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단어들에서 시간이 존재한다는 환상이 나온다. 단어에 관한 장에서 그런 단어들을 쓰지 않는 부족의 사례를 들었다. 그들에겐 과거도 미래도 없어. 사실상 현재에서만 산다. 그러면서 그들은 자연이며 주변 세계와 아주 잘 공존한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어쩌면, 우리가 알고 있는 시간은 실제로 있는 게 아니라 우리의 언어와 문화의 산물이란 말인가? 우리는 시간이란 프리즘을 통해 세상을 지각하는 데 하도 익숙해져서, 그런 세계관의 정확성 여부는 생각도 않는다.
시간의 몇몇 환상을 살펴보자.
과거란 무엇인가?
먼저, 모든 단어에는 우리가 거기에 집어넣는 어떤 뜻과 어떤 이미지가 있음을 기억하자.
당신에게 ‘과거’란 무엇인가?
이 단어에 당신은 어떤 뜻을 부여하나?
이 단어와 관련하여 당신 내면세계에서 어떤 이미지가 나타나나?
대체로 ‘과거’에서 사람들은 언젠가 자기한테 일어난 사건의 장면들을 보게 된다. 여러 환경에 있던 유년기의 자신을 본다. 자기 인생의 여러 시기에 일어나서 기억되는 일들을 본다.
또 ‘과거’라는 단어를 접할 때 손을 흔들며 “이건 지나간 거야” 하고 말할 수 있고, 그러면서 마인드에서는 (내부 화면에서는) 자신의 등 뒤에서 구불구불 뒤쪽으로 이어지는 어떤 길을 보기도 한다.
당신 경우엔 어떤가?
‘과거’라는 단어에 대한 반응으로 당신의 정보 채널에서 무엇을 보는가?
어떤 대답을 하든, 그건 다 내부 정보 채널에서 나오는 정보일 것이다.
직접 보고 확인하라.
당신에게 직접적인 질문을 던지고 싶다.
당신의 과거를 지금 나한테 보여줄 수 있나?
과거가 정말 존재한다면, 그걸 나한테 보여주시라.
어떤 것을 보여주든, 그건 다 바로 목전의 현실에 있는 무엇이거나, 아니면 자기 마인드의 내부 화면에서 당신이 지각하는 무엇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건 (과거가 아니라) 현재에, 바로 지금 여기에, 있는 게 될 것이다.
하지만 과거가 분명 있다고 사람들은 강하게 느낀다. 고고학적 발견이나 고문서, 아니 단순히 당신의 개인적 기억 등이 그 증거이다. 당신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
엊저녁에 식사를 어떻게 준비했는지 난 기억해. 아침에 샤워하고 이를 닦은 것도 기억나. 이건 다 있었던 일이야, 비록 지나간 것이긴 하지만.”
물론, 그렇게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당신이 나열한 것은 전부 당신의 기억이나 회상일 뿐이라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한데, 기억이나 회상은 당신의 내부 정보 채널에 있는 이미지이다. 즉, 과거에 관한 그 이미지들은 전부 당신 의식에서 사실상 바로 지금 나오는 것이다. 과거에서 나오는 게 전혀 아니다.
또 이런 반박이 나올 수도 있겠다.
“현재란 과거에 있었던 사건들의 연속이야, 내가 과거에 어떤 행위를 했기 때문에 현재가 있는 거 아니겠어? 예를 들어, 1분 전에 내가 탁자에 컵을 놓았기에 컵이 지금 거기 있는 거잖아.”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당신이 1분 전에 (과거에) 컵을 놓았을 때, 실제로는 그 행위가 현재에 일어난 것이라는 점이다. 단지 지금 그것을 과거처럼 회상하는 것일 뿐.
어제나 1년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는다면, 당신은 기억에서 정보를 끄집어낼 것이다. 기억에서 나오는 정보는 전부 지금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니 당신이 생각하는 과거란 전부 바로 지금 떠오르는 회상이고 기억이다.
당신에게 기억이 없다면, 당신의 주관적 세계에 당신의 과거가 있을까?
이제 ‘미래’라는 개념을 살펴보자.
미래는 과거에 비하면 한층 더 비현실적이다.
