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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9.08.12 아이에 대한, 어른들의 자동적 반응 12가지 (19) 1
  2. 2019.08.10 6과. 아이의 얘기에 귀기울이지 못하는 이유 (18)
  3. 2019.08.07 '적극적 듣기' 특성과 대화 규칙 (15)
  4. 2019.08.07 5과. 아이의 얘기를 귀기울여 듣는 방법 (14)
  5. 2019.08.07 부정적 경험 맛보게 하기 (13)
  6. 2019.08.06 자녀에게 강요하는 상황과 충돌을 피하기 (12)
  7. 2019.08.06 부모의 지나친 기대와 과잉 보호 (11)
  8. 2019.08.05 4과. 아이가 원치 않을 때는? (9)
  9. 2019.08.05 아동의 근접발달 영역 확장과 자전거 타기 (8)
  10. 2019.08.05 규칙 2를 지키지 않을 때 어떤 현상이? (7)
  11. 2019.08.04 3과. "우리, 함께 해 볼까?" (6) 2
  12. 2019.08.02 식구들이 카를손을 보다 (8장 계속)
  13. 2019.08.02 8. 카를손이 생일에 오다
  14. 2019.08.02 공연 '기적의 밤' (7장 계속)
  15. 2019.08.01 7. 카를손이 영리한 개 알베르트와 공연하다
  16. 2019.08.01 카를손의 유령 놀이 (2-2)
  17. 2019.07.31 6. 카를손이 유령 놀이를 하다 (2-1)
  18. 2019.07.31 5. 카를손이 좀도둑들을 골려 주다 (2-2)
  19. 2019.07.31 5. 카를손의 장난 (2-1)
  20. 2019.07.31 4. 카를손이 내기를 걸다 (2-1)
  21. 2019.07.31 3. 카를손이 천막 놀이를 하다
  22. 2019.07.30 도움을 청하지 않는 한 아이 일에 끼어들지 않는다 (5)
  23. 2019.07.30 '무조건 수용'을 가로막는 원인 (3)
  24. 2019.07.29 2. 카를손이 탑을 세우다
  25. 2019.07.29 1부. 지붕 위에 사는 카를손 1. 카를손과 만나다
  26. 2019.07.28 1과. 조건 없는 수용이란? (2)
  27. 2019.07.27 자녀와 소통, 어떻게? (1)
  28. 2019.07.15 도웰 교수의 머리 25, 26장
  29. 2019.07.14 도웰 교수의 머리 21, 22장
  30. 2019.07.12 도웰 교수의 머리 19, 20장

 

(어른들의 자동적인 반응 12가지, 계속) 

 

4. 조언, 진부한 해결책   

"왜 한번 해보지도 않는 거야…" 

"내가 보기엔, 우리가 가서 사과해야겠다." 

"내가 너라면 반격을 했을 거야."

 

통상 우리는 이렇게 조언하기에 인색하지 않다. 게다가 아이들에게 조언하는 것이 부모의 의무라고 여긴다. 그리고 종종 자신을 본보기로 든다. 

"내가 네 나이 때는…" 

하지만 아이들은 그런 조언에 귀 기울이지 않는 편이다. 때로는 노골적으로 반항한다. “아빠는 그렇게 생각하지만, 내 생각은 달라요.” “그렇게 말하기는 쉽지요.” “그런 말 안 해도 알아요!” 

 

아이의 그런 부정적인 반응 이면에는 무엇이 있나? 바로... 독자적인 사람이 되어 스스로 결정 내리고 싶은 갈망이 있다. 성인들도 다른 누군가가 조언을 해댈 때 늘 기분 좋게 여기지는 않지 않는가. (이와 관련해 소중한 아포리즘 하나 - "청하지 않은 조언을 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도 없다.") 

한데 아이들은 성인들보다 훨씬 더 예민하다. 우리는 아이에게 뭔가를 조언할 때마다 이런 뉘앙스를 풍기기 쉽다. 즉, 아이는 아직 어리고 경험이 없으며 우리가 아이보다 더 현명해서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다는... 

그리고 부모들의 그런 '위에 있는' 자세가 아이들의 반발심을 자극하고, 그래서 자기네 문제를 더 이상 얘기하고 싶어 하지 않게 된다는 데 문제가 있다. 

 

다음 대화에서 아빠는 그런 실수를 피하지 못했다. 

우울한 아들에게 진부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아빠

토요일 저녁 아들이 눈에 띄게 우울한 표정으로 집안을 어슬렁거리고 있다. 

아빠: 왜 그렇게 기분이 안 좋은 거니?

아들: 아, 그냥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요. 

아빠: 나가서 바람 좀 쐬고 와라. 날도 참 좋은데. 

아들: 아니요, 밖에 나가고 싶지도 않아요. 

아빠: 그럼, 철수한테 전화해서 게임을 하자고 하렴. 

아들: 게임도 질렸어요, 그리고 철수가 오늘은 바빠요. 

아빠: 그러면 책이라도 읽어!

아들: 아, 아빠, 왜 그렇게 채근하세요. 아빠는 내 기분을 몰라요. (자기 방으로 가서 문을 잠근다.) 

적극적 듣기 방법으로 아들과 대화하는 아빠

아빠가 <적극적 듣기> 방법을 떠올린 뒤 대화는 다르게 이어졌다. 잠시 뒤 아빠가 아들 방으로 들어가서 곁에 앉는다. 

아빠 (아들 어깨에 손을 얹고): 아직도 기분이 우울하구나. 

아들: 네, 안 좋아요. 

아빠 (잠시 침묵한 뒤): 아무 것도 하고 싶지가 않은 모양이네. 

아들: 그래요, 근데 리포트를 작성해야 하는데. 

아빠: 리포트를 써야 하는구나. 

아들: 네, 월요일까지, 고대 그리스 신화에 관한 건데, 참고 서적이 없어요. 어떻게 준비하겠어요? 

아빠: 자료를 어디서 찾을 수 있는지 생각해 보렴. 

아들: 그게 문젠데, 아무 데서도… (잠시 말을 끊는다.) 아, 그래, 영철이 집에 백과사전이 있어요. 

아빠: 그래, 거기엔 다 나와 있을 거야. 

아들 (이제 활기를 띠면서): 당장 전화할래요. 

(전화해서 백과사전 얘기를 끝낸 뒤 영철이한테 말한다.) 그 다음에 나가 놀자. 

 

가만히 살펴보면, 우리가 조언하려 한 것에 아이들 스스로 이르는 경우가 참으로 많다. 사실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아이들 스스로 결정하고 해결책을 찾도록 훈련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자립성을 키우는 길이다. 부모로서는 그런 기회를 아이들에게 주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비록 그렇게 하는 것보다는 조언을 건네는 것이 더 편하고 익숙한 것이긴 해도...  

 

5. 입증, 논리적 결론, 가르치기 

"식사하기 전에 손 씻어야 한다는 것쯤은 알 때가 됐잖니."  

"자꾸 딴 데 정신 팔면 실수하게 된다."

"내가 몇 번이나 말했니. 엄마 말에 콧방귀만 뀌더니 이젠 다 네가 해결해라."

 

이런 말에 아이들은 흔히 “그만해요”, “내버려 둬”, “됐어!” 하고 응답한다. 그렇게 단적인 거부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해도, 아이들에겐 심리학에서 <의미 장벽>이나 <심리적 청각장애>라 부르는 현상이 생겨 어른의 말을 듣지 않는다. 

물웅덩이에서 철벅이는 딸아이에게 아빠가 그만하라고 하지만...

다섯 살 된 영희와 아빠가 봄날 거리를 걷고 있다. 겨우내 쌓였던 눈이 녹으면서 인도 곳곳에 물웅덩이가 생겼다. 영희는 채 녹지 않은 눈과 여기저기 물 웅덩이를 보고 좀 신이 났다. 

 

아빠: 영희야, 웅덩이에 들어가면 신발이 젖는다. 신발이 젖으면 발과 몸이 차가워지고, 몸이 차가워지면 감기 걸리기 쉬워. 봄철 도시에는 병균이 많다는 걸 알아두렴. 

영희 (아빠 말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고인 물을 또 철벅이면서): 아빠, 근데 저기 지나가는 아저씨는 왜 코가 빨개? 

 

6. 지적, 질책, 꾸지람, 타박하기 

"이게 무슨 짓이냐!"

"또 엉망으로 만들었구나!"

"이게 다 너 때문이야!"

"너한테 쓸데없이 기대를 걸었구나."

"넌 어째 늘 그 모양이냐!"

 

이런 말이 아이들을 키우고 가르치는 데 아무 소용이 없다는 점에 당신은 이미 동의할 것이다. 이런 말들은 아이한테... 적극적 방어나 대응 공격, 거부, 화를 내거나 울적해짐, 억압감, 자신에게 실망, 부모와 관계에 대한 낙담 등을 야기할 뿐이다. 이런 경우 아이의 자존감이 낮아지며, 실제로 자신이 좋은 사람이 못 되며 의지 약하고 기대에 부응도 못하며, 결국 실패자나 낙오자라고 생각하게 된다. 한데 자존감이 낮으면 새로운 문제들이 또 나타난다.  

 

어떤 부모들은 비판이 교육적으로 아주 중요하다고 확신한다. 이 때문에 가정에서 아이와 소통하는 주요 형식이 때때로 명령 섞인 지적이 되는 것이다. 

아이를 나무라고 지적하는 아빠

 

아이가 온종일 듣는 말들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일어날 시간이다."  

"얼마나 더 뒹굴고 있을래?"

"봐라, 네 셔츠가 여기 처박혀 있잖아."

 

"저녁에 미리 가방을 챙겨 두라고 했지?!"

"문을 조용히 닫아라 아기가 자고 있어."

"왜 또 강아지를 산책시키지 않았니? 고양이 밥을 안 줬니? 네가 원해서 데려왔으니까 네가 챙겨야지!"

 

"네 방 꼴이 또 이게 뭐냐!"

"물론 숙제를 아직 안 했겠지."

"네가 먹은 밥그릇은 네가 씻어야 한다고 몇 번이나 말했니."

 

"밥 먹으라는 얘기도 이제 지쳤다."

"…을 하지 않으면 나가 놀 생각도 마라."

 

"전화기에 얼마나 오래 매달려 있을 거야?"

"잠잘 시간인데 아직도 뭘 하고 있는 거니?!"

네 강아지는 네가 산보시켜야지.

이런 말들을 아이가 계속 들을 날이 며칠이나, 몇 주간이나, 몇 해나 될지 계산해 보라. 아이가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이나 느낌을 얼마나 많이 받는가! 그것도 가장 가까운 사람들 입을 통해서! 

이 부정적인 압박감에서 다소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아이는 자신이 뭔가 가치 있는 존재임을 자신과 부모에게 내보여야 한다. 그리고 그 가장 빠르고 쉬운 방법은 부모의 지적과 요구를 비판하며 저항하고 나서는 것. (한데, 이건 또 주로 부모의 소통 스타일 때문에 생긴다.) 

 

이런 상황이 가정에서 일어나면,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첫 번째 중요한 방법은... 아이의 부정적 측면만이 아니라 긍정적 측면에도 눈길 돌리려고 애쓴다. 아이를 용인하고 너무 받자하면 혹시 아이 버릇을 나쁘게 만든 건 아닐지 걱정하지 말라. 그런 생각은 자녀와 관계에서 아주 해롭다. 먼저 하루 동안 아이에게 좋은 말을 할 수 있는 긍정적인 계기를 찾아보라. 예를 들면, 

"동생을 유치원에 데려다 주고 와서 고맙구나."

"약속 시간에 맞춰 집에 오니 잘 했어."

"너랑 같이 식사 준비하는 게 난 좋단다."

 

부모가 사랑한다는 것을 아이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아이한테 긍정적인 감정을 꼭 드러내지 않아도 된다고 여기는 부모들이 간혹 있다. 이건 전혀 그렇지 않다. 

 

11세 소녀의 쓰라린 고백. 

엄마는 날 사랑하지 않아, 난 분명히 알아. 몇 번이나 확인해 봤거든. 예를 들어, 며칠 전 오빠가 엄마한테 꽃을 선사했을 때 엄마는 미소를 지었어. 어제 나도 엄마한테 꽃을 사다 드렸어, 그리고 엄마 표정을 유심히 관찰했는데, 나한테는 미소를 짓지 않았어. 이제 난 분명히 알게 됐어. 엄마가 오빠는 사랑하면서 난 사랑하지 않아.

 

아이들은 어른의 행동과 말과 표정을 그렇게 있는 그대로 해석하는 경향이 크다. 아이들은 세상을 흑백 톤으로, 무조건 예스 아니면 무조건 노로, 받아들이기 쉽다. 이런 점들을 우리가/어른들이 늘 헤아리기는 하는 걸까? 

질문 하나 더: 우리(어른들) 자신은 가장 가까운 사람한테서 늘 비판과 지적을 받으면서 잘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그에게서 좋은 말을 기대하고 그런 말이 나오기를 그리워하지는 않았나? 

 

7. 칭찬   (계속) 

(알림)  Voice Training에 관심 있는 분들은 여기를 참조해 주세요.

관련 포스트:

5과. 아이의 얘기를 귀기울여 듣는 방법 (14)

부정적 경험 맛보게 하기 (13)

4과. 아이가 원치 않을 때는? (9)

아동의 근접발달 영역 확장과 자전거 타기 (8)

3과. "우리, 함께 해 볼까?" (6)

2과. 부모의... 도움인가, 간섭인가 (4)

자녀와 소통, 어떻게? (1)

5. 카를손의 장난 (2-1)

질책과 비난 섞지 않고 자기감정 드러내기 51

자신과 타인을 판단과 평가 없이 대하기 49

루덩의 악마들 10편 5

도웰 교수의 머리 9장

수다쟁이 어린 딸

달과 아빠

돌아가신 할아버지

삶의 법칙 30 가지 (2-2)

소통에서 침묵하는 이유 5가지

 

 

  6과. 아이가 하는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하는 이유  

 

어른들의 자동적인 반응과 그 12가지 타입
부모들의 어려움
세발자전거와 이륜자전거
우리의 듣기를 훈련하자
가정에서 수행할 과제  
부모들의 질문

아이와 소통에서 적극적 듣기 방법을 적용하기가 쉽지 않다.

<적극적 듣기> 방법을 배우려는 부모들이 가장 크게 호소하는 어려움은...

정말 필요한 응답이 아니라 썩 적절하지 못한, 지금까지 익숙하게 쓰던, 대답들만 머릿속에서 뱅뱅 맴돈다는 것.

한 수업에서, 딸의 이런 불평에 어떻게 응답할지 적어 보라고 했다. 

영희는 나랑 더 이상 친하게 지내고 싶어 하지 않아요.
오늘 그 애가 다른 여자애하고 정답게 웃고 놀면서 나한테는 눈길 한 번 안 주었어요.

 

이런 대답들이 나왔다. 

– 네가 먼저 그 애들한테 다가가 보렴. 너를 받아줄지도 모르잖아. 

– 어쩌면 네가 뭔가 잘못했겠지.

– 물론 기분이 많이 나쁘겠구나. 그러나 그 애하고 노는 게 영희는 더 재미있는지도 모르지. 그 애한테 네 우정을 강요하지 않는 게 좋겠다. 다른 친구를 찾으렴. 

– 그러면 영희한테 네 새 인형을 갖고 놀자고 해보렴.

– 글쎄, 그럴 땐 어떻게 해야 하나? 그 둘에게 뭔가를 선물하렴.

– 사는 게 다 그런 거야. 너무 속상해하지 마라.  

– 너희 둘이 다투진 않았어?

– 걱정 마. 나랑 같이 놀면 되잖아. 

 

그리고... 이런 응답이 죄다 그리 적절치 못하다는 점을 알고 부모들이 깜짝 놀랐다. 

 

최근 20년 동안 심리학자들이 아주 중요한 작업을 해냈다. 부모들이 아이들을 상대하면서 주로 입에 올리는 말을 유형별로 구분한 것인데, 이런 어구가 아이의 얘기를 적극적으로 듣는 데 큰 장애가 된다. 그런 게 전부 12가 타입이나 되더라! 

부모들이 별 생각 없이, 습관적으로 내놓는 이 응답 유형을 하나하나 알아보자. 또 아이는 부모의 그런 말에서 무엇을 듣는지도 살펴본다. 


 

1. 명령, 지시 

“당장 그만해!” 

“저리 치워라!” 

“휴지통을 비워라!” 

“얼른 침대로 들어간다!”

“그런 얘긴 내가 더 이상 안 듣게 해라!” 

“입 다물어라!”

 

이런 극단적인 말을 들을 때 아이는 부모가 자기 문제를 이해하려 들지 않으며 아이의 독립성을 존중하지 않는다고 느낀다. 이런 말은 다 아이에게 (부모가 일방적이기에) 불공정하다는 느낌을, 나아가서 (아이의 문제를 그 누구한테도 호소할 수 없기에) 홀로 버려진 느낌을 유발한다. 

그리고 이에 대한 반응으로... 아이들은 대개 서운함이나 모멸감을 느끼고, 그래서 엇나가거나 대들고,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혼잣말로 꿍얼대고, (어른들 표현으로) 아망을 떤다. 

 

아이에게 옷을 입으라고 재촉하는데 아이가 거부한다.

 

엄마: 진영아, 얼른 옷 입어라 (명령), 유치원에 늦겠다!

진영: 혼자 못 입겠어, 도와줘.

엄마: 그런 생각은 하지도 마라! (지시) 벌써 몇 번이나 혼자 입었는데!

진영: 셔츠가 맘에 안 들어, 입기 싫어.

엄마: 또 새로운 핑계를 대는구나! 자, 얼른 입어라! (다시 명령)

진영: 지퍼가 안 올라가요. 

엄마: 지퍼 올리지 말고 그냥 가 봐라, 그러면 다른 애들이 다 네가 칠칠맞지 못하다고 흉볼 거야

진영 (울먹이는 목소리로): 엄마 나빠…

 

저 대화를 이런 식으로 아주 다르게 이어갈 수 있을 것이다. 

엄마: 진영아, 얼른 옷 입어야겠다. 안 그러면 유치원에 늦을 거야.

진영: 혼자 못 입겠어, 도와줘.

엄마 (잠깐 휴지): 혼자서 입을 수가 없구나. 

진영: 셔츠가 맘에 안 들어, 입기 싫어.

엄마: 셔츠가 맘에 안 드는구나.

진영: 응, 애들이 어제 계집애 같다면서 웃었어. (뜻하지 않은 정보)

엄마: 기분이 아주 안 좋았겠네. 알겠다. 그럼, 이걸 입으렴!

진영 (기분이 좋아져서): 줘요! (얼른 입는다.) 

 

이 두 번째 대화에서 ("자서 입을 수가 없구나. 셔츠가 맘에 안 드는구나"  같은) 엄마의 응답이 나오려면, 자신의 할 말(지시)에만 신경 쓸 게 아니라 아이가 하는 얘기에 귀기울이고 아이가 내보이는 반응에 진심으로 주목해야 할 것이다. 그 결과 어린 아들은 자신에게 닥친 문제를 기꺼이 끄집어내며, 그걸 엄마는 뜻밖의 정보로서 받아들일 수 있다. 

만약 대화가 첫 번째처럼 오간다면... 다음 유형의 말이 이어지게 마련이다. 

 

2. 경고, 주의, 위협 

"울음 그치지 않으면, 널 두고 갈 거야." 

"한 번만 더 그러면, 회초리를 들겠다!"

"약속 시간에 집에 안 들어오면, 어떻게 될지 두고봐라!" 

 

울음 그치지 않으면 너를 두고 갈 거야!

아이가 지금 (화나 있거나 속상하거나 두렵거나 슬프거나 토라지거나... 등등) 불쾌한 심적 상태를 겪고 있다면, 그런 아이에게 경고를 날리고 주의를 주고 위협을 가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외려 아이를 한층 더 힘겨운 상황으로 몰아넣는 것일 뿐이다. 

첫 번째 대화 끝에서 엄마가 “그러면 다른 애들이 다 네가 칠칠맞지 못하다고 흉볼 거야” 하고 은근히 위협을 가한다. 그러자 아이가 눈물 모드로 전환되어 엄마를 공격한다

이런 장면들이 익숙한가? 그 결과 당신은 한층 더 닦달하면서 또 다른 위협을 가하고 소리침으로써 반응하는 경우가 있나? 

 

위협과 경고는 그게 자주 반복되면 아이들이 거기에 익숙해져 별로 반응하지 않게 된다는 점에서 더 안 좋다. 그때 어떤 부모들은 말에서 행동으로 넘어가고, 벌도 가벼운 것에서 더 강하거나 가혹한 것으로 강도가 세진다. 그 결과 떼쓰는 어린애를 거리에 혼자 ‘남겨두거나’ 방문을 잠그거나 어른 손이 회초리나 허리띠로 간다. 

 

3. 훈계, 설교 

"넌 올바르게 행동해야 돼."

"사람은 다 열심히 노력해야 하는 법이다."  

"넌 어른들한테 공손하게 대해야 돼." 

 

훈계나 설교 같은 것에 아이들은 귀를 막는다.

이런 식의 훈계에서 아이들이 새로운 뭔가를 받아들일 일은 거의 없다. 저런 말을 골백번 들어도 아이들은 전혀 달라지지 않는다. 그보다는 외적 권위의 압력을, 때론 자책감을, 때론 따분함을 느낀다. 이런 걸 다 동시에 느끼는 것이 가장 일반적이다.  

사실, 도덕적 지침이나 올바른 행동은 어른의 말보다는 집안 분위기로써 아이들에게 심어진다. 무엇보다도 부모의 행동을 따라 하면서 그렇게 된다. 만약 가족 구성원들이 다 성실하고 거친 말을 삼가고 거짓말하지 않고 집안일을 나눠 한다면... 아이는 올바르게 행동하는 법을 알지 못할 수가 없다.  

