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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9.05.06 웃음
  2. 2019.04.04 (7) 에고와 고통의 몸체
  3. 2019.04.04 (6) 고통의 몸체 녹여 없애기
  4. 2019.03.21 '나'를 찾기 - 분리, 동일시
  5. 2019.03.20 (1) 당신 마음은 당신이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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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웃음 (365-3)  

 

웃음이란... 아이들 환히 웃는 모습

 

웃음 터질 만한 일이 생기기를 꼭 기다려야 하나요? 

인생 자체만으로도 웃음 짓기에는 충분해요. 

 

우리네 인생은 정말 터무니없고 정말 어처구니가 없잖아요. 

우리네 인생은 참으로 아름답고 참으로 멋지잖아요! 

그렇게 어지러이 뒤섞인 것이야말로… 바로 우주 차원의 거대한 조크 아니겠어요? 

그네 타면서 환히 웃는 소녀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이 웃는 거예요. 

당신이 웃기로 마음먹기만 한다면 말이죠. 

하지만 사람들은 잘 웃지 않게 됐어요. 

거의 웃지를 않으며, 어쩌다 웃는다 해도 진실하게 웃지 않아요. 

 

사람들은 마치 누군가에게 호의를 베풀 듯이 웃고, 

어떤 의무를 수행하듯이 웃는단 말이죠. 

하지만 웃는 것 자체가 기분 좋잖아요! 

누구한테 호의를 베푸는 게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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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누군가를 즐겁게 하려고 웃음 지을 필요가 없어요. 

당신이 기쁘지 않다면 그 누구도 기쁘지 않을 테니까요. 

이유를 기다리지 말고 그냥 자신을 위해 웃으세요. 

 

웃음이야말로 진정한 구원

 

웃기 위한 조건은 이미 완벽하게 다 갖춰져 있어요! 

그런데도 우리는 대개 웃으려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아주 인색해서… 

웃음에 인색하고, 사랑에 인색하고, 삶에도 인색합니다. 

 

이 인색함을 버릴 수 있다는 사실이 분명해지자마자, 

우리에게는 다른 차원이 열립니다. 

웃음이야말로 참된 종교이자 구원입니다. 

나머지는 다 탁상공론일 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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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통의 몸체와 동일시하려는 에고 

 

금방 앞에서 설명한 과정은 대단히 강력하면서도 간단하다. 

이것을 어린애한테도 가르칠 수 있고 언젠가는 아이들이 학교에서 가장 먼저 배우는 축에 들어갈 것이다. 

 

고통의 몸체
고통의 몸체에 하도 익숙해지다 보니,고통 자체가 '나'라는 착각에 빠지기 쉽다.

 

내면에서 벌어지는 것을 감시하는 자로서 존재한다는 기본 원칙을 이해하게 되면

그리고 그것을 체감함으로써 확실히 깨닫는다면… 가장 강력한 변환 도구를 마음대로 부리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 해서 아무런 내적 저항 없이 아픔을 술술 털어낼 수 있다는 뜻은 아니야. 삶의 대부분을 자신의 감정적 아픔덩어리와 바짝 동일시하면서 살아왔고 자아감의 전부나 상당 부분이 아픔덩어리에 들어 있다면, 내적 저항이 특히 더 클 수밖에 없다.

이건… 아픔덩어리에서 불행한 자신을 만들어 냈으며 마인드가 만들어 낸 허구를 ‘나 자신’이라 믿는다는 뜻이다

 

이런 경우, 자신의 정체성을 잃는다는 무자각적인 두려움 때문에 모든 분리에 (즉, 동일시하기를 멈춤에) 강한 저항이 생길 것이다. 달리 말해, 잘 모르는 것에 뛰어들어서, 불행하지만 친숙한 ‘나’를 잃기보다는… 차라리 아픔을 겪는 게, 아픔덩어리가 되는 게 더 낫다고 여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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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경우에 해당된다면, 자신의 내면에 있는 저항을 관찰하라. 

아픔에 집착하는 모습을 지켜보라. 
경계 태세를 아주 높이라. 
불행한 상태에서 맛보는 기묘한 만족감을 관찰하라. 
그것에 관해 얘기하거나 생각하려는 강박 충동을 관찰하라. 
저항을 의식적인 것으로 만들면, 그 저항이 멈출 것이다. 
그때 아픔덩어리에 주의를 기울이고 증인으로 머물러 아픔덩어리의 변형을 주도할 수 있다.

 

이건 오로지 각자가 개인적으로만 할 수 있다. 아무도 대신해 줄 수 없다. 

그러나 운이 좋아서 이미 높은 수준의 의식을 갖춘 이들을 만나 그들과 함께 현존 상태에서 연결될 수 있다면, 대단히 유익하게 과정을 앞당길 수 있다. 그런 식으로 각자의 빛이 빠르게 더 강해질 것이다. 막 불붙기 시작한 통나무를 이미 훨훨 타고 있는 것 곁에 잠시 두었다가 떼어 놓으면, 첫 번째 통나무는 훨씬 더 강렬하게 타오를 것이다. 결국, 그건 같은 불길이야. 

 

그런 불꽃이 되는 것이 영적 마스터의 기능들 중 하나이다. 일부 치유 전문가들도 그런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데, 단, 이미 마인드 수준을 넘어섰고 누군가와 작업하는 동안 강렬한 의식적 존재 상태를 만들어 유지할 수 있는 경우에만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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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의 아픔: 

 고통의 몸체 녹이기 

 

<지금> 순간의 힘에 다가설 수 없는 한… 

우리가 겪는 감정적인 아픔은 모조리 우리 안에 웅크리고 있는 다른 아픔의 잔재 뒤로 숨어든다. 

그건 이미 거기에 있던 과거의 아픔과 합쳐져서 우리네 마인드와 몸에 기식하게 된다. 

