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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9.07.10 루덩의 악마들 (1편 2)
  3. 2019.07.10 루덩의 악마들 (1편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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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덩의 악마들  

The Devils of Loudun 

 

 

올더스 헉슬리 저

(번역, 주석, 해설 – 김성호)

 

 

루덩의 악마들 책 표지

 


 

3편

 

3-1

 

  우르뱅 그랑디에가 승리와 패배와 또 위태로운 승리를 반복하면서 끝없이 싸움을 벌이는 동안 그보다 더 젊은 동시대인도 나름대로 투쟁을 벌였는데, 그건 비교할 수 없이 더 높은 상을 얻기 위한 싸움이었다. 

  보르도 칼리지에서 공부하면서 장 조셉 수렝[각주:1]은 신학생이나 예수회 수련수사들 가운데서 용모 준수한 젊은 성직자를 자주 보고, 그의 근면과 재능을 예로 드는 교사들의 말을 들었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1617년 그랑디에가 보르도를 떠난 뒤 수렝은 그를 더 이상 못 봤다. 1634년 늦가을 그가 루덩에 왔을 때 주임신부는 이미 죽고 그의 유해는 사방으로 흩뿌려진 뒤였다.

 

  나이가 엇비슷한 두 사람은 같은 학교에서 같은 선생들 밑에서 같은 인문학과 종교학을 공부했다. 한 사람은 세속의 신부요 다른 사람은 예수회 수도사로 둘 다 성직자이지만 완전히 다른 세계에서 살도록 운명 지워졌다

  그랑디에는 평범하고 감각적인 사람이었다. 단지, 관능이라는 측면에서 조금 더 두드러졌을 뿐. 그의 삶의 기록이 충분히 증명하듯이 그의 세상은 복음서와 사도행전에 자주 등장하는 의미의 세상이었다. 

  “불행하구나, 유혹이 가득한 이 세상!” 

  “이제 이 세상에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승의 자만이며, 다 아버지한테서 나온 것이 아니요 세상에서 온 것이라. 이 세상도, 세상의 정욕도 다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할지니.”[각주:2]

 

  ‘이 세상’이란... 인간의 경험으로 각각의 자아에 나타나고 자아로써 형성되는 것. 그것은 자아의 지시에 따르는, 물질적이고 불충분한 삶. 그것은 우리네 음욕과 공포가 하도 크기에 자연스러움을 상실한 세계. 그것은 영원성에서 분리된 유한. 자체의 비이원적인 근간에서 고립된 상태의 다양함. 불행의 연속 같은 시간 흐름. 그것은 현실이라 불리는, 무수히 많은 아름답고 신비한 개개의 것들을 대신하는 언어적 범주의 체계. 그것은 페티시즘이 되어 버린 거짓 이데아. 그것은 우리네 실용적 어휘와 동일시된 우주. ‘이 세상’ 맞은편 위에 ‘다른 세상’이 있고, 거기 하나님 왕국이 숨어 있다. 

 

  수렝은 자의식적인 삶을 시작한 이래 바로 이 왕국으로 늘 끌렸다. 그의 가족은 부유하고 사회적 지위가 높은데다 신앙이 독실했다. 이 신앙은 실용성과 자기희생 정신을 띠었다. 그의 부친은 임종 전에 상당한 재산을 예수회에 희사했고, 모친은 남편 보낸 뒤 카르멜회 수녀가 됨으로써 자신의 숙원을 이루었다. 부모가 사내애를 체계적이고 양심적으로 엄하게 키울 수밖에 없었다. 

 

장 조셉 수렝 수도사

 

  오십 년 지나 유년기를 돌아보면서 수렝은 아주 짧은 시기 하나만 행복하게 기억할 수 있었다. 여덟 살 때 지역에 역병이 창궐했다. 소년을 안전한 시골집으로 보냈다. 때는 여름이고 시골은 그림 같이 아름다우며, 여자 가정교사는 소년한테 공부라는 멍에를 지우지 말고 삶을 마음껏 누리게 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친척들이 별의별 놀라운 선물을 싸 들고 아이를 찾아오곤 했다.

  「난 날마다 천방지축으로 뛰어놀았어,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얼마나 안쓰러운 의미를 담고 있는 문구인가!) 그 격리 기간이 끝난 뒤 학교에 들어갔는데, 그때부터 힘겨운 시기가 시작됐다. 하나님을 공부한다는 게 어찌나 힘들었는지 불과 네댓 해 전에야 평생 처음으로 안도감을 맛봤다. 그 이전에는 고통이 계속 커지기만 하여 때로는 인간으로서 견딜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한계까지 이르기도 했다.」 

 

  장 조셉이 예수회 수사들의 생도가 됐다. 그들이 그에게 그가 아는 모든 것을 가르쳤고, 그래서 무대를 선택할 시간이 됐을 때 젊은이는 주저 없이 예수회 일원이 됐다. 하지만 다른 원천에서 그는 라틴어보다 더 좋은 뭔가를, 스콜라신학보다 더 중요한 뭔가를 배웠다. 

 

  수렝이 칼리지에서 공부한 청소년기 다섯 해 동안 보르도 지역 카르멜회 수녀원 원장은 ‘천사들의 수녀 이사벨’이라 불린 에스파냐 수녀였다. 이사벨 수녀는 테레사 성녀[각주:3]의 동료이자 제자였는데, 중년에 들어 다른 수녀 몇 명과 함께 프랑스로 파견돼 테레사 성녀의 가르침과 영성과 신비주의 교리를 전파하고 있었다. 참된 마음으로 듣고자 갈망한 모든 경건한 영혼에게 이사벨 수녀는 이 알아듣기 힘든 가르침을 언제든 소상하게 설명해 주었다. 

