장은 저희 행위의 괴물 같은 측면에 눈이 멀 정도로 광적이었을 것이며, 그런 거창한 서약도 양심적으로 했음이 분명하다. 덧붙이자면, 참사회 위원 미뇽은 제 머리 위에 그 무엇도 올리지 않고 그 어떤 천벌도 자신에게 돌리지 않는 쪽을 택했다.
(몇 해 동안 마귀 들림 소동이 벌어지는 중에 루덩을 방문한 저명한 영국 여행객들 가운데 젊은 존 메이틀랜드가 있었다. ... <계속>)
우리의 두 번째 사례는 최면에 걸린 사람으로, 최면에 의해 강경증(强勁症) 상태로 들어선 경우이다. 최면의 본질이며 그 암시가 자율신경계에 어떻게 영향 끼치는지를 우리는 아직 충분히 파악하지 못한다. 그러나 최면에 쉽게 빠지는 사람들이 있으며, 그 상태에서 그들 잠재의식의 어떤 부분이 최면술사가 건넨 암시에 몸이 따르게 한다는 것쯤은 우리가 알고 있다.
피험자가 최면에 잘 걸리는 타입이라면 노련한 최면술사는 그를 언제든 강경증 같은 경직 상태로 유도할 수 있는데, 바로 이런 경직 상태를 루덩의 독실한 신자들은 사탄의 소행으로 여긴 것이다. 정말 그랬다. 왜냐하면 그 당시 개념으로 보아 그런 희귀한 현상은 수녀들이 속임수를 썼거나, 아니면 초자연적인 힘에 의한 것이 분명하니까.
만약 당신이 아리스토텔레스며 성 아우구스티누스, 갈레노스[각주:1], 아랍 학자들의 저술을 다 읽는다 해도, 오늘날 우리가 무의식이라 부르는 것에 대한 언급은 눈곱만치도 없다는 점을 발견하리라. 우리네 선조들에겐 한 쪽에 영혼이나 의식적인 자아가, 또 다른 쪽엔 하나님과 성인들, 일단의 선하고 악한 스피릿들만 있었을 뿐이다.
오늘날 우리는 의식적 자아의 활동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며 어떤 면에서는 더 효율적인 무의식의 활동이라는 광대한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런 개념을 그 시대에는 도저히 갖출 수 없었다. 인간 본성에 대한 당대 이론에는 무의식을 위한 자리가 없었다. 따라서 우리 선조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전혀 몰랐다.
지금 우리가 무의식의 활동으로 설명하는 희귀한 현상을 그때는 완전히 부정하지 않으면 인간 외적인, 외계 혼령들의 행위로 치부해야 했다. 그러니까 발작을 일으키면서 나타난 강경증은 속임수 아니면 악마들이 들끓는다는 징후였다.
토마스 킬리그루[각주:2]가 젊은 시절인 1635년 가을 루덩에서 시행된 한 엑소시즘을 참관했다. 진행을 맡은 탁발수사가 이 영국인에게 수녀의 돌덩이 같은 팔다리를 만져 보라고 했다. 사탄의 파워와 그보다 더 큰 전투 교회[각주:3]의 파워를 느끼고 인정하고서, 하나님 뜻이라면, 이단적 종교를 버리고 로마가톨릭으로 개종하라는 의미였다. 친구 월터 몬테규는 그 이전 해에 그렇게 했다. 이 사건을 묘사하는 편지에서 킬리그루가 이렇게 썼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돌덩이 같은 건 없었다. 그저 단단한 근육과 강한 팔과 뻣뻣한 다리만 느꼈을 뿐.」
(수녀들이 프라이버시와 존중 받을 권리를 얼마나 철저히 박탈당했는지에 주목하자. 엑소시즘을 시행한 수도사는 장터에서 여흥 돋우는 쇼의 여리꾼처럼 행동한다. “여러분, 이쪽으로 오시오! 주저 말고! 눈으로 못 믿겠다면 만져 볼 수 있어요. 이 뚱뚱한 여인의 허벅지를 꼬집어 봐요, 그러면 우리가 하는 말이 백 프로 사실이라는 걸 확인할 겁니다!” 그렇게 그리스도의 반려자들이 카바레 사회자나 서커스 열광자로 바뀌곤 했다.)
