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src="https://cdn.subscribers.com/assets/subscribers.js"> 도웰 교수의 머리 19, 2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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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공상과학(SF)소설의 효시 

  도웰 교수의 머리  


벨랴예프 지음

김성호 옮김


브리케의 머리를 코른 교수가 들여다보다.




19. ‘다루기 힘든 케이스’ 


의사 라위노에게 마리 로랑은 ‘다루기 힘든 케이스’였다. 사실 코른 곁에서 일하는 동안 그녀의 신경계가 상당히 쇠약해졌다. 그럼에도 의지가 흔들리지는 않았다. 이제 그 작업을 라위노가 맡았다. 

그가 로랑의 ‘심리 주무르기’에 본격적으로 착수하는 대신, 일단은 멀리서 주의 깊게 관찰만 했다. 그녀를 일찌감치 무덤으로 보낼 것인지, 아니면 정신 나가게 할 것인지, 코른 교수가 아직 확실한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 여러 모로 보아 라위노의 정신 ‘병원’ 체제에는 후자가 더 적당했다.


로랑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자신의 운명이 최종 확정될 수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죽음 아니면 미친증. 여기서는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그녀에게도 다른 길이 없었다. 그녀는 최소한 미친증과 싸우기 위해 정신력을 다 모았다. 아주 온순하고 순종적이며 겉으로는 평온하게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사람의 심리를 꿰뚫는 재능이 뛰어나고 환자 경험이 많은 라위노를 그걸로 속이기는 어려웠다. 로랑이 온순하게 굴자 라위노는 오히려 더 경계하고 의심했다. 


‘힘든 케이스야.’ 

아침 회진 시간에 로랑을 문진하면서 라위노가 그런 생각을 지우지 못했다. 

“기분이 어때요?” 하고 묻자, 로랑이 “좋아요, 고맙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우리는 환자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지요. 그런데도 상황이 낯설고 상대적으로 자유가 제한되기 때문에 어떤 환자들은 억압된 상태를 느낍니다. 고독감과 우울증에 시달리는 겁니다.”

“고독에는 익숙해졌어요.”

‘속내를 간파하기가 쉽지 않겠어.’ 라위노가 생각하면서 말을 이었다. 

“당신은 본질적으로 다 정상입니다. 신경쇠약 증상만 약하게 보일 뿐이에요. 코른 교수의 말로는, 정상적인 사람에게 몹시 힘겨운 인상을 초래하는 실험에 당신이 참여했다더군요. 당신은 아주 젊어요. 과로와 약간의 노이로제 증상이 있고… 그래서 당신을 아주 소중히 여기는 코른 교수가 여기서 휴식을 취하도록 조치한 거지요…”

“코른 교수에게 고마울 따름입니다.”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기질이야.’ 라위노가 괘씸하게 여겼다. ‘이 젊은 여자를 다른 환자들과 함께 지내도록 해야겠어. 그러면 꿍꿍이속을 더 드러낼지도 모르고, 성격을 더 빨리 알아낼 수 있을 거야.’

그런 계산에서 라위노가 은근하게 제의했다. 

“당신은 너무 오래 앉아 있었습니다. 정원으로 왜 나다니지 않지요? 여기 정원은 아주 좋아요, 정원이라기보다 수십 헥타르에 달하는 공원이라 할 만하지요.”

“산보를 나가지 못하게 하더군요.”

“그래요?” 라위노가 놀란 빛을 띠며 목소리를 높였다. ”내 조수가 실수했군요. 산보가 해로운 환자들도 있지만, 당신은 그런 편이 아닙니다. 나다니세요. 우리 환자들과 알고 지내세요. 흥미로운 이들도 있답니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하지요.”


라위노가 나가자 로랑이 방에서 나와 검은 테가 둘리고 음울한 잿빛으로 칠이 된 기다란 복도를 따라 출구로 향했다. 여기저기 방마다 닫힌 문 안쪽에서 미친 듯이 으르렁대는 소리와 고함소리, 발작적인 웃음소리, 중얼거리는 소리 같은 게 들려왔다.

“오… 오… 오…” 왼쪽에서 들리는 소리에,

“우-우-우… 하-하-하-하.” 오른쪽에서 반응했다.     

‘동물원에 온 것 같아.’ 