  한 번도 빠짐없이 찾아와 열심히 듣는 이들 가운데 좀 왜소한 편인 열두 살 남학생이 있었다. 소년은 장 조셉, 그건 그가 자유 시간을 즐겁게 보내는 방편. 

  하나님의 사랑을, 그분과 합일되는 기쁨을, 온유와 겸양, 가슴의 정화, 분주하고 어지러운 마음 비우기 등을 유창하지 못한 프랑스어로 얘기하는 목소리를 소년은 널따란 객실 창살 너머에서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듣곤 했다. 그렇게 귀를 기울이면서 소년은 ‘이 세상’이며 육체와, 지상의 주권자들이며 지상의 권세와 싸우겠다는 단호한 결의로 마음이 꽉 차는 것을 느꼈다. 싸워서 이겨야 비로소 자신을 하나님께 맡길 자격이 생길 터. 장 조셉이 주저하지 않고 영적 투쟁의 길을 택했다.

 

  열세 살을 갓 넘겼을 때 하나님 은혜의 신호요 다가올 승리의 전조인 듯싶은 것이 소년에게 시현됐다. 어느 날 카르멜회 교회에서 기도하는 중에 초자연적인 빛을 보게 됐다. 그건 하나님의 본질을 밝히는 동시에 모든 거룩한 특성을 명시하는 듯한 빛이었다. 

  그 계시며 그 체험에 수반된 환희의 기억이 죽는 날까지 그를 떠나지 않았다. 이 신비한 느낌이, 그랑디에나 부샤르와 똑같은 사회적, 교육적 환경에 처한 그를 다른 이들과 달리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승의 자만’에서 벗어나게 해주었다. 물론, 그런 정욕과 자만을 그가 전혀 몰랐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오히려 그는 그런 유혹을 지독하게 감지했다. 

 

  수렝은 몸이 허약하고 신경이 예민하면서 관능적 충동이 특히 강한 유형에 속했다. 게다가 문학적 재능이 뛰어나 나이가 들어서는 그 재능에 자신을 다 바치면서 신앙보다는 미학 문제를 다루는 직업 문인이 되려는 유혹도 자연스레 겪었다. 

  가장 존경받을 만한 ‘안목의 정욕’에 굴복하고 싶다는 마음은 세상에서 인정받으려는 야심과 명성 애호 때문에 더 커졌다. 그는 명성이라는 맛을 음미하고 비평가들의 칭송과 열광하는 독자들의 갈채를 거부하는 척하면서도 결국 즐길 수 있었을지 모른다. 

 

  저급한 정신이 육적 삶의 유혹에 약하듯이 고급한 정신은 지적 삶의 유혹에 약하다. 장 조셉의 경우 수치스러운 유혹 못지않게 명예로운 유혹도 아주 강했다. 창작 유혹이 얼마나 강한지 경험으로 알았다. 단지 열세 살 때 접한 그 찬란한 광채를 기억하는 덕분에 헛된 명성이라는 유혹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다. 

 

  수렝은 동정남으로 죽었으며 작품 대부분을 제 손으로 소각했다. 또 명성으로 말하자면, 이름을 날리지 않은 상태로 그친 게 아니라 (우리가 보게 되듯이) 외려 나쁜 평판을 남기는 것에 만족했다. 저 뒤에 가서 묘사되는, 상상도 못할 고난과 시련에 맞서면서 그는 영웅적인 근기를 발휘하며 기독교적 완성을 향해 고통스럽게 나아갔다. 

 

  하지만 그 이상한 고행 스토리를 살펴보기 전에 그런 불가사의한 편력에 나서는 선남선녀들은 어떤 동기를 지니고 있는지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잠시 다른 얘기를 해야겠다. 

(3-2편 계속)

(알림)  Voice Training에 관심 있는 분들은 여기를 참조해 주세요.

 

관련 포스트: 

루덩의 악마들 11편 6 (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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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덩의 악마들 (1편 2)

루덩의 악마들 (1편 1)

역사의 메아리 (올더스 헉슬리 소개와 작품 해설 4. 끝)

역사의 메아리 (올더스 헉슬리 소개와 작품 해설 3)

역사의 메아리 (올더스 헉슬리 소개와 작품 해설 2)

역사의 메아리 (올더스 헉슬리 소개와 작품 해설 1)

 

 

  1. Jean-Joseph Surin (1600-1665) - 프랑스의 예수회 신비주의자, 설교가, 종교 저술가, 엑소시스트. 8세에 순결서원, 10세에 카르멜회에서 명상을 배우고, 16세에 수련수사. 20대에 파리 클레르몽 칼리지에서 공부. 성직자로서 준엄한 자기부정을 실행, 사회 접촉을 거의 다 끊었다. 1634년 9월 루덩에 파견돼 잔느의 엑소시스트로 활동하면서 악령에 들씌우게 됐다. 20년 넘도록 환각과 망상, 발작, 신체 마비, 언어 능력 상실 등에 시달렸다. 그런 와중에도 간간이 힘찬 음성과 달변으로 강론을 펼쳐 주치의가 기적 같다고 했다. 죽기 8년 전에 악령을 떨쳤다. 영성에 관해 뛰어난 저술을 몇몇 남겼다. [본문으로]
  2. 마태복음 18:7, 요한복음 12:31, 요한일서 2:15-17. [본문으로]
  3. St. Teresa of Ávila (1515-1582) - 에스파냐의 신비주의자, 로마가톨릭 성인, 교회박사, 카르멜회 수녀, 반종교개혁에 관한 여러 글의 저자, 정신 기도를 통한 관상 생활 신학자. 카르멜회 개혁가, 십자가의 성 요한과 함께 ‘맨발의 카르멜회’ 창설자.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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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덩의 악마들  

The Devils of Loudun 

 

 

올더스 헉슬리 저

(번역, 주석, 해설 – 김성호)

 

 

the devils of loudun

 


 

 

  새 주임신부가 말을 타고 천천히 다가가면서 보자 하니, 루덩은 구릉 위에 자리 잡은 소도시인데 우뚝 솟은 탑 두 개가 금방 눈에 들어왔다. 하나는 성 베드로 교회의 첨탑, 또 하나는 웅장한 성채 한가운데 있는 중세 시대 아성.