킬리그루의 편지가 이어진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수녀 몸뚱이가 아주 딱딱하고 쇳덩이보다도 무거웠다고 긍정한다. 필경 그들은 나보다 믿음이 더 컸고, 그래서 기적이 나보다 그들한테 더 잘 보였나 보다.」
여기서 ‘기적’이라는 단어가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만약 수녀들이 속임수를 쓰지 않는 것이라면 시체처럼 경직된 사지는 초자연적인 원인 때문이다. (당시로서는) 다른 설명이 불가능하다.
데카르트가 등장하고 인간 본성에 관해 더 ‘과학적인’ 이론이 웬만큼 퍼졌다 해도 본질적으로 변한 것은 적었다. 외려 몇몇 측면에서는 사람들이 이전보다 더 비현실적인 관점을 견지하게 됐다. 악마를 그 누구도 더 이상 입에 올리지 않지만, 그와 동시에 한때 악마의 힘으로 치부하던 현상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더 이상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게 됐다. 적어도 이전의 엑소시스트들은 트랜스나 강경증, 다중인격, 초감각적 지각 같은 사실을 반박하지는 않았는데 말이다.
그런 기이한 현상을 데카르트 이후에 등장한 심리학자들은 난센스며 허구로 여기거나, 그게 아니라면 ‘상상의 작업’ 결과로 설명하는 경향을 보였다. 과학자들에게 ‘상상’이란 ‘환상’과 거의 같은 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상상에 기인한 것으로 간주된 현상들은 (메스머[각주:4]가 자기장 최면으로 효과를 본 치료 같은 것은) 무시하는 게 더 안전하고 적절했을 것이다.
인간에 대한 관념을 데카르트가 기하학적 범주에 집어넣고자 강력히 시도한 끝에 뭔가 경탄할 정도로 ‘명료한 생각들’이 형성됐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명료한 생각들은 거대한 의미를 지니는 어떤 사실들을 무시하게 만든다. 이 사실들에 데카르트 이전 철학자들은 진지하게 대했지만, 당시 지배적인 몇몇 심리 이론의 영향으로 그 사실들을 그저 초자연적인 원인 탓으로 돌려야 했다.
오늘날 우리는 이 이해되지 않는 사실들을 수용할 수 있으며 악마를 들먹이지 않고도 이 사실들을 설명할 수 있다. 우리는 (‘스피릿’이나 ‘순수 에고’나 ‘아트만’과 반대되는 것으로서) 인간 마인드를 데카르트 철학의 영혼이며 데카르트 이전 시대의 영혼과는 완연히 다른 뭔가로 납득할 수 있다.
예전 철학자들은 영혼이 단일하며 나뉘지 않고 불멸이라는 도그마를 굳게 믿었다. 한데 우리가 보기에 영혼은 명백히 복합적 요소들의 혼합이며, 요소들 덩어리인 영혼은 분해되고, 육신이 죽은 뒤에도 뭔가 다른 형태를 띠면서 살아남을 수 있다.
불멸은 사이키[각주:5]가 아니라 스피릿에 속하며, 이때 사이키가 선택한다면 스피릿과 합치될 수도 있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이성의 근간에는 의식이 있다. 이성과 의식은 제 육체와 상호 작용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존재의 육체나 다른 이성이며 의식과는 직접 접촉하지 않는다.
데카르트는 인간 육신을 자율 규제하는 오토마톤으로 간주했고, 그래서 다른 부차적 영혼들이 존재할 필요성을 못 봤다. 한데 이제 우리는 의식적인 ‘나’와 ‘생리적 무의식’이라 부를 수 있는 것 사이에잠재의식의 폭넓은 활동 범주가 있다고 짐작한다.