여기에는 우리가 태어난 세상의 무지와 무자각 때문에 어린 시절에 겪어야 한 아픔도 물론 들어간다. 

고통의 몸체

이 퇴적된 아픔이 우리 몸과 마인드를 점령하고 있는 부정적 에너지장이다. 이것을 만약 보이지 않지만 제 나름대로 움직이는 실체로 볼 수 있다면, 진실에 매우 근접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감정의 아픔덩어리이다. (혹은, 고통의 몸체이다.) 

이 아픔덩어리는 두 가지 형태로 존재한다. 휴면 상태와 활동 상태. 

 

아픔덩어리는 대체로 전체 시간의 9할 정도는 졸고 있지만, 심히 불행한 사람의 경우엔 100% 시간 내내 꿈틀거릴 수도 있다. 어떤 이들은 거의 전적으로 아픔덩어리를 통해 사는 반면에, 또 어떤 이들은 그것을 특정 상황에서만 겪을 수 있다. 이를테면, 아주 무간한 사이에서, 혹은 과거의 상실이나 절망, 배신 또는 신체나 감정의 상처 등과 연결된 상황에서 그렇다.  

 

이 졸고 있는 고통의 몸체를 무엇이든 꿈틀거리게 할 수 있다. 특히 당사자의 과거 아픔 패턴과 공명하는 것이라면 더욱 더 그렇다. 조는 상태에서 깨어날 채비가 돼 있을 때, 그건 가까운 누군가의 악의 없는 말이나 생각으로도 활성화될 수 있다. 

 

어떤 고통의 몸체는 계속 징징대는 아이처럼 밉살스럽고 불쾌하지만 비교적 해롭지 않다.

또 어떤 아픔덩어리는 사악하고 파괴적인 괴물이요 진짜 악마이다. 개중에 어떤 것은 물리적 폭력도 꺼리지 않으며, 더 많은 것은 감정적인 폭력을 삼가지 않는다.  

어떤 고통의 몸체는 그 주인의 주변 사람이나 지인들을 공격하는 반면에, 또 어떤 것은 직접 주인을 공격할 수도 있다. 이런 경우 자신의 삶에 대한 생각과 감정은 아주 부정적이고 자멸적인 성격을 띤다. 질병이며 불행한 일이 그렇게 해서 종종 발생한다. 제 주인을 자살로 몰아넣는 아픔덩어리도 있다. 

잘 안다고 여겨 오던 어떤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낯설고 혐오스러운 괴물이 되어 내 앞에 마주할 때, 우리는 상당히 큰 충격을 받게 된다. 하지만 이 아픔덩어리를 다른 누구보다도 자기 자신 안에서 관찰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어떤 형태로든 우리한테 불행의 징후가 되는 것을 죄다 주시해야 하니… 그것이 꿈틀거리며 일어나는 고통의 몸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건 짜증이나 성급함, 울적한 기분, 괜히 어깃장 놓으려는 태도, 노여움, 분노 발작, 우울증, 또 대인관계에서 극적인 행동을 취하려는 욕구 등의 형태를 띨 수 있다. 

이 고통의 몸체가 졸다가 잠깨려는 순간을 포착하라.

 

다른 모든 현존하는 실체와 마찬가지로 고통의 몸체도 생존하기를 원하는데, 우리가 그것을 무의식적으로 자신과 동일시할 때만 생존이 가능하다. 그때 그건 벌떡 일어나서 우리를 지배하여 ‘우리 자신이 되고’ 우리를 통해 살 수 있다. 그건 ‘먹이’를 섭취하기 위해 우리를 필요로 한다. 

그건 그 자체 에너지에 공명하는 우리네 체감에서 에너지를 얻으며 노여움이나 증오, 비탄, 감정 폭발, 파괴적 성향, 폭력, 심지어 질병 같이 아픔을 더 키우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먹이로 삼는다. 그리하여 고통의 몸체가 우리를 장악했을 때, 그건 자체 에너지 주파수를 되쏘는 상황을 우리 삶에서 만들어 그 에너지를 먹고 산다.  

아픔은 아픔만 먹고 살 수 있다. 아픔은 기쁨을 먹고 살 수 없다. 소화해내지 못하니까고통의 몸체에 한번 정복당하면, 우리는 아픔을 더 많이 원하게 된다. 

그래서 피해자나 가해자가 된다. 직접 고통을 겪거나 누군가에게 고통을 가하고 싶어진다. 혹은 둘 다를 동시에 원한다. 전자와 후자는 실제로 별반 다르지 않다. 

물론 대다수 사람들은 이런 사실을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난 아픔을 전혀 원치 않아!” 하고 맹렬히 주장할 것이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네 생각과 행동은 자신과 다른 이들한테 계속 아픔을 주게끔 설계돼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이런 점을 우리가 진정 의식한다면… 그 패턴은 녹아 없어질 것이다. 왜냐하면, 정신 나가지 않고서야 누가 아픔을 더 많이 바라겠으며, 의식적으로 미치광이가 될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아픔덩어리는 에고가 드리운 그림자로서, 실제로 우리네 의식의 빛을 겁낸다. 그건 발각될까봐 겁낸다. 그것의 생존 여부는… 그걸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자신과 동일시하느냐, 또 내면에 도사린 아픔 직시하기를 무의식적으로 두려워하느냐에 좌우된다. 만약 이 아픔덩어리를 직시하지 않고 우리 의식의 빛을 거기에 비추지 않는다면… 그건 계속 발톱을 드러낼 것이다. 

고통의 몸체가 쳐다보기도 싫을 만큼 위험한 괴물로 보일 수 있지만, 분명히 말하건대, 이건 한낱 실체 없는 환영에 불과한 것이며 우리 현존의 힘에 대항할 수도 없다. 

