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오래 살았다면, 일이 잘 안 풀리는 경우가 제법 많다는 것을 안다. 인생에서 고통과 슬픔을 없애고 싶다면, 그런 경우에 승복할 필요가 있다. 있는 것을 수용하는 즉시 마인드와 동일시에서 벗어나며 <존재>와 다시 연결된다. 저항은 마인드가 하는 짓이다. 승복은 순전히 내적인 현상이다.
승복한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삶의 흐름에 나 자신을 맡긴다는 뜻
우리네 마인드는 현재 순간에 저항합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거기엔 이유가 있어요. 마인드가 현재 순간을 겁내기 때문이에요. 삶이 매 순간 새롭게 달라지기 때문에 현재라는 순간은 늘 새로운데, 이 새로운 것을 우리네 평범한 마인드는 두려워합니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유지하려고 애써요.
그렇기 때문에 만약 자신을 마인드와 동일시한다면,
우리도 역시 새로운 순간을 겁내고 거기에 저항하고, 그래서 현재 순간에서 떨려나게 됩니다.
그러나 현재 순간에서 떨려난다는 것은…
삶에서 내몰린다는 뜻 아니겠어요?
게다가 현재 순간에서 떨려난다는 것은…
자신을 스스로 고통에 몰아넣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저항에는 고통이 따르기 마련이다.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것에 맞설 때, 우리에겐 불만과 고통이 반드시 따라붙는다.
더 이상 고통 받지 않고 행복해지는 유일한 방법으로 에크하르트 톨레가 제시하는 것이…
<현재 순간 받아들이기>입니다. 이걸 배우기 위해 우리는 이미 많은 것을 알고 수행했습니다.
그런데 받아들인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뭔가요?
그 개념을 더 깊이 알아볼 시간이 됐습니다.
그건… 현재 순간에 우리가 접하는 것이 전부 실제이며 그것을 상대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에서만 그치지 않습니다. 그런 인정은 이성에서 더 많이 나올 겁니다.
현재 순간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뿐 아니라, 또한 거기에 푹 잠겨 그 안에 머물면서 그것을 저항 없이 따르기도 해야 합니다. 그런 까닭에 에크하르트 톨레는 수용의 필요성을 언급하면서 그 개념을 더 또렷하게 만들기 위해 승복이란 단어를 씁니다.
이게 무슨 말인지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이 대목에서 아주 중요합니다.
승복을 우리는 바람직하지 못한 것으로 보는 경향이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힘겨운 상황에 처한 사람에게 “절대 굴하지 마, 단념하지 마!” 하고 말하는데, 이건 아주 적절하고 올바른 촉구입니다. 또, 자신의 훼손된 권리를 법적 근거에서 옹호하는 사람한테 “자네 입장을 포기하지 마, 양보하지 마!” 하고 말하는데, 이것 역시 반박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같은 말이라도 (단어라도) 다른 맥락에서 쓸 수 있지 않겠어요?
우리는 존중하는 사람이나 연장자에게 길을 기꺼이 양보합니다.
돛을 달고 항해하거나 서핑을 한다면, 바람이나 파도의 힘에 굴할 수 있습니다.
잘 알지 못하는 길을 갈 때, 우리를 이끄는 권리를 강한 리더에게 맡기면서 스스로 길을 택할 권리를 포기하기도 합니다.
어떤 강렬한 느낌이나 열정을 좇음으로써 외려 자유롭고 편안하며 삶의 흐름에 어렵잖게 올라탄다고 느낄 수 있어요.
이렇게 보니까, 양보나 승복이라는 개념이 자기 권리를 내던지거나 자신을 비하하는 등 뭔가 나쁜 쪽과 연관된 것만은 아니로군요. 사실, 세상 거의 대부분의 것은 상대적이지 않겠어요?
승복한다는 것이 마뜩치 않은 것을 따르거나 나쁜 뭔가를 꾹 참는다는 뜻은 전혀 아닙니다.
그렇게 할 필요는 정말 없어요.