게다가 만약 초감각적 작용과 사이코키네시스의 존재를 인정한다면, 무의식 수준에서 사람은 다른 사람들 의식이며 물적 대상들에 직접 작용할 수 있다는 점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데카르트와 그 후계자들이 무시하기로 하고 또 그의 전배들은 사실로 받아들이지만 악마의 틈입으로만 설명할 수 있었던, 그 기괴한 해프닝들을 오늘날 우리는 인간 심리의 자연스러운 가능성으로 돌린다. 또 이 심리의 영역이며 힘과 약점은 오늘날 과학적 관념을 한참 뛰어넘는다.
그 당시 사람들은 루덩에서 발생한 일들을 협잡이라 여기지 않았다면 순전히 심리적 측면에서는 마법과 악마의 간계로 설명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러나 수녀들 행동을 순전히 심리적 측면이 아니라 생리적 원인으로 돌리려 한 사람도 많았다. 그들은 잔느 수녀가 내보인 것 같은 현상을 생리 기능 관점에서 설명할 수 있다고 보며, 물리적 대응 수단이 적절하다고 했다. 이 이론을 굳게 믿는 이들은 회초리라는, 오래 된 수단을 써 보라고 제시했다.
탈망[각주:6]의 기록을 보면, 쿠드레-몽팡시에 후작은 귀신들렸다 하여 엑소시스트들 손에 맡겼던 딸 둘을 집으로 데려간 뒤 ‘잘 먹이고 호되게 회초리질을 했다. 그러자 악마가 즉각 달아났다.’ 루덩에서도 마귀 들림의 나중 단계에서는 채찍질이 아주 많이 처방됐다. 수렝의 기록을 보면, 교회 의식을 비웃기만 하던 악마들이 회초리를 보자 부리나케 달아난 경우가 왕왕 생겼다.
많은 경우 예전 회초리질은 아마도 현대의 충격 요법 같은 역할을 했으리라. 즉, 무의식이 육체적 고통을 아주 겁내어, 그런 고통을 또 겪느니 차라리 미친 듯 행동하기를 그만 두는 식.[각주:7] 19세기 초까지도 광기가 확실하다 싶은 경우에는 채찍질을 동원한 충격 요법이 어김없이 적용됐다.
불쌍한 톰은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 신민이었다. 그러나 2백 년이 지나 광기 어린 조지 3세 치하에서도 잉글랜드 의회 양원은 궁정 의사들한테 미친 왕을 채찍질하도록 위임하는 법안을 채택했다.
평범한 노이로제나 히스테리에 회초리질이 효과를 본다고 간주됐지만 유일한 수단은 아니었다. 이런 질환은 당시 의학 이론에 따르면 흑담즙이 잘못된 부위에 지나치게 누적돼 생겼다. 로버트 버튼은 이렇게 말한다.
「갈레노스는 이런 질환을 모두 검은 냉기 탓으로 돌리면서, 이 질병 탓에 스피릿이 검어지며 뇌 물질이 흐리고 어두워진다고 생각한다. 또 그 결과 주변 대상이 다 끔찍하게 보이며, 마인드 자체는 검은 체액에서 나오는 이 어둡고 칙칙하고 짙은 기운 때문에 늘 어둠과 공포와 비탄에 잠기는 것이라 생각한다.
갈레노스의 이런 판단을 두고 아베로에스[각주:9]가 비웃고 작센의 헤라클레스도 빈정댄다. 그러나 엘레니우스 몬탈투스, 로도비쿠스 메르카투스, 알토마루스, 기네리우스, 브라이트, 라우렌티우스 발레시우스 등은 갈레노스의 관점에 적극 동조했다.
정신이 흐트러지면 흑담즙이 생성되고, 침울함은 스피릿을 흐리게 하고, 흐려진 스피릿이 공포와 비탄을 야기한다는 게 그들이 내린 결론이다. 라우렌티우스는 검은 기운이 특히 횡격막을 공격하고 이어서 정신을 공격한다고 추정하는데, 그건 태양이 구름에 가려 흐려지는 것과 같다.