 

몇몇 영적 가르침은 모든 고통이 궁극적으로 환상이라고 언명하는데, 이건 진실이다. 

한데 “당신도 진실이라고 여기나?” 하는 점이 중요하다. 더 나아가, 단순한 믿음만으로는 저 언명을 진실로 만들지 못한다. 

죽을 때까지 고통을 겪으면서도 계속 이건 환상이라고 말만 하는 데 그치고 말 것인가? 

그렇게 한들 과연 고통에서 벗어나게 될까? 

이제 우리는 각자의 생생한 체감을 통해 이 진실을 깨달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고통의 몸체는 우리의 관찰을 받아 정체가 드러나기를 원치 않는다. 우리가 관찰하고 내면에서 그 에너지장을 느끼고 거기에 주의를 기울이는 순간… 그것과의 동일시가 깨진다. 더 높은 차원의 의식이 열린다. 난 그것을 현존이라고 부른다. 

 

이제 우리는 아픔덩어리의 목격자나 감시인이다. 이건… 아픔덩어리가 우리를 참칭하면서 우리를 더 이상 이용할 수 없고, 우리한테서 더 이상 에너지를 빨아들일 수 없다는 뜻이다. 

우리가 자신의 심원한 힘을 발견했다는 뜻이다. 

우리가 <지금> 순간의 힘에 다가서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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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픔덩어리와의 동일시를 깰 만큼 충분히 의식하게 될 때… 그건 어떻게 되나? 

고통의 몸체를 만드는 것은 무자각인데, 의식이 그것을 의식(자각)적인 것으로 변질시킨다이 보편적 원리를 바울 사도가 잘 표현했다. “모든 것은 빛을 받으면 보이게 되고, 빛에 드러나는 것은 무엇이든 스스로 빛이 된다.” (에베소서 5:13) 

우리는 어둠과 싸울 수 없듯이 고통의 몸체와도 싸울 수 없다. 그렇게 하려고 하면 내적 갈등이 생겨 고통이 더 많아질 것이야. 주시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주시한다는 것은 그걸 그 순간에 실재하는 것의 일부로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고통의 몸체
고통의 몸체 = 아픔 덩어리 = 과거의 누적된 아픔

아픔덩어리는 갇힌 생명 에너지로 이뤄진다. 이 에너지는 우리의 전체 에너지장에서 떨어져 나간 것이며 마인드와 동일시라는 부자연스러운 과정의 결과 한동안 독자성을 띤다. 이건 불시에 스스로 돌변하여 자기 꼬랑지를 삼키려고 하는 짐승처럼 반생명적인 것이 된다. 

우리네 문명이 어째서 생명 파괴적인 것이 되었다고 생각하나? 하지만, 생명을 파괴하는 힘마저도 여전히 생명 에너지이다.

 

우리가 마인드와 떨어져서 감시자가 될 때도, 고통의 몸체는 한동안 여전히 꿈틀대면서 우리를 자기와 자꾸 동일시하게 만들려고 꾀를 낼 것이다. 우리가 동일시하기를 그만둠으로써 에너지를 더 이상 공급하지 않더라도 아픔덩어리는 타성 때문에 스스로 돌아가는 물레바퀴처럼 한동안은 꿈틀거린다. 이 단계에서 그것이 신체 여러 부위에 괴로움과 아픔을 일으킬 수도 있겠지만, 그게 오래 가지는 않는다. 

현재에 계속 머물면서 예리하게 의식하라. 
항상 경계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내면 공간을 지키라. 
이 아픔덩어리를 직접 관찰하고 그 에너지를 느낄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실재해야 한다. 그러면 그건 우리 생각을 통제할 수 없다. 
우리네 생각이 아픔덩어리의 에너지장과 동조하는 순간, 우리는 그것과 동일시되며 우리의 생각으로 다시 그걸 먹여 살리게 된다. 

 

예를 들어, 노여움이 아픔덩어리의 주된 에너지 진동이고 우리가 화를 내면서 누군가가 나에게 한 짓이나 그자를 한번 손봐줘야겠다는 생각을 품는다면, 우리는 무자각 상태가 되며 아픔덩어리가 곧 ‘나 자신’이 된다. 분노가 있는 곳에는 그 밑에 늘 아픔이 있기 마련이다. 

혹은, 어두운 분위기가 찾아들고 갖가지 부정적인 생각에 빠져 내 삶이 참으로 하찮고 끔찍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그 몇몇 생각의 벡터가 고통의 몸체와 같은 방향을 달리게 되어 우리는 무자각에 빠지고 아픔덩어리의 공격에 취약해진다. 

 

여기서 ‘무의식이나 무자각’은 어떤 정신적 패턴이나 감정적 패턴과 동일시된다는 뜻이다. 이건 감시자가 완전히 없어진다는 뜻도 포함한다. 의식적으로 오랫동안 계속 주의를 기울이면… 아픔덩어리와 우리네 생각 과정의 연결이 차단되어 아픔덩어리가 변질하게 된다. 고통이 우리 의식의 불꽃에 연료가 되고, 그 결과 의식의 불길이 더 환히 타오르는 것처럼 보인다.

이건 쇠를 귀금속으로 변형하는 고대 연금술의 밀교적 의미와 마찬가지로, 고통을 깨어난 의식으로 변환하는 것이다. 의식의 계층화가 멈추고 내면의 분열이 치유됨으로써 우리는 다시 온전해진다. 그때 우리의 책임은 아픔을 더 이상 만들지 않는 것이다.

 

이 과정을 요약해 보자. 

자기 내면의 감정에 주의를 집중하라. 
그것이 바로 아픔덩어리라는 것을 알아두라. 

