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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9.07.24 7단계. 고통의 몸체 다스리기 32
  2. 2019.03.20 (4) 감정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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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단계

  <고통의 몸체> 변환하기  

 

우리가 겪는 감정적인 아픔은
과거의 아픔과 합쳐져서 우리 마인드와 몸에 기식하게 된다.

이 퇴적된 아픔이 우리 몸과 마인드를 점령하고 있는 부정적 에너지장이다.
  이것이 바로 감정의 아픔덩어리, 혹은 고통의 몸체이다. 

 

과거의 아픔이 몸에 만든 부정적 에너지장 감지

 

깨달음 상태에 있지 못하는 동안에는… 

즉, 마인드나 에고나 <거짓된 나>가 아니라 <존재>며 <참된 나>와 하나가 되지 못하는 동안에는… 

아픔과 고통을 어떻게든 스스로 만들어 낼 수밖에 없어요. 때로는 아무 이유나 근거도 없이 마인드가 그냥 고통을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아주 평온하고 쾌적한 상황에 있을 수 있는데…

하지만 갑자기 어떤 불안한 생각이 머릿속에 들어와요. 우리 생각에 앞으로 일어날 수 있거나 과거에 일어난 일 때문에 전전긍긍하기 시작해요. 전자도 후자도 현실이나 실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잊은 겁니다. 

 

과거는 이미 없고 미래는 아직 없으니…

걱정거리가 전혀 안 돼요! 

그런데도 우리는 전전긍긍하고, 그러면서 부정적인 감정뿐 아니라 아픔과 고통의 에너지까지 만들어내고, 그 에너지가 우리 몸에 자리를 잡습니다.  

 

에크하르트 톨레우리네 몸에 나름의 지혜가 있다고 말합니다.

달리 말해, 몸은 합리적이에요.

그러나 또 뭔가를 아주 쉽게 믿기도 해요. 그래서 실제 상황을 생각하는 상황과 구분하지 못해요.

우리 몸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 마치 실제인 양 반응합니다.

 

심지어 따뜻한 침대에 편하고 안전하게 누워 있으면서도

‘흠, 뭔가가 나를 위협할 수 있어’ 하고 생각한다면…

몸은 실제로 위협당하는 것처럼 반응해요.

그래서 심장 박동 수가 늘어나고 호흡이 불규칙하게 바뀌며 근육이 긴장해요.

그렇게 해서 몸은 에너지를 추가로 더 만드는데…

하지만 이 에너지는 그 어디로도 나갈 데가 없어요. 위협이 실제 벌어진 게 아니라 가상이고 허구니까!

출구를 찾지 못한 이 에너지는 독성을 띠고 신체에 축적되어 정상적인 신체 기능을 방해하게 돼요. 여기서 그치는 게 아니라, 계속 불안한 생각을 만들어 내고 긴장을 키워요. 

 

안 좋은 일이 실제로 발생했다 해도 고통과 아픔의 에너지를 만들어 내지 않을 수 있어요. 

독성 에너지주변에서 벌어지는 것을 우리 마인드가 ‘나쁘다’고 평가하는 경우에만 생성됩니다.

그러나 <존재>에게는 이 세상에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전혀 없잖아요?

우리의 <참된 나>와 <내면의 목격자>한테 그런 게 없듯이 말이죠.

오로지 있는 것이 있을 뿐이며, “좋네, 나쁘네” 하는 판단은 우리네 마인드가 일삼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에고>의 삶이 아니라 <참된 나>의 삶을 산다면,

모든 것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어요. 심지어 마인드가 나쁘다고 여기는 것에서도 그렇습니다. 

사실, 세상에 머무는 동안 최고의 목표들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어떤 경험이든 다 필요하며 유용하고 ‘좋은’ 것이 아니겠어요? 그리고 그 목표들 중 하나가 (과거와 미래에 연연하지 않고 생각과 감정의 혼란 속에서 헤매지 않으며 지금 이 순간의 체험에 초점을 맞추어 의식하는) 자각 상태의 제고라 하겠습니다. 

