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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0.11.21 흰 까마귀 이야기 (Tolerance)
  2. 2019.05.15 (77) 퍼블릭 스피킹 마무리
Variety/사회 현안2020. 11. 21.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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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흰 까마귀 이야기 

 - 사람들은 <누군가가 자기와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왜 견디기 힘들어하나? 

 

* 사람들은 누군가가 자기와 다르다는 사실을 왜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나? (나 혹은 우리와) 다른 사람들을 포용하고 보듬어 안기가 왜 그렇게 어려운가? 

 

- <우리 이외의 사람들이 우리와 다르다는 점을 얼마나 견딜 수 있느냐>는 곧 <우리가 자신의 불안감에 어떻게 대처하는지>에 달려있다

만약, 사람들이 불안감에 사로잡혀서 상황을 곱씹어 볼 여력도 없이 순간순간에 반응하는 쪽으로 기운다면, 그들은 불안감을 없애거나 최소화하여 (일단, 표면적으로라도) 마음 편케 하기 위해 ‘어렵지 않은’ 방법을 찾을 것이다. 그 가운데 하나가, 오호라, (자기네와) 다른 사람들에게 공격적으로 대하는 집단에 들어감으로써, 자신이 중요한 존재라는 느낌을 떠받치고 자신의 불안감을 줄이는 것이더라. 

경제나 정치, 군사 어떤 분야에서 어떤 긴장이든, 한 사회에서 긴장이 클수록 포용은 더 줄어든다는 점을 굳이 말할 필요가 있을까? 

 

포용 (Tolerance)

 

대다수는 <우리>라는 커다란 집단 정체성을 만드는데, 안타깝게도, 여기서는 책임이나 고통스러운 선택이나 건강한 의혹을 지니는 개별적인 <나>는 용해되고 ‘비인격화’가 (혹은, 몰개성화, 주체나 자아감 상실이) 일어난다.

그리고 그 여러 후과로는, 들어오는 정보에 대한 비판 감소 (소스가 권위적이라면 특히 더!), 흑백 논리, 총체적인 단순화, 거친 일반화, ‘우리 편 아닌’ 사람의 이미지를 밋밋하게 만들어 편견이나 고정관념에 묶어두기와 같은 현상이 나타난다. 

☞ 루덩의 악마들 1편 4

 

별생각 없이 무조건 싸잡다 보니 희한한 일반화가 벌어진다. 예를 들어, 중국인은 다 ‘뙤놈(되놈)’이요 일본인은 다 ‘쪽발이’라는 말을 듣거나 입에 올린 적은 없는가? 보수라 자처하는 자들은 다 ‘수구 꼴통’이요, 진보라 자처하는 자들은 (알고 보니) 다 ‘후안무치와 위선 덩어리’라고 말하거나 생각해 본 적은 없나?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지 말자는 뜻이다.) 

 

사람들이 이루는 집단은 (혹은, 무리나 패거리는) 만족스러운 자아감을 맛보기 위해 ‘외부의 적’을 아주 필요로 한다. 한데, ‘만일, 그들이 싫어하고 혐오하는 대상이 어찌어찌하여 사라진다면, 그들은 뭘 할까?’ 하는 의문을 품어봄 직하다. 곰곰이 생각하다 보면, 그들 대열의 결속은 <누군가와 맞서서 우리끼리 의리 지키기>라는 원칙에 입각하고 있음이 명백해진다. 그런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통치자들은 이 원칙을 꽤 성공적으로 이용하여, 시민과 유권자들의 관심을 더 화급한 현안에서 떼어놓곤 했다. 

 

중세 서구에서는 전염병이 창궐할 때 이단자나 (마녀라 이름 붙인) 아름다운 여성들을 ‘(우리와 다른) 외부의 적’으로 공표하곤 했다. “갈라놓고 통치하라”는 원칙은 문명화됐다는 오늘날에도 세계 각국의 정치에 심심찮게 등장한다. 이런 행위는 종교에도 전형적이니, (우리) 종파 바깥의 사람들을 다 일반화해서 (싸잡아서) 뚜렷한 원인 설명도 없이 ‘저들은 잘못되고, 바르지 못하고, 알아먹지 못하는 이단자’들로 치부할 때 그렇다. 

자기네를 <외부의 적>과 확실하게 구별하는 집단은 전부 “우리와 함께하지 않는 자는 다 우리에 맞서는 자”라는 이분법적 접근을 고수한다는 점이 특징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그래, 우린 신념이나 믿음이 같지 않아, 그래도 난 그 사람의 이런저런 점은 존중해”라는 접근은 불가능해지며, 그는 한 가지에서 나와 생각이 달라, 그러니 다른 것도 다 좋을 수 없어”와 같은 생각이 퍼지게 된다. 

