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터가 문을 닫고 시원한 밤거리로 나섰다. 연민과 회한을 안고 희생자의 모습을 피해 범죄 현장에서 달아나는 범죄자도 이보다 더 큰 안도감을 느끼지 못했으리라. 거리에서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홀가분했다. 기억과 예상에서 벗어나 홀가분했다. 두어 시간 동안은 과거나 미래를 생각하지 않아도 돼. 오로지 지금 여기서, 매 순간 그의 육신이 처한 곳에서만 홀가분하게 살 수 있게 됐다. 자유야!
그러나 그건 공허한 입찬소리였으니,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달아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녀 목소리가 쫓아왔다. “당신은 가야 해요.” 그의 범죄는 살인일 뿐 아니라 협잡이기도 했다. “가세요.” 그는 얼마나 점잖게 거부했던가! 끝에 가서 얼마나 너그럽게 동의했던가! 그건 가장 잔혹한 가장질이었다.
“오, 신이여!” 거의 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 어찌 이럴 수가?” 자신이 혐오스럽고, 그런 자신에게 깜짝 놀랐다. “하지만 그녀가 나를 평온하게 놔두기만 한다면!” 그가 계속 중얼거렸다. “그녀는 왜 합리적이지 못할까?” 무기력하고 헛된 분한이 내면에서 다시 솟구쳤다.
그의 갈망이 전혀 다른 것이던 때를 생각했다. 그녀가 그를 가만히 놔두지 않기를 간절히 원하던 때가 있었다. 지금 그녀가 그에게만 매달리는 것도 다 그가 조장한 일이었다.
둘이 살던 오두막을 떠올렸다. 그때 그들은 민둥민둥한 구릉들 사이에서 둘만이 호젓하게 몇 달을 보냈다. 버크셔 쪽 전망은 얼마나 아름다웠던가! 그러나 가장 가까운 마을은 1마일 반이나 떨어져 있었다. 오오, 식량 가득한 배낭의 그 무게라니! 비가 내리면 진창은 또 어떻고! 물도 깊이가 좋이 백 피트 넘는 우물에서 두레박으로 퍼 올려야 했다.
그러나 두레박질같이 지겨운 일을 하지 않을 때도, 그건 정말 아주 만족스러웠을까? 마저리와 함께 정말 행복했던 적이 있었나? 어쨌든 그가 상상한 것만큼, 그런 상황에서 누려야 했던 만큼, 그렇게 행복했던가? 그것은 <에핍시치디언>(1)과 같은 것이어야 했다. 하지만 그렇지 못했어. 왜냐면 그가 너무 의식적으로 그걸 원했기 때문일 거야. 왜냐면 자신의 감정이며 둘의 생활을 셸리의 시가에 맞추려고 일부러 애썼기 때문일 거야.
“예술을 너무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선 안 되네.” 언젠가 저녁에 시를 두고 담화 나눌 때 매형인 필립 퀄즈가 한 말이 떠올랐다. “사랑에 관한 것일 때 특히 그렇지.”
“예술이 진실하다 해도 그래요?” 월터가 물었었다.
“예술은 너무 진실해 보여서 곤란해. 증류수처럼 순수해 보이는 경향이 있단 말일세. 진실이 단지 진실에 불과할 때, 그건 부자연스러워, 그건 실세계의 그 무엇과도 닮지 않은 비실제적 관념이야. 자연에서는 다른 많은 무관한 것들이 늘 가장 중요한 진리와 뒤섞여 있게 마련이네. 그게 바로 예술이 우리한테 작용하는 이유일세. 엄밀히 말하자면, 예술이 실생활의 관련 없는 것을 다 다루면서도 순수하기 때문이야. 떠들썩한 주연도 포르노 책자만큼 흥분시킬 수는 절대 없어. 피에르 루이스(2) 작품에서 처녀들은 하나같이 젊고 몸매는 완벽하다네. 게다가 환희를 방해하는 건 전혀 없어. 곧, 딸꾹질이나 구취도 없고 피로나 권태도 없고 미납 계산서나 보내지 않은 업무 서신도 없단 말일세. 우리가 예술에서 얻는 감동과 생각과 감정은 아주 순수해, 화학적으로 말이야.” 그리고 웃으면서 덧붙였다. “도덕적이 아니라.”
“그러나 <에핍시치디언>은 포르노가 아니잖아.” 월터가 반박했다.
“아니지, 그러나 그것도 화학자의 관점에서는 똑같이 순수하네. 셰익스피어의 이 소네트를 기억하지?
내 연인의 눈은 태양과 사뭇 다르구나,
산호는 그녀의 붉은 입술보다 훨씬 더 붉고
눈이 백색이라면 그녀 가슴은 왜 회갈색인지,
머리카락이 줄이라면 그 머리에서는 검은 줄이 자란다.
나는 붉고 흰 다마스크 장미를 본 적이 있지만
그녀의 볼에서 그런 장미를 본 적은 없어라.
그리고 어떤 향수에는 더 큰 기쁨이 들어 있어,
내 연인의 입에서 나는 숨결보다도 말이지. (3)
등등. 그는 시인들을 너무 곧이곧대로 받아들였고, 그에 반응한 것이야. 이것이 자네한테 보내는 경고라고 해두세.”