로랑이 그 압박하는 상황에 굴하지 않고자 정신을 다잡으려 애썼다. 걸음을 다소 재촉하여 건물 밖으로 나왔다. 정원 깊숙한 곳으로 이어지는 오솔길이 평탄하게 펼쳐졌다. 그 길을 따라 걸었다.


라위노 의사의 ‘시스템’은 여기서도 감지됐다. 주변 모든 것이 음울한 빛을 띠고 있었다. 나무들이라고는 암녹색을 띤 침엽수 일색이고, 등받이가 없는 목제 장의자들은 암회색으로 칠이 됐다. 무엇보다도 꽃밭들을 보고 로랑이 특히 놀랐다. 화단들은 마치 무덤처럼 조성됐는데, 거의 검은색에 가까운 암청색의 오랑캐꽃들이 주종을 이루면서 장례식장의 흰 리본처럼 바깥을 두르고 있었다. 거무튀튀한 측백나무들이 그림을 보충했다.

‘그야말로 공동묘지와 다를 바 없네. 여기 있으면 죽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겠어. 하지만 나를 어쩌지는 못할 거야, 미스터 라위노. 난 당신의 비밀들을 짐작했고 당신의 ’효과‘는 당장 나를 덮치지 못할 거야.’ 

로랑이 그렇게 자신을 추스르고는 ‘무덤 같은 화단들’을 빠르게 지나쳐서 소나무 오솔길로 들어섰다. 사원 기둥 같이 키 큰 나무들이 위로 쭉쭉 뻗어서 암녹색 둥근 지붕들을 덮었다. 소나무들의 우듬지가 고르고 일관된 마른 소리를 냈다.

정원 곳곳에서 잿빛 가운 차림의 환자들이 눈에 띄었다. 

정신병원에 감금된 로랑이 정원을 산책하다.


‘저들 중 누가 미친 사람이고 누가 정상인일까?’ 

그건 그들을 그리 오래 관찰하지 않아도 틀림없이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직 희망을 잃지 않은 이들은 ‘신참’인 로랑을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정신병자들은 희미해진 의식으로 자신에게 몰입했고, 자기네 눈에 들어오지 않는 바깥세상과 단절돼 있었다


길고 허연 턱수염을 달고 키가 크고 마른 노인이 로랑에게 다가왔다. 노인은 무성한 눈썹을 치켜세우며 로랑을 보고는 혼잣말을 계속하는 것처럼 입을 열었다. 

“십일 년까지는 셌지만, 그 다음에는 잊어버렸어. 여기에는 달력이 없고 시간은 정지됐어. 이 오솔길을 얼마나 많이 어슬렁거렸는지 몰라. 이십 년인가, 아니 천년일 수도 있어. 신의 얼굴 앞에서는 하루가 천년 같아. 시간을 종잡기 힘들어. 아가씨, 당신도 여기서 천년 동안 저기 돌담까지 갔다가 다시 천년 동안 되돌아오게 될 거야. 여기서 나갈 수는 없어. 여기로 들어오는 이들이여, 희망은 다 내던지라! 단테가 그러지 않았나, 허허허! (*<신곡>의 ‘지옥’ 편 3연에서). 그런 생각을 안 했다고? 당신은 내가 미쳤다고 생각하오? 난 교활한 사람이야. 여기서는 광인들만 살 권리가 있어. 당신도 나처럼 여기서 나가지 못할 거야. 당신과 나는…” 


환자들의 대화를 엿듣는 것이 업무인 남자 간호사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노인이 말투를 바꾸지 않으면서 능글맞게 눈을 끔뻑였다. 

“나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야, 나의 백일천하는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 무슨 말인지 알겠나?” 

간호사가 멀어지자 그가 던지는 말을 들으면서 로랑이 생각했다.

‘가엾은 사람. 과연 사형선고를 피하려고 미치광이 행세를 하는 걸까? 목숨을 구하려고 위장해야 하는 사람이 나 하나만이 아니구나.’


또 다른 환자가 로랑에게 다가왔다. 검은 염소수염을 단 젊은이가 장방형 원에서 평방근을 도출하는 법에 대해 황당무계한 소리를 지껄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간호사가 로랑 쪽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병원 측에서 이 젊은이는 심하게 감시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가 로랑에게 바짝 다가서더니 침을 튀기면서 더 빠르고 집요하게 입을 놀렸다.