미래에 대해 생각할 때, 당신이 기대하는 무엇이나 볼 것이라 예상하는 뭔가가 어떻게 일어날지 상상할 것이다. 예를 들어, 미래를 생각하면서 당신을 불안하게 만들거나 어떤 행동에 영감을 주는 뭔가를 상상할 수 있다. 사람들은 뭔가를 계획할 때 종종 미래에 대해 생각한다. 그건 저녁 식사 후 어디로 산책할까 생각하는 것일 수 있고, 혹은 올여름 휴가를 바닷가에서 어떻게 보낼지 상상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그게 무엇이든, 미래를 생각하면서 당신은 자기 마인드에서, 자신의 내부 정보 채널에서, 사건의 예견되는 발전이나 미래에 기대하는 것을 상상하며 어떤 장면을 그릴 것이다.
미래에 관해 생각할 때, 그걸 당신은 지금, 현재에서, 한다.
학수고대하던 미래가 도래하는 순간, 그 미래에 있는 현실은 당신이 상상하던 것과는 아주 다르다. 다시 강조하고 싶은 것은, 당신이 상상하던 대로 여름에 정말 바다에 간다 해도, 거기서도 당신은 역시 현재에 있으리라는 점이다.
결국, 미래란…
우리 마인드에서 지금은 없지만 곧 나타날 수 있는 뭔가에 대한 상상이 표현된 것일 뿐이다. 그러나 그것도 역시 지금, 현재에, 나타날 것이다.
미래는 환상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자.
어떻게?
예를 들어, 미래를 지금 즉시 보여 달라는 요청에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이 무엇을 보여주든 그것은 또 현재에 있을 테니까 말이다. 과거와 마찬가지로, 미래는 당면한 현실에 있지 않으며, 우리 상상에 속한다. 미래는, 과거와 마찬가지로 우리 마인드에 있는 이미지다. 이 이미지는 본질적으로 우리 마인드에 있는 여느 추상적인 이미지처럼 환상이며, 세상에 잘 적응하도록 편리하게 일반화한 것이다.
(과거나 미래는 없고) 오로지 현재만 있다. 우리는 (언젠가 그 당시) 현재에서 우리한테 일어난 일을 (지금의) 현재에서 기억한다. 우리는 (언젠가 다가올) 현재에서 우리한테 일어날 일을 (지금의) 현재에서 상상한다. 과거와 미래는 기억과 상상의 작업일 뿐이다.
하지만, 과거와 미래가 상상의 장난임을 인정하면서도, 우리가 기억하는 사건들이 있었고 미래가 어떤 형태로든 도래하리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그 모든 것을 우리는 살면서 항상 본다.
이것을… 시간이 아니라면 무엇으로 어떻게 설명하나?
앞에서 살펴본 대로, 우리가 직접 접근할 수 없는 객관적 실재라는 게 있다. 그리고 우리 마인드는 거기서 정보를 얻어 우리를 위해 세상 모델을 만든다. 즉, 우리의 주관적인 현실을 (실재를, 세계를) 만들어 낸다.
따라서, 우리가 알고 있는 시간이란…
객관적 실재에서 일어나는 어떤 과정들의 모델이며, 이 과정은 변화와 관련된다.
변화가 실제로 어떻게 일어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과학자들이 알아내려 애쓰고 있다. 변화와 관련된 객관적 과정을 구별하기 위해서는 물리적 시간이란 개념을 들일 수 있고, 이 과정을 우리가 주관적으로 반영하기 위해서는 심리적 시간이란 개념을 들일 수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시간은 심리적 시간이다.
이건 당연히 물리적 시간을 제법 잘 묘사하지만, 실제 존재하는 건 아니다.
이미 20세기에 아인슈타인은 상대적으로 움직이는 물체들에서 물리적 시간이 다르다는 것을 발견했다. 예를 들어, 광속에 가까운 속도로 움직이는 로켓을 지구에서 발사한다면, 이 로켓에서 흐르는 시간은 지구의 시간보다 훨씬 느리게 진행될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하여 이 로켓의 시계에서 1년이 지나는 동안, 지구의 시계로는 1백 년이 지나게 될 것이다. 우주비행사들이 지구에 돌아와 보면 손자들이 나이를 훨씬 더 많이 먹었을 것이다.
