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자각 상태는 우리가 자신을 마인드며 생각의 흐름과 동일시할 때 생깁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생각하는 과정에는 생각만 들어가는 게 아니에요. 여기엔 또 늘 불안에 시달리는 에고가 만들어 내는 욕망과 감정과 신체 반응도 들어갑니다.
무자각이란 본질적으로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이건 현재 순간에 대한 저항이다. 이건 있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려 함이다. 이건 삶과 자기 자신에게서 달아나는 것이다.
자신이 그렇게 한다는 것을 대다수 사람들은 알아차리지도 못합니다. 단적으로, “내가 왜 그렇게 말했는지 나도 모르겠어” 하는 경우가 그렇습니다. 또 “하지만 난 아무 것도 회피하지 않고 그 무엇에도 맞서지 않아” 하고 말은 하지만, 자기 자신과 자신의 반응을 잘 살펴본다면 실제로 우리 안에서는 현실과 투쟁이 늘 벌어지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이런 예를 들어 볼까요. 버스에서 불편하게 앉아 장시간 가야 하는 경우에 우리는 뭔가 불쾌감을 느껴요. 한데, 그걸 느끼고 싶어 하지 않으면서 그냥 꾹 참고 시계 들여다보며 ‘이 상태가 곧 끝나겠지’ 하는 생각만 해요.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느끼는 것을 느끼고 싶어 하지 않아요.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아요.
그 상황이 얼른 지나가고 다른 뭔가로 대체되기를 바랍니다.
얼핏 보기에는, 불편하거나 불쾌한 상황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게 얼른 끝나기를 바라는 것이 당연한 듯싶기도 해요. 우리네 마인드가 ‘그렇게 느끼지 마, 그냥 털어 버려, 받아들이지 마!’ 하고 말하는 것 같아요. 있는 것을 느끼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 이건 곧 자각하지 못하거나 않는다는 뜻이거든요.
마인드는 그렇게 우리를 호립니다. ‘뭔가를 받아들이지 않는 게 자연스러운 거야’ 하고 속삭이면서 말이죠. 하지만 그건 사실 자연스러운 게 전혀 아니에요. 우리는 모든 것을 다 겪고 그 무엇도 회피하지 않으면서 다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세상에 나왔습니다.
세상엔 편안한 것뿐 아니라 불편한 것도 있어요. 불편하고 불쾌하다 해서 피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들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지만 ‘지금 여기 있는 것’을 인식하고 수용하지 않는다면, 올바른 해결책을 찾을 수 없고 출구를 못 보지 않겠어요?
사람들이 같은 문제를 두고 몇 해씩 고민하면서도 해결하지 못한다면… 이건 그들이 자신의 문제에 눈을 감고 문제를 직시하려 하지 않는다는 확실한 반증이다.
가장 흥미로운 점은… 불편한 무엇조차 객관적인 사실로 주어져서 어차피 겪어야 할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그 불편이 스르르 사라지며, ‘아하, 그래, 삶의 매 순간을 정말 즐길 수 있다’는 점을 알게 되는 겁니다.
우리가 <존재>의 수준에 이르게 되면, 거기엔 오로지 기쁨과 즐거움만 있으며, ‘이건 나쁜 순간이야, 좋은 순간이야. 이건 편하고 저건 불편해’ 하는 판단이 없어집니다.
불편한 상황을 있는 그대로, 피할 수 없는 현재 순간으로 받아들이다 보면, 예전엔 알아차리지 못하던 것을 분명 알아차리게 될 거예요. 예를 들어, 1) 앞에 탄 버스에서 불편한 상황에서도 다른 이들을 둘러보며 그들 감정과 기분을 느끼면서 어떤 흥미로운 점을 알게 되겠지요. 2) 혹은 차창 너머 스쳐가는 풍경에 흥미를 느끼거나, 그 상황에서 즐길만한 것을 분명히 찾아낼 겁니다. 3) 물론 무엇보다 더 큰 즐거움은 ‘아, 내가 이렇게 살아 있어 버스를 타고 갈 수 있구나’ 하고 느끼는 것 등이겠습니다.
바로 이렇게 <지금> 순간을 선명하고 충만하게 느낍니다. 우리는 마인드가 강제하는 불편한 상황이나 반응이나 감정의 노예가 더 이상 되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사실상 파괴적인 마인드의 작동 이면에서 다른 뭔가를 보고 느낄 겁니다.
실습 12
뭔가 불편하거나 걱정되고 불안하게 느껴질 때, 그런 반응을 바깥에서 하듯이 관찰해 보세요. 집중이 잘 안 된다면, 이렇게 자문하십시오.
‘내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지금 난 어떻게 느끼고 있지?’
‘무엇 때문에 침착하지 못한 건가?’
두 가지 실재가 (현실이) 있음을 알아둬야겠습니다.
