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공상과학(SF)소설의 효시
도웰 교수의 머리
벨랴예프 지음
김성호 옮김
17. 라위노의 사설 병원
스물세 살에 장밋빛 얼굴의 블론드, 운동으로 다져진 근육질의 샤우브는 ‘음모자들’의 제안을 흔쾌히 수락했다. 일단은 일의 전모를 상세히 밝히지 않고 친구들에게 그저 큰 도움을 줄 수 있다고만 설명했다. 샤우브는 명랑하게 고개를 끄덕거렸을 뿐 자기가 도울 일이 혹시 비난받을 짓은 아닌지 아르망에게 묻지도 않았다. 그는 아르망과 그 친구의 정직성을 믿었다.
샤우브가 탄성을 내질렀다.
“신나는 일이야! 당장 스코로 가겠어. 화구를 들고 가면, 작은 마을에 낯선 사람이 나타났다 해도 이상하게 보이지 않을 거야. 간호사들과 간병인들의 초상화를 죄다 그리겠어. 괜찮은 아가씨들이 있으면, 연애도 좀 하지, 뭐.”
“필요하다면, 손도 내밀고 마음도 주게.”
아르망이 맞장구치자 젊은이가 수줍게 덧붙였다.
“그러기에는 내가 썩 잘 생기지 못했어. 하지만 필요하다면 나의 이두박근을 기꺼이 발휘하겠어.”
새로운 동맹자가 길을 떠났다.
“기억하게나. 최대한 신속하고 극도로 조심스럽게 움직여야 하네.”
도웰이 마지막 당부를 했다.
샤우브는 사흘 뒤에 돌아오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이미 다음 날 저녁 아주 풀이 죽어서 아르망에게 왔다.
“불가능해. 그건 병원이 아니라 석조 담장으로 둘러싸인 감옥이야. 직원들 아무도 담장 밖으로 나오지 않아. 식료품 공급 업자들조차 마당에도 들여놓지 않아. 관리인이 정문까지 나와서 필요한 것을 받아 가는 거야… 나는 그 감옥을 양 우리 주변의 늑대처럼 빙 둘러봤지만, 잠입은커녕 담장 안을 한 번 들여다보지도 못했어.”
아르망이 실망하여 짜증을 내기까지 했다.
“샤우브, 자네가 재치와 유연성을 발휘하리라 기대했는데.”
그 말에 샤우브도 역시 짜증 묻은 소리로 대꾸했다.
“그런 솜씨를 직접 발휘해 보시는 게 어때? 나도 그렇게 빨리 포기하지는 않았을 거야. 그러나 그 지역의 한 화가와 우연히 알게 됐는데, 그 사람은 그 지역을 잘 알고 병원 습속도 꿰뚫고 있어. 그의 말로는 그게 아주 특수한 병원이라는 거야. 알고 보니, 그 담장 안에는 범죄와 비밀이 수두룩해. 죽을 생각 없이 너무 오래 사는 일가친척들을 상속인들이 광인으로 몰아 거기다 집어넣고 뒤에서 후견인 행세를 한다는 거야. 또 미성년자들의 후견인들도 거기로 피후견인이 성년이 되기 전에 보낸다지? 이른바 후견을 계속하면서 그들 재산을 마음 놓고 주무르는 거지.
그건 부자들을 위한 감옥이야. 불쌍한 아내와 남편, 늙은 일가친척, 피후견인들을 산 채로 감금하는 감옥 말일세. 병원 소유주는, 주임 의사이기도 한데, 고객들한테서 어마어마한 수입을 받는다는군. 거기 직원들도 급료가 짭짤하다네. 거기는 무법지대야, 불법을 저질러도 석조 담장이 아니라 금덩이가 막아주지. 거기서는 매수가 횡행해. 그런 여건에서 내가 스코에 일 년을 죽치고 앉아 있어봤자 병원에 발끝도 디밀지 못할 게 빤하지 않나?”
“죽치고 앉아 있을 게 아니라 행동을 했어야지.”
아르망이 퉁명스레 대꾸했다.