아이가 ‘올바른 행동’을 하지 않는다면, 1) 가족 중 누군가가 그렇게 행동하지는 않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게 아니라면 필경 다른 원인이 작동할 것인데, 2) 아이가 자신의 고민이나 내적인 혼란, 정서적 고통 때문에 ‘행동 규범을 벗어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경우에서 올바른 행동과 도덕을 들먹이며 훈계나 설교처럼 말로 하는 가르침은은 외려 반발심을 키울 우려가 크다.  

 

실제 스토리

 

아홉 살 영희와 열세 살 철수, 두 아이의 부모가 2주일 동안 출장을 떠난다. 이때 엄마 여동생이, 그러니까 아이들 이모가, 열한 살 된 자기 딸 순이를 데리고 이 집에 와서 아이들을 돌본다. '예민한' 나이의 아이 셋이 한데 있다 보니 언제든 충돌이 발생할 수 있다. 철수와 영희가 출장 간 부모를 그리워하는 마당에, 사촌이 자기 엄마와 함께 나타난 것이 아이들 관계를 더 힘들게 만들게 된다. '지금 저 애한테는 엄마가 있는데 우리한텐 없어' 하는 생각에 두 아이가 사촌에게 부러움과 질투를 품고, 그래서 그 아이를 괜히 놀리고 집적거리고 싶어진다. 

셋이 자주 함께 놀면서도 툭하면 말다툼을 벌이고, 그럴 때 두 오누이가 한편이 되기에 사촌 순이가 자주 눈물을 흘린다. 순이의 엄마이자 두 아이의 이모는 어느 편도 들지 않으면서 아이들한테 공정하게 대하려 애쓴다.  

 

이모의 이런 태도도 조카들에겐 (그래도 엄마는 없기에) 그리 도움 되지 못하고, 순이가 보기엔 자기 엄마가 늘 다른 두 아이 편만 드는 것 같다. 이런 상황에서 티브이 채널 선택을 두고 세 아이가 또 한바탕 충돌한다. 이번에 철수가 사촌 여동생 얼굴을 세게 밀면서 순이가 넘어져 울음을 터뜨린다. 순이 엄마가 옆방에서 달려와 보니, 철수와 영희 오누이가 놀란 얼굴이지만 ‘싸울 태세를 갖춘 채’ 바라보고 있고, 순이가 바닥에 엎어져서 큰 소리로 울고 있다. 

철수가 사촌 누이와 티브치 채널을 두고 다투어 이모가 와서 보다.

 

이모: 왜들 그러니? 무슨 일이야?

순이: 철수 오빠가 내 얼굴을 때렸어어엉!

이모: (철수에게 화난 눈길을 돌린다) !!!

영희: 순이가 티브이를 켰는데 오빠가 다른 채널로 넘기니까 순이가 또 넘기고, 그러자 오빠가 순이를 밀었어요… 이렇게… (장면을 재연한다.)

이모 (화가 나서 철수에게): 얼굴을 세게 밀쳤다고?!

철수: 네.

이모: 사람 얼굴을 어떤 경우에도 건드리면 안 된다는 건 알아?!

철수: 알아요!

이모: 얼굴을 때리는 건 사람에게 가할 수 있는 최대의 모욕이란 걸 알아?!

철수: 알아요!

이모: 알면서도 그렇게 했구나. 일부러 그런 거야. 

철수: (도전적인 말투로) 네, 일부러 그랬어요! (그러고는 달아난다.) 

철수가 순이의 인형들을 망가뜨리다.

15분쯤 지나 순이의 울음소리가 또 새롭게 들린다.

"오빠가 나를 방에 못 들어오게 하고는 내 인형들로 뭔가를 하고 있어.“

이모가 방에 들어가 보니, 철수가 이미 없어졌다. 인형들 옷이 찢겨져 나뒹굴고 순이가 가장 아끼는 인형이 사라졌다. 순이가 울면서 ”내 인형 어디 있어? 돌려줘!“ 하고 요구하자 철수는 ”몰라, 난 건드리지 않았어“ 하고 대꾸한다.  

이모는 철수의 지나친 행동을 알리기 위해 애들 부모가 얼른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이모는 철수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다들 있는 자리에서 해명하고 사과해야 한다고 보았다.  

엄마가 철수와 적극적 듣기 방법을 이용하여 단 둘이 대화하다.

 

하지만 엄마는 철수와 따로 얘기하는 방법을 택했다. 대화가 한 시간 넘게 이어졌다. 철수가 사실대로 솔직하게 얘기했다. (인형은 순이 침대 밑에서 금방 발견됐다.) 한데 얘기를 들어 보니, 철수는 자기가 버림받은 것 같아 불행하며 ‘다들 자기를 공격한다고’ 느낀 것이었다. (알고 보니, 학교에서도 그맘때 불쾌한 일들이 있었다.) 

그리고 이틀 뒤 철수가 뜻밖에 이모한테 사과하면서 덧붙였다. "나를 못된 애라고 여기지 말아 주세요. 그냥 최근에 내 상태가 안 좋아서 그랬을 뿐이에요." 이모와 순이는 일주일을 더 묵었는데, 아이들 관계가 그 이전보다 훨씬 더 평온해졌다.

엄마와 대화 이후 철수가 이모에게 사과하고 사촌 누이와 친하게 지내다.사촌

 

이 스토리는 규칙, 허용 한계, 처벌 등에 관한 물음을 많이 제기한다.

하지만 이것을 지금 다루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 주제는 구두 권고와 훈계의 영향이니까. 비록 이모가 십대 아이에게 다른 사람 얼굴 건드리면 안 된다는 지적을 옳게 했다 하더라도, 이것이 그 아이를 ‘바로잡거나’ ‘가르치지’ 못했고, 이어지는 적대감과 보복 행위만 야기했을 뿐이다.  

이와 반대로, 아들의 얘기를 제대로 들을 줄 알았던 엄마의 노련한 대화는 신기하게도 아들을 부드럽게 만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행동 규범이나 도덕에 관해 아이들하고 얘기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일까? 그건 전혀 아니다. 하지만 이걸 아이들이 흥분한 상황이 아니라 차분한 상태에 있을 때만 해야 한다

다음 경우에서 어른들의 전형적인 표현은 불에 기름만 붓는 격이다. 

 

4. 조언, 해결책 제시            

<계속> 

(알림)  Voice Training에 관심 있는 분들은 여기를 참조해 주세요.

관련 포스트:

5과. 아이의 얘기를 귀기울여 듣는 방법 (14)

부정적 경험 맛보게 하기 (13)

4과. 아이가 원치 않을 때는? (9)

3과. "우리, 함께 해 볼까?" (6)

2과. 부모의... 도움인가, 간섭인가 (4)

1과. 조건 없는 수용이란? (2)

자녀와 소통, 어떻게? (1)

자신과 타인을 판단과 평가 없이 대하기 49

질책과 비난 섞지 않고 자기감정 드러내기 51

1부. 지붕 위에 사는 카를손 1. 카를손과 만나다

말의 비언어적 요소

엄마 말 안 듣는 아이

(47) 동어 반복

(46) 정중한 말씨

소통에서 말투의 중요성

피해야 하는 You-negative 구조

순한 사람조차 화나게 하는 말

 

 

 

(Lesson 5 계속) 

 

좀 더 긴 이야기를 사례로 든다. 여기서 엄마는 울고 있는 아이와 얘기 나누면서 자기가 듣고 본 것을 몇 번 말했다. 

 

엄마가 사업 얘기로 바쁘다. 옆방에서 다섯 살 된 딸과 열 살 된 아들이 놀고 있다. 갑자기 울음소리가 요란하게 터진다. 울음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면서 엄마가 있는 방문의 손잡이가 돌아간다. 엄마가 문을 여니, 눈물범벅이 된 딸과 그 뒤로 얼굴 찌푸린 아들이 서 있다. 

다섯 살 딸과 열 살 아들이 놀다가 동생이 울면서 엄마한테 달려오다.

딸: 아-아-아-앙!

엄마: 철수 오빠가 널 화나게 했구나… (휴지)

딸 (계속 울면서): 오빠가 날 밀었어어어!

엄마: 오빠가 널 밀어서 넘어져 다쳤구나… (휴지)

딸 (우는 건 멈추지만 여전히 화난 말투로): 아니, 나를 붙잡지 못했어. 

엄마: 네가 어디선가 뛰어내렸는데, 오빠가 너를 붙잡지 못해 네가 넘어졌구나… (휴지)

뒤에서 잘못했다는 표정으로 서 있던 철수가 그렇다는 식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딸 (이미 차분해져서): 응… 난 엄마가 필요해. (엄마 무릎에 안긴다.)

엄마가 어린 딸을 무릎에 앉히고 대화하다.

 

엄마 (잠시 뒤에): 넌 엄마랑 같이 있고 싶은데, 엄마가 없으니까 오빠한테 화를 내며 같이 놀고 싶지 않은 모양이구나. 

딸: 아니. 오빠가 방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테이프만 듣잖아. 난 재미가 없어.

철수: 좋아, 이제 가자, 네가 좋아하는 걸 틀어줄게, 가자.  

 

* * *

이 대화에는 <적극적 듣기>의 몇 가지 중요한 특성과 추가적인 대화 규칙들이 있어 살펴볼 만하다. 

 

1) 

아이 말을 경청하고 싶다면, 반드시 얼굴을 그 쪽으로 돌리라. 눈높이를 맞추는 것도 아주 중요해. 아이가 어리면, 곁에 무릎 굽혀 앉아서 아이의 손을 잡거나 혹은 무릎 쪽으로 아이를 가볍게 끌어들일 수 있다, 혹은 당신이 앉은 의자를 아이 쪽으로 가까이 옮길 수 있다. 

아이 얘기에 귀기울이려면 얼굴을 반드시 그쪽으로 돌리라.

 

다른 방에 있으면서, 얼굴을 전자레인지나 개수대로 돌리고, 티브이를 보면서, 신문을 읽으면서, 또는 안락의자에 등을 깊게 파묻고 앉거나 소파에 누워서... 아이와 소통하기를 피하라. 

아이에 대한 당신의 위치와 당신 자세는 당신이 아이 말을 얼마나 귀기울여 들을 준비가 돼 있는지에 대한 첫 번째이자 가장 강한 신호. 모든 연령의 아이들이 의식하지 못하면서도 잘 ‘읽어 내는’ 이 신호에 아주 주의해야 한다

 

아이가 얘기할 때 아이에게 눈길 돌리고 자세도 제대로 갖추라.

2) 

풀이 죽거나 화가 나 있거나 괴로워하는 아이와 대화한다면, 아이한테 질문을 던져서는 안 돼당신은 그저 확인하는 형식으로 대응하여 말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예를 들어,

아들 (우울한 얼굴로): 앞으로는 철수하고 안 놀겠어.

엄마 (아빠): 그 애한테 화가 났구나. 

 

바람직하지 못한 대응:

– 무슨 일이야? 왜 그래?

– 왜, 그 애한테 화났니?

 

부모의 첫 번째 대응 어구가 왜 더 바람직한가? 왜냐하면, 이런 식의 대응으로 부모는 아들의 ‘감정적 파도’에 함께 실려서 아들의 속상하고 화난 심정을 듣고 이해한다는 것을 금방 내보이니까 그렇다.  

 

후자의 경우... 아들은 부모가 자신과 동떨어져 있으며, 그저 외부인으로서 오로지 ‘사실’에만 관심 보이며 그것을 묻는 것이라 생각하기 쉽다.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으며 엄마나 아빠는 물음을 던지면서 아들의 상태에 전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데도, 아들이 거리감을 느끼게 된다는 데 문제가 있다. 

그럼, 왜 그런 문제가 생기나? 질문 형식의 말은 공감을 잘 반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확언하는 어구와 묻는 어구 간의 (긍정문과 의문문의) 차이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고 때로 이건 그저 미묘한 억양에 불과할 뿐인 듯싶겠지만, 그 둘에 대한 반응은 흔히 아주 다르다. 

화난 아이는 “무슨 일이야?” 하는 물음에 종종 “아무 것도 아니야!” 하고 대답하기 일쑤다. 한데 당신이 “무슨무슨 일이 일어났구나” 하고 말한다면, 아이는 그 일에 대해 얘기를 꺼내기가 더 쉽다. 

 

3) 

대화에서 ‘휴지/止/pause를 취하는 것’이 아주 중요해. 

당신의 말이 끝날 때마다 잠시 침묵하는 것이 가장 좋다. 

이 시간은 아이의 것임을 기억하라, 이 시간을 당신의 의견이나 촌평, 지적 등으로 채우지 말라. 

 

휴지를 취함으로써, 아이가 자신의 마음 상태를 규명하면서 동시에 당신이 곁에 있음을 더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아이의 대답 이후에도 잠시 침묵하는 것이 좋다. 아이가 또 뭔가를 덧붙일 수도 있으니까. 

 

당신의 말을 아이가 들을 준비가 아직 안 돼 있음을 아이의 외양으로 알 수 있다. 아이가 당신을 바라보지 않고, 다른 데를, ‘자기 내면’이나 먼데를 본다면, 당신은 계속 침묵하라. 지금 아이 내면에서는 아주 중요하고 필요한 작업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4) 

당신의 대답에서, 아이한테 일어난 일을 반복하고 다음에 아이의 감정을 표시하는 것도 유익할 때가 더러 있다. 앞의 사례에서 아빠의 대답을 두 어구로 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 

 

아들 (우울한 표정으로): 앞으론 철수하고 어울리지 않을래요. 

아빠: 그 애하고 더 이상 친하게 지내고 싶어 하지 않는구나. (들은 말의 반복)  

아들: 네, 원치 않아요. 

아빠 (휴지 뒤에): 넌 그 애한테 화가 났구나. (아들의 감정 상태를 표현).

 

우울한 아들의 얘기를 들어주는 방법

아이한테 들은 말을 반복하면 아이가 자기를 놀리는 것으로 여길지 모른다고 부모들이 우려할 수 있다. 그런 우려는 같은 뜻의 다른 단어들을 써서 피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앞의 사례에서 ‘어울리다’를 아빠는 ‘친하게 지내다’로 바꾸었다. 실제로는, 만약 당신이 같은 어구를 쓴다 해도 그러면서 아이의 마음 상태를 정확이 짐작한다면, 아이는 이상한 것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대화가 원만하게 이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응답하면서 당신이 아이한테 일어난 일이나 아이의 감정을 전혀 정확하게 짐작하지 못하는 경우도 물론 생길 수 있다. 그렇다고 당황하거나 주저하지 말라. 다음 얘기에서 아이가 당신 말을 바로잡아 줄 것이다. 그러면 아이가 바로잡는 것에 주목하고, 그걸 받아들였음을 보여주면 된다. 

 

두 아이와 사례에서 엄마는 세 번째에 가서야 딸과 아들한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짐작했다. (“네가 어디선가 뛰어내렸는데 오빠가 붙잡아주지 않았구나.”) 그다음에 딸이 금방 진정됐다. 

 

* * *

다시 강조하고 싶은 것 – 적극적 듣기 방법에 따른 대화는 우리 문화에 상당히 낯설고, 그걸 습득하기란 그리 쉽지 않다. 하지만 이 방법은 당신의 공감을 얻기만 하면 그 성과가 곧 드러날 것이다. 방법은 최소한 3가지가 있다. 이것들도 당신이 아이의 얘기를 제대로 들을 수 있는지 징표가 될 수 있다. 이런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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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포스트:

4과. 아이가 원치 않을 때는? (9)

아동의 근접발달 영역 확장과 자전거 타기 (8)

도움을 청하지 않는 한 아이 일에 끼어들지 않는다 (5)

'무조건 수용'을 가로막는 원인 (3)

1부. 지붕 위에 사는 카를손 1. 카를손과 만나다

1과. 조건 없는 수용이란? (2)

자녀와 소통, 어떻게? (1)

바람의 방향을...

사람과 물건

질책과 비난 섞지 않고 자기감정 드러내기 51

자신과 타인을 판단과 평가 없이 대하기 49

침묵의 힘 (The Power of Silence)

(47) 동어 반복

침묵의 힘, 묵언 수행 (오디오)

퍼블릭 스피킹(10) 휴지 (pause) 취하기

소통 법칙 14가지 (1. 오디오) - 호메로스, 소크라테스, 파스칼

대화에서 피해야 할 표현들

군더더기 말이 드러내는 당신 특성

기억하고 음미할 만한 경구 (1)

 

 

  Lesson 5. 아이가 하는 얘기를 잘 듣는 방법  

 

‘적극적 듣기’란 무엇이고 언제 아이의 말을 경청해야 하나? 
여러 사례
적극적 듣기의 보충 원칙들
올바른지를 아는 방법. (적극적 듣기의 결과 셋)
또 두 가지 놀라운 결과
가정에서 수행할 과제 
부모들의 질문

 

아이의 얘기를 잘 듣기

 

아이가 힘들어하는 원인이 아이의 감정 영역에 숨겨져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럴 때 그 감정 측면을 도외시한 채 뭔가를 가르치고 방법을 일러주고 방향을 제시하는 등의 행동으로는 아이를 제대로 돕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런 경우 가장 좋은 것은…

아이 말을 주의 깊게 듣기

사실 우리는/부모들은 그것과 다른 쪽에 익숙해 있다. 아이가 하는 말을 건성으로 듣는 경우가 허다하다. 

 

심리학자들이 '도와주는 듣기'라는 방법을 알아내고 그 이점을 자세히 설명했다. 이는 달리 <적극적 듣기>라고 부른다. 아이의 말을 적극적으로 듣는다는 건 무슨 뜻? 

상황을 몇 가지 접해 보자. 

 

엄마가 공원 벤치에 앉아 있는데, 세 살 된 아들이 눈물 흘리며 달려온다. 

“저 애가 내 장난감을 빼앗았어!” 

세 살 된 아들이 장난감을 빼앗기고 울면서 엄마한테 오다.

 

아들이 학교에서 돌아왔는데 화가 나서 가방을 내던지고,

그 이유를 묻는 아빠에게 “학교 안 다닐래요!” 하고 쏘아붙인다. 

아들이 학교에서 돌아와 화를 내며 책가방을 내팽개친다.

 

딸이 나가 놀려고 한다. 바깥이 추우니까 보온을 잘 해야 한다고 엄마가 털모자를 건네지만,

딸은 “그 모자는 보기 흉해” 하면서 쓰기를 거부한다. 

 

추운 날 바깥에 나가는 딸에게 모자를 주지만 보기 흉하다고 거부한다.

 

아이가 화가 나 있거나 풀 죽어 있을 때, 시험을 망쳤거나 뭔가를 실패했을 때, 아이가 마음의 상처를 입거나 부끄러워하거나 무서워할 때, 아이한테 누군가가 거칠거나 부당하게 대했을 때, 나아가서 아이가 그냥 아주 피곤할 때도...

이런 상황에서 부모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당신이 아이의 마음 상태를 (혹은 심적 경험을) 이해하고 있으며 아이가 하는 얘기에 '귀기울이고' 있다는 사실을 아이가 느끼고 알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려면 당신이 보기에 아이가 지금 무엇을 느끼며 어떤 마음 상태에 있는지를 일컫는 것이 가장 좋다고 기펜레이터 여사는 권장한다. 즉, 아이의 느낌이나 심적 체험을 ‘적절하게 이름 붙여서’ 부르는 것이 바람직하다.  

다시 간단히 말해서, 
아이에게 어떤 감정적인 문제가 있다면, 아이가 하는 얘기를 적극적으로 들어야 한다. 

아이의 얘기를 적극적으로 듣는다는 것은...
아이가 당신에게 전하고 알린 상태나 상황을 대화 중에 아이한테 ‘되돌려 주면서’
아이의 감정을 표현한다는 뜻. 달리 말해, 아이의 느낌과 감정 상태를 최대한 알아주며, 알아주고 있다고 아이한테 표시하는 것. 

  

앞의 사례들로 돌아가서 부모가 아이의 감정을 어떻게 부르는지 보자. 

 

아들: 저 애가 내 장난감을 빼앗았어!

엄마: 그래서 네가 아주 속상하고 저 애한테 화가 났구나.

 

아들: 난 이제 학교에 안 갈래!

아빠: 넌 학교 다니기를 더 이상 원치 않는구나

 

딸: 이 흉한 모자를 안 쓸래!

엄마: 넌 그 모자를 아주 싫어하는구나.

 

이 대목에서 곧장 토를 달자면, 저런 식의 응답이 당신에게는 십중팔구 이상하고 심지어 부자연스럽게 보이리라. 그보다는 이렇게 대답하는 게 훨씬 더 쉽고 익숙했을 것이다. 

 

– 괜찮아, 저 애가 좀 가지고 놀다가 돌려줄 거야…

– 학교를 안 다니겠다니, 무슨 소리야?!

– 변덕 좀 그만 부려라, 이 모자가 뭐가 어때서 그래?!

 

이런 식의 (지금까지 익숙하게 써 오던) 대응 방식이 다 괜찮아 보임에도 불구하고... 여기엔 공통된 결함이 한 가지 들어 있다. 바로, 아이를 아이가 겪은 심적 체험과 (마음 상태와) 따로 떼어 놓는 것

이 상태를 도외시한 채 조언이나 충고나 지적을 한다면, 그걸 아무리 우호적인 말투로 건넨다 해도 결국 아이의 심적 경험은 중시하지 않고 고려하지 않는다고 아이한테 알리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충분한 '역지사지'가 어렵고, 그 결과 아이한테 자기를 잘 이해한다는 느낌을 주기 어렵다. 그러면... 관계가 소원해지기 쉽다. 