하나는 외적인 것으로서 주변 세상의 실재, 다른 하나는 내적인 것으로서 우리 생각과 감정의 실재… 그리고 외부 세계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결정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내적 실재입니다.
이 외부세계를 우리는 객관적으로 볼 수 있어요. 조화롭고 기쁨 넘치고 평온이 가득한 <존재>의 실제로 말이지요.
이 외부세계를 우리는 왜곡되게 볼 수도 있어요. 우리의 내적 불안과 불만과 불쾌함이 투영된 것으로 말입니다.
뭔가 불편하거나 불쾌한 게 있다면, 그걸 유발하는 것이 무엇인지 내 안에서 찾아보십시오.
한데, 그런 것은 우리가 현실을 인정하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을 때만 생깁니다.
당신의 경우, 받아들이지 않는 게 정확히 무엇인가요?
자신에게 말하세요.
“이건 그냥 있는 거야. 난 이걸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그렇게 받아들이면 불편함이나 불쾌감이 사라지고, 그게 어떤 것이든 매 순간을 즐거워하게 됩니다.
사람이 무엇에 대해 보이는 반응이 느낌이요, 그 느낌이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감정이다. 사람을 방해하는 것은 느낌이 아니라 감정이다. 물론, 부정적인 감정!
부정적인 감정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일반적인 것이 노여움일 것. 억울한 마음을 삭이지 못해서 생기는 병이라 풀이되는 <화병>에 걸려선 안 되겠다. 화난 감정을 해소할 수 있어야 한다. 몸에 쌓여서 건강을 해치지 않게끔. 그것도 이왕이면 건설적인 방법으로 풀어줄 필요가 있다.
1) 감정은 우리네 몸에 살며 몸을 통해서만 드러난다. 머리로 분석해 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
2) 이 방법들은 다 속에 쌓인 (부정적) 기운을 분출하는 것. 효과가 있다. 하지만 삶에서 뭔가를 바꿀 필요가 있다면, 먼저 관계나 감정적인 유대를 돈독히 하는 게 좋다. 예를 들어, 엄마와 사이가 안 좋다 치자. 그렇다 하여, 엄마와 관계를 좋게 바꾸는 대신 베개 두드리면서 스팀만 발산한다면, 큰 의미가 없다. 치통에 시달릴 때 진통제로 우선 때우고는 치과에 가지 않는 것과 같다.
3) 복잡하게 얽힌 여러 감정 가운데 화가 아주 많다. 자책감이나 모욕감 같은 상태에서 벗어날 때도 주로 노여움이 이용된다. 따라서 화난 감정을 잘 다스리지 못하면, 우리는 더 멀리 나아갈 수 없다.
4) 우리가 원하는 대로 뭔가가 되지 않을 때 자연스레 나타는 순간적이고 일시적인 감정으로서 노여움과 성격으로 굳어진 노여움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간간이 화가 나는 느낌은 억누르지 않고 건강하게 해소한다면 정상적인 현상이다. 한데, 어디서나 모든 것을 제 마음대로 하기 원하고 그게 이뤄지지 않을 때 세상에 불만 품어 늘 화난 상태는 비정상이다. 그걸 통제할 줄 모르는 것도 비정상이야.
5) 화난 감정을 다스린다는 것이, 그걸 느끼지 않거나 억누른다는 뜻은 아니다. 자신에게 아무 것도 남기지 않고 남들을 힘들지 않게 하면서 노여운 기운을 해소하는 것이 올바른 컨트롤이다.
여기서는 다른 이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면서 부정적인 감정을 해소하는 <건설적인 방법>을 먼저 알아본다. (물론, 비생산적인 방법도 여럿 있어서, 많이들 쓰고 있다.)
1. 발 구르기
눈을 감는다. 몸에서 어떤 감정을 느끼면서, 발을 굴러 바닥으로 내보낸다. 물론 혼자 풀밭이나 모래밭에서 발 구르는 것이 가장 좋다. 하지만 그럴 형편이 안 되면, 집이나 사무실에서 눈을 감고 발을 구르라. 그게 어떻게 보일지 신경 쓰지 말고. 인도의 전통 춤에서 여자의 발 구르는 장면을 떠올리면 더 효과적이겠다.
2. 소리 지르기
숨을 깊이 들이쉰 뒤 입을 벌리고 가슴에 맺힌 것을 다 소리로 내 보낸다. 속이 후련하게 느껴질 때까지 몇 번 반복한다. 들판에서 소리 지르는 것이 가장 좋다. 그러나 집에서도 베개에 얼굴 파묻고 가능하다. 식구나 이웃을 괴롭게 하지 않는 것이 필요한데, 그들에게 방해될까 염려하는 마음이 있다면 효과가 떨어진다. 충분히 이완된 상태에서 하지 않으면, 자칫 목소리가 상할 수 있다.