  상징적 측면에서 루덩의 스카이라인은 이미 시대에 뒤졌다. 고딕식 종탑이 제 그림자로 도시 절반을 덮고 있기는 하지만 많은 루덩 주민들은 위그노이기에 이 종탑이 속한 가톨릭교회를 혐오했다.[각주:1]  푸아티에 백작가문이 전성기에 세운 성채는 아직 위풍당당한 인상을 풍기고 있지만, 그 위세도 이미 막판에 이르렀다. 리슐리외가 곧 권좌에 올라 지방 귀족의 세습 성채뿐 아니라 지역자치 자체를 깡그리 무너뜨릴 테니까. 

  자신이 종파 전쟁의 (삼십년전쟁의) 마지막 국면에 들어서고 있다는 것을 젊은 주임신부는 당연히 몰랐다. 그 뒤로 거대한 민중혁명의 서곡이 이어진다는 것도 당연히 몰랐다. 

  성문 곁에 세워진 교수대에서는 시체들이 썩고 있었다. 어떤 곳에는 쌍으로 걸려 있기도 했다. 성 안으로 들어서자 지저분한 거리들과 별의별 희한한 냄새와 악취가 그를 맞이했다. 아궁이 연기, 거위와 돼지 배설물, 빵 굽는 냄새, 말똥 냄새, 씻지 않은 인간 군상의… 

 

성문 곁 교수대에서는 시체가 썩고 있었다.

 

  소작농이며 수공업자, 날품팔이, 하인들 같이 가난한 사람들이 1만4천 주민의 하찮고 이름 없는 다수를 차지했다. 한 계층 위로는 점방 주인들, 숙련공들, 부르주아 신분 최하위에 불안정하게 턱걸이한 하급관리들이 있고, 또 그 위로는 천민들 어깨에 걸터앉아 숱한 특전을 누리고 신성한 권리로 지배하는 부유한 상인들과 학식 있는 전문가들, 귀족들이 있었다. 

  한데 이 귀족에도 나름의 계급이 있으니, 맨 밑에는 소지주, 그 위로 부유한 지주들, 더 위로 봉건적 대지주들과 고위 성직자들이 자리 잡았다. 

 

  이런 배경에서 예외적으로 자유로운 지성과 문화의 오아시스가 드문드문 보였다. 이 오아시스들 바깥의 정신적 분위기는 숨 막힐 정도로 촌스럽고 투박했다. 부자들은 오로지 돈과 재산에만 정신 쏟고 권리와 특전에만 미친 듯 달려들었다. 송사를 벌일 여유가 있거나 전문적 법률 자문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이천에서 삼천 명인데, 루덩에는 법정 변호사가 스물, 사무 변호사가 열여덟, 집행리가 열여덟, 공증인이 여덟쯤 됐다. 

  이문을 쫓아다니다가 남은 시간과 에너지는 가정생활의 반복되는 기쁨과 걱정 같은 일상사에, 이웃에 대한 험담이나 종교 의식, (루덩이 신구 교회 양 진영으로 갈라진 도시인만큼) 신랄하고 지칠 줄 모르는 신학적 논쟁에 녹아들었다. 

 

  주임신부 재직 기간 중 교구민들의 진정한 경건함을 증명할 만한 사건은 전혀 없었다. 최소한 그런 자료는 보전되지 않았다. 단지 예외적인 사람들만이 영적 생활에 몰입하는데, 그들은 하나님이 영이요, 그렇기에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공경해야 한다는 점을 직접 경험으로 알고 있다. 

  그렇긴 해도 루덩에는 꽤 많은 변변치 못한 자들과 더불어 선량하고 반듯한 이들, 경건한 이들, 심지어 독실한 이들까지 다 있었다. 하지만 여기에 성인(聖人)은 없었다. 즉, 그 모습 하나가 존재의 영원성에 대해 반박할 수 없는 증거요 모든 실체의 거룩한 근간과 온전하게 합일해 있음을 보여주는 이들은…

 

  그런 성스러운 인물이 도시에 나타나려면 육십 년이 더 지나야 했다. 루이즈 트롱셰가 심신의 숱한 체험과 시련을 거친 뒤 고통 받는 이들을 돕기 위해 루덩 병원에 왔을 때, 그녀는 즉각 강렬하고 신실한 영적 생활의 중심이 됐다. 나이와 계층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묻고 조언과 도움을 청하러 그녀한테 몰려들었다. 루이즈가 파리에 있는 예전 고해신부에게 편지를 보냈다. 

  「여기서 우리는 아주 큰 사랑을 받고 있어요. 그래서 난 몹시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요. 내가 하나님에 관해 말할 때, 사람들은 아주 감동하여 눈물을 줄줄 흘리지요. 내가 하는 일로 인해 그들이 나를 한층 더 사랑하게 될까 싶어 겁이 납니다.」 

  그녀는 어디론가 달아나고 싶었지만, 도시의 신앙심에 붙들린 몸이 됐다. 그녀가 기도하면 병자들이 치유되는 일이 종종 생겼다. 다들 성녀 덕분에 회복됐다고 확신했는데, 그녀는 외려 부끄러워하며 고행에 충실했다. ‘내가 정말 이적을 하나라도 행했다면, 난 자신을 저주받았다고 여겼을 겁니다.’ 