그러나 지금 우리가 얘기하는 것은 나쁜 것에 승복한다는 게 아니라…
현재 순간에 승복하며, 지금 여기 있는 것과 진짜 현실과 <존재>에 승복한다는 얘기입니다.
만약 괴로워하고 불만이나 불안을 느낀다면… 이게 의미하는 것은 단 하나밖에 없습니다.
‘아, 내가 지금 삶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거스르고 있구나!’ 바로 이것입니다.
이건,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이 있지 않기를 바라는 거예요.
지금 여기 있는 것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 거예요.
만약 삶에서 뭔가가 마음에 안 든다면, 우리는 바꿀 수 있어요.
참기만 하면서 계속 고통 받아선 안 돼요.
그러나 뭔가를 바꿀 수 있으려면…
먼저, 지금 여기 있는 것을 받아들여야 해요.
에크하르트 톨레는 저항하지 않는 것이 행동하지 않는다는 뜻은 전혀 아니라고 말합니다.
자연스러운 흐름에 저항하기를 멈추면, 더 효율적으로 움직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영원한 원천인 <존재>에서 우리한테 힘이 들어올 테니까요. 게다가 저항이며 저항에 수반되는 부정적 감정에 에너지를 허비하지 않을 테니까 말이죠.
<지금>이라는 순간을 받아들이는 것은… 삶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받아들임이요 거기에 거스르지 않음을 뜻한다. 만약 삶을 우리가 거기에 섞여 따라가는 흐름으로 느낄 수만 있다면… 현재 순간에 머무는 것은 찰나적인 느낌이 아니라 끊임없는 과정이 될 것이다.
실습 37
혼자 떨어져서 편안한 자세를 취하고 눈을 감으십시오.
주의를 내면으로 기울이고 <지금> 순간과 연결하세요.
자신을 파도라고 상상하십시오.
우리는 다 망망대해의 일부분입니다.
우리 각자는 그 드넓은 바다가 지닌 힘의 일부요, 바다에 깃든 평온함의 일부입니다.
그 힘과 평온함이 이제 파도가 된 우리를 어떻게 움직이는지 느끼면서, 우리는 해면을 따라 천천히 부드럽게 굴러갑니다.
무자각 상태는 우리가 자신을 마인드며 생각의 흐름과 동일시할 때 생깁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생각하는 과정에는 생각만 들어가는 게 아니에요. 여기엔 또 늘 불안에 시달리는 에고가 만들어 내는 욕망과 감정과 신체 반응도 들어갑니다.
무자각이란 본질적으로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이건 현재 순간에 대한 저항이다. 이건 있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려 함이다. 이건 삶과 자기 자신에게서 달아나는 것이다.
자신이 그렇게 한다는 것을 대다수 사람들은 알아차리지도 못합니다. 단적으로, “내가 왜 그렇게 말했는지 나도 모르겠어” 하는 경우가 그렇습니다. 또 “하지만 난 아무 것도 회피하지 않고 그 무엇에도 맞서지 않아” 하고 말은 하지만, 자기 자신과 자신의 반응을 잘 살펴본다면 실제로 우리 안에서는 현실과 투쟁이 늘 벌어지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이런 예를 들어 볼까요. 버스에서 불편하게 앉아 장시간 가야 하는 경우에 우리는 뭔가 불쾌감을 느껴요. 한데, 그걸 느끼고 싶어 하지 않으면서 그냥 꾹 참고 시계 들여다보며 ‘이 상태가 곧 끝나겠지’ 하는 생각만 해요.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느끼는 것을 느끼고 싶어 하지 않아요.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아요.
그 상황이 얼른 지나가고 다른 뭔가로 대체되기를 바랍니다.
얼핏 보기에는, 불편하거나 불쾌한 상황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게 얼른 끝나기를 바라는 것이 당연한 듯싶기도 해요. 우리네 마인드가 ‘그렇게 느끼지 마, 그냥 털어 버려, 받아들이지 마!’ 하고 말하는 것 같아요. 있는 것을 느끼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 이건 곧 자각하지 못하거나 않는다는 뜻이거든요.
