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만약 부모가 처음에 다른 이름을, 예를 들어 영호라는 이름을, 붙였다면 당신은 철수가 아닐 것이다. 이름이란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부를 때 쓰는 단어일 뿐이다.
당신을 영호라 부른다 해서 당신의 자기인식이나 자아감이 과연 바뀔까?
아니다.
혹시 당신을 ‘항아리’라 부른다 해도 당신의 자아감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있던 그대로로 남아 있을 것이다.
이런 점을 음미해 보면, 당신 이름이 곧 당신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그런데도 누군가가 당신 이름을 부르면, 당신은 그 사람이 바로 당신에게 말하는 것임을 느낀다. 누군가가 당신을 향하면서 실수로 다른 이름으로 당신을 불렀다면, ‘나한테 하는 말이 아니겠지’ 하는 느낌이 있을 것이다.
누군가가 우리를 향하면서 우리 이름을 부를 때, 우리의 의식에서는 자아감이 떠오르고, 그래서 우린 자신을 종종 이 단어와 혼동한다.
자신을 다른 무엇과 혼동하는 것을 동일시(identification)라 부른다.
바로 그런 식으로, 우리는 자기 이름과 동일시된 것이다.
2
본연의 자신을 잃는 다음 방법은 살면서 자신을 어떤 역할과 동일시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이를 낳고 키우는 여성은 자신을 엄마라고 부른다. “난 엄마야” 하고 말한다. 그러면서 자기가 수행하는 엄마 역할을 자신과 동일시한다.
출산 전까지는 엄마가 아니었는데도 말이다.
그녀의 자아감이 출산을 전후하여 달라진 게 하나 없는데도 말이다.
다시 말하건대, 자아감은 우리가 ‘나’라는 단어를 말할 때 드는 느낌이다. 이 느낌은 그 사람이 부모의 역할을 하든 하지 않든 상관없다. 그저 출산 후 엄마라는 새 역할이 생겼을 뿐인데, 그녀가 자신을 그 역할과 동일시한 것이다.
전형적인 (사회적) 역할로는 우리네 각자의 직업을 꼽을 수 있다.
만약 의사로 오랫동안 일해 온 사람에게 “당신은 누구냐”고 물으면 그는 “난 의사요” 하고 대답할 수 있다. 여기서도 엄마의 역할 경우와 같은 도식이 작용한다. 즉, 그는 그저 의사 역할을 해왔을 뿐이며, 어린 시절엔 의사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잊은 것이다.
그러나 지금이나 유년기에나 그의 자아감은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이 직업에 크게 회의를 느끼거나 다른 일을 하고 싶어지거나 ‘나에겐 의사 노릇이 어울리지 않나 봐’ 하는 생각에 사로잡힐 때, 자기 직업과의 동일시가 잘못된 것임을 강하게 느끼기 시작한다.
“나는 패배자야” 혹은 “나는 쿨해” 같은 형태의 동일시도 있다.
자신이 패배자라는 느낌은 사람이 해 온 역할의 하나이다. 사람이 아주 오랫동안 어떤 역할을 할 때, 그 역할과 합쳐지는 듯한 느낌에 사로잡히면서 그것이 그의 거짓된 자아감일 뿐임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난 패배자야” 혹은 “난 쿨해”, 둘 다 역할이다. 이건 다 실제 자아감에 해당하지 않는다.
역할의 예를 더 들어보자.
“나는 사업가야”, “난 2급 정비사야”, “난 사장이야”, “난 아들이야”, “난 노숙자야”, “난 제주도민이야” 등이 다 역할의 일종이다.
한데, 이런 생각이나 진술 역시 본연의 자신을 어떤 역할과 잘못 동일시하는 것이다.
그런 동일시에서 사람을 끌어내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예를 들어, ‘쿨한’ 사람에게
“넌 전혀 쿨하지 않으며, 그렇게 말하는 건 네 약점을 숨기기 위한 마스크일 뿐이야”
하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전혀 동의하지 않고 그 이미지를 끝까지 지키려 들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동일시에서 얻는 게 많기 때문이다. 그가 쿨하다면, 다른 이들이 그를 멋지게 보고 존중한다. 근데, 그렇지 않다고 하면, 그럼 그는 누구인가? 시시껄렁한 사람이야? 그런 사람을 누가 존중하겠어?