 

  몇 해 지나 상부에서 루덩을 떠나라는 지시가 내렸다. 광명이 뚫고 들어올 창문이 주민들에겐 더 이상 없었다. 얼마 지나 종교적 열기가 식고 영적 삶에 대한 관심이 시들었다. 루덩은 평소 상태로 돌아갔다. 두 세대 이전 우르뱅 그랑디에가 말을 타고 들어오던 때의 상태로. 

 

  새 주임신부에 대한 대중의 감정은 애초부터 날카롭게 양분됐다. 신앙심이 더 깊은 여성들 대다수는 그를 마음에 들어 했다. 이전 주임신부는 늙어서 비슬거리며 볼품없었다. 한데 후임자는 한창 젊은 나이에 키가 훤칠하고 몸매도 잘 빠진데다가 분위기마저 당당하며 심지어 (한 증언에 따르면) 위엄이 서리기까지 했다. 

 

우르뱅 그랑디에 신부

 

  검은 눈이 크고 베레 모자 아래로 검은 곱슬머리가 풍성하게 넘실거렸다. 이마가 넓고, 코는 독수리 같고, 입술은 붉고 통통하고 잘 움직거렸다. 밴 다이크[각주:2] 수염이 턱을 장식하고 윗입술 위에 두툼한 콧수염을 달고 있는데, 그건 포마드를 발라 꼼꼼하게 다듬었기에 돌돌 감아 올린 양 끝이 한 쌍의 요염한 의문부호처럼 코 양쪽에서 서로 마주보았다. <파우스트>를 읽은 사람 눈에는 그의 초상화가 좀 더 통통하고 불퉁스럽지 않으며, 단지 아주 조금 덜 지적인 메피스토펠레스가 화려한 사제복을 입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매혹적인 외모에다 좋은 매너와 타고난 달변이라는 사회적 덕목을 갖추었다. 듣기 좋은 말을 우아하게 선사할 줄 알았다. 게다가 상대 여인이 볼품없지 않다면, 말하면서 던지는 눈길이 말보다 더 상대를 뜨겁게 만들었다. 새로 부임한 주임신부가 여성 교구민들한테 보이는 관심이 유별난데, 그건 단순히 목가적인 것 이상이었다. 

 

  그랑디에가 살던 시대는 소위 체면치레를 중시하던 시대의 우중충한 여명기였다. 중세 모든 기간과 근대 초기에 가톨릭교회 공식 규정과 성직자 개개인의 실생활 사이에는 괴리가 엄청나서, 그 양 끝이 연결되지 않고 연결될 수도 없어 보였다. 

  가장 높은 대수도원장부터 가장 낮은 탁발수사에 이르기까지 성직자들 대다수가 방탕에 기울었음을 중세나 르네상스 시대 작가들 중 얘기하지 않은 이들이 거의 없었다. 

  성직자 계급의 부패는 종교개혁을 야기했고, 그건 또 반종교개혁을 초래했다. 트렌토 공의회[각주:3] 이후 스캔들을 일으키는 교황은 점점 더 흔치 않게 됐고, 마침내 17세기 중엽에 이르러서는 그런 품종이 완전히 사라졌다. 귀족 가문의 작은아들이라는 사실이 승진의 유일한 장점이던 주교들도 이제는 행실을 바르게 하려 들었다. 하급 사제단의 도덕성을 이제 교회 권력이 경계하는 눈초리로 주시했고, 그 권력은 예수회나 오라토리오회[각주:4] 같이 종교적 순수성의 맹렬한 감시자들이 내부에서 주시했다. 

 

  신교도들과 중견 영주들과 지역 자치권을 억압하는 대가로 왕들이 가톨릭교회를 중앙권력 강화 도구로 썼던 프랑스에서는 성직자들의 존경받는 태도가 왕실의 큰 관심사였다. 민중은 추잡한 행위로 오점 남긴 성직자들의 교회를 우러르지 않을 터이다. 

 

  한데 “짐이 곧 국가니라” 하는 식의 법이 지배하던 나라에서는 교회를 두고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었다. 즉, 교회에 대한 불경은 곧 국왕에 대한 불경이다. 피에르 베일이 자신의 기념비적인 <사전>에 덧붙인 무수한 주석들 중 하나에서 이렇게 쓴다.[각주:5]  

 

   「언젠가 어떤 신사가 베네치아 사제단의 끝도 없는 방탕에 대해 늘어놓기에, 종교와 국가의 명예를 모독하는 그런 난잡한 행위를 공화국 원로원이 어찌 보고만 있느냐고 내가 물었다. 

  그가 대답하길, 권력은 공익 차원에서 이 방종을 활용한다고 했다. 또 이 수수께끼를 설명하기 위해 이렇게 덧달았다. 원로원은 성직자와 수도사들을 민중이 최대한 경멸하기를 내심 바라고 좋아한다오. 그런 상태라야 그들이 민중을 선동해 권력에 저항하기 어려워지니까. 그가 하는 말로는 또 군주가 예수회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한 가지 이유는 그들이 품위를 지키기 때문에, 그런 고로 하층 계급의 존경을 더 받고, 그래서 반정부적인 선동을 일으킬 힘을 더 갖기 때문이라고 했다.」 

 

  17세기 내내 프랑스에서 성직자들의 난잡한 행위에 대한 국가 정책은 베네치아 원로원이 추구한 것과는 정반대였다. 베네치아 원로원은 교회의 과도한 영향력을 경계했기 때문에 성직자들이 돼지처럼 행동하는 걸 보며 좋아하고 존경받는 예수회 수사들을 의심쩍게 보았다. 