갈레노스의 견해에 그리스와 아라비아의 거의 모든 저자를 비롯해 라틴계 저자들도 다 동의한다. 아이들이 어둠 속에서 겁을 내듯이, 흑담즙질 성향인 사람들은 내면에 늘 두려움을 지니고 있다. 그 검은 기운이 (예수회 신부 토마스 라이트가 애착에 관한 소론에서 주장하듯이) 심장 부근의 검은 피에서 나오든지 혹은 위장이나 비장, 횡격막, 혹은 뭔가 잘못된 부위들 전부에서 나오든지, 그건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 검은 기운이 정신을 집요한 감옥에 잡아두고 끝없는 공포와 불안, 슬픔 따위 힘든 감정으로 괴롭힌다는 점.」
그런 식으로, 생리적 관점에서 정신질환은 건강하지 못한 혈액이나 병든 내장에서 발생하는 연기나 안개 같은 것으로 여겼으며, 이 ‘검은 기운’이 뇌나 정신을 직접 흐리거나 아니면 자연스럽고 활기차고 생명력 있는 스피릿들이 흘러야 하는 여러 튜브를 막는 것이라 했다. (당시에는 신경 조직을 속이 빈 관처럼 여겼으니까)
(근세 과학 문헌을 읽다 보면 가장 거친 초자연주의와 가장 거칠고 나이브한 유물주의 같은 것이 이상하게 뒤섞여 있음에 놀라게 된다. 한데 이 덜 다듬어진 유물주의는... <계속>)
Claudius Galenus (129-201경) - 고대 로마의 의사, 자연과학자. 고대 의술의 대가. [본문으로]
Killigrew (1612–1683) - 잉글랜드의 극작가, 연출가, 극장 운영. 국왕 찰스 1세의 시동으로 출발해 찰스 2세의 침실 시종관. 위트에 능한 대화 상대, 자유분방한 인물. [본문으로]
Church Militant - 싸우는 교회, 현세에서 악과 싸우는 교회. *기독교 신학에서, 그리스도교회는 전통적으로 이렇게 나뉜다. 1) 전투 교회 - 지상에 살고 있는 기독교인들을 포함 (에베소서 6:12 -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2) 승리의 교회 - 현세에서 악과 싸워 이겨 승천한 천국의 영혼들을 포함 3) 참회의 교회 - 지금 연옥에 있는 이들을 포함. [본문으로]
Friedrich Mesmer (1734-1815) - 유대계 오스트리아 의사. 1775년 ‘동물 자기론(磁氣論)’ 발표. 뉴턴 역학 초기의 가설인 '에테르'란 개념을 환자 치료에 이용했다. [본문으로]
psyche - 전통적으로, 영혼은 살아있는 것에만 고유한 것으로 인식돼 왔고,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이 영혼을 사이키라 불렀다. [본문으로]
Gédéon Tallemant (1619-1692) - 프랑스의 시인. 여러 인물에 관해 간결한 이야기 모음집 덕분에 후세에 기억된다. 루이 14세 시대 파리의 유명한 문학 살롱 주인인 마담 랑부이에가 앙리 4세와 루이 13세 치세의 상세한 자료를 많이 제공. 당대 문학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인 이 저술에 파스칼과 라퐁텐도 들어 있다. [본문으로]
정신병 치료 방법과 결과가 자세하고 정확하게 기록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후반부터였다. 한 유명한 정신과 의사가 그 문건들을 연구하고 나한테 들려준 바로는, 아주 중요한 결론을 내릴 수 있으니, 정신질환 치유 비율은 2백 년에 걸쳐 거의 비슷했다고 한다. 비록 지금은 전혀 다른 방법들을 쓰고 있음에도 그렇다고 한다. 현대 정신 분석가들의 치료율은 1800년도 정신병 의사들의 치료율보다 더 높지 않다. 1600년도 정신병 의사들도 비슷했을까? 정확한 답을 우린 모른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을 것이라고 나는 짐작한다. 17세기에는 정신질환자들을 아주 가혹하게 다룸으로써 많은 경우 병을 악화시켰을 텐데, 이 주제를 우리는 저 뒷장에 가서 다시 다룰 것이다. - 저자 주. [본문으로]