“원이란 무한이야. 원과 같은 면적의 정방형이란 무한대의 면적이지. 잘 들어요. 원의 정방형에서 평방근을 도출하는 것은 무한대에서 평방근을 도출한다는 뜻이야. 이건 N승을 곱한 무한대의 일부가 될 거야, 그런 식으로 정방형도 결정할 수 있을 것… 근데 당신은 내 말을 안 듣고 있군요.” 

갑자기 젊은이가 화를 내면서 로랑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그녀가 손을 빼낸 뒤 자기 방이 있는 병동 쪽으로 뛰다시피 하며 서둘렀다. 현관 가까이 이르러서 라위노 의사와 마주쳤다. 그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로랑이 자기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잠그고 싶었지만 안쪽에는 잠금장치가 없었다. 응대하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문이 열리고 문턱에 라위노 의사가 나타났다.

그의 머리는 여느 때처럼 약간 뒤로 젖혀졌다. 다소 커지고 둥글고 날카로운 퉁방울눈이 안경 너머로 방안을 살폈다. 검은 콧수염과 아래턱에 난 작은 삼각형 수염이 입술과 함께 꿈틀거렸다.

“실례하오, 허락도 없이 들어와서. 의사라는 직분으로는 그럴 수도 있다오…”


의사 라위노는 로랑의 ‘도덕적 가치의 파괴’를 시작할 좋은 순간이 됐다고 판단했다. 그의 무기고에는 아주 여러 가지 작용 수단들이 있었다. 사람 좋아 보이게 하는 진정성과 정중함, 매혹적인 친절함에서부터 거칠음과 냉소적인 솔직함에 이르기까지. 그는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로랑의 평정을 깨기로 작정하고, 그래서 돌연 무례하고 비웃는 말투를 취했다.

“왜 당신은 ‘들어오세요. 난 당신을 부르지 않았어요. 생각에 골똘해서 노크를 못 들었어요.’ 하는 말을 하지 않는 거요? 아니면 그 비슷한 말이라도?”

“아니요, 노크 소리는 들었어요. 그러나 혼자 있고 싶어서 대답하지 않았지요.”

“늘 그렇듯이, 역시 솔직하군요!”

그가 비아냥거리듯이 말했다. 거기에 기분이 상해서 로랑이 한마디 걸쳤다.

“솔직함이란 빈정거리기에 좋은 대상이 아닙니다.” 

‘예상대로 걸려들고 있어.’ 

라위노의 기분이 좋아졌다. 그가 로랑의 맞은편에 무례하게 걸터앉아서 툭 튀어나온 눈알을 미동도 않은 채 뚫어져라 쏘아보았다. 로랑이 그 눈길을 참으려고 했지만 결국 불쾌해졌다. 스스로에게 화가 나서 얼굴을 붉히며 눈을 내리깔고 말았다.

라위노가 여전히 빈정거리는 투로 입을 놀렸다.

“당신은 솔직함이 빈정거리기에 좋은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하는군요. 한데 난 그게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하오. 만일 당신이 정말 자기감정에 충실한 사람이라면, 나를 여기서 내쫓았을 것이오. 왜냐면 나를 미워하니까. 그렇기는 해도 손님을 환대하는 여주인의 친절한 미소를 간직하도록 해 봐요.”

로랑이 퉁명스레 대꾸했다.

“이건… 그저 예의범절일 뿐이에요, 어려서부터 교육받은.”  

“예의범절이 아니라면, 나를 내쫓을 건가요?” 

그러면서 라위노가 난데없이 뾰족한 소리로 깔깔대며 웃음을 터뜨렸다. 


“훌륭해요! 아주 좋아! 예의범절이 솔직함과 일치하지 않는군. 그러니까, 예의범절 때문에 솔직하게 행동할 수 없는 거지요. 이게 첫 번째이고.” 

그가 손가락을 꼽았다. 

“오늘 기분이 어떠냐고 묻자 당신은 ‘아주 좋다’고 대답했지요. 비록 당신의 눈빛에서 나는 당신이 목을 매달 수도 있을 것으로 보았지만. 즉, 그때 당신은 거짓말을 한 거요. 그것도 예의범절에서 나온 건가요?”

로랑이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랐다. 또 거짓말을 하든지, 아니면 감정을 감추고자 한 것이라고 고백해야 했다. 그래서 입을 꾹 다물었다.

라위노가 계속 지껄였다. 