  정치적으로 강력하며 단호하게 갈리아주의에 입각한 프랑스 군주제는 로마교황을 두려워할 이유가 전혀 없었으며 교회를 아주 유용한 신민 지배 메커니즘으로 봤다.[각주:6] 그래서 왕들은 예수회 수사들을 비호하며 세속 사제단의 무절제를 근절하느라 부심했다. 적어도, 그런 현상이 겉으로 드러나는 일이 없도록 했다. 

 

  [*저자 주 ☞ 기술하는 시기 처음에는...  

「트렌토 법규가 교회에 전혀 작용하지 못했다. 1560년 왕의 자문회의가 열렸는데… 빈의 주교인 샤를 마리약이 밝히길, 교회 규율이 다 사라지고 사제단이 이렇게 추잡하게 행동하며 스캔들이 이렇게 자주 일어난 적이 없었다고 했다. 프랑스 고위 성직자들이 독일인들을 흉내 내 성직자들로 회합 만드는 풍습을 도입했고 개중에 내연녀를 두지 않은 이들에게는 소정의 벌금을 물린다고…」

  「그런 면으로 보자면 트렌토의 신부들은 고위 성직자들의 도덕 수준을 끌어올리지 못했다. 하지만 교회 재판 기록을 연구한 결과, 17세기와 18세기에 걸쳐 사회적 도덕이 점차 커짐에 따라 성직자들 쪽에서도 몰염치한 냉소주의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일이 상당히 줄어들었다.」 

 

  어떤 수단을 써서든 밖으로 새지 않고 스캔들을 피하는 것이 아주 중요해졌다. 성직자가 내연녀와 함께 산다면 반드시 누이나 질녀로 둔갑시켰다. 1668년 법규에 따르면 미니모회 수도사들은 ‘정욕의 유혹에 빠지거나 절취 행위를 하기 전에 수도사 옷을 벗었다면’ 교회에서 파문되지는 않는다. 

  이 시기 내내 사제단에게 점잖은 처신을 가르치려는 움직임이 과민할 정도로 강했다. 예를 들어, 1624년 성직자 르네 소피는 어떤 치안판사 아내와 간통 현장에서 적발됐다. 그것도 바로 교회 안에서. 경찰 책임자 르망사가 죄인에게 교수형을 내렸다. 선고가 과하다고 르네가 파리 고등법원에 항소했다. 고등법원은 그 선고를 산 채로 화형에 처하는 것으로 바꾸었다.][각주:7] 

 

  새 주임신부가 교회 조직에서 입신하기 시작한 때는 성직자의 스캔들이 여전히 잦기는 했어도 이미 권력이 극도로 용인하지 않던 시기였다. 

 

  그랑디에와 같은 시대에 살았지만 더 젊은 장 자크 부샤르가 17세기 자신의 소년기와 청년기 기록을 후손에게 남겼다.[각주:8] 이 문건은 객관적인 임상 관찰을 담고 양심의 가책과 도덕적 판단 등에서 완전히 자유롭기에 19세기 학자들이 소수 전문가를 위해서만 발행할 수 있었다. 그것도 작자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비행을 저질렀다고 확실히 강조하면서! 

  하지만 하벨록 엘리스, 크라프트에빙, 허쉬펠트, 킨제이의 책들을 읽으며 자란 세대에게 부샤르의 기록은 더 이상 분개할 만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각주:9] 그럼에도 충격을 주지는 않지만 여전히 경악할 만하다. 루이 13세의 신민이 믿기 어려운 섹스 행태를 갖가지로 차분하고 냉정하게 묘사하는 것을 읽으면 참으로 놀랍다. 마치 오늘날 여대생이 인류학 리포트를 쓰거나 정신과 의사가 질환의 역사를 기술하는 것과 똑같이 말이다! 

 

  르네 데카르트는 부샤르보다 열 살 더 많다. 하지만 이 위대한 철학자가 아파서 울부짖는 ‘오토마톤’들을 가지고, 천박한 명칭으로는 고양이며 개라 불리는 것들을 상대로, 해부 실험을 실행하기 훨씬 이전에 부샤르는 제 모친의 하녀를 데리고 이미 심리적, 화학적, 생리적 실험을 다 해냈다. 

  그가 처음 눈길 돌렸을 때 그 처녀는 신을 공경하며 도덕적으로 결백한 사람이었다. 파블로프만큼이나 인내와 날카로운 관찰력을 발휘하면서 부샤르는 이 처녀가 자기를 완전히 믿게끔 꼬드겨 결국 자연철학에 헌신하도록 재조립했다. 그 결과 그녀는 실험 대상이 되기에 기꺼이 동의하고 연구에 직접 참여하기도 했다. 

 

  부샤르의 침대 곁탁자 위에는 해부와 의술에 관한 대형서적들이 대여섯 권 놓여 있었다. 밀회 중간에, 혹은 고도로 실험적인 애무를 행하면서, 플로스와 바텔스의 이 기이한 선구자는 <De Generatione 생성>과 페르넬, 페란두스를 읽고 이론과 실제를 아주 꼼꼼하게 비교했다.[각주:10]

   대다수 동시대인들과 달리 그는 앞선 시대 권위자들을 전혀 믿으려 하지 않았다. 렘니우스와 로데리쿠스 카스트로는[각주:11] 몸엣것의 이상하고 놀라운 특성에 대해 분별 있는 생각을 죄다 기술했지만, 부샤르는 이 확언들이 정말 그런지 직접 확인하기 원했다. 연구열에 감염된 하녀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일련의 실험을 수행하면서 까마득한 옛날부터 의사들과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이 사람들을 헷갈리게 해온 것을 다 뒤집었다. 

 

  알고 보니… 몸엣것은 풀을 죽이지 않고, 거울을 흐리게 하지 않고, 포도나무 싹을 시들게 하지 않고, 아스팔트를 녹이지 않고 또 칼날에 지워지지 않는 녹을 남기지도 않더라! 