그것이 내면에 있다는 점을 받아들이라. 
그것을 생각하지 말라. 즉, 감정이 생각으로 바뀌지 않게 하라. 
그것을 판단도 분석도 하지 말라. 

아픔덩어리의 특질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만들지 말라.
계속 현재에 머물면서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을 계속 관찰하라. 
감정적인 아픔뿐 아니라 그걸 ‘지켜보는 관찰자’요 말없는 감시인이 있다는 점도 인식하라. 

이것이 바로 <지금> 순간의 힘이요, 우리네 본연의 의식적인 현존의 힘이다. 

그렇게 하면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라. 

 

 

많은 여성들 경우, 아픔덩어리가 특히 생리를 앞두고 눈뜬다. 그것이 잠깨는 이유 등에 관해서는 뒤에 가서 더 자세히 얘기하겠다. 지금은 이런 점만 말하고 싶다. 즉… 

그 순간에 방심하지 않고 늘 조심하며 내면에서 느끼는 것에 지배되는 대신 그걸 죄다 지켜볼 수 있다면… 가장 강력한 영적 수행 기회를 얻게 되며, 그때 과거의 모든 아픔을 빠르게 변환할 수 있다.

(알림)  Voice Training에 관심 있는 분들은 여기를 참조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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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구두가 나는 아니야!" 

 

 

- 멋진 자동차를 한 대 뽑았어요. 신나지요. 괜히 ''도 잡고 싶고... 그런데 어느 날 옆구리에 흠집이 난 걸 발견했어요. 속상해요, 안 해요? 화가 나요, 안 나요? 그래서 며칠 동안 우울하고 밥도 잘 안 넘어갔다구요? .

여러 벌의 구두가 있지만, 이 구두들이 나는 아니야

- 능력을 인정받고 싶은 마음에 자기 시간이나 생활도 팽개치고 직장에 '올인'해요. 몰지각한 상사가 가끔 눈꼴시게 굴어도 꾹 참아요. '에이, 요즘 일자리 구하기도 힘든데, 여기서 떨려나면 어떡해? 이게 내 밥줄이니까 견뎌야지 별 수 있겠어?' .

 

- 자기 일이나 취미 활동도 포기하고 아이들 키우는 데 헌신했어요. 가끔 속 썩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예쁘게 잘 크는 걸 보니까 흐뭇했어요. 자신이 대견스럽게 보이기도 했어요. 그런데 다 크고 나니까 공부하느라 일하느라 내 곁을 떠나서 잘 찾아오지 않아요. 전화도 별로 안 해요. '에그, 자식도 크면 남이야!' 절로 탄식이 나와요. 허전함과 상실감마저 든다구요? .

 

이런 말이 (진리가) 하나 있더군요.

우리는... 자신과 동일시하는 것들에 지배당하지만, 자신과 분리하는 것들은 지배하고 컨트롤한다.

(이 말에서, 동일시/identification 대신 '집착' 같은 단어를, 분리 대신 '초연(하게 대하다)' 같은 단어를 써도 무방하겠네요.)

 

우리네 많은 사람들은 어떤 순간이나 시기에 가장 소중해 (때론, 절실해) 보이는 것을 자기 자신과 같은 것이라 여기는 경향이 커요. , 살면서 가정이나 사회에서 자신이 주로 수행하는 역할, 혹은 자신의 주된 정신 방향이나 기능을 자신과 동일시해요.

 

자동차며 직장이며 자녀를, 성공이나 출세나 직위를, 아름다운 외모나 옷이나 액세서리를, 근사한 집이나 돈이나 하다못해 구두까지도... '나한테 중요한 것'이라 여길 수는 있는데, 그게 곧 <나 자신>이라 착각할 때 심각한 문제가 생긴다는 데 문제가 있어요

 

어떤 문제가 생기냐구요?

'나에게 아주 좋고 소중하고 절실한' 것들에 얽매여, 그보다 몇 십 배, 몇 백 배 더 소중한 <>를 홀대하면서 그 <>가 한껏 펼 수 있는 것을 가로막는 셈이 되니까요. 게다가 <>가 없는 바에야 자동차며 자녀들이며 출세며 돈이며 예쁜 얼굴이며 정의를 위한 투쟁이며 교회 열심히 나가는 것 등이 다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그래서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도 나오지 않았겠어요? (이 대목에서 자칫 곡해를 살 측면이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말이 길어지니까 일단 넘어가기로 하지요. ^^)

 

자기 안팎의 어떤 것을 자신과 동일시함으로써 한동안 즐겁고 만족스러울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해요. 하지만 여기엔 심각한 단점이 있어요. <>에게 위험하기까지 해요.

 

먼저, 외적인 요소를 들어볼까요. 결론적으로...

직장을 잃는다고 해서 <>가 죽나요? (당장엔 힘들 수 있지만, 다른 직장을 찾으면 돼요.)

실패했다고 해서 <>가 사라지나요? (칠전팔기는 <>를 잘 간수할 때 가능하잖아요?)

자동차가 긁혔다고 해서 <>까지도 긁어야 (속상해하고 화내야) 하나요?

자식들이 '코빼기도 잘 안 비친다' 해서 원망할 필요가 있나요? 그들에겐 그들 삶이 있는 걸요. 새도 키워 놓으면 나가서 따로 둥지 틀잖아요? 그게 자연과 삶의 정상적인 흐름인 걸요. ', 그래. 어릴 때처럼 늘 곁에서 재롱 떨고 등 두드려 주기를 바랄 순 없어. 열심히 키워서 내보냈으니, 내 할 일은 다 했어. 이젠 나도 내 삶을 살아야지.'

자신의 주된 역할이나 기능을 계속 자신과 동일시하면...
결국엔 사는 게 힘들어질 수 있어요. 아니, 그러기가 십상이에요. 상실감이나 좌절감에 빠지기 쉽고, 그래서 위험하다는 얘기까지 나오는 것이죠.

