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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9.07.18 루덩의 악마들 9편 5
  2. 2019.07.10 루덩의 악마들 1편 3
  3. 2019.07.10 루덩의 악마들 (1편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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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덩의 악마들  

The Devils of Loudun 

 

 

올더스 헉슬리 저

(번역, 주석, 해설 – 김성호)

 

올더스 헉슬리 만년

 


 

  수렝이 원장수녀에게 엑소시즘을 시작하자 일이 분 뒤 발람이 나타났다. 사지를 뒤틀고 경련을 일으키고 하느님을 거세게 모욕하는 말이 나오고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잔느의 배가 갑자기 부풀어 오르더니 곧 임신 막달에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이어서 가슴도 복부만큼이나 산더미처럼 부풀었다. 엑소시스트가 각 부위에 성유물을 대자 부풀어 오른 게 가라앉았다. 

  킬리그루가 한 발짝 다가서서 수녀의 손을 쥐어 보니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맥박을 짚어 보니, 느리고 희미했다. 원장수녀가 그를 밀치고는 제 두건을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거의 배코 치다시피 한 머리가 금방 드러났다. 그녀가 두 눈알을 굴리며 혀를 쑥 빼물었다. 혀는 엄청나게 부풀었는데 색깔이 검으며 모로코가죽처럼 바닥이 우둘투둘했다. 수렝이 발람에게 성체에 경배하라 이르면서 그녀를 풀어주었다. 잔느가 장의자에서 마룻바닥으로 미끄러져 내렸다. 오랫동안 발람이 완강하게 버텼지만, 결국에는 소정의 의식을 이행했다. 킬리그루의 기록을 계속 보자. 

 

  「그러고는 바닥에 눕자 허리를 뒤로 활처럼 꺾고 발뒤꿈치와 배코 친 맨머리로 몸을 지탱하면서 탁발수사를 따라 마룻바닥을 돌아다녔다. 또 다른 기이하고 부자연스러운 포즈들도 많이 취했는데, 그런 자세를 난 여태 본 적도, 사람이 할 수 있다고 여긴 적도 없었다. 게다가 이건 잠깐 취하다 만 동작이 아니라 한 시간 넘게 계속됐다. 그럼에도 그녀는 호흡 하나 흩트리지 않고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내내 혀를 밖으로 빼물고 있었는데, 그건 믿기 어려울 정도로 팽창돼 한순간도 줄어들지 않았다. 그러고 나서 마치 그녀를 산산조각 내는 듯한 공포의 비명이 나온 뒤 줄곧 한 단어만 읊조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건 바로 “요셉”이었다. 그 소리에 성직자들이 다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이건 신의 표시야, 저 자국을 봐!” 

  그녀가 내뻗은 손을 보면서 한 수도사가 자국을 찾았다. 몬태규 씨와 나도 꼼꼼하게 들여다봤다. 그녀 손바닥에서 다소 불그레한 색깔이 짙어지며 정맥을 따라 1인치쯤 반점들이 나타나더니 글자가 뚜렷하게 만들어지는 것을 나는 보았다. 그건 그녀가 읊조린 것과 같은 단어, ‘요셉’이었다. 이 자국은 악마가 약속한 것이라고, 예수회 수사가 말했다. 떠날 때 그렇게 만들 것이라고 했다는…」 

 

  엑소시즘 과정은 아주 상세하게 기록됐으며 매번 담당 엑소시스트가 그 문건에 서명했다. 그런 문건에 몬태규가 영어로 추신을 달고, 거기에 그와 킬리그루가 자기네 이름을 적었다. 사실, 킬리그루는 서신을 유쾌한 문투로 맺는다. 

  「이런 일을 자네가 다 믿을 것이라 기대하네. 세상에는 자네의 겸손한 친구 토마스 킬리그루보다 더 뻔뻔한 자들과 허풍쟁이들이 많이 있으니 말일세.」 

 

  시간이 흐르면서 손바닥에는 요셉 이외에 예수, 마리아, 살레의 프랑수아 이름자도 나타났다. 처음 나타날 때는 발갛던 이름자들이 한두 주일 지나면 희미해지지만, 그때마다 잔느의 천사가 다시 또렷하게 만들곤 했다. 

  이 현상은 1635년 겨울에 시작돼 1662년 성 요한의 날까지 불규칙하게 계속됐다. 그리고 그날 이후 수렝이 기록한 것처럼 「그걸 보려고 끈질기게 몰려드는 사람들 때문에 주님께 열중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건져 달라고 원장수녀가 정성껏 기도했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아무도 모를 이유로」 이름자들이 완전히 사라졌다. 

 

  수렝과 동료 몇몇, 또 대다수 일반 구경꾼들은 이 기발한 성흔 형태를 전능자께서 내린 특별한 은혜라고 믿었다. 하지만 더 교육받은 동시대인들은 이 기적에 의문을 품었다. 애초부터 마귀 들림이라는 것도 믿지 않은 마당에 이제 신비한 철자들의 거룩한 근원 따위는 더더욱 안 믿었다

  그들 중 몇몇은, 예를 들어 존 메이틀랜드 같은 이는, 이름자를 산성 물질로 손바닥에 새겼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또 다른 이들은 색깔 넣은 전분으로 표면에 선을 넣을 수 있다는 쪽으로 기울었다. 많은 이들은 철자들이 양손이 아니라 왼손에만 나타났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오른손잡이가 써 넣기에 더 편하지 않겠어? 

 

  잔느 수녀의 전기를 펴낸 가브리엘 레게 박사와 질 투레트 박사는 둘 다 샤르코[각주:1]의 제자인데, 자기암시에 의해 손바닥에 글자가 생겼다고 믿는 편이며 히스테릭한 낙인의 현대적인 사례 몇몇을 인용하여 그런 관점을 옹호한다. 여기서 덧붙일 것은 많은 히스테리 환자의 피부는 특별한 민감성을 지닌다는 점. 그런 사람의 피부는 손톱으로 살짝 긁기만 해도 붉은 자국이 생겨서 몇 시간이고 없어지지 않는다. 