물론 필립이 옳았다. 통나무집에서 보낸 몇 달은 <에핍시치디온>과도 <라 메종 뒤 베르제>(4)와도 닮지 않았다. 우물과 마을로 걸어 다니는 게 어땠는지… 그러나 우물과 산책이 없고 순수한 마저리 하나만 그에게 있었다면, 그게 더 좋았을까? 더 나빴을지도 몰라. 순수한 마저리가 자잘한 일상으로 단련된 마저리보다 더 나빴을지도.
예를 들어, 그녀의 정제됨과 다소 차가우며 아주 창백하고 영적인 도덕성을, 그가 이론적으로 멀리서는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실제로 가까이서는? 그가 사랑에 빠진 것은 바로 그 미덕과 또 정제되고 세련되고 창백한 영성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불행했으니, 칼링은 입에 담지도 못할 만큼 고약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연민 때문에 월터는 불륜의 기사가 됐다.
당시 그에게 사랑이란 대화였고 영적 교류요 교감이었다. (그때 나이 스물둘에 지독하게 순수했으니까. 성적 갈망을 승화하기에 익숙한 청소년의 순결을 지니고 막 옥스퍼드 대학을 마쳤으며, 철학자들과 신비주의자들의 시가와 노작들로 가득 차 있었으니까). 그건 진짜 사랑이었다.
성생활이란 그저 자잘한 일상 중 하나에 불과하며 피할 수 없는 것이야, 왜냐면 안타깝게도 인간에게 몸뚱이가 있으나 그건 가능하면 붙잡아두어야 했으니까. 천사들 편에서 인위적으로 불태우기를 익힌 젊은 욕망의 열정을 지닌 채 지독하게 순수한 그는 마저리에게서 태생적 차가움과 선천적으로 낮은 활력의 산물인, 정제되고 차분한 순수성에 감탄했었다.
“당신은 참 좋은 사람이에요.” 그가 그렇게 말했었다. “그런 게 당신한텐 아주 쉽게 다가오는 것 같아요. 나도 당신처럼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건 절반 죽은 사람이 되겠다는 갈망과 같은 것이었는데, 그때는 그걸 깨닫지 못했다. 수줍고 내성적이고 민감한 껍질 아래서 그에겐 삶의 욕구가 강렬했다. 마저리 같이 좋은 사람이 되려면 그에겐 큰 노력이 필요했다. 그러나 노력했다. 그러면서 그녀의 선함과 순수함에 넋을 잃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쏟는 그녀의 헌신에 감동했고, 그녀의 찬양을 받고 우쭐해졌다. 적어도 그녀가 그를 지치게 하고 화나게 하기 전까지는.
대체로, 무지하고 시야 좁은 사람들이 남의 일에 감 놔라 배 놔라 하면서 사사건건 한마디씩 걸치기를 좋아하는 데 비해, 먹물이 제법 들고 세상을 좀 아는 사람은 그런 무지한 자들과 달리 (외려) 어떤 사안에 대해 의견 내놓는 데 종종 머뭇거리며 자신 없게 보인다는 점을…
당신은 혹시 알아차린 적이 있는가?
“어리석은 자는 자신이 현명하다고 생각하지만, 현명한 사람은 자신이 어리석다는 걸 알고 있다.”
셰익스피어가 희곡 <당신좋으실 대로 As you like it> (1599)에서 그렇게 썼다. (이 한 문장이 <더닝-크루거 효과>의 뜻을 아주 잘 드러낸다.)
찰스 다윈도 설파하길, 확신이나 확언, 자기 과신 등은 지식보다 무지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다들 알다시피 소크라테스는 또 뭐라고 했던가? “내가 아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게야.”
이런 사실들로 보자면, 우리가 거론한 이 흥미로운 특성을 아주 옛날부터 사람들이 관찰해 온 게 분명하다.
이런 현상이 왜 나타나는지, 미국의 학자들이 알아냈다.
<더닝-크루거 효과>는
1999년 <미숙함 그리고 그것에 대한 무지: 자신의 무능을 인식하지 못함이 높아진 자부심으로 어떻게 이어지는가>라는 연구에서 데이빗 더닝과 저스틴 크루거가 처음 강조한 인지 편향이다.
알고 보니, 지식이 많은 사람일수록 어떤 주제에 더 적극적으로 파고들면서 모든 것이 간단하지 않다는 점을 깨닫더라. 그러니 섣불리 단언하고 장담하지 못하는 것. 더닝과 크루거라는 두 학자가 대학생들을 상대로 실험했다.
그 결과, 지식이 적은 사람들은 자신이 뭔가를 모르고 뭔가에 부적격이고 무능하다는 사실 자체를 깨닫지 못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그들은 또 자기네가 (잘) 아는 듯 보이는 분야에 (자기네가 아직 모르는) 정보가 얼마나 많이 숨어 있는지 자체를 생각도 않는다.
이로 인해, (무지하거나 무능한) 사람이…
(잘 모르기 때문에) 자기 능력을 과대평가하고 뭔가를 장담하고 뭔가에 큰소리치며 더 적극적으로 나대고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려 들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안목 짧거나 판단이 흐리거나 역시 무지한) 주변 사람들 눈에는 뭔가에 정통하거나 해박하고 유능한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더닝-크루거 효과>를 우리네 표현으로 한편에서는 시쳇말로 ‘무식하면 용감하다’와 또 다른 편에서는 ‘아는 게 병’으로 요약할 수 있겠다. 다만, 전자는 딱 들어맞는데 후자는 뉘앙스에서 좀 차이가 있지 않나 싶다.