 

인형을 끌고 어딘가로 나아가는 어린 아이

나이 들면서 체력이 달리는 운동선수, 젊었을 때의 미모가 시들어 가는 여배우, 졸업 후에 새로운 책임감에 시달리는 대학생, 치열하게 일했지만 어쩌다 실패한 사업가, 근사하게 살다가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된 재산가... 등이 힘들어하고 절망에 빠진다면, 그건 그들이 '전성기의 체력', '한창 때 미모', '학생 신분', '일이나 돈'을 자신과 동일시했기 때문이에요.

 

내적인 요소로 보자면, 자신의 머리나 (지력이나) 자기감정이나 몸 같이 자신의 특정한 일부와 동일시하는 경우에 일이 더 안 풀리고 삶이 더 힘들어질 수 있어요. 왜냐구요? 왜냐하면... 흔히 하는 이런 말들이 반증이 될 수 있겠네요.

"머리만 믿고 까불다가 낭패를 봤어.'

"자기감정에 사로잡혀서 상황을 직시하지 못했어."

자신의 특정한 일부를 자신과 동일시한다는 것은 (, 자신이라 여기는 것은) 우리네 <진짜 나>에 본래부터 깃들어 있는 무한한 힘을 스스로 제한하는 셈이에요. (지금 우리 얘기는 <진짜 나>를 찾아가는 과정의 한 토막이에요.)

그 결과, '어디 어떤 위치에서 무엇을 하든 늘 기껍고 즐겁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내가 요것밖에 안 되나', '이렇게 살 수밖에 없는 거야?' 하는 자괴감에 빠지기 쉬워요. 그러면 우울해지지 않겠어요? 자칫 열등감에 시달릴 수도 있어요.

 

이탈리아 정신과 의사 Assagioli

이건 다 <> 자체는 지극히 다양하고 심오하고 힘이 넘침에도 불구하고, 그 다양한 <>의 일부만 자기 자신이라고 여기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자신의 진면목을 스스로 다 드러내지 않기 (혹은, 못하기) 때문이에요

이런 점을 이탈리아 정신과 의사 Assagioli가 알아내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신분석과 명상을 결합하여 <psychosynthesis, 정신종합요법>을 만들어 냈어요. '동일시''분리'라는 용어도 거기서 나왔습니다.

 

이론과 실습이 좀 많은데, 여기서는 '개인의 신체며 감정이며 지력과 분리하는' 실습을 하나 간략히 소개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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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곳에 홀로 편하게 앉아서 긴장을 푸세요. (이완 실습을 미리 해도 좋아요.) 

숨을 깊고 느리게 몇 번 들이쉬고 내쉬세요. (이완과 호흡 실습은 우리 블로그에 많아요.) 

다음에 아래 텍스트를 의미 새겨 가면서 자신에게 천천히 말해 주세요.

1.

나에게 몸이 있지만, 몸이 나는 아니다. 내 몸은 건강하거나 아플 수 있고, 피곤하거나 가뿐할 수도 있어. 하지만 그런 상태가 나에게, <참된 나>에게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내 몸이 내가 세상 살면서 인식하고 활동하는 데 소중한 도구임은 분명해. 하지만, 도구보다 더 큰 무엇은 아니야. 나는 늘 건강하도록 몸가축에 소홀하지 않아. 하지만 내가 몸은 아니야. 나에게 몸이 있지만, 이 몸이 곧 는 아니다.

(그 다음엔 눈을 감고 1~2분 동안 뜻을 음미하면서 몇 번 더 비슷하게라도 되풀이하세요. 마지막 어구가 핵심이에요. 이건 요 다음 2번과 3번에서도 마찬가지에요.)

2.

나에게 감정이 있지만, 이 감정이 나는 아니야. 내 감정은 다양하고 변덕스럽고 때론 혼란스럽기도 하다. 내 감정은 사랑에서 증오로, 평온에서 분노로, 기쁨에서 슬픔으로 바뀔 수 있어. 하지만 내 본성과 내 진짜 천질은 바뀌지 않는다. <>는 언제나 그대로 나야. 이를테면, 분노의 파도에 휩쓸릴 때가 더러 있지만, 시간 지나면 그게 사라진다는 걸 난 알고 있어. 그렇기 때문에 나는 분노가 아니다. 더 나아가, 내 감정이 <>가 아니라는 점도 분명해. 내 감정을 내가 지켜보고 이해하면서 다스리고 활용하고 조화롭게 통합하는 법도 점차 배울 수 있어. 내 감정이 나는 아니야. 나에게 감정이 있지만, 그 감정이 곧 나는 아니다.

3.

나에게 마인드가 (마음이, 지력이) 있지만, 마인드가 나는 아니야. 내 마인드는 뭔가를 탐구하고 나를 표현하는 데 소중한 도구야. 하지만 그것이 내 본질은 아니다. 사상이며 지식이며 경험을 새로 얻을 때마다 내 마인드의 내용은 늘 달라진다. 가끔은 내 말을 안 듣기도 해. 그렇기 때문에 내 마인드가 나라고 말할 수는 없어. 마인드는 내 안팎의 세계를 지각하고 인식하는 기관인 것이지 가 아니야. 나에게 마인드가 있지만, 이 마인드가 곧 나는 아니다.

 

이건... 우리한테 중요하긴 하지만 정작 <> 자신보다는 덜 중요한 것을 떼어내는 (분리하는) 단계에요. 물론, 그 다음에 동일시 단계가 이어지겠지요. 그건 별도로 다루겠어요.

 

결국 <분리> 작업이란 가장, 정말, 진짜 소중하고 본질적인 것과 그 아래로 중요한 것들을 구별하는 일이에요. 구분하고 판별할 줄 알면, 일도 더 효율적으로 할 수 있고 삶을 더 즐겁게 보낼 수 있지 않겠어요?