  자기암시에 의한 것이든 의도적인 속임수이든 혹은 그 둘의 혼합이든 우리에겐 각자 나름대로 선택할 자유가 있다. 내 경우로 말하자면, 그 두 가지가 다 섞인 쪽으로 기운다. 낙인 혹은 성흔은 잔느 스스로도 진정 기적 같은 것이라 여기기에 충분할 만큼 자연스레 생겼을 터이다. 만약 그게 진짜 기적이었다면 대중에게 더 교훈이 되고 그녀 자신에게는 더 신뢰할 만한 것이 되게끔 그 현상을 개량해도 무리가 없었을 텐데. 

  그녀 손바닥에 나타난 거룩한 이름자들은 월터 스코트의 장편소설들과 비슷한 것이었으니, 달리 말하면, 사실에 기초하되 상상력과 가공 기법에 훨씬 더 많이 신세진 것이었으리라.

 

  (내막이야 어떠하든) 잔느 수녀는 이제 본인만의 고유한 이적의 소유자가 됐다. 그건 그냥 개인 차원의 것이 아닐 뿐더러 장기간에 걸친 것이었다. 거룩한 이름자들이 희미해지면 그녀의 천사가 나타나서 즉각 또렷하게 만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저명한 방문객들이나 이적에 갈급한 보통 구경꾼들한테 언제든 보여줄 수 있었다. 이제 그녀 자신이 걸어 다니는 성물이 됐다

 

  이사카론이 1636년 1월 7일 그녀를 떠난 뒤 베게모트만 남았다. 그러나 이 신성 모독의 악령은 다른 악마들을 다 합쳐 놓은 것보다 더 억척같았다. 엑소시즘도 고행도 묵상기도도 다 소용없었다

  의지가 없고 훈련되지 않은 정신에 신앙이 강요되다 보니 역작용이 나타났다. 즉, 정신이 감응(유도)적인 반발을 일으킨 결과 외려 거칠고 충격적인 불신앙으로 접어들었고, 그리하여 그 인격에 강요된 진리들을 다 부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부정과 저항은 악령이 되어 잔느의 무의식에 둥지를 튼 채 혼란과 스캔들을 일으키며 떠나지 않으려 했다

 

악령을 내쫓는 엑소시즘 시행 하의 수녀

 

  수렝이 열 달 넘게 씨름한 끝에 마침내 10월에 베게모트를 완전히 격퇴했다. 수도회 관구장이 그를 보르도로 소환하고, 다른 예수회 수도사가 원장수녀를 감독하게 됐다. 

 

  레쎄 수사는 이른바 ‘단순한 엑소시즘’에 충실한 사람이었다. 잔느 수녀 말에 따르면, 그는 엑소시즘 중에 악마들이 성체를 우러러 받드는 장면을 가장 좋아했다. 수렝이 ‘말을 공격해서 기사를 끌어내리려 했다’면 레쎄는 기사를 직접 대놓고 공격했다. 말의 감정에 개의치 않고, 말을 달래려는 시도도 전혀 하지 않고

  원장수녀의 기록을 보면 「어느 날 저명인사들이 모이자, 수도사가 그들의 영적 복리를 위해 엑소시즘을 시행하기로 했다.」 원장수녀가 자기는 몸이 아픈데 엑소시즘을 거치면 더 나빠질 것이라고 영적 지도자에게 말했다. 「그러나 엑소시즘을 시행하고 싶어 안달이 난 수사는 나한테 용기를 내고 하나님을 믿으라고 말했다. 그러고는 엑소시즘을 시작했다.」 그녀가 평소에 하던 묘기를 잘 해냈는데, 그 결과 고열에 허리 통증이 심하게 도져서 자리에 눕게 됐다.

 

  위그노이지만 도시에서 최고로 꼽히는 의사 팡통을 불렀다. 그녀한테 사혈을 세 번 하고 약제를 주었다. 효과가 있어서 병자가 「속을 다 비우고 더러운 피를 쏟았다. 그게 이레나 여드레쯤 갔다.」 상태가 호전됐다가 며칠 지나 다시 악화됐다. ‘레쎄 수사는 엑소시즘을 재개할 만하다고 여긴 모양이지만 난 극심한 구역질과 구토에 시달렸어.’ 열이 다시 오르고 옆구리 통증이 극심해지고 각혈이 시작됐다. 

  다시 부름 받은 팡통이 흉막염이라고 진단했다. 이레 동안 일곱 번 사혈하고 관장을 네 번 했다. 그런 뒤 그는 병세가 치명적이라고 알렸다. 그날 밤 잔느가 내면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 목소리가 하는 말. 넌 죽지 않을 거야, 하지만 하나님이 너를 일부러 지극히 위험한 상태까지 데려가실 텐데, 네가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회복하게 하심으로써 그분의 권능을 똑똑히 보이기 위함이지. 

 

  이틀 동안 상태가 악화되기만 하고 기력도 거의 쇠한 듯 보였기에 2월 7일 죽어가는 여인한테 병자성사를 거행했다. 그 동안에 사람을 보내 의사를 불렀다. 의사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면서 그녀가 기도를 읊조렸다. 

  “주여, 당신께서는 이 병을 고치심으로써 당신 권능의 특별한 은혜를 보이고자 하심을 내가 잘 알고 있나이다. 이것이 그런 경우라면, 의사가 볼 때 가망 없다고 판단할 만한 상태로 나를 이끄소서.” 

 

  팡통이 도착해 병자를 살펴보고 진단을 내렸다. 한두 시간 뒤에는 숨이 끊어질 겁니다. 그리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서 그때 파리에 머물고 있던 로바르데몽에게 보낼 보고서를 썼다. 