 

이와 달리 <적극적 듣기> 방법에 따라 응답하는 경우, 아이의 내면 상태를 이해하며 더 자세히 들은 뒤 그 상태를 더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음을 아이가 알게 하는 것이다. 

아이의 감정 상태에 부모가 액면 고대로 공감하고 그렇다는 점을 내보일 때, 아이는 아주 특별한 인상을 받게 된다. (이 공감은 부모 자신에게도 큰 인상을 일으킨다. 이에 관해서는 잠시 뒤에 소개한다.) 

 

많은 부모들이 아이의 느낌에 차분하게 ‘공명하려고’ 처음 시도하면서 뜻밖의 결과를, 때론 놀라운 결과를 접한다고 얘기한다. 두 가지 실제 경우를 보자. 

방안이 어수선한 딸의 마음을 엄마가 알아주다

엄마가 딸아이 방에 들어와 보니 방이 아주 어수선하다.
엄마: 은총아, 아직 방을 치우지 않았니?
딸: 아, 조금 있다가 할게요, 엄마.
엄마: 지금은 치울 마음이 크지 않구나. 
딸 (갑자기 엄마 목을 껴안으며): 엄마, 내 마음을 어찌 그리 잘 알아요?!

 

일곱 살 된 소년의 아빠가 들려준 또 다른 케이스는 이렇다. 

일곱 살 소년이 아빠 손을 잡고 발길을 재촉하다.

아들과 둘이 버스를 타려고 서둘렀다. 막차여서 늦으면 절대 안 돼. 가는 길에 아들이 초콜릿을 사 달라고 했지만, 아빠가 들어주지 않았다. 그러자 마음 상한 아들이 아빠의 바쁜 길을 방해하기 시작했다. 일부러 느릿느릿 걷고 주변을 두리번거리기도 하고 심지어 무슨 핑계를 대면서 발길을 멈추기도 하더라. 아빠가 어떻게 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차 시간에 늦어서도 안 되지만, 그렇다고 어린 아들을 억지로 끌고 가고 싶지도 않았어.

이때 그가 (지금 이 대목에서 다루는) 우리의 조언을 떠올렸다. 
민영아, 초콜릿을 사주지 않아서 기분이 상했구나, 그리고 기분이 상해서 아빠한테 화도 났구.” 
그 결과 아빠가 전혀 예상도 못한 일이 일어났다.
아이가 문득 아빠 손을 다정하게 잡았고
, 둘은 정류장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물론 갈등이 언제나 그렇게 빨리 해소되지는 않는다. 때론, 엄마나 아빠가 얘기를 잘 듣고 이해할 준비가 돼 있음을 느끼고 아이가 자기한테 일어난 일을 기꺼이 계속 얘기할 때도 있다. 어른은 그저 적극적으로 듣기만 하면 된다. 

 

좀 더 긴 이야기를 사례로 든다. 여기서 엄마는 울고 있는 아이와 얘기 나누면서... <계속> 

 

관련 포스트: 

4과. 아이가 원치 않을 때는? (9)

아동의 근접발달 영역 확장과 자전거 타기 (8)

3과. "우리, 함께 해 볼까?" (6)

도움을 청하지 않는 한 아이 일에 끼어들지 않는다 (5)

'무조건 수용'을 가로막는 원인 (3)

1과. 조건 없는 수용이란? (2)

자녀와 소통, 어떻게? (1)

1부. 지붕 위에 사는 카를손 1. 카를손과 만나다

4. 카를손이 내기를 걸다 (2-1)

사람과 물건

질책과 비난 섞지 않고 자기감정 드러내기 51

관계에 고요와 평정의 공간 들이기 위해 경청을. 50

자신과 타인을 판단과 평가 없이 대하기 49

(68) Self-control

(67) 자기 기분 조율하기

목소리와 여성 이미지

소통에서 말투의 중요성

퍼블릭 스피킹(20) 경청 기법

들을 줄 안다는 것 1

당신의 경청 수준은?

 

 

(Lesson 4 계속. 규칙 3, 4) 

 

* * *

우리 레슨에서는 어른들이 아이들과 같이 해야 할 (혹은 하지 않아야 할) 일을 제시할 뿐 아니라, 또한 부모들의 자기 연마도 제시한다는 점을 독자 여러분은 이미 알아차렸을 것이다.

이제 우리가 논의할 다음 규칙은

부모들이 자신을 어떻게 추스르고 어떤 자세를 갖춰야 할지에 관한 것이다. 

 

적절한 순간에 ‘핸들을 놓아줄’ 필요성, 즉, 이제 아이가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을 아이 위해서 아이 대신에 하기를 그만둬야 한다고 이미 얘기했다. 하지만 이 규칙은 실제로 아이의 여러 일과 작업에 당신이 관여하여 지도하거나 안내하는 행위를 점차 줄이는 것과 관련된다. 이제 그 방법을 알아본다. 

 

중요한 질문 - 이것은 누가 신경 써야 하는 일인가? 물론 처음엔 부모들이 할 일인데, 시간이 흐르면? 

자기네 아이가 스스로 일어나 학교에 가고, 스스로 책상 앞에 앉아 공부하고, 날씨에 맞게 스스로 옷을 갖춰 입고, 제 시각에 잠자리에 들고, 알려주지 않아도 서클이나 트레이닝에 알아서 나가고…

이런 것을 간절히 바라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겠나? 

 

하지만 이런 일들을 많은 가정에서 여전히 부모가 신경 써서 하고 있다. 

부모의 몫으로 남아 있다. 

아침마다 아이를 깨워야 하고, 그 와중에 또 아이와 신경전을 벌이는 상황이 당신에게도 익숙한가? 

엄마는 왜 나한테 …을 (챙겨주지, 꿰매주지, 알려주지) 않았어?!” 같이 아들이나 딸이 늘어놓는 불평과 비난을 듣는 데 당신은 익숙한가? 

 

그런 일이 당신 가정에서 일어난다면, <규칙 3>에 특히 주목하라. 

규칙 3:
아이가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아이의 개인적인 일의 보살핌과 책임을 
점차 꾸준히 자신에게서 떼어내 아이한테 넘겨준다. 

 

보살핌을 점차 줄인다’는 말에 놀라지 마시라.

이건 당신의 소중한 딸이나 아들의 성장과 성숙을 가로막는 자잘한 보살핌, 끝없이 늘어질 수 있는 후견에 관한 얘기이다.

아이들의 일과 행위에 대한 책임을, 또 나중엔 자기 삶에 대한 책임을 아이들 자신에게 넘겨주는 것은 

아이에게 당신이 내보일 수 있는 최대의 보살핌이다.

이건 지혜로운 보살핌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아이가 더 강하고 더 자신감 넘치게 되고, 당신과 아이의 관계가 더 평온하고 기쁘게 된다. 

 

이 대목에서 기펜레이터 여사는 자신의 생활 경험을 털어 놓는다. 

오래 전 이야기.
대학을 막 졸업하고, 첫애가 태어났다. 어려운 시기,
 일하는 대가는 적었다. 부모가 더 많이 벌었어, 평생 일했으니까. 
한번은 나하고 대화하면서 아버지가 말하시길,
긴급한 경우 너를 물질적으로 도울 준비가 돼 있단다. 하지만 늘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면 외려 너에게 해를 끼치는 꼴일 테니까.” 

아버지의 이 말씀을 난 평생 기억했어, 그 말씀을 들으면서 나한테 생긴 감정도 늘 잊지 않았다. 이렇게 묘사할 수 있을 것이다. ‘맞아, 옳은 말씀이야. 저를 그렇게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살아남도록 애쓰고, 잘 해낼 거예요.’ 

한데 이제 되돌아보면 나는 아버지가 뭔가 더 큰 것을 말하셨다고 깨닫는다.
넌 네 힘으로 설 만큼 충분히 강해졌다, 이제 스스로 나아가라, 너한테 나는 더 이상 필요치 않구나.”
아주 다른 말로 표현된,
아버지의 이 믿음이 나중에 많은 어려운 상황에서 나에게 큰 도움이 됐다

 

아이의 일에 대한 책임을 아이 자신에게 넘기는 과정이 그리 간단치는 않다. 사소한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러나 이 사소한 것들조차도 부모 입장에서는 크게 걱정될 수 있다. 이해가 된다.

사실 자기 아이의 한시적 안녕이 위험해질 수도 있지 않은가.

이런 반박이 가능하다. 

 

어떻게 잠을 깨우지 않을 수 있겠어? 분명히 늦잠을 잘 테고, 그러면 학교에 가서 큰일이 날 텐데?” 

혹은 

억지로라도 공부하게 하지 않으면, ‘낙제 점수를 받을 텐데!” 

 

여기서... 좀 역설처럼 들릴지 몰라도...

그러나 당신 아이에겐 부정적 경험이 필요하다.

물론, 그런 경험이 아이의 생명이나 건강을 위협하지 않는다면, 그렇다. (이 부분을 9과에서 더 자세히 다룬다.) 

이 진리를 <규칙 4>로 적을 수 있다.

규칙 4:
당신의 자녀가 자기 행위의 (혹은 무행위의) 부정적 후과를 맛보도록 하라. 
그래야만 아이가 성숙하고 ‘의식 있는 사람’이 될 것이다. 

 

우리의 <규칙 4>는 ‘실수하면서 배운다’는 속담과 같은 말이다.

부모들은 용기를 내서 아이들이 실수하도록 의식적으로 판을 꾸밀 필요도 있겠다. 실수를 통해 아이가 안목을 키우고 자립적인 사람이 되는 걸 배우도록. 

 

가정에서 수행할 과제 

 

과제 1

당신이 보기에 아이가 스스로 할 수 있고 해야 할 어떤 일들을 두고 아이와 마찰이 있는지, 살펴보라. 그 가운데 한 가지를 골라서 한동안은 아이와 함께 하라. 

당신과 함께 할 때 아이가 더 잘 했는지 보라. 그렇다면, 다음 과제로 넘어가라. 

 

과제 2 

아이의 어떤 일에서 당신의 개입을 (당신의 지시나 알림의 말을) 대신할 수 있을 외적 수단을 궁리하라. 자명종, 서면 규칙이나 약속, 알림 그림, 도표 등이 가능하다. 

이 보조 수단을 아이와 함께 의논하고 다듬으라. 

아이가 이 외적 수단을 잘 이용할 수 있는지 확인하라. 

 

과제 3 

종이를 수직으로 반으로 접으라. 왼쪽에 <스스로>, 오른쪽에 <엄마와 함께>라고 적으라. 왼쪽에 아이가 스스로 결정하고 수행하는 일들을, 오른쪽에는 대개 당신이 관여하는 일들을 적으라. (도표를 아이와 함께 합의하여 채우면 좋다.) 

그 다음에 <함께> 목록에서 지금이나 머지않아 <스스로> 목록으로 옮길 수 있는 게 무엇인지 보라. 

그런 이동 하나하나가 아이의 성장에 중요한 단계임을 알아두라. 이 이동이 곧 아이의 성장이고 성공인데, 이 성공을 꼭 주목하라. 그런 도표의 사례를 소개한다. 

 

엄마와 11세 딸이 함께 작성한 <스스로 – 함께> 도표의 사례

아이가 스스로 할 일과 엄마와 같이 할 일 목록

자녀가 많은 가정에 딸이 있다면, 그 아이는 이미 상당히 자립적인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여전히 엄마의 참여를 필요로 하는 일은 있게 마련이다. 오른쪽의 1번에서 4번 항목이 곧 왼쪽으로 옮겨지기를 기대한다. 그것들은 이미 절반은 가 있는 셈이다. 

 

부모들의 질문  

 

문: 내 노력에도 불구하고 효과가 전혀 없다면? 아이가 이전처럼 아무것도 원치 않고 하지 않으며 부모한테 대들고, 그런 걸 부모가 견디지 못한다면? 

 

답: 그런 힘겨운 상황에 대해 우리는 앞으로 많이 얘기 나눌 것이다. 우선은 한 가지만 말하고 싶다.

부디 참을성 있게 대하세요!” 

만약 우리가 정리한 <규칙>들을 기억하고 가정에서 할 과제를 수행하면서 실천하려고 정말 애쓴다면, 반드시 성과를 거두게 된다. 하지만 그리 빨리 거두지 못할 수도 있다. 때론 며칠, 몇 주일, 때론 몇 달이 걸리기도 한다. 사안에 따라 심지어 한두 해가 걸릴지도 모른다. 당신이 뿌린 어떤 씨앗은 결실을 맺으려면 땅속에 더 오래 있어야 한다. 물론 그동안에도 희망을 잃지 않고 땅을 계속 일궈야 하겠지. 단, 씨앗들의 성장 과정은 이미 시작됐음을 기억하시라

 

아이와 소통에서는 참을성이 중요해

 

문: 과연 아이의 일을 늘 도울 필요가 있을까? 내 경험상, 때론 누군가가 그저 곁에 앉아서 귀를 기울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안다. 

 

답: 전적으로 옳은 말씀! 사람은 다, 더욱이 아이는, 일이나 작업에서 도움뿐 아니라 말의 도움도 필요로 한다. 심지어 침묵이 도움 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제 우리는 바로 그 <듣고 이해하는 기법>으로 넘어갈 것이다.   (Lesson 4 끝) 

(알림)  Voice Training에 관심 있는 분들은 여기를 참조해 주세요.

관련 포스트: 

4과. 아이가 원치 않을 때는? (9)

아동의 근접발달 영역 확장과 자전거 타기 (8)

규칙 2를 지키지 않을 때 어떤 현상이? (7)

3과. "우리, 함께 해 볼까?" (6)

도움을 청하지 않는 한 아이 일에 끼어들지 않는다 (5)

부모의... 도움인가, 간섭인가 (4)

'무조건 수용'을 가로막는 원인 (3)

1과. 조건 없는 수용이란? (2)

자녀와 소통, 어떻게? (1)

1부. 지붕 위에 사는 카를손 1. 카를손과 만나다

8. 카를손이 생일에 오다

질책과 비난 섞지 않고 자기감정 드러내기 51

사람과 물건

자신과 타인을 판단과 평가 없이 대하기 49

유념해야 할 일상 메타 표현

소통 법칙 14가지 (1. 오디오) - 호메로스, 소크라테스, 파스칼

15. 당신은 당신 세계 안에 있다

우리가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과학 실험 3가지

유머, 금언, 경구 몇 가지

 

(lesson 4 계속) 

 

<사랑으로?> 혹은 <돈으로?> 

 

이를테면 책 읽기나 숙제하기, 집안일 돕기 등 아이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려 들지 않을 때, 어떤 부모들은 돈으로 해결하려고 든다. 자기네가 원하는 걸 자녀가 하면, 돈을 주거나 자녀가 원하는 물건을 사주기로 한다.

한데 이런 방법은 효과가 작을 뿐 아니라 자칫 아주 위험할 수도 있다. 이런 거래(?)는 대개 아이의 요구가 커지는 것으로 끝나 버리기 십상이다. 달리 말해, 아이는 갈수록 더 많은 것을 요구하게 되는데, 정작 아이 행동에서 약속한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왜냐고? 그 원인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아주 섬세한 심리 메커니즘을 알 필요가 있다. 이건 불과 얼마 전 심리학자들이 특별히 연구한 대상이었다. 

공부나 집안일 등 해야 할 일을 하면 돈을 주거나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해

한 실험에서 어떤 퍼즐 게임에 열심히 참여하는 대학생들에게 일정 금액을 대가로 지불했다.

그러자 이 학생들의 게임 참여도가 돈을 받지 않는 다른 학생들에 비해 금방 현저히 낮아지게 됐다. 

여기서 드러난 메커니즘은 이런 것이다.

사람은 스스로 선택한 것을 내적 자극과 동기에 의해 더 잘 하고 더 열심히 하더라.

만약 그 일 때문에 보수를 받거나 보상받음을 알게 되면, 그 열정이 저하되고 활동 성격이 완전히 달라진다. 즉, 그는 이제 ‘개인적인 창의’가 아니라 ‘돈벌이’에 매달리게 되는 것이다. 

 

보상을 기대하면서 ‘주문에 따라’ 하는 작업이

창의에 얼마나 치명적인지,

창의적 활동과 거리가 얼마나 먼지를

많은 학자와 작가, 예술가들이 잘 알고 있다.

모차르트의 <레퀴엠>이나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같은 걸작이 나오려면, 외부의 주문이나 보상이 아니라 개인의 힘과 창의적 천재성이 필요한 것이다. 

 

지금 이 주제는 많은 진지한 생각으로 이어지는데, 무엇보다도...

나중에 시험에서 답하기 위해 뭔가를 배워야 하는 학교 시스템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게 된다.

그런 시스템이 아이들의 자연스러운 호기심을 꺾거나 새로운 탐구에 대한 흥미를 죽이는 것은 아닐까?

(*이건 이미 20년쯤 전 앨빈 토플러 선생이 '한국의 학생들은 미래에 불필요한 지식과 있지도 않을 직업을 위해 하루 열다섯 시간씩 학교와 학원에서 시간을 허비한다'고 한 지적과 같은 맥락이겠다.) 

 

하지만 그건 별개의 주제이고, 지금 여기서는

아이들한테 외적 동기나 인센티브를 제시할 때 극히 조심해야 한다는 점만 확실히 해두자. 그런 것이, 아이들에게 본래 내재돼 있지만 그리 단단하지는 못한 활동성과 적극성을 파괴함으로써, 외려 역효과를 내기 쉬우니까 그렇다.

 

중3 사내애의 엄마가 심리 상담에서 고충을 털어놓았는데, 그건 익히 알려진 문제들이었다. 아들 병수가 학교 수업에 ‘끌리지 못하고’ 공부를 안 하고 책들에도 흥미가 없고 틈만 나면 집에서 빠져나갈 궁리만 한다는 것. 엄마는 당연히 아들 걱정에 마음 편할 날이 없다. 얘가 어떻게 되려고 이러나?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까? 

한데 병수는 건강하고 잘 웃는 아이, 자신에게 웬만큼 만족하며 낙천적인 성격이다.

학교에서 생기는 불쾌한 일들은? 괜찮아, 어떻게든 잘 될 거야. 인생은 대체로 멋진 편이야. 근데 엄마만 내 존재를 괴롭혀. 

 

부모들의 지나친 교육열과 아이들의 유아적 성향의 (즉, 아직 미성숙함의) 결합은 아주 전형적이고 완전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왜?

여기 메커니즘은 간단해서, 이런 심리 법칙에 기초한다. 

아이의 인성과 개성은
자신의 갈망에 따라 흥미를 갖고 하는 활동에서만 발달한다.

 

“말을 물가로 끌고 갈 수는 있지만, 억지로 물을 먹일 수는 없다.”

이는 크나큰 지혜를 담은 속담이다. 아이를 기계적으로 억지로 공부하게 할 수는 있겠지만, 그렇게 공부한 것이 아이 머릿속에서 신선한 뭔가를 싹 틔우고 꽃 피울 리는 만무하다. 게다가 공부하라는 부모의 요구가 더 강할수록, 흥미 느끼고 필요하다고 여기던 과목조차 덜 좋아하게 될 것이 빤하다. 

말을 물가로 끌고 갈 수는 있지만, 억지로 물을 먹일 수는 없다

 

* * *

어떻게 해야 하나? 강요하는 상황과 충돌을 어떻게 피하나? 

먼저 자녀가 무엇을 가장 좋아하는지, 무엇에 가장 끌리는지 살펴봐야 한다.

인형 놀이, 장난감 자동차, 동무들과 어울림, 조립 완구 수집, 공차기, 현대 음악 등…

이 가운데 어떤 것들은 부모가 보기에 쓸모없는 짓이나 심지어 해로운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어른에게 그렇게 보이는 것이 아이한테는 중요하고 흥미로울 수 있다는 점을 우리가/어른들이 명심해야 한다. 나아가 그것을 존중할 필요가 있다

아이가 좋아하는 것을 존중할 필요가 있다.
이런 경우 당신의 보트는 물살을 따라 순항할 것이다.

 

만약 아이가 어떤 일이 자기한테 왜 흥미롭고 중요한지를 당신한테 얘기하고 또 당신은 그 일을 아이의 눈으로 보면서 (아이한테 별 영양가 없는) 평가와 조언을 피할 수 있다면... 그러면 좋다. 

 

만약 아이의 그런 일에 당신이 함께 참여하고 아이의 몰입과 열정을 같이 할 수 있다면... 정말 좋아. 그런 경우 아이들은 부모에게 고마움을 크게 느낀다. 또 그렇게 하다 보면 다른 종류의 성과도 거두게 될 텐데... 즉, 아이의 흥미가 생기고 관심이 커지는 것을 보면서, 당신이 유익하다고 여기는 것을 더 쉽게 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새로운 지식이나 인생 경험, 사물에 대한 당신의 시각 같은 것을. 특히 아이의 흥미를 돋우는 책으로 시작한다면 책 읽기에 대한 열의도 어렵지 않게 키우게 될 것이다. 

 

한 아빠의 경험담을 예로 들어보자. 

그는 아들 방에서 나는 음악 소리가 하도 크고 시끄러워서 처음 한동안은 아주 힘들었다. 그러다가 묘안을 냈다. 

아들이 크게 틀어 놓는 음악 소리에 아버지가 애를 먹다

 

영어 실력이 충분치는 못해도 일단 팝송의 가사를 적고 뜻을 알아보라고 아들에게 제시한 것.

결과는 놀라웠다.

음악이 더 조용해지고, 아들은 영어에 관심을 보이다가 열정까지 품게 됐다. 나중에 아이는 외국어대학을 마치고 전문 번역사가 됐다. 

음악을 크게 틀어 놓는 아들에게 아버지가 묘안을 제시하다.