3. 수다 떨기
여성적인 방법. 속에 있는 감정을 다 말로 끄집어낸다. 그러나 가정 문제를 아무한테나 털어놓아선 안 된다는 점을 염두에 두라. 안 그러면 더 악화될 수 있으니까. 여성이라면, 자기감정을 남편한테 다 쏟아내지 않도록 조심한다. 그가 견디기 힘들 테니까. 만약 여자 친구들에게 쏟아낸다면, 먼저 그들의 동의를 구하라. 그리고 좋은 감정과 얘기도 곁들여야 함을 잊지 말라. 안 그러면, 듣는 이들 입장에서는, 자기네가 마치 감정 배설하는 '해우소'가 된 느낌을 받을 수 있으니까.
4. 운동
부정적인 감정을 발산하는 아주 좋은 방법. 이때 우리는 몸을 움직이는데, 몸에 어떤 하중이 가해지는 동안 감정이 분출된다. 몸에 하중을 싣는 동안은 몸이 힘들지만, 그 다음에 하중을 걷어낸 뒤엔 몸뿐 아니라 마음과 기분도 얼마나 가뿐하고 개운해지는가.
5. 마사지
우리 몸에서 모든 막힘과 위축은 몸에 쌓인 감정 때문이다. 필요한 부위들을 잘 주물러 줌으로써 위축과 긴장이 제거되며, 감정을 잘 추스를 수 있다.
6. 베개 두드리기
화가 풀리지 않을 때, 누군가를, 뭔가를 치고 싶다는 충동이 들 때도 있다. 그 순간 베개를 마음껏 두드려 패라. 그러고 나서 그 베개를 잠잘 때 쓰지 않는 게 중요하다. 그냥 다음에도 감정 발산의 도구로 이용하라. 베개에 얼굴 파묻고 통곡을 해도 좋다.
7. 놀이동산
더 짜릿하고 무서운 탈것이나 장소를 골라서, 내키는 대로 소리 지른다. 거기서는 어떻게 소리 지르든 아무도 개의치 않는다.
8. 수작업
그림 그리기, 낙서하기, 실로 짜기, 여러 수작업 등을 통해 부정적인 감정을 내보낸다. 이 부정적인 에너지가 두 손을 통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면서 어떤 미움이나 분한의 잔재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9. 노래하기
노래를 통해 가슴에 맺힌 고통과 분노를 발산할 수 있다. 음치 소리를 듣는다 해도 상관없다. 그냥 노래하라. 목소리가 아니라 마음으로! 누구 듣기 좋게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부정적인 감정이 나가도록 노래한다.
10. 울음 울기
아주 여성적인 방법이지만, 그 효과를 우리가 종종 과소평가한다. 우리 눈물은 뜨겁다. 눈물이 감정으로 들끓기에 그렇다. 동시에 눈물과 함께 많은 감정이 밖으로 나온다는 뜻. 특히 화가 마구 나는데 금방 자리에 앉아 울 수 없다면, 그 감정을 촉진하여 눈물로 바꾸라.
11. 노여움/불만의 편지 쓰기
자기감정과 심적 체험을 나오는 대로 종이에 마구 쏟아낸다. 그런 뒤 불태운다.
12. 잡동사니 내다버리기/정리하기
쓰레기통, 다락방, 창고가 그래서 필요하다. 어떤 경우에든 주변 환경을 정돈하면, 마음도 개운해지고 숨 쉬기도 더 편해진다. 감정에도 잡동사니나 폐기물이 있다. 그것을 내보내고 풀어주는 것은 불필요한 물건들 정리하기보다 더 쉽다. 선반이며 책장을 정리하면서 동시에 머릿속도 정돈한다.
13. 묵상/명상
명상 방법은 아주 많다. 예를 들어 여름철에 좋은 버전. 땅바닥에 앉아 눈을 감고, 엉덩이에서 땅으로 길고 굳센 뿌리들이 내린다고 상상하라. 땅바닥과 연결됐다고 느낀 뒤, 신체 여러 부위에 누적된 부정적 감정들이 이 뿌리들을 통해 땅속 깊이 사라진다고 상상하라. 머리에서, 가슴에서, 위축되고 긴장한 부위에서 감정을 모아 내보낸다.
<부정적인 감정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알고 실행하는 것이 실생활에서 심신 건강에 아주 중요하겠다.
하지만, 그 이전에 부정적인 감정에는 어떤 것들이 있으며, 그건 어디서 비롯되는 것인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더 그 이전에 <감정이란 무엇인가> 살펴보는 것도 좋겠다.)
1) 화 (노여움, Anger)
많은 사람들 경우,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면, 자신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속에서 화가 나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그러면서 상대를 압박하고 얽매이게 만드는 효과도 생긴다. 달리 말해, 화를 냄으로써 상황을 컨트롤하려 드는 것. 언쟁에서 유리한 입장을 취하고, 자신의 실수를 남에게 전가하는 데 이용한다. (“방귀 뀐 놈이 성낸다.”)