샤우브가 자기 다리를 과시적으로 들어 올리고 찢어진 바지 끝을 가리켰다. 그러고는 씁쓸한 빈정거림을 담아 말했다.
“자, 보다시피 행동도 했네. 간밤에 담장을 기어올라 넘으려고 했거든. 그런 거야 식은 죽 먹기지. 그러나 담장 저편으로 뛰어내리자마자 송아지만한 개들이 달려들더군. 그 결과가 이거야… 원숭이처럼 날쌔게 움직이지 않았다면 아마도 난 갈기갈기 찢겼을 거야. 그리고 그 순간 널따란 정원 사방에서 경비원들의 호각 소리가 들리고, 손전등 불빛이 여기저기서 번쩍였지.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야. 내가 그만 돌아 나오려고 했을 때 경비원들이 개들을 정문 밖으로 풀었어. 그 짐승들이 어떻게 훈련받았느냐 하면, 예전에 아메리카 남부 농장들에서 도주한 흑인들을 수색하려고 훈련시킨 개들하고 똑같다고 보면 돼…
아르망, 자네가 알다시피, 내가 단거리 경기에서 상을 얼마나 많이 받았나. 만일 내가 간밤에 그 빌어먹을 개들을 피해서 죽을힘을 다해 뛴 것처럼 늘 달렸다면, 아마도 세계 챔피언이 됐을 거야. 마침 저만치서 자동차가 달려오는데, 속도가 시속 삼십 킬로미터쯤은 될 거야. 그렇게 지나치는 자동차 발판에 가볍게 뛰어 올랐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난 이미 죽은 목숨이었을 거야!
“정말 환장하겠군!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한담?”
아르망이 머리털을 곤두세우며 소리쳤다. 그리고 전화기로 달려갔다.
”아르투아를 불러야겠어.“
몇 분 지나지 않아 아르투아가 친구들과 악수를 나누었다.
샤우브의 실패담을 대강 듣고서 그가 말했다.
“그건 예견된 일이었네. 코른이 자기의 제물들을 허술한 곳에 둘 리가 있겠나?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한담?”
그가 아르망과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
“정면으로 돌파해서 코른이 한 것처럼 주임의사를 매수한다?..”
“내 재산을 다 쏟아 부어도 좋아!”
아르망이 소리쳤다.
“그 정도로는 부족할 것 같네. 라위노 의사의 영리 기관은 그가 고객들한테서 받아 챙기는 거금과 고객들이 그에게 보내는 신뢰를 바탕으로 한다는 점이 중요해. 그렇기 때문에 라위노가 벌써부터 짭짤한 뇌물을 먹고 있다면, 다른 어떤 조건으로도 그는 고객들의 이익을 팔아넘기지 않을 거야. 라위노는 자신의 평판을 훼손하기 원치 않을 뿐 아니라, 나아가서 사업 근간이 흔들리는 것도 바라지 않아. 앞으로 이십 년 동안의 수입과 맞먹는 거금을 일시에 받을 수 있다면, 혹시 우리 쪽으로 돌아설 수도 있겠지만 말이야. 한데 우리 재산을 다 모아도 그 정도는 되지 못할 것이네. 라위노의 고객들은 백만장자라는 점을 잊지 말게나. 그의 직원들 중 누군가를 매수하는 게 차라리 훨씬 더 간단하고 싸게 먹히지. 그런데 라위노가 직원들도 감금된 사람들 못잖게 철저히 감시하고 있다는 점이 문제야.
샤우브 말이 맞네. 나도 라위노의 병원에 관한 정보를 웬만큼 수집했어. 거기는 외부인이 강제수용소에 잠입했다가 탈주하는 것보다 더 어려워. 그는 직원을 뽑을 때도 뒷조사를 철저하게 해서 주로 가족이 없는 사람들을 쓰고 있다네. 라위노는 법을 어기고 경찰의 눈을 피해 다니는 자들도 기꺼이 받아들여. 급료를 후하게 주지만, 일하는 기간에는 병원 밖으로 절대 나가지 않겠다는 서약을 받지, 근데 그 기간이 십 년도 되고, 이십 년도 넘어.”