3
다음에, 사람들은 의식의 어떤 발현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나는 내가 생각하는 것이야”, “나는 내가 느끼는 것이야” 등이 그렇다.
실제로, 누군가에게 무엇을 말할 때 우리는 그게 마치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처럼 말한다. 이건 바로 내가 말하는 것이요, 이 생각은 내 생각인 것 같다. 머릿속 목소리와 강한 동일시가 일어난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종종 알아차리지 못한다.
이걸 우리 자신의 생각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누군가에게 무엇을 어떻게 말하는지를 살펴보기만 하면…
즉, 대화하면서 자각 상태를 켜거나 감득력을 가동하기만 하면…
당신이 말하는 생각과 단어들이 있고 또 그걸 다 알아차리는 당신이 있음을 당신은 금방 알게 될 것이다.
간단한 실험 하나.
“난 초밥을 좋아해” 하고 속으로 말하거나 중얼거려 보라.
어떤가, 당신한테 생각이 나타나서 그것을 말로 표현한 것일 뿐이다. 이때 생각이 있고, 또 그 생각을 보고 듣는 당신이 있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초밥을 정말 좋아하며 친구나 자기 자신에게 그렇게 말한다면, 이걸 바로 당신이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에 유의하라.
무슨 차이가 있냐고?
전자의 경우 당신은 자기 생각과 동일시되지 않았고, 후자에서는 동일시됐다.
감정의 경우도 거의 비슷하다.
우리가 화난 상태에 있을 때, 이건 우리가 화난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분노의 감정과 합쳐져서 자기 자신을 분노처럼 드러낸다.
그러나 화를 내는 동안 자각 상태를 켜거나 감득력을 가동하기만 하면, 당신이 곧 분노는 (분노 자체는) 아니라는 사실을 금방 알아차릴 것이다. 그것을 (분노를) 당신은 당신의 여러 발현 가운데 하나로서 관찰하기만 할 뿐이다.
실제로, 자각 상태를 가동할 때, 당신의 동일시가 그 자각 상태로 옮겨가고, 그래서 생각이나 감정과의 동일시에서 멀어진다.
‘자각 상태를 켠다/가동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자각이란
당신이 ‘지금 여기’ 있으면서 지금 당신과 당신 주변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명확히 아는 것이다. 자신의 생각과 감정, 상태, 감각 등을 아는 것이다.
우리는 종종 자각 상태에서 벗어나 있다.
그냥 망각 (혹은, 무자각) 상태에 있는 듯한 경우가 많다. 감정에 압도될 때 이런 일이 특히 자주 일어난다.
예를 들어, 아이가 귀한 그릇을 떨어뜨려 깨졌을 때, 당신은 순간적으로 화가 나서 아이한테 소리치기 시작한다. 그러나 당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 퍼뜩 깨닫고 정신이 들어서, 당신이 지금 화를 내고 아이한테 소리치고 있으며 아이가 겁먹은 눈으로 당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문득 깨닫는다.
이것이 당신을 금방 식게 한다.
당신 자신의 분노와 (동일시가 아니라!) 분리된 것이다.
4
그다음에 자주 나타나는 동일시하기는 자신을 어떤 추상적 이미지와 동일시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난 영혼이야”, “난 우주정신이야”, “난 사람이야”, “난 호모사피엔스야” 등이 그것이다.
영혼을 보거나 느낀 사람이 있나?
영혼은 무엇인가?
다들 나름대로 해석한다. 어떻든 영혼은 추상적인 이미지다. 혹자가 “나는 영혼이야” 하고 말할 때, 그건 필경 누군가가 그에게 그런 말을 하고 그가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것임이 분명하다.
사실, ‘영혼 soul’이란 개념은 그리스도교에서 우리한테 들어왔다고 할 수 있다. 기독교에서는 사람을 육신과 영혼으로 나누어 이 개념에 어떤 의미를 부여했다. 지구상에 기독교가 없었다면, 영혼이란 개념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영혼이 아니라는 것이 확실해진다. 결국, 영혼이 무엇인지 알든 모르든 당신의 자아감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알고 보니, 혹자가 자기는 영혼이라고 말할 때, 그는 자신을 자기가 이 용어에 집어넣은 어떤 추상적 이미지와 동일시하는 것이다.