또 화나 노여움을 통해 자기권리를 지키려 들기도 한다. 화를 냄으로써 상대로 하여금 자신이 한 발 물러서야 함을 알게 하는 것.
자신에게 내는 화는 자신이 뭔가를 하게끔 내몰며, 두려워하는 일에 착수하게 하는 방법일 수 있다. 행동을 시작하기 위한 방아쇠가 되기도 한다. (예, ‘난 왜 이렇게 뚱뚱하지?’ 하고 자신에게 화를 내면서 다이어트를 시작한다). 혹은 자신의 실수나 실패를 두고 자신을 징벌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2) 슬픔 (비애, Sadness)
이건 자신과 자신의 성취에 불만을 드러내는 방법. 욕구가 억압되는 바람에 생기는 괴롭고 답답한 감정. 또한 다른 사람들이나 상황에 자신의 실망을 투영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연민과 동정을 드러내는 모양일 수도 있다. 누군가에게 사고가 벌어졌음을 동정하면서, 슬픔으로 자신의 태도와 반응을 표현한다.
3) 짜증 (염증/厭症, Irritation)
이건 노여움의 약한 형태. 누군가의 행동이 탐탁하지 않아 자꾸 자극하고 신경 건드릴 때 나타난다. 욕구 불만을 표출하는 수단이며, 사람을 성가시게 하는 뭔가를 멈추게 할 수 있다. 또한, 사람이 침체 상태에서 벗어나 행동하게끔 동기를 제공한다.
모든 경우에 짜증 이면에는 상황을 통제하고 지배하려는 갈망이 숨어 있다. 즉, 우리는 우리가 원하고 말한 대로 일이 되지 않을 때 짜증을 낸다.
4) 죄책감 (자책감, guilt)
이건 자신을 징벌하는 형태의 감정. 때론 자기가 저지른 오류의 책임을 회피하는 데 유용하게 쓰이기도 한다. 즉, 죄책감을 느끼고, 후회하면서, 그것으로 끝이다. 더 이상 아무 것도 할 필요가 없다. 죄책감이 남들보다 우월함을 드러내는 형식인 경우가 더러 있다. ‘나는 자신의 잘못된 행동에 이렇게 괴로워할 정도로 아주 발달된 사람이야.’
죄책감은 상당히 해로운 감정으로서, 자신의 뭔가를 바꿔야 한다는 신호이다. 그런 느낌이 어디서 비롯됐는지 분석할 필요가 있다. 즉, 뚜렷한 원인이 없는데도 주변이나 사회에서 주입한 것에 따라 그런 느낌을 받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 뭔가 흉측한 일을 저질렀는지 살펴봐야 한다. 즉, 행위의 원인을 분석하고, 자신을 진정 용서하고, 그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격려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서, 행위의 후과로 불거진 손실을 보상하거나 상처받은 사람한테 용서를 빈다면, 더 좋겠다.
5) 실망 (낙담, Disappointment)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상황에서 불만을 표출하기 위해 설계된 감정.
6) 두려움, 불안 (Fear, anxiety)
이 감정은 자기보호 본능과 연관된다. 위험한 상황을 예방하여 사람을 지키는 것이 이 감정의 과제. 사람은 예기치 않게 일어나는 불상사와 장애, 붕괴, 파멸의 장면을 두려움을 통해 마음속에서 그린다.
그러나 이런 감정의 과제는 사람을 방해하는 게 아니라 돕는 것. 즉, 위험을 예고하고 실제 상황을 보게 하고, 어디에 함정이 도사리고 있을 수 있는지 가리킴으로써 사람이 어려움에 대비하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무시하고 돌진하는 것은 현명한 처사가 못 된다. 불안은 무슨 일이 일어나기 전에 나타나는 느낌일 수 있다.
이런 감정들이 왜 생기는지, 그 씨앗을 합리적으로 찾을 필요가 있다. 그럴 때, 이 감정의 양극성이 바뀌며, 그 결과 사람에게 에너지를 채워 움직이게 자극한다.
뭔가 이루려는 여러 번의 시도와 노력이 바라는 결과를 안기지 못했을 때 나타나는 감정. 절망은 깊은 실망으로서, 향후 어떤 시도를 체념하고 포기하게 만든다.
8) 냉담 (무관심, Apathy)
이건 뭔가에 맞선 저항이나 거역이 섬세하고 순하게 드러난 형태. 대개, 공공연히 저항할 힘이나 가능성이 없는 사람들이 드러낸다. 자신의 힘과 불만의 소극적인 표출.
참조:
9) 우울감 (슬럼프, Depression)
이런 감정 역시 어떤 상황에서 주도권을 쥐려는 형태이다. 일이나 사람한테서 멀어지고, 정상적인 생활 흐름에서 벗어난다. ‘비 맞은 장닭 같은’ 사람한테서 주변 사람들이 얻을 것은 하나 없으며, 우울해하는 사람을 두고 주변에서 안타깝게 여기며 죄책감마저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을 조종하는 도구로 제법 많이 이용된다.
