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src="https://cdn.subscribers.com/assets/subscribers.js"> 9단계. 마음 편히 행복하게 사는 길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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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단계

  마음 편히 행복하게 사는 길  

 

  형태의 수준에서는, 형태들의 탄생과 소멸, 창조와 파괴, 성장과 하락이 있다. 
이건 어디에나 다 반영되니… 
별이나 행성, 천체, 나무와 꽃 등의 생명 주기에, 
국가와 정치체제, 문명 등의 흥망성쇠에, 
개개인 삶에서 획득과 상실이라는 필연적 순환에 다 반영된다. 

부처는 우리의 행복조차도 고뇌나 고통인 dukkha라고 설파했다. 
행복에는 그 반대되는 것이 필히 따른다. 
우리네 행복과 불행이 사실상 하나라는 의미이다

 

<에고>가 세우는 거짓 목표들을 거부하라

 

“나한텐 목표를 달성하려는 끈기와 의지가 부족해.” 

“앞으로 나아갈 동기가 충분치 않아.”

“난 좀 게으른데다가 과단성도 부족한가 봐.” 

 

그렇게 투덜거리면서 자책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질문을 자신에게 던져 보십시오. 

 

‘내 안에 있는 누가 이렇게 거세게 움직이기를 바라는 거야?’

‘누가 목표를 세우고 달성하기 원하는 거지?’

‘누가 나를 영원히 멈추지 않는 질주로 내모는 것이야?’

 

그렇게 자문해 보면… 대부분 경우 이런 대답이 나올 거예요. 

“이건 <참된 나>가 아니라 <에고>가 그렇게 하는 거야!” 

 

(자기도취, 이기심, 우월감, 지배욕 따위에 사로잡힌) 에고는 늘 안절부절못합니다

이건 놀랍지도 않은 것이… 에고는 현재 순간에 머문다는 게 무엇인지 모르고, 그 결과, 차분하고 만족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니까요. 에고는 늘 볼이 부어 있고, 그래서 늘 자신에게 없는 뭔가를 얻고 싶어 합니다.  

 

에고는 늘 우리한테 속삭이고 다그쳐요. 

“해야 돼, 해야 돼! 이걸 해, 저것도 해! 여기로 와, 저기로 가, 어떻게 좀 해 봐! 빨리, 더 빨리!!” 

우리를 게으름뱅이라 부르고 행동하지 않는다고 탓하며 욕하는 것은… 바로 <에고>입니다.  

 

 

그러면 에고는 도대체 왜 그러는 걸까요? 

고요하고 평안한 상태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평온한 상태에서는 자신이 노출될 수 있으니까 그렇습니다. 

우리가 멈추어서 차분하게 마음 가라앉히다가 무심코 자기(에고)를 보게 될까 두려워서… 에고는 어떤 목표들을 향해 돌진하라고 재촉하면서 우리를 끝없이 불안하고 공연히 분주한 상태에 잡아둡니다.

 

이런 입장이 혹자에겐 너무 앞서 나간 것처럼 보일 수 있어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할지도 모르죠. 

“아니, 그렇다면… 우리의 갈망이나 목표가 다 <거짓된 나>와 에고가 강요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아무 것도 원하지 말고 그 무엇으로도 돌진하지 말아야 한다는 거야? 한마디로… 아예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거야? 그런데, 그렇게 하면 거기서 삶이 멈추지 않을까? 우리 인류가 몽유병자 집단 같은 것이 되어서 활동할 생각은 없이 꼼짝도 않고 명상만 하는 건 아닐까?”

 

걱정 말아요,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거예요!

왜냐하면, 지구상의 삶이 ‘아무 것도 하지 않고는 살 수 없게끔’ 설계돼 있으니까요. 살려면 활동도 하고 세속적인 재화에 관심도 가져야지요. 물질이란 다 썩기 마련인 만큼, 우리가 보살피지 않으면 아주 빨리 쓸모없게 되잖아요? 게다가 세상살이 여건이 녹녹치 않아서, 우리에겐 먹을거리가 필요하고 악천후도 막아야 해요. 또한 우리는 최대한 편안하고 쾌적하게 살기를 원해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 몸은 물론이고 생활 여건을 위해서는, 또한 영적 성장을 위해서도, 관심 기울이고 활동하고 움직일 수밖에 없어요. 지상에서 그냥 벌어지는 일이란 하나도 없습니다. 지식 얻고 필요한 책을 찾기 위해서도 일어나서 밖으로 나가고 서점에 가야 하거나, 아니면, 최소한 컴퓨터를 켜야 하잖아요? 