- 1600년도쯤 잉글랜드에서 널리 퍼진 발라드. 작자 미상. 베들람은 정신병원. '베들람의 톰'은 미치광이라는 뜻으로, 근세 이후 영국에서 미쳤거나 미친 체한 거지와 부랑자를 일컬을 때 쓴다. 그들은 베들람의 환자였다고 주장하거나 그렇게 추정된다. 이 장시는 이후 현대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서, 수많은 시와 글과 소설과 노래 앨범 등에 영감을 주거나 인용됐다. 예, 마크 트웨인의 <왕자와 거지>에서 존 캔티가 에드워드 왕자에게 “베들람의 톰처럼 미쳐도 단단히 미쳤구나!” 하고 말한다. [본문으로]
Averroes (1126-1198) - 아랍의 종교철학자. 본명은 이븐 루슈드. 코르도바에서 이슬람 종법학자의 아들로 태어나 모로코에서 죽다. 자연과학, 의학, 수학, 신학, 철학 등 당대 모든 학문을 섭렵. 독자적 저술도 적잖이 있으나 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석자로 명성을 떨쳤다. "자연을 아리스토텔레스가 처음 해석했고, 아리스토텔레스를 아베로에스가 처음 해석했다." 라파엘의 <아테네 학당>에 나오는 유일한 이슬람 학자. 단테는 <신곡>에서 그를 비기독교 세계의 현자 대열에 두었다. 거의 비슷한 시기 유대 세계의 최고 철학자인 마이모니드에게 영향을 끼쳤다. [본문으로]
이제 <Freudian slips>의 (혹은 말실수나 실언이라고 알려진) 국내외 사례를 몇 가지 살펴본다. 황당하다는 느낌도 들고 웃음을 참지 못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도, 탐구심 강한 이들한테는 여러 생각 때문에 머릿속이 분주해질 게 분명하다.
* 미국 43대 대통령을 지낸 조지 부시 주니어의 경우에는 이른바 실언이 하도 많고 널리 알려져서 생략. Bushism이라는 신조어까지 생겼을 정도니까.
* 2014년 바티칸 강론 중에 프란치스코 교황의 입에서 카소(caso, 샘플)이라는 단어 대신 이탈리아어 욕설인 카초(cazzo, 음경, 얼뜨기)가 무심결에 흘러 나왔다. 교황은 금방 정정했지만 실언 동영상이 이미 수십 개 사이트와 블로그 등에서 널리 퍼지고 말았다.
====> 이 경우는 문자 그대로 발음의 실수 정도가 아닐까 싶다.
* 미국 상원의원 테드 케네디가 티브이 증언에서 “국가 이익이란 최고(best) 인재들을 장려하는 데 있어야 합니다” 하는 말을 하려고 했다. 한데 best 대신 그는 breast를 불쑥 내뱉었다. 게다가 손바닥을 컵처럼 모아 쥐고서. 역시 재빨리 고쳐 말했지만 그의 평판에 오점을 남기게 됐다.
====> 사회가 용납하지 않아 억눌린 욕구와 충동 가운데는 성욕이, 성적인 것이 가장 크다고 한다. 상원의원 이미지가 구겨질 만하다.
* (조지 부시 정권에서 국무장관 직을 수행하던 시절) 콘돌리자 라이스가 한 만찬석상에서 어떤 질문을 받고 답변했다.“여러 번 말씀 드렸다시피, 이미 제 남편한테...” 일순간 짧은 휴지를 취한 뒤 “부시 대통령한테 보고했고…”
====> 이것도 테드 게네디 경우처럼 전형적인 ‘프로이트의 실언’이다. 당시 라이스가 미혼이라는 상황이 구구한 해석을 낳는 데 한몫을 했다. “라이스가 보스한테 품고 있던 은밀한 감정이 불거진 것 아니야?” 하지만 늘 그렇듯이, 반대 견해도 있다. “뭐, 그렇게까지 확대할 필요 있나? 격무에 시달리다 보니 그런 것이겠지.” 아직 둘 다 확실치 않다. 지금까지 이 포스팅 시리즈를 숙독한 당신께서는 어떻게 해석하시겠는가? ^^
*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거룩한 도시이며, 서울의 시민들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이명박 씨가 2004년 5월 장충체육관 '청년 학생 연합기도회'에서 <서울을 하나님께 드리는 봉헌서>를 낭독하면서)
====> (나중에 성토하는 여론이 높아지자 그쪽에서 ‘말실수’라고 둘러댔는지 확인하지는 않았으나) 이건 말실수가 아니다. 억눌리고 억제하던 무의식의 발로가 아니다. 편협한 사고방식을 지닌 사람의 뻔뻔한 발언일 뿐. 왜 편협하고 뻔뻔하다 하냐고? 왜냐하면, 모든 시민을 다 아울러야 하는 위치에 있었으니까. 비슷한 맥락에서, 전두환 씨의 “29만 원 운운”도 말실수가 아니다. 그건 거짓말이었다. 뻔뻔한, 새빨간...
