흠, 지름길이 너무 멀리 있나? 그런 면이 없지 않고, 여기엔 역설적인 측면도 좀 있는 게 사실.
하지만, 그런 생각과 주장의 본질에 별다른 흠이나 오류는 없다.
상대방의 얘기를 당신은 어떤 모습으로 듣고 싶은가요?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이런 주장도 있으니, 곧, "갖가지 형태의 말하기를 잘 하려면? 먼저, 듣기를 잘 하면 된다!" 그러면 대화도 소통도 스피치도 다 좋아진다.
이것을 잘 하는 학생은 성적도 올라가게 마련, 이것을 잘 하는 부모한테 좋은 자녀 있기 마련, 이것을 잘하는 비즈니스맨은 성과를 올리기 마련, 이것을 잘 하는 상담자는 신뢰를 얻기 마련, 이것을 잘 하는 연인은 애정을 굳히기 마련, 이것을 잘 하는 상사는 좋은 부하를 얻기 마련... 더 늘어놓을 필요가 있을까? 한마디로, 세상이 좋아진다.
한데, 우리네 대다수는 이런 점을, 아주 기본적이면서도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 성급한 성과를 바라기 때문에, 아니면 정말 중요한 길을, 필요한 방법을 몰라서? 여기 제시하는 생각, 사실 소통과 스피치의 연구와 실행 때 많이 하는 것. 목소리를 제대로 조율하고 키운 다음에 우리 모두가 들어서야 할 과정이기도 하다!
각설하고, 효과적인 청자가 되려면?
1. 가장 중요한 것은 듣는 일에 자신을 조율하기. 즉, 일정 시간 자신의 문제 같은 것을 잊기, 그래야 상대방 느낌을 이해할 수 있지 않겠나.
2. 상대방 언급에 반응할 때, 당신의 공감과 느낌 같은 것을 담아야 해.
3. 휴지(pause)를 유지하기. 당신 답변 뒤에 상대방은 잠시 생각하느라 침묵해야 돼. 그건 오로지 그의 시간이며, 그렇기 때문에 당신이 확인이며 부연 따위로 끼어들어선 안 되겠지?
4. 공감 가는 듣기에서는, 상대방 감정을 되돌려주기만 하면 돼. 그런 감정이 왜 생겼는지 상대에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
5. 상대가 흥분하는 경우, 대화를 짤막한 어구며 간투사들로 유지하는 게 가장 좋아.
들으면서 해야 할 것
1. 상대방에 맞서는, 자신의 편견이며 열등감 따위는 날려버려~
2. 대답과 결론을 서둘지 말아요.
3. 사실과 견해로 국한해야겠지?
4. 당신 말이 명료하고 정확한 것인지, 살피라.
5. 상대방 얘기를 평가함에서 편견을 품지 않는다. 경청하는 척만 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귀를 기울인다. 잡생각에 (자기 생각에) 휘둘리지 말라.
6. 대화에 임하면서, "내 입장은 이미 확고해!" 하고 단정 짓지 말아야. 즉, 선입견을 최소화.
7. 대화나 토론 주제에 대한 자신의 흥미와 관심의 강도를 조율하라.
8. 상대방의 주된 생각을 일부라도 나누고, 그걸 올바르게 이해하려고 애쓴다.
9. 들은 정보를 (마음속에서) 자신의 것과 얼른 맞춰 본 뒤, 즉시 대화의 주된 내용으로 돌아온다.
10. 자기 의견을 적극 내놓지 않으면서 그냥 주의 깊은 청자로만 남아 있는다 해도, 대화와 토론, 논쟁에서 수동적이 아니라 적극적인 참여자가 되어야.
11. 대화 중에, 두세 번 잠시 말이 끊기는 틈에 (휴지에), 들은 것을 마음속에서 일반화하기.