우주정신이나 호모사피엔스하고 동일시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나는 사람이야” 하고 말할 때의 동일시를 규명하기가 좀 어렵다.
우리가 사람인 건 당연해 보여. 왜냐면 당신과 나를 포함해 우리는 다 사람이니까.
하지만 이것을 좀 더 주의 깊게 살펴보자.
‘사람’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사회가 우리한테 가르친 추상적 이미지가 아닐까?
그러면, 사회는 ‘사람’이란 단어로 무엇을 의미하나?
대략 다음과 같이 보이고 옷을 입고 어떤 언어로 서로 얘기하는 생물을 사람이라 부른다.
유년기부터 우리는 “그는 사람이야” 하는 말을 들었다. 똑똑한 어른들 말을 어찌 믿지 않을 수 있나. 생각도 않고 믿어 버렸다. 게다가 알고 보니, 우리 몸이 사람의 몸과 비슷하고 우리가 말을 하더라. 그래서 나는 사람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 여러 징조를 지니고 있으니까 말이다.
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이제 자신의 자아감으로 되돌아가자.
이 느낌에 인간과 관련된 뭔가가 과연 있나?
이 자아감은 ‘사람’이라는 추상적 이미지가 아니야. 이건 구체적이고 생생한 느낌이다. 내 몸은 인간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나는 사람이라고 말하긴 어렵다. 왜냐하면, 나의 자아감으로서의 ‘나’가 있고, 내가 보고 느끼는 내 몸이 있으니까.
‘사람’이 추상적이며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임을 이렇게 확인할 수 있다. 언젠가 옛날 옛적에 ‘사람’이란 단어를 궁리해 내고, 앞의 그림처럼 보이는 남자와 여자를 전부 이 단어로 불렀다.
한데 이 단어를 통용시키지 않을 수도 있지 않았던가. ‘여자’라 불리는 별개의 종이 있고, ‘남자’라 불리는 별개의 종이 있다고 말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이 둘은 겉모습은 비슷하지만 서로 완전히 다른 종이라고 말할 수 있다.
덧붙이자면, 이것이 진실에 더 가까웠을 것이다. 왜냐면 여성과 남성의 유기체와 심리 구조는 상당히 다르니까.
하지만 우리 조상들은 남자와 여자를 하나로 묶어서 ‘사람’이라 불렀다.
그렇게 하지 않을 수도 있었을 테고, 그랬다면 ‘사람’이란 말은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나의 종으로서 남자가 있고 또 별개로 여자가 있었을 것이다.
그때는 “나는 사람이야” 대신에 “나는 남자야, 여자야” 하고 말할 수 있었겠지.
이건 다 ‘사람’이란 개념이 인위적인 것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추상적 이미지이며, 우리는 어떻게든 그것일 수가 없다. 하지만 앞으로 우리는 우리 각자를 가리키는 데 ‘사람’이란 단어를 쓸 것이다. 편의상 그렇다. 우리 언어에서 이 단어가 확고하게 뿌리 내렸으니까.
그건 우리를 무자각 상태로 몰아가며, 심지어 우리한테 어떤 고통이 있다는 사실도 부정하게 만들려 할 겁니다.
어떤 고통이 우리한테 실제로 있을 뿐 아니라 우리가 그걸 몇 해 동안 끌어안고 있음을 인식하게 되면, 진짜 충격일 수도 있어요. 그런 자각 자체가 종종 고통스러운 것이기도 해요.
그래도 이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왜냐하면, 고통의 몸체가 아무리 불쾌하다 해도 그게 내 안에 있음을 인식하고 받아들여야 치유도 가능하니까요.
이 단계에서 중요한 것은…
‘아, 내가 예전에는 이 고통의 몸체가 지시하는 대로 살고 행동했구나’
하면서 자책에 빠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 당시 우리는 자각하지 못한 상태였기에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도’ 정말 몰랐으니까요.
<고통의 몸체>에 지배돼 저지른 행동을 우리가 책임질 수는 없어요.
예전에 행한 것은 전부 그것의 행위요 결정이요 반응이었습니다.
그것의 횡포에 저항할 힘이 우리한테 부족했을 뿐이에요.
그러므로 자신을 꾸짖어선 안 됩니다.
자책과 자기비판에 빠지지 말아요.