 

이걸 깨달을 때…
인생에서 아픔과 고통을 더 이상 자초하지 않을 수 있게 된다.

 

과거의 아픔이 퇴적된 감정의 아픔덩어리, 고통의 몸체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아픔은 여전히 남아 있어요.

부정적인 감정이나 아픔, 고통 따위는… 쉽게 사라지고 증발될 수 없는 에너지임을 기억해 둬야겠어요. 이 에너지는 몸 안에 쌓여서 완전한 에너지 구성체를 만드는데, 이걸 에크하르트 톨레<고통의 몸체> 혹은 아픔덩어리라 부릅니다.  

 

고통의 몸체란…
부정적으로 충전된 에너지장으로서, 우리 심신을 점령할 수 있다.

 

고통의 몸체는 두 가지 형태로 존재합니다. 

휴면 상태와 활동 상태. 

그것이 늘 활동 상태에 있다면, 그 사람은 평생 고통스럽게 살기 때문에 세상에서 가장 불행할 수밖에 없어요. 그런 사람들 가운데서 범죄자나 자살자가 나와요. 필사적인 영웅이나 진실과 정의를 위한 투사도 이 부류에 든다고 할 수 있어요. 또 알코올중독자나 마약중독자, 거지, 노숙자처럼 인생 밑바닥으로 떨어진 사람들도 고통의 몸체에 늘 시달리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아요.

 

잠자지 않는 고통의 몸체가 겉으로 드러나게 되면…

행복이나 삶의 만족, 진정한 자기실현 등에 대한 희망을 늘 모조리 앗아갑니다. 그러나 줄곧 깨어서 활동 상태에 있는 <고통의 몸체>는 그리 흔치 않습니다. 대다수 사람들한테서 그건 잠자고 있다가 눈을 뜨고 또 졸기도 해요

고통의 몸체가 눈뜰 때…

아주 다정하던 사람이 갑자기 불쾌하고 못된 사람으로 바뀌거나, 혹은 낙천적인 줄 알았던 사람이 우울하고 비관적인 불평분자로, 혹은 조용하던 사람이 시끄럽고 히스테릭한 사람으로 바뀔 수 있어요. 

 

고통의 몸체가 깨어났다는 징후는 다른 사람들을 관찰하면서 잘 볼 수 있어요. 

그러나 정작 자기 자신은 바깥에서 명료하게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우리 고통의 몸체가 잠깨는 순간을 추적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당사자는 알아차리지 못할 수 있으나 그 순간에 그 사람은 본연의 자신이 아니라 다른 어떤 사람으로 변합니다. 헐크처럼 말이죠. 

 

알아차리고 의식하고 추적하고 관찰하기…
오직 이 방법으로만 <고통의 몸체>를 다루어서 그것의 횡포를 막을 수 있다.

 

이른바 분노조절장애도 바로 이 고통의 몸체가 심하게 횡포 부릴 때 나타나는 징후인데, 이걸 막는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에요. 고통의 몸체는 자신이 발견되거나 노출되기를 아주 꺼리니까요. 그건 그림자처럼 빛을 겁내요. 그건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을 우리가 깨닫지 못하게 하려고 몰래 숨어 있거나 위장을 해요.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용기를 내서 그걸 직시할 필요가 있어요

 

우리 각자의 내면에 웅크리고 있는 고통의 몸체를 깨우는 게 무엇인지 깨닫는다면, 그것이 언제 돌출할지 알아내기가 더 쉽지 않겠어요? 결국, 그것이 제 스스로 그냥 잠을 깨는 게 아니라 어떤 ‘방아쇠’가 작동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니까요.

 

과거에 아픔을 야기한 뭔가가 떠오르게 하는 상황이 전부 이 ‘방아쇠’ 역할을 해요. 

예를 들어, 

1) 부모가 생활비 같은 돈 문제로 자주 다투던 가정에서 성장한 사람은 경제적 문제와 관련된 얘기나 암시가 나오면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고통을 겪을 수 있어요. 혹은, 

2) 어려서 부모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은 버림받는 것을 아주 두려워하기 때문에, 이를테면 친구가 약속 시간에 겨우 5분 늦은 걸 두고도 그 사람의 아픔덩어리가 밖으로 튀어나올 수 있어요.