우울이 분노의 소극적 표현인 경우도 더러 있다.
10) 단념 (체념, discouragement)
이건 사람이 활동을 멈추고 휴식을 취해야 한다는 뜻. 혹은, 뭔가를 거부하고픈 내적인 욕구가 강하다는 뜻. 어쩌면, 그저 피로가 쌓인 상태일지도 모른다.
적절한 단어를 찾을 수 없다면, 무엇을 느끼는지 표현하기 힘들지 않겠는가? 인터넷 검색으로 <느낌 차트>를 찾아 살펴보면서, 감정 범위를 이해하고 느낌을 묘사하는 단어들을 충분히 익히라.
** 느낌을 가장 잘 설명하는 단어들을 익히도록 한다. 예를 들면, 흔히 쓰는 ‘좋은’ 대신에, ‘기쁜/즐거운’, ‘행복한/상서로운’, ‘고마운/감사하는’, ‘우쭐대는/의기양양한/득의만만한’ 같은 단어를 이용한다. 마찬가지로, 그저 ‘나쁜’ 느낌이라고 말하는 대신에 ‘화난/짜증나는/초조한’, ‘불확실한/미심쩍은/모호한’, ‘거부된’, ‘낙담한’ 느낌을 받는다고 구체적으로 표현하라. (*어휘력 강화 방법)
4. ‘난 왜 이렇게 느끼는 거지?’ 하고 자문한다.
느낌의 뿌리에 이르기 위해 ‘왜’라고 잇달아 자문하라.
예를 들어, “난 울고 싶은 느낌이야. 왜 그렇지? 왜냐하면 부장한테 화가 많이 나니까.
그건 또 왜? 왜냐면 그가 나를 불쾌하게 만들었으니까.
그건 또 왜? 왜냐면 나를 존중하지 않으니까.”
느낌의 밑바닥에 이를 때까지 ‘왜’라는 질문을 계속 던지라.
5. 복합적인 느낌과 감정을 해부한다.
우리는 동시에 여러 감정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이 감정들을 하나씩 풀어 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각각에 대처할 수 있으니까.
예를 들어, 오랜 기간 병으로 고생하다가 세상을 뜬 친척이 있다면, 그 죽음에 슬퍼할 것이다. 하지만 그가 더 이상 고통 받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안도감이 들 수도 있다.
* 복합적인 감정은 1차 감정과 2차 감정을 함께 느끼기 때문에 생긴다.1차 감정은 어떤 상황에 대해 처음 내보이는 반응이요, 2차 감정은 1차 감정에 뒤따라 나오는 직-간접적인 감정이다. 예를 들어, 만약 사귀던 사람한테 차임을 당했다면, 처음에 괴로운 느낌에 휩싸일 수 있다. 그러다가 ‘내가 사랑 받을 가치가 없나’ 하는 느낌도 들게 된다.
1차 감정과 2차 감정을 해부하고 판독할 필요가 있다. 심리의 흐름을 더 확실히 그려 볼 수 있다.
내가 여기서 사용하는 마인드라는 단어에는 단순히 생각만 들어가는 게 아니다. 여기엔 모든 무의식적인 정신적 감정적 반응 패턴뿐 아니라 감정도 들어간다. 감정은 마인드와 몸이 만나는 곳에서 생긴다. 감정은 마인드에 대한 신체의 반응이야. 혹은 달리 말하자면, 마인드 상태가 몸에 반영된 것이야.
예를 들어, 공격이나 적대적인 생각을 하면 우리가 분노라 부르는 에너지가 몸에 축적된다. 몸은 싸울 준비에 돌입한다. 신체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위협받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몸이 움츠러들게 되는데, 이것이 우리가 두려움이라 부르는 것의 물리적인 측면이다.
연구 결과를 보면, 강한 감정은 몸에서 생화학적 변화마저 일으킨다.
이런 생화학적 변화는 감정의 물리적 측면이나 물질적 측면을 나타낸다.
물론 우리는 흔히 자신의 생각 패턴을 다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의 감정을 관찰함으로써만 여러 감정을 인식할 수 있다.
호불호나 판단, 해석 같은 자신의 생각과 더 많이 동일시될수록… 달리 말해, 지켜보는 의식으로서 덜 현존할수록… 감정 에너지는 우리가 알게 모르게 더 강해질 것이다. 만약 자기감정을 느낄 수 없고 거기서 단절돼 있다면, 결국엔 순전히 신체적인 문제나 증세로 그 감정을 체감하게 될 것이다. 근년에 이에 관한 글들이 아주 많이 나온 만큼, 여기서 더 깊이 다룰 필요는 없겠다.