이것이 우리한테 경악스럽게 보이는 이유는 단 하나, 우리 마인드가 우리에게 시간의 모델만 만들어 낼 뿐이지 물리적 시간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지구상에는 광속에 가까운 속도로 움직이는 물체들이 없고, 그래서 움직이는 물체들에서 물리적 시간의 변화가 하도 작은 까닭에 우리가 그걸 알아차리지 못하며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여길 뿐이다.
'우리한테 이건 (물리적 시간은) 중요하지 않으며, 시간은 어디서나 똑같이 흐르는 것 같아.'
이게 우리의 주관적인 시간 감각이다.
만약 과거와 미래가 우리 마인드의 산물이라면, 우리는 지금 당장 무엇을 확인할 수 있나?
오직 한 가지만 가능하니, 변화가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바로 지금 알아차릴 수 있다.
외부세계도 내면세계도 변화하고 있다. 변화가 바로 지금 일어나고 있다. 그냥 관찰하라. 항상 변화가 일어나는 ‘지금’이 언제나 있다. 그리고 이것이야 이제 직접 관찰할 수 있으니, 이것이 바로 우리 눈앞에 있는 현실(실재, 실체)이다.
바로 앞에서 일어나는 일에 1분 동안 주의를 기울여 보라.
생각이며 느낌 등 내면세계의 일도 덩달아 관찰할 수 있다. 그것도 바로 지금 벌어지고 있다. 심지어 과거의 뭔가를 회상한다 해도, 그것 역시 당신의 내부 화면에 나타나는 일련의 생각과 이미지로서 바로 지금 발견할 수 있다.
과거와 미래가 의식에 있는 이미지라는 점을 이해했다면, 그 이미지들에 당신이 얼마나 자주 빠져드는지 추적할 수 있다.
당신에게 일어난 일들을 얼마나 자주 떠올리나.
그것을 당신은 지금 회상하고, 이 회상이 지금 당신에게 영향을 미친다. 당신의 생각과 감정 상태에 영향을 미친다.
당신이 얼마나 자주 미래로 들어서는지 관찰해 보라. 더 정확히 말해, 당신 마인드에서 기대와 계획을 얼마나 자주 품고 세우는가?
있을 수 있는 뭔가에 대해 얼마나 자주 불안해하는가. 이 불안은 당신이 바로 지금 자기 마인드에서 그리는 미래의 무서운 이미지들에서 나오는 것이다.
과거나 미래에 빠져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 ‘이건 단지 내 마인드의 이미지일 뿐이야’ 하고 자신을 달랠 수 있다. 그때 우리는 주의와 눈길과 관심을 지금 실제로 우리한테 일어나는 일로, 지금 순간으로, 우리가 발 딛고 있는 목전의 현실로 돌릴 수 있을 것이다.
그때 우리는 오로지 ‘지금 여기’만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모든 위대한 영적 대가들이 설파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오로지 ‘지금’, 오로지 ‘여기’만 있다. 나머지는 죄다 마인드의 한갓된 장난이며, 마인드가 만들어 낸 추상적 실재(현실)이다.
아이가 머리도 있고, 성격도 좋고, 학교 성적도 괜찮은데, 집에서 엄마가 무슨 옳은 말을 (지시나 부탁 따위를) 하면, 아예 들은 체도 안 하고 어떤 일을 하지도 않을 때... 답답하지요.
문제는 '억양'에 있어요!
(물론, 지금 우리가 하는 얘기는 부모와 자식 사이가 아주 틀어져서 일부러 반항하는 경우가 아니라, 정상적인 가정과 관계를 염두에 두는 겁니다.)
집에서 아이에게 뭔가 크고 작은 일을 시키거나 부탁하거나 지시할 때, 이게 잘 먹혀들게 하려면 어구 끝에서 내려가는 억양을 취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억양은 단호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며, 남성 스타일로 간주됩니다.