그런 경청 기술 익히기의 전제 조건으로 이런 과제를 수행해 보세요. 즉, 이틀 동안 함구하는 거예요. 이틀 동안 입을 꾹 다물고 지내는 겁니다.
- 아니, 어떻게 이틀씩이나 말을 안 하고 지내나? 갑자기 입을 다물라니?! 별 시답잖은 짓을 다 하라고 시키는군.
- 난 말 잘 하는 법을 배우고 싶은데, 침묵하라고 하네. 이게 뭐야?
흠, 불평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네요. 한데, 이건 시답잖은 짓이 아니라 아주 진지한 작업입니다. 제 얘기가 ‘새 까먹은 소리’가 아니라는 근거를 대겠습니다. 이틀 동안 말하지 않고 지내기는 물론 힘들어요. 그것도 사회생활을 하면서. 그러나 그렇게 해 보면…
심하게 수줍음 타는 사람은 이틀 동안 침묵한 뒤에 이렇게 생각할 수 있을 거예요.
‘흠, 많은 사람들이 나보다 훨씬 더 흉하게 말하면서도 부끄러운 줄 모르고 태연하게 살고 있네. 근데 내가 왜 소심하게 굴어야 하지? 이런저런 경우에 그들보다 내가 말을 더 제대로 할 수 있다면?’
이와 반대로, 끊임없이 주절대지 않으면 뭔가 불안한 것만 같아서‘언어 스팸’을 쏟아내는 데 익숙해진 사람들은쓸데없이 대화에 끼어들지 않고 자제하는 능력을 발견하게 될 거예요. 그런 사람들은 모임에서 무의미한 다변으로 눈길 끄는 짓을 자기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그만두게 되겠지요.
아무 때나 낄 데 안 낄 데 가리지 않고 토를 달고 반응을 보임으로써 다른 이들에게 불편과 짜증을 안기는 사람들을 누구나 기억할 거예요. 그런 사람들은 그럴 기회가 없을 때는 옆 사람들에게 의미 없이 말을 걸고, 그래서 그들이 화자의 얘기를 경청하는 데 방해가 됩니다. 그런 사람과 유쾌한 소통을 기대하기란 꽤나 힘들어요. 그런 사람들은 10초라도 함구하기를 어려워해요. 또, 그걸 지적하면 섭섭하게 여기고...
만에 하나 당신이 그런 타입에 해당된다면, 닷새 동안 침묵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묵언 수행을 두 달 간격으로 반복하는 게 더 좋아요. 두 번째는 나흘 침묵, 세 번째는 사흘, 네 번째는 이틀, 다섯 번째는 하루 동안 침묵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묵언 과제를 수행하면서,
* 누가 어떻게 말하는지,
* 주변 사람들의 성공과 실패가 무엇에 좌우되는지,
* 사람들에게 어떤 언어 매너가 있는지,
* 어떤 사람은 대화 상대들을 어떻게 사로잡는지,
* 또 다른 사람은 입을 열기만 하면 듣는 이들에게 왜 은근한 짜증이나 모욕감, 따분함, 피로 따위를 안기게 되는지…
이런 면들을 분석하는 겁니다.
어때요, 제 말에 일리가 있나요? 그렇다면 묵언을 위해 적당한 날을 잡으세요. 당신이 (이런 표현을 서운하게 여기지 않기 바랍니다) '수다꾼'이라고 생각되면 이틀이 아니라 나흘 동안 침묵할 필요가 있습니다. 식구, 지인, 직장 동료들에게 의사가 이틀 동안 말하기를 금했다고 알리세요. 그리고 침묵하십시오. 급하게 말해야 할 경우에 대비해, 메모지와 볼펜을 휴대하세요. 들을 수는 있지만, 말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침묵하고, 우리는 생각한다. 우리는 혼자 속으로 말한다.
이건 우리 소통과 스피치 훈련에서 중요한 단계입니다.
처음엔 혼자 속으로 말하고, 필요한 단어들을 고르고, 그런 뒤에야 선택한 단어들을 입에 올리기.