 

  부샤르가 여자 조수이자 실험동물과 혼인을 피하기 위해 황급히 파리를 떠났을 때 생물학은 아주 전도유망한 연구자 하나를 잃었다. 그는 행운의 여신을 찾아서 로마 교황청으로 향했다. 원하는 건 아주 소박했다. 이교도들의 땅에서, 아니면 브르타뉴에서라도, 연간 육칠천 리브르 수입이 있는 작은 성직자 직급을 하나 얻는 것. (연간 6500리브르는 데카르트가 유산을 현명하게 굴려서 얻는 수입. 그건 물론 호화롭지는 못하지만 철학자가 신사처럼 살기에는 넉넉했다.) 

  가련한 부샤르는 결국 성직록을 받지 못했다. 당대에 <Panglossia>라는 글이나 콥트어와 페루어, 일본어를 포함해 마흔여섯 개 언어로 된 시선집의 우스꽝스러운 작자로 알려졌을 뿐인 그는 마흔이 못 돼 죽었다. 

(루덩의 악마들 1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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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포스트:

루덩의 악마들 11편 6 (최종)

루덩의 악마들 10편 4

루덩의 악마들 9편 6

루덩의 악마들 8편 1

루덩의 악마들 7-1편 3

루덩의 악마들 6편 2

루덩의 악마들 5편 3

루덩의 악마들 4편 4

루덩의 악마들 3-3편 3

루덩의 악마들 2편 1

루덩의 악마들 1편 8

루덩의 악마들 1편 7

루덩의 악마들 1편 6

루덩의 악마들 1편 5

루덩의 악마들 1편 4

루덩의 악마들 1편 3

루덩의 악마들 (1편 1)

역사의 메아리 (올더스 헉슬리 소개와 작품 해설 1)

역사의 메아리 (올더스 헉슬리 소개와 작품 해설 4. 끝)

역사의 메아리 (올더스 헉슬리 소개와 작품 해설 2)

역사의 메아리 (올더스 헉슬리 소개와 작품 해설 3)

 

  1. 위그노 (Huguenot) - 칼뱅 사상에 크게 영향 받은, 16-17세기 프랑스의 프로테스탄트. 바시의 학살, 성 바르톨로메오 학살 사건 등 극심한 박해를 받았다. [본문으로]
  2. Van Dyck, Anthony (1599–1641) - 플랑드르의 화가. 앤트워프 출신. 네덜란드와 이탈리아에서 활동한 뒤 잉글랜드에서 대표적인 궁정화가가 됐다. 초상화, 인물화를 많이 그렸다. [본문으로]
  3. 루터의 종교개혁 95개조 반박문으로 실추된 가톨릭교회의 권위를 되찾고 새로운 개혁을 이루기 위해 열린 회의. 1545년부터 1563년까지 모두 25회 열렸다. [본문으로]
  4. 1575년 로마에서 필립 네리가 설립한 성직자 모임. 필립 네리(1515-1595)는 반종교개혁 운동의 한 기둥. 음악을 신에게 봉사하는 수단 중 하나로 중히 여겼으며, 많은 음악가들이 그가 설립한 오라토리오회에 참여했다. [본문으로]
  5. Bayle (1647-1706) - 네덜란드 출신 프랑스 계몽주의 선구자. 18세기 사상의 실제적 원전. 저술가, 신학자. <역사와 비판 사전> [본문으로]</역사와>
  6. 갈리아주의 (Gallicanism) - 교황의 권위를 강조하는 교황지상주의에 반대하여, 교황 권력을 제한해야 한다는 프랑스의 역사적 움직임. 하지만 프랑스 예수회는 교황지상주의를 적극 옹호. [본문으로]
  7. 트렌토 공의회 이후 프랑스 교계 분위기를 다룬 앙리 리의 <대처 금지 역사> 29장 - 저자 주 [본문으로]</대처>
  8. Bouchard (1606-1641) - 프랑스 작가. 루이 13세 비서관의 아들. 에로 문학과 고백록. [본문으로]
  9. 하벨록 (Havelock Ellis, 1859-1939) - 영국의 의사, 심리학자, 사회평론가, 성과학자. 크라프트에빙 (Krafft-Ebing, 1840-1902) - 정신신경질환 교수. 저서 <성적인 정신병 psychopathia sexualis> (1886) 허시펠트 (Hirschfeld, 1868-1935) - 유대계 독일 의사, 성과학자. [본문으로]</성적인>
  10. 플로스 (Hermann Ploss, 1819-1885) - 독일 인류학자, 민속학자, 부인병학자. 바텔스 (Johann Bartels, 1769-1836) - 독일의, 나중에 러시아의 수학자, 교육가. 페르넬 (Fernel, 1497–1558) - 프랑스 내과의. 신체 기능 연구를 묘사하기 위해 ‘생리학’, ‘병리학’이라는 용어를 도입. 페르넬리우스라는 달 분화구 명칭은 그의 라틴어 이름을 따서 명명한 것. [본문으로]
  11. 렘니우스 (Levinus Lemnius, 1505-1568) - 덴마크 의사, 저술가. 수태와 출산의 비밀 연구. 로데리쿠스 카스트로 (Rodericus a Castro) - 부인 질환 연구서 저자.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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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덩의 악마들  

The Devils of Loudun 

 

 

올더스 헉슬리 저

(번역, 주석, 해설 – 김성호)

 

올더스 헉슬리 루덩의 악마들 the devils of loudun

 


 

1

 

  이름난 풍자 작가요 나중에 주교가 된 조셉 홀[각주:1]이 1605년 처음으로 플랑드르[각주:2] 지역을 방문했다. 