 

사실, 포용력이 부족한 건 자신을 보호하려는 필요에서 나온다고 볼 수 있다. 그 사람에 관해 그에게 불편한 정보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적대적 집단이 어떤 우월성으로 자극할 때), 혹은 주변 세상에 관해 그에게 썩 편치 않은 정보에서 보호하고, 또 예를 들어, 노인이나 병자, 노숙자, 장애인 등을 두고 ‘나도 저런 모습이 될까 봐’ 두려움으로부터 보호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저 사람은 제가 잘못해서 저렇게 된 거야, 나한테는 저런 일이 생기지 않을 거야” 하는 확신 뒤에 숨으려 든다. 

 

포용한다는 것은, 서로 다르다는 점을 인정한다는 뜻.

 

* 당신 자신이 사회 통념에서 좀 떨어져 있고, 그로 인해 ‘(다수인 우리와) 다르다’는 이유로 주변에서 괴롭힘을 가하는 상황에서는, 뭘 어떻게 해야 하나? 

 

- 비인격화를 (혹은, 몰개성화를) 무너뜨려야 한다. 만약, 직장에서 당신이 대다수와 뭔가 좀 다르다 하여 괴롭힘을 당한다면, 구성원 각자와 개별적으로 접촉해 볼 수 있다. 그들이 당신한테서 사람을 보게끔. 그들의 불안을 줄이기 위해. 당신의 소신이 그들의 소신을 위협하지 않음을 보이기 위해. 

 

당신이 채식주의자이거나 독신주의자라 해서, 고기를 먹거나 결혼한 사람들을 증오한다는 뜻은 아니잖아. 난 어떤 걸 하지 않지만, 당신한테도 그렇게 하라고 강요하지는 않아”라는 입장이 적합할 것이다. 

그런 면을 보이려면, 당신의 포용이 필요하다. 아주 노골적으로 공격하는 경우에는, 대항할 수 있음을 보여야 한다. 뾰족한 해결책이 없다면, 짐을 싸라. 그리고 당신을 이해하는 사람들을 찾아 나선다. 

 

당신이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 하여 집단에서 노골적으로 공격하는 상황에선 어떡하나. 예를 들어, 당신이 childfree를 고수하는데 직장에는 전형적인 ‘엄마들’만 있어서 당신을 ‘여자답지 못하다’고 몰아세울 수 있다. 어떻게 처신해야 하지? 

동어반복이 되겠지만, 이런 태도가 온당할 것. 

“당신에겐 멋진 자녀들이 있고, 난 엄마가 되기로 한 당신 선택을 존중해요. 하지만 엄마가 되지 않기로 한 내 결정도 역시 존중한답니다.” 진심으로 말한다면, 통한다. 

한데, 만약 속으로는 아이를 둔 그 엄마들이 다 어미돼지 같다고 생각하면서 그렇게 말한다면, 당연히 안 먹히겠지. 진정성이 중요하다. 자신이 먼저 시작해야 한다. 

 

* 다른 이들이 당신을 공격하진 않는 대신 아예 무시하는 경우엔 어떡하나? 어떻게 처신하면 좋지? 

 

-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무시가 노골적인 공격보다 더 견디기 힘들다. 이건 공격과 마찬가지인데 다만 위장된 것일 뿐이고, 그래서 두 배로 긴장하게 만든다. 즉, 언제 어떻게 터질지 모르니까. 

그 상황을 눈에 띄는 것으로 만들고, (건강과 생명에 위협되지 않는다면) 차라리 드러난 공격으로 바꾸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이렇게 묻는다. “내가 사무실에 들어서자 당신(들)은 얘기를 멈추고 보란 듯이 등을 돌리는군요. 내가 뭘 잘못했나요?” 

 

 

* 당신이 (예를 들어 채식주의자라는) 자기 관점을 말할 때, 듣고 나서 그런 짓은 그만두라면서 ‘올바른 길’을 알려줄 테니 그렇게 살지 말라고 어떻게든 당신을 저지하려는 사람들도 왕왕 있다. 그런 귀찮은 성화를 피하려면, 어떻게 반응하고 처신해야 하나? 

 

– 이럴 때 대개 상대방은 당신을 염려하기 때문이라는 인상을 풍긴다. 실제로는 주제넘게 나서는 것이지만. 이렇게 하면 될 것이다. 