거꾸로, 어구 끝이 올라가는 말은 연약하고 여성적인 것으로 들립니다. 이런 억양은 편안한 느낌을 만들고, 상대방에게 이해와 공감의 느낌을 주고, 대화를 지속하는 데 좋아요.
그러나 훈육이라는 측면에서는 비효율적이라는 것.
아이를 좀 '사람답게' 만들어 갈 필요가 있을 때는 그런 억양을 쓰지 않는 게 더 낫습니다.
아이의 눈길을 끌고 대화에 끌어들일 필요가 있다면,
어구 끝이 올라가는 억양이 필요하겠지요. (안 그런가요? 바로 이렇게 올라가는 억양).
그러나 부모의 지시를 수행하게 할 필요가 있다면,
내려가는 억양이 훨씬 더 효과적이라는 뜻입니다.
'아, 우리 애가 아빠 말은 그런대로 잘 듣는데, 엄마 말은, 엄마를 좋아하면서도, 잘 안 듣는 것에 그런 이유가 있었겠구나.'
어때요, 일리가 있습니까?
이런 근본적인 원인에다 중요한 디테일을 몇 가지 첨부하자면, 이렇습니다.
•아이에게 지시할 때, 짤막한 어구를 이용. ‘잘게 썬’ 어구. •중요한 어구 사이에 휴지를 둔다. (휴지의 중요성과 방법을 우리가 많이 다뤘습니다.)
•각각의 중요한 어구에서 ‘키워드’에 강세를 준다. •유성자음(울림소리)에 강세를 준다. (성대가 떨려 울리는 자음. ㄴ, ㄹ, ㅁ, ㅇ)
•단어들을 명확하고 단호하게 소리 내고, 모음을 길게 끌지 않는다. 모음 소리를 노래하듯 늘이는 것은 부드러운 억양의 특징.
결국, 우리가 누군가에게 인사를 건네거나 격려하고 위로하고자 할 때는, 더 멜로디 있게 말하고 끝이 올라가는 억양을 쓸 겁니다, 안 그런가요? 하지만, 질서를 잡고 기강을 세울 필요가 있을 때는 억양을 좀 다르게 해야 한다는 점을 이제 우리가 알게 됐습니다. (군대 같은 조직에서 많이 쓰지 말입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명연설 <I have a dream> *미국 대통령 오바마의 정치 스피치 *스티브 잡스의 (통칭) <Stay hungry, stay foolish!> *노무현 대통령의 (통칭)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이건 다 인터넷에서 금방 찾을 수 있어요. (아래 관련 포스트에도 있어요.)
그 하나하나가 다 나름대로 감동을 줄 겁니다.
감상하면서, 화자가 원고에 눈길을 얼마나 돌리는지 주목해 보세요.
이번 #액션을 열심히 수행했다면, 성실한 당신은 저 네 편의 스피치 중에서 뭔가 차이 나는 것이 있음을 분명히 알아차렸을 거예요.
-어라, 가능하면 원고를 읽지 말라고 했는데, 어떤 이는 아예 대놓고 읽잖아! 이게 도대체 무슨 영문이람? 저이가 스피치 기법 하나 모를 리 만무한데!!
그래요. 적절한 의문이에요.
스피치 중에 원고 읽기를 최대한 줄이라고 강력히 권고하는 것이 일반적이긴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더러 있어요.
화자의 애드리브와 자연스러움보다는 텍스트에 충실함이 더 요구되거나 시간이 엄격히 제한된 상황 등에서 그렇습니다.
*아주 격식을 갖춘 행사의 일환으로 발언할 때 (예, 졸업식 축사) *파토스가 특히 강조된 전달에서. (예, 혼인 축사, 송덕문, 조사)
*어휘나 표현에 최대한 신중을 기해야 하는 발언에서. (예, 기업 활동 보고, 민감한 정치 연설, 외교적 발언) *자신의 원고 안에서 다른 이들의 글을 정확하게 인용해야 할 때. (예, 시나 어떤 책의 구절)
*스피치를 철저하게 연습할 시간이 없는 경우. *원고를 작가 등 다른 사람이 쓴 경우. (직접 작성한 것보다 소화하기가 어려우니까.) *스피치에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 원고에 의존하지 않으면 불안한 경우.