"마음에 너무 담아두지 마."

"뭐 사소한 일에 목숨 걸 일 있나!"

"하나님 것은 하나님에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이런 말들도 분리의 중요성에서 나온 게 아닐까 싶어요.

 

보리수 밑에서 명상에 잠기다

 

저 실습을 상황에 맞게 더 확장하고 변형할 수 있어요.

(지금 나에게 소중하고 절실한) 이 자동차가, 이 직장이, 직업이, 출세가, 성공이, 자녀들이, 부모가, 학업이, 발표가, 면접이, 돈이, 집이, 예쁜 얼굴이, 근육질 몸이, 옷이, 하다못해 이 구두까지도... <>인 것은 아니야. 절대 아니야. 

 

여기서 두 가지만 덧붙여야겠네요.

1.

노파심에서 먼저... 저렇게 생각하고 행동한다 해서 일이나 자녀나 학업 등등에 소홀히 대해도 된다는 것은 정말로 절대 아니에요. 저렇게 한다면, 오히려 저 모든 것이 더 잘 될 거예요. 그 이유는... 저렇게 할 때 우리가 더 자유롭고 편해지며 크고 넓게 보게 되니까요.

"잡으려면 먼저 놓아주라" 하는 말도 비슷한 맥락이겠어요. (삶의 자연스러운 흐름에 맞서는 대신, 한 발짝 물러서고 승복하고 용인하고 받아들이기 같은 개념으로 저절로 이어지는 듯한데, 이 역시 우리가 따로 다룰 대목이에요.)

2.

'그렇다면, 그놈의 <>는 도대체 뭔데 돈이나 출세나 권력보다도 더 소중하다는 거야?!' 이런 생각이 드나요? ... 이건 제법 긴 얘기가 되겠어요. 이때의 <>(우리에게 아픔과 고통만 안기는) '거짓된 나'<에고>가 아니라, 진정 <참된 나>를 가리킨다는 것만 우리가 일단 알아두지요. 그리고 그 안에 (우리 내면에!) 보물이 들어 있어요. (<낡은 궤짝의 비밀> 포스팅을 보면 좋겠어요.)

 

한창 때 미모로 대중의 사랑을 받다가 나이 들어 그 미모가 사라지면서 인기도 사라지자, 실망하고 좌절하던 끝에 아예 세상을 등진 여배우들이 나라 안팎으로 제법 있어요. 그들이 만약 '한창 때 미모'를 곧 자기 자신이라 여기지 않고 내면의 아름다움을 닦았다면, 나이 들어서도 외려 더 꽃 파웠을 거예요. 예를 들어, 아프리카 아이들 돌보는 오드리 햅번...

(알림)  Voice Training에 관심 있는 분들은 여기를 참조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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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덩의 악마들 11편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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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당신과 당신 마인드는 같은 것이 아니야

 

깨달음에 가장 큰 장애물

 

-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한 거지가 어떤 거리에서 삼십 년 넘게 구걸을 해 왔다. 

어느 날 낯선 사람이 그 곁을 지나갔다. 

거지가 낡은 모자를 기계적으로 내밀면서 “동전 한 닢만 적선하십시오” 하고 우물거렸다.  

행인이 “나한테는 당신에게 줄 것이 하나도 없군요” 대꾸하고는 “한데 거기 깔고 앉은 건 뭐지요?” 하고 물었다.   

“아, 이건 별것 아닙니다. 그저 낡은 궤짝이에요. 아주 오래 전부터 깔고 앉던 거지요.”  

“그 안을 한번 들여다보기는 했나요?” 

“아뇨, 그럴 필요가 뭐 있어요? 아무 것도 없는데.”  

“그러지 말고 한번 들여다보구려.” 행인이 적극 권했다. 

거지가 마지못해 몸을 일으켜 귀찮다는 듯이 궤짝 뚜껑을 열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궤짝 안에는 금덩이가 가득 들어 있는 게 아니던가!

 

You are not your mid. - Eckhart Tolle


당신에게 줄 것 하나 없이 내면을 들여다보라고 권하는 행인이 바로 나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는 이 우화처럼 무슨 궤짝 속을 들여다보라는 게 아니라, 그것보다 훨씬 더 가까이 있는 자기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라고 권한다.

 

“하지만 난 거지가 아니야!” 하는 반응이 나올 수도 있다. 자신의 진정한 보물은 <존재>의 빛나는 기쁨과 여기서 나오는 깊고 확고한 평온인데… 이걸 발견하지 못한 이들은 재산이 아무리 많다 해도 거지와 다를 바 없다. 그들은 바깥에서 작은 쾌락이나 성취를 찾고 인정받기를 갈망하며 안전을 모색하고 사랑을 원한다. 한데 그 모든 것을 포함하여 세상이 제시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보물이 정작 자기 안에 있다는 사실은 모른다. 

 

깨달음이라는 단어는 뭔가 초인적인 성취 같은 걸 떠올리게 하고, 우리네 <에고>는 그런 식으로 몰아가기를 좋아한다. 하지만 깨달음이란… <존재>와 하나 된다고 느끼는 자연스러운 상태일 뿐이다. 

이건 헤아릴 수 없고 불멸인 뭔가와 연결된 상태이며, 좀 역설적이지만 본질적으로는 우리 자신이면서도 또 우리보다 훨씬 더 큰 무엇과 연결된 상태이다. 

이건 우리의 이름과 형태를 넘어서서 우리의 진정한 본질을 (실체를) 찾는 것이다. 

 

이 연결을 느낄 수 없을 때, 우리는 자기 자신이며 주변 세상과 분리됐다는 착각에 사로잡힌다. 
그러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자신을 고립된 파편으로 인식한다. 
이때 두려움이 생기며, 자기 안팎에서 빚어지는 갈등과 충돌이 일상사가 된다. 