마인드는 그렇게 우리를 호립니다. ‘뭔가를 받아들이지 않는 게 자연스러운 거야’ 하고 속삭이면서 말이죠. 하지만 그건 사실 자연스러운 게 전혀 아니에요. 우리는 모든 것을 다 겪고 그 무엇도 회피하지 않으면서 다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세상에 나왔습니다.
세상엔 편안한 것뿐 아니라 불편한 것도 있어요. 불편하고 불쾌하다 해서 피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들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지만 ‘지금 여기 있는 것’을 인식하고 수용하지 않는다면, 올바른 해결책을 찾을 수 없고 출구를 못 보지 않겠어요?
사람들이 같은 문제를 두고 몇 해씩 고민하면서도 해결하지 못한다면… 이건 그들이 자신의 문제에 눈을 감고 문제를 직시하려 하지 않는다는 확실한 반증이다.
가장 흥미로운 점은… 불편한 무엇조차 객관적인 사실로 주어져서 어차피 겪어야 할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그 불편이 스르르 사라지며, ‘아하, 그래, 삶의 매 순간을 정말 즐길 수 있다’는 점을 알게 되는 겁니다.
우리가 <존재>의 수준에 이르게 되면, 거기엔 오로지 기쁨과 즐거움만 있으며, ‘이건 나쁜 순간이야, 좋은 순간이야. 이건 편하고 저건 불편해’ 하는 판단이 없어집니다.
불편한 상황을 있는 그대로, 피할 수 없는 현재 순간으로 받아들이다 보면, 예전엔 알아차리지 못하던 것을 분명 알아차리게 될 거예요. 예를 들어, 1) 앞에 탄 버스에서 불편한 상황에서도 다른 이들을 둘러보며 그들 감정과 기분을 느끼면서 어떤 흥미로운 점을 알게 되겠지요. 2) 혹은 차창 너머 스쳐가는 풍경에 흥미를 느끼거나, 그 상황에서 즐길만한 것을 분명히 찾아낼 겁니다. 3) 물론 무엇보다 더 큰 즐거움은 ‘아, 내가 이렇게 살아 있어 버스를 타고 갈 수 있구나’ 하고 느끼는 것 등이겠습니다.
바로 이렇게 <지금> 순간을 선명하고 충만하게 느낍니다. 우리는 마인드가 강제하는 불편한 상황이나 반응이나 감정의 노예가 더 이상 되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사실상 파괴적인 마인드의 작동 이면에서 다른 뭔가를 보고 느낄 겁니다.
실습 12
뭔가 불편하거나 걱정되고 불안하게 느껴질 때, 그런 반응을 바깥에서 하듯이 관찰해 보세요. 집중이 잘 안 된다면, 이렇게 자문하십시오.
‘내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지금 난 어떻게 느끼고 있지?’
‘무엇 때문에 침착하지 못한 건가?’
두 가지 실재가 (현실이) 있음을 알아둬야겠습니다.
하나는 외적인 것으로서 주변 세상의 실재, 다른 하나는 내적인 것으로서 우리 생각과 감정의 실재… 그리고 외부 세계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결정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내적 실재입니다.
이 외부세계를 우리는 객관적으로 볼 수 있어요. 조화롭고 기쁨 넘치고 평온이 가득한 <존재>의 실제로 말이지요.
이 외부세계를 우리는 왜곡되게 볼 수도 있어요. 우리의 내적 불안과 불만과 불쾌함이 투영된 것으로 말입니다.
뭔가 불편하거나 불쾌한 게 있다면, 그걸 유발하는 것이 무엇인지 내 안에서 찾아보십시오.
한데, 그런 것은 우리가 현실을 인정하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을 때만 생깁니다.
당신의 경우, 받아들이지 않는 게 정확히 무엇인가요?
자신에게 말하세요.