내 뜻이 잘 전달됐으리라 기대합니다. 이번 과제를 수행한 뒤에야 다음 과제로 넘어가십시오. 건너뛸 필요가 없습니다. 체계적으로 접근하면 더 좋은 결과를 얻으니까요.
이번 과제를 수행한 뒤 당신은 자기감정을 더 잘 다스릴 수 있고, 당신 말은 더 신중하고 더 깔끔해질 겁니다.
툭하면 싸우는 부부가 있었습니다. 하도 잦은 싸움에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된 아내가 지혜로운 수도사를 찾아가 부탁했습니다.
“부부싸움하지 않는 방법을 좀 알려 주셔요.”
부인의 간절한 청을 듣고 수도사가 물을 한 병 주면서 말했습니다.
“이 병에 든 것은 우리 수도원 우물에서 길어 올린 특별한 물로서, 효능이 신통하답니다. 집에 두었다가 남편이 싸우려고 덤빌 때면 이 물을 한 모금 입에 머금으세요. 뱉어도 안 되고 삼켜도 안 됩니다. 그냥 머금고만 계세요. 남편 말이 끝날 때까지 계속 그러고 있어야 합니다. 다툼이 있을 때마다 그렇게 하세요. 큰 효능이 있을 겁니다.”
부인이 그대로 했습니다. 남편이 무슨 시비를 걸기 시작하면, 물을 입에 머금었어요. 그리고 남편 말이 끝날 때까지 물 머금은 채 입을 다물고 있었습니다. 계속 그렇게 했더니, 집안이 조용해졌습니다. 남편의 거친 말도 조금 나오다가 그치고 말게 됐습니다. 부인은 신비로운 물에 감탄했습니다.
어느 날 다시 수도사를 찾아갔습니다.
"수도사님! 이건 정말 성스러운 물이군요. 이 물을 입에 머금은 뒤 부부싸움이 사라졌습니다."
수도사가 웃으면서 대답합니다.
“부인에게 드린 물은 신비로운 게 아닙니다. 그냥 보통 물이지요. 부인이 물을 입에 머금으면서 지킨 침묵이 신비로운 능력을 발휘한 것일 뿐이죠.”
19 세기 많은 철학자들이 실존주의의 개념을 발전시켰지만, 이 개념을 널리 알린 이는 프랑스 작가 사르트르였다. 1944년 5월 파리에서 초연된 연극 <출구 없는 방/ Huis Clos/ No Exit>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니까. 이 작품에는 안내인, 가르생, 에스텔, 이네스 등 네 캐릭터만 등장하며, 무대는 벽난로 위에 커다란 청동 장식품이 놓이고 앙피르 풍 가구가 배치된 객실. 그러나 이 작품에는 “다른 사람들이 바로 지옥”이라는 식의 실존주의적 사고가 배어 있다.
안내인: 어찌 그렇겠습니까? 우리는 이를테면 중국인이나 인도 사람을 위한 방도 다 제공합니다. 그들한테 앙피르 양식의 안락의자가 왜 필요하겠습니까?
가르생: 그럼, 나한테는 어떤 양식이 맞겠소?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아시오? 이런! 그게 무슨 상관이람. 사실대로 말하자면, 난 견딜 수 없는 가구들 사이에서, 거짓된 상황에서 살면서 그런 삶을 마음껏 즐겼지요. 루이 필립 양식의 식당처럼 거짓된 상황…, 그 양식을 알아요? 요는, 말하자면, 가짜 속에 또 가짜가 있다는 것이오.
안내인: 앙피르 풍으로 꾸민 객실도 전혀 나쁘지 않다는 걸 알게 될 겁니다.
가르생: 그래요? 아, 좋아요, 좋아. 그렇다고... (사방을 둘러보면서) 하지만 이건 예상치 못했는데... 저 아래에서 우리한테 하는 얘기를 당신은 알고 있나요?