죄책감을 안고 살면 안 돼요.
예전엔 우리가 본연의 삶 속에 사실상 없었기 때문에 고통의 몸체가 우리를 지배한 것이라는 점만 깨달으면 됩니다. 즉, 우리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요. 우리를 대신하여 고통의 몸체가 선택한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자책할 이유가 전혀 없어요. 그 상황에서 우린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거예요.
그러나 이젠 모든 게 달라졌습니다.
우리는 진정 존재하는 사람이 됐어요.
자기 자신 안에 있고 현재 순간에 존재해요.
이제 우리는 일어나는 것을 전부 과거와 미래에 연연하지 않고 생각과 감정의 혼란 속에서 헤매지 않으며 지금 이 순간의 체험에 초점 맞추어 의식하는 자각 상태에 있어요. 곧, 이젠 우리의 <참된 나>가 우리 삶에서 결정하고 행동하고 선택할 수 있다는 뜻이에요.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점은… 그렇게 하기 위한 힘이 이젠 우리한테 있다는 것이다.
예전엔 우리가 삶에 존재하지 않고 힘이 없음을 이용하여 고통의 몸체가 선택하고 결정했다면,
이젠 우리가 존재하고 우리한테 힘이 있습니다.
이 힘을 주는 것이 바로 현재 순간이에요.
현재 순간에 있을 때, <존재> 자체와 그 힘에 접근할 수 있게 되니까요.
그리고 이 힘으로써 고통의 몸체를 이겨내고 과거의 고통들에 사로잡힌 현실이 아니라 자신에게 새로운 현실을 만들 수 있어요.
당신 삶에 있던 극적인 사건이며 불쾌한 일이며 문제는 전부 고통의 몸체가 만들어 낸 것이다. 그건 당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당신을 비슷한 불행으로 잇달아 끌어들일 수 있다.
전형적인 사례를 하나 들어볼까요.
아버지가 엄마에게 못되게 굴고 술독에 빠져 살면서 딸을 갖가지로 학대하며 폭력까지 휘두른 가정에서 한 소녀가 살았다면…
성인이 됐을 때 이 여성의 아픔덩어리는 아버지와 비슷한 파트너를 선택할 개연성이 아주 높아요.
만약 그녀가 이 아픔덩어리의 에너지를 자각의 빛으로 바꾸면서 그것과 분리되지 않는다면, 유년기에 시작된 일련의 고통이 이후에도 계속될 겁니다.
예전에는 우리가 낯선 (괴물 같은) 에너지에 예속되고 지배받았기 때문에 본연의 자기 자신이 되지 못했다는 점을 깨닫는 것이 아주 중요해요. 이제 우리는 그런 것이 반복되지 않게 할 힘을 갖추었어요.
고통의 몸체가 언제 또 부정적인 감정을 들쑤셔서 우리를 바람직하지 않은 상황으로 끌어들이는지 알아차리는 방법을 익혀야 합니다. 그런 일이 생기겠다 싶으면 즉각 행동과 생각을 멈추고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세요.
“됐어, 그만. 여기에 끌려드는 건 내 의지가 아니야. 난 다른 건 선택할래.”
그렇게 자각된 자세를 통해 우리는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아주 빨리 바꿀 수 있습니다.
실습 34
살면서 어떤 불쾌한 일이 생겼거나 뭔가 실패한 상황을 몇 가지 떠올리세요.
그런 상황을 우선 서너 가지라도 들어 보세요. 종이에 간단히 적어도 좋아요.
그리고 그 각각의 상황에 앞서서 자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떠올리세요.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상황이 발생하기 전 자신의 상태를 기억하는 거예요.
기분이 어땠는지, 어떤 생각과 감정에 휩싸여 있었는지 등을.
‘아, 그래. 안 좋은 상황에 빠지기 전에 나에겐 부정적인 감정들이 상당히 컸구나’
알게 됐을 거예요. 이를테면, 두려움이나 초조, 긴장, 짜증, 적대감, 뭔가에 대한 저항 같은 것이었어요.
그 결과, 부정적인 감정에 휩쓸려 원치 않는 사건들에 뜻하지 않게 빠져들었어요.
바로 이 파도에 떠밀려 불상사나 실패나 문제에 부닥치게 된 것이었지요.