상대가 당신과 썩 상관없고 개인적으로 대수롭지 않은 사람일 때는, 딱 부러지게 선을 긋는다. “고맙지만, 그 얘기는 하고 싶지 않군요.” 

당신에게 중요한 사람이라면, 

1) 그게 왜 안 된다고 느끼는지 이유를 관심 있게 경청하고 

2) 상대의 관점이 세상에 존재하는 여럿 가운데 하나임을 인정하고 

3) 그의 생각을 존중하지만, 그래도 당신 소신은 다르다고 표명한다. 진정성이 담겨 있다면, 상대도 알아들을 것이다. 

 

* 많은 사람이 왜 자기네와 같은 ‘꽈’가 아니라고 여기는 사람들에게 관용을 베풀지 않을 뿐 아니라 그런 비관용 태도를 당당하게 여기기까지 하나? 왜 갖은 방법으로 이를 강조하고 부각시키나? 

 

– 왜냐하면, 그들 딴에 ‘옳다고’ 보는 어떤 다수의 일원이 되는 걸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 다수가 없으면 미미한 존재로 남을지도 모를 자신의 중요성을 키워 준다고 느끼니까. 즉, 이것 역시 불안감과 자기 회의, 신념 상실에서 비롯된다. 그런 상태에서, 옳다고 여기는 (커다란) 집단의 구성원임을 여봐란듯이 과시하다 보면, 제 눈에는 자신이 더 높아지고 여타 ‘시시껄렁한 자들’에 비해 슈퍼맨이라도 된다고 여길 수 있다. 

그렇다면, 그들에겐 이런 착각이 왜 필요한가? 왜냐하면, 그 ‘시시껄렁하다고 여기고 싶은 자들’의 우월성에 그들 자신이 은근히 신경 쓰이기 때문이다. ‘저들이 더 똑똑하고 더 부유하고 더 행복할 수 있거나 그렇게 보인단 말이야.’ 

 

이런 메커니즘은 위험하다. 하지만, 인류 역사에서 여러 번 가동됐다. 파시스트 독일에서 소수 민족과 성 소수자들을 상대로 그렇게 했다. 소비에트 연방에서 반체제 인사들을 그렇게 대했다. 우리 한국에서도 ‘수구 꼴통’이라 불리는 집단과 ‘위선적 진보’라 불리는 집단이 서로를 그렇게 대하고 있다. 앞의 두 가지 사례와 양상이 조금 다를지는 모르나, ‘우리 편 아니면 적’이라는 편협함에서는 대동소이하다. ‘맹목적으로 자기편 감싸기’ 역시 마찬가지이다. 자기네 진영과 패거리만의 이익을 위해서 말이다. 포용이나 공존은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사실, ‘무늬만 민주주의’가 아니라 ‘진정한 민주주의’가 꽃 피우려면, ‘흰 까마귀’가 지금보다 더 늘어나서 눈치 보지 않고 주눅 들지 않고 훨훨 날아다닐 수 있어야 한다. 물론, 나와 생각 다른 사람도 미워하지 않을 수 있고, 나보다 약한 사람을 동정할 줄 알고, 못된 것에 공분하며,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애쓰는 ‘흰 까마귀’들이.) 

언젠가 처칠은 영국의 반유대주의에 대한 질문을 받고 이렇게 응답했다. 
“영국인들은 반유대주의자가 아니다, 왜냐면 우리가 유대인보다 열등하다고 여기지 않으니까.” 

처칠의 이 언급 하나가 지금까지 우리 이야기의 지향점을 100% 대변한다. (아래, 주석 참고)

 

하지만...

만약, 괴롭힘이 신체 안전을 실제로 위협하는 정도에 이르렀다면, 공격자에게 “난 당신한테 위험하고 방해되는 사람이 아님”을 증명하려는 시도를 다 접어야 한다. 이때는 자신과 자신의 건강과 생명을 지켜야 한다. 

혹시, 오호라, 우리 사회 각계각층이 이 정도의 갈라치기까지 치달은 건 아닌가. 
만에 하나 그렇다면? 우리는 좀 더 담대해질 필요가 있겠다. 
담대해지려면?.. 
당신의 생각을 적어 주시라! 담대하게!

 

* 주석: 앞에 처칠의 언급이라고 소개한 생각에 대해 이견도 있다. 즉, 그런 말은 처칠 시대 이전부터 나돌긴 했는데, 거짓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영국은 반유대주의의 선두로서 12세기에 유대인들을 내쫓은 최초의 국가이며, 14세기에 경제 상황으로 인해 그들을 다시 받아들였다는 주장이 있다. 이 부분을, 그 진위를, 나는 아직 확인해보지 않았다. 