“이건 그냥 있는 거야. 난 이걸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그렇게 받아들이면 불편함이나 불쾌감이 사라지고, 그게 어떤 것이든 매 순간을 즐거워하게 됩니다.
당신이 처한 상황이나 주변 환경, 생활 형편, 다른 이들의 언행이나 하다못해 날씨를 두고도 말이나 생각으로 불평하는 자신을 포착할 수 있는지 보라.
불평이란 전부 지금 있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뜻이야.
거기에는 자기도 모르는 부정적인 충전이 늘 실린다.
그래서 불평하는 사람은 스스로 자신을 피해자나 희생양으로 만든다.
불평하는 대신 자신이 체감하는 것을 터놓고 말하고 얘기하라. 그러면 힘을 얻는다.
그러니 필요하거나 가능하다 싶을 때 행동하거나 얘기함으로써 상황을 바꾸라.
그 상황에서 빠져나가거나, 아니면 받아들이라. 그 외에는 전부 미친 짓이다.
평범한 무자각은 항상 어떤 식으로든 <지금> 순간의 부정과 연결된다.
<지금> 개념에는 당연히 <여기>도 포함돼.
자신이 처한 ‘지금 여기’에 저항하고 있나?
‘여기’보다 다른 어딘가에 있기를 늘 꿈꾸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여기’는 아주 좋을 리가 만무하다. 혹시 나도 그런 축에 들지는 않는지, 자기관찰을 통해 알아보라.
어디에 있든, 거기에 온몸과 온 마음으로 있으라.
만약 ‘난 지금 여기가 견디기 힘들고’ 그래서 불행하다면, 선택할 수 있는 길이 세 가지 있다.
1) 그 상황에서 벗어나고 피하기 2) 그 상황을 바꾸기 3) 그 상황을 완전히 받아들이기.
자기 삶을 책임지고 싶다면, 이 세 가지 중 하나를 택해야 하며, 지금 당장 해야 한다. 그 다음에 결과를 받아들이라. 핑계대거나 변명하지 말고. 부정적인 생각이나 감정이 전혀 없이. 심령을 더럽히지 말고. 자신의 내면 공간을 늘 맑게 유지하라.
현재 처한 상황을 벗어나거나 바꾸는 행동을 취한다면…
먼저 부정적인 생각이나 감정이나 태도를 최대한 내던지라.
필요한 것에 대한 직관이나 통찰력에서 나오는 행동이 부정성에서 비롯되는 행동보다 더 효율적이다.
무엇이든 행동을 취하는 것이 전혀 움직이지 않는 것보다 더 나을 때가 많다. 불편하거나 불쾌한 상황에 오랫동안 매여 있는 경우에 특히 더 그렇다. 만에 하나 그 행동이 오류가 된다 해도 최소한 뭔가는 배우게 되고, 그런 경우에 그건 단순히 실수로만 남지는 않는다. 꼼짝도 안 한다면, 아무 것도 습득하지 못해.
두려움 때문에 행동하지 못하고 있나?
그 두려움을 인식하고 지켜보고 거기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그것과 완전히 함께하라. 그렇게 하면 그 두려움과 당신 생각의 연결이 끊어진다.
두려움이 자기 마인드에 스며들게 놔두지 마. <지금> 순간의 힘을 활용해. 두려움은 그 앞에서 버틸 수 없어.
만약 자신의 ‘지금, 여기’를 바꾸기 위해 할 수 있는 게 정말 아무 것도 없고 그 상황에서 벗어날 수도 없다면… 내면의 저항을 내던지고 그 ‘여기와 지금’을 통째로 받아들이라. 그러면… 자신을 비참하거나 분노하거나 가엾게 느끼기를 즐기는 <불만에 찬 거짓 나>가 더 이상 살아남을 수 없다. 이걸 우리는 승복(承服)이라 부른다.