일련의 불상사가 생기기 전에 어떤 상태에 있었는지 다시 한 번 잘 떠올려 보세요.
그리고 이런 질문을 자신에게 던지고 대답해 보세요.
- 그때 나는 무엇을 하거나 하려 하는지 정말 잘 알고 있었나?
- 그때 난 자제할 수 있었나?
- 어떤 걷잡을 수 없는 힘이 나를 마구 내몬다는 느낌은 없었나?
- ’나한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어‘ 하고 나중에 자신에게 말하진 않았나?
만약, 어떤 부정적인 감정이나 생각에 휩쓸려서 바람직하지 못한 뭔가에 끌렸다면…
그건 고통의 몸체에 조종당했다는 표시입니다.
그것 때문에 자각을 잃고, 결국 자신에게 해가 될 행동을 한 것이에요.
어쩌면, 당시에는 우리한테 선택의 여지가 없어서 달리 행동할 수 없었던 것처럼 보일지도 몰라요. 사실, 선태의 여지가 없었던 건 맞아요. 왜냐면 그 상황에서는 우리의 <참된 나>가 없었으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고통의 몸체가 대신 선택한 거예요.
그런데 고통은 새로운 고통을 낳기만 할 뿐이지, 다른 것은 전혀 낳을 수 없어요.
그 상황을 다 이제 <참된 나>와 <내면의 증인> 입장에서 차례로 다시 살펴보세요.
그 상황에서 빠져나오세요.
판단과 감정의 프리즘을 거치지 말고 선입견 없는 관찰자의 시각으로 보세요.
그 각각의 상황에서 원치 않은 결과를 초래하지 않았을 행동 버전을 몇 가지 찾으세요.
자신의 <참된 나>가 이끌었다면 어떻게 행동했을까요?
실제로 더 좋게 선택할 길이 몇 가지 있었음을 알게 됐을 거예요.
단지 <거짓된 나>의 눈으로 보는 동안엔 그 길들이 보이지 않았을 뿐, <참된 나>의 눈으로 보면 반드시 보게 될 겁니다.
만약 지금 삶에서 긍정적인 선택을 못 보는 상황이 있다면, 그것도 <내면의 증인> 관점에서 살펴보세요.
(과거와 미래에 연연하지 않고 생각과 감정의 혼란 속에서 헤매지 않으며 지금 이 순간의 체험에 초점을 맞추는 의식 상태인) 자각으로 보통 때보다 훨씬 더 깊게 들어설 거예요.
이때의 느낌을 에크하르트 톨레는 현존이라 부릅니다.
우리는 <존재> 안에 깊이 들어가 있어요.
현재 순간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삶의 여정에 완전하고 충실하게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잔잔하면서도 정말 기뻐하는 상태가 꼭 따라붙습니다. 진짜 살아 있다고 느끼는 바람에, 다른 생각이며 감정이며 체험 등이 죄다 썩 대수롭지 않아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도 이 상태란… 현실 도피가 아니라, 거꾸로 현실을 더 깊고 객관적으로 자각하여 납득하는 것입니다. 에고의 상태가 아니라, 에고가 없는 상태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지상의 물질세계에서 살고 행동하는 법을 서서히 익히면서도 평온하고 조화로운 <존재> 상태에 머물게 됩니다. 이 때문에 우리네 활동이 주눅 드는 건 결코 아니며, 되레 이전보다 힘을 훨씬 덜 들이고도 훨씬 더 큰 효과를 얻게 될 거예요.
비결은 단순합니다. <지금>이라는 순간의 힘이 돕는 것이죠.
마인드와 분리되어 잡념의 흐름을 멈춰 세우고 <지금> 순간과 하나가 된 덕분에 자기 안에서 <존재>를 찾은 사람에게는 우주의 힘이 작용하기 시작합니다.
바로 이 때문에, 생각의 흐름을 멈추어서 우리가 더 우매해지는 것이 아니라… 훨씬 더 총기를 띠고 나아가 현명해지기까지 합니다. 무의미한 생각의 흐름 대신 알짜 지식을 갖추게 되니까 말이지요.
잡다한 생각들의 끊임없는 흐름은 무익한 마인드 상태요, 내면의 고요는 마인드가 유일하게 거두는 결실이라 할 수 있다.