그러나 다시 말하건대, 라퐁텐은 드문 예외일 뿐이다. 라퐁텐의 동시대인들은 글에서 인간 외적 본질인 자연 세계에 눈길을 전혀 돌리지 않았다. 코르네유의 비극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은 면밀하게 조직된 계층적 집단의 세계에 살고 있다. 옥타브 나달이 ‘코르네유의 세계는 바로 도시’라고 쓴다.
라신의 여주인공들과 그들을 고민케 하고 특색 없는 남자들의 더 엄격히 제한된 세계는 코르네유의 도시처럼 창문이 없다. 이 세네카 풍 비극의 극치는 숨 막히고 좁아서 공기도 없고 편히 움직일 공간도 없고 배경도 없는 파토스이다. 그것들이 <리어 왕>, <당신 좋을 대로>, <한여름 밤의 꿈>, <맥베스> 등과 얼마나 다른가 말이냐.
셰익스피어의 코미디나 비극은 어떤 것이라도 읽다 보면 어릿광대며 악인, 영웅, 고급 매춘부, 눈물 흘리는 왕비들 같은 인간 세상 뒤편에 지구와 우주가 늘 존재하며 생물과 무생물의 세상이, 이성이 없는 것과 의식이 또렷한 세상이 있다는 사실들이 거의 스무 줄마다 나온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된다.
사람을 자연과 떨어진 상태에서 묘사하는 시는 사람의 본질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실제로 확고하게 연관된 인간 외적 세계는 무시하고 인간 영혼 안에서만 하느님을 알고자 애쓰는 영성은 거룩한 존재의 충만함을 알 수 없다.
“내 가장 깊고 가장 확고한 소신은, 만약 그것이 이단적이라면 정통 교리에는 더 나쁜데, 모든 사상가들과 학자들이 뭐라 해도 신의 뜻은 우리가 만물을 도외시하며 그분을 사랑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거꾸로 우리가 만물을 통하고 우리 출발점으로서의 만물과 함께 그분을 찬양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많은 신앙 서적을 난 썩 좋아하지 않는다.”
이런 측면에서 17세기에 가장 덜 불쾌한 신앙 서적들 중 하나는 토마스 트러헌[각주:2]의 <명상의 시대>일 것이다. 잉글랜드의 시인이요 신학자인 그는 하나님이 당신 피조물에 나쁘게 대한다고 여기지 않았다. 거꾸로, 모든 피조물을 통해 하나님을 찬미할 필요가 있으며, 모래알에서 무한한 공간을, 꽃송이에서 영원을 볼 줄 알아야 한다고 믿었다. 트러헌의 표현에 따르면, 사욕 없는 관상을 통해 ‘세상을 얻는’ 사람은, 그리하여 하나님을 얻으며 나머지는 전부 저절로 추가되는 것임을 알게 된다.
“모든 갈망과 야망을 채우고 의심과 배신을 물리치고 용기와 기쁨으로 굳건해지는 것이 정녕 달콤한 일 아니런가? 이 모든 것은 사람이 세상을 얻기만 하면 다 달성될 수 있다. 그러면 지혜와 힘과 선함과 영광의 하나님이 우리 앞에 나타나니까.”
이상적인 삶에서 랄망은 양립할 수 없어 보이는 자연적 요소와 초자연적 요소의 혼합에 대해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보듯이, 그가 말하는 ‘자연적인 것’이란 자연 전체가 아니라 그저 발췌한 일부일 뿐이다.
트러헌도 양립할 수 없는 것들의 뒤섞음을 옹호하지만, 그는 자연을 가장 작은 디테일까지 포함해 통째로 받아들였다. 그가 보기에 백합들과 까마귀들은 인간과 상관없이 ‘하나님 안에서’ 스스로 존재한다. 자, 여기 모래가 있고, 모래 알갱이들 속에서 피어나는 꽃이 있다. 이것들을 사랑스럽게 응시하라. 그러면 그 안에서 영원성도 무한성도 보게 되리니.
자연물에 내재한 이 신성함을 수렝도 체험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나무나 지나치는 동물한테서 하나님의 충만한 위대함을 실제로 감지한 순간들이 있었다고 몇몇 짧은 기록에서 고백한다. 그러나 아주 이상하게도, 갖가지 작은 것들 속에 절대자가 존재한다는 개념을 어디서도 상세하게 기술하지는 않았다. 심지어 자신의 많은 영적 서신의 수신자들한테도 백합에 관한 그리스도의 권고를 따르면 암중모색하는 영혼이 하나님을 알게 될 것이라는 점을 한 번도 조언하지 않았다.
타락한 자연은 모두 부패한 것이라고 주입된 믿음이 직접 체험에서 얻은 것보다 그의 마음에서 더 강했다고 짐작할 수밖에 없겠다. 주일학교에서 배운 독단적인 말과 가르침이 확연하고 자명한 사실을 흐리게 만들었다.
선종의 3대 조사는 “제 앞에 있는 이것을 보고 싶다면, 이것에 대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고정된 관념을 갖지 말라”고 쓴다.[각주:3]
그러나 관념 고정은 신학자들이 직업적으로 하는 일이고, 수렝과 그의 스승은 깨달음을 추구한 사람이기 이전에 신학자였다.