  맥박이 불규칙하고 복부가 비정상적으로 팽창돼 있으며, 관장은 물론이고 그 어떤 치료법으로도 소용없을 정도로 쇠약한 상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설로 형용키 어려운 고통’을 덜어줄지도 모른다는 희망으로 그녀에게 작은 좌약을 하나 삽입했습니다. 하지만 그건 한낱 완화제일 뿐이기에 다른 뭔가를 기대해선 안 되지요. 병자는 임종을 앞두고 있습니다.

 

  여섯 시 반 잔느가 혼수상태에 빠졌다. 그리고 자신의 천사를 보았다. 천사는 기다란 금발 고수머리를 휘날리는 18세 매혹적인 젊은이 형상을 하고 있었다. 수렝의 말에 따르자면, 이 천사는 앙리 4세와 가브리엘 데스트레의 손자요 세자르 방돔의 아들인 보포르 공작과 똑 닮았다. 이 왕자는 악마들을 보려고 얼마 전 루덩에 왔었는데, 어깨까지 늘어진 금발이 원장수녀한테 깊은 인상을 남긴 바 있다. 천사에 이어 성 요셉이 나타나더니 그녀 오른편 옆구리에, 통증이 극심한 부위에, 손을 얹어 무슨 기름을 발라 문질렀다. ‘그러자 난 정신을 차리고 완전히 회복됐다.’ 

 

  (그건 또 하나의 이적이었다.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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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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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덩의 악마들 10편 1

루덩의 악마들 9편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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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Jean Martin Charcot (1825-1893) - 프랑스의 의사, 신경병 학자, 현대 신경학의 창시자. 히스테리 치료에 최면 기법을 이용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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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덩의 악마들  

The Devils of Loudun 

 

 

올더스 헉슬리 저

(번역, 주석, 해설 – 김성호)

 

바네사 레드그레이브, 올리버 리드, 악마들

 


 

 

  루덩의 새 주임신부는 제 침대를 실험대로 바꾸려 들기에는 지나치게 정상이고 지나치게 왕성한 식욕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부샤르처럼 그도 존중받는 부르주아 가정의 자제이고, 부샤르처럼 예수회 기숙학교에서 교육 받고, 부샤르처럼 영리하고 학식 있고 열정적인 휴머니스트이고, 또 부샤르처럼 교회 무대에서 눈부신 출세를 꿈꾸었다. 

  기질에서는 어떨지 몰라도 사회와 문화라는 측면에서 이 두 프랑스 사람한테는 비슷한 점이 많았다. 그렇기 때문에 부샤르가 유년기와 학창시절, 또 방학 때 고향집에서 하던 장난 따위에 관해 하는 얘기가 그랑디에한테도 간접적으로 적용된다 하겠다. 

 

  부샤르의 <고백록>에서 드러난 세계는… 좀 지나치다는 점만 빼면 현대 성과학자들이 우리한테 내보이는 세계와 아주 흡사하다. 작자는 아이들이 성적 유희에 얼마나 자주 거침없이 탐닉하는지를 묘사한다. 모든 정황으로 보건대 어른들은 그들 장난질을 그저 수수방관만 한 듯하다. 

  선량한 수도사들 밑에서 학교에 격렬한 놀이가 없는 차에, 사내애들의 넘치는 에너지는 끊임없는 자위와 반공휴일에 벌이는 동성애 행위 이외에 따로 분출구를 찾을 수 없었다. 물론 활기찬 대화와 유창한 설교, 고해와 기도를 통해 웬만큼 자제되기도 했다. 

  예를 들어 부샤르가 이렇게 적고 있다. 즉, 교회의 4대 축일 중에는 습관적인 성적 유희를 자제하는 편이어서, 어떤 때는 여드레를, 혹은 열흘 내내 참을 수 있었다고. 하지만 그런 순결 기간이 아무리 애써도 두 주일을 넘기지는 못했다. 신앙심으로 어느 정도 버티긴 했어도. 

 

  어떤 특정 상황에서건 우리네 실제 행동은 성향이나 이해관계를 가로에 두고 도덕적 이상이나 종교적 최고선을 세로에 두는 사각형의 대각선으로 나타난다. 부샤르의 경우, 또 짐작컨대 그가 쾌감의 동반자라 부르는 다른 학생들 경우에도, 신앙심의 상하 직선이 아주 짧고 베이스에 가까워서 대각선이 베이스와 이루는 각도가 지극히 작았던 듯싶다. 

 

  휴일에 집으로 돌아가면 부샤르의 부모는 젊고 순결한 하녀가 자는 방에 아들 잠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처녀가 깨어 있을 동안에는 순결 그 자체지만 잠자는 동안에는 그녀에게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었다. 사실, 그녀가 정말 잠들었는지 잠든 척했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나중에, 학창시절이 끝난 뒤, 부샤르는 소떼를 돌보는 어린 시골 소녀한테 마음이 끌렸다. 동전 몇 푼에 그녀는 젊은 나리의 욕망을 기꺼이 다 들어주었다. 그리고 새 하녀가 나타났다. 그녀는 부샤르의 이복형으로 카쌍의 수도원장인 사람 곁에서 일했는데, 수도원장이 유혹하려고 하자 거기를 떠나 이 가정에 들어왔다. 그리고 곧 각종 섹스 실험에서 부샤르의 모르모트요 공동 작업자가 됐다. <고백록> 2부에 상세히 묘사돼 있다. 

 

  부샤르와 프랑스 왕위 계승자 사이에 넓고 깊은 간격이 있었다는 것이야 두말하면 잔소리다. 그럼에도 미래의 루이 13세가 양육된 도덕적 분위기는 미천한 학생의 인격이 형성된 상황과 많은 측면에서 비슷하다. 어린 왕자의 주치의인 장 에로아의 <일지>가 보전돼 있다. 이 문건 덕분에 우리는 17세기 아이들 교육을 아주 상세하게 알게 된다. 