<존재>란… 마르지 않는 힘의 원천입니다. 마인드와 이것이 낳은 생각의 줄기가 우리와 <존재> 사이에 장벽을 만드는데 이것이 사라지기만 한다면, 우리는 <존재>에 담겨 있는 힘을 전부 마음껏 쓸 수 있습니다.
자신이나 자기 생각에 심각하게 대하는 태도가 때로는 마인드에서 벗어나는 데 방해가 됩니다. 그런 태도를 갖게 하는 것은 바로 <에고>요 <거짓된 나>입니다. 바로 이 에고가 자기 자신이며 (생각을 포함하여) 자기가 생산하는 것을 죄다 아주 심각하게 여기는 거예요.
반면에 <참된 나>의 관점에서는 우리의 생각이 중요해 보일 때가 더러 있긴 해도 보기만큼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잠깐이라도 마인드의 속박에서 벗어난다면, 우리는 세상의 본질과 진정 융합됨을 느낄 수 있으며, 이때 생각이며 문제며 걱정 따위가 다 의미를 잃고 중요하지 않게 돼요. 그리고 이 덕분에 삶이 훨씬 더 만족스러워집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여러 문제를 대체로 지나치게 크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에 더 심각하게 대할수록 해결은 더 어려워지기 마련이에요. 그렇다고 경솔하게 대하라는 소리는 아닙니다. 단지, 조화를 이루고 균형을 맞추라는… 평범한 일들과 일상의 걱정근심을 본래 자리에 두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 것들은 삶의 본질이 결코 아니에요. 인생의 으뜸 요소가 아니에요.
가장 급한 것은… <존재>와 하나 되는 것, 또 이 합일을 얻어 <존재>로 돌아가기 위해 우리가 하는 것입니다. 잡다한 생각에 빠져서는 이 점을 이해하기 힘들어요.
잡다한 생각에 사로잡힐 때 우리는 중요한 것을 부차적인 것으로, 대수롭지 않은 것을 대단한 것인 양 착각하기 쉬워요. 하지만 생각의 흐름을 멈추면, 모든 것이 제 자리로 돌아가게 됩니다.
우리네 마인드 대부분을 차지하는 잡생각의 내용이 공허한 수다에 불과하여 아무 데도 쓸모없으며 전혀 도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린 이미 확인했습니다. 이런 점을 확실히 깨달았다면, 자기 생각을 그저 귀하게만 여겨 마냥 매달리는 일은 더 이상 없겠지요.
실습 11
나중에 마인드에서 또 생각이 줄줄 이어지는 것을 알게 되면, 이렇게 중얼거리십시오.
“이 생각들에는 별 의미가 없어. 중요하지 않아. 진지하거나 심각한 게 아니야.”
그러고 나서 그 생각들을 떨쳐버리세요.
마인드가 무의미한 수다를 떨고 있음을 발견할 때마다, 이 생각들은 중요한 게 아니라고 반복하여 자신에게 말하세요.
생각의 흐름을 멈추고 나면... 내면이 고요하고 평온해지면서 매혹적이고 조화로운 순간을 접하게 돼요. 거기엔 오직 기쁨만 있을 뿐이요, 아픔이나 고통 따위는 전혀 없음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이건 우리가 진짜 자신과 진짜 삶에 파고들었다는 뜻입니다.
이젠, 그런 상태를 간간이 누리기만 할 게 아니라, 그 상태에서 사는 방법을 익히는 것이 우리가 할 일입니다.
내가 평범한 무자각이라 부르는 것은… 자기의 생각 과정이나 감정, 반응, 욕망, 혐오 등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상태를 뜻한다. 대다수 사람들의 보통 상태가 그렇다. 이 상태에서는 에고 마인드가 지배하기 때문에 <존재>를 의식하지 못한다. 이건 예리한 아픔이나 불행의 상태가 아니라, 크진 않지만 거의 계속되는 불안이나 불만, 따분함, 초조함, 신경질의 상태… 일종의 정적(靜的)인 배경이다.
이 정적인 배경이 이른바 ‘정상적인’ 생활의 일부로 하도 깊숙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수도 있다. 에어컨 윙윙거리는 소리처럼 낮고 지속적인 배경 소음을 그게 멈추기 전까지는 잘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 배경 소음이 갑자기 멈추면 안도감이 생긴다.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편해진다.