랄망의 고행에서 가슴의 정화는 성령의 인도에 늘 온유하게 따름으로써 완성됐다. 성령의 일곱 가지 은사[각주:4] 중 하나는 이해력인데, 이 이해력에 맞서는 악덕은 ‘영적인 것들에 대한 난폭함’이다. 이런 난폭함은 갱생하지 않은 자들에게 흔한 상태이며, 그런 사람은 대체로 내면의 빛에 완전히 눈이 어둡고 감화의 목소리에 완전히 귀가 어둡다.
이기적인 충동을 억제하고, 제 생각을 추적하는 증인을 두고, ‘마음 움직임을 감시하는 작은 파수꾼’을 세움으로써… 사람은 마음 그 어느 깊은 곳에서 나오는 메시지를, 직관적 지식과 직접적 명령과 상징적 꿈이며 판타지 형태의 메시지를 인식하게 되는 점까지 직관을 키울 수 있다.
끊임없이 돌아보고 경계하는 가슴은 모든 은혜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되고, 결국 ‘성령에 점유(감화)되고 지배(인도)된다.’
그러나 이런 경지로 가는 길에서 아주 다른 종류의 점유와 지배가 있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모든 영감과 계시가 다 하나님께서 나오는 것은 아니며, 심지어 부도덕하고 부적절한 것도 있으니까. 그렇다면, 그들 중 어떤 것이 성령의 목소리이며 어떤 것이 미치광이 목소리고 사악한 범죄의 목소리인지, 어떻게 식별해야 하나?
피에르 베일[각주:5]이 한 독실한 재세례파 젊은이의 경우를 인용한다. 이 젊은이는 어느 날 아우의 목을 베라고 명령한 목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성서를 많이 읽은 그 아우는 이런 일이 이전에도 벌어졌다는 것을 알기에 이 계시의 신성함을 인정했다. 같은 신자들이 많이 모인 자리에서 제 2의 이삭처럼 자발적으로 죽음으로 달려가 참수를 당했다.
그런 경우를 키에르케고르는 ‘도덕성의 목적론적 유보’라고 우아하게 칭한다.[각주:6] 창세기와 달리 실생활에서는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없다. 실생활에서 우리는 광기의 속삭임에 현혹되지 않도록 늘 경계해야 한다.
랄망은 ‘계시’라는 것이 하나님한테서 나오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점을 아주 잘 알고 있었으며, 신자들이 망상에 빠지지 않게끔 여러 모로 경고했다. 성령에 순종하라는 그의 교리가 내재적 영혼이라는 칼뱅파 교리 같은 것이 아니냐며 의심쩍게 이의를 제기한 동료들에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첫째, 계시 형태로 나타나는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고서는 그 어떤 선행도 이룰 수 없다는 것은 종교의 신조이고, 둘째, 종교적 계시는 가톨릭 신앙과 교회 전통과 교회 권위자들에 의해 인정된다. 만약 계시라는 것이 사람으로 하여금 신앙과 교회에 역행하게 한다면, 그건 거룩한 계시일 수 없으리니.
이는 내면에 웅크리고 있는 광기를 조심하는 아주 효율적인 방법이다. 퀘이커교도들이 활용하듯이, 다른 방법도 있다. 특이하거나 위험스러운 뭔가를 해야겠다는 충동이 강하게 밀려올 때 그 사람은 ‘존중하는 친구들’의 조언을 듣고 계시의 본질에 관해 그들 의견을 따라야 했다.
랄망도 같은 절차를 옹호한다. 그는 성령이 실제로는 ‘우리한테 판단력 있는 이들과 상의하고 우리 행위를 가까운 이들 의견에 맞추도록 촉구한다’고 주장한다.
그 어떤 좋은 행위도 성령의 계시 없이는 이뤄질 수 없다. 랄망은 이것이 가톨릭신앙의 신조라고 단언한다. ‘난 그런 식으로 성령의 인도를 받아본 적이 없다고 투덜거린’ 동료들한테 이렇게 답했다.
참 신자들에겐 그런 계시가 늘 따라다녀요, 본인이 못 느끼는 중에도. 그대들이 온당하게 살기만 한다면 종교적 계시를 필히 인식하게 될 겁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대신 「그들은 제 자신 바깥에 살기를 택하면서 제 영혼을 들여다보러 집으로 잘 오지 않고, (그렇게 하겠다고 서약한) 양심 점검을 아주 피상적으로 행하고 주변 사람들이 보기에 빤한 잘못들만 참작한다. 제 욕구와 습관의 내적 뿌리를 찾으려 애쓰지는 않고, 마음의 상태와 경향이며 가슴의 작열을 돌아보지는 않고서 말이다.」
그런 사람들이 성령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한들 놀랄 게 무엇이겠는가. 「그들이 성령의 목소리를 어찌 들을 수 있겠나? 그들은 저희 행동으로 인한 은밀한 마음속 죄마저도 알지 못하거늘. 그러나 그런 걸 알기에 적절한 조건을 내면에서 만들기만 하면, 성령이 인도하심을 틀림없이 알게 되리라.」
이런 점들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른바 선행이요 자선이라 하는 것들 대부분이 왜 비효율적이며 나아가서 많은 경우 왜 유해한 것인지 알 수 있다.
속담처럼 만약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돼 있다’[각주:7] 한다면, 그것은 대다수 사람들이, 내면에서 나오는 그리스도의 빛을 못 보기에, 순수한 선의를 지닐 수 없기 때문이다. 바로 이 때문에 행동하기 이전에 늘 관상(심사숙고)이 선행돼야 한다고 랄망이 말하는 것.