  「여로에서 우리는 파괴된 교회들을 얼마나 많이 보았던가. 도처에 남은 거친 잔해들이 신앙과 더불어 동족상쟁 역시 처절했음을 여행자에게 말해준다. 오오, 전쟁의 참혹한 흔적이여! 그러나 교회들은 무너졌다 해도 (경탄스럽게) 도처에서 예수회 칼리지들이 나타난다. 내가 들른 도시마다 이 학교들이 이미 문을 열었거나 세워지는 중이었다. 

  이 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과연 정책이 신앙보다 더 중요한 것인가? 이 사람들은 저주를 가장 많이 받는 곳에서 (여우처럼) 일을 가장 잘 꾸려 간다. 저희 진영에서 극도로 괴롭힘을 당하고 모든 이들한테 미움을 받고 우리의 저항에 부딪치면서도 이 독한 잡초들은 쑥쑥 자란다.」   

 

  칼리지들은 아주 단순하고 확실한 이유 때문에 우후죽순처럼 등장했다. 바로 수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조셉 홀과 그 세대가 잘 알고 있었듯이 예수회원들은 이른바 ‘정책’을 가장 중시했다. 예수회가 학교를 계속 세운 까닭은 적대자며 자유사상가며 프로테스탄트들에 맞서 로마가톨릭교회를 강성하게 만들기 위함이었다. 예수회원들은 젊은이들을 가르쳐 교회 이익에 전적으로 헌신하는 계층을 만들고자 했다.[각주:3]

 

  이런 현상을 체루티가 아주 잘 표현했다. 「우리가 다리를 곧게 펴 주려고 갓난애 아랫도리를 천으로 동여매듯이, 사람을 평생 건강하고 유복한 상태로 만들려면 유년기부터 의지를 동여매야 한다.」 (이 언급에 줄 미슐레[각주:4]가 극도로 분개했다.) 

  교육자들 의도야 정말 단호했지만 그 뜻을 알리고 지도하는 방법이 미흡했다. 학생들 의지를 천으로 동여맸음에도 불구하고 예수회 최우수 생도들 중 몇몇은 칼리지를 졸업하자 열렬한 자유사상가가 됐고, 장 라바디[각주:5]처럼 프로테스탄트가 된 이들도 있었다. ‘정책’이 관련된 이상 교육 체계는 설립자들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했다. 

 

  그러나 다중은 정략적 측면에 관심이 없었다. 그저 저희 자식들이 젊은 교양인으로서 갖춰야 할 것을 다 배울 수 있는 학교가 중요할 뿐이었다. 이런 요구에 예수회원들이 다른 대다수 교육 공급자들보다 더 잘 부응했다.

 

  「예수회 지붕 아래서 보낸 일곱 해 동안 나는 무엇을 눈여겨보았던가? 온건하고 근면하고 절도 있는 생활. 예수회 수사들은 하루 모든 시간을 우리들 교육에, 혹은 그들 서원을 엄격히 실행하는 데 바쳤다. 내 말이 사실임을 입증하기 위해 나처럼 그들 밑에서 교육받은 수천 명이 증언하기를 바란다.」  

  볼테르가 그렇게 적었다. 이 말은 예수회 교수법이 아주 뛰어나다는 점을 여실히 증명한다. 이와 동시에, 볼테르의 생애 자체는 학습을 ‘정책’이라는 목표에 맞추려고 한 교육자들의 시도가 얼마나 허망한 것이었는지를 한층 더 확실하게 입증한다.[각주:6]   

 

  볼테르가 칼리지에서 공부하던 때, 예수회 학교들은 이미 잘 알려지고 익숙한 현상이었다. 그러나 한 세기 이전 교육 현장에서는 칼리지의 많은 장점이 정말 혁명적이었다. 대다수 교육자들이 회초리 휘두르는 능력 이외에는 모든 면에서 아마추어이던 그 시기에, 예수회원들의 교육 방식은 제법 인도적이었으며 교수진도 신중하게 선별돼 체계적인 훈련을 받았다. 

  여기서는 고급 라틴어를 가르치고 광학과 지리와 수학, 극작 분야에서 최신의 성취를 들려주고 (그들의 학기 말 연극 공연은 유명했다), 좋은 예절과 교회에 대한 존중과 (적어도 프랑스에서 앙리 4세가 가톨릭으로 개종한 이후에는) 국왕 권위에 복종하기를 가르쳤다. 

 

  바로 이런 이유로 예수회 칼리지들이 전형적인 상류 부유층 취향에 맞았다. 즉, 애지중지하는 아이가 구식 교육에 시달리게 할 수는 없다고 마음먹은 어머니들, 그 자신이 학식을 갖추고 있으며 건전한 교리와 키케로 식 달변에 관심이 큰 숙부들, 또 그 자신이 애국심 있는 관리로서 군주제 원칙을 인정하거나 미리 앞을 내다보는 부르주아로서 예수회가 폭넓은 연줄로 제자들한테 좋은 직무나 궁정의 한 자리, 교회 명예직 따위를 찾아주겠지 기대한 아버지들… 바로 그들 입맛에 딱 맞은 것이다. 

 

  예를 들어, 루앙 시의 코르네유 부부 같은 이들을 보자. 가장은 왕실 고문변호인이고 아내는 변호사 딸인 마르트 르 프장. 어린 아들 피에르가 특출한 재주를 보이는데, 어떻게 칼리지에 보내지 않을 수 있겠나?[각주:7] 

   혹은 렌 시의회 고문인 조아킴 데카르트를 보자. 그는 1604년 총명한 막내아들 르네를 여덟 살밖에 안 됐지만 공부시키느라 라 플레시로 데려간다.[각주:8] 얼마 전 국왕의 승인을 받아 문을 연 예수회 칼리지로. 