 

깨달음을 ‘고통의 끝’이라고 간결하게 표현한 붓다의 정의가 정말 마음에 와 닿는다. 여기에 초인적인 것이라곤 없다, 안 그런가?

정의로서는 물론 완전하지 못하다. 깨달음은 고통이 아닌 것이라고만 말할 뿐이다. 그러나 더 이상 고통이 없을 때 남는 건 무엇인가? 

 

이에 관해 부처는 말을 아끼는데, 그 침묵은 우리 스스로 헤아려 보라는 암시이다. 그는 부정적인 정의를 이용함으로써… 이 정의를 믿어야 할 무엇이나 초인적인 성취로 마인드가 받아들이지 못하게 한다. 즉, 깨달음이 우리가 달성할 수 없는 목표는 아니라는 뜻이다. 

이런 예방책에도 불구하고 많은 불자들은 깨달음이란 붓다가 할 수 있는 것이지 ‘우리한테 해당되는 것은 아니라고’ 믿는다. 적어도 이승에서는 아니라고 믿는다.

 

- 당신은 <존재>라는 단어를 쓰는데, 이게 무슨 뜻인지 설명해 줄 수 있나?  

 

<존재>란… 태어났다가 죽고 나타났다가 사라질 수밖에 없는 많은 생명 형태들 너머에서 늘 존재하며 영원한 ‘하나의 생명’이다. 하지만 존재는 모든 형태의 가장 안쪽에 보이지 않는 불멸의 본질로서 그 너머에만 있는 게 아니라 그 형태의 깊은 곳에도 있다. 즉, <존재>는 우리 각자의 가장 심원한 자아이자 실체로서 지금이라도 우리가 거기에 접근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자신의 마인드로 포착하려 들지는 말라. 그걸 이해하려 들지 말라. 

마인드가 고요할 때만 그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현존하면서 <지금> 순간에 주의를 완전히 집중할 때 비로소 <존재>를 느낄 수 있지만, 마인드로는 절대 이해할 수 없다. <존재>를 다시 또렷하게 인식하고 ‘그 느낌을 실감하는’ 상태에 머무는 것이 바로 깨달음이다. 

 

 ∫

 

- 당신이 쓰는 <존재>는 신(神)과 같은 뜻인가? 만약 그렇다면, 왜 신이란 단어를 안 쓰나?

 

신이란 단어는 수천 년 동안 오용되는 바람에 본래 의미를 다 잃었다. 난 그 단어를 쓴다 해도 아주 가끔만 쓴다. 내가 말하는 오용이란… 이 단어에 깃들어 있는 무한한 광대함과 신성한 영역을 한 순간도 접해 보지 못한 사람들이 마치 자기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확실히 아는 것처럼 이 단어를 입에 올린다는 뜻이다. 

 

신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야. 자기네가 부인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처럼 그렇게 한다. 이런 오용 때문에 “우리의 신만이 유일한 진짜 신이고, 너희 신은 가짜야”라거나 니체의 유명한 언급 “신은 죽었다” 같이 터무니없는 확신과 주장, <에고> 식의 망상 따위가 생기는 것이다. 

 

신(神)이란 단어는 닫힌 개념이 되어 버렸다. 그 말이 나오는 순간 아마도 허연 수염 달린 노인의 심상이 떠오르겠지만, 이건 우리 바깥에 있는 누군가나 무엇인가에 대한 심적 관념인 것일 뿐이다. 아, 그래, 이것이 남성이나 남성적인 것이라는 점도 거의 확실하다. 

 

신이나 <존재>는 물론이고 그 어떤 단어도 그 단어 이면의 형용키 어려운 실체를 정의하거나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단지 중요한 것 하나는… “단어가 가리키는 ‘그것’을 우리가 체감하는 데 이 단어가 도움이 되나, 아니면 방해가 되나?” 하는 점이다. 이 단어는 그 이면의 초월적인 실체를 가리키는 것일까, 아니면 우리 머릿속에 아주 쉽게 날아들어 우리가 믿는 어떤 생각이나 정신적 우상이 되는 걸까? 

 

<존재>라는 단어는 신이란 단어처럼 그 무엇 하나 명확히 밝히거나 알려주지 못한다. 하지만 <존재>라는 단어에는 열린 개념의 이점이 있다. 이 단어는 보이지 않는 무한한 것을 (그것의 본질, 역할, 의미를) 어떤 조건적이고 유한한 대상으로 축소시키지 않는다. 

 

<존재>를 심상으로 만들기는 불가능하다. 

<존재>를 그 누구도 독점할 수 없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본질이며, ‘나는 이런 사람이야, 나는 저런 사람이야’ 하면서 자신을 다른 무엇과 동일시하기 이전에 ‘내가 있다’고 실감하고 내 실재를 느낌으로써 즉각 다가들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존재>라는 단어에서… <존재>를 체감하는 쪽으로 작은 한 발을 내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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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이 실체를 체감하는 데 가장 크게 방해되는 건 무엇인가?

 

자신을 자기 마인드와 동일시하는 것이다. 즉, 생각이 집요하게 이어지도록 부추기는 마인드를 바로 ‘나 자신’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잡생각을 멈출 수 없다는 건 끔찍한 재앙인데, 이런 점을 우리는 제대로 실감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거의 누구나 다 잡생각에 시달리니까, 이게 마치 정상인 듯 보이기 때문이다. 

정신적 소음 때문에 내면의 고요한 영역을 찾기 어려워

그리고 이 그칠 줄 모르는 정신적 소음 때문에 우리는 <존재>와 불가분한 내면의 고요한 영역을 발견하기 어렵다. 또 이 소음 때문에 <마인드가 만든 거짓된 나>가 생겨나서 우리한테 두려움과 고통의 그림자를 드리운다. 이 부분은 잠시 뒤에 자세히 살펴보겠다.