“내가 도와드리지요, 마드무아젤 로랑. 그건, 이렇게 표현해도 된다면, 자기방어를 위한 가장이었어요. 그래요, 안 그래요?” 

“그래요.” 

로랑이 도전적으로 대꾸했다. 

“아하, 당신은 예의를 차리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있소. 이게 첫 번째고, 두 번째로 당신은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있소. 이 대화를 계속한다면 내 손가락이 모자랄까 겁이 나오. 당신은 또 연민 때문에도 거짓말을 했지요. 모친에게 위로의 편지를 쓰지 않았던가요?”


로랑이 깜짝 놀랐다. 라위노가 어떻게 그런 것까지 알고 있단 말인가? 그렇다, 그는 실제로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이것도 그의 시스템의 일환이었다. 그는 정신병자라고 몰아붙이며 환자들을 맡기는 고객들한테 입원 사유며 환자에 관한 정보를 낱낱이 요구하곤 했다. 고객들은 그것이 자기네 이익을 위해서도 불가피함을 인식하고 가장 무서운 비밀들조차 라위노에게 감추지 않았다.


의사 라위노가 로랑의 방으로 와서 심리를 압박한다.


“당신은 훼손된 정의라는 이름으로, 또 죄를 벌하려는 요량으로 코른 교수에게 거짓말을 했소. 당신은 진실을 위해 거짓말을 했어요. 이거야말로 씁쓸한 패러독스가 아니겠소! 일일이 열거하자면, 당신의 진실은 늘 거짓으로 충전돼 온 셈이오.”

라위노가 과녁을 제대로 겨냥했다. 로랑이 잔뜩 축기가 들었다. 자기 인생에서 거짓말이 그렇게 큰 비중을 차지했는지, 아직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정의로운 당신이 이제 짬을 내어 생각해 보시오, 얼마나 죄를 많이 범했는지를. 솔직함으로써 당신이 얻은 것은 무엇이오? 내가 말해 드리지. 바로 이런 감금 상태에 떨어졌을 뿐이오. 그 어떤 힘도, 지상의 힘도 하늘의 힘도, 당신을 여기서 빼내지 못할 거요. 그렇다면 거짓말은? 만약 코른 교수를 악마의 자식이요 거짓의 대가라고 간주한다 해도, 그는 여전히 아주 멀쩡히 존재하고 있는 게 아니오?”

라위노가 로랑에게 눈길을 꽂은 채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처음이니까 이 정도만 해 두자. 일단 장전은 잘 됐어.’ 

스스로 흡족하게 여기면서 작별 인사도 없이 나갔다. 

로랑은 그가 나가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앉은 자리에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그날 저녁 이후 라위노는 예수회 식으로 계속 대화하기 위해 저녁마다 그녀에게 나타났다. 로랑의 도덕적 기반과 더불어 심리를 뒤흔들어 놓기는 라위노가 전문가라고 자부하는 일이었다. 

로랑이 정말로 뼛속까지 고통스러워했다. 나흘째 되는 날 더 이상 참지 못하여 불같은 얼굴로 일어나서 소리쳤다. 

“나가요! 당신은 사람이 아니라 악마야!”

그 장면에 라위노가 진짜 만족감을 맛봤다.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으면서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당신은 좋아지는군요. 이전보다 더 솔직해졌어요.”

“나가라니까요!” 

로랑이 숨을 거칠게 몰아쉬면서 재촉했다. 

‘대단해. 안 나가면 주먹질까지 하겠는걸.’ 

의사가 기분 좋게 휘파람을 불면서 밖으로 나갔다. 


사실, 주먹질까지 할 정도로 로랑의 정신이 극히 혼미해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정신 건강은 심각한 위협에 처했다. 혼자 남게 됐을 때 정신 자락을 쥐는 것도 그리 오래 가지 않을 것임을 인식하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한데 라위노는 결말을 앞당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저녁마다 흐느끼는 노랫소리가 로랑을 쫓아 다녔다. 그건 그녀가 모르는 악기에서 나오는 소리였다. 어디선가 첼로가 통곡하는 듯했다. 소리는 때때로 바이올린의 고음까지 올라갔다가 즉각 높이만이 아니라 음색까지 바뀌어서 마치 맑고 매혹적이지만 슬픔이 절절한 사람 목소리처럼 들리기까지 했다. 가슴을 후비어 파고드는 멜로디는 그렇게 순환하면서 끝도 없이 반복됐다. 