승복은 나약함이 아니다. 거기엔 거대한 힘이 들어 있어. 승복한 사람만이 영적 파워를 지닌다. 승복을 통해 우리는 그 상황에서 내적으로 자유로워질 것이다. 그러면 내 쪽에서 아무런 노력을 들이지 않는데도 상황이 변하는 것을 발견할 수도 있다. 어떤 경우에든 우리는 자유롭다.
혹은, 뭔가 꼭 해야 하는데 꾸물거리면서 하지 않는 일이 있나?
그렇다면 지금 당장 일어나서 하라. 그렇게 하지 못하겠다면…그 순간 자신의 무활동이나 게으름이나 소극성을 전적으로 받아들이라. 그 상태에 완전히 들어서라. 그걸 즐기라. 할 수 있는 만큼 빈둥거리거나 행동하지 말라.
그 상태에 의식적으로 완전히 들어선다면, 금방 거기서 나올 것이야. 어쩌면, 나오지 않을지도 모르지. 어느 쪽이든 내적 갈등이나 저항이나 부정적인 것은 하나도 없다.
음, 스트레스를 받고 있나? 미래로 나아가느라 바빠서 현재 순간을 거기 도달하는 수단 정도로 치부하나? 스트레스란… ‘여기에’ 있으면서 ‘저기에’ 있고 싶어 하거나 현재에 있으면서 마음은 미래에 가 있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이 분열이 우리 내면을 쪼개 놓는다. 내면을 그렇게 쪼개면서 산다는 것은 정말 무분별한 짓이다. “다른 사람들도 다 그렇게 사는데, 뭐” 해봤자 그 무분별이 (미친 짓이) 줄어드는 건 아니다.
필요하다면, 미래를 그리지 않고 현재에 저항하지 않으면서도 빨리 움직이고 부지런히 일할 수 있다. 달려갈 수도 있다. 일단 움직이고 일하고 달린다면… 거기에만 몰두하라. 그 순간에 팽배하게 흐르는 에너지를 즐기라.
그러면 더 이상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자신을 (현재에 있는 나와 미래에 가 있는 나) 둘로 쪼개지도 않는다. 그냥 움직이고 일하고 달리면서, 그걸 즐기라.
아니면 모든 걸 다 내던지고 공원 벤치에 앉아 있을 수도 있어. 하지만 그럴 때 자기 마인드를 주시하라. 마인드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넌 일해야 돼.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 마인드를 지긋이 지켜보라. 거기에 미소 지으라.
주의나 눈길이 자꾸 과거로 돌아가나?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과거에 대해 자주 말하거나 생각하나? 자신의 성공담, 모험이나 체험, 혹은 자신이 피해자가 됐던 스토리나 당했던 끔찍한 일, 혹은 누군가에게 한 짓 등을?
생각하는 과정에서 죄책감이나 자부심, 분개, 적대감, 후회, 원망, 자기연민 같은 것이 일어나나?
만약 그렇다면, 그건 거짓된 자아감을 강화할 뿐 아니라 또한 마음속에 과거를 쌓아둠으로써 자기 몸의 노화를 가속화하는 것이다. 주변에서 자기 과거에 심하게 매달리는 사람들을 관찰해 보면, 이 사실을 직접 확인할 수 있다.
그게 자신의 일일 수도 있고 혹은 누군가에게 뭔가를 하겠다고 동의해서 하긴 하는데, 마음 한편에서 화가 나고 저항하는 것일 수도 있다.
가까운 사람에게 무언의 분노를 품고 있나?
이 때문에 자신에게서 발산되는 에너지가 주변 사람들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악영향을 끼칠 만큼 해롭다는 것을 알고 있나?
자신의 내면을 잘 들여다보라.
노여움이나 께름칙한 기미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지는 않나?
만약 있다면, 그걸 마인드와 감정 두 가지 측면에서 관찰하라.
이 상황을 피하려고 마인드는 어떤 생각들을 만들어 내고 있나?
다음에, 그 생각들에 대해 몸이 드러내는 반응인 감정을 살펴보라. 그 감정을 느끼라.
느낌이 좋은가? 아니면, 불쾌한가?