  사실 왕세자는 아주 귀한 아이였다. 팔십 년이 넘어서 프랑스 국왕에게 태어난 첫아들이니 말이다. 그러나 이 둘도 없이 귀중한 아이의 특별한 교육법이 우리에겐 참으로 놀랍다. 온 나라에서 늘 기도해주는 아이를 주변에서 이제 우리가 보는 식으로 대했다면, 평범한 아이들한테는 무슨 일이 벌어졌겠는가? 

 

  왕세자가 서로 다른 어머니 서넛한테서 태어난 이복 형제누이들과 함께 자랐다는 측면부터 시작하자. 같은 피를 지닌 형제누이 중 몇몇은 왕세자보다 나이가 더 많고 몇몇은 더 어렸다. 세 살쯤에, 어쩌면 그 이전에, 어린 루이는 사생아가 무엇이며 서자들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아주 확실히 알았을 것이다. 그런 정보를 주고받는 데 동원된 언어가 늘 어찌나 천박한지 아이가 종종 충격을 먹곤 했다. 아이는 가정교사인 마담 몽글라를 두고 이렇게 말하곤 했다. “Fi donc![각주:1] 정말 구역질나는 여자야!”  

  부왕 앙리 4세는 추잡한 노래를 아주 좋아했다. 그래서 궁정 대신들과 하인들이 궁정 일을 보러 다니면서 그런 노래를 끊임없이 불러댔다. 그들이 그런 외설적인 노래를 입에 담지 않을 때면 어린 왕자의 수행원들이, 남자든 여자든, 아이 아버지의 사생아들에 관해, 아이의 미래 아내인 (이미 약혼한 사이인) 오스트리아 안 공주의 어떤 진가를 짐작하여 아이한테 음란한 어휘로 낄낄대며 농담을 건네곤 했다. 

 

  게다가 왕세자의 성교육은 입말에 그치지 않았다. 대개 밤마다 아이를 여관들이 자기네 침대로 데려갔다. 당시에는 나이트가운이나 파자마를 잘 입지 않았고, 그 침대에서는 여관의 남편들도 밤을 보내곤 했다. 네댓 살쯤 됐을 때 어린 루이는 이른바 ‘인생의 사실들’을 이미 알았을 것이 분명하다. 그것도, 귓전으로 듣기만 하는 게 아니라 정밀한 관찰을 통해서. 

  17세기 궁전에는 프라이버시라는 게 전혀 없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 가능성은 더 커진다. 건축가들이 낭하라는 것을 아직 궁리하지 못했다. 건물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가려면 다른 사람 방의 한 끝을 그저 지나칠 수밖에 없는데, 그 방에서는 언제든 어떤 일이든 벌어질 수 있었다. 

 

  궁정 에티켓 문제도 간과할 수 없다. 미천한 사람들보다 좀 운이 없게도 왕실 인사한테는 혼자 있는 시간이 거의 허용되지 않았다. 왕족의 피를 가졌다면, 그 사람은 중인환시 하에 태어나고 죽었으며 중인환시 하에 용변도 보고 때로는 중인환시 하에 사랑을 나눠야 했다. 에워싸는 건축의 성격상 다른 사람들이 태어나고 죽고 용변 보고 사랑 나누는 장면을 아이가 싫든 좋든 다 볼 수밖에 없었다. 

  성인이 되어 루이 13세는 여인들을 지극히 혐오하고, (플라토닉 성격이었겠으나) 남성들을 아주 선호하고 갖가지 신체 기형과 질병 따위에 숨넘어갈 정도로 질색했다. 마담 몽글라와 궁정 여인들의 난잡한 언행이 첫 번째 특징과, 또 자연적인 반응으로서 두 번째 특징의 원인일 것이다. 세 번째로 말하자면, 생제르맹앙레의 지나치게 노골적인 침실들에서 어린애가 어떤 메스꺼운 장면들과 얼마나 부닥쳤을지, 누가 알겠는가? 

 

  자, 루덩에 새로 부임한 주임신부가 성장한 세계가 그러했다. 그 세계에서 전통적인 성적 터부는 무지하고 가난에 찌든 다수에게는 거의 의미가 없고 사회 상층부에서도 그리 심하지 않았다. 

  그 세계에서는 공작부인들이 자기네 딸의 유모가 얼굴 붉힐 농담을 예사로 내뱉고 상류층 귀부인들이 외설을 아무렇지도 않게 입에 담았다. 지위와 재산을 갖춘 남자는 (너무 결벽하지 않다면) 욕구를 거의 마음대로 채울 수 있었다. 그 세계에서는 또 교양 있고 사려 깊은 사람들조차 종교의 가르침을 순전히 피크윅[각주:2] 식의 경박함을 가지고 받아들였으니, 이론과 실제 행동 사이의 괴리가 엄청나게 컸다. 믿음의 시대라는 중세 세태에 비하면 좀 덜하긴 했을지라도. 

 

  이런 세계의 소산인 우르뱅 그랑디에가 제 교구에 자리 잡으면서 지상과 천상의 열매를 다 맛보기로 한 것이다. 그가 아주 좋아하는 시인은 롱사르[각주:3]인데, 그가 지은 스탠자를 보면 젊은 주임신부의 관점을 완벽하게 엿볼 수 있다. 

 

신 앞에 고개 조아리고 열심히 기도하면서, 

우리는 온유하고 얌전해. 

교회 종소리 들으며 무릎 꺾고 

설교단을 바라보네. 

침대로 날아들어 몸뚱이를 결합하며, 

우리는 욕망에 끓고 죄가 많도다. 

태평하게 웃음 날리며 기꺼이 배우노라, 

의미심장한 사랑을. 

 

  이것은 ‘둥글둥글 무난한 삶’을 기술하는 것이고, 바로 그런 둥글둥글한 삶을 이 스물일곱 한창 젊은 휴머니스트가 누리고자 했다. 그러나 성직자의 삶은 둥글둥글 다 누리는 게 아니라 영원히 정해진 한 점이 되어야 한다. 풍향계가 아니라 컴퍼스 다리인 것. 그 한 점을 고수하기 위해 성직자는 특정한 의무를 지니고 특정한 서원을 한다.