 

가끔 부모들이 직관적으로 찾아내는, 그런 성공 전략은 품종 사과나무가지를 야생 사과나무에 접목하는 방법을 연상시킨다. 야생 사과나무는 생명력이 크고 서리에도 강해서 접목된 가지가 그 생명력을 받으면 훌륭한 나무가 자란다. 땅속에 있는 인공 묘목 자체는 살아남지 못한다. 

 

부모나 교사들이 아이들에게 제공하는, 거기다가 요구와 꾸중을 곁들여서 건네는, 많은 작업이나 활동이 그렇다. 즉, 살아남지 못한다. 동시에 그것들은 기존의 열정이나 몰입에 잘 ‘접목된다.’ 이런 열정이 처음엔 ‘조잡한 것’이라 해도 괜찮아. 거기엔 생명력이 있고, 그 힘은 ‘문화적 품종’의 성장과 개화를 충분히 촉진할 수 있다. 

 

여기서 나는 부모들의 반박을 예견한다.

"관심이나 흥미 하나만 좇아서는 안 돼! 규율이 필요하고 책임도 있어야 하며, 거기엔 재미없는 책임도 있는 법이야!" 

그런 의견에 난 동의하지 않을 수 없어.

규율과 책임에 대해서 우리는 나중에 더 자세히 다룰 것이다. 지금은 우리가 강요와 이에 따른 충돌에 관해 얘기하고 있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즉, 자녀가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하도록 주장하고 심지어 요구하게 되고, 이 때문에 부모와 자녀 양쪽의 기분이 다 상하는 상황에 관해 얘기하고 있다. 

 

부모의 요구 때문에 기분 상한 딸아이

* * *

우리 레슨에서는 부모가 아이들과 같이 할 만한 (혹은 하지 않아야 할) 것을 제시할 뿐 아니라, 또한 부모들이 자신을 갈고 닦아야 하는 것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을 당신은 이미 알아차렸을 것이다.  <계속>  

(알림)  Voice Training에 관심 있는 분들은 여기를 참조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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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와 여성 에너지

자장가 (a lullaby)

변성기 아이들

여성의 속삭임

루덩의 악마들 3-3편 1

목소리에서 가장 중요한 것

 

(4과 계속) 

 

아이한테 협력하고 아이와 공조하려 할 때 아주 종종 발생하는 갈등의 원인을 하나 더 살펴본다. 

부모가 가르치고 얼마든 도울 준비가 돼 있으며 자기네 말투도 조심스레 살피는데... 즉, 화내지 않고 고압적으로 접근하지 않고 나무라지 않으려고 조심하는데도 일이 잘 안 되는 경우가 있다. 

 

이런 현상은 주로 아이를 지나치게 배하고 과잉 보호하는 부모들한테서 생긴다. 그들은 아이가 원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아이한테 원하고 아이한테 해주려 한다

 

언젠가 우연히 접한 장면 하나. 겨울방학 때 스키장에서 있었던 일. 

많은 스키어들이 슬로프를 따라 신나게 질주하고 있었다. 그런데 슬로프 중간쯤에 세 사람이 멈춰 서서 뭔가 옥신각신하는 듯했다. 알고 보니 엄마와 아빠, 열 살 된 딸이었다. 딸아이는 당시에는 보기 드문 고급 스키를 신고 아주 값비싼 새 스키복을 갖춰 입었다. 난 가까이에 있다가 우연히 이런 대화를 듣게 됐다. 

 

스키장에 엄마 아빠와 딸 세 식구

 

– 영미야, 저 아래까지 조금만 더 내려가 보자. - 아빠가 하는 말. 

– 안 할래 – 딸아이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 어렵지 않아. - 엄마가 끼어들었어. - 스틱을 조금만 지치면 돼. 봐라, 아빠가 시범을 보일 거야. (아빠가 시범을 보였다.) 

– 싫어, 안 한다고 했잖아! 스키 타고 싶지 않아. - 딸이 쏘아붙이고는 몸을 홱 돌렸다. 

– 영미야, 우린 정말 많이 애썼다. 너한테 스키를 가르치려고 일부러 멀리 여기까지 왔어, 티켓도 비싸게 주고. 

– 그거야 엄마, 아빠가 좋아서 그런 거지! 내가 원해서 내가 부탁한 게 아니잖아! 

 

그들 대화를 들으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저런 멋진 스키를 신고 리프트로 꼭대기에 올랐다가 하얀 눈밭을 달려 내려오고 싶어 한단 말이냐, 단지 부모의 경제적 여력이 안 돼서 못하는 것일 뿐이지. 한데 이 잘 차려입은 소녀한테는 다 있어. 하지만 이 아이는 황금 새장의 새처럼 아무것도 원치 않는 것이다. 엄마와 아빠가 아이의 갈망보다 더 앞서 나아갈 때는 아이한테 있던 의욕마저 꺾이기 쉽다.  

 

이와 비슷한 일이 학습에서도 더러 일어난다. 

15세 소녀의 아버지가 심리 상담을 청했다.

 

딸은 집에서 아무것도 안 해. 자잘한 심부름도 하지 않고, 자기가 먹은 그릇을 닦지도 않고, 제 속옷도 빨지 않고 물에 담근 채 이삼 일이나 놔둔다. 그런 걸 부모는 다 용납하고 심지어 면제할 용의가 있었다. 아이가 공부에 전념하기만 한다면! 하지만 아이는 공부에도 별 뜻이 없어. 학교에서 오면 소파에 누워 빈둥거리거나 전화기에 매달려 있다. 

 

아이가 공부에만 전념한다면 다른 일은 다 눈감아 줄 수도 있다는 부모

 

학교 성적은 대부분 과목이 5점 만점에 3점이나 2점. 고등학교에 갈 수나 있을지 부모는 걱정이 태산이다. 졸업시험 생각하기가 겁나. 엄마는 일 때문에 하루 걸러 집에 들어온다. 요 근래에 엄마는 딸의 공부만 생각해. 아빠가 직장에서 아내에게 전화해 묻는다. 

초롱이가 공부하고 있나? 

아니요, 책상 앞에 앉지도 않았어. 

아빠는 퇴근해 집으로 오는 지하철에서 딸아이의 교재를 훑어보고, 그렇게 ‘다 무장한 채’ 집에 들어선다. 그러나 아이를 금방 책상 앞에 앉히기도 쉽지 않다. 질질 끌다가 결국 9시나 되어서야 초롱이가 오늘 해야 할 숙제를 선심 쓰듯이 펼친다. 필요한 대목을 아빠가 열심히 설명해 보지만, 딸아이는 "그래도 모르겠어" 하고 딴청을 피운다. 딸아이의 딴청과 아빠의 설득이 오가다가 10분쯤 지나면 공부가 아예 다 끝나고 만다. 딸아이가 교재를 한쪽으로 내던지고 때론 히스테리까지 부린다. 부모는 이제 가정교사를 들여야 하지 않나 생각한다.

 

초롱이 부모의 실수는...

열심히 공부하기를 딸아이 자신이 원하는 게 아니라, 아이 대신 그들이 원한다는 데 있다

 

이런 경우에 늘 떠오르는 일화가 하나 있다. 

 

기타에 늦을까봐 짐을 들고 플랫폼을 따라 달리는 사람들

 

기차역에서 일단의 사람들이 가방을 들고 아이 손을 잡고 플랫폼을 따라 마구 달린다.

렇지 않으면 기차를 타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더욱 열심히 달린 끝에 마지막 차량을 간신히 따라잡는다.

가방이며 짐들을 기차에 던져 올리고 발판에 뛰어오른다.

드디어 기차가 속력을 낸다. 

플랫폼에 남은 사람들이 녹초가 된 채 트렁크에 주저앉아 크게 웃음을 터뜨린다. 

 

- 뭐가 그리 우스운가요? - 주변 사람들이 그들에게 묻는다. 

- 우리를 배웅 나온 이들이 떠났거든요! 

기차가 떠난 뒤 플랫폼에 남은 사람들

 

아이를 위해 수업을 준비하거나 아이와 함께 대학에, 영어학교에, 수학학교에, 음악학교에 '입학하는' 부모들은 이 일화에서 배웅 나온 이들과 아주 비슷하지 않은가? 많은 이들이 동의할 것이다.

상황과 분위기에 고조되고 감정적으로 달아오른 상태에서 그들은 자기네가 아니라 자녀가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

그리고 당사자는 ‘플랫폼에 그냥 남아 있는’ 경우가 아주 흔하다. 

 

초롱이 경우도 그랬다. 그 아이의 삶을 다음 3년 동안 어찌어찌 추적해 본 결과, 고등학교를 겨우 졸업하고 흥미도 없는 기술대학에 들어갔지만 1학년을 마치지 못하고 학교를 그만두고 말았다.

 

아이한테 지나치게 많은 것을 원하는 부모들은

대개 그들 자체가 힘들게 산다.

그들에겐 자신의 관심에 쏟을 시간도 힘도 남지 않고, 개인 생활도 없게 된다.

부모의 의무를 다 하려는 열의와 노력과 고단함은 이해되는데, 그래봤자 결국 물살을 거슬러서 배를 끌고 가는 셈이 아닌가! 

이게 아이한테 무슨 의미가 있나? 

물살을 거슬러 노를 저어 봤자 힘만 들 뿐.

기펜레이터 여사가 소개하는 사례 하나. 

14세 소녀의 엄마. 이 엄마는 목소리 크고 활기찬 여인. 그에 반해 딸은 맥없고 무심하고 그 무엇에도 흥미가 없어. 아무것도 안 해, 어디도 안 가, 누구하고 사귀지도 않아.

사실 소녀는 아주 온순한 편이었다. 이런 면에서는 딸에 대한 불만이 전혀 없었다.

그 딸과 단둘이 있을 때 내가 물었다. 

- 만약 요술지팡이가 있다면, 무엇을 부탁하겠니? 

소녀가 한참 생각하더니, 나직한 목소리로 우물우물 대답했다.

- 부모가 나에게 원하는 대로 사는 게 아니라, 내가 원하는 대로 살게 해 달라고...

 

아이 자신의 꿈과 갈망을 무시하고 부모 뜻대로만 하면...

 

이 대답에 난 깜짝 놀랐다. 아이 자신의 꿈과 갈망의 에너지를 부모가 아이한테서 얼마나 많이 빼앗았단 말인가! 그러나 이건 극단적인 경우이다. 더 많은 경우에 아이들은 자기한테 필요한 것을 바라고 얻을 권리를 위해 싸운다. 부모가 (그들 보기에) ‘올바른 일’을 주장하고 고집한다면, 아이는 같은 고집으로 ‘올바르지 않은’ 것을 하기 시작한다. 

이때 그게 뭔지는 안 중요해, 단지 그게 자신의 것이기만 하면 된다. 자신의 생각, 자신의 방식, 자신의 꿈, 자신의 소망... 한마디로, 부모가 원하고 이끄는 삶이 아니라 자신이 계획하고 가꾸는 삶을 살 수만 있다면, 설령 지옥에 떨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이런 모습은 특히 틴에이저들한테서 자주 볼 수 있는데, 여기서 우리는 모순을 발견한다. 즉, 부모들이 자기네 입장에서는(!) 아이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데, 그것이 외려 아이로 하여금 진지한 일에서 멀어지게 만들고 자기 일에 대한 책임감을 약화시키는 것이다! (왜냐하면... 동어 반복이 되겠지만, 자신의 삶이라는 인식이 약해지기 때문에.)   

 

  <사랑으로?> 혹은 <돈으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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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과. “아이가 원치 않으면?”  

 

할 수 있는데도 하지 않아
말투와 고압적인 지시
동등하게. 외적 수단들. 누가 기차에 탈까? 
물살 거스르는 보트. 충돌 피하려면? 
규칙 3: 아이들에게 책임을 전달하기. 부모들의 우려
규칙 4: 아이들이 실수를 경험하게 한다
가정에서 수행할 과제 
부모들의 질문.

 

부모와 자녀가 같이 하는 작업은 한 단원에서 따로 다룰 만큼 중요한 주제이다. 

상호 접촉의 어려움과 갈등, 또 그것을 피하는 방법에 관해 먼저 얘기하자. 

 

어른들을 궁지에 몰아넣는, 전형적인 문제들로 시작하자. 

스스로 해야 할 많은 일을 아이가 완전히 습득했다. 그래서 흩어진 장난감들을 상자에 모아 넣거나 자기 잠자리를 정리하거나 전날 저녁에 교과서 등속을 가방에 챙기기 등을 아이는 이미 혼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다. 그런데도 그런 걸 한사코 하지 않으려고 한다!

장난감을 정리하거나 책가방 챙기기를 스스로 할 수 있는데도 아이가 한사코 하려 들지 않는다.

 

그런 경우에 어떻게 하지? 그런 것도 부모가 거들어줘야 하나?” 하고 부모들이 묻는다.

아닐 수도 있고, 그럴 수도 있다. 

 

아이가 ‘부모 말을 듣지 않는’ 원인이 무엇인지가 중요하다. 어쩌면 당신은 아이와 함께 해야 할 길을 아직 다 지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당신 혼자서만 아이가 장난감을 스스로 정리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은 아닌가. 만약 그런 일을 아이가 “함께 하자”고 청한다면, 그건 괜한 것이 아니다. 어쩌면 아이는 아직 자신을 조직하기가 어려울지도 몰라, 혹은 어쩌면 아이가 그저 당신의 참여와 심리적 지지를 필요로 하는 것일지도. 

아이를 심리적으로 지지할 필요가 있다.
아이에 대한 부모의 심리적 지지는 아이의 일에 관여할 때처럼 말로 전달된다.

 

자전거 타기 학습 때 이런 어구가 있었음을 우리는 기억한다.

‘핸들과 안장에서 이미 손을 다 떼고 난 뒤에도 어느 기간 동안 당신은 자전거를 타는 아이 곁에서 함께 뛰어간다.’

바로 이것이 아이에게 힘을 주는 것!

당신이 곁에 있음을 아이는 든든하게 여기는 것!

그리고 이 심리적 지지 역시 말로써 전달된다.  

 

그러나 부정적인 고집과 거부의 뿌리는 부정적인 심적 경험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더 많다. 이건 아이 자신의 문제일 수 있지만, 그보다는 당신과 아이 사이에서, 아이와 당신의 상호관계에서 생기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한 소녀가 심리학자와 상담하는 중에 이런 심정을 털어놓았다.

“난 내가 먹은 그릇과 접시를 군말없이 닦을 준비가 돼 있어요. 근데 그렇게 하면 부모는 자기네 말이 나한테 먹혀들었다고 여겨요. 그래서 그냥 하고 싶지 않게 되지요.”

이건... 마당 쓸려고 빗자루 들었는데 누가 "마당 좀 쓸어라" 하면 들었던 빗자루 내던지는 것과 같은 심리이다. 

설거지할 준비가 돼 있는데 설거지하라는 말을 들으면 그냥 그만두게 된다.
난 내가 먹은 그릇과 접시를 닦을 준비가 돼 있어요. 근데 그렇게 하면 부모는 자기네가 이겼다고 여겨요

만에 하나 자녀와 관계가 이미 오래 전에 망가졌다면, 어떤 방법을 적용하는 것으로 충분하고 모든 게 한순간에 잘 될 것이라는 식으로 생각하지 말라. 이른바 ‘방법’이라는 것들을 물론 적용해야 한다. 그러나...

말투가 다정하고 따스하지 못하다면 그런 방법들을 아무리 동원해도 관계가 정상으로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사람과의 관계를 좋게 하려 할 때는 말투가, 어조가, 억양이, 말의 톤이 가장 중요하다. 만약 아이가 하는 일에 당신이 관여하여 아이한테 도움 되지 않는다면, 심지어 당신 도움을 아이가 거부한다면, 그런 걸 다 그만두고 먼저 당신이 아이와 어떻게 소통하는지 세심하게 살펴볼 일이다. 

 

여덟 살 된 소녀의 엄마가 하는 이야기. 

딸이 피아노를 잘 치게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피아노를 사고 레슨 교사를 고용했어요. 나도 어렸을 때 배우다가 그만뒀는데, 지금은 후회가 돼요. 딸이라도 피아노를 잘 치면 좋겠다고 생각하거든요. 레슨 시간 외에도 딸과 함께 매일 두 시간씩 피아노 앞에 앉아요.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아이와의 관계며 학습 상황이 자꾸 나빠지지 뭐에요! 아이가 건반 두드리는 것이 내 마음에 들지 않아 한마디 하면, 아이는 금방 입이 댓발로 나와서 변덕을 부려요. 나와 딸의 생각과 주장이 매번 달라서 결국엔 “나가요, 엄마가 없는 게 더 좋아!” 하는 말로 끝나곤 하지요. 

피아노 연습을 두고 엄마와 딸아이가 매번 마찰을 빚는다.

한데 내가 자리를 비우면 딸애가 손 모양이나 손가락 놀림을 제대로 할 리가 없다는 건 분명해요. 그것뿐 아니라 연습도 후루룩 끝내고는 "오늘 할 건 다 했어요" 하기 일쑤거든요. 

 

이 엄마의 염려를 알 만하고 엄마의 의도도 참 좋다.

더욱이 엄마는 어려운 일에서 딸을 도우려고 애쓴다.

그러나 이 엄마는 아이의 일을 도울 때 가장 중요한 요소를 하나 간과했다. 이

게 없이는 도움마저도 아이한테는 외려 방해나 간섭으로 바뀌게 되는 중요한 조건을 하나 놓쳤다. 바로...

소통의 우호적인 톤, 부드러운 말투, 따스한 어조... 

피아노 연습하는 딸에게 엄마가 다정하고 부드러운 어조로 말한다.

 

이런 상황을 상상해 보자. 친구가 당신과 함께 뭔가를 하러 왔다.

예를 들어 티브이가 고장나서 고치러 왔다고 치자. 그가 앉아서 당신에게 이른다.

"자, 매뉴얼을 꺼내라. 이제 드라이버로 뒷면을 뜯어내. 넌 나사를 어떻게 그렇게 돌리나? 그렇게 억지로 누르지 말란 말이야!" 등등. 

이런 상황이라면 일은 당연히 중동무이되기 마련이다. 

 

그런 ‘공동 작업’을 영국 작가 제롬(Jerome Klapka Jerome)이 1인칭으로 유머 섞어 묘사했다. 

난 누군가가 끙끙대며 고생하는 것을 가만히 앉아서 보고만 있을 수 없다오.
그가 하는 일에 끼어들고 싶어지지. 대개는 일어나서 주머니에 두 손을 찌르고 방안을 오가게 된다오.
그러면서 작업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지적하기 시작하는 거야
.
나에겐 그런 활달
한 기질이 있다오.

 

* * *

고압적이거나 훈계조의 지시’도 어디선가는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자녀와 함께 하는 일에서는 결코 아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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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목소리 높여 말하기

(47) 동어 반복

소통에서 말투의 중요성

피해야 하는 You-negative 구조

순한 사람조차 화나게 하는 말

 

 

보다시피, <규칙 2>는 아이가 어렵게 여기는 일을 어떻게 도와야 하는지 설명한다. 

다음 사례는 이 규칙의 보충 사항들이 뜻하는 바를 더 세세하게 보여준다. 

 

* * * 

많은 부모가 아이에게 자전거 타는 법을 가르쳐 봤을 것이다.

대개는 아이가 안장에 앉은 뒤 균형 잃어 자전거와 함께 넘어지지 않게 버티는 것부터 시작된다. 당신은 한 손으로 핸들을 쥐고 다른 손으로 안장을 잡고 자전거가 똑바로 서게 한다. 

이 단계에서는 거의 모든 것을 당신이 직접 한다. 당신이 자전거를 끌고 아이는 그저 서툴고 조급하게 페달을 돌리려고 할 뿐. 하지만 얼마 지나서 아이 스스로 핸들을 조작하는 것을 보게 되고, 그때 당신은 핸들을 쥔 손에서 서서히 힘을 뺀다.

아이한테 자전거 타는 법을 가를칠 때 처음엔 아빠가 핸들과 안장을 잡는다.

또 얼마큼 시간이 흐르면 당신은 핸들을 놓고 안장만 붙잡은 채 바로 뒤에서 쫓아갈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끝으로 당신은 안장을 잠깐 놓아서 아이가 스스로 몇 미터쯤 가도록 할 수 있다고 느낀다, 비록 언제든 다시 아이를 붙잡아 줄 준비가 돼 있긴 하지만. 

마침내 아이가 스스로 자신 있게 타는 순간이 온다!

아이가 스스로 할 수 있다 싶을 때 아빠는 자전거의 핸들과 안장에서 다 손을 뗄 수 있다.

아이가 부모 도움으로 습득하는 새로운 일들을 다 주의 깊게 살펴보면, 자전거 타기와 비슷한 면이 많을 것이다.

흔히 아이들은 적극적이어서, 부모가 하는 것을 자기도 해보려고 늘 덤벼들게 마련이다.

만약 어린 아들과 전기 기차를 가지고 놀면서 아빠가 처음에 레일을 깔고 기관차를 작동시켰다면, 그다음 얼마 뒤에는 아이가 그 일을 다 스스로 하려고 든다. 게다가 이제는 레일도 자기 나름대로 설치한다. 

 

만약 예전엔 엄마가 어린 딸에게 밀가루 반죽을 떼어 주고 딸이 서툴지만 나름대로 과자나 빵을 만들게 했다면, 이제 어린 딸은 자기가 반죽을 빚어 덩어리를 자르고 싶어 한다. 

새로운 일들의 ‘영역’을 습득하려는 아이의 갈망은 아주 중요하며, 부모는 그걸 아주 소중히 지켜줘야 한다.

이젠 아이가 직접 반죽을 빚고 자르고 싶어 한다.
…아이들은 적극적이야, 당신이 하는 것을 늘 자기도 해보려고 든다.

 

* * *

이제 우리는 아마도 가장 미묘한 순간에 이른 듯하다. 즉,

아이의 자연스러운 적극성을 어떻게 보호해야 하나?