그것이 실제로 당신 내면에 두려고 하는 에너지인가?
다른 선택의 여지가 있나?
어쩌면 당신이 이용당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을지도 모르고, 어쩌면 하는 일이 지겨울 수도 있고, 어쩌면 가까운 사람이 정직하지 않거나 짜증을 유발하거나 혹은 지각이 없을지도… 하지만 그런 건 다 상관이 없다.
이 상황에 대한 당신의 생각과 감정이 옳든 아니든 차이가 전혀 없다.
사실, 당신은 지금 있는 것에 저항하고 있다. 현재 순간을 자신의 적으로 바꾸고 있다. 내면과 외부 간에 충돌과 불만을 만들고 있다.
당신의 불만은 자신과 주변 사람들의 내적 존재뿐 아니라 당신도 포함되는 집단적 인간 심리까지 더럽힌다. 지구 오염은 인간들 내면의 심적 오염이 밖으로 반영된 것일 뿐이다. 지각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내면 공간에 책임지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속으로 불만이나 화를 품고 있을 때 탈출구는 두 가지다.
1) 하는 일을 그만두고 당신이 느끼는 것을 상대에게 낱낱이 표현하기, 아니면…
2) 상황을 둘러싸고 마인드가 만들어 내며 거짓된 자아감 강화 외에는 아무 쓸모가 없는 부정성을 내버리기. 이것의 무익하고 무의미함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부정적 성향은 어떤 상황에 대처하는 최적의 방법이 못된다. 실제로 대부분의 경우 부정성은 우리를 꼼짝 못하게 잡아둠으로써 진정한 변화를 가로막는다. 부정적인 에너지가 수반되어 실행된 것은 무엇이든 그것으로 오염되고, 시간이 지나면서 아픔과 불만을 더 많이 초래하기 마련이다. 게다가 부정적인 내면 상태에는 전염성이 있다.
불만은 신체 질환보다 더 쉽게 퍼진다. 불만은 공명 법칙을 통해 다른 이들의 잠복된 부정성을 촉발하고 키운다. 물론, 그들이 면역성을 얻기 전까지, 즉, 고도의 의식을 얻기 전까지는 그렇다.
우리는 세상을 오염시키고 있나? 아니면, 쓰레기더미를 치우고 있나?
우리는 다 자신의 내면 공간에 책임을 져야 한다. 다른 누가 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지구에 책임을 져야 한다. 내면에서 하는 대로 바깥에서도 하기 마련이다. 만약 사람들이 내면의 오염을 청소한다면, 외부도 더 이상 오염시키지 않을 것이다.
- 당신이 제시한 대로 부정성을 내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그냥 내던지라. 손에 들고 있는 뜨거운 석탄덩어리를 어떻게 내던지나? 가지고 다니는 짐 가운데 무겁고 쓸모없는 것을 어떻게 내던지지? 아픔 겪거나 무거운 짐 지기를 더 이상 원치 않음을 인식하고, 부정적인 생각이나 감정을 놓아버리면 된다.
고통의 몸체 같이 깊은 무자각이나 사랑하는 이를 잃은 것 같이 깊은 아픔은… 대개 우리네 현존의 빛과 결합된 수용을 통해… 즉, 지속적인 주의와 관심을 기울이며 받아들임으로써 변환해야 한다.
이에 반해, 평범한 무자각은 대부분 쉽게 내던질 수 있다. 그걸 더 이상 원치 않으며 필요 없다는 것을 알고, 뭔가에 대뜸 조건반사를 내보일 게 아니라 다른 선택의 여지도 있다는 걸 깨닫기만 하면 된다.
이건 다 <지금> 순간의 힘에 접근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
- 만약 당신이 어떤 감정을 부정적인 것이라 부른다면, 앞에서 설명한 대로 선과 악의 정신적 양극단을 만드는 건 아닌가?
그건 아니다. 양극단은 초기 단계에서 만들어졌다. 당신 마인드가 현재 순간을 나쁜 것으로 판단했을 때 이미 양극단이 생겼다. 이 판단이 그때 부정적인 감정을 만들어 낸 것이다.