 

누구한테나 있는 이 고통의 몸체가 무엇에 반응하여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아차린다면, 그것을 감지하여 다스리기가 더 쉬워질 겁니다. 

 

  실습 32  

 

당신의 아픔덩어리가 어떤 상황에서 잠을 깨는지 알아차리는 것부터 시작해야겠어요. 

어떤 부정적인 감정이 든다거나 그 비슷한 기미라도 나타나게 된다면…

고통의 몸체가 잠을 깬다는 신호이자 반증입니다. 

 

갑자기 불만이나 짜증이 생기거나 화가 나거나 반감이나 혐오가 들거나 울적함을 맛본 적이 있나요?

자기도 모르게 기분 나빠진 적이 있나요? 

 

그런 것이 때로는 뚜렷한 이유가 없어 보이는데 생기기도 해요.

또 때로는 어떤 외부 원인 때문에 그런 상태에 빠지는 듯싶기도 해요.

예를 들어, 누군가가 한 말에 기분이 상한 경우. 혹은 무슨 일이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아서 화가 난 경우

 

그런데… 그 외부 원인이란

우리 내면의 ‘방아쇠’를 당기는 계기일 뿐이라는 점을 분명히 알아둬야겠습니다.

실제로, 같은 입장에서 같은 말을 듣거나 같은 실패를 겪었어도 기분 상하거나 화내지 않는 사람이 분명 있을 거예요. 그런 일 때문에 당겨질 ‘방아쇠’가 그에게 없다면… 안 그렇겠어요? 

외부 상황이 우리 상처를 건드립니다. 

과거에 우리한테 아픔이나 마음고생, 고통 겪게 한 무엇인가를 떠올리게 합니다. 

 

외부 상황이 당신한테 과거의 무엇을 떠올리게 했는지 정확히 기억해 내려고 애쓰세요. 

그렇게 하느라고 마음속에서 과거로 이동하여 거기 한참 머무르거나 갇힐 필요는 없어요. 

이야말로 과거 경험을 도움 삼아 현재에서 뭔가를 좋은 쪽으로 바꾸는 경우에요.

이런 상황에서는 회상이 유용해요. 

 

다만, 한 가지 조건을 지키는 것이 중요해요.

즉, 자신의 감정과 그 감정을 야기한 과거 상황을 <내면의 목격자> 눈으로 들여다봐야 합니다. 그러면 현재 순간에서 벗어나지 않으며 자신의 판단과 감정적 반응으로 흐려지지 않은 장면을 객관적으로 보게 될 겁니다. 

 

‘내 안에서 어떤 감정들이 가장 자주 일어나며 어떤 방아쇠로 촉발되는지’ 끊임없이 추적할 때, 우리는 <고통의 몸체>를 더 경계하고 조심하게 됩니다. 

이건 자신과의 싸움에서 완전한 승리를 거두는 데 가장 중요한 단계입니다

주의를 기울이고 경각심을 가지면, 고통의 몸체가 당신을 지배하는 힘이 금방 몇 배 더 약해질 거예요. 

(알림)  Voice Training에 관심 있는 분들은 여기를 참조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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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정은 마인드 움직임에 대한 신체의 반응  

 

- 그렇다면 감정은 어떤가? 난 마인드보다도 감정에 더 자주 사로잡히는데.

 

내가 여기서 사용하는 마인드라는 단어에는 단순히 생각만 들어가는 게 아니다. 여기엔 모든 무의식적인 정신적 감정적 반응 패턴뿐 아니라 감정도 들어간다. 감정은 마인드와 몸이 만나는 곳에서 생긴다. 감정은 마인드에 대한 신체의 반응이야. 혹은 달리 말하자면, 마인드 상태가 몸에 반영된 것이야. 

 

감정은 마인드에 대한 신체 반응. 불안감&#44; 사랑&#44; 우울&#44; 혐오&#44; 자부심&#44; 수치심.