그걸 어떻게 죽이지 않고, 어떻게 무뎌지지 않게 해야 하나?

알고 보니, 부모들은 여기서 이중의 위험성에 시달린다.  

첫 번째 위험은...
자신의 몫을 너무 일찍 아이한테 떠넘기는 것. 자전거 사례로 보자면, 이건 5분 지나서 핸들과 안장에서 손을 다 떼는 것과 같다. 그런 경우 아이가 넘어질 것은 당연하고, 그렇게 되면 아이는 자전거 타려는 의욕을 아예 잃거나 내팽개칠 수 있다.
두 번째 위험은...
함께 하는 일에서 거꾸로 부모가 너무 오랫동안 집요하게 관여하는 것, 이른바
지루한 리더십 혹은 관리. 앞의 자전거 사례에서 이게 어떤 실수인지 확연히 알 수 있다. 

 

상상해 보자. 부모가 자전거의 핸들과 안장을 쥐고서 아이와 함께 첫날부터 계속 일주일 이상 아이 곁에서 달리곤 한다면… 아이가 스스로 자전거 타는 법을 배우게 될까? 거의 그렇지 못할 것이다. 이 무의미한 작업을 (학습을) 십중팔구 아예 지겨워할 것이다. 곁에 어른이 계속 들붙어 있는 것에도 물론 그렇고!

 

앞으로 몇 가지 레슨에서 우리는 일상사를 둘러싸고 아이들과 부모들이 겪는 어려움을 다룰 것이다.  

이제 가정학습으로 넘어가자.

 

가정에서 수행할 과제

 

과제 1

먼저 아이가 잘 못하거나 하기 힘들어하는 어떤 일을 고르라. 

“자, 이제 우리가 함께 해 볼까?” 하고 아이에게 제의하라. 

아이의 반응을 살피라. 

아이가 응한다면, 함께 그 일을 하라. 

당신의 개입을 줄일 수 있는 (핸들을 놓는) 순간을 주의 깊게 추적하라. 하지만 그걸 너무 빠르거나 급하게 하지 말라. 

아빠가 자전거 핸들을 너무 일찍 놓으면 아이가 넘어져.

사소한 것일지라도 아이가 처음 혼자 힘으로 거두는 성공을 반드시 눈여겨보라. 그걸 축하하라. (동시에 자신도!)

 

과제 2

아이가 (부모와 함께, 부모한테 배워서)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두어 가지 고르라. 

과제 1과 같은 과정을 되풀이하라. 

그리고 아이와 자신에게 성공을 다시 축하하라.

 

과제 3

하루 동안 아이와 함께 같이 놀고 수다 떨면서 정성껏 대화하라. 당신과 함께 보낸 시간이 아이에게 긍정적으로 작용하고 기억되게끔.

 

부모들의 질문 

 

문: 늘 그렇게 함께 뭔가를 하면서 아이가 버릇없게 크는 건 아닌가? 모든 걸 다 부모한테 넘기게 되지 않을까.

답: 그렇게 걱정할 만하다. 여기서 아이가 하거나 해야 할 일을 얼마나 많이 얼마나 오랫동안 당신이 떠맡을지는 전적으로 당신에게 달렸다. 

 

문: 아이와 함께 할 시간이 전혀 없다면 어떡하나?

답: 내가 알기에, 당신에겐 ‘더 중요한’ 일들이 있다. 무엇이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 일인지는 당신 자신이 선택하는 것임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그리고 많은 부모들이 알고 있는 한 사실이 중요도의 선택에 도움 될 것이다. 즉, 아이들 양육과 교육에서 놓친 것을 수정하고 채우는 데 나중에는 열 배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어간다는 사실을

 

문: 아이가 스스로 하지 않으면서도 내 도움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답: 이건 당신과 자녀의 상호관계에 감정적 문제가 드리운 것으로 보인다. 이런 문제를 우리는 다음 레슨에서 다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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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더듬 stammer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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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에서 침묵하는 이유 5가지

 

*    *    *

부모의 이른바 (잘못된) '교육적인 고려' 때문에

아이가 힘들어하는 영역에 아이를 혼자 놔두는 것이 왜 큰 실수인지 이제 분명히 이해됐으리라.

이건 아이의 발달에서 중요한 심리적 법칙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아이들은 지금 자기한테 필요한 것을 잘 느끼며 잘 안다고 말할 수 있다. 

아이들이 이런 말을 꺼내면서 얼마나 자주 부모에게 요청하는가. 

“같이 놀아요”, 

“놀러 나가요”, 

“함께 만들어요”, 

“나도 데리고 가”, 

“나도 있어도 돼요?” 등등. 

 

만약 당신에게 정말 거부하거나 미뤄야 할 심각한 이유가 있지 않다면,

대답은 언제나 “그래, 그러자꾸나!”가 되어야 한다

 

아이의 그런 요청을 부모가 잘 들어주지 않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나?

한 심리 상담에서 오간 대화를 예로 들자. 

 

엄마가 집안일로 분주한데 아이가 놀아 달라고 청한다.

엄마: 우리 애는 좀 이상해요, 정상이 아닌가 봐요. 얼마 전 남편과 식탁에 앉아서 얘기하고 있는데, 막대기를 들고 나한테 다가오더니 대뜸 찌르지 뭐에요

상담사: 당신은 아이와 시간을 주로 어떻게 보내나요?

엄마: 아이하고 시간을 어떻게 보내냐구요? 같이 보낼 시간이 어디 있어요?! 집에서 난 집안일로 늘 바쁜걸요. 한데 아이가 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나랑 놀아 줘” 하고 조르지요. 그러면 난 “그만해라, 혼자 놀아, 장난감이 다 있잖아?” 하고 응답하구요.

 

상담사: 그럼, 남편은 아이하고 놀아주나요?

엄마: 무슨 말씀을! 퇴근해서 돌아오면 소파에 누워 티브이에 목을 빼는데…

상담사: 아이가 아빠한테 잘 다가가나요?

엄마: 물론, 다가가지요, 하지만 남편이 아이를 내밀어요. "봐라, 난 피곤하다, 엄마한테 가 보렴!”  

 

아빠가 퇴근해서 티브이 앞에 앉아 있고 아이가 놀아 달라고 청했지만 거부당한다.

이런 상황에서 애정 욕구가 충족되기는커녕 마음 상한 아이가 ‘물리적인 행동 방법’으로 돌아선 것이 과연 놀라운 일일까?

아이의 공격성은 아이에 대한 부모의 비정상적 소통 스타일에 대한 반응, 정확히 말해 불통에 대한 반응이다.

그런 소통 스타일은 아이의 발달을 가로막을 뿐 아니라 때로는 정서상의 문제를 심각하게 야기하기도 한다.

 

*     *     *

이제 <규칙 2>를 어떻게 적용할지, 구체적인 사례에서 살펴보자.

 

알려지다시피 책 읽기를 좋아하지 않는 아이들이 있다. 부모들은 당연히 속이 상해서 아이가 책과 친해지게 하려고 갖가지 수단을 동원하지만, 그래도 여의치 않다.

 

내가 아는 어떤 부모 역시 아들이 책을 전혀 읽지 않는다고 하소연한다. 부모는 아이가 교양 있고 책을 많이 읽으면서 크기를 원했다. 부모는 무척 바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이라야 ‘가장 흥미로운’ 책들을 사다가 아들 책상에 올려놓는 것이었다. 물론 아이한테 책을 열심히 읽어야 한다고 당부도 하고 요구하기도 했어. 하지만 사내애는 흥미진진한 모험이나 판타지 소설들은 무심하게 잔뜩 쌓아둔 채, 아이들과 공놀이나 하려고 밖으로 나가곤 했다.

 

부모가 재미난 책들을 사다가 책상에 놓아두지만 아이는 밖으로 나돌기만 한다.

이런 상황의 타개책으로 부모들이 예전부터 알아냈고 또 늘 새로이 알아차리는 더 미더운 방법이 있다.

바로, 아이와 함께 책 읽기

많은 가정에서 아직 글자를 모르는, 취학 전 아이에게 소리 내어 책을 읽어 준다.

그러나 어떤 부모들은 아들이나 딸이 이미 학교에 들어간 뒤에도 계속 그렇게 한다.

“이미 글자를 깨친 아이하고 얼마나 오랫동안 함께 책을 읽어야 하나요?”

하는 질문에는 일관되게 대답하기가 불가함을 먼저 밝힌다. 

독서의 자율화 속도가 아이들마다 다르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건 아이들 대뇌의 개별적 특성과 관련된다). 그렇기 때문에 책 읽기 습관이 굳어지지 않은 시기에는 아이가 책 내용에 흠뻑 빠지도록 돕는 것이 중요하다.

 

부모들이 참석하는 한 세미나에서 어떤 엄마가 아홉 살 된 아들에게 책 읽기에 어떻게 흥미를 일으킬 수 있었는지 자신의 경험을 소개했다. 

 

철수는 책을 썩 좋아하지 않고 읽어도 게으름 피우면서 느릿느릿 뜨문뜨문 읽었어요. 읽어 내는 분량이 적기 때문에 빨리 읽기도 배울 수 없었구요. 악순환 같은 것이 생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떡하나, 고민하다가 아이가 책에 흥미를 갖게 하자고 마음먹었어요.
재미난 책들을 골라서 밤에 아이에게 읽어 주기 시작한 겁니다.
그러다 보니, 잠잘 시간쯤 되면 아이가 침대에 들어가서 내가 집안일을 마저 끝낼 때까지 기다렸어요. 

우린 책을 읽으면서 줄거리에 흠뻑 빠졌습니다. 다음엔 무슨 이야기가 나올까?
이미 불을 끌 시간이 됐는데도 아이는 “엄마, 한 쪽 더 읽어 주세요!” 하고 청합니다.
그리고 나한테도 궁금한 건 마찬가지이고…
그러면 “5분만 더 읽자”고 확실하게 약속한 뒤에 마무리를 짓습니다. 

엄마가 저녁마다 아이가 잠자리에 들 때 책을 읽어주기 시작한다.

얼마 지나자 아이는 다음 날 저녁이 되기를 초조하게 기다리곤 했어요.
때론 기다리지 못하고 스스로 이야기를 끝까지 다 읽더군요. 특히 남은 대목이 얼마 안 될 때 말이지요.
지금은 외려 아이가 나한테
“오늘 저녁에도 책을 꼭 읽어 주세요!”
하고 먼저 당부를 합니다. 나 역시 새로운 이야기를 소개하기 위해 책을 다 읽으려고 애쓰곤 했지요. 그렇게 아이가 점차 책을 손에 쥐더니, 이제는 책을 손에서 뗄 수가 없게 됐어요.

 

이 스토리는 엄마가 아이에게 근접 발달 영역을 어떻게 만들고 습득하도록 도왔는지 보여주는, 훌륭한 사례이다.

엄마의 도움과 가이드 덕분에 아이가 이미 그 나이에 일일불독서 구중생형극 (一日不讀書 口中生荊棘)의 수준에 오르게 됐음을 알 수 있다. 그뿐 아니라, 기술한 규칙에 맞게 부모가 행동할 때 아이와 좋은 관계를 얼마나 쉽게 맺고 유지할 수 있는지를 이 사연은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이제 <규칙 2>를 더 구체적으로 적어 보자. 

만일 아이가 힘들어하고 당신 도움받을 준비가 돼 있다면, 반드시 도우라.
이때...
► 아이가 스스로 할 수 없는 것만 당신이 하고, 나머지는 아이 스스로 하도록 맡긴다. 
► 아이가 새로운 행동을 습득함에 따라 그것을 점차 아이한테 넘긴다. 

 

보다시피, <규칙 2>는 아이가 어렵게 여기는 일을 어떻게 도와야 하는지 설명한다.

다음 사례는 이 규칙의 보충 사항들이 뜻하는 바를 더 세세하게 알려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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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과. 조건 없는 수용이란? (2)

질책과 비난 섞지 않고 자기감정 드러내기 51

사람과 물건

자신과 타인을 판단과 평가 없이 대하기 49

에고가 아니라 '참된 나'로 관계를 맺기 48

1부. 지붕 위에 사는 카를손 1. 카를손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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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덩의 악마들 11편 3

자장가 (a lullaby)

목소리와 여성 에너지

여성의 속삭임

변성기 아이들

어린 아들 딸과의 대화

달과 아빠

수다쟁이 어린 딸

신체언어 달인 아역 배우 13인

 

 

만약 어떤 작업을 아이가 힘들어한다면... 

규칙 2. <근접 발달 영역> 법칙. 
이 법칙을 고려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나 
책 읽기의 사례
설명이 있는 규칙 2. 
자전거 타기 학습
가정에서 수행할 과제 
부모들의 질문

 

엄마와 아이가 모자이크를 함께 한다.

앞선 레슨에서 우리는,

아이가 뭔가를 스스로 하기 원하고 즐거이 그렇게 한다면 아이를 가만 놔두는 것이 중요함을 이야기했다. (규칙 1).

그런데 아이가 스스로 해낼 수 없을 만큼 큰 어려움에 부닥쳤다면, 이건 다른 문제이다. 이때는 불간섭 원칙이 바람직하지 않으며, 그렇게 한다면 해만 초래할 수 있다.

 

한 사례로서 11세 소년의 아빠가 전하는 얘기를 들어본다. 

아들 생일에 우리부부는 조립 블록을 선물했어요.
아이가 아주 좋아하면서 그걸 가지고 놀기 시작했지요. 
일요일이라서 난 어린 딸과 거실 카펫 위에서 놀고 있었는데, 5분쯤 지나
“아빠, 여기가 조립이 잘 안 되는데 도와줘요”
하는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나는
“네가 어린애니? 스스로 해보렴” 하고 대꾸했어요. 

아이가 블록 조립을 힘들어하여 아빠에게 도움을 청했는데, 거절당하다.

근데 그 말에 아이가 금방 풀이 죽더니 블록을 걷어 치우고 말더군요.
그리고 그 뒤로는 그걸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습니다.

도와주기를 거부당한 아이가 토라지다.

많은 부모들이 왜 툭하면 이 소년의 아빠처럼 대응하나?

속마음으로는 가장 좋은 의도에서 그럴 것이다. 즉, 아이가 어려움에 부닥쳤을 때 겁내지 않고 스스로 극복하는 습관을 들이도록 유도하려는 마음에서 말이다. 물론 다른 이유나 동기도 있겠다. 시간이 없다거나 아이한테 무관심해서, 혹은 부모가 그 작업을 할 줄 몰라서... 

이런 식으로, 좋은 의도에서 부모 나름대로 생각하는 ‘교육적 고려 사항’과 피치 못할 이유들이 전부 우리의 <규칙 2>를 실행하는 데 주된 장애가 된다.

이 규칙을 먼저 일반적인 형식으로 적고, 다음에 더 자세히 설명을 달아 보자. 

 

규칙 2: "만일 아이가 힘들어하고 도움받을 준비가 돼 있다면, 반드시 도우라."

 

“우리, 함께 해 볼까?”

하는 말로 시작하는 것이 아주 좋다.

이 놀라운 말이 아이한테 새로운 기량과 지식, 몰입의 분야로 나아가는 문을 열어 준다. 

 

언뜻 보기에 규칙 1과 2는 모순되는 듯싶다.

하지만 겉으로만 그렇게 보일 뿐, 실제로는 상황이 다르다.

규칙 1이 적용된 상황에서는 아이가 도움을 청하지 않고 심지어 도와주려는 것을 거부하기도 한다.

이와 달리, 아이가 직접 도움을 청할 때는 당연히 규칙 2가 적용된다. 또 “뭔가 잘 안 돼요”,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어요” 하고 하소연하거나 시작한 일을 몇 번 실패한 끝에 아예 포기하는 경우에도 규칙 2가 적용된다.

그런 현상 자체가 도움이 아주 필요하다는 신호니까.

아이가 혼자 손을 씻으려 하는데 좀 어려워 보인다.

                

아이 손 씻는 것을 엄마가 도와준다.

우리의 <규칙 2>는 그냥 쓸만한 조언이 아니다.

 

이건 저명한 심리학자 레프 비고츠키(Vygotsky)가 발견한 심리 법칙에 근거를 둔다. 이것을 그는 <아동 근접 발달 영역 (Zone of proximal development)> 법칙이라 불렀다.

부모라면 누구나 이 법칙을 당장 알아야 한다. 간략히 알아보자. 

근접발달 영역, 아이 혼자 할 수 있는 영역, 아이가 할 수 없는 영역

알려지다시피, 아이들에겐 각 연령대에서 스스로 처리할 수 있는 일들의 한계가 있다.

이 한계를 넘어선 일들은 어른이 개입해야 할 수 있거나 (어른의 도움과 안내가 있어도) 아예 하지 못한다. 

예를 들어, 취학 전 아이는

이미 스스로 단추를 채우고 손을 씻고 널려 있는 장난감을 치우고 정돈할 수 있지만,

하루 동안 해야 할 여러 일을 잘 조직할 수는 없다.

바로 이 때문에 취학 전 아이가 있는 가정에서 부모들이 이런 말을 자주 입에 올리는 것이다. 

“자, 이젠 우리 철수가 ...을 할 때야”, 

“이제 우린 ...을 할 거란다”, 

“먼저 식사하고 그다음에는...”

 

간단한 도식을 그려 보자. 원 안에 또 다른 원이 들어 있다.

작은 원은 아이가 스스로 처리하는 일들을 표시하고, 작은 원과 큰 원 사이의 영역은 아이가 어른과 함께 해낼 수 있는 일들을 표시한다. 큰 원 바깥에는 아이 혼자서는, 또 어른과 함께라도, 지금은 할 수 없는 과제들이 있다. (그림 3.1).

 

부모와 함께, 스스로. 부모와 함게 하는 영역이 클수록 (근접발달 영역이 클수록) 나중에 아이 혼자 할 수 있는 일의 범주가 커진다.

그림 3.1

 

이제 비고츠키가 발견한 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아보자.

그의 설명에 따르면, 아이가 성장하고 발달하면서 스스로 수행하기 시작하는 일의 범위가 확장되는데, 이건 다 그 이전에 어른들과 함께 수행한 것들 덕분에 그렇다. 달리 말해, 아이가 오늘 엄마와 함께 수행한 것을 내일은 아이 스스로 할 것이다.

바로 ‘엄마와 함께’ 한 덕분에! 

 

함께 하는 영역은 아이의 가까운 앞날에 드러나고 발휘될, 아이의 잠재력이다.

이 때문에 이걸 근접 발달 영역(Zone of proximal development)이라 부른 것이다

앞의 그림 3-1을 잘 살펴보면,

A의 경우 근접발달 영역이 넓다. 즉, 부모가 아이와 함께 많은 것을 한다. 그러면 조만간 아이는 더 많은 일을 (부모와 함께 해 봤던 일을) 스스로 해낼 수 있게 된다.

B의 경우 근접발달 영역이 좁다. 아이가 힘들어하는 일을 부모가 함께 하기보다는 아이한테 떠맡기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면 나중에 아이 스스로 해낼 수 있는 일의 범주도 A의 경우보다 더 좁다. 

 

결론: 

앞의 아이가 더 빨리 발달하고,

자신감이 더 크고,

성공을 거두는 경우가 더 많고,

삶과 하는 일에서 더 행복하게 느낄 것이다. 

식탁 차리는 것을 아이가 거들어주도록 엄마가 도와준다.

   

아이가 쿨컵을 갖고 오는 걸 엄마가 알려주고 돕는다.

 

부모의 좋은 의도 때문에, 이른바 <교육적인 고려> 때문에

아이가 힘들어하는 곳에 아이 혼자 놔두는 것이 왜 큰 실수인지 이제 분명히 이해됐으리라. 

<계속>

(알림)  Voice Training에 관심 있는 분들은 여기를 참조해 주세요.

관련 포스트: 

자녀와 소통, 어떻게? (1)

1과. 조건 없는 수용이란? (2)

1부. 지붕 위에 사는 카를손 1. 카를손과 만나다

사람과 물건

자신과 타인을 판단과 평가 없이 대하기 49

질책과 비난 섞지 않고 자기감정 드러내기 51

'무조건 수용'을 가로막는 원인 (3)

부모의... 도움인가, 간섭인가 (4)

2. 카를손이 탑을 세우다

자장가 (a lullaby)

(70) 시 낭송

6. 카를손이 유령 놀이를 하다 (2-1)

아이들의 스피치 준비

10과. 자녀와 소통 방법 정리 (1부 끝. 37)

아이들의 행동 영역 4가지 (31)

자녀와 갈등, 건설적 해결 방법 5단계 (28)

소중한 일은 절대 미루지 말아요. 야쉰

7과. 부모의 감정은 어떻게 하나? (23)

 

 

  (8장 계속) 


   - 얘야, 꼬맹이, 현관에서 누가 널 기다리는구나. - 아빠 말씀에도 대꾸하지 않았어요. 

    그러자 아빠가 꼬맹이 어깨를 가만히 흔들었습니다. 

    - 얘야, 못 들었니? 현관에서 친구가 너를 기다리고 있단다.

    - 구닐라 아니면 크리스터이겠지, 뭐. 

    꼬맹이가 귀찮다는 듯이 반응하자, 엄마가 부드럽게 말했습니다. 

    - 아니, 그게 아니다. 널 기다리는 친구는 빔보라고 한다. 

    - 빔보가 누군지 난 몰라! 

    꼬맹이가 투덜대자 엄마가 또 설명했어요. 

    - 네가 모를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쪽은 너하고 사귀기를 간절히 원하는걸. 


    바로 그 순간 현관 쪽에서 나직하게 짖는 강아지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꼬맹이가 온몸에 힘을 주고 고집스럽게 베개에서 떨어지지 않았어요.