- 그러나 당신이 어떤 감정을 부정적인 것이라 부른다면, 그런 게 있어선 안 되며 그런 감정을 지니면 좋지 않다고 말하는 건 아닌가? 내가 이해하기에, 우리는 어떤 감정을 나쁜 것이라 판단하거나 그런 감정은 품으면 안 된다고 하기 보다는 어떤 감정이든 있도록 해야 하지 않나 싶다. 원망을 느껴도 좋고 노여움이나 짜증, 변덕을 느껴도 좋아. 안 그러면, 우린 자신을 억누르고 내적 갈등이나 부정에 빠진다. 어떤 것이든 다 괜찮다.
지당한 말씀. 어떤 마인드 패턴이나 감정이나 반응이 생기면, 그걸 받아들이라. 예전에는 우리가 자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뭘 선택해야 할지도 몰랐어. 이건 판단이 아니라 사실이야.
만약 선택의 여지가 있었거나 선택의 여지가 있음을 의식했다면, 우리는 고통과 기쁨, 평온과 불안, 평화와 갈등 중에서 뭘 택했을 것인가? 자신의 자연스러운 안녕 상태를 망가뜨리고 내면에서 삶의 기쁨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생각이나 감정을 택했을까?
나쁘고 안 좋음을 뜻하는 감정을 전부 난 부정적인 것이라 부른다. ‘넌 이걸 하면 안 돼’ 같은 의미에서 나쁜 게 아니라, 속이 불편한 느낌 같이 명백하고 실제로 나쁜 것을 뜻하는 감정을 부정적인 것이라 부른다.
20세기에만 사람들이 자기와 같은 사람들을 어떻게 1억 명 이상이나 죽일 수 있었나? 사람들은 서로에게 상상을 뛰어넘는 고통을 가한다. 서로에게 가하는 것만이 아니라 다른 감각 있는 존재들에게 매일 야기하는 고문과 고통과 잔혹함, 정신적 감정적 물리적 폭력까지 감안하면 참으로 끔찍하다.
그런 사람들은 과연 자신의 자연스러운 내면 상태와 내면에서 맛보는 삶의 기쁨을 알면서 그렇게 하는 것일까? 물론, 아니다. 아주 부정적인 상태에 있고 자신을 정말 혐오스럽게 느끼는 사람들만이 자기감정을 반영하여 그런 현실을 만들 수 있을 뿐이다.
그런 사람들이 지금 우리를 부양하고 떠받치는 자연과 지구를 파괴하고 있다. 믿기 어렵지만 사실이다. 인간이란 위험하리만치 광기에 사로잡히고 아주 병든 부류이다. 이건 판단이 아니야. 이건 사실이다. 한데, 이 광기 아래 멀쩡하고 온전한 정신이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치유와 구제는 지금 당장이라도 가능하다.
- 이제 당신 얘기를 구체적으로 떠올려보면, 자신의 분노나 적대감, 까칠함 등을 수용할 때 그런 것을 더 이상 맹목적으로 드러내지 않으며 다른 이들한테 투사할 개연성이 줄어든다는 것은 확실히 맞다. 하지만 그게 혹시… 자기 기만은 아닌지 궁금하다.
당신 경우처럼 한동안이라도 수용을 실천할 때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하는 시점이 다가오며, 그 단계에서는 부정적인 감정들이 더 이상 생기지 않는다. 그렇지 않다면… 당신이 말하는 ‘수용’이란 한낱 정신적인 라벨일 뿐이며, 이 상태에서는 당신의 <에고>가 여전히 불행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다른 이들이며 당신의 주변 환경이며 당신의 ‘지금 여기서’와 분리된 느낌만 커지게 된다.