 

  그랑디에의 경우 의무를 다 떠맡고 필요한 서원도 했지만, 그걸 지킬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 심적 구속감을 나중에 드러내게 된다. 루덩에 도착하고 십년 지나 오직 한 사람의 독자를 위해 쓴, 순결서원에 관한 짧은 글에서. 

  순결서원에 맞서는 주요 근거로 그는 두 가지를 든다. 첫 번째는 이런 삼단논법으로 요약되리라. ‘지키기 불가능한 약속은 구속력이 없다. 젊은 남자한테 금욕은 불가능하다. 고로, 그런 금욕 서약은 구속력이 없다.’ 이것으로 충분치 못하다면, 그에겐 두 번째 근거가 준비돼 있다. 강압에 못 이겨 한 약속은 지킬 의무가 없다는 보편적 공리에 근거한 것. 

 

  「성직자가 금욕을 받아들임은 금욕을 좋아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성직을 얻기 위함이다. (그의 서약은) 선한 의지에서 나온 게 아니라 수락하지 않으면 성직을 맡을 수 없으니 힘겨운 조건이라도 받아들이도록 강요하는 교회가 그에게 부과한 것이다.」 

  그런 시각을 견지하면서 그랑디에는 궁극적으로 자신에게 혼인의 자유가 있으며, 일단은 화답하는 여인 누구하고든 둥글둥글 원만한 삶을 꾸릴 권리가 충분하다고 여겼다. 

 

  새 주임신부가 성적 매력을 풍긴다는 측면이 교구에서 고상한 척하는 사람들한테는 아주 끔찍한 스캔들로 보였다. 그러나 고상 떠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다른 주민들에겐, 심지어 자기가 정결을 지키는 기독교인이라고 믿는 이들한테도, 그랑디에 같은 사람의 출현과 성향과 평판으로 생긴 상황에서는 뭔가 유쾌하게 흥분되는 면이 있었다. 

  섹스와 종교는 서로 기막히게 결합된다. 이 결합에는 토심스런 구석도 좀 있지만 절묘하고 통렬한 풍미가 있어서 계시라는 미각을 깜짝 놀라게 한다. 무슨 계시냐고? 바로 그게 문제다.

 

  그랑디에가 여신도들한테 인기 끌면서 남자들 사이에서는 당연히 평판이 안 좋았다. 여성 교구민들의 남편과 아버지들은 매너 좋고 혀도 잘 굴리며 똑똑한 이 젊은 멋쟁이를 처음부터 아주 의심쩍게 대했다. 

  새 주임신부가 설령 성자라 해도 그렇지, 성 베드로 교회 같은 부유한 교회가 왜 외지인한테 돌아가야 하는 거야? 아, 우리 지역 성직자들이 뭐가 모자라서? 루덩의 헌금은 루덩 출신자 주머니에 들어가야 하잖아. 

  설상가상으로 그 외지인은 혼자 부임하지도 않았다. 모친과 형제 셋과 누이 하나까지 줄줄이 달고 왔다. 

  형제 중 하나한테는 이미 도시 수석행정관 사무실에 자리를 만들어 주었어. 성직자인 다른 아우는 성 베드로 교회 주임신부 대리로 임명됐고… 역시 성직에 있는 셋째는 아직 공식 지위를 차지하지 못했지만 뭔가 교회 직분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거든. 이거야말로 심각한 외침()이 아니고 뭐란 말이오! 

 

그랑디에 신부 집전

 

  하지만 그 불평꾼들조차 그랑디에 신부가 강론을 우레처럼 힘차게 할 수 있고 건전한 교리며 학식까지 충분히 갖춘 유능한 성직자라는 점은 인정해야 했다. 그러나 바로 그런 장점들이 외려 그에게 해를 끼쳤다. 

 

  기지 넘치고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이기에 그랑디에가 처음부터 도시의 가장 귀족적이고 교양 있는 인사들한테서 초대를 받았다. 루덩의 상류사회를 구성하기는 하지만 소위 상류사회 엘리트층에는 들지 못하는, 돈은 많지만 투박한 시골뜨기들과 거들먹거리는 관리들과 집안 좋지만 망나니짓 하는 자들한테 굳게 닫혔던 저택 문들이 외지에서 굴러온 이 시건방진 애송이한테는 즉각 열린 것이다. 

 

  얼마 전 도시와 성채의 지방장관으로 임명된 장 다르마냑과 친교를 맺었을 뿐 아니라 법률가요 정치가, 역사가, 시인으로 유명한, 루덩 최고의 명사 스케볼라 생마르트[각주:4] 노인 저택에도 무상으로 드나들게 됐다. 나름대로 내로라하면서도 거기에 끼지 못한 사람들이 그런 얘기를 전해 듣고는 한층 더 화를 내고 한을 품게 됐다. 

 

  다르마냑은 주임신부의 일처리 능력과 판단력을 아주 높이 샀고, 그래서 궁정으로 떠날 때마다 관방 업무를 다 그에게 맡겼다. 생마르트에게는 무엇보다도 주임신부가 고전을 잘 알기에 노인의 작품들을 제대로 평가할 수 있는 인문주의자라는 점이 좋았다. 예를 들어, 베르길리우스 전문가로서 노신사의 걸작과 <Paedotrophiae Libri Tres> 같은 작품 말이다. 특히 후자는 아이들 보육과 양육에 관한 연역적 장시인데, 어찌나 인기가 좋은지 작자 생전에 열 판을 찍었다. 또 시구들이 아주 우아하고 적확해서 롱사르 같은 거장조차 이렇게 말할 정도였다. 

  “난 우리 시대 그 어떤 시인들보다 이 시의 저자를 더 좋아해. 설령 벰보와 나바제로, 숭고한 프라카스토로[각주:5] 불쾌하게 여긴다 해도 내 생각을 바꾸지 않겠어.” 