그 음악을 듣고 로랑이 처음에는 좋다고 생각하기까지 했다. 그뿐 아니라 음악이 어찌나 달콤하고 애잔한지, 의아하게 여기기 시작했었다. 어디선가 정말 연주를 하는 건가? 아니면 환청이 커지는 건가? 시간이 흐르고 흘러도 음악은 사람을 홀리는 듯이 똑같은 순환을 되풀이했다. 첼로가 바이올린으로 변하고, 바이올린이 통곡하는 목소리로 바뀌고… 하나의 음정이 반주 안에서 슬프게 울렸다. 한 시간이 지나서 로랑은 음악 소리 따위는 실제로 없으며 단지 자기 머릿속에서만 울리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 구슬픈 가락을 피할 수가 없었다. 귀를 틀어막았지만 음악 소리가 계속 들리는 것 같았다. 첼로, 바이올린, 목소리… 첼로, 바이올린, 목소리…


“저 소리 때문에 정말 미칠 수도 있겠어.” 

로랑이 중얼거렸다. 음악 소리를 막으려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고 혼자 크게 소리 내어 말도 해 보았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다. 그 음악 소리는 꿈에서도 쫓아다녔다. 

자리에 누웠지만 잠을 이루지 못한 채 눈을 뜨고 첼로와 바이올린, 사람 목소리... 첼로와 바이올린, 사람 목소리의 끝없는 반복을 들으면서 생각했다. 

‘사람들이 저렇게 쉴 새 없이 연주하고 노래할 수는 없어. 저건 분명히 기계에서 나오는 소리야… 사악한 힘이 사람을 미몽에 빠뜨리려고 드는 거야.’ 


동이 틀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어서 서둘러 정원으로 달려 나갔다. 그러나 멜로디는 이미 집요한 생각으로 바뀌었다. 로랑은 실제로 울리지 않는 음악 소리를 듣기 시작했다. 단지 정원을 어슬렁거리는 광인들의 비명과 신음, 웃음 따위가 그 소리를 약간 희미하게 할 뿐이었다.




20. 신입 환자 


마리 로랑의 신경계가 서서히 망가져 갔다. 그러다 보니 살면서 처음으로 자살을 생각하게 됐다. 한번은 산보하면서 제 손으로 생을 마감하는 방법을 궁리하기 시작했다. 어찌나 골몰했는지 어떤 광인이 길을 건너 다가오면서 뭐라고 지껄이는 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불가사의는 모르는 게 좋아. 물론 그건 다 감상적인 거지.”

로랑이 놀라서 흠칫 몸을 떨며 상대방을 쳐다봤다. 그 사람도 다른 환자들처럼 잿빛 가운을 걸치고 있었다. 보기 좋은 몸매에 키가 훤칠하고 잘 생기고 늠름한 얼굴이 금방 그녀의 눈길을 끌었다. 

‘새로 온 환자인 모양이야.’ 그녀가 생각했다. ‘면도한 지 닷새도 안 됐네. 한데 이 얼굴을 보니까 왜 누군가가 떠오르는 거지?..‘ 


문득 젊은이가 빠른 말로 속삭였다. 

“당신을 압니다. 마드무아젤 로랑이지요? 당신 어머니 집에서 초상화를 봤어요.”

“나를 어떻게 알지요? 당신은 누군가요?” 

로랑이 놀라서 물었다. 

“세상은 아주 좁아. 나는 내 형제의 형제야. 나의 형제는 나인가?”

젊은이가 소리 높여 외쳤다. 


남자 간호사가 눈에 띄지 않지만 주의 깊게 그를 주시하면서 옆으로 지나갔다. 

간호사가 저만치 사라지자 젊은이가 다시 빠른 말로 속삭였다. 

“나는 아르투아 도웰입니다. 도웰 교수의 아들이지요. 나는 미치지 않았어요. 단지 미친 척하는 것일…”

간호사가 다시 그들 쪽으로 다가왔다. 

아르투아가 갑자기 로랑한테서 멀어지며 외쳤다. 

“나의 죽은 형이 여기 있다네! 네가 나고, 내가 너야. 너는 죽은 뒤 내 안에 들어왔지. 우리는 쌍둥이였어. 그러나 내가 아니라 네가 죽은 거야!!”