 

이런 이유에서 사람이 (인류가) 완전히 행동하지 않는 상태에는 이를 수 없을 거예요. 게다가 행동하려는 충동이 에고나 <거짓된 나>가 아니라 <참된 나>와 <존재>에서 나올 수 있고 나와야 한다는 점에서도 그렇습니다.  

 

<존재>가 우리를 인도할 때… 그때 우리 행동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그때는 필요한 것을 필요할 때 필요한 대로 정확히 해내면서도 힘은 훨씬 덜 소모합니다. 

 

<존재>는 우리로 하여금 쓸데없이 허겁지겁 움직이게 하지 않아요. 

<존재>는 우리를 무의미한 목표와 행동으로 내몰지 않아요. 

이런 짓은 에고만이 할 수 있어요. 

 

그런데 가만 보면, 자신의 <거짓된 나>에 의해 움직이는 까닭에 헛되이 부산떨고 무의미하게 행동하면서 삶을 허비하는 사람들이 오늘날 얼마나 많은가요!  

 

만약 <참된 나>가 항상 우리 행동을 주도한다면… 실패나 패배나 좌절 같은 것은 모를 겁니다. 정말 필요한 것을 늘 얻으면서, 언제나 행복하고 평온하고 만족하는 가운데 자신이며 세상과 조화롭게 살 겁니다. 

 

‘하아, 거 참 동화 같은 얘기지’ 하는 생각이 든다면, 그 이유는 단 하나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힘겨운 생활이며 파란만장한 삶에 지나치게 익숙해지고 거기에 붙들려 있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지상에서 행복하고 평온한 삶을 실제로 누릴 수 있어요. 

그리고 그건 바로 당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실습 42  

 

‘이것만 달성하면 난 행복해질 거야’ 기대하면서 그 동안 세웠던 목표들을 떠올려 보십시오. 

 

- 그 기대가 적중했나요? 아니면, 웬만큼 채워졌나요? 

- 결국에 정말로 행복하게 느꼈다면… 그것은 씁쓸함이나 실망 같은 것이 전혀 섞이지 않고 진정 순수한 행복이었나요? 그 행복이 오래 가던가요? 

- 예전 언젠가 이러이런 목표들을 달성한 것 때문에 지금도 여전히 행복하다고 느끼나요? 

- 그 목표들을 달성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들였는데, 그에 비해 얻은 것이 훨씬 적은 것 같지는 않았나요? 

 

 

자신의 사례에서 분석하기 어렵다면… 다른 이들의 경험을 참조해 보세요. 

 

어렵게 이룬 행복조차 영원하거나 불변일 수 없다는 점에 주목하십시오. 

행복을 열심히 좇아가 잡았는데 기대한 결과를 전혀 얻지 못하는 경우가 아주 많다는 점에도 주목하세요. 

 

이번에는 그동안 살면서 있었던 이런 순간들을 떠올려 보세요. 

즉, 그 무엇도 딱히 열망하지 않고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으면서, 그저 지금 있고 존재하면서 행복 추구가 아니라 실존을 즐겼던 순간들을 기억해 보세요. 

 

이를테면, 휴가 중에 누린 짧은 순간순간이 그런 것 아닐까요? 

어쩌면 그건 원하던 목표를 이루면서 맛본 것보다는 더 차분하고 조용한 행복의 상태였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바로 그런 것이 더 참된 진짜 행복이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나요? 

 

‘지금 여기 있음’에서 나오는 진정한 기쁨과 행복은 언제 어느 순간에도 우리가 누릴 수 있으며, 이를 위해 어떤 목표를 세우고 달성하려는 욕망이 전혀 필요치 않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둬야겠습니다.

(알림)  Voice Training에 관심 있는 분들은 여기를 참조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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