 

  아아, 명성이란 얼마나 덧없으며 인간의 자부심이란 또 얼마나 헛된 것인가! 나바제로라는 이름은 말할 것도 없고 추기경 벰보라는 이름도 우리한테는 의미가 적다. ‘숭고한 프라카스토로’가 후손들 기억에 남아 있다면 순전히 이런 사실 덕분이다. 즉, 불행한 왕자 시필리스에 관해 깔끔한 라틴어로 의학적 전원시를 쓰면서 매독이라는 창피한 질병에 점잖은 별명을 달아 주었다는 점. 왕자는 지독한 고통을 겪다가 유창목 달인 물을 잔뜩 마시고 나서야 ‘갈리아(프랑스) 병’을 털어냈다. 

  죽은 언어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더 죽어만 간다. 생마르트의 교훈적 장시 세 권은 프라카스토로의 시필리스보다 역사에 남을 기회가 훨씬 더 적었다. 한때 모든 사람한테 읽히고 신성보다 더 신성한 대접을 받았건만, 오늘날엔 그 스케볼라 생마르트도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그랑디에가 친분을 트던 시기에 노시인은 저무는 영광 속에 아직 머물러 있으며 최고의 원로요 일종의 국정 기념비였다. 그의 만찬에 간다는 것은 최고의 영광이었다. 존경받는 정치가요 인문학의 수반이 은퇴하여 살고 있는 화려한 저택에서 그랑디에는 그 위대한 인물은 물론이고 역시 유명한 아들들이며 손자들과도 허물없이 대화를 나누었다. 

  거기로는 명성 높은 객들이 드나들었다. (신분을 감춘) 웨일스 왕자, 박애주의자요 혁신적 의사이며 프랑스 저널리즘의 창시자인 테오프라스트 르노도, 나중에 방대한 노작 <Astronomia Philolaica>를 쓰고 변광성 주기를 처음으로 정확하게 결정한 이스마엘 부요 같은 이들. 

  게다가 지역 사회 등불도 합류하곤 했다. 루덩의 수석치안판사 기욤 세리제, 독실하고 학식 있는 검찰관 루이 트렌캉. 그는 아벨 생마르트와 동문수학했으며 문학과 골동품 연구에서 취향이 그 가족과 비슷했다. 

 

  그런 선택된 인사들과 나누는 우의는 참으로 흡족한 것이지만, 아웃사이더들한테서 받아야 하는 적대감 또한 만만치 않았다. 

  아주 총기 있다는 이유로 우둔한 자들한테 불신을 사고, 일처리가 좋다 하여 무능한 자들한테 시기 받고, 넘치는 기지 때문에 둔감한 자들한테 또 훌륭한 매너 때문에 촌뜨기들한테, 또 여인들한테 사랑 받는다 하여 매력 없는 자들한테 경원시되다니… 그의 보편적 우월함에 대한 대접이 뭐 이렇단 말인가! 

(루덩의 악마들 1편 계속) 

(알림)  Voice Training에 관심 있는 분들은 여기를 참조해 주세요.

관련 포스트: 

루덩의 악마들 11편 1

루덩의 악마들 10편 1

루덩의 악마들 9편 3

루덩의 악마들 8편 1

루덩의 악마들 7-2편 4

루덩의 악마들 6편 4

루덩의 악마들 5편 4

루덩의 악마들 4편 1

루덩의 악마들 3-3편 3

루덩의 악마들 2편 7

루덩의 악마들 1편 8

루덩의 악마들 1편 7

루덩의 악마들 1편 6

루덩의 악마들 1편 5

루덩의 악마들 1편 4

루덩의 악마들 (1편 2)

루덩의 악마들 (1편 1)

역사의 메아리 (올더스 헉슬리 소개와 작품 해설 4. 끝)

역사의 메아리 (올더스 헉슬리 소개와 작품 해설 3)

역사의 메아리 (올더스 헉슬리 소개와 작품 해설 2)

 

 

  1. 흥, 쳇, 제기랄! (불어) [본문으로]
  2. 디킨스의 장편 <피크윅 보고서>(1836)의 주인공. 단순하고 쾌활하며 막연한 성격의 대명사. [본문으로]</피크윅>
  3. 롱사르 (Pierre de Ronsard, 1524-1585) - 프랑스 시인, 당대에는 ‘시인들의 왕자’라 불렸다. [본문으로]
  4. 생트마르트 (Sainte-Marthe) 가문 - 16-18세기 프랑스 주요 시인들을 줄줄이 배출. 1555년에 죽은 시인 샤를은 프로테스탄트 성향을 의심받아 투옥됐다가 미친 척하여 석방됐고, 그의 조카 스케볼라(1536-1623)는 앙리 4세의 총신으로 라틴어로 시를 지어서 롱사르를 비롯해 동시대인들을 환호케 했다. 그의 장남 아벨과 쌍둥이인 차남들도 시인, 손자 스케볼라 3세는 국왕의 사관. [본문으로]
  5. 벰보 (Pietro Bembo, 1470-1547) - 이탈리아 인문주의자, 로마교황 레오 10세의 비서관, 추기경, 학자. 나바제로 (Andrea Navagero, 1483-1529) - 이탈리아 인문주의자, 베네치아 귀족 출신. 프라카스토로 (Girolamo Fracastoro, 1478-1553) - 베네치아 의사, 시인. 그의 장시 <시필리스 혹은 갈리아 질병>에서 매독을 가리키는 Syphilis 용어가 나왔다. [본문으로]</시필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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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덩의 악마들  

The Devils of Loudun 

 

 

올더스 헉슬리 저

(번역, 주석, 해설 – Chimin)

 

올더스 헉슬리 루덩의 악마들 the devils of loudun

 


 

1

 

이름난 풍자 작가요 나중에 주교가 된 조셉 홀[각주:1]이 1605년 처음으로 플랑드르[각주:2] 지역을 방문했다. 