* 사면에 바다를 갖고 있는 대한민국이 바다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것은 우리 역사의 과오입니다. (경인 아라뱃길 개통 기념사, 이명박)
====> 이건 4편 <실언의 유형> 가운데, 글쎄, ‘어휘 선택 실수’에 해당하나? 아니면, 또 다른 원인인 무지에 해당할까? 하지만 대한민국이 3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다는 것은 우리 골목 어슬렁거리는 길고양이도 아는 사실 아닌가. 그러니까... 이것 역시 전형적인 ‘프로이트의 실언’이 아닌가 싶다. 즉, 무의식의 발로! 그는 혹시 ‘4면에 바다를 갖고 있는 나라’를 제 모국으로 여기는 것은 아닐까?
* 15년 동안의 대통령 직을 사퇴합니다. 아,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박근혜)
====> 명명백백한 ‘프로이트의 실언’이라 하겠다. ‘난 공주였어, 내 아버지가 이 나라 대통령이었어, 저기 북쪽에서도 대를 이어 승계하는데 여기서도 그래야 마땅한 거 아니야? 이 나라 왕권(?)은 나한테 있고, 대통령은 나야’ 하는 생각을 자주 품은 것은 아니었을까? 프로이트라면 분명히 그렇게 해석했을 듯싶다.
* 바쁜 벌꿀은 슬퍼할 시간도 없다. (2012년 힐링 캠프에서, 박근혜)
* 전화위기의 계기로 삼아서... (2012년 경기도당 선거대책위원회 출범식, 박근혜)
====> 전자는 단순히 음절이나 형태소가 바뀐 ‘프로이트의 실언’으로 볼 수 있고, 후자는 무지에서 비롯된 ‘프로이트의 실언’에 속하겠다. “이산화까스 운운” 역시 무지에서 튀어나온 ‘프로이트의 실언’.
---> 프로이트라면 이런 해석을 내놓지 않았을까? 마음속으로는 ‘회장님이 이미 돌아가셨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런 속내가, 검찰 조사를 받으러 가는 중에 기자들이 몰려들자 당황한 나머지 의식의 컨트롤이 느슨해지면서, 그 틈으로 무의식이 치고 올라와 자기 정보를 불쑥 들이민 것 아니겠어?
* “당 대표를 맡겨 주신 것에 대해 막대한 책임감을 느낀다.” “해방 이후 이 땅을 건국하고 산업화하고, 문민정부를 세운 이 당이 이렇게 몰락한건 우리들의 자만심 때문”이라고 말했다. “앞으로 당을 쇄신하고 혁신해서 전혀 달라진 모습으로 국민의 신뢰를 받을 것을 약속한다.” “감사한다. 잘 하겠다.” (신문 기사에서, 자유한국당 신임 당 대표 수락 연설, 홍준표)
---> 존경하는 홍준표 선생께서 ‘자유한국당 대표로 선출됐다’는 기사에서 “전혀 달라진 모습으로 국민의 신뢰를...”이란 대목을 보고 나는 내심 깜짝 놀랐다. 기사가 잘못 작성/인쇄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왜?
왜냐하면, 대놓고 결론부터 말해서, ‘전혀 달라진 모습으로...’라는 대목이 나한테는 ‘절대 달라지지 않는 모습으로...’로 100% 읽히고 해석됐으니 말이다. “거, 자네한테 혹시 난독증이 있는 거 아니야?!” 존경하는 홍 선생께서는 특유의 비아냥대는 미소를 지으면서 그렇게 반박하거나 타박할지도 모르겠다. 만에 하나 그렇게 한다면, 그건 온당한 반박이 ‘전혀(!)’ 아니다. 못 된다. 왜?