강한 무자각적 감정 패턴은 우발적인 듯 보이는 사건 형태로 나타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내가 직접 관찰한 것인데, 속에 분노를 갖고 있으면서 그걸 인식하지 못하고 겉으로 드러내지도 않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을 자극하여 뚜렷한 이유도 없이 언어폭력이나 물리적 공격을 받을 가능성이 더 높다. 그에게서 적대감과 분노가 저절로 강하게 발산되며, 이걸 다른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포착하고, 이것이 그들의 잠재된 적대감을 촉발하기 때문이다.
만약 자신의 여러 감정을 느끼기 어렵다면… 먼저 자기 몸의 내면 에너지장에 주의를 집중하하라. 몸을 내면에서부터 느끼라. 그러면 자신의 여러 감정과 접촉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부분은 나중에 더 자세히 탐구한다.
∫
- 마인드 상태가 신체에 반영된 것이 감정이라고 당신은 말한다. 하지만 때론 마인드와 감정 사이에 갈등이 생긴다. 마인드는 “노”라고 하는데 감정은 “예스”라 말하거나 혹은 그 반대의 경우 말이다.
자신의 마인드를 정말 알고 싶다면, 몸이 늘 진실하게 알려줄 것이다. 그러므로 감정을 들여다보거나 그 감정을 몸에서 느끼라. 만약 생각과 감정 사이에 분명한 갈등이 있다면, 생각이 거짓이고 감정이 진짜일 것이다. 이 감정이 비록 당신의 정체성에 대한 최종 진실은 아닐지라도, 그 당시 당신의 마인드 상태에 관한 상대적인 진실은 알려준다.
‘피상적인 생각’과 ‘무의식적인 정신적 과정’ 간의 갈등은 흔한 현상이다. 마인드의 무의식적인 움직임을 생각으로(서) 인식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움직임은 언제나 감정 형태로 몸에 반영될 테니까 우리가 알아차릴 수 있다.
이런 식으로 감정을 지켜보는 것은 앞에서 얘기한 대로 생각을 듣거나 지켜보는 것과 기본적으로 같다. 유일한 차이라면… 생각이 머릿속에 있는 반면에 감정은 강한 물리적 요소를 지니는 까닭에 주로 몸에서 느껴진다는 점이다. 감정이 몸에 있도록 놔둘 수 있지만, 이때 감정에 지배당하면 안 된다.
우리는 더 이상 감정이 아니야, 우리는 이제 감정의 관찰자요 지켜보는 존재이다.
이것을 연습한다면, 우리 안에 있는 무의식적인 것이 (혹은, 자각하지 못한 것이) 죄다 의식의 빛을 쏘이게 될 것이다.
- 그러니까 감정 관찰이 생각 관찰만큼 중요하다는 얘기인가?
그렇다. 이렇게 자문하는 습관을 들이라.
“지금 이 순간 내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나?”
이 질문이 올바른 방향을 가리킬 것이다.
단, 분석하지 말고 그냥 관찰만 하라. 내면에 주의를 집중하라. 감정 에너지를 느끼라. 아무 감정도 발견되지 않는다면, 몸의 에너지장 안으로 더 깊이 주의를 기울이라. 이것이 <존재>로 들어가는 문이다.
∫
감정은 대개 증폭되고 힘이 넘치는 생각 패턴이며 또 아주 종종 극도의 에너지를 띠기 때문에, 처음엔 그걸 지켜볼 수 있을 만큼 현재 순간에 푹 빠져 있기가 쉽지 않다. 감정은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지배하려 드는데, 우리한테 현존이 충분치 않다면 대개 그렇게 된다.
흔히 그렇듯이, 현존 상태가 부족하여 감정과 무의식적으로 동일시하게 된다면, 그 감정이 한동안 바로 ‘우리 자신’이 된다. 우리네 생각과 감정이 서로 먹이를 주는 악순환이 종종 형성된다. 생각 패턴이 감정 형태에서 자체의 과장된 반영을 만들어 내고, 감정의 진동 빈도가 본래 생각 패턴에 계속 먹이를 주는 것이다. 어떤 감정 유발의 원인이라고 인식하는 상황이나 사건이나 사람을 마음에 담아둠으로써 생각이 감정에게 에너지를 공급하고, 감정은 또 생각 패턴에 활력을 불어넣는 식이다.
기본적으로 모든 감정은 이름과 형태 너머에서 자의식 상실에 뿌리를 두는, 하나의 원초적이고 미분화된 감정이 여러 가지로 변형된 것이다. 이 미분화된 성격 때문에 이 감정을 정확히 묘사할 만한 이름을 찾기가 어렵다.
‘두려움’이란 단어가 먼저 떠오르지만, 이 미분화된 감정에는 지속적인 위협감 이외에 포기나 버림받음, 불완전의 느낌이 깊이 담겨 있다. 어쩌면 여기에 가장 잘 어울리는 것은 기본 감정만큼 분화되지 않고 단순한 명칭을 지닐 수 있는 용어인 아픔이 (혹은, 고통이) 아닐까 싶다.