「여로에서 우리는 파괴된 교회들을 얼마나 많이 보았던가. 도처에 남은 거친 잔해들이 신앙과 더불어 동족상쟁 역시 처절했음을 여행자에게 말해준다. 오오, 전쟁의 참혹한 흔적이여! 그러나 교회들은 무너졌다 해도 (경탄스럽게) 도처에서 예수회 칼리지들이 나타난다. 내가 들른 도시마다 이 학교들이 이미 문을 열었거나 세워지는 중이었다. 

이 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과연 정책이 신앙보다 더 중요한 것인가? 이 사람들은 저주를 가장 많이 받는 곳에서 (여우처럼) 일을 가장 잘 꾸려 간다. 저희 진영에서 극도로 괴롭힘을 당하고 모든 이들한테 미움을 받고 우리의 저항에 부딪치면서도 이 독한 잡초들은 쑥쑥 자란다.」   

 

칼리지들은 아주 단순하고 확실한 이유 때문에 우후죽순처럼 등장했다. 바로 수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조셉 홀과 그 세대가 잘 알고 있었듯이 예수회원들은 이른바 ‘정책’을 가장 중시했다. 예수회가 학교를 계속 세운 까닭은 적대자며 자유사상가며 프로테스탄트들에 맞서 로마가톨릭교회를 강성하게 만들기 위함이었다. 예수회원들은 젊은이들을 가르쳐 교회 이익에 전적으로 헌신하는 계층을 만들고자 했다.[각주:3]

 

이런 현상을 체루티가 아주 잘 표현했다. 「우리가 다리를 곧게 펴 주려고 갓난애 아랫도리를 천으로 동여매듯이, 사람을 평생 건강하고 유복한 상태로 만들려면 유년기부터 의지를 동여매야 한다.」 (이 언급에 줄 미슐레[각주:4]가 극도로 분개했다.) 

교육자들 의도야 정말 단호했지만 그 뜻을 알리고 지도하는 방법이 미흡했다. 학생들 의지를 천으로 동여맸음에도 불구하고 예수회 최우수 생도들 중 몇몇은 칼리지를 졸업하자 열렬한 자유사상가가 됐고, 장 라바디[각주:5]처럼 프로테스탄트가 된 이들도 있었다. ‘정책’이 관련된 이상 교육 체계는 설립자들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했다. 

 

그러나 다중은 정략적 측면에 관심이 없었다. 그저 저희 자식들이 젊은 교양인으로서 갖춰야 할 것을 다 배울 수 있는 학교가 중요할 뿐이었다. 이런 요구에 예수회원들이 다른 대다수 교육 공급자들보다 더 잘 부응했다.

 

「예수회 지붕 아래서 보낸 일곱 해 동안 나는 무엇을 눈여겨보았던가? 온건하고 근면하고 절도 있는 생활. 예수회 수사들은 하루 모든 시간을 우리들 교육에, 혹은 그들 서원을 엄격히 실행하는 데 바쳤다. 내 말이 사실임을 입증하기 위해 나처럼 그들 밑에서 교육받은 수천 명이 증언하기를 바란다.」  

볼테르가 그렇게 적었다. 이 말은 예수회 교수법이 아주 뛰어나다는 점을 여실히 증명한다. 이와 동시에, 볼테르의 생애 자체는 학습을 ‘정책’이라는 목표에 맞추려고 한 교육자들의 시도가 얼마나 허망한 것이었는지를 한층 더 확실하게 입증한다.[각주:6]   

 

볼테르가 칼리지에서 공부하던 때, 예수회 학교들은 이미 잘 알려지고 익숙한 현상이었다. 그러나 한 세기 이전 교육 현장에서는 칼리지의 많은 장점이 정말 혁명적이었다. 대다수 교육자들이 회초리 휘두르는 능력 이외에는 모든 면에서 아마추어이던 그 시기에, 예수회원들의 교육 방식은 제법 인도적이었으며 교수진도 신중하게 선별돼 체계적인 훈련을 받았다. 

여기서는 고급 라틴어를 가르치고 광학과 지리와 수학, 극작 분야에서 최신의 성취를 들려주고 (그들의 학기 말 연극 공연은 유명했다), 좋은 예절과 교회에 대한 존중과 (적어도 프랑스에서 앙리 4세가 가톨릭으로 개종한 이후에는) 국왕 권위에 복종하기를 가르쳤다. 

 

바로 이런 이유로 예수회 칼리지들이 전형적인 상류 부유층 취향에 맞았다. 즉, 애지중지하는 아이가 구식 교육에 시달리게 할 수는 없다고 마음먹은 어머니들, 그 자신이 학식을 갖추고 있으며 건전한 교리와 키케로 식 달변에 관심이 큰 숙부들, 또 그 자신이 애국심 있는 관리로서 군주제 원칙을 인정하거나 미리 앞을 내다보는 부르주아로서 예수회가 폭넓은 연줄로 제자들한테 좋은 직무나 궁정의 한 자리, 교회 명예직 따위를 찾아주겠지 기대한 아버지들… 바로 그들 입맛에 딱 맞은 것이다. 

 

예를 들어, 루앙 시의 코르네유 부부 같은 이들을 보자. 가장은 왕실 고문변호인이고 아내는 변호사 딸인 마르트 르 프장. 어린 아들 피에르가 특출한 재주를 보이는데, 어떻게 칼리지에 보내지 않을 수 있겠나?[각주:7] 

혹은 렌 시의회 고문인 조아킴 데카르트를 보자. 그는 1604년 총명한 막내아들 르네를 여덟 살밖에 안 됐지만 공부시키느라 라 플레시로 데려간다.[각주:8] 얼마 전 국왕의 승인을 받아 문을 연 예수회 칼리지로. 