예를 들어, 공격이나 적대적인 생각을 하면 우리가 분노라 부르는 에너지가 몸에 축적된다. 몸은 싸울 준비에 돌입한다. 신체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위협받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몸이 움츠러들게 되는데, 이것이 우리가 두려움이라 부르는 것의 물리적인 측면이다. 

 

연구 결과를 보면, 강한 감정은 몸에서 생화학적 변화마저 일으킨다. 

이런 생화학적 변화는 감정의 물리적 측면이나 물질적 측면을 나타낸다. 

물론 우리는 흔히 자신의 생각 패턴을 다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의 감정을 관찰함으로써만 여러 감정을 인식할 수 있다.

 

호불호나 판단, 해석 같은 자신의 생각과 더 많이 동일시될수록… 달리 말해, 지켜보는 의식으로서 덜 현존할수록… 감정 에너지는 우리가 알게 모르게 더 강해질 것이다. 만약 자기감정을 느낄 수 없고 거기서 단절돼 있다면, 결국엔 순전히 신체적인 문제나 증세로 그 감정을 체감하게 될 것이다. 근년에 이에 관한 글들이 아주 많이 나온 만큼, 여기서 더 깊이 다룰 필요는 없겠다. 

 

강한 무자각적 감정 패턴은 우발적인 듯 보이는 사건 형태로 나타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내가 직접 관찰한 것인데, 속에 분노를 갖고 있으면서 그걸 인식하지 못하고 겉으로 드러내지도 않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을 자극하여 뚜렷한 이유도 없이 언어폭력이나 물리적 공격을 받을 가능성이 더 높다. 그에게서 적대감과 분노가 저절로 강하게 발산되며, 이걸 다른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포착하고, 이것이 그들의 잠재된 적대감을 촉발하기 때문이다. 

 

만약 자신의 여러 감정을 느끼기 어렵다면… 먼저 자기 몸의 내면 에너지장에 주의를 집중하하라. 몸을 내면에서부터 느끼라. 그러면 자신의 여러 감정과 접촉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부분은 나중에 더 자세히 탐구한다. 

 

 

- 마인드 상태가 신체에 반영된 것이 감정이라고 당신은 말한다. 하지만 때론 마인드와 감정 사이에 갈등이 생긴다. 마인드는 “노”라고 하는데 감정은 “예스”라 말하거나 혹은 그 반대의 경우 말이다.

 

자신의 마인드를 정말 알고 싶다면, 몸이 늘 진실하게 알려줄 것이다. 그러므로 감정을 들여다보거나 그 감정을 몸에서 느끼라. 만약 생각과 감정 사이에 분명한 갈등이 있다면, 생각이 거짓이고 감정이 진짜일 것이다. 이 감정이 비록 당신의 정체성에 대한 최종 진실은 아닐지라도, 그 당시 당신의 마인드 상태에 관한 상대적인 진실은 알려준다.

 

‘피상적인 생각’과 ‘무의식적인 정신적 과정’ 간의 갈등은 흔한 현상이다. 마인드의 무의식적인 움직임을 생각으로(서) 인식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움직임은 언제나 감정 형태로 몸에 반영될 테니까 우리가 알아차릴 수 있다. 

 

이런 식으로 감정을 지켜보는 것은 앞에서 얘기한 대로 생각을 듣거나 지켜보는 것과 기본적으로 같다. 유일한 차이라면… 생각이 머릿속에 있는 반면에 감정은 강한 물리적 요소를 지니는 까닭에 주로 몸에서 느껴진다는 점이다. 감정이 몸에 있도록 놔둘 수 있지만, 이때 감정에 지배당하면 안 된다. 

우리는 더 이상 감정이 아니야, 우리는 이제 감정의 관찰자요 지켜보는 존재이다. 

이것을 연습한다면, 우리 안에 있는 무의식적인 것이 (혹은, 자각하지 못한 것이) 죄다 의식의 빛을 쏘이게 될 것이다. 

 

감정 관찰

 

- 그러니까 감정 관찰이 생각 관찰만큼 중요하다는 얘기인가?