“그렇게 자유가 없이 죄수들처럼 사는 데도 동의할 사람들을 그자는 도대체 어떻게 구하는 거지?”
아르망이 물었다.
“어려운 일도 아니야. 많은 사람들이 편안한 노후 보장에 끌리기 마련이네. 그들 대다수는 또 지금도 사는 게 팍팍하고. 물론 누구나 다 거기 생활을 견디지는 못해. 라위노의 병원에서도 아주 드물긴 하지만, 몇 년에 한 번씩 직원들이 달아나는 경우가 생기네. 바로 얼마 전에도 자유로운 생활을 갈망한 직원 하나가 도망쳤지. 한데 그날로 그의 시체가 스코 외곽에서 발견되고 말았네.
지역 경찰은 라위노에게 매수돼 있어. 경찰은 그 직원의 죽음을 자살로 처리했네. 라위노가 시체를 거두어 자기 병원으로 옮겼어. 그 뒤 어떻게 했을지는 짐작이 가는 거야. 필경 시체를 다른 직원들에게 보여주고 계약을 어기는 자는 누구든지 이런 운명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을러댔을 게 분명해. 그런 형편이네.”
아르망이 아연실색했다.
“자넨 그런 정보를 어디서 얻었나?”
아르투아 도웰이 흐뭇한 미소로써 대답을 대신했다.
샤우브가 다소 기분이 나아져서 말했다.
“보라구, 내 잘못이 아니라고 말했잖아.”
“그 끔찍한 곳에서 로랑이 어떻게 지낼지 상상이 가네. 그렇다면 어떤 대책을 세워야 하지, 아르투아? 폭약으로 담장을 부술까? 지하 갱도를 팔까?”
아르투아가 안락의자에 몸을 깊숙이 파묻고 생각에 잠겼다. 그런 그를 친구들이 말없이 응시했다.
“유레카(Eureka)!” (* “알았어, 됐어.” 아르키메데스가 왕관의 금 순도 측정법을 발견하고서 내지른 탄성)
문득 아르투아 도웰이 탄성을 내뱉었다.
18. ‘미친 사람들’
크지 않은 방, 정원으로 창이 나 있다. 사방에 잿빛 벽. 잿빛 침대 위에 푹신한 연회색 이불. 작은 흰 탁자와 두 개의 흰 의자.
로랑이 창가에 앉아서 멍한 눈길로 정원을 내다보았다. 아마 빛깔 머리가 햇빛을 받아 금색을 띠었다. 그녀는 몹시 여위고 창백했다. 창에서 보이는 오솔길을 따라 환자들이 산보하고 있었다. 그들 사이로 검은 테를 두른 흰 가운 차림의 간호사들이 어른거렸다.
어슬렁거리는 환자들을 보면서 로랑이 중얼거렸다.
“미친 사람들... 그리고 나도 미쳤고… 참으로 무의미한 일이야! 내가 한 일이 겨우…”
그녀가 손가락들에서 소리가 날 만큼 두 손을 꼭 쥐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코른이 그녀를 서재로 불러 말했다.
“얘기 좀 합시다, 마드무아젤 로랑. 일자리를 얻기 위해 처음 왔을 때 우리가 나눈 대화를 기억하시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집에서 보고 들은 것을 밖에서 절대 누설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지요?”
“네.”
“이제 다시 한 번 서약하면 모친을 보러 가도록 해주겠소. 보시오, 내가 당신을 얼마나 신뢰하는지.”
코른이 상대의 심리를 제대로 찔렀다.
로랑이 극도로 당황했다. 몇 분 동안 입을 떼지 못했다. 로랑은 약속을 지키는 데 익숙했다. 그러나 여기서 벌어지는 일을 알고 난 뒤로는… 그녀가 주저하는 것을 보면서 코른이 그 갈등상태를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살폈다.
마침내 그녀가 나직하게 말했다.
“네, 함구하겠다고 약속했지요. 그러나 당신은 나를 기만했습니다. 나한테 많은 것을 감췄어요. 만일 처음부터 사실대로 알려주었다면, 그런 약속을 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니까, 약속을 지키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이오?”
“예.”