마인드의 주된 과제 하나는… 이 감정적인 아픔과 싸우거나 그걸 제거하는 것이며, 이 때문에 마인드가 끊임없이 움직이기도 하는데, 하지만 그렇게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라야 그 아픔을 한동안 덮는 데 불과하다.
아픔을 없애려고 마인드가 더 버둥거릴수록 정작 아픔은 더 커진다.
마인드는 해결책을 스스로 찾을 수 없으며 우리한테 찾게 하지도 못한다.
왜냐하면, 마인드 자체가 이 ‘문제’의 본질적인 일부니까. 자기가 방화범이면서 방화범을 찾아내려고 하는 수사 책임자를 상상해 보라.
마인드와 동일시하기를 멈추지 않는 한, 달리 말해 에고에서 자아감 끌어내기를 그만두지 않는 한, 우리는 아픔에서 자유롭지 못하리라. 마인드와 동일시하기를 멈출 때, 마인드가 제 권좌에서 밀려나고 우리네 진정한 본성인 <존재>가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그래, 당신이 뭘 묻고 싶어 하는지 난 알아.
- 그렇다면 사랑이나 기쁨 같은 긍정적인 감정은 어떻게 되는지 물으려 했다.
그 감정들은 내면에서 <존재>와 자연스레 연결된 상태와 불가분하다. 생각 흐름에 틈새와 간격이 생길 때마다 사랑과 기쁨이 번뜩이거나 한순간 깊은 평온을 맛볼 수 있다. 그런 간격들이 대다수 사람들한테는 마인드가 ‘입 다무는’ 순간에 우연히 드물게 나타나는데, 때로는 형용키 어려운 아름다움이나 극단적인 신체 활동, 심지어 큰 위험으로 촉발될 때도 더러 있다.
그때 내면의 고요가 갑자기 찾아든다. 이 고요 속에 포착하기 어려우면서도 강렬한 기쁨이 있고 사랑이 있고 평온이 있다. 그런 순간은 대개 아주 짧다. 마인드가 다시 재빨리 소음을 일으키기 때문인데, 마인드의 이 움직임을 우리는 ‘생각하기’라고 부르는 것이다. 마인드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전까지는 사랑과 기쁨과 평온이 무성할 수 없다.
하지만 이 세 가지를 난 감정이라 부르지 않으려 한다.
사랑과 기쁨과 평온은 감정 영역 너머 더 깊은 차원에 있다.
따라서 감정 영역 너머에 있는 이 세 가지를 느낄 수 있으려면 먼저 여러 감정을 충분히 의식하고 느낄 줄 알아야 하겠다. 감정(Emotion)이란 문자 그대로 ‘불안, 동요, 교란’ 등을 뜻한다. 이 단어는 ‘어지럽히고 파괴한다’는 뜻의 라틴어 emovere에서 유래한다.
사랑과 기쁨과 평온은 <존재>의 깊은 상태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내면에서 <존재>와 연결된 상태의 세 가지 측면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 가지에는 대척하는 것이 없다.
왜냐하면 이 셋은 마인드 너머에서 솟아나는 것이니까.
이와 달리, 여타 감정들은 이원론적인 마인드의 일부로서 정반대의 법칙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간단히 말해, 나쁜 것 없이는 좋은 것도 가질 수 없다는 뜻이야. 그렇기 때문에 깨닫지 못하여 마인드를 자신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때로 기쁨이라고 (잘못) 부르는 것은, 계속 번갈아 나타나는 ‘아픔과 즐거움의 사이클’에서 즐거운 측면이 잠시 나타난 경우가 태반이다.
즐거움이 늘 바깥에 있는 뭔가에서 비롯되는 반면에, 기쁨은 우리 내면에서 나온다.
오늘 우리를 즐겁게 한 것이 내일 아픔을 주며, 혹은 우리를 떠남으로써 그 부재가 또 우리에게 아픔을 안길 것이다.
또 종종 사랑이라 불리는 것은 한동안 즐겁고 가슴 설렐 수 있지만, 그건 사실 중독성 집착이며 눈 깜빡할 새에 정반대의 것으로 변할 수 있는 극도의 결핍 상태이다. 이른바 ‘사랑’이라는 많은 관계가 초기 행복감이 지나간 뒤에는 사실상 ‘사랑’과 증오, 매력과 비난 사이를 넘나들게 된다.
진정한 사랑은 사람에게 고통을 주는 법이 없다.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진정한 사랑은 갑자기 증오로 변하지 않으며, 진정한 기쁨은 아픔으로 변하지 않는다.
이미 말한 것처럼, 깨달음을 얻기 전이라도, 달리 말해 자기 마인드에서 벗어나기 전이라도, 진정한 기쁨이나 진정한 사랑, 깊은 내적 평온을 고요하지만 생생하게 얼핏 접할 수 있다. 이것이 우리네 참 본성의 한 측면이다. 단지, 그걸 대개는 마인드가 가리고 있을 뿐이지.