안내인: 무슨 얘기 말인가요?
가르생: 흠... (방안을 휘둘러보면서) 이곳에 관해 하는 말들 말이오.
안내인: 사실, 그런 건 다 허튼소리에 불과해요. 누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어요? 그 사람들은 여기 와 본 적이 없는데. 왜냐하면, 아시다시피, 그들이 여기 오려면...
가르생: (그를 주시하면서) 농담이냐구요? 아니요, 여기서 웃을 일이 뭐 있겠소. (침묵. 가르생이 앞뒤로 바장인다.) 여긴 거울이 없군요. 창문도 하나 없네. 깨질 물건은 하나도 없어. (문득 어조를 높여서) 한데, 내 칫솔은 왜 압수한 거요?
안내인: 아, 좋아요! 그러니까 당신은 아직 이른바 인간적 품위를 떨치지 못한 건가요? 이런 표현, 미안합니다.
가르생: (화가 나서 안락의자 팔걸이를 내려치며) 빈정대지 마시오. 내 처지를 분명히 알긴 하지만, 그래도 그런 건 못 참아...
안내인: 아, 알겠습니다! 기분 상하게 할 뜻은 없습니다. 댁은 뭘 원하시나요? 고객들은 다 똑같은 질문들을 던져요. 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정말 멍청한 질문들이지요. 다들 “고문실은 어디 있어요?” 하는 물음으로 시작합니다. 그 다음에 좀 진정되면 칫솔을 요구하는데, 그래봤자 개인위생을 염려해서 그러는 건 전혀 아니에요. 한데 정말이지, 당신들은 생각 하나 제대로 할 수 없단 말인가요? 대답해 보세요, 당신이 왜 이를 닦아야 하는 겁니까?
가르생: (흥분을 가라앉히고) 그래, 그럴 필요가 없군. (다시 사방을 둘러보면서) 그리고 거울은 왜 들여다보고 싶어 하나? 하지만 벽난로 위에 있는 저 청동 흉상으로 말하자면… 내가 저기서 눈을 떼지 못할 순간이 올 것 같아요. 눈을 떼지 못하겠지요?
좋아요, 우리 툭 털어놓고 얘기해 봅시다. 난 내 처지를 아주 잘 알고 있다오. 이게 어떤 느낌인지 말해 볼까요? 한 남자가 물에 빠져 허우적대면서 조금씩 가라앉고 있는데, 두 눈은 아직 물 위에 내놓고 있는 꼴이오. 그리고 무엇을 볼까요? 그 사람 이름이… 아, 바르베디앙, 그가 만든 청동 흉상을 보겠지요. (*Barbedienne, 1810-1892, 프랑스 금속세공인). 이건 악몽이오! 이게 저들의 의도 아닌가요?
아, 아니야, 당신은 질문에 응하지 말라는 지시를 받았겠지. 그래서 더 묻지 않을 게요. 하지만 나한테 함부로 대하지는 마시오, 나를 놀라게 하면서 즐길 생각일랑 접어요, 상황을 잘 파악하고 있으니까. (다시 앞뒤로 바장인다.) 자, 칫솔은 필요 없게 됐어. 침대도 그렇고. 여기서는 다들 잠도 안 자는 모양이구려?
안내인: 그렇습니다.
가르생: 그럴 줄 알았소. 잠을 왜 자야 하지? 졸음이 당신 뒤편에서 조용히 다가들고 눈이 저절로 감기는 것을 느끼지만, 침대로 갈 필요가 없지. 소파에 눕는데, 이런, 잠이 달아나고 마네. 두 눈을 부비고 일어나면, 모든 게 다시 시작되는 것이고.
안내인: 당신은 정말 낭만적이군요!