왜냐하면... 간단하다. 국어사전만 들추면 된다.
전혀 (全-) - 부정어와 함께 쓰여, ‘절대로’, ‘완전히’의 뜻을 나타내는 말. 국어사전에서 소개하는 예문. 다행스럽게도 오키나와 부근에서 태풍이 소멸되는 바람에 우리나라에는 피해가 전혀 없었다. 계곡 위에서 찰방찰방하는 소리가 났지만 사람들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어쨌건 친삼촌이면서 질녀의 모습이 전혀 생각나지 않는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즉, 한국어를 쓰고 한국인들과 소통하고 한국 땅에서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전혀’ 다음에는 반드시 부정어가 나온다는 것을 훤히 알고 있다. 거기에 익숙하다. 자연스레 그렇게 해석한다. 저절로 그렇게 납득한다. '전혀'라는 단어를, 말을 들으면, 그 다음에는 '그렇게/그게 않겠구나/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본능적으로 품게 된다.
사실, 이런 예문이며 설명이며 보태는 자체가 ‘전혀’ 구차스럽다. 유치원 코흘리개도 다 아는 것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모래시계>의 총명하고 총기 넘치는 명 검사께서 삼척동자도 아는 것을 어찌 모르실 수 있을까나. 그런 전제 하에서, 이건 “전화위기의 계기로...” 같이 ‘무지에서 비롯된 실언’의 유형이 전혀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게 된다.
혹시... 본인이나 주변에서나 ‘전혀 달라진 모습으로...’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아직도) 전혀 인지하고 있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지금 문득 그런 의문마저 든다. 하기야 그런 기사를 (그대로) 내보내는 이른바 기자나 이른바 언론사도 있는 판국이니... (*이건 “너무 좋아” 같이 아주 잘못된 표현과 같은 맥락이다. 우리 한국 사회의 일그러진 근대화 과정을 바로 “너무 좋아”라는 왜곡된, 그런데도 너도 나도 쓰는, 표현에서 낱낱이 대조하고 점검해 볼 수 있다. 다음 기회에.)
말이 참으로 길어졌다. 만약, 홍준표 선생께서 정말 “전혀 달라진 모습으로...”라고 말했다면, 이건 전형적인 ‘프로이트의 실언’이라 해석할 소지가 다분하다. 즉, 무의식의 발로. 즉, ‘절대 달라지지 않겠다, 달라질 일이 뭐 있느냐...’ 같은 생각이 내면에 잔뜩 깔려 있는 것은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확 달라진’이나 ‘완전히 달라진’이 아니라 자기도 모르게 ‘전혀’라는 단어를 쓴 것이 아닌가...
말실수는 누구나 언제든 할 수 있다. 단, 정말 창의적이고 진정 총명한 프로이트의 업적을 잘 알아서, 자기만의 편협하고 허황되거나 욕심 많은 속내가 부지불식간에 드러나는 바람에 곤욕을 치르는 일은 없도록 해야겠다. 특히 공인들 경우엔 더더욱 그렇다. 아니, 아니야. 그게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가짐을 바로 하는 것이겠지.
하지만 실언에 관해 더 얘기 나누기 전에, 그보다 상위 개념인 이른바 <실착(失錯) 행위>를 좀 알아보자.
프로이트는 무의식적으로 범하는 여러 실수 행위를 다루면서 그리스어 ‘파라프랙시스 (para-praxis)’와 독일어 ‘펠라이슈퉁 (Fehlleistung, 기능 장애)’이라는 용어를 썼다.
파라프랙시스는 ‘속에 있는 생각과 의도를 (속내를, 의중을) 자기도 모르게 드러내는, 말실수나 행위’를 뜻한다. 한국어로는 ‘실착 행위, 실착증’으로 옮긴다.