    ‘아니야, 이젠 정말 헛된 꿈을 다 버려야 해.’

    하지만 현관에서 강아지 옹알거리는 소리가 또 들려왔어요. 꼬맹이가 벌떡 일어나 앉아서 물었습니다. 

    - 강아지야? 진짜 살아 있는 강아지?

    아빠의 대답이 들렸습니다.

    - 그렇단다. 강아지야. 네 강아지.


    이때 보쎄 형이 현관으로 달려가더니 일 분도 안 지나서 꼬맹이 방으로 돌아오는데, 아아, 꼬맹이는 꿈을 꾸는 것만 같았어요, 아, 글쎄, 작고 털이 보송보송한 닥스훈트가 품에 안겨 있는 게 아니겠어요! 

    - 이게 살아 있는 내 강아지라고? - 꼬맹이가 중얼거렸습니다. 

    빔보를 받아 안으려고 두 손을 내뻗을 때 두 눈에는 눈물까지 글썽였습니다. 강아지가 갑자기 연기처럼 사라지지는 않을까 겁내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습니다.  



꼬맹이가 진짜 강아지를 생일선물로 받고 좋아서 어쩔 줄 모르다.


    그러나 빔보는 사라지지 않았어요. 꼬맹이가 품에 안자, 꼬맹이 뺨을 혀로 핥고 왈왈 짖으며 귀에 코를 대고 킁킁 냄새를 맡았어요. 빔보는 정말 살아있는 강아지였습니다. 


    - 그래, 이제 행복하니, 꼬맹이?

    아빠 물음에 꼬맹이가 그저 한숨만 내쉬었습니다. 

    ‘어떻게 그런 걸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단 말이야!’ 


    꼬맹이는 어찌나 행복하든지, 어딘가 속에서, 마음인지 뱃속인지 어딘가가 아픈 것 같기도 했어요. ‘사람이 행복에 겨울 때면 이럴 수도 있나?‘

    - 이 비로드 강아지는 이제 빔보의 장난감이 될 거야. 알겠니, 꼬맹이! 우린 너를 약 올리려고 한 게 아닌데… 어휴, 정말 미안하게 됐다. - 베탄 누나가 사과했습니다. 


    꼬맹이는 모든 걸 용서했어요. 그리고 식구들이 자기한테 하는 말을 거의 듣지 못했어요. 왜냐면 빔보하고 이야기하고 있었으니까. 

    - 빔보, 귀여운 빔보, 넌 내 강아지야! - 그러고는 엄마한테 말했지요. - 내 빔보가 알베르트보다 훨씬 더 사랑스럽다고 생각해요. 왜냐면 털이 짧은 닥스훈트는 세상에서 가장 좋은 강아지가 분명하니까.

    그러나 구닐라와 크리스터가 곧 올 때가 됐다는 걸 퍼뜩 떠올렸어요. 

    오오! 이 하루가 이렇게 큰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다니, 꿈만 같아. 이제 나한테도 강아지가 있다는 걸 그 애들이 알게 될 거야. 그것도 진짜 강아지, 세상에서 가장 매력적인 강아지가 있다는 걸! 


    그러다가 갑자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습니다. 

    - 엄마, 할머니한테 갈 때 빔보를 데려가도 될까?

    - 물론이지. 이 작은 광주리에 담아서 데려가렴.

    엄마는 보쎄 형이 강아지를 안고 올 때 함께 가지고 온 예쁜 광주리를 가리켰습니다.

    - 아! 그래!!

    꼬맹이에게 다른 말은 더 필요가 없었습니다. 


    초인종이 울렸습니다. 구닐라와 크리스터가 온 겁니다. 꼬맹이가 동무들에게 달려가면서 신나서 소리쳤어요. 

    - 강아지를 선물 받았다! 이젠 내 강아지가 생겼어!

    - 어머나, 정말 귀엽네! - 구닐라가 탄성을 지르고 나서 곧 정신을 차리고 기쁘게 말했어요. 

    - 생일 축하해. 자, 이건 크리스터하고 내가 준비한 선물이야.

    그러면서 꼬맹이에게 캔디 상자를 내밀고는 다시 빔보 앞에 쭈그리고 앉더니 같은 말을 되풀이했습니다. 

    - 어머나, 어쩜 이렇게 귀여울까!

    그 말을 들으면서 꼬맹이는 정말 흐뭇했습니다. 


꼬맹이가 생일선물로 받은 강아지를 동무들에게 보여주다.


    - 예파 만큼이나 귀엽다.

    크리스터가 하는 말에 구닐라가 핀잔을 주었어요.

    - 무슨 소리야, 이 강아지가 예파보다 훨씬 더 낫지. 심지어 알베르트보다도 훨씬 더 좋다!

    - 그래 맞아, 알베르트보다 훨씬 더 낫네. - 크리스터가 맞장구를 쳤습니다.

    꼬맹이는 구닐라와 크리스터가 정말 좋은 동무들이라고 생각하면서 잘 차려놓은 생일상으로 안내했습니다. 


    때마침 엄마가 치즈와 소시지를 넣은 샌드위치 접시와 과자가 수북이 담긴 그릇을 가져왔습니다. 생일상 한가운데에는 벌써 촛불 여덟 개 꽂힌 생일 케이크가 자태를 뽐내고 있었어요. 그 다음에 엄마가 핫 초콜릿이 든 커다란 차관을 가져와서 찻잔에 따르기 시작했지요. 


    - 카를손을 기다려야 하지 않아?

    꼬맹이가 조심스레 묻자, 엄마가 고개를 저었습니다. 

    - 아니, 기다릴 필요가 없겠구나. 오늘은 날아오지 않을 거야. 그리고 그 얘기는 앞으로 아예 그만두자꾸나. 이제 너한테는 빔보가 있지 않니?

    물론 이제 꼬맹이에게는 빔보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꼬맹이는 카를손이 생일에 와 주기를 몹시 기다렸습니다.  

    구닐라와 크리스터가 테이블 앞에 앉고, 엄마가 아이들에게 샌드위치를 대접했어요. 꼬맹이도 빔보를 광주리에 넣고 테이블에 앉았습니다. 


    엄마가 나가고 아이들만 남자, 보쎄 형이 방문으로 코를 들이밀고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 케이크를 다 먹지 마라. 나하고 베탄 몫은 남겨 둬!

    - 알았어, 한 조각 남겨 둘게. - 꼬맹이가 대답했습니다. - 공평하게 말하자면 그럴 필요가 없지만, 그래도 남겨 둘게. 형하고 누나는 내가 아직 세상에 없을 때 벌써 몇 번이나 케이크를 먹었잖아.

    - 단, 큰 조각을 남겨 둬야 한다! - 보쎄 형이 문을 닫으면서 또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바로 그 순간 창밖에서 귀에 익은 소리가 윙윙 들리더니 카를손이 방안으로 날아들면서 외쳤습니다. 

    - 너희들 벌써 둘러앉은 거냐? 벌써 다 먹어 치웠겠지?

    - 걱정 마. 생일상에는 먹을거리가 아직 쌓였으니까. - 꼬맹이가 안심시켰습니다. 

    - 그럼 됐어!

    - 근데 넌 꼬맹이 생일을 축하하지 않을 거야? - 구닐라가 카를손에게 물었습니다. 

    - 아, 물론이지. 축하한다! 난 어디에 앉아야지? 


    그런데 엄마는 그예 네 번째 찻잔을 놓지 않았습니다. 그걸 알아차리고는 카를손이 아랫입술을 빼물고 금방 볼이 부었어요.

    - 아, 난 이렇게는 못 놀아! 이건 불공평해. 내 찻잔은 왜 없는 거지?

    꼬맹이가 즉시 자기 것을 건네주고, 주방으로 살짝 들어가서 다른 찻잔을 가져왔습니다. 방으로 돌아와서 꼬맹이가 말했습니다.

    - 카를손, 선물로 강아지를 받았어. 이름이 빔보야. 바로 저기 있어.

    그리고 광주리 안에서 자고 있는 강아지를 가리켰습니다. 

    - 정말 좋은 선물이다. - 카를손이 말했습니다. - 아, 저 샌드위치와 저 케이크 좀 건네주라, 저것도… 아, 그래, 그거! 


꼬맹이 생일 파티에 카를손이 참석하다.



    카를손이 먹을거리를 이것저것 앞에 놓고 나서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 아, 하마터면 잊을 뻔했다! 나도 선물을 가져왔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선물… - 그러고는 바지 주머니에서 호각을 꺼내 꼬맹이에게 내밀었습니다. - 이제 이걸로 빔보를 부를 수 있을 거야. 난 늘 호각을 불어서 내 개들을 부른다. 비록 내 개들은 다 이름이 알베르트이고 날아다닐 줄 알지만…

    - 어떻게 네 개들은 이름이 다 알베르트야? - 크리스터가 놀랐어요.

    - 그래, 천 마리가 다 그렇다! 자, 이젠 사과파이를 먹어도 되지 않겠냐.

    서두르는 카를손에게 꼬맹이가 말했습니다. 


    - 호각 선물 고마워, 다정한 카를손! 빔보를 이 호각으로 부르면 기분이 좋을 거야.

    - 단, 그 호각을 내가 자주 빌려 갈 것이라는 점을 염두에 둬라. 아주, 아주 자주 말이야. - 그러더니 별안간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 근데, 캔디를 선물 받았냐?

    - 물론이야. - 꼬맹이가 대답했어요. - 이 애들이 선물했어.

    - 좋아, 이 캔디는 다 자선사업에 쓰일 거다. 

    카를손이 캔디 상자를 자기 주머니에 넣었습니다. 그러고는 또 샌드위치를 꿀떡꿀떡 삼켰습니다. 

    구닐라와 크리스터, 꼬맹이도 까딱 잘못하면 먹을 게 남아나지 않겠다 싶어서 손과 입을 아주 빨리 놀렸습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엄마는 샌드위치를 많이 마련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엄마와 아빠, 보쎄, 베탄은 식당에 앉아 있었어요.

    - 아이들이 저렇게 조용한 것 좀 보세요. - 엄마가 말했습니다. - 꼬맹이가 마침내 강아지를 갖게 됐으니 나도 행복해요. 물론 강아지를 키우면 잡다한 일이 많겠지만, 거야 어쩌겠어요!

    - 그래요, 앞으로는 꼬맹이가 그 뭐야, 지붕 위에 사는 카를손 같은 허깨비 얘기를 하지 않겠지. - 아빠가 말했습니다. 

    그 순간 꼬맹이 방에서 아이들 웃음소리와 수다 떠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러자 엄마가 제안했습니다. 

    - 가서 애들을 한번 봅시다. 저 애들은 참 사랑스러워요.

    - 그래요, 가 봐요! - 베탄이 거들고 나섰습니다. 


    그리고 네 사람이, 엄마와 아빠, 보쎄, 베탄이, 꼬맹이가 생일을 어떻게 즐기고 있는지 보러 갔습니다.

    아빠가 방문을 열었습니다. 하지만 외마디 비명을 먼저 내지른 사람은 엄마였습니다. 왜냐면 꼬맹이 옆에 앉아 있는, 작고 퉁퉁한 사람을 먼저 보았으니까요.

    그 작고 퉁퉁한 사람은 입가에 생크림을 잔뜩 묻히고 있었습니다.

    - 어머나, 어쩜, 난 기절할 것만 같아. - 엄마가 말했어요. 

    아빠와 보쎄, 베탄은 말없이 서서 눈만 휘둥그레 떴습니다. 


    - 봐요, 엄마, 카를손이 결국 날아왔잖아. 아아, 얼마나 멋진 생일이야! - 꼬맹이가 아주 기분 좋게 말했어요.

    그때 작고 퉁퉁한 사람이 입술에 묻은 생크림을 손가락으로 닦아낸 뒤 엄마와 아빠, 보쎄, 베탄에게 통통한 손을 힘차게 흔드는 바람에 생크림이 사방으로 튀었습니다. 



꼬맹이 생일상에 앉아 있는 카를손을 식구들이 보고 크게 놀라다.


    - 안녕! - 작고 퉁퉁한 사람이 인사를 건넸습니다. - 여러분은 여태껏 나를 알게 될 영광을 못 누렸지. 나는 카를손, 지붕 위에 사는… 어이, 구닐라, 구닐라, 넌 접시에 너무 많이 담잖아! 나도 파이를 먹고 싶단 말이야…

    그러다가 이미 접시에서 파이 몇 개를 집은 구닐라의 손을 낚아채 도로 내려놓게 했습니다. 

    - 이렇게 게걸들린 여자애는 본 적이 없어! - 카를손이 훨씬 더 큰 파이를 자기 접시에 올려놓고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 세상에서 파이를 가장 잘 집는 사람은 바로 지붕 위에 사는 카를손이다! 


    - 우리는 식당으로 갑시다. - 엄마가 아빠한테 속삭였어요. 

    - 그래, 그렇게 하는 게 더 좋을 거야. 당신들이 있으면 내가 불편해. - 카를손이 서슴지 않고 말했습니다. 


    꼬맹이 방에서 나오자 아빠가 엄마를 보며 말했습니다. 

    - 하나만 약속합시다. 당신이나 보쎄, 베탄 다들 나한테 약속해. 우리가 지금 본 것을 그 누구한테도 절대 발설하지 않겠다고 말이야. 

    - 왜 그래야지요? - 보쎄가 물었습니다. 

    - 지금 장면을 우리가 말한다 해도 믿는 사람이 없을 테니까. - 아빠가 나직하게 말했어요. - 또 누군가가 믿는다면, 별의별 질문을 퍼부으면서 우리를 죽을 때까지 편히 내버려두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아빠와 엄마, 보쎄, 베탄은 꼬맹이가 찾아낸 놀라운 친구에 관해 그 누구한테도 절대 얘기하지 않기로 서로 다짐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약속을 지켰습니다. 카를손에 관한 얘기를 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게 됐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카를손은 아무도 모르는 작은집에서 계속 사는 거지요. 비록 그 작은집은 스톡홀름에서 가장 평범한 거리, 가장 평범한 건물의 가장 평범한 지붕 위에 있을지라도 말입니다. 또 그렇기 때문에 카를손은 지금도 마음 가는 곳이면 어디나 태연하게 돌아다니면서 내키는 대로 장난을 칩니다. 그가 세상에서 제일가는 장난꾸러기란 것은 다 알려져 있으니까요!


    샌드위치와 과자, 파이를 다 먹은 뒤 크리스터와 구닐라가 집으로 돌아가고 빔보가 자기 바구니에서 곤히 잠들었을 때, 꼬맹이는 카를손과 작별하게 됐습니다.

    카를손이 날아갈 채비를 마치고 창턱에 앉았어요. 바람이 커튼을 흔들었지만, 이미 여름이 다가왔기 때문에 공기는 따스했어요.


    - 다정하고 다정한 카를손, 내가 할머니 댁에서 돌아올 때도 넌 계속 지붕 위에서 살고 있을 거지? 분명히 그럴 거지? - 꼬맹이가 물었어요.

    - 느긋하게, 언제나 느긋하게! - 카를손이 말했습니다. - 할머니가 나를 놓아주기만 한다면, 그럴 거다. 한데 할머니가 놓아줄지는 아직 몰라. 할머니는 나를 세상에서 가장 착한 손자라고 여기거든. 

    - 근데 넌 정말 세상에서 가장 착한 손자야?

    - 물론이지. 내가 아니면 누가 있겠어? 다른 누군가를 꼽을 수 있단 말이냐? - 카를손이 물었어요. 

    그러고는 배에 있는 단추를 누르자 모터가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꼬맹이 생일파티가 끝나고 카를손이 창밖으로 날아가다.


    - 내가 다시 돌아오면 우리는 사과파이를 더 많이 먹자! - 카를손이 외쳤습니다. - 파이는 많이 먹어도 살이 안 찐다!.. 잘 있어, 꼬맹이!

    - 안녕, 카를손! - 꼬맹이도 마주보며 외쳤습니다. 

    그리고 카를손은 날아갔습니다. 


    그러나 꼬맹이 침대 곁에 놓인 광주리에서는 빔보가 잠을 자고 있습니다. 꼬맹이가 강아지를 내려다보다가 작고 부르튼 손으로 강아지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중얼거렸습니다.

    - 빔보, 내일 우린 할머니한테 갈 거야. 잘 자라, 빔보! 좋은 꿈 꿔.


                                                           - 1부 끝. 


관련 포스트: 

1부. 지붕 위에 사는 카를손 1. 카를손과 만나다

2. 카를손이 탑을 세우다

3. 카를손이 천막 놀이를 하다

4. 카를손이 내기를 걸다 (2-1)

4. 카를손이 내기를 걸다 (2-2)

5. 카를손의 장난 (2-1)

좀도둑들을 골려 주다 (5장. 2-2)

6. 카를손이 유령 놀이를 하다 (2-1)

자녀와 소통, 어떻게? (1)

1과. 조건 없는 수용이란? (2)

도움을 청하지 않는 한 아이 일에 끼어들지 않는다 (5)

사람과 물건

자신과 타인을 판단과 평가 없이 대하기 49

자장가 (a lullaby)

목소리와 여성 에너지

목소리와 여성

정서적인 성숙함의 징표 11가지 (2)

아이의 얘기를 다른 식으로 듣기 (6과 최종. 22)

루덩의 악마들 1편 4

루덩의 악마들 4편 4

자장가 (a lullaby)


    8. 카를손이 생일에 오다



    계절이 바뀌어 여름이 됐습니다. 그리고 방학도 시작되어 꼬맹이가 시골 할머니 집으로 떠날 준비를 했습니다. 그러나 출발 전에 한 가지 중요한 사건을 치러야 했어요. 뭐냐면, 꼬맹이가 여덟 살이 된 거랍니다. 

    아아, 꼬맹이가 자기 생일을 얼마나 손꼽아 기다렸든지! 일곱 살이 되던 날부터 기다리기 시작했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거예요.

    두 생일 사이에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는지, 그저 놀랍기만 했어요. 그건 한 크리스마스에서 다음 크리스마스까지 걸리는 시간과 거의 같았습니다


꼬맹이가 생일 전날 저녁 카를손과 대화하다.



    전날 저녁 꼬맹이가 카를손과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 내일이 내 생일이야. 구닐라와 크리스터가 오고 내 방에서 생일 파티를 열 거야… - 꼬맹이가 문득 말끝을 흐렸어요. 표정도 흐려졌습니다. - 난 정말이지 너도 초대하고 싶었어, 하지만…

    엄마가 카를손 얘기만 나오면 화를 내는 통에 초대 허락을 받기는 영 글렀던 거지요.

    카를손이 그 어느 때보다 더 심하게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었습니다. 

    - 나를 초대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너하고 상대하지 않을 거다! 나도 신나게 놀고 싶어.

    그러자 꼬맹이가 허겁지겁 말했습니다.

    - 좋아, 좋아, 내일 너도 와라.

    꼬맹이는 엄마한테 말씀 드리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카를손 없이는 생일이 즐거울 수가 없어.’ 


    카를손이 부은 볼을 가라앉히면서 물었어요.

    - 우리한테 뭘 대접할 거냐?

    - 아, 물론 달콤한 케이크지. 촛불 여덟 개로 장식한 생일 케이크가 나올 거야.

    - 거 참 좋다! - 카를손이 기뻐서 소리쳤습니다. - 근데 이런 제안을 해도 되겠냐?

    - 뭔데?

    - 촛불 여덟 개 꽂힌 케이크 하나 대신에 촛불 하나 꽂힌 케이크 여덟 개를 준비해 달라고 엄마한테 부탁할 수는 없을까?

    하지만 꼬맹이는 그런 부탁을 엄마가 들어줄 리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러자 카를손이 또 물었습니다.

    - 넌 분명히 좋은 선물들을 받겠지?

    - 글쎄, 잘 모르겠는걸. 


    꼬맹이가 대답하면서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세상에서 가장 원하는 것을 아무래도 받지 못할 것임을 알고 있었던 겁니다. 

    - 내 평생에 강아지를 선물로 받지는 못할 거야. 하지만 다른 선물들이야 당연히 많이 받겠지. 그걸로 만족하고 강아지는 잊은 채 하루 종일 즐겁게 보내기로 했어.

    - 그뿐 아니라 너한테는 내가 있잖아. 내가 강아지보다 훨씬 더 좋지. - 그렇게 말하고는 카를손이 고개를 숙여서 꼬맹이를 뚫어져라 쳐다봤습니다. - 네가 어떤 선물을 받을지 궁금한걸. 만약 캔디를 받는다면, 내 생각에 넌 그걸 즉각 자선사업에 기부해야 할 거야. 

    - 좋아, 캔디 상자를 받으면, 너한테 줄게.

    카를손을 위해서라면 꼬맹이는 무엇이든 할 준비가 돼 있었습니다. 특히 이제 작별을 눈앞에 두고서야 두말할 나위가 없지요. 그래서 한마디 덧붙였습니다. 


    - 저기 말이야, 카를손, 나는 모레 할머니 집으로 떠나서 여름내 거기 있을 거야.

    카를손이 잠시 표정을 굳히더니 곧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 나도 할머니한테 간다. 우리 할머니가 네 할머니보다 진짜 할머니답다.

    - 네 할머니는 어디 사시는데? - 꼬맹이가 물었습니다.

    - 집에 살지, 어디 살겠어! 너는 내 할머니가 거리에 살면서 밤새 헤매 다닌다고 생각하는 거냐? 


    그러나 카를손의 할머니에 대해서도, 꼬맹이 생일에 대해서도, 다른 무엇에 관해서도 둘은 더 길게 얘기를 나눌 수 없었답니다. 왜냐하면 벌써 바깥에 어둠이 진하게 깔렸고, 생일 아침에 늦잠 자지 않으려면 꼬맹이가 여느 때보다 더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 했으니까요.