 

  또 거의 비슷한 시기, 생트 시에 학식 있는 참사회 위원인 그랑디에가 있다. 그에게 조카가 있으니, 비록 데카르트나 코르네유 같이 부유한 귀족은 못 되더라도 당당한 사회 구성원인 또 다른 법률가의 아들이다. 우르뱅이라는 이름의 이 소년은 이제 열네 살이며 지극히 영리하다. 가장 좋은 교육을 받을 자격이 충분한데 생트 인근에는 보르도의 예수회 칼리지보다 더 좋은 학교가 없었다. 

  이 유명한 배움터에는 소년들을 위한 중등 과정과 우아한 예술을 가르치는 칼리지, 신학교, 사제 임명 뒤에도 더 공부하고 싶어 하는 형제들을 위한 심화 과정이 다 있었다. 조숙하고 영리한 우르뱅 그랑디에가 여기서 십년을 넘게 보냈다. 중등학생에서 신학 대학생으로, 그리고 나이 스물다섯 된 1615년 이후 예수회 수련수사로… 그렇긴 해도 수도사가 될 마음은 없었다. 예수회 엄한 규율을 따를 소명감을 충분히 느끼지 못했으니까. 

 

  아니야, 수도회 안이 아니라 수도원 담장 밖에서 교구 신부로 커리어를 쌓고 싶어. 재주가 뛰어난데다가 막강한 교회 조직의 비호를 받는 사람은 이 직업에서 많은 것을 꿈꿀 수 있잖아. 

  예를 들어, 어떤 고관대작의 종교의식 담당이나 나중에 프랑스 육군원수나 추기경이 될 사람의 영적 카운슬러가 되는 거야. 또 주교 회의나 왕실 공주들 앞에서, 심지어 왕비 면전에서 뛰어난 언변을 과시할 기회가 분명 있을 것이야. 어디 그뿐이랴, 외교 사절이나 고위 행정직, 수입 좋은 명예직, 구미 당기는 불로소득 따위도 가능해. 또 (귀족 출신이 아니기에 확률이 떨어지긴 해도) 운이 좋다면 주교 예모로 머리를 장식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인생 노년이 화려하게 보장되는 거야. 

 

  그의 이력 초기에는 그런 장밋빛 꿈이 다 이뤄질 수 있는 듯싶었다. 신학과 철학을 이태 동안 깊이 연구한 뒤 스물일곱 나이 젊은 그랑디에 신부가 오랜 기간 근면하고 모범적으로 살아온 보상을 받았으니 말이다. 

  예수회가 루덩 시에 있는 생피에르 뒤 마르셰 교구라는 중요한 생활 수단을 선사한 것. 같은 후견인들 덕분에 성 십자가 공주 성직자단 교회의 참사회 위원도 됐다. 사다리에 발을 걸쳤으니, 이제 할 일은 올라가는 것만 남았다. 

 

(루덩의 악마들 1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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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포스트:

루덩의 악마들 1편 3

루덩의 악마들 1편 4

루덩의 악마들 1편 5

루덩의 악마들 1편 6

루덩의 악마들 1편 7

루덩의 악마들 1편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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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메아리 (올더스 헉슬리 소개와 작품 해설 4.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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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덩의 악마들 11편 1

루덩의 악마들 10편 1

루덩의 악마들 9편 1

루덩의 악마들 8편 1

루덩의 악마들 7-1편 1

루덩의 악마들 6편 1

루덩의 악마들 5편 1

루덩의 악마들 4편 1

루덩의 악마들 3-1편

루덩의 악마들 2편 1

 

  1. 조셉 홀 (Joseph Hall1, 574-1656) - 잉글랜드의 주교, 모럴리스트 문인, 풍자가. 호주가 발견되기 이전 남부 대륙의 환상적인 여행과 거기 풍습을 풍자적으로 묘사한 <다르면서도 같은 세상 mundus alter et idem>(1605)의 저자. 이 책은 여러 모로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의 전신으로 평가된다. [본문으로]</걸리버></다르면서도>
  2. 플랑드르 - 현재의 벨기에 서부, 프랑스 북부, 네덜란드 남서부를 포함하는 지역. [본문으로]
  3. 예수회 - 종교개혁 시기인 1534년 성 이냐시오 로욜라가 세운 로마가톨릭 수도회. 과격한 전투적 가톨릭 수호 선교기관. 1. 교육에 중점 2. 종교개혁에 대항 3. 세계 선교 등이 주요 목표. [본문으로]
  4. Jules Michelet (1797-1874) - 프랑스의 역사가, 사회평론가. 교회권력 반대자. 역사와 사회, 자연에 관해 아주 주관적인 책을 명료하고 격동적인 언어로 여러 편 썼다. ‘르네상스’ 용어의 창시자. [본문으로]
  5. Jean Labadie (1610-1674) - 프랑스 신학자, 가톨릭에서 프로테스탄트로 개종하고 경건주의 단체인 라바디파를 만들었다. (경건주의/Pietism - 정통 프로테스탄트에 맞서는 신비주의적 가르침, 보수주의와 반지성주의가 특색) [본문으로]
  6. Voltaire (1694-1778) - 프랑스의 작가, 사상가, 계몽주의 시대의 대표자. 18세기 유럽의 전제 정치와 종교적 맹신에 저항하고 진보적 이상을 고취. 비판 정신과 재치, 풍자 같은 프랑스 정서 특유의 자질을 구현한 작품 활동으로 유럽 문명 진로에 큰 영향을 끼쳤다. [본문으로]
  7. 피에르 코르네유(1606-1684) - 몰리에르, 라신과 함께 17세기 프랑스의 3대 극작가. [본문으로]
  8. 르네 데카르트(1596-1650) - 프랑스의 철학자, 과학자, 수학자.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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