“솔직히 말해 주어 고맙소. 당신이 적어도 교활하게 굴지는 않는 덕분에 당신과 일하기가 좋아요. 당신에게는 진실을 말하는 용기가 있소.”
그런 말은 로랑을 추켜세우기 위한 것만이 아니었다. 코른은 평소 정직을 어리석은 것이라 여겨 왔지만, 이 순간만큼은 그녀의 용감한 성격과 도덕적 불굴이 정말 훌륭해 보였다.
‘빌어먹을, 이 젊은 여자를 제거하고 나면 무척 아쉬울 텐데. 어떻게 처리를 해야 한다?’
“그렇다면, 마드무아젤 로랑, 당신은 할 수만 있다면 즉각 나를 경찰에 고발할 거요? 그게 나한테 어떤 결과를 초래한다는 걸 잘 알잖소. 난 중벌을 받을 거요. 그뿐 아니라, 나의 명성도 진흙탕에 떨어지겠지.”
“그런 점을 진작 고려하셨어야지요.”
그 말을 짐짓 못 들은 체하면서 코른이 입을 놀렸다.
“이봐요, 마드무아젤, 편협한 도덕적 관점에서 이제 그만 벗어나시오. 만일 내가 아니라 도웰 교수가 오래 전에 땅 속에서 썩거나 화장터에서 재가 됐다면, 그의 업적이 됐으리라는 점을 알아두시오. 머리통이 지금 하고 있는 것은, 본질적으로 죽은 뒤의 창의가 아니겠소? 그걸 내가 만들어냈단 말이오. 그런 여건에서 도웰의 머리의 ‘생산물’에 내가 일부 권리를 가지고 있는 것 아니겠소? 게다가 내가 없다면 도웰은, 그러니까, 그의 머리는 발명을 수행할 수 없었을 거요. 뇌를 수술해서 어디에 접합할 수 없다는 것을 당신도 알고 있지요. 그런데도 나는 브리케의 머리를 몸통과 ‘결합시키는’ 수술을 훌륭하게 끝냈소. 경추들을 거치는 척수가 잘 유착됐단 말이오. 이 과제를 해결하는 데 도웰의 머리와 코른의 손이 힘을 쓴 거요. 바로 이 두 손도...”
코른이 자기 손을 보면서 내밀었다.
“쓸모가 있다는 말이오. 이 두 손은 지금가지 백여 명의 목숨을 구했으며, 당신이 내 머리 위에 복수의 칼을 늘어뜨리지만 않는 한 앞으로도 수백의 생명을 구할 것이오. 그러나 이게 전부가 아니오. 우리의 최근 연구는 의학계만이 아니라 전 인류의 생명이라는 측면에서도 혁명적인 것이오. 앞으로 의학은 사람의 꺼져가는 생명을 복원할 수 있소. 수많은 위인들을 죽은 뒤에 소생시키고 인류 지복을 위해 그들의 삶을 연장시킬 수 있게 될 거란 말이오! 나는 천재들의 생명을 연장할 것이고, 자녀들에게 아버지를, 아내에게 남편을 돌려주게 될 거요. 앞으로는 이런 수술을 외과의라면 누구나 집도하게 될 거요. 인류의 슬픔이 크게 줄어들게 될…”
“다른 불행한 이들을 희생해서...”
“그렇다 한들 무엇이 나쁘단 말이오. 두 명이 통곡하는 대신 한 사람만 울게 되는 거요. 두 구의 시체 대신 한 구만 있게 되는 거요. 이게 과연 거대한 전망이 아니란 말이오? 그런 것과 비교할 때 내 개인적인 일들은, 아무리 범죄적인 것이라 해도, 도대체 뭐가 문제란 말이오? 죽어가는 생명을 구하는 외과의의 영혼에 죄업이 있다 해도 병자들은 개의치 않을 것이오. 당신은 나만 죽이는 게 아니라, 앞으로 내가 구할 수 있는 수천의 생명도 죽이는 꼴이 되는 거요. 당신은, 내가 완성하기만 한다면, 그 완성보다 천 배는 더 큰 범죄를 짓는 꼴이 되는 거요. 재삼재사 숙고하고 최종 답변을 들려주시오. 재촉하지 않으리다.”