'프레젠테이션의 달인’이라 불리는 스티브 잡스가 스탠포드 대학 졸업식 스피치에서는 왜 원고를 읽어 내려갔는지, 이제 수긍이 가지요?
그러나 텍스트를 읽어야 하는 경우에도, 그저 밋밋한 낭독에 머물지 않고 말맛이 생기게끔 하려면?
몇 가지를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원고를 읽기 편하게 준비한다는 것은 기본. 그러려면, 손으로 쓰기보다는 타이핑하여 인쇄하는 것이 좋다. 아무리 좋은 필체로 썼더라도 일그러진 글자 하나가 단상에서 읽을 때는 생각보다 훨씬 더 힘들 수 있으니까.
*활자 크기를 눈에 잘 들어오게끔 정해야 한다.
*줄 간격을 너무 크게 잡으면 읽기에 더 불편하다.
*중간 중간에 소제목을 적절히 배치. 물론 이건 읽는 게 아니지만, 스피치의 이정표가 된다. 또 큰 휴지를 취하라는 신호 역할도 된다.
*하나의 문장이라도 휴지를 표시하기 위해 줄을 바꿀 수 있다. 문장을 작은 덩어리들로 나누고 각 덩어리 사이에 빗금(⁄)으로 표시하여 가벼운 휴지를 넣는다. (chunking)
*특별히 강조를 요하는 단어나 어구를 이탤릭체나 굵은 글자로 표시하면 읽을 때 편할 것. 이런 목적으로 밑줄을 쓰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종이 여백에 참고나 주의 사항을 적어 넣는다. 예를 들어, 빨간 펜으로 ‘숨 들이쉬기’, ‘천천히’, ‘청중을 한 번 둘러보기’ 따위.
어때요, 이런 식으로 원고를 준비하면 읽기에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 다음에, 실제 읽을 때는 또 어떤 점들을 고려해야 할까요?
원고 의존도가 클수록, 화자는 무슨 족쇄나 수갑을 찬 것처럼 신체의 속박을 받기 마련입니다. 연단 뒤에서 두 발을 바닥에 붙박은 채 두 손으로 원고를 쥐고 내내 고개를 꺾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좀 끔찍하지요?
그게 바로 원고 읽기의 폐해입니다.
자연스러운 제스처를 가로막고 몸을 부자연스러운 상태로 잡아두니까요.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최선의 길을 찾아야겠지요?
*될 수 있는 한, 원고를 높은 위치에 놓는다. 연단을 이용할 때는 원고를 너무 낮게 세팅하지 말고, 손에 들고 있을 때도 높이 올리도록 하라. 왜? 왜냐면 설령 눈길이 청자들을 향하지 않더라도 그 비슷하게 보이게 되고, 목소리 내기에도 편하니까. 제임스 흄스(Humes)는 <처칠처럼 말하라, 링컨처럼 서라>에서 스피치 대가들의 비결 중 하나가 원고에서 눈길을 들어 올릴 때만 청중에게 말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만큼 시선 접촉이 중요하다는 뜻.
*제스처를 다 죽이지 말라. 원고 읽는 스피치에서는 손을 쓰고 몸을 놀리기가 상당히 어렵지만, 그래도 당신이 산송장이 결코 아니라는 점을 보여 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청중의 눈길에서 맥이 빠질 것.
*읽으면서도 얼굴 표정을 다양하게 짓는다. 청중이 아니라 원고를 내려다보고 있는데 표정을 다양하게 한들 무슨 소용이 있나? 글쎄,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른 효과가 부수적으로 따른다. 즉, 표정을 좇아 목소리도 다양하게 구사되는 것. 이건 상당히 중요한 점이다. 왜냐면, 원고 읽기에서 필연적인 시선 접촉 부족을 벌충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다양한 목소리 구사니까. 이때 청자들은 당신이 들여다보는 원고에 주목하는 대신 당신이 전하는 메시지에 귀를 기울일 테니까.
하지만! 지금까지 우리가 나눈 얘기는원고나 스크립트를 꼭 읽어야 하는, 드문 경우를 염두에 둔 겁니다. 더 많은 경우에는 가능한 한 피해야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