 

그렇다. 이렇게 자문하는 습관을 들이라. 

“지금 이 순간 내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나?” 

 

이 질문이 올바른 방향을 가리킬 것이다. 

단, 분석하지 말고 그냥 관찰만 하라. 
내면에 주의를 집중하라. 
감정 에너지를 느끼라. 
아무 감정도 발견되지 않는다면, 몸의 에너지장 안으로 더 깊이 주의를 기울이라.
이것이 <존재>로 들어가는 문이다. 

 

감정은 대개 증폭되고 힘이 넘치는 생각 패턴이며 또 아주 종종 극도의 에너지를 띠기 때문에, 처음엔 그걸 지켜볼 수 있을 만큼 현재 순간에 푹 빠져 있기가 쉽지 않다. 감정은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지배하려 드는데, 우리한테 현존이 충분치 않다면 대개 그렇게 된다. 

 

흔히 그렇듯이, 현존 상태가 부족하여 감정과 무의식적으로 동일시하게 된다면, 그 감정이 한동안 바로 ‘우리 자신’이 된다. 우리네 생각과 감정이 서로 먹이를 주는 악순환이 종종 형성된다. 생각 패턴이 감정 형태에서 자체의 과장된 반영을 만들어 내고, 감정의 진동 빈도가 본래 생각 패턴에 계속 먹이를 주는 것이다. 어떤 감정 유발의 원인이라고 인식하는 상황이나 사건이나 사람을 마음에 담아둠으로써 생각이 감정에게 에너지를 공급하고, 감정은 또 생각 패턴에 활력을 불어넣는 식이다. 

 

기본적으로 모든 감정은 이름과 형태 너머에서 자의식 상실에 뿌리를 두는, 하나의 원초적이고 미분화된 감정이 여러 가지로 변형된 것이다. 이 미분화된 성격 때문에 이 감정을 정확히 묘사할 만한 이름을 찾기가 어렵다. 

‘두려움’이란 단어가 먼저 떠오르지만, 이 미분화된 감정에는 지속적인 위협감 이외에 포기나 버림받음, 불완전의 느낌이 깊이 담겨 있다. 어쩌면 여기에 가장 잘 어울리는 것은 기본 감정만큼 분화되지 않고 단순한 명칭을 지닐 수 있는 용어인 아픔이 (혹은, 고통이) 아닐까 싶다. 

 

마인드의 주된 과제 하나는… 이 감정적인 아픔과 싸우거나 그걸 제거하는 것이며, 이 때문에 마인드가 끊임없이 움직이기도 하는데, 하지만 그렇게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라야 그 아픔을 한동안 덮는 데 불과하다. 

아픔을 없애려고 마인드가 더 버둥거릴수록 정작 아픔은 더 커진다. 

마인드는 해결책을 스스로 찾을 수 없으며 우리한테 찾게 하지도 못한다. 

왜냐하면, 마인드 자체가 이 ‘문제’의 본질적인 일부니까. 자기가 방화범이면서 방화범을 찾아내려고 하는 수사 책임자를 상상해 보라. 

 

마인드와 동일시하기를 멈추지 않는 한, 달리 말해 에고에서 자아감 끌어내기를 그만두지 않는 한, 우리는 아픔에서 자유롭지 못하리라. 마인드와 동일시하기를 멈출 때, 마인드가 제 권좌에서 밀려나고 우리네 진정한 본성인 <존재>가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그래, 당신이 뭘 묻고 싶어 하는지 난 알아.

 

- 그렇다면 사랑이나 기쁨 같은 긍정적인 감정은 어떻게 되는지 물으려 했다. 

 

그 감정들은 내면에서 <존재>와 자연스레 연결된 상태와 불가분하다. 생각 흐름에 틈새와 간격이 생길 때마다 사랑과 기쁨이 번뜩이거나 한순간 깊은 평온을 맛볼 수 있다. 그런 간격들이 대다수 사람들한테는 마인드가 ‘입 다무는’ 순간에 우연히 드물게 나타나는데, 때로는 형용키 어려운 아름다움이나 극단적인 신체 활동, 심지어 큰 위험으로 촉발될 때도 더러 있다. 