로랑이 정신병원에서 아르투아 도웰과 접촉하다


도웰은 그 뜻하지 않은 습격에 놀란 어떤 우울증 환자를 뒤쫓아 갔다. 난폭한 환자가 체수 작고 빈약한 우울증 환자를 건드릴까봐 남자 간호사가 그들 뒤를 또 쫓아갔다. 그렇게 그들이 정원 가장자리까지 달려간 뒤 도웰은 쫓아가던 환자를 포기하고 다시 로랑에게 돌아왔다. 그는 간호사보다 더 빨리 달렸다. 로랑 곁을 지나치면서 도웰이 달리는 속도를 줄이고 하던 말을 끝냈다. 

“당신을 구하려고 여기 온 겁니다. 오늘 밤 탈출을 준비하세요.” 

그리고 한 쪽으로 풀쩍 뛰어가더니 자기를 거들떠보지도 않는 어떤 비정상적인 노파 주변을 맴돌면서 춤을 추었다. 춤을 끝내고는 장의자에 걸터앉아 고개를 푹 숙인 채 생각에 잠겼다.


그의 연기가 어찌나 그럴싸했든지 로랑은 도웰이 정말 미친 사람 흉내만 내는 것인지 의심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미 그녀에게 희망이 생겼다. 그 젊은이가 도웰 교수의 아들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잿빛 환자복과 면도하지 않은 얼굴 때문에 ‘개성이 상당히 죽긴’ 했어도, 부친과 닮았다는 것이 이제 한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는 초상화로 그녀를 알아보았다. 어머니를 찾아갔던 게 분명했다. 그런 일이 다 실제와 비슷했다. 어쨌든 이날 밤 로랑은 잠자리에 들지 않은 채 뜻밖의 구원자를 기다리기로 했다.

구원에 대한 기대가 생기면서 그녀가 용기를 내고 새로운 힘을 얻었다. 마치 끔찍한 악몽을 꾸다가 막 잠이 깬 것만 같았다. 끈질기게 쫓아다니는 노랫소리마저 더 조용해지고 멀리 사라져 허공에서 녹아 없어지게 됐다. 로랑이 음울한 지하실에서 신선한 대기로 막 나온 사람처럼 심호흡을 했다. 삶의 욕망이 예전에는 볼 수 없던 힘으로 갑자기 그녀 안에서 타올랐다. 어찌나 기쁜지 웃음이 나오려고 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조심해야 했다. 


조반을 알리는 종이 울리자 그녀는 짐짓 우울한 얼굴을 하려고 애쓰면서 병동으로 발을 옮겼다. 그건 사실 최근에 늘 짓는 표정이었다.

입구 곁에 여느 때처럼 라위노 의사가 서 있었다. 그는 산책에서 감방으로 돌아오는 죄수들을 감시하는 옥지기처럼 환자들을 지켜보았다. 가운 밑에 숨긴 돌멩이며 찢어진 가운, 환자들의 팔과 얼굴에 할퀸 자국 등 아무리 사소한 것조차 그의 눈길을 피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환자들의 표정을 유독 주의 깊게 살피곤 했다.


로랑이 라위노의 곁을 지나치면서 그를 보지 않으려고 눈길을 내려뜨렸다. 얼른 빠져나가고 싶었다. 그러나 그가 잠깐 그녀를 세우고는 더 예리한 눈길로 얼굴을 들여다봤다.

“기분이 어떻소?” 

“늘 그래요.” 

“이건 또 무엇을 위한 어떤 거짓말이오?”

그녀가 지나가도록 비켜서면서 그가 비아냥거리며 묻고는 뒤에 대고 덧붙였다.

“저녁에 우린 또 얘기를 나눌 거요.”

그녀가 지나간 뒤 그에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울한 얼굴을 기대했건만, 뭔가 들뜬 상태에 있는 것처럼 보인단 말이야. 그녀의 생각과 기분에서 내가 뭔가를 본 것일까? 그게 뭔지 찾아내야지…