이른바 ‘정상적으로 보이는’ 중독성 관계에서도 더 진실하고 더 상하지 않는 뭔가가 체감되는 순간들이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순간들은 마인드가 끼어들어 다시 뒤덮는 바람에 한순간 번뜩임으로 그치고 말 것이다. 그때 ‘아, 나에게 뭔가 소중한 게 있었는데 잃고 말았네’ 하는 느낌이 들 수도 있고, 아니면, 마인드가 ‘됐네, 이 사람아, 그건 다 환상이었어’ 하고 납득시키려 들지도 모른다.
사실, 그건 환상이 아니었으며 우리가 그냥 잃어버릴 수 있는 게 아니다. 그건 우리네 자연스러운 상태의 일부로서, 마인드가 가릴 수는 있다 해도 결코 파괴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늘에 먹구름이 잔뜩 끼었다 해도 태양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태양은 구름 저편에 여전히 남아 있다.
- 붓다가 이르기를, 아픔이나 고통은 욕망이나 욕구 때문에 생기는 것이기에 아픔에서 벗어나려면 욕망의 끈을 끊어야 한다는데…
우리네 욕망이란죄다 <존재>의 기쁨을 대체하기 위해 외부의 사물과 미래에서 구원이나 자기 실현이나 충족을 얻으려는 마인드이다. 내 마인드가 곧 나 자신이라고 여기는 한, 나의 갈망이며 욕구며 탐심이며 집착이며 혐오 따위가 곧 나인 셈이다. 그런 것 이외에 다른 ‘나’는 더 이상 없다. (아, 물론, 약간의 예외는 있으니… 단순한 가능성이나 충족되지 않은 잠재력, 아직 싹트지 않은 씨앗 같은 ‘나’도 있기는 한데, 이건 지금 우리가 다루는 마인드 전반으로 보자면 작은 부분일 뿐이다.) 이런 상태에서는, 자유나 깨달음을 얻으려는 나의 갈망조차… 미래에 이를 실현하고 완성하려는 또 다른 욕망일 뿐이다.
그러니 욕망에서 자유로워지거나 깨달음을 ‘성취하려’ 애쓰지 말라.
현재에 실재하도록 하라.
마인드의 관찰자로서 현재에 있으라.
붓다의 가르침을 입에 올리는 대신, 붓다가 되고 ‘깨어난 자’가 되라. 붓다라는 단어 자체가 마인드의 참된 본질을 이해하는 ‘깨어난 자’라는 뜻이다.
사람들은 은총 받는 상태에서 떨려 나고 시간과 마인드의 영역에 들어서서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게 된 이후 오랜 세월 아픔의 손아귀에 쥐여 왔다. 그 이래로 사람들은 자신을 <근원>뿐 아니라 서로 간에도 분리된, 낯선 우주의 무의미한 파편이라고 여기기 시작했다.
우리가 자신을 마인드와 동일시하는 한… 영적으로 말해서, 깨닫지 못하는 한… 아픔은 피할 수 없다. 지금 난 주로 감정적인 아픔에 관해 얘기하고 있다. 이것이 육체적 아픔과 질병의 주원인이기도 하다. 원한이나 증오, 자기연민, 죄책감, 분노, 우울증, 질투 등이, 심지어 아주 가벼운 짜증이나 초조함까지도… 이것이 다 여러 형태의 아픔이다.
또 모든 즐거움이나 신바람 같은 감정적 고양에는 아픔의 싹이 내포돼 있다. 즉, 그 자체에 그것과 필히 붙어 다니는 정반대의 것이 있어서, 시간이 지나면 나타나게 된다.
감각적인 고양을 얻기 위해 마약을 복용해 본 사람은 상승 뒤엔 반드시 하강이 따르며 쾌감이 어떤 형태의 아픔으로 바뀐다는 점을 누구나 다 안다. 아주 무간한 사이가 즐거움의 원천에서 아픔의 원인으로 얼마나 쉽고 빠르게 바뀔 수 있는지, 많은 이들이 경험으로 알고 있다. 더 높은 곳에서 본다면, 부정적인 것과 긍정적인 것이라는 양극단은 같은 동전의 양면이며, 둘 다 내재된 아픔의 (근본적인 고통의) 일부로서 마인드와 동일시된 에고의 의식 상태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다.
우리네 아픔에는 두 가지 수준이 있으니… 하나는 지금 우리가 만들어 내는 아픔이요, 두 번째는 우리 마인드와 몸에 여전히 남아 있는 과거에서 비롯된 아픔이다.
현재에서 아픔(고통)을 만들지 않는 방법과 과거의 아픔(고통)을 녹여 없애는 방법, 바로 이것이 이제 내가 하려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