 

그때 내면의 고요가 갑자기 찾아든다. 이 고요 속에 포착하기 어려우면서도 강렬한 기쁨이 있고 사랑이 있고 평온이 있다. 그런 순간은 대개 아주 짧다. 마인드가 다시 재빨리 소음을 일으키기 때문인데, 마인드의 이 움직임을 우리는 ‘생각하기’라고 부르는 것이다. 마인드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전까지는 사랑과 기쁨과 평온이 무성할 수 없다. 

 

 

하지만 이 세 가지를 난 감정이라 부르지 않으려 한다. 

사랑과 기쁨과 평온은 감정 영역 너머 더 깊은 차원에 있다. 

따라서 감정 영역 너머에 있는 이 세 가지를 느낄 수 있으려면 먼저 여러 감정을 충분히 의식하고 느낄 줄 알아야 하겠다. 감정(Emotion)이란 문자 그대로 ‘불안, 동요, 교란’ 등을 뜻한다. 이 단어는 ‘어지럽히고 파괴한다’는 뜻의 라틴어 emovere에서 유래한다. 

 

사랑과 기쁨과 평온은 <존재>의 깊은 상태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내면에서 <존재>와 연결된 상태의 세 가지 측면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 가지에는 대척하는 것이 없다. 

왜냐하면 이 셋은 마인드 너머에서 솟아나는 것이니까. 

 

이와 달리, 여타 감정들은 이원론적인 마인드의 일부로서 정반대의 법칙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간단히 말해, 나쁜 것 없이는 좋은 것도 가질 수 없다는 뜻이야. 그렇기 때문에 깨닫지 못하여 마인드를 자신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때로 기쁨이라고 (잘못) 부르는 것은, 계속 번갈아 나타나는 ‘아픔과 즐거움의 사이클’에서 즐거운 측면이 잠시 나타난 경우가 태반이다. 

 

즐거움이 늘 바깥에 있는 뭔가에서 비롯되는 반면에, 기쁨은 우리 내면에서 나온다. 

오늘 우리를 즐겁게 한 것이 내일 아픔을 주며, 혹은 우리를 떠남으로써 그 부재가 또 우리에게 아픔을 안길 것이다. 

 

또 종종 사랑이라 불리는 것은 한동안 즐겁고 가슴 설렐 수 있지만, 그건 사실 중독성 집착이며 눈 깜빡할 새에 정반대의 것으로 변할 수 있는 극도의 결핍 상태이다. 이른바 ‘사랑’이라는 많은 관계가 초기 행복감이 지나간 뒤에는 사실상 ‘사랑’과 증오, 매력과 비난 사이를 넘나들게 된다. 

진정한 사랑은 사람에게 고통을 주는 법이 없다.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진정한 사랑은 갑자기 증오로 변하지 않으며, 진정한 기쁨은 아픔으로 변하지 않는다. 

 

이미 말한 것처럼, 깨달음을 얻기 전이라도, 달리 말해 자기 마인드에서 벗어나기 전이라도, 진정한 기쁨이나 진정한 사랑, 깊은 내적 평온을 고요하지만 생생하게 얼핏 접할 수 있다. 이것이 우리네 참 본성의 한 측면이다. 단지, 그걸 대개는 마인드가 가리고 있을 뿐이지. 

 

이른바 ‘정상적으로 보이는’ 중독성 관계에서도 더 진실하고 더 상하지 않는 뭔가가 체감되는 순간들이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순간들은 마인드가 끼어들어 다시 뒤덮는 바람에 한순간 번뜩임으로 그치고 말 것이다. 그때 ‘아, 나에게 뭔가 소중한 게 있었는데 잃고 말았네’ 하는 느낌이 들 수도 있고, 아니면, 마인드가 ‘됐네, 이 사람아, 그건 다 환상이었어’ 하고 납득시키려 들지도 모른다. 