「우리는 내면에 더 침잠할수록 바깥 활동을 더 많이 할 수 있다. 내면의 자신을 덜 들여다볼수록 선을 행하려 애쓰기를 더 삼가야 한다.」
다른 대목에서 이렇게 말한다.
「자선 활동에 들이덤비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그 열의와 자선의 동기가 순수한 것일까? 아니면, 그런 일에서 자기애를 충족하기 때문에, 기도나 공부를 싫어하기 때문에, 제 방에서 호젓하게 명상에 잠기기를 견딜 수 없기 때문은 아닌가?」
어떤 성직자가 헌신적인 신도들을 많이 데리고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목자의 말씀과 선행은 ‘그가 얼마나 사리사욕에서 멀어지고 하나님과 가까이 하는지에 비례해서만’ 좋은 결실을 맺을 것이다.
언뜻 선을 행하는 듯 보이는데,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못한 경우가 왕왕 있다. 영혼을 구하는 사람은 거룩한 이들이지 사업에 능한 자들이 아니다.
「행위는 우리가 하나님과 합일하는 데 장애가 되어선 안 된다. 외려 우리를 그분한테 더 큰 사랑으로 더 바짝 묶는 것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너무 과하면 육체의 죽음을 야기하는 어떤 체액들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종교 생활에서도 지나치게 활발하며 기도와 명상으로 절제되지 않은 활동은 필히 영적 죽음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바로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아무 결실 없는 삶을 사는 것이다. 겉보기에는 아주 칭찬받을 만하고 눈부시고 건설적인 일을 하는데도 말이다!
계시의 조건인, 욕심 없는 자기성찰 없이는 재능도 결실 맺지 못하고 열의와 근면도 영적 가치를 전혀 일궈내지 못한다.
「기도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이 평생 이룰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단 한 해에 해낼 수 있다.」
그래, 외적인 작업은 외부 상황을 바꾸는 데는 효율적이겠지. 하지만 아무리 좋은 환경에도 파괴적이고 자멸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데, 상황에 대해 사람들의 그런 행동을 바꾸고자 하는 일꾼은 먼저 자신의 영혼을 정화하고 영혼이 계시를 접하게 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저 외부 지향적인 사람은 트라야누스[각주:8] 황제처럼 일하고 데모스테네스[각주:9]처럼 웅변을 토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내면을 지향하는 사람은 한마디 말로도, 다른 사람이 총명과 학식을 다 동원해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인상을, 많은 가슴과 마음에 안길 수 있다. 그 한마디에 성령이 깃들기만 한다면!」
그렇다면 ‘성령에 점유(감화)되고 지배(인도)된다’는 것을 실제로 어떻게 느끼나? 지속적인 계시 상태를 수렝보다 나이 적은 동시대 여성 아멜 니콜이 아주 꼼꼼하게 묘사했다. 그녀를 고향 브르타뉴 전역에서는 애정을 담아 la bonne Armelle (착한 아멜)이라 불렀다.
하녀로서 음식 만들고 걸레질하고 아이들 돌보면서도 관상하는 성자의 삶을 산 그녀는 글을 배우지 못해 제 사연을 적을 수 없었다. 다행히도 재주 있고 글을 잘 아는 수녀가 있어서, 그녀의 은밀한 얘기와 고백을 거의 놓치지 않고 기록하게 됐다.
「아멜은 자신이 그 어떤 행위도 할 수 없고 그저 고생하며 하나님 역사에 순종하는 데에만 적합하다고 여겼다. 고백하기를, 육신을 지니고 있지만, 이 육신은 스스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 성령에 의해서만 움직이고 인도된다고 했다. 하나님이 그녀 영혼에게, 내가 들어설 수 있도록 자리를 만들라, 명령하고 거기 들어서셨다. 아멜은 제 육신이나 마음에 관해 말할 때 ‘내 몸’이나 ‘내 마음’이라는 말을 더 이상 하지 않았다. 왜냐면 ‘나의’라는 단어가 그녀에겐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그녀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 속한다고 했다.
그녀가 언젠가 이렇게 말한 것을 기억한다. 하나님이 절대적 주인이 되었을 때 그 동안 나를 가로막은 것들을 (나쁜 습관과 이기적 충동 따위를) 모두 내버렸어요. 그렇게 되자, 그녀 마음은 주님이 그녀 영혼의 심연에서 어떤 일을 벌이는지 깨닫지 못했고, 그 역사를 방해하지 못했다. 그녀 마음은 하나님만이 자유로이 들어설 수 있는 이 심연의 문 밖에서 주인 명령을 공손하게 기다리는 하인과 같았다. 간간이 아멜은 전능자께서 계신 은밀한 문 앞에 많은 천사들이 입구를 지키듯이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런 상태가 얼마 동안 지속됐다. 그러다가 주님께서 그녀의 의식적인 자아를 영혼의 심연으로 들여놓으셨다. 들여놓을 뿐 아니라, 거기 가득 채워진 신성한 완성을 실제로 보게 하셨다. 그건 사실 늘 차 있었지만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그녀가 알지 못했던 것일 뿐. 내면에서 느끼는 그리스도의 빛은 그녀가 감당키 어려울 만큼 강해서 한동안 육신이 심한 고통을 겪었다. 그러나 점차 견디게 되면서 그리 큰 고통 없이도 계속 그 빛을 알아볼 수 있게 됐다.」
아멜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도 놀라운데, 다른 비슷한 증언들과 대조해 보면 한층 더 흥미롭다. 즉, 만물의 신성한 근간과 같은 본질인 순수한 자아 혹은 아트만이 이 놀랄 만한 자아에 내재돼 있다는 점. 영혼 안에는 ‘하나님만 들어설 수 있는’ 은밀한 심연이 있다.