가르생: 그런 소리 마시오. 난 눈물 흘리지 않고 불평도 하지 않을 게요. 금방 말한 대로 상황을 직면할 거요. 공정하고 당당하게 마주할 것이오. 내가 짐작도 하기 전에 상황이 뒤통수치기를 바라지 않아요. 이걸 당신은 낭만적이라고 부르는군요. 여기선 휴식이 필요 없다는 뜻이오? 휴식이 필요 없다면 잠을 왜 자나? 안 그렇소? 잠깐만. 이봐요, 여기선 징벌을 어떻게 받지요? 어디서? 아, 알겠어, 휴식도 없이 내닫는 삶이로군.
안내인: 휴식도 없다니요?
가르생: (그를 흉내 내면서) 휴식도 없다니요? (수상한 눈빛으로) 나를 보시오. 내 그럴 줄 알았어! 당신 눈길이 왜 이다지도 뻔뻔스러운지 이제 알겠소. 근육 위축증에 걸렸군!
안내인: 무슨 뜻이지요?
가르생: 당신 눈꺼풀 말이오. 우리네 눈꺼풀은 위아래로 움직여요. 이걸 가리켜서 깜빡거림이라고 하지. 이건 찰칵 하고 내려가면서 휴식을 취하는 작고 검은 셔터 같은 것이라오. 모든 것이 검게 변하고 두 눈은 축축해지지요. 그러면 얼마나 휴식이 되고 상쾌해지는지 당신은 모를 게요. 한 시간마다 4천 번의 짧은 휴식이 있다오. 4천 번의 짧은 멈춤을 생각해 봐요! 뭐라구요? 내 눈꺼풀도 닫히지 않게 될 것이라고? 어리석게 굴지 마시오. 눈꺼풀 없는 것이나 잠을 못 자는 것이나 매한가지야. 난 절대 다시 잠자지 않을 거요.
하지만 어떻게 견디냐고? 이해하려고 해 봐요. 보다시피, 난 놀리기를 좋아해요, 이건 나의 제 2의 천성이고, 난 자기 자신을 놀리는 데 익숙하다오. 자신을 괴롭히는 데 익숙하다고 해도 되겠지. 난 멋지게 괴롭히지 못해. 그러나 휴식도 없이 계속 그렇게 할 수는 없어요. 저 아래에서 나한테는 밤이 있었다오. 난 잠을 잤어요. 늘 곤히 자곤 했어. 일종의 보상 같은 거지요. 그리고 행복한 꿈도 살짝 꾸었지. 거기엔 푸른 들판이 있었다오. 그냥 평범한 들판인데, 거기서 한가롭게 거닐곤 했지… 여긴 지금 낮이오?
안내인: 램프 켜져 있는 게 안 보입니까?
가르생: 아, 그래요, 알겠어. 그러니까 이게 당신네 낮이로군. 바깥은 어떻소?
안내인: (놀라서) 바깥이라니요?
가르생: 이런 젠장, 무슨 뜻인지 알잖소. 저 벽 너머 말이오!
안내인: 거긴 통로가 있습니다.
가르생: 그러면 통로 끝에는?
안내인: 객실들이 더 있고 통로도 더 있고 또 여러 계단이 있지요.
가르생: 그 다음엔 뭐가 있나요?
안내인: 그게 전붑니다.
가르생: 당신도 쉬는 날이 있을 텐데, 그때는 어디로 가시오?
안내인: 숙부한테 갑니다. 3층에서 선임 안내원으로 일하지요.
가르생: 흠, 그렇군. 전등 스위치는 어디 있지요?
안내인: 여기에 스위치 같은 건 없습니다.
가르생: 뭐라구요? 그렇다면 불을 못 끈다는 뜻이오?
안내인: 아, 관리실에서 전기를 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층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겁니다. 여기엔 전기가 넘치니까요.
가르생: 거 참 좋군. 그러니까 늘 눈을 뜨고 살아야 한다는 뜻이오?
안내인: (빈정대듯이) ‘산다’는 표현을 쓰셨나요?