(알림)  Voice Training에 관심 있는 분들은 여기를 참조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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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 강렬한 인상  

 

 

절굿공이 아래서 짓이겨지는 쌀은 얼마나 고통스러운가! 

그러나 수없이 두들김을 당한 다음에는 

목화처럼 하얗게 쏟아진다. 

이 세상 인간사도 때로는 이와 같아서 

역경이 사람을 빛나는 옥으로 바꾸어 놓는다. 

호 치 민 (베트남 독립과 민족주의 운동 지도자)

 

호치민

 

강렬한 오프닝으로 스피치를 출발하여 자신 있게 본론으로 순항했는데, 결말에 이르러서 연료가 떨어졌어요. 

당신은 발언을 끝냈지만, 청중은 아직 듣기를 끝내지 않았어요. 

청중은 여전히 당신을 응시하고 있고, 당신도 그들을 바라봅니다. 

일순간 고요가 찾아들어요. 

 

열렬한 박수갈채를 기대하던 당신은 당혹감을 곱씹다가 얼떨결에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무의미한 말로 휘갑을 치지요. 

비로소 객석에서 자비를 베풀듯이 박수가 나오고, 그때서야 당신은 당혹감을 떨치고 자신의 소명을 다했다고 안도합니다. 

 

여러 사람 앞에서 갖가지 형태의 발언을 하게 될 때, 심심찮게 겪는 현상이에

이런 일은 왜 생기는 걸까요?

눈을 그려 넣지 않았거나, 신통치 않게 넣었기 때문이에요! 화룡점정(畵龍點睛)!!

우리 대화 맨 앞에서 청자들을 사로잡는 오프닝 방법과 유형을 알아본 것처럼, 이제 스피치를 인상 깊게 마무리하는 방법도 생각할 시간이 됐습니다. 

 

스피치 마무리는 당신이 던진 행동 촉구(call to action)를 청중이 연호하면서 뜨겁게 기립 박수를 보내게 하거나 적어도 청자들의 심금을 점잖게 울릴 마지막 호기입니다. 

그런 기회를 지극히 상투적이거나 영양가 없는 말로 맺어서는 절대 안 될 일! 

 

노련한 스피커들의 스피치는 ‘Thank you’라는 두 단어로 끝나는 법이 거의 없어요

윌리엄 사파이어(1929-2009)가 명연설을 모아 엮은 <역사상 위대한 스피치 (Lend Me Your Ears: Great Speeches in History)>에 소개된 217편 가운데 ‘감사합니다!’로 끝을 맺은 스피치는 일곱 편에 불과합니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스피치를 그런 평범한 말로 끝내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먼저 새겨두기 바랍니다. (청중이 당신에게 감사를 표해야지요.) 그런 맺음말은 그렇지 않다면 훌륭했을 스피치마저 죽이게 됩니다. 

 

피해야 할 표현을 더 들어 볼까요.

 

“이 자리에 선 것이 정말 큰 영광(기쁨)이었습니다.” (어수룩하게 들려요.)

“오늘 발언을 잘 준비하지 못해 미안합니다.” (잘 준비해야 마땅하지만, 혹여 그렇지 못했다 해도 이런 결어는 아무런 득이 되지 못해요.)

 

또 스피치를 마치고 청중에게 질문을 구걸하면 안 되어요. (소개자가 그걸 하고, 대답을 듣기 위해 연단으로 당신을 다시 부르게 하세요.)

 

그렇게 하는 대신 마지막 불꽃을 태우는 겁니다!  

결론에 뒤따르는 맺음말은 스피치에서 마지막 언급입니다. 

이건 물론 오프닝이며 토픽과 연관되는 것이어야 해요. 보통 세 문장 이내의 간결한 표현으로써, 스피치 목표를 강조하고 청중의 기억에 뭔가를 남기는 것이 맺음말의 역할입니다. 클라이맥스이자 결정타가 되어야 하는 거지요. 

그렇기 때문에 밋밋한 어조로 말하는 “감사합니다”는 그리 적절한 마감이 되기 어려운 겁니다.  

 

듣는 이들에게 소름이 돋거나 머리끝이 쭈뼛 서고 혈관이 터질 만큼 강력하고 높은 어조로 장식해야 합니다. 오페라가수가 역을 끝내도 가슴 깊이 노래 여운이 남고, 코미디언이 무대를 떠난 뒤에도 계속 웃음이 이어지듯이, 스피커가 단상을 내려간 뒤에도 청자들이 뭔가 생각에 깊이 잠겨 있게끔 만들어야 하지요. 