하나님만 들어설 수 있는 까닭은… 신성한 근간과 의식적인 자아 사이에 비인격화된 실체, 곧 우리네 무의식의 지대가 깔려 있는데, 거기에는 범죄적 본능과 원죄가 둥지 틀고 있기 때문이다. 이 무의식은 광기와도 가깝고 하나님과도 가깝다.
우리는 원래의 죄를 (원죄를) 가지고 태어난다. 그러나 우리한테는 원래의 덕도 (원덕도) 있다. 이를 서구 신학에서는 ‘은혜를 감당할 능력’ 혹은 ‘영혼의 불꽃’이라 부른다. 이건 최초의 순수와 결백을 간직한 의식의 파편. 이 타락하지 않은 의식의 파편을 ‘신테레시스’[각주:10]라 부른다.
프로이트 유파 심리학자들은 원덕보다는 원죄에 훨씬 더 많이 주목한다. 그들은 쥐와 바퀴벌레들을 차분히 연구하지만 내면에서 느끼는 그리스도의 빛을 보기를 꺼린다. 융과 그의 후계자들이 좀 더 현실적이다. 그들은 개인적 무의식의 경계를 넘어섰고, 마음이 점점 더 비인격화되기 시작하면서 심령매체와 뒤섞이는 영역을 개척하기 시작했다. 융의 심리학은 내재하는 망상증의 범위를 넘어섰지만 내재하는 신까지 이르지는 못했다.
반복컨대, 원죄의 밑바탕이 되는 원덕이 존재한다는 증거는 무수히 많다. 아멜의 경우가 독특한 건 아니었다. 영혼의 심연이 있어서, 거기서 신성한 사랑과 지혜의 빛이 나온다는 것을 역사 내내 많은 사람들이 인식해 왔다.
그것을 수렝 신부도 인식했는데, 단지 저 뒤에서 기록되듯이, 그와 함께 심령매체에 두려움이 있고 개인적 잠재의식에 해로운 쓰레기가 있음을 강하게 인식하기도 했다. 그는 하나님과 사탄을 같은 순간에 인식했고 자신이 모든 존재의 신성한 근간과 영원히 결합됐음을 아주 확실히 알면서도 이미 돌이킬 수 없이 저주받았다는 것도 굳게 믿었다.
결국, 우리가 저 뒤에서 보게 되듯이, 그것은 하나님을 두루 인식하는 과정이었다. 그 고통 받는 마음에서, 원죄는 시간과 상관이 없는 까닭에 훨씬 더 크고 많은 원덕 속으로 결국 사라지고 말았다.
신비 체험, 현신, 이른바 ‘우주 의식’의 번쩍임 등은 간청한다고 하여 얻는 것이 아니며 실험실에서 일률적으로 마음대로 반복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영혼 깊은 곳에서 얻은 체험이 명령에 따르는 게 아니라면, 그 심연으로 다가들고 그 영역 안에 존재하며 천사들 속에서 (아멜의 말대로) 문가에 서는 체험은 반복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최면상태를 실험한 사람들은 이런 점을 발견한다. 즉, 어떤 트랜스 깊이에서 피험자들이 홀로 있고 주의가 산만하지 않다면 내재된 평정과 좋은 상태를 심심찮게 알게 된다는 것. 이때 이 좋은 상태는 광대하지만 고립되지 않은 공간들이나 빛의 인지와 자주 연관된다.
랄망과 그 제자들은 신비 체험의 근거를 굳이 입증하려 들지 않았다. 그들은 신비 체험이 가능하다는 것을 직접 경험으로 알았으며, 그들이 가지고 있는 아레오파고스의 디오니시우스의 <신비주의 신학>에서부터 테레사 성녀와 십자가의 성 요한[각주:11]의 얼마 전 증언에 이르기까지 가장 믿을 만한 문헌들로 확인도 했다.
가슴 정화와 성령에 온유함으로써 달성되는 그 목표의 신성한 본질과 가능성을 그들은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과거에 하나님의 미더운 종들이 이 길을 거치고 서면 증거를 남겼으며, 그 증언들의 정통성을 로마교회 박사들이 담보했다. 이제 그들은 감각과 의지가 몸부림치는 어두운 밤들을 스스로 이겨낸 뒤 평범한 인간으로서는 도무지 알지 못하는 평정 상태를 체득하게 됐다.