가르생: 말꼬리 잡지 마시오. 눈을 감지 않는다. 영원히. 눈앞엔 늘 대낮이야. 또 머릿속에도. (휴지.) 벽난로 위에 있는 저 청동상을 전등 위에 떨어뜨리면 불이 나가지 않을까?
안내인: 그건 아주 무겁습니다.
(가르생이 청동상을 들어 올리려 한다.)
가르생: 맞네. 정말 무겁군. (침묵.)
안내인: 그럼, 더 하실 말씀 없다면, 물러가겠습니다.
가르생: (흠칫 놀라면서) 뭐, 간다구요? 잘 가시오. (급사가 문에 이른다.) 잠깐. (급사가 몸을 돌린다.) 이게 벨 맞소? (급사가 고개를 끄덕인다.) 원할 때 벨을 누르면 당신이 나타나나요?
안내인: 원칙은 그렇습니다. 그러나 가끔 말을 안 들어요. 배선에 문제가 좀 있지요.
(가르생이 벨 쪽으로 다가가서 누른다. 벨이 울린다.)
가르생: 잘 작동하는군!
안내인: (놀라서) 정말 작동하네요. (역시 벨을 누른다.) 하지만 좋아하진 마세요, 변덕이 심하니까요. 이제 정말 가야겠습니다. 편히 쉬십시오.
가르생: (손짓으로 그를 세우면서) 저기…
안내인: 네?
가르생: 아니, 아무 것도 아니요. (그가 벽난로 쪽으로 가서 페이퍼 나이프를 집어 든다.) 이건 또 뭐지요?
사르트르(Jean Paul Sartre)의 <출구 없는 방>은 독일의 프랑스 점령을 상징하는 작품.
그 자신이 2차 대전 동안 프랑스군 군인으로서 패배와 전쟁의 고통을 생생히 겪었다.
사건은 지옥의 일부로 간주되는 방에서 벌어지는데, 이 방에 들어선 세 사람은 서로가 제 주변에 있는 다른 존재를 견디지 못한다. 이것은 전쟁 동안 뒤섞여 살고 있는 프랑스인들과 독일인들 간의 관계를 암시한다는 해석도 있다. 이 희곡에서 사르트르는 자유, 타인에게 의존, 속임수, ‘잘못된 믿음’ 같은 이슈를 다룬다.
<출구는 없다> 공연 장면
죽음을 보는 방식이며 현재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등에 관한 사르트르의 메시지를 이해하려면 이 희곡에 담긴 여러 관념이며 상징화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또한 등장인물들이 각자 처했던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캐릭터들도 깊이 있게 살펴봐야겠다.
사르트르는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을 통제하게 하는 존재인 ‘존재 안의 존재(being-in-itself)’나 아니면 스스로 선택하는 존재인 ‘존재 위한 존재(being-for-itself)’를 확고하게 믿었다.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그의 경구는 인간 의식이 ‘존재 위한 존재’나 ‘존재 안의 존재’에 집중됐다는 그의 믿음을 드러내는 주제였다.
인간에겐 자신의 생각, 특유함, 가치, 어떤 특징을 선택할 힘이 있다. 이런 힘과 더불어 선택에 대한 책임도 따라붙는다. 이 책임이 두려워서 사람들은 한 발 물러선 채 자기가 생각하고 행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선택하고 통제하게 하는 것. 이건 자신의 행동에 책임지지 않는 방법. 그럼으로써 ‘존재 위한 존재’ 대신 ‘존재 안의 존재’가 생긴다.