 

철학자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유명한 언급을 내놓았을 때, 그는 가장 근본적인 진리를 발견한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사실상 그건 가장 근본적인 착각을 드러낸 것이다. 즉, 생각을 <존재>와 같은 것으로 보았고, 자신을 생각과 동일시한 것이다.  

 

거의 모든 사람들 속에 웅크리고 있는 강박적인 ‘생각꾼’은 자신이며 주변 세계와 확실히 분리된 상태에서 살고 있다. 문제며 대립이며 충돌이 끊이지 않는, 극도로 복잡한 세상에 살고 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마인드는 갈수록 더 분열되고 있다. 

 

깨달음이란… 흠 없이 온전한 상태, 하나가 되기 때문에 평온한 상태이다. 
깨달음이란… 삶이 ‘의식에 나타나고 드러난’ 측면인 이 세상에서 삶과 하나 될 뿐 아니라 우리네 가장 심원한 자아이며 ‘드러나지 않은, 의식에 나타나지 않은’ 삶과도 하나 되는 상태이다. 한마디로, <존재>와 하나가 됨에 깨달음이 있다. 
깨달음이란… 내 안팎으로 끊임없는 갈등이며 고통의 종식일 뿐 아니라, 또한 자기도 모르게 끝없이 이어지는 생각에 더 이상 노예처럼 얽매이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이야말로 얼마나 크나큰 해방이란 말인가! 

 

자기 마인드를 자신이라 여길 때… 개념이나 꼬리표, 형상, 단어, 판단, 정의라는 이름의 흐릿한 차단막이 생기고, 그래서 진정한 관계가 다 차단된다!

마인드와 동일시할 때… 나와 나 자신 사이에, 나와 내 동료들 사이에, 나와 자연 사이에, 나와 신(神) 사이에 이 차단막이 드리우고, 이 차단막 때문에 이른바 분리 망상이 생긴다!!

즉, ‘내가 있고 또 나와 완전히 다른 별개의 것이 있다’고 잘못 생각하게 된다!!!

 

이때 우리는 가장 중요한 사실을 잊게 되니… 물질적인 외양과 개개의 형태들 기저에서 우리는 그 모든 것과 하나라는 사실 말이다. ‘잊는다’는 것은 이 일체감을 더 이상 자명한 실체로 느낄 수 없다는 뜻이다. 

 

모든 것과 하나임을 진실이라 믿을 수는 있지만, 그게 과연 진실인지는 알지 못한다. 

믿음이 위안은 될 수 있다. 하지만 직접 경험해 보아야만 믿음에 얽매이지 않으며, 이것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믿음이다. 

 

생각하는 과정은 병이 되었다. 질병은 상황의 균형이 깨질 때 생긴다. 이를테면, 신체 세포의 분열과 증식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이 과정이 신체 전반과 조율되지 않은 채 계속된다면 세포들이 급증하면서 병이 생기는 것이다. 

 

참고: 마인드는 (머리, 지력, 마음은) 제대로 사용하기만 한다면 더없이 훌륭한 도구이다. 하지만 잘못 사용하면 아주 파괴적인 도구가 된다. 더 정확히 말해, 우리가 마인드를 제대로 쓰지 못한다는 게 아니다. 우리는 대개 그걸 아예 이용하지 않아. 그 대신 마인드가 우리를 이용한다. 바로 이게 병이다. 우리는 자기 마인드가 곧 ‘나 자신’이라고 믿는다. 이건 망상이야. 이 도구가 우리를 점령했다.

 

- 그 말에 난 썩 동의하지 않아. 대다수 사람들처럼 나도 목적 없는 생각을 많이 하는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뭔가를 하면서 내 마인드를 이용한다. 늘 그렇다. 

 

크로스워드 퍼즐을 푼다거나 원자탄을 만들 수 있다고 해서 마인드를 이용한다는 뜻은 아니다. 개가 뼈다귀 핥기를 좋아하는 것처럼, 마인드는 어떤 문제에 매달리기를 좋아한다. 이 때문에 마인드는 십자말풀이를 하고 원자탄을 만드는 것이다. 당신은 어느 쪽에도 관심이 없다. 

이런 질문을 하나 해 보자. 

당신은 원할 때면 언제나 자기 마인드에서 벗어날 수 있나? 

마인드 ‘끄는’ 단추를 발견했나?

 

- 흠, 생각하기를 완전히 멈춘다는 뜻인가? 아니, 그럴 수는 없어, 아주 잠깐이면 몰라도. 

 

그렇다면 그건 마인드가 당신을 이용한다는 뜻이야. 당신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마인드와 동일시했고, 그래서 마인드의 노예가 됐다는 것도 모른다. 이건 우리가 자기도 모르게 뭔가에 홀리고 난 뒤, 우리를 홀린 그것을 자기 자신으로 받아들이는 것과 거의 흡사하다. 

자유는… 우리를 점유하고 있는 실체인 ‘생각꾼’이 본연의 우리가 아님을 깨닫는 데서 시작된다. 이걸 알 때 그 실체를 관찰할 수 있다. 이 ‘생각꾼’을 지켜보기 시작하는 순간, 더 높은 수준의 의식이 활성화된다. 

 

그러면 생각 너머에 무한한 지혜가 (혜심/慧心이) 있으며, 생각은 이 지혜의 미미한 일부일 뿐임을 깨닫게 된다. 또한, 아름다움, 사랑, 창의, 기쁨, 내면의 평화 등 정말 중요한 것은 전부 마인드 너머에서 생긴다는 것도 알게 된다. 비로소 우리는 깨어나기 시작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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