알다시피 분리성은 에고의 정체감을 이루는 기반이다. 진정으로 수용했다면 그런 느낌들이 즉각 변형됐을 것이다. 당신 표현대로 모든 것이 다 괜찮다는 것을 정말 잘 알았다면, 그런 부정적인 감정들을 애초에 품고 있었겠나? 그런 감정은 지금 있는 것을 판단하고 거기에 저항하지 않고서는 생길 수 없을 거야.
당신 마인드에는 ‘모든 게 괜찮아’라는 생각이 있지만 더 깊은 곳에서는 그걸 믿지 못하고, 그래서 정신과 감정 측면의 낡은 저항 틀이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야. 이 때문에 기분이 나빠지는 것이고.
- 그것도 괜찮지, 뭐.
흠, 당신은 “난 무자각 상태가 되어 고통 받아도 좋아!” 하고 말하려는 건가? 걱정하지 마, 그렇게 하고 싶다면, 그럴 권리를 아무도 빼앗지 않을 테니까. 어떤 음식을 먹고 탈이 난 걸 알고 나서도 그걸 계속 먹으면서 “아, 탈이 나도 괜찮아” 하고 계속 주장하고 싶은 건가?
이 진실을 깨달으려면 그렇게 살아 볼 필요가 있다. 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삶의 활력을 느낄 만큼 현존하고 매 순간을 <존재>의 기쁨으로 느낄 수 있을 때, 비로소 시간에서 자유로워졌다고 말할 수 있다.
- 그러나 나에겐 내일까지 지불해야 할 청구서들이 있고, 결국 다른 사람들처럼 늙어서 죽겠지. 그런데 어떻게 시간에서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겠나?
내일 지불할 청구서들은 문제가 못 돼. 육신이 사라지는 것도 문제가 아니야.
'지금'이라는 순간을 잃는 것이 문제이다. 아니, 그것이 바로 단순한 상황이나 사건, 감정을 개인적인 문제나 고통으로 바꾸는망상의 본질이라고 하는 것이 더 옳겠다.
<지금>을 잃는 것은 <존재>를 잃는 것이다.
시간에서 해방된다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위해 과거를 필요로 하고 성취를 위해 미래를 필요로 하는 심리적 요구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이건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심오한 의식 전환이다.
이런 의식의 변화가 단번에 극적이고 근본적으로 일어나기도 하지만, 그런 경우는 매우 드물다. 이런 일은 대개 크나큰 고통의 한가운데서 완전한 승복을 통해 일어난다. 하지만 대다수 사람들은 이런 의식 전환에 공을 많이 들여야 한다.
시간 초월한 의식 상태를처음에 몇 번 얼핏 엿보게 될 때는, 시간과 현재의 차원 사이를 왔다 갔다 하게 된다. 그러면서 <지금> 순간에 우리네 주의가 얼마나 드물게 집중돼 있는지 먼저 깨닫는다.
그러나 현존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자체가 이미 큰 진전이다. 그 알아차림이 처음에는 몇 초밖에 지속되지 않는다 해도, 그렇게 알아차리는 것이 바로 현존이다.
그 다음에 우리는 의식의 초점을 과거나 미래보다 현재 순간에 더 자주 집중하면서, <지금> 순간을 놓쳤음을 깨달을 때마다 거기에 몇 초가 아니라 더 오랫동안 머물 수 있다.
따라서 현존하는 상태에 굳건히 자리 잡기 전에, 달리 말해 충분히 의식적인 상태가 되기 전에… 우리는 의식과 무자각 사이를, 현존하는 상태와 마인드 동일시 상태 사이를 한동안 왔다 갔다 한다. <지금> 순간을 잃었다가 거기로 되돌아가기를 몇 번이나 반복하게 된다. 그러다가 결국엔 현존이 (혹은, 실재가) 주된 상태가 된다.
대다수 사람들은 실재 상태를 전혀 체험하지 못하거나, 아니면 드문 경우에 단지 우연히 아주 짧게 겪는데, 그러면서도 그게 뭔지 분간하지 못한다. 대다수 사람들은 의식과 무자각 사이를 오가는 게 아니라, 여러 수준의 무자각 사이를 오가는 것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