그리고 그걸 찾아내기 위해 저녁에 그가 왔다. 그 만남을 로랑이 아주 겁냈다. 잘 견디기만 한다면 이 만남도 마지막이 될 것이다. 만약에 그렇지 못하다면 그녀는 이미 죽은 목숨이었다. 이제 그녀는 라위노 의사를 속으로 ‘대심문관’이라고 불렀다. 사실 몇 백 년 전에 살았다면 그는 그런 칭호를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의 궤변과 꼬치꼬치 파고드는 심문, 예상치 못한 함정 질문들, 심리에 정통한 지식, 그리고 악마 같은 분석 따위를 그녀가 다 두려워했다. 그는 진정 ‘위대한 논리학자’요 현대판 메피스토펠레스였다. 그래서 모든 도덕적 가치를 파괴하고 가장 확고한 진리들을 의심케 하여 약화시키는 재간이 뛰어났다.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파멸되지 않기 위해 그녀는 의지를 다 모아 한마디도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것도 역시 위험한 행보였다. 그건 노골적인 전쟁의 선포요, 공격의 강화를 초래하고야 말 마지막 자기방어의 저항이었다. 그러나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라위노가 와서 여느 때처럼 휘둥그런 눈으로 쏘아보면서 “자, 무엇을 위해 당신은 거짓말을 했지요?” 하고 물었을 때, 로랑은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입술이 굳게 맞물리고 두 눈은 바닥을 향했다. 라위노가 예의 종교재판 식 심문을 개시했다. 로랑의 얼굴이 백짓장처럼 허옇게 됐다가 벌겋게 달아오르기도 했지만, 종내 입을 열지 않았다. 라위노가 인내심을 잃고 성질을 부리기 시작했다. 그건 그에게서 아주 드물게 일어나는 일이었다.


그가 비웃듯이 말했다. 

“침묵은 금이라. 자신의 가치를 다 희생하면서도 당신은 목소리 없는 짐승들과 완전한 백치들의 미덕이라도 간직하고 싶은가 보구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을 거요. 침묵에는 폭발이 뒤따르지. 폭로적 달변의 안전밸브를 열지 않는다면 당신은 증오심으로 폭발할 것이오. 그리고 침묵한다 해서 무슨 의미가 있겠소? 그런다고 내가 당신의 생각을 읽지 못하는 줄 아시오? 당신은 지금 ‘넌 나를 미치게 하려고 들지만 그렇게 안 될 걸.’ 하고 생각하고 있소. 자, 우린 터놓고 얘기하게 될 거요. 그렇게 될 겁니다, 귀여운 아가씨. 사람의 영혼을 망가뜨리기가 나한테는 회중시계를 고장 내는 것보다 더 힘들지 않아요. 이 복잡하지 않은 기계의 부품들을 난 속속들이 알고 있소. 저항하면 할수록, 당신은 광기의 암흑으로 걷잡을 수 없이 더 깊게 빠져들 거요.” 

‘이천 사백 예순 하나, 이천 사백 예순 둘…’ 

라위노가 하는 말을 듣지 않으려고 로랑이 계속 숫자를 헤아렸다.

간병인이 조용히 문을 두드리지 않았다면, 이 고문이 얼마나 길어졌을지 모른다. 

“들어오시오.” 

라위노가 퉁명스레 말했다. 

“7번 병상의 환자가 죽은 것 같아요.”

간병하는 여자가 말했다. 라위노가 마지못해 일어났다. 

“죽는 게 차라리 더 낫지.” 그가 나직하게 투덜거렸다. “내일 우리의 흥미로운 대화를 마칩시다.” 

로랑의 턱을 들어 올리며 말하고는 비웃듯이 코웃음을 치고 나갔다. 


로랑이 무겁게 한숨을 내쉬고 맥없이 탁자 위에 엎어졌다. 

한데 벽 저편에서는 한없이 구슬픈 음악이 벌써 통곡하고 있었다. 그 마력적인 음악의 파워가 얼마나 강한지, 로랑이 자기도 모르게 그런 기분에 젖게 됐다. 아르투아 도웰과 만나기로 한 것도 이젠 그저 병적인 상상의 헛소리로만 보이고, 어떤 투쟁도 소용없는 짓인 것만 같았다. 죽음, 오로지 죽음만이 그녀를 이 고통에서 벗어나게 할 것이다. 그녀가 주변을 두리번거렸고… 그러나 환자들의 자살은 라위노 의사의 시스템에 포함되지 않았다. 여기에는 목매달 것조차 하나 없었다. 불현듯 늙은 어머니 얼굴이 떠올랐다.

‘아니, 안 돼, 이건 아니야, 어머니를 위해서 그렇게 하지는 않을 거야… 비록 이 마지막 밤을… 도웰을 기다리겠어. 만일 그가 오지 못한다면…’ 

더 이상 생각을 달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경우 자기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 온몸으로 감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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