“대답은 벌써 드렸습니다.”
로랑이 서재를 나갔다.
그녀가 도웰 교수의 머리가 있는 방으로 가서 코른과의 대화를 자세히 전했다. 도웰의 머리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가 나직한 소리로 말했다.
“당신의 의도를 드러내지 않거나 최소한 막연하게 대답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난 거짓말을 못하는 체질이에요.”
“그래서 떳떳할 수는 있지만… 자신에게 운명의 굴레를 씌었구려. 당신은 파멸될 수 있고, 그러면서도 그 희생이 누구한테도 도움이 되지 못할 거요.”
“난… 달리 방법이 없었어요.”
로랑이 우울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머리한테서 멀어졌다.
자기 방으로 돌아와 창가에 앉으면서 같은 말을 연신 중얼거렸다.
“주사위는 던져진 거야.”
‘불쌍한 마마.’ 그런 생각이 뜻하지 않게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하지만 마마도 나처럼 행동했을 거야.’ 로랑이 스스로에게 답했다. 어머니한테 편지를 보내 자기에게 벌어진 일을 소상히 알리고 싶었다. 최후의 편지를 썼다. 그러나 그걸 보낼 방법이 없었다. 로랑은 죽을 수밖에 없음을 의심하지 않았다. 죽음을 차분하게 맞을 준비는 돼 있었다. 단지, 어머니가 걱정되고 코른의 범죄를 폭로하지 못한다는 것이 비통할 뿐이었다. 그러면서도 언제든 그가 보복을 당할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녀가 예상한 일은 짐작보다 더 빨리 벌어졌다.
로랑이 불을 끄고 잠자리에 들었다. 신경이 날카로웠다. 벽에 놓인 서랍장 뒤편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경악하기보다는 그저 깜짝 놀랐다. 방문은 잠겨 있었다. 기척도 없이 방안으로 들어올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뭐가 바스락거리지? 쥐가 다니나?‘
그 다음 일은 삽시간에 벌어졌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이어 삐거덕거리는 발소리가 들렸다. 누군가의 발길이 재빨리 침대로 접근했다. 로랑이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그러나 그 순간 누군가의 힘센 손아귀가 그녀를 베개로 짓누르고 얼굴에 클로로포름을 적신 마스크를 씌웠다.
‘이제 죽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그녀가 온몸을 흔들며 본능적으로 저항했다.
“얌전히 있어.”
그건 코른의 목소리였다. 수술할 때마다 듣던 목소리. 그리고 의식이 가물가물해졌다.
의식이 돌아왔을 때는 이미 정신병원에 있었다.
비밀을 지키지 않으면 ‘지독히 힘겨운 대가’를 치를 것이라는 위협을 코른 교수가 실행한 것이다. 코른이 무슨 짓이든 저지를 사람임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가 복수를 가한 것이다. 그리고 그 자신은 아무런 징벌도 받지 않았다. 마리 로랑이 자신을 희생했지만, 그 희생에는 아무런 결실이 따르지 못했다. 그런 생각 때문에 그녀의 정신적 균형이 한층 더 깨졌다.
그녀는 거의 절망적인 상태에 빠졌다. 여기서도 코른의 영향력을 느꼈다.
처음 두 주 동안은 방안에만 갇혀 있었다. 나뭇가지들이 무성하고 ‘얌전한’ 환자들이 어슬렁거리는 정원으로 나가는 것도 금지됐다.
얌전한 환자들이란, 감금 상태에 저항하지 않으며 자기네가 완전히 정상이라고 의사들에게 증명하지 않을 뿐 아니라 병원 비리를 폭로하겠다고 위협하지 않으며 탈출을 시도하려 들지도 않는 이들이었다. 병원 전체로 보자면 진짜 정신 이상자들은 십분의 일도 되지 않았으며, 그들조차도 병원에 들어와서 그런 상태로 바뀐 것이었다. 그런 목적을 위해 라위노는 ‘심리적 중독’이라는 복잡한 수법을 고안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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