Gabriel Marcel (1889-1973) - 프랑스의 철학자, 극작가, 비평가. 유신론적 실존주의의 대표적 철학자. 나이 마흔에 가톨릭에 귀의. <형이상학적 일기>, <구체적 철학 경험> 등. [본문으로]</구체적></형이상학적>
Thomas Traherne (1637-1674) - 잉글랜드 성공회 성직자, 시인, 사상가, 지복 철학을 다룬 산문 Centuries of Meditations이 20세기 초에 발간돼 널리 읽힌다. [본문으로]
欲得現前 莫存順逆 - 도가 앞에 나타나길 바라거든 따름과 거스름을 두지 말라. <신심명> [본문으로]</신심명>
1지혜 2이해력 3지식 4권고 5인내 6경건함 7신의 외경. 이 일곱 가지 선물의 원천으로 흔히 이사야서 11장 1-2절을 꼽는다 [본문으로]
Pierre Bayle (1647-1706) - 프랑스 계몽시대의 영향력 있는 사상가요 신학 비평가. 칼뱅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잠시 가톨릭에 귀의. ‘계몽철학의 화약고’라 불리는 <역사와 비평 사전> 때문에 프랑스 가톨릭과 개혁교회한테 맹렬한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그가 죽자 그의 적수들도 친구들도 모두 위대한 지성인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했다. [본문으로]</역사와>
쇠렌 키에르케고르 (Søren Kierkegaard, 1813-1855) - 덴마크의 종교철학자, 신학자, 저술가, 현대 실존주의의 선구자. ‘어떤 특별한 목적을 위해 보편적인 윤리를 유보하거나 정지시킬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공포와 전율>에서 아들을 제물로 바치려는 아브라함 이야기를 통해 조명한다. 이 저술의 장르를 그 스스로 ‘변증법적 비가’라 정의했다. [본문으로]</공포와>
"The road to hell is paved with good intentions" - 유럽 속담. 좋은 일을 하려고 의도하는 것만으로는 모자라고, 실제로 그렇게 해야 한다는 뜻. 혹은, 상황을 더 좋게 만들려고 의도했지만 실제로는 훨씬 더 나쁘게 만드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뜻. [본문으로]
Caesar Nerva Trajanus (53-117) - 고대 로마 황제. 속주들과 이탈리아, 로마 등지에서 대규모의 토목공사 실시. 도로와 교량, 수로의 건설, 황무지 개간, 항구 건물의 건축. 특히 로마는 트라야누스의 토목공사로 풍요롭게 변모했다. [본문으로]
Demosthenes (B.C. 384-322) -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정치가, 웅변가. [본문으로]
Synteresis - 가톨릭 교부요 성서학자인 히에로니무스(342-420)가 고대 그리스 3대 비극시인 가운데 한 사람인 아이스킬로스(B.C. 525-456)의 작품을 풀이하면서 양심(conscientia)을 뜻하기 위해 사용한 용어. 이것의 꺼지지 않는 불꽃이 우리 안에서 마지막까지 선을 알게 한다. 세네카 등 스토아학파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되며, 양심에 대한 태도를 여러 모로 정의하면서 나중에 토마스 아퀴나스 등 스콜라철학자들과 마이스터 에크하르트(1260-1328) 등 신비주의자들도 사용했다. [본문으로]
Dionysius the areopagite (460경-520경) - 침묵과 비움을 설파한 기독교 신비주의 성자, 시리아 지방을 중심으로 활동한 영성가. St. John of the Cross (1542-1591) - 성 환 델라 크루스. 에스파냐 영성가, 반종교개혁의 주요 인물, 테레사 성녀와 함께 ‘맨발의 카르멜회’ 창립, 로마가톨릭 성인. [본문으로]
거기(무지)에다 탐욕까지 갖추었다면… 이는 또 완벽한(?) 저주를 받았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겁니다. 이에 관해서는 더 왈가왈부할게 없겠지요.
'아는 것이 힘이다', '아는 것만큼 보인다' 등등 지식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격언은 많이 있습니다. 오죽하면, '무지는 신이 내린 저주이며, 지식은 우리가 하늘로 오르게 하는 날개'라는 금언까지 있겠습니까.
모자라는 부분을 채우려 노력함은 당연지사인데, 차고 넘쳐서 지나침 또한 조심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물질에서든 정신에서든 별반 차이가 없는 듯싶습니다. 즉, 사치, 화려함, 분수 없음, 허영심, 공명심 따위가 다 조심하고 경계할 대상이 아니던가요?
아는 것이 많다고 과연 하늘에 오를 수 있을지 의문 들지 않는 것도 아니지만, 그럼에도 아는 것이 많으면 분별력과 안목과 지혜 같은 덕목을 싹 틔우고 가꾸는 데 도움 되지 않을까 싶어요.
한데 세상사라는 것이 참 오묘해서, 아는 것이 너무 많을 때,
특히 어떤 분야에서 소위 전문가 소리를 들을 때, 자칫 잘못하면 외려 <소통에 장애를 겪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왜?'를 알아보기 전에 한 가지 실험 사례를 소개하지요.
<실험>
스탠퍼드 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한 한 졸업생이 1990년 아주 단순한 게임을 하나 했다고 합니다.
즉, 피험자들을 두 그룹으로 나눠서, 한 쪽은 <Happy birthday> 같이 누구나 잘 아는 여러 노래의 리듬을 두드리게 하고, 다른 쪽은 그 리듬을 주의 깊게 들으면서 그게 무슨 노래인지 알아맞히는 것.
결과가 어땠을까요?
이 실험에서 한 그룹의 tapper들이 두드린 리듬의 노래는 모두 120개인데, 청자들이 정확하게 알아맞힌 곡은 3개였다는군요. 성공률 2.5%.
그런데… 실험에 들어가기 전에
"청자들이 리듬만 듣고 어떤 노래인지 정확하게 짐작할 확률이 얼마나 될까?"