 

사실, 그건 환상이 아니었으며 우리가 그냥 잃어버릴 수 있는 게 아니다. 그건 우리네 자연스러운 상태의 일부로서, 마인드가 가릴 수는 있다 해도 결코 파괴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늘에 먹구름이 잔뜩 끼었다 해도 태양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태양은 구름 저편에 여전히 남아 있다. 

 

- 붓다가 이르기를, 아픔이나 고통은 욕망이나 욕구 때문에 생기는 것이기에 아픔에서 벗어나려면 욕망의 끈을 끊어야 한다는데… 

 

우리네 욕망이란 죄다 <존재>의 기쁨을 대체하기 위해 외부의 사물과 미래에서 구원이나 자기 실현이나 충족을 얻으려는 마인드이다. 내 마인드가 곧 나 자신이라고 여기는 한, 나의 갈망이며 욕구며 탐심이며 집착이며 혐오 따위가 곧 나인 셈이다. 그런 것 이외에 다른 ‘나’는 더 이상 없다. (아, 물론, 약간의 예외는 있으니… 단순한 가능성이나 충족되지 않은 잠재력, 아직 싹트지 않은 씨앗 같은 ‘나’도 있기는 한데, 이건 지금 우리가 다루는 마인드 전반으로 보자면 작은 부분일 뿐이다.) 이런 상태에서는, 자유나 깨달음을 얻으려는 나의 갈망조차… 미래에 이를 실현하고 완성하려는 또 다른 욕망일 뿐이다. 

 

그러니 욕망에서 자유로워지거나 깨달음을 ‘성취하려’ 애쓰지 말라. 

현재에 실재하도록 하라. 

마인드의 관찰자로서 현재에 있으라. 

붓다의 가르침을 입에 올리는 대신, 붓다가 되고 ‘깨어난 자’가 되라. 붓다라는 단어 자체가 마인드의 참된 본질을 이해하는 ‘깨어난 자’라는 뜻이다. 

 

사람들은 은총 받는 상태에서 떨려 나고 시간과 마인드의 영역에 들어서서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게 된 이후 오랜 세월 아픔의 손아귀에 쥐여 왔다. 그 이래로 사람들은 자신을 <근원>뿐 아니라 서로 간에도 분리된, 낯선 우주의 무의미한 파편이라고 여기기 시작했다. 

 

우리가 자신을 마인드와 동일시하는 한… 영적으로 말해서, 깨닫지 못하는 한… 아픔은 피할 수 없다. 지금 난 주로 감정적인 아픔에 관해 얘기하고 있다. 이것이 육체적 아픔과 질병의 주원인이기도 하다. 원한이나 증오, 자기연민, 죄책감, 분노, 우울증, 질투 등이, 심지어 아주 가벼운 짜증이나 초조함까지도… 이것이 다 여러 형태의 아픔이다. 

 

모든 즐거움이나 신바람 같은 감정적 고양에는 아픔의 싹이 내포돼 있다. 즉, 그 자체에 그것과 필히 붙어 다니는 정반대의 것이 있어서, 시간이 지나면 나타나게 된다. 

감각적인 고양을 얻기 위해 마약을 복용해 본 사람은 상승 뒤엔 반드시 하강이 따르며 쾌감이 어떤 형태의 아픔으로 바뀐다는 점을 누구나 다 안다. 아주 무간한 사이가 즐거움의 원천에서 아픔의 원인으로 얼마나 쉽고 빠르게 바뀔 수 있는지, 많은 이들이 경험으로 알고 있다. 더 높은 곳에서 본다면, 부정적인 것과 긍정적인 것이라는 양극단은 같은 동전의 양면이며, 둘 다 내재된 아픔의 (근본적인 고통의) 일부로서 마인드와 동일시된 에고의 의식 상태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다. 

 

우리네 아픔에는 두 가지 수준이 있으니… 
하나는 지금 우리가 만들어 내는 아픔이요, 
두 번째는 우리 마인드와 몸에 여전히 남아 있는 과거에서 비롯된 아픔이다. 


현재에서 아픔(고통)을 만들지 않는 방법과 과거의 아픔(고통)을 녹여 없애는 방법, 바로 이것이 이제 내가 하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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