    다음 날 아침 눈을 뜨고 꼬맹이가 침대에 누운 채 기다렸습니다. 

    ‘이제 식구들이 방으로 들어와서 생일 케이크와 선물들을 건넬 거야.’ 

    몇 분이 그렇게 긴 줄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선물들을 빨리 보고 싶다는 마음이 어찌나 간절했든지, 기다림에 지쳐서 배가 아프기까지 하지 뭡니까. 


    하지만 마침내 복도에서 식구들 발소리가 울리고 “꼬맹이가 벌써 일어났을 거야” 하는 말소리도 들려 왔어요. 그리고 곧 방문이 활짝 열리고 엄마와 아빠, 보쎄 형과 베탄 누나가 들어섰습니다.

    꼬맹이가 몸을 일으켜 침대에 앉았는데, 두 눈이 반짝거렸어요. 


꼬맹이가 아침에 침대에 누운 채 식구들의 축하인사와 선물을 받고 행복해하다.


    - 생일 축하한다, 소중한 꼬맹이야! - 엄마가 말했습니다. 

    아빠와 보쎄 형과 베탄 누나도 “축하해!” 하고 말했지요. 그리고 촛불이 여덟 개 꽂힌 케이크와 선물들이 담긴 큰 쟁반을 꼬맹이 앞에 내놓았습니다. 

    선물은 많았습니다. 지난 크리스마스 때 받은 것보다는 좀 적은 듯싶기도 했지만 말입니다. 꼬맹이가 재빨리 세어 보니 쟁반에 꾸러미가 네 개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빠가 그러시는 거예요.

    - 선물을 아침에 다 받는 건 아니란다. 낮에도 또 뭔가를 받을 수 있을지 모르지. 


    꼬맹이가 꾸러미 네 개에 아주 기뻐했어요. 거기에는 물감 상자와 장난감 피스톨, 예쁜 책, 파란색 새 반바지가 있지 뭐에요. 그건 다 마음에 쏙 들었습니다. 

    ‘엄마와 아빠, 보쎄 형과 베탄 누나는 정말 다정한 이들이야! 이렇게 다정한 부모와 형과 누나가 세상 누구한테 또 있을까.’ 

    꼬맹이가 피스톨을 몇 번 쏘았습니다. 격발 소리가 아주 크게 울렸습니다. 식구들이 다 침대 곁에 앉아서 꼬맹이가 쏘는 피스톨 소리를 들었지요. 아아, 식구들이 서로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 여덟 해 전에 네가 요렇게 작은 아이로 세상에 나온 걸 생각해 보렴. 

    아빠가 한 손을 오므려 보이면서 말하자, 엄마가 말을 받았습니다.

    - 그래요, 세월이 참 빨리 지나가요! 그날 스톡홀름에 비가 얼마나 퍼부었는지 기억해요? 

    - 엄마, 내가 여기 스톡홀름에서 태어났어요?

    꼬맹이 물음에 엄마가 대답했습니다.

    - 물론이란다.

    - 근데 보쎄 형하고 베탄 누나는 말메에서 태어났고? 

    - 응, 그래.  

    - 아빠는 게테보르게에서 태어나지 않았어요? 나한테 그렇게 말했잖아…

    - 그렇단다, 나는 게테보르게 출신이야. 

    - 그러면 엄마는 어디서 태어났어?

    - 에스킬스툰.

    그 말이 끝나자마자 꼬맹이가 엄마를 뜨겁게 포옹하면서 외쳤어요. 

    - 그렇게 서로 다른 곳에서 태어났으면서도 우리가 다 이렇게 만났으니, 정말 다행이야!

    그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리고 식구들이 불러주는 <생일 축하합니다> 노래를 들으면서 꼬맹이가 장난감 총을 쏘았어요. 총소리가 요란하게 울렸습니다.


    오전 내내 꼬맹이는 연신 피스톨을 쏘면서 손님들을 기다리며 낮에도 또 무슨 선물을 받을지 모른다고 한 아빠 말만 생각했습니다. 

    ‘어떤 순간에 기적이 이뤄질지도 몰라. 강아지를 선물한다면…’ 

    그러나 그건 불가능하다는 걸 문득 깨닫고, 그렇게 어리석은 꿈을 버리지 못하는 자신에게 화를 내기까지 했습니다. 사실 오늘은 강아지 생각은 버리고 그저 기쁜 마음만 갖기로 마음먹지 않았던가요. 그리고 꼬맹이는 실제로 모든 것에 기뻐했습니다.


    점심식사가 끝나자마자 엄마가 꼬맹이 방에 생일상을 차리기 시작했어요. 엄마는 커다란 화병에 꽃을 한 아름 꽂고 가장 예쁜 장밋빛 찻잔을 세 개 내왔습니다. 

    그걸 보고 꼬맹이가 가만있지 못했습니다.

    - 엄마, 찻잔은 네 개가 필요해요.

    - 왜 그렇지? - 엄마가 놀랐습니다. 

    꼬맹이가 우물쭈물했어요. 하지만 엄마가 못마땅하게 여길 줄 빤히 알면서도, 카를손을 생일에 초대했다는 사실을 털어놓아야 했습니다.

    - 지붕 위에 사는 카를손도 이제 올 거야. - 꼬맹이가 용기를 내어 말하면서 엄마 눈을 용감하게 마주봤습니다.

    엄마가 한숨을 내쉬었어요.

    - 오, 이런! 그래, 오라고 하렴. 오늘은 네 생일이잖니. - 그러나 거기서 그치지 않고 꼬맹이의 블론드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었어요. - 너는 아직도 젖먹이 같은 상상에 사로잡혀 있구나. 여덟 살이 됐다는 게 믿기 어렵네. 몇 살이지, 꼬맹이?

    - 나는 가장 원기 왕성한 때의 대장부야. 카를손하고 아주 똑같아. - 꼬맹이가 당당하게 대답했습니다. 


    이날은 느릿느릿 지나갔어요. 아빠가 말한 바로 그 ‘한낮’이 된지 벌써 오래건만, 그 누구도 그 어떤 선물도 더 이상 가져오지 않았어요.

    그러다가 마침내 새 선물을 하나 더 받았습니다.


    보쎄와 베탄은 아직 여름방학을 맞지 않았는데,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둘 다 보쎄의 방에 들어가더니 안에서 문을 잠갔습니다. 

    둘은 꼬맹이를 안으로 들이지 않았어요. 복도에 서서 꼬맹이는 방안에서 흘러나오는 누나의 키득키득 웃음소리와 종이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호기심 때문에 몸이 달아올랐지요. 


    얼마 뒤 둘이 나오더니, 베탄 누나가 웃으면서 종이꾸러미를 하나 내밀었습니다. 꼬맹이가 아주 기뻐서 당장 풀어 보려고 했어요. 하지만 보쎄 형이 말렸습니다.

    - 아니야, 여기 붙어 있는 시를 먼저 읽어 봐라.


    시는 꼬맹이도 알아볼 수 있도록 굵은 인쇄체 글자들로 적혀 있어서, 꼬맹이가 직접 읽었습니다. 



형과 누나가 너한테 강아지를 선물하는 거야.

이 강아지는 다른 개들하고 싸우지 않아,

짖지 않고 뛰지 않고 물지 않아,

그 누구한테 절대 달려들지도 않아.

꼬리도 앞발도 얼굴도 귀도

이 강아지는 검은 비로드로 된 거야.


 

꼬맹이가 헝겊 인형 강아지를 받고 슬퍼하다.

  꼬맹이가 입을 꾹 다물었어요. 돌처럼 굳은 듯싶었습니다.

    그걸 보면서 보쎄 형이 말했어요.

    - 자, 이제 꾸러미를 풀어도 된다.

    그러나 꼬맹이는 상자를 내던지고 말았습니다. 근데, 눈물이 양 볼을 타고 우박처럼 흘러내리지 뭐에요. 

    - 왜 그래, 꼬맹이, 왜 그러니? - 베탄 누나가 놀라서 물었습니다. 

    - 그, 그러지 마, 울지 마, 울지 마라, 꼬맹이! - 보쎄 형이 당황하여 말을 더듬었어요. 아주 난처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베탄 누나가 꼬맹이를 꼭 끌어안았습니다.

    - 미안해, 용서해라! 우린 그냥 웃자고 한 거야. 알겠니?

    꼬맹이가 베탄의 포옹을 홱 뿌리쳤어요.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돌리고 흐느끼면서 중얼거렸습니다. 

    - 형하고 누나는 알잖아. 내가 진짜 강아지를 얼마나 갖고 싶어 하는지, 알잖아! 그런데도 이렇게 날 놀리다니…


    꼬맹이가 자기 방으로 쏜살같이 달려가서 침대에 얼굴을 파묻었습니다. 보쎄와 베탄이 그 뒤를 쫓아 달려왔어요. 엄마도 뛰어왔어요. 하지만 꼬맹이는 그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온몸을 들썩이면서 울기만 했습니다.


    이제 생일이 다 망쳤군요. 꼬맹이는 살아있는 강아지를 선물로 받지 못하더라도 오늘만큼은 종일 즐겁게 보내기로 결심했었지요. ‘하지만 비로드로 만든 장난감 강아지를 선물하다니, 누굴 놀리는 거야? 정말 심했어!’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울음이 진짜 신음으로 바뀌었고 머리는 베개에 더 깊이 파묻혔습니다. 


꼬맹이가 형과 누나의 장난에 확가 나서 침대에 엎드려 울다.


    엄마와 보쎄 형과 베탄 누나가 어쩔 줄 몰라 침대 곁에 그냥 서 있기만 했습니다. 다들 역시 아주 우울했습니다. 잠시 뒤 엄마가 조심스레 말했습니다. 

    - 이제 아빠한테 전화해서 오늘은 좀 일찍 퇴근해 들어오시라고 부탁할게. 


    그래도 꼬맹이는 그저 울기만 했습니다. ‘아빠가 집에 온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 이제 꼬맹이에게는 모든 것이 다 울적하게만 보였어요. 생일은 망가졌고, 어떻게 해도 돌이킬 수 없게 됐습니다.

    엄마가 전화하러 가는 소리를 들었지만, 꼬맹이는 계속 훌쩍훌쩍 울기만 했습니다. 


    아빠가 현관에 들어서는 소리를 들었지만, 여전히 눈물만 쏟았어요. 

    이제 꼬맹이는 절대 명랑해질 수가 없게 됐습니다. 

    ‘이럴 바에는 차라리 지금이라도 죽는 게 더 낫겠어. 그러면 보쎄하고 베탄이 장난감 강아지를 볼 때마다 어린 동생이 아직 살아 있던 생일에 동생을 고약하게 놀린 일을 기억하면서 두고두고 괴로워하겠지…’

    꼬맹이는 엄마와 아빠, 보쎄 형, 베탄 누나가 침대 주변에 서 있는 것을 문득 알아차렸습니다. 하지만 얼굴을 베개에 더 깊숙이 파묻기만 했습니다.


    (- 얘야, 꼬맹이, 현관에서 누가 널 기다리는구나. - 아빠 말씀에도 대꾸하지 않았어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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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장 계속) 


    카를손의 수다에 꼬맹이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어요. 지금은 어린 강아지 외에는 그 무엇에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심지어 카를손이 잠시 재미나게 노는 것도 싫지는 않다고 말할 때조차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카를손이 입술을 삐죽이며 밝혔습니다. 


    - 싫으면 관둬라! 넌 이 개하고만 줄곧 장난치는데, 나도 뭔가 하고 싶다.

    구닐라와 크리스터가 편들고 나서자, 카를손이 부은 볼을 가라앉히면서 말했습니다.

    - 얘들아, ‘기적의 밤’ 무대를 만들자. 알아맞혀 봐, 세상에서 제일가는 마법사가 누구지?

    - 물론 카를손이지! - 꼬맹이와 크리스터, 구닐라가 입을 모아 외쳤습니다.  

    - 그렇다면, ‘기적의 밤’이라는 공연을 벌이기로 결정이 된 거냐?

    카를손이 묻자 아이들이 또 입을 모아 대답했습니다. 

    - 그래, 그래!  

    - 공연 입장료는 캔디 하나로 정하는 거야?

    - 맞아. - 아이들이 동의했어요. 

    - 입장료로 받은 캔디는 자선 목적으로 쓴다는 것도 결정한 거지?

    - 어떻게? - 아이들이 어리둥절했습니다.  

    - 진짜 자선이라는 건 하나밖에 없다. 바로 카를손을 돕는 거야. 

    아이들이 어리둥절하여 서로 멀거니 쳐다봤습니다. 


    - 아, 어쩌면… 

    크리스터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지만, 카를손이 바로 말을 가로막았어요.

    - 아니, 우리는 이미 결정 내렸다! 그게 아니라면 난 안 놀 거야.

    하는 수 없이 아이들은 모은 캔디를 전부 지붕 위에 사는 카를손에게 기부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동네 아이들이 공연을 보기 위해 줄을 서서 입장료로 캔디를 지불하다.


    크리스터와 구닐라가 거리로 달려 나가서 아이들에게 이제 저 위 꼬맹이 방에서 ‘기적의 밤’이라는 큰 공연이 시작될 것이라고 알렸습니다. 그러자 백 원짜리 하나만 있는 아이들까지 포함해 다들 상점으로 달려가서 저마다 ‘입장료 캔디’를 샀습니다.

    꼬맹이 방문 앞에 구닐라가 서서 구경꾼들한테 캔디를 받아 ‘자선을 위해’라고 적힌 상자에 넣었습니다. 


    방 한가운데 크리스터가 손님용 의자들을 쭉 늘어놓았습니다. 방 한 구석에 걸려 있는 홑이불 뒤에서 나직하게 어르는 말소리와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키레라는 이름의 사내애가 물었습니다.

    - 우리한테 뭘 보여줄 건데? 만약 시시한 거면 캔디를 돌려달라고 할 거야.

    꼬맹이와 구닐라, 크리스터는 이 키레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 애는 늘 불평만 늘어놓는 편이었거든요


    그때 홑이불 뒤에서 꼬맹이가 작은 강아지를 안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관객들에게 의기양양하게 알렸습니다. 

    - 이제 여러분은 세상에서 제일가는 마술사와 학식이 있는 개 알베르트를 보게 될 겁니다!

    그러자마자 홑이불 뒤쪽에서 목소리가 들렸어요.

    - 네, 지금 공표한 대로 세상에서 제일가는 마술사가 등장합니다!!

    그 목소리와 동시에 카를손이 관객 앞에 모습을 드러냈어요. 차림새가 요란했습니다.  


    머리에는 꼬맹이 아빠의 실크해트를 쓰고 어깨에는 엄마의 격자무늬 앞치마를 걸쳤는데, 앞치마를 턱 밑에서 화려한 나비댕기로 묶은 겁니다. 이 앞치마가 카를손에게는 마술사들이 흔히 걸치고 나타나는 검은 망토를 대신했어요. 다들 기대가 커서 따스한 박수를 보냈습니다. 키레만 빼고 말이지요. 


꼬맹이가 강아지를 안고 무대로 나와 카를손을 소개하다.



    카를손이 허리 굽혀 인사했습니다. 아주 흡족한 모습이었어요. 인사를 끝내자 실크해트를 벗고는 모자 안이 텅 비었다는 것을 모두에게 보였습니다. 그건 마술사들이 흔히 하는 행동과 아주 똑같았어요.


    - 신사 숙녀 여러분, 이 모자 안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걸 확인해 주세요. 보시다시피 완전히 텅 비었습니다. 

    꼬맹이는 언젠가 서커스에서 본 마술사의 공연을 떠올리면서 생각했습니다. ‘이제 저 모자에서 잿빛 토끼를 꺼내겠지. 카를손이 실크해트에서 토끼를 꺼낸다면 진짜 재미날 거야!‘ 

    - 이미 말씀드린 대로 여기엔 아무 것도 없습니다. - 카를손이 우울하게 말을 이었습니다. - 그리고 여러분이 여기에 아무 것도 넣지 않는다면, 여기엔 절대 그 무엇도 있지 않을 겁니다. 지금 보니까, 저 앞에 앉은 어린 대식가들이 캔디를 먹고 있군요. 이제 우리가 이 실크해트를 한 바퀴 돌리면, 여러분은 여기에 캔디를 하나씩 던지게 될 거예요. 자선을 베풀기 위해 여러분이 기부를 하는 거지요.


    꼬맹이가 모자를 들고 한 바퀴 돌았습니다. 사탕이 가득 채워졌어요. 그 모자를 카를손에게 건네주었습니다. 

    카를손이 건네받은 모자를 흔들면서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 봐요, 이 모자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네요! 만약 모자가 꽉 채워졌다면, 이렇게 소리가 나지는 않을 겁니다.

    카를손이 캔디를 하나 입에 넣고 우물우물 씹었습니다. 

    - 그래요, 이게 바로 자선이라는 겁니다! - 그렇게 외치고는 턱을 더 부지런히 놀렸습니다. 

    키레 하나만이 손에 두툼한 봉지를 들고 있으면서도 모자에 캔디를 한 개도 넣지 않았습니다. 

    - 자, 소중한 친구들이여, 그리고 키레 너도, 다들 보세요. - 카를손이 말했습니다. - 여러분 앞에 학식 있는 개 알베르트가 있습니다. 이 개는 뭐든지 할 수 있답니다. 전화도 걸고 날아다니기도 하고 빵을 굽기도 하고 말도 하고 다리를 들어올리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뭐든지 할 수 있어요. 


    그 순간 강아지가 정말로 작은 발을 들었어요. 그것도 키레가 앉아 있는 의자 곁에서. 그리고 금방 마룻바닥에 작은 물웅덩이가 생겼습니다. 


    - 이제 여러분은 내 말이 허풍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겁니다. 이 개는 정말 공부를 많이 했답니다.

    - 말도 안 되는 소리야! - 키레가 쏘아붙이고는 자기 의자를 물웅덩이에서 떼어놓았습니다. - 강아지들이 이런 마술이야 다 하지. 알베르트한테 말을 몇 마디 하게 해 봐. 그게 좀 더 힘들 걸, 헤헤헤!

    그러자 카를손이 강아지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 알베르트, 정말 너한테는 말하는 게 힘드니?

    - 아니. - 강아지가 뱃속에서 나오는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어요. - 담배 피울 때만 말하기가 힘들어.

    아이들이 깜짝 놀라 다들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강아지가 말하는 것 같았거든요. 그러나 꼬맹이는 강아지 뒤에서 카를손이 말하는 것이라고 단정했습니다. 그리고 좋아하기까지 했어요. 왜냐면 말하는 강아지보다 평범한 강아지를 갖고 싶었으니까요.



카를손이 푸들을 데리고 무대에 나와 공연을 벌이다.



    - 사랑스러운 알베르트야, 너는 우리 친구들과 키레에게 개의 생활에 관해 무엇이든 얘기해 줄 수 있겠니?

    카를손이 부탁하자 알베르트가 얘기를 시작했습니다. 

    - 얼마든지 할 수 있지. 그저께는 영화관에 갔었어. - 그렇게 말하면서 카를손 주변을 즐겁게 겅중겅중 뛰었어요. 

    - 물론, 그랬겠지. - 카를손이 맞장구를 쳤습니다. 

    - 아, 그래! 내 옆 의자에 빈대 두 마리가 앉아 있더군. - 알베르트가 계속 입을 놀렸습니다. 

    - 어, 그게 무슨 말이냐! - 카를손이 놀랐습니다. 

    - 아, 그래! 나중에 거리로 나와서 얘기 들으니까 한 벼룩이 다른 벼룩에게 그러는 거야. “어떡할래, 집에 걸어서 갈까 아니면 개를 타고 갈까?"


    아이들은 모두 이것이 설령 ‘기적의 밤’과는 거리가 멀다 하더라도 좋은 공연이라고 여겼습니다. 키레 하나만 여전히 얼굴을 찌푸렸어요.

    - 이 개가 빵을 구울 줄도 안다고? 

    키레가 비웃듯이 말하자, 카를손이 강아지에게 물었습니다.

    - 알베르트, 넌 빵을 굽니?  

    알베르트가 하품을 하고 바닥에 엎드려서 대답했습니다. 

    - 아니, 할 줄 모르는데…

    - 헤헤헤! 내 그럴 줄 알았지! - 키레가 소리쳤어요. 

    - …왜냐면 지금 누룩이 없으니까. - 알베르트가 말을 마쳤습니다. 


    아이들이 다 알베르트를 아주 좋아했지만, 키레는 여전히 고집을 부리면서 요구했어요.

    - 그렇다면 한 번 날아 보라고 해. 나는 데는 누룩이 필요 없으니까.

    - 알베르트, 한번 날아 볼래? - 카를손이 강아지에게 물었습니다. 

    강아지는 잠이 든 듯했지만, 그래도 카를손의 물음에 대답은 했어요. 

    - 암, 기꺼이 하지. 그러나 네가 나랑 같이 난다면 나도 날겠어. 왜냐면 나는 어른들 없이 혼자 날지는 않겠다고 엄마한테 약속했으니까.

    - 그렇다면 이리 와라, 귀여운 알베르트야.

    카를손이 강아지를 마룻바닥에서 들어 올렸습니다. 

카를손이 강아지를 안고 창밖으로 날다.

    눈 깜짝할 새에 카를손과 알베르트가 날아올랐습니다. 처음엔 천장으로 날아올라 샹들리에 주변을 몇 바퀴 돌더니 곧장 창밖으로 나갔습니다. 키레가 어찌나 놀랐는지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말았어요.


    아이들이 우르르 창가로 몰려가서 카를손과 알베르트가 지붕 위로 날아다니는 것을 보게 됐습니다. 한데 꼬맹이는 겁이 나서 소리쳤어요. 

    - 카를손, 카를손, 내 강아지를 데리고 돌아와!