하는 질문에 tapper들은
"50%는 될 거야"
하고 응답했고 합니다. 달리 말해,
리듬을 두드리는 사람들은 자기네 메시지가 둘에 하나는 (50%는) 제대로 전달될 것이라고 예상(기대)했는데, 실제로 그렇게 된 메시지는 40개 가운데 한 개 꼴에 (2.5%) 불과했던 겁니다.
바로 이 대목이 중요해요.
누구나 다 잘 아는 노래의 리듬을 두드리는 이들은 그렇게 두드리면서 그 노래의 멜로디며 노랫말까지 속으로 떠올립니다. 당연하지요? 그러면서 '에이, 이런 노래를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생각하기 십상입니다.
그런데 그 리듬이 청자들에겐 해괴한 모스 부호처럼 들릴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것.
제가 설명을 잘 했는지 모르겠으나, 전문 용어를 남발하는 전문가들 대다수가 저 tapper들과 같은 심리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니, 그렇습니다.
'에이, 이 정도를 설마 모를까. 이런 용어야 다들 웬만큼은 알겠지'
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지요.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하는 것과도 조금은 비슷할지 모르겠어요. 혹은, 역지사지가 부족한 탓일 수도 있을 거예요.
혹은, 더 나아가자면, 공감 능력이 떨어지는 것은 아닌지도…
그래서 본래 메시지를 잘 전달하지 못하게 되고, 나아가 소통에 장벽을 만들게 됩니다.
이런 현상에 <지식의 저주>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배음, 언어 호흡>
제 경우에도 '아, 내가 지식의 저주를 받은 모양이야' 하고 느낀 경우가 제법 됩니다.
이를테면, <소통과 보이스, 스피치 세미나>에서 멤버들과 함께 얘기 나눌 때 그런 경우가 있어요.
"이완하고 진동과 공명을 통해 여러 배음(倍音)을 키워야 합니다" 혹은
"목소리를 제대로 내려면 먼저 언어 호흡을 제대로 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한데, 나중에 어떤 회원들이 그럽니다.
"아, 난 배음이 배에서 나오는 소리인 줄 알았어요."
"언어 호흡이란 말은 머리털 나고 처음 들어 봐, 그게 뭐야?"
물론, 나중에 자세히 설명하면 "아아, 그거?" 하고 이해들 하지만, 처음엔 사실 저한테도 '이 정도는 누구나 웬만큼 아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있어서 가볍게 지나친 경우가 있다는 얘깁니다. ㅜ.ㅜ
<여러 분야에서>
'고객 만족!'이나 '효율성 100% 달성!' 같은 훌륭한 경영 전략도
실행 방법을 구체적으로 만들어 직원들에게 두루 알리고 교육하지 않는 한,
<지식의 저주>에서 벗어나기 힘들 겁니다.
비즈니스에서, 경영진과 일반 직원들은, 홍보자들과 고객들은, 본부와 현장 직원들은, 다 나름의 정보에 의지하지만 정보 불균형이 심한 탓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저 실험에서 tapper들과 청자들 경우처럼 말이죠.
전문 분야에 종사하는 이들이 (예를 들어, 건축가나 회계사, 엔지니어, 의사, 학자, 법률가들이), 전문 용어를 좀 입에 올려야 신뢰를 더 키울 수 있지 않겠는가, 중요한 개념들의 격이 살지 않을까, 내가 좀 더 '폼이 나는' 건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건 잘못된 생각입니다.
사실 지식이 저주가 되는 까닭은,
전문 분야에서 새로운 영감이나 기발한 아이디어를 더 잘 떠올릴수록, 그것을 명쾌하게 전달하기가 더 힘들다는 데 있어요.
하지만 힘들다는 것일 뿐이지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점에 주목해야 하겠습니다.
<지식의 저주를 떨치는 방법>
1. 나에게 지식의 저주가, 그런 인간적인 취약함이 있는지를 먼저 확인하고 인정하기.
2. (말하기에서) 다방면으로 질문을 적극 장려한다.
사람들이 쓰는 단어를 주의 깊게 듣는다. 명료하고 단순한 질문에 명료하고 단순하게 대답하는 방법을 궁리한다. 전문용어가 과다하게 나올 때, “그걸 다른 식으로 어떻게 말할 수 있나요?” 하고 물으라. 혹은 “그 단어를 쓸 수 없다면, 어떻게 말했겠어요?”
3. 스토리텔링을 적극 장려한다.
우리 뇌는 이야기에 접속이 잘 되기 때문에, 스토리가 사실과 숫자보다 기억하기 더 쉽다. 실제 인물에 관해 실제 스토리를 동원하여 (구체적인 단어들로) 설명한다. (혹은 가공의 인물이 있는 가설적 상황을 이용해도 좋다.)
4. 독창적인 은유와 비유를 찾는다.
비유는 새로운 아이디어나 낯선 개념을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과 연결해 주기 때문에 유용하다. '아아, 이건 (내가 알고 있는) 그것과 비슷해, 이제 감을 잡겠어.'
5. 스피치 원고를 저런 식으로 작성한 뒤에 소리 내어 읽어 본다.
6. 원고를 목표하는 청중 가운데 누군가에게 주어 읽은 뒤 이해되지 않는 부분을 물어보게 한다.
우리가 일상에서 자주 겪지요?
외지인에게 길을 알려줄 때도, 어쩌면 <지식의 저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