유형
프로이트는, (겉으로는 하찮고 무의미해 보이는) 실언을 비롯한 실착 행위에 묻어서 무의식적인 욕구와 갈망 따위가 밖으로 드러나며, 이것을 분석할 수 있다고 여긴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의 실착 행위를 네 종류로 나누었다.
1) 잘못 말하기, 잘못 쓰기, 잘못 읽기 (단어나 상징, 이미지를 잘못 인지하기), 헛듣기 (몬데그린 mondegreen - 한 단어나 구절을 잘못 듣거나 잘못 해석하여 새로운 뜻을 부여하게 되는 것. 시나 노래를 들으면서 흔히 발생한다.)
2) 깜빡하기 (자기 이름이나 낯선 단어들, 자신의 의도 등을 얼른 기억하지 못하거나, 기억에서 사라짐)
3) 물건들을 잃어버리거나 엉뚱한 곳에 두기/감추기 (아이를 태우고 가야 할 자동차의 키를 자기도 모르게 냉장고에 넣어 두는 행위)
4) 혼란스러워서 헷갈리는 행위.
이런 행위를많은 사람들이 그저 엉뚱하거나 황당하거나 대수롭지 않게 보아 넘기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프로이트는 중요한 심리 현상 표출로 해석했다. 즉, 해결되지 않은 무의식적 갈등이나 억눌린 갈망이 (저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것이라고...
꿈의 해석과 마찬가지로 실착 행위에, 프로이트는 '무의식의 비밀로 향하는 길’이 있을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실착 행위가 다 쉽게 이해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여기서도 신체언어 시그널 해석과 마찬가지로, 맥락이 아주 중요하겠지.)
하지만 아무리 복잡한 실착 행위라 해도, 환자의 언행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그 의미를 추정할 수 있는 경우가 더러 있다. (예를 들어, 상담 시간을 놓치거나 진료비 지불을 잊는 실수 같은 것). 환자의 실착 행위를 통해 분석자와 환자 본인은 무의식에서 벌어지는 것에 관해 중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저 앞의 4가지 분류에서, 첫 번째 그룹과 나머지 3가지 그룹에도 유의미한 차이가 있다.
전자에서는 당사자의 어떤 의향이 드러나는데, 후자에는 그런 점이 없다는 것.
실착 행위의 범주
이쯤에서, ‘파라프랙시스’의 특징이랄까, 얼굴을 정리해 본다.
1) 실착 행위는 일정한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누구한테나 일어나는 정상적인 현상’ 안에 있어야 한다. 거칠게 말하자면, 미친증이 아니라는 것.
2) 실착 행위는 한순간 나타났다가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가는 (듯한) (마인드의) 파괴, 일탈, 장애, 고장... 같은 성격을 띤다.
3) 실착 행위를 보면서 대다수 사람들은 그 동기를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아주 우연히, 어쩌다가 돌출한 것이라 여기고 만다. (실제로, 파라프랙시스의 대부분이 그런 쪽의 것이기도 하다.)
실착 행위는 멀쩡한 정신에서, 멀쩡한 상태에서, 멀쩡한 사람한테서 나타난다.
이런 현상에 흥미를 느낀 프로이트가 연구를 시작하면서 자문했다.
“나로 하여금 바로 그런 식으로 잘못 말하게 하는 뭔가가 있는 것일까?”
그는 하려던 말과 극히 상반된 것을 말하는 실수의 경우가 가장 흥미롭다고 기록했다.
“실착 행위는 서로 다른 두 가지 의도가 간섭하고 충돌하면서 생긴다. 개중 하나를 파괴된 것이요, 다른 하나를 파괴하는 것이라 부를 수 있다.”
특히 실언(slips of tongue)의 경우,
그 이면에는 직접 대놓고 말할 수 없는, 곤란하고 불편하고 불쾌한 뭔가가 억눌려 있다고 보았다.
어디에?
무의식에.
한데, 무의식은 의식보다 아는 것이 훨씬 더 많아서,
의식이 감정의 침입을 받는 등 어떤 이유로 조금 느슨해진다 싶은 순간,
주저 없이 작동하면서 제 안에 쌓여 있는 정보를 주인에게 들이미는 것. (이런 과정과 결과를 우리는 실언이나 말실수라고 표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