이 희곡에서 사르트르가 묘사한 캐릭터는 안내인과 이네스, 에스텔, 가르생. 가르생은 리오 출신의 저널리스트로서 가장 먼저 방에 들어온다. 그는 전쟁 중에 탈영하려 했다는 이유로 총살을 당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탈영이 평화주의자로서 신념을 옹호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강변한다. 대화가 펼쳐지면서 가르생은 자기네 세 사람이 어쩌다 우연히 한데 있게 된 것이 아니라 서로의 존재로써 서로를 고문하게 하려는 목적에서 같이 있게 됐음을 깨닫는다. 또 이 곤경을 수습하는 최선은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각자 따로 지내면서 다른 사람을 내버려두는 것이라고 밝힌다.
이야기 전반에 걸쳐 가르생은 과거를 되돌아보고 지구의 현재를 내려다보면서 자신이 지구에서 사랑한 사람들에게 저지른 못된 짓을 두고 자신을 달래려고 한다. 자신이 왜 지옥에 떨어졌는지 충분히 깨닫고 더 이상 아무 의문도 품지 않는다.
두 번째로 객실에 들어온 이네스는 가장 파괴적인 캐릭터. 그녀는 다른 두 사람에게 적대감과 문제를 불러일으키려고 든다. 과거에 그녀는 우체국 사무원이었다. 자신이 사촌의 아내를 유혹하고 간통을 저질렀기 때문에 지옥에 떨어진 것이라고 믿는다. 그녀는 자는 동안 자기 사촌의 아내이자 자신의 애인이 스토브를 켜 두어 가스가 새 나오는 바람에 함께 죽었다. 남자들을 싫어하는 게 분명한 이네스는 가르생을 미워하여 툭하면 아옹다옹한다. 하지만 에스텔이 아주 매력적인 여성임을 금방 알아차리고는 계속 치근댄다. 에스텔에게 더 가까워질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 애쓰면서도 실제로는 그녀를 두려워한다.
마지막으로 방에 들어온 사람은 에스텔. 셋 중에서 가장 크게 겁에 질려 있다. 자신의 실제 존재를 스스로 상기하기 위해 거울을 보는데, 그 방에는 거울이 없음을 깨닫고 자신의 존재를 분명히 하기 위해 가르생과 이네스에게 의존하기로 한다. 또한 자신은 지옥에 있는 게 아니라고 굳게 믿으면서 폐렴으로 죽었다는 것만 인정한다. 그녀는 ‘죽은’이란 단어 대신 ‘부재중’이란 단어를 쓰자고 다른 두 사람에게 부탁한다.
이네스가 계속 집적대지만 에스텔은 오로지 남자하고만 함께 할 수 있으며 가르생을 좋아한다고 밝힌다. 가르생은 한순간 에스텔에게 흥미를 보이다가 곧 이네스와 그녀의 행동에 집중하게 된다. 결국 에스텔은 자신이 불륜을 저질렀으며 사생아를 죽였다고 고백한다.
가장 베일에 싸인 캐릭터는 안내인. 그는 세 사람을 방으로 안내하면서 질문에는 거의 대답하지 않으며 수수께끼 같은 말만 짧게 남기곤 한다. 자기를 호출할 수 있는 벨을 가르생에게 알려주지만, 그건 거의 작동하지 않는다. 안내인은 악마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그는 가르생에게 탈출할 기회를 주지만, 그러면서도 가르생이 이네스의 비판을 겁내 떠나지 못할 것임을 알고 있다. 세 사람은 안내인이 자기들을 은근히 우롱하며 방의 가구 배치 같은 문제로 아주 성가시게 한다고 여긴다.