그것이 맺음말의 기능이고 효과입니다. 

청중의 뇌리에 남는 것은 대개 마지막 단어들이에요. 마지막 말로써 당신 생각을 크리스털처럼 요약하고 메시지에 전류를 넣고 청중이 움직이게 하는 겁니다. 

 

사파이어의 <명연설 모음집>에서 세 편을 골라, 스피치를 어떻게 마무리 지었는지 살펴보지요. 그 자체로 흥미로울 뿐 아니라, 당신의 창의력을 꿈틀거리게 만들고 강렬한 인상으로 발언을 끝내는 방법을 배울 수 있을 겁니다.

 


 

아메리카 혁명 직전 식민지 이주자들에게는 전쟁이 첨예한 문제로 대두됐어요. 미국의 정치가요 독립운동가 패트릭 헨리(1736-1799)는 1775년 3월 버지니아 주 하원 연단에 올라 미합중국의 독립을 주창하는 명연설을 역사에 남겼습니다. 

특히 결어로 삼은 마지막 서너 문장은 이백여 년을 넘기면서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어요. 스피치의 제목이 되기도 했고요. 바로 이 대목입니다. 

 

쇠사슬에 묶이고 노예 상태로 허덕이면서도 살아야 할 정도로 삶이 소중합니까? 

아니면 그런 평화가 그렇게 달콤합니까? 오, 신이여, 이걸 부디 막아 주소서! 

다른 이들이 어떤 길을 택할지 나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나로서는 이렇게 외칩니다. 

자유를 달라! 아니면 죽음을 달라!!

 

그리고 패트릭 헨리는 연단을 떠납니다. 

그 다음에 어떤 장면이 이어졌을지는… 당신께서 상상해 보십시오. 

 

두 번째 사례로 넘어갑니다. 

 

이 나라와 전 세계의 생산 대중을 등에 업고, 또 도처에서 상업계와 노동계 이해 당사자들과 임금근로자들의 지지에 힘입어, 우리는 금본위제를 요구하는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당신들은 노동의 이마에 가시관을 억지로 씌워서는 안 될 것이오! 

당신들은 인류를 금 십자가에 올려놓고 책형하려 들어서는 안 될 것이오!!

 

멋진 비유를 담은 맺음말에 기립하여 박수 치지 않을 이들이 어디 있겠어요? 

1896년 미국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윌리엄 브라이언(1860-1925)은 이 연설로 대통령 후보 자리를 따냈습니다. 이 연설은 이후 <금 십자가>라는 제목으로 불리게 됐어요. 

민중 민주주의 지지자요 은본위제 운동의 리더였던 그는 미국 민주당의 진보 진영을 이끌었고, 이후에도 대통령 후보에 두 번 더 지명됐으며, 윌슨 대통령 시절에는 국무장관을 지내기도 했어요. 흥미로운 점은, 전국을 수도 없이 돌아다니면서 묵직한 중저음의 당당한 목소리를 토해 냈던, 당대 가장 저명한 연설가요 강연자이기도 했다는 사실이네요. 

 

영화 <King’s speech>를 보셨겠지요? 

말더듬 콤플렉스를 극복하려는 왕의 고뇌와 몸부림에 잔잔하지만 오랫동안 남는 감동을 추스르기 힘들었어요. 콜린 퍼스의 연기도 참 잘 어울렸고. 

국왕의 권위는 어디에 있나? 세금 부과? 전쟁 선포? 

아니, 국민을 대변하는 능력이야. 그런데 난 말을 못하니…

히틀러의 침공에 맞서 전쟁을 선포하며 군대와 국민에게 하나 되어 싸우자고 호소하는 라디오 연설을 눈앞에 두게 됐지요. 스튜디오로 향하는 왕을 배웅하며 처칠이 너스레를 떱니다. “저도 마이크를 겁냅니다. 혀가 굳어서 발음도 꼬이지요.” 

 

그러나 이건 말하기 공포에 시달리는 왕을 위로하기 위한 마음씀씀이였을 뿐. 실제로 그는 우리가 알다시피 대단한 연설가였습니다. 

조지 6세 국왕의 저 라디오 연설 이후 몇 달 뒤인 1940년 6월 전쟁 중에 처칠은 영국 국민에게 항전 의지를 끝까지 불사르자고 촉구합니다. 그 스피치를 이렇게 마무리 지었어요.

 

그런 고로 우리의 책무를 한층 더 인식하고 이 난국을 견뎌냅시다. 

만일 영국 연방과 제국이 수천 년 지속된다면 사람들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게 하는 겁니다. 

그때가 우리의 태평성대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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