많은 이들이 무의식적으로 기본적인 불안을 없애려 하면서 술이나 마약, 섹스, 음식, 일, 티브이, 심지어 쇼핑 같은 마취제를 이용한다.
그럴 때, 적절히 이용하면 아주 즐거울 수도 있는 활동이 강박성과 중독성을 띠게 되고, 그렇게 하여 얻은 것은 전부 증상을 극히 짧은 순간 완화할 뿐이다.
평범한 무자각 상태에서 은연중에 느끼는 불안이…
일이 잘 안 풀리거나, 혹은 에고가 위협받거나, 혹은 삶의 상황에서 실제이든 상상이든 중대한 도전이나 위협, 상실이 있거나, 혹은 인간관계에 갈등이 있을 때…
깊은 무자각의 아픔으로 바뀐다.
즉, 더 뼈저리고 더 확실한 고통이나 불행으로 바뀐다.
이건 평범한 무자각이 더 깊게 강화된 형태로서, 종류가 아니라 깊이와 강도에 차이가 있다.
평범한 무자각 상태에서는 지금 있는 것에 대한 습관적인 저항이나 부정이 불안과 불만을 일으키는데… 이를 대다수 사람들은 정상적인 삶이라 여긴다. <에고>에 대한 도전이나 위협을 통해 이 저항이 격해질 때, 분노나 심한 두려움, 공격, 우울증 같은 극도의 부정성이 나타난다.
깊은 무자각 상태는…
고통의 몸체가 촉발되고 그것을 우리가 자신과 동일시하게 됐다는 뜻인 경우가 많다. 물리적 폭력은 거의 늘 깊은 무자각에서 나온다.깊은 무자각 상태는 군중이나 심지어 한 국가가 부정적인 집단 에너지장을 생성할 때마다 어디서나 쉽게 발생한다.
깨어 있는 의식 수준의 가장 좋은 지표는 삶의 도전이 닥칠 때 대처하는 자세나 방식이다.
이런 도전을 통해서…
아직 깨지 못한 사람은 무자각 상태에 더 깊이 빠지고 의식을 갖춘 사람은 한층 더 깨어나는 경향이 있다.
삶의 도전을 우리는 자신의 일깨움에 이용할 수도 있고, 아니면 그로 인해 더 깊은 동면에 빠질 수도 있다. 그러면 평범한 무자각 수준의 꿈이 진짜 악몽으로 바뀐다.
만약 방안에 혼자 앉아 있거나 숲을 거닐거나 혹은 누군가의 얘기를 듣는 것처럼 정상적인 환경에서도 실재할 수 없다면, 뭔가가 잘못 되거나 혹은 힘겨운 상황이나 힘든 사람, 상실 위협이나 상실감에 직면할 때는… 깨어 있는 의식 상태를 결코 유지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 자기도 모르게 툭툭 반응하게 되며 (이것도 결국 두려움의 한 형태이다) 깊은 무자각 상태로 빠져들 것이다. 그런 도전은 다 우리한테 시험이다.
눈을 감고 얼마나 오래 앉아 있을 수 있는지 혹은 무슨 기이한 장면을 보는지가 아니라. 이런 도전에 대응하는 방식만이… 우리가 어떤 의식 상태에 있는지를 자신과 다른 이들에게 보여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이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는 일상에서 자신의 삶을 더 많이 의식하고 자각하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 그러면서 우리는 현존하는 힘에서 성장한다.이 힘이 우리 내면과 주변에 고주파 에너지장을 생성한다. 이 에너지장에서는 무자각도 부정성도 불화도 폭력도 침투하여 살아남을 수 없다. 어둠이 빛 앞에서 살아남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자신의 생각이며 감정의 관찰자가 되는 법을 연습할 때, 이 자체가 현존의 핵심 부분인데, 평범한 무자각 상태의 정적인 배경을 처음 알아차리고 지금까지 내적 평온과 얼마나 거리가 멀었는지 실감하면서 새삼 놀랄지도 모른다.
생각 수준에서는… 판단이나 불만, 또 <지금>에서 멀리 떨어진 정신적 투영의 형태로 많은 저항을 발견할 것이다. 감정 수준에서는… 불안이나 긴장, 권태, 초조함 등의 암류(暗流)가 있을 것이다. 둘 다 상습적으로 저항을 일삼는 마인드의 측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