사르트르는 각 등장인물의 존재와 본질의 차이에 의문을 제기한다. 각자는 지구에서 이미 죽었고 남은 영혼으로만 생존할 수 있다. 그들은 폐쇄되고 고립된 상황으로 인해 자신이 정말 누구인지 스스로 볼 수 있다. 실존주의는 인간 행위를 객관적으로 이해하려는 전통적 접근 방식을 거부하는 것. 실존주의자들은 그 어떤 공동체나 전통, 법과도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개개인을 연구하고 들여다보기를 택한다. <출구는 없다>에서 우리는 실존주의를 제대로 관찰할 수 있다. 출구도 거울도 없기 때문에 캐릭터들은 자기네가 실제로 거기 있고 본질을 지니고 있는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
처음에 이네스는 가르생의 표정을 두고 가르생과 갈등을 겪는다. 입매가 마음에 안 드니 그만 씰룩거리라고 요구한다. 그가 그녀의 지적을 받아들여 씰룩거림을 멈추려 애쓴다. 이것은 등장인물들이 자기네 존재를 정의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 의견에 의존하는 여러 사례 가운데 하나이다. 가르생은 이네스가 그의 본질을 정의하도록 허용한 것.
이 작품의 또 다른 흥밋거리는 사르트르가 지옥을 최종 장소로 묘사하지 않았다는 점. 마인드 상태가 지옥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독자가 알게 한다. 독일군의 파리 점령 기간에 이 희곡을 썼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안내인의 눈꺼풀 없는 응시로써 사르트르가 나치의 프랑스인 감시를 비유했다고 볼 수도 있겠다. 가르생은 안내인의 주시를 몹시 곤혹스럽게 여기는데, 다른 사람들의 의문의 눈길 받는 것을 겁내기 때문이다.
에스텔은 가르생을 처음 볼 때 그를 지상의 연인과 결부시킨다. 이건 스토리 후반에 둘의 관계를 예고하는 것. 에스텔이 거울에 의존하여 실제로 거기 있다고 믿음을 통해 존재와 본질이 또 거론된다. 에스텔은 물질적인 것들에 의존해 자기 존재를 정의한다. 반면에 이네스는 자신의 존재나 본질을 다른 사람들이 정의하게 놔두지 않는다. “그녀는 항상 자신을 처절하게 의식한다고 주장한다.” 에스텔은 이네스에게 거울이 돼 달라고 하지만, 그녀가 에스텔을 제대로 돕기란 불가능하다. 외모에 대한 의견이 서로 다르니까.
에스텔과 가르생 둘 다 자기네 과거를 떠나보내고 이미 저지른 것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 그들은 각자 자신의 지옥을 만들어 내는데, 그건 끝없는 개인적 고문처럼 보인다. 둘은 여전히 과거에 있는 듯이 행동하며, 이네스와는 달리 지금 여기를 보려 들지 않는다. 이네스는 자신의 현재를 분명히 보며 과거가 바뀔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거기에 더 연연하지 않기로 한다.
이네스와 마찬가지로 가르생은 자신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판단을 극히 염려하며 통제력이 부족할까 겁낸다. 그는 이제 자신이 사라졌고 자신의 기억과 유산을 남들에게 남겨 두어 기쁘게 했다고 믿는다. 그는 자신을 정의할 자유를 다른 이들에게 넘긴다. 그는 이제 ‘존재 안의 존재’가 되었다. 이건 안내인이 그를 위해 문을 열 때 떠나지 않기로 한 이유이다. 그는 과거에 자신이 행한 선택을 두고 사람들이 그를 판단할 것이라 믿으며, 자신을 영원히 이 방에 맡기기로 결정한다.
사르트르는 가르생과 에스텔, 이네스를 한데 모아둠으로써 다른 사람들이 서로에게 지옥이 될 수 있음을 잘 보여준다. 지옥은 그냥 물리적 장소가 아니라 우리네 마음가짐일 수 있다. 각자가 서로 응시하는 파워가 대체로 각 개인의 개성을 앗아간다. 타인의 존재만으로 충분히 고통을 야기할 때 신체적 고문은 필요가 없다. 각 캐릭터가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와 책임을 잃고 무시한다.
<출구 없는 방>은 삶의 여러 중요한 주제를 보고 싶어 하는 이들이 접할 만하다.
자기 행동에 책임, 다른 사람들을 받아들이기, 자신을 스스로 정의하기, 실존, 현재에 집중 등이 삶을 꾸리는 중요한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