 

또 거의 비슷한 시기, 생트 시에 학식 있는 참사회 위원인 그랑디에가 있다. 그에게 조카가 있으니, 비록 데카르트나 코르네유 같이 부유한 귀족은 못 되더라도 당당한 사회 구성원인 또 다른 법률가의 아들이다. 우르뱅이라는 이름의 이 소년은 이제 열네 살이며 지극히 영리하다. 가장 좋은 교육을 받을 자격이 충분한데 생트 인근에는 보르도의 예수회 칼리지보다 더 좋은 학교가 없었다. 

이 유명한 배움터에는 소년들을 위한 중등 과정과 우아한 예술을 가르치는 칼리지, 신학교, 사제 임명 뒤에도 더 공부하고 싶어 하는 형제들을 위한 심화 과정이 다 있었다. 조숙하고 영리한 우르뱅 그랑디에가 여기서 십년을 넘게 보냈다. 중등학생에서 신학 대학생으로, 그리고 나이 스물다섯 된 1615년 이후 예수회 수련수사로… 그렇긴 해도 수도사가 될 마음은 없었다. 예수회 엄한 규율을 따를 소명감을 충분히 느끼지 못했으니까. 

 

아니야, 수도회 안이 아니라 수도원 담장 밖에서 교구 신부로 커리어를 쌓고 싶어. 재주가 뛰어난데다가 막강한 교회 조직의 비호를 받는 사람은 이 직업에서 많은 것을 꿈꿀 수 있잖아. 

예를 들어, 어떤 고관대작의 종교의식 담당이나 나중에 프랑스 육군원수나 추기경이 될 사람의 영적 카운슬러가 되는 거야. 또 주교 회의나 왕실 공주들 앞에서, 심지어 왕비 면전에서 뛰어난 언변을 과시할 기회가 분명 있을 것이야. 어디 그뿐이랴, 외교 사절이나 고위 행정직, 수입 좋은 명예직, 구미 당기는 불로소득 따위도 가능해. 또 (귀족 출신이 아니기에 확률이 떨어지긴 해도) 운이 좋다면 주교 예모로 머리를 장식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인생 노년이 화려하게 보장되는 거야. 

 

그의 이력 초기에는 그런 장밋빛 꿈이 다 이뤄질 수 있는 듯싶었다. 신학과 철학을 이태 동안 깊이 연구한 뒤 스물일곱 나이 젊은 그랑디에 신부가 오랜 기간 근면하고 모범적으로 살아온 보상을 받았으니 말이다. 

예수회가 루덩 시에 있는 생피에르 뒤 마르셰 교구라는 중요한 생활 수단을 선사한 것. 같은 후견인들 덕분에 성 십자가 공주 성직자단 교회의 참사회 위원도 됐다. 사다리에 발을 걸쳤으니, 이제 할 일은 올라가는 것만 남았다. 

 

(루덩의 악마들 1편, 계속) 

 

관련 포스트:

루덩의 악마들 1편 3

루덩의 악마들 1편 4

루덩의 악마들 1편 5

루덩의 악마들 1편 6

루덩의 악마들 1편 7

루덩의 악마들 1편 8

루덩의 악마들 (1편 2)

역사의 메아리 (올더스 헉슬리 소개와 작품 해설 4. 끝)

역사의 메아리 (올더스 헉슬리 소개와 작품 해설 3)

역사의 메아리 (올더스 헉슬리 소개와 작품 해설 2)

역사의 메아리 (올더스 헉슬리 소개와 작품 해설 1)

루덩의 악마들 11편 1

루덩의 악마들 10편 1

루덩의 악마들 9편 1

루덩의 악마들 8편 1

루덩의 악마들 7-1편 1

루덩의 악마들 6편 1

루덩의 악마들 5편 1

루덩의 악마들 4편 1

루덩의 악마들 3-1편

루덩의 악마들 2편 1

 

  1. 조셉 홀 (Joseph Hall1, 574-1656) - 잉글랜드의 주교, 모럴리스트 문인, 풍자가. 호주가 발견되기 이전 남부 대륙의 환상적인 여행과 거기 풍습을 풍자적으로 묘사한 <다르면서도 같은 세상 mundus alter et idem>(1605)의 저자. 이 책은 여러 모로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의 전신으로 평가된다. [본문으로]</걸리버></다르면서도>
  2. 플랑드르 - 현재의 벨기에 서부, 프랑스 북부, 네덜란드 남서부를 포함하는 지역. [본문으로]
  3. 예수회 - 종교개혁 시기인 1534년 성 이냐시오 로욜라가 세운 로마가톨릭 수도회. 과격한 전투적 가톨릭 수호 선교기관. 1. 교육에 중점 2. 종교개혁에 대항 3. 세계 선교 등이 주요 목표. [본문으로]
  4. Jules Michelet (1797-1874) - 프랑스의 역사가, 사회평론가. 교회권력 반대자. 역사와 사회, 자연에 관해 아주 주관적인 책을 명료하고 격동적인 언어로 여러 편 썼다. ‘르네상스’ 용어의 창시자. [본문으로]
  5. Jean Labadie (1610-1674) - 프랑스 신학자, 가톨릭에서 프로테스탄트로 개종하고 경건주의 단체인 라바디파를 만들었다. (경건주의/Pietism - 정통 프로테스탄트에 맞서는 신비주의적 가르침, 보수주의와 반지성주의가 특색) [본문으로]
  6. Voltaire (1694-1778) - 프랑스의 작가, 사상가, 계몽주의 시대의 대표자. 18세기 유럽의 전제 정치와 종교적 맹신에 저항하고 진보적 이상을 고취. 비판 정신과 재치, 풍자 같은 프랑스 정서 특유의 자질을 구현한 작품 활동으로 유럽 문명 진로에 큰 영향을 끼쳤다. [본문으로]
  7. 피에르 코르네유(1606-1684) - 몰리에르, 라신과 함께 17세기 프랑스의 3대 극작가. [본문으로]
  8. 르네 데카르트(1596-1650) - 프랑스의 철학자, 과학자, 수학자.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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