    카를손이 순순히 말을 들었습니다. 금방 돌아와서 알베르트를 바닥에 내려놓았어요. 강아지가 몸을 부르르 떨었습니다. 아주 놀란 표정이었는데, 태어나서 처음 날아 본 것 같다는 느낌을 주었습니다.


    - 오늘은 이걸로 충분합니다. 더 보여줄 게 없어요. - 카를손이 관객들에게 정중하게 인사한 뒤, 키레에게 다가가서 통통한 손으로 툭 치며 거칠게 말했습니다. - 그리고 넌 앞으로 교육 좀 받아야겠다!

    키레는 카를손이 뭘 원하는지 금방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 캔디를 내놔야지! - 카를손이 화난 목소리로 말했어요. 

    키레가 봉지를 꺼내 카를손에게 넘겼어요. 사실은 캔디 한 개를 더 자기 입에 넣은 뒤 그렇게 한 겁니다.

    - 인색한 꼬마야, 부끄러운 줄 알아라!..

    카를손이 그렇게 말하고는 눈길로 뭔가를 서둘러 찾으면서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 근데 자선기금 상자는 어디에 있는 거야? 

    구닐라가 자기가 모은 ‘입장료 캔디’ 상자를 건네주었습니다. 구닐라는 캔디를 잔뜩 얻은 카를손이 이제 아이들에게 하나씩 나눠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카를손은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상자를 낚아채더니 캔디를 열심히 세기 시작했습니다.

    - 전부 열다섯 개로군. 저녁식사로 충분해… 잘들 있어라! 난 저녁 먹으러 집으로 가겠다.

    그러고는 창밖으로 날아갔습니다. 


    아이들이 흩어지기 시작했어요. 구닐라와 크리스터도 자기네 집으로 돌아갔어요. 알베르트와 둘만 남게 되자, 꼬맹이는 아주 좋았습니다. 강아지를 무릎에 앉히고 뭔가를 속삭였습니다. 강아지가 꼬맹이 얼굴을 몇 번 핥다가 코를 골면서 달콤하게 잠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엄마가 세탁소에서 돌아온 뒤 모든 게 금방 달라졌습니다. 꼬맹이가 아주 시무룩해졌어요. 엄마는 알베르트가 집 없는 강아지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은 겁니다. 그리고 알베르트 목걸이에 새겨진 번호로 전화를 해서 자기 아들이 작고 검은 푸들 강아지를 발견했다고 알렸지 뭡니까. 


    꼬맹이가 강아지를 안고 전화기 곁에서 혼자 중얼거리며 안달했어요. 

    - 제발 그 사람들이 주인이 아니어야 할 텐데…

    하지만, 아아, 전화 받은 사람이 강아지 주인인 것으로 드러났어요!

    엄마가 수화기를 내려놓고 말했습니다. 

    - 아들아, 보비의 주인이 누군지 알겠니? 스테판 알베르트라는 이름의 소년이란다.

    - 보비라고? - 꼬맹이가 되물었어요. 

    - 그래, 이 강아지 이름이란다. 스테판은 여태껏 울고 있었다는구나. 일곱 시에 찾으러 올 거야.

    꼬맹이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지만, 얼굴에 핏기가 싹 가시고 두 눈에서 불꽃이 일었습니다. 강아지를 더 꼭 끌어안고는 엄마한테 들리지 않게끔 강아지 귀에 대고 소곤소곤 속삭였어요. 

    - 귀여운 알베르트, 네가 내 강아지가 되기를 얼마나 원했는데!

    일곱 시가 되자 스테판 알베르트가 와서 강아지를 데려갔습니다.


    꼬맹이가 침대에 엎어져서 우는데, 그 울음소리가 어찌나 슬픈지 듣는 사람마저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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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머리 부스스한 꼬마가 세로줄이 있는 파란 파자마 차림으로 주방에 있는 엄마한테 맨발로 터벅터벅 걸어갔습니다. 아빠는 벌써 일터로 나가셨고 보쎄 형과 베탄 누나는 학교에 갔네요. 

늦잠을 자고 일어난 꼬맹이가 잠옷 차림으로 엄마한테 가서 안기다.

    꼬맹이 학교 수업은 좀 늦게 시작됐는데, 그건 정말 안성맞춤이었습니다. 왜냐면 비록 오랜 시간은 아니라도 엄마랑 둘이 있는 걸 아주 좋아했으니까요. 그런 시간에는 이야기 나누고 함께 노래 부르거나 서로 동화를 들려주기에 딱 좋지요. 꼬맹이가 이미 세 살짜리 어린애는 아니지만 아직은 엄마 무릎 위에 앉기를 좋아합니다. 물론 아무도 안 볼 때만 그렇게 하지요


    꼬맹이가 주방에 들어섰을 때 엄마는 식탁 곁에 앉아서 신문을 읽으며 커피를 마시고 있었어요. 꼬맹이가 아무 말도 않고 엄마 무릎 위에 앉았습니다. 엄마가 아이를 포옹하고 다정하게 감싸 안았습니다. 꼬맹이는 잠이 완전히 깰 때까지 엄마 품에서 그렇게 앉아 있곤 합니다


    엄마와 아빠는 어제 산보 나갔다가 예정보다 늦게 돌아오셨어요. 그때 꼬맹이는 벌써 침대에 누워 잠이 들었지요. 자면서 아이는 이리저리 뒹굴었어요. 막내에게 홑이불을 덮어주다가 엄마는 홑이불에 숭숭 구멍이 뚫린 것을 보았습니다. 그뿐 아니라 홑이불이 마치 누가 일부러 검정을 묻힌 것처럼 지저분했습니다. 그때 엄마는 이렇게 생각했어요. ‘꼬맹이가 노느라고 피곤해서 일찍 잠자리에 들었구나.’ 


    하지만 이제 이 장난꾸러기가 무릎 위에 있을 때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봐야겠다고 단단히 마음먹었어요. 

    - 얘, 꼬맹이야, 엄마는 네 홑이불에 누가 구멍을 냈는지 알고 싶구나. 단지, 지붕 위에 사는 카를손이 그랬다고 말할 생각일랑 제발 그만두렴. 

    꼬맹이가 입을 다물고 긴장했습니다. ‘어떡하지? 구멍들은 바로 카를손이 낸 것인데, 엄마는 그 사람 얘기는 아예 하지 말라고 그러네.’ 꼬맹이는 도둑들 얘기도 일절 하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말해 보았자 엄마가 믿을 턱이 없으니까요.

    - 그래, 대관절 어떻게 된 일이니? - 꼬맹이가 우물우물하자 엄마가 더 기다리지 못하고 대답을 재촉했습니다. 

    - 구닐라한테 물어보면 안 되겠어, 엄마? - 꼬맹이가 꾀를 내어 말하고는 잠깐 생각했어요. ‘구닐라가 말하는 게 더 낫지. 엄마는 나보다 그 애 말을 더 믿을 테니까.’ 

    엄마는 생각했어요. ‘아! 구닐라가 홑이불에 구멍을 낸 모양이군.’ 그러고는 또 자기 꼬맹이가 착한 아이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왜냐면 다른 사람을 두고 이러쿵저러쿵 고자질하지 않고, 구닐라가 직접 말하기를 바라는 것이니까요

    엄마가 꼬맹이 어깨를 감싸 안았습니다. 그러면서 이제 꼬맹이에게 더 이상 아무 것도 캐묻지 않고, 기회가 닿으면 구닐라와 얘기하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 넌 구닐라가 그렇게 좋으니? 

    엄마가 말을 돌려 묻자 꼬맹이가 대답했어요. 

    - 응, 아주 좋아해.

    엄마가 다시 신문에 눈길을 돌리자 꼬맹이는 말없이 무릎에 앉은 채 생각했습니다.


    사실 나는 정말 누구를 사랑하는 거지? 무엇보다도 엄마를… 그리고 아빠도… 또 보쎄 형과 베탄 누나도 아주 좋아해… 맞아, 나를 잘 상대해주지 않는다 해도 아주 좋아할 때가 많아. 특히 보쎄 형을. 하지만 때로는 모든 사랑이 날아간 듯이 식구들에게 화를 내기도 하는걸. 지붕 위에 사는 카를손도 사랑하고, 구닐라도 역시 사랑해. 그래, 어른이 되면 그 애하고 혼인할지도 몰라. 바라든 바라지 않든 아내는 있어야 되잖아. 물론 난 그 누구보다도 엄마하고 혼인하기를 바랐어. 하지만 그건 불가능해

    갑자기 걱정스러운 생각이 하나 떠올랐습니다. 

    - 대답해 줘, 엄마. 보쎄 형이 어른이 되고 죽으면, 내가 형 아내하고 혼인해야 하는 거야?

    엄마가 커피 잔을 끌어당기면서 놀란 눈으로 꼬맹이를 바라봤어요. 그러다가 웃음을 간신히 참으면서 물었습니다. 

    - 왜 그런 생각을 하는 거니?

    바보 같은 말을 꺼냈다는 생각에 놀라서 꼬맹이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기로 했어요. 하지만 엄마가 가만두지를 않는군요. 

    - 말해 보렴. 왜 그런 생각을 한 거야?

    - 보쎄 형이 컸을 때 내가 형의 낡은 자전거와 낡은 스키를 물려받았잖아… 그리고 나만할 때 형이 타고 놀던 나무말도 물려받았고… 형의 낡은 파자마며 구두 같은 걸 다 내가 헤지도록 입고 신는데…

    - 알았다, 형의 낡은 아내는 너한테 돌아가지 않도록 하마. 약속할게. - 엄마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습니다. 

    그 얼굴을 보면서 꼬맹이가 물었어요. 

    - 엄마한테 장가가면 안 되나?

    - 그건 아마도 불가능할 거야. 나는 벌써 아빠한테 시집갔잖니.

    - 맞아, 그건 그래. - 그렇게 말하고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못마땅한 투로 덧붙였습니다. - 나하고 아빠가 둘 다 엄마를 사랑하다니, 정말 좋지 못한 일치야.

    그러자 엄마가 웃음을 터뜨리면서 말했습니다. 

    - 두 사람 다 나를 사랑한다는 건, 내가 좋은 여자라는 뜻이 아니겠니? 


    꼬맹이가 어깨를 들썩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 그러면 난 구닐라한테 장가갈래. 누구하고든 혼인은 해야 되잖아!

    그러고는 다시 생각에 잠겼어요. 구닐라하고는 그다지 오순도순 살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면 그 애하고 가끔씩 다투기도 하니까요. 그래요, 누가 되든 아내라는 사람이 아니라 엄마와 아빠, 보쎄 형, 베탄 누나하고 그냥 쭉 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습니다.

    - 난 아내보다는 강아지를 훨씬 더 갖고 싶어. 엄마, 나한테 강아지를 선사할 수는 없어?

    엄마가 가볍게 한숨을 지었습니다. 아, 꼬맹이가 또 강아지 타령을 하는군! 그건 지붕 위에 사는 카를손 얘기 못지않게 듣기 힘든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서둘러 말을 돌렸습니다

    - 꼬맹이야, 이제 옷 입을 시간이다. 안 그러면 학교에 지각할 거야.

    엄마 말에 꼬맹이가 서운함을 드러냈습니다.

    - 그래, 알겠어. 내가 강아지 얘기만 꺼내면 엄마는 학교 얘기로 넘어가네!


    …그날 꼬맹이는 학교에 가는 게 즐거웠습니다. 크리스터며 구닐라하고 의논할 게 많았으니까요.

    수업이 끝나고 여느 때처럼 셋이 함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이제 크리스터와 구닐라도 카를손을 안다는 사실에 꼬맹이는 여느 때보다 더 기뻤습니다. 


    - 그 사람은 정말 명랑하지 않니? 네가 보기에 그 사람이 오늘 또 올 것 같아? - 구닐라의 물음에 꼬맹이가 대답했습니다.

    - 모르겠다. 그 사람은 ‘대충’ 오겠다고 약속했어. 그건 곧 생각나면 온다는 뜻이야.

    - 그 사람이 ‘대충’ 오늘 날아오면 좋겠다. 구닐라하고 네 방에 가도 돼? - 이번에는 크리스터가 물었습니다.

    - 당연히 와도 된다. 

    그때 다른 존재 하나가 불쑥 나타나더니, 역시 아이들과 함께 걷고 싶어 했습니다. 아이들이 길을 건널 때 작고 검은 푸들이 꼬맹이에게 달려온 겁니다. 푸들은 꼬맹이 무릎을 핥으면서 친근하게 왈왈 짖었어요. 


꼬맹이와 동무들이 거리에서 길 잃은 강아지를 만나다


    꼬맹이가 환성을 질렀습니다.

    - 얘들아, 여기 좀 봐, 얼마나 근사한 강아지니! 복잡한 거리에 놀라서 나한테 저편으로 데려가 달라고 부탁하는 모양이야.

    네거리가 나올 때마다 강아지를 다정하고 안전하게 데리고 가면 꼬맹이는 행복할 겁니다. 강아지도 그걸 느낀 게 분명해요. 꼬맹이 곁에 붙었다 떨어졌다 하면서 인도를 펄쩍펄쩍 뛰어가니까 말이지요.

    - 어머나, 정말 예쁘다. 이리 오렴, 강아지야! - 구닐라가 작은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러자 꼬맹이가 강아지 목줄을 쥐면서 말했습니다.

    - 아니야, 나랑 나란히 가고 싶어 한다. 이애는 나를 좋아해.

    - 그 강아지는 나도 좋아했어. - 구닐라가 쏘아붙였어요. 


    작은 강아지는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다 사랑할 준비가 돼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꼬맹이도 이 강아지를 사랑했어요. 아아, 정말 사랑했어요! 허리를 굽혀 강아지 머리를 쓰다듬고 목덜미를 톡톡 건드리면서 나직하게 휘파람도 불고 쭈쭈 소리도 냈어요. 그 부드러운 소리들은 이 검은 푸들이 세상에서 가장 마음이 가고 가장 매혹적인 강아지라는 뜻이었습니다

    강아지는 자기도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듯이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습니다. 좋다고 겅중겅중 뛰고 반갑게 짖으면서, 아이들이 동네 거리로 들어설 때도 계속 뒤따라왔습니다.  


    - 혹시, 집이 없나? - 꼬맹이가 강아지와 헤어지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어서 한 가닥 기대를 담아 덧붙였습니다. - 주인이 없는지도 몰라.

    - 그래, 그런 것 같은데. - 크리스터가 맞장구를 쳤지만, 꼬맹이는 가볍게 화를 내면서 말을 잘랐어요.

    - 넌 입 다물고 있어! 네가 어떻게 알아?

    예파를 가지고 있는 크리스터가 개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게 무슨 뜻인지 과연 이해할 수 있었을까요!

    - 이리 오렴, 귀여운 강아지야! - 집이 없는 게 분명하다고 더 확신하면서 꼬맹이가 강아지를 불렀습니다.

    - 아니, 그 강아지는 너를 따라가려고 하지 않을걸. 

    크리스터가 경고하는 말에 꼬맹이가 얼른 대꾸했습니다. 

    - 그냥 가도 괜찮아. 하지만 나를 따라오면 좋겠다. 


    강아지가 꼬맹이 뒤를 따라왔어요. 그러다 보니 꼬맹이가 사는 집까지 오게 됐네요. 꼬맹이가 강아지를 안고 계단을 올라갔습니다. 

    ‘강아지를 데리고 있어도 되는지 엄마한테 물어봐야겠어.’ 

    그러나 엄마는 집에 안 계셨어요. 식탁 위에 남긴 메모를 보니까, 엄마는 세탁소에 가니까 필요하면 거기로 오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강아지가 꼬맹이 방으로 쏜살같이 뛰어들었습니다. 강아지를 쫓아서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갔습니다.

    - 봐라. 이 강아지는 나하고 살고 싶어 하는 거야! - 꼬맹이가 좋아서 어쩔 줄 몰라 소리 질렀습니다. 


    바로 그 순간 지붕 위에 사는 카를손이 창문으로 날아들었습니다. 

    - 안녕! 너희들, 뭐야, 개를 세탁이라도 한 거냐? 털이 떡이 졌네!

    - 이건 예파가 아니야, 모르겠어? 이건 내 강아지야!

    하지만 꼬맹이 말을 크리스터가 가로막고 나섰습니다.

    - 아니, 네 강아지가 아니야.

    - 그래, 너한테는 강아지가 없잖아. - 구닐라가 거들고 나섰어요. 

    그러자 카를손도 한마디 했습니다.

    - 나한테는 저기, 저 위에, 개가 천 마리는 된다.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개 농장은 바로…

    - 너희 집에서 난 개를 한 마리도 못 봤는데! - 꼬맹이가 카를손의 말을 잘랐습니다. 

    - 그때는 개들이 집에 없었을 뿐이야. 다들 사방으로 날아간 거야. 내 개들은 전부 날아다닌다.


    하지만 카를손의 수다가 꼬맹이 귀에는 전혀 들어오지 않았어요. 날아다니는 개 천 마리가 지금 꼬맹이에게는 이 작고 귀여운 강아지 하나에 댈 게 아니었거든요.

    꼬맹이가 새삼스럽게 힘주어 말했습니다. 

    - 아니야, 난 이 강아지의 주인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

    구닐라가 강아지 목덜미를 자세히 보려고 고개를 숙였습니다. 

    - 어쨌든 목줄에는 알베르트라고 적혀 있는 걸.

    - 그건 주인 이름이 틀림없어. - 크리스터가 말을 받았어요.

    - 이 알베르트는 벌써 죽었을 거야! - 꼬맹이가 반대하여 말하고는 잠시 생각했습니다.

    ‘알베르트라는 사람이 설령 있다 해도, 이 강아지를 사랑하지는 않아.’ 


    그러다가 퍼뜩 그럴 듯한 생각이 떠올라서 크리스터와 구닐라를 애원하는 눈빛으로 보면서 물었습니다.

    - 혹시, 강아지 이름이 알베르트가 아닐까?

    하지만 아이들은 대답 대신 놀리듯이 그냥 웃기만 하는 것이었어요. 

    그러자 카를손이 대신 나섰습니다. 

    - 나한테는 알베르트라는 이름의 개들이 몇 마리 있다. 안녕, 알베르트!

    강아지가 카를손에게 달려가면서 반갑게 짖었어요. 

    꼬맹이가 소리쳤습니다.

    - 봐라, 얘들아. 강아지가 자기 이름을 아는 거야!.. 알베르트, 알베르트, 이리 와.

    구닐라가 강아지를 붙잡아 살펴보더니 쌀쌀맞게 말했습니다.

    - 여기 목걸이에 전화번호가 있는 걸.

    그 말에 카를손이 설명하고 나섰습니다. 


    - 개들한테는 자기 전화번호가 있는 게 당연하다. 그 강아지한테 말해라. 자기 주인한테 전화해서 조금 늦게 돌아가겠다고 알리라고 해. 내 개들은 어디서 머물게 되면 늘 전화를 하지. - 통통한 손으로 강아지를 쓰다듬으면서 카를손이 계속 입을 놀렸습니다. - 내 개들 중 한 마리는, 아, 그 애도 이름이 알베르트인데, 며칠 전에 어쩌다가 어디서 오래 머물게 되어 나한테 알리려고 집으로 전화를 했는데, 전화번호를 헷갈려서 다른 지역에 사는 늙은 퇴역 소령 집으로 걸게 됐다. 알베르트가 “당신은 카를손의 개들 중 하나인가요?” 하고 묻자, 소령이 화가 나서 고함을 쳤어. “이 돼지 같은 녀석아! 나는 개가 아니라 소령이야!” 그러자 알베르트가 정중하게 말했어. “근데 왜 나한테 이렇게 짖어대는 겁니까?” 하하하, 봐라, 얼마나 똑똑하냐!


    (카를손의 수다에 꼬맹이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어요. 지금은 어린 강아지 외에는 그 무엇에도 관심이 없었답니다.  <계속>) 


관련 포스트:

1부. 지붕 위에 사는 카를손 1. 카를손과 만나다

3. 카를손이 천막 놀이를 하다

자녀와 소통, 어떻게? (1)

1과. 조건 없는 수용이란? (2)

'무조건 수용'을 가로막는 원인 (3)

사람과 물건

질책과 비난 섞지 않고 자기감정 드러내기 51

자신과 타인을 판단과 평가 없이 대하기 49

자신감 강화 (2)

5. 카를손의 장난 (2-1)

4. 카를손이 내기를 걸다 (2-2)

4. 카를손이 내기를 걸다 (2-1)

아동의 근접발달 영역 확장과 자전거 타기 (8)

달과 아빠

돌아가신 할아버지

자장가 (a lullaby)

엄마 말 안 듣는 아이


(6장 계속) 

    카를손이 선반에서 폴짝 뛰어내리더니 구닐라에게 다가가서 뺨을 살짝 꼬집었습니다. 

    - 어때, 네 앞에 있는 내가 작은 허깨비라고?

    - 우린… - 크리스터가 우물거렸습니다. 

    - 흠, 네 이름이 어거스트냐? - 카를손이 크리스터에게 물었습니다. 

    - 그렇지는 않아. - 크리스터가 고개를 저었어요. 

    - 좋아. 더 계속해 보자!.. - 카를손이 말했어요.

    - 이 애들은 구닐라와 크리스터야. - 꼬맹이가 소개했습니다. 


    카를손이 뭔가를 찾듯이 두리번거리다가 서둘러 설명했습니다. 

    - 이제 좀 재미나게 노는 데 난 반대하지 않겠다. 작은 의자들을 창문으로 내던져 볼까? 아니면 그 비슷한 놀이를 한번 궁리해 볼까?

    꼬맹이는 그게 아주 재미난 놀이라고는 여기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엄마와 아빠가 그런 장난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걸 확실히 알고 있었지요.

    - 흠, 너희들은 겁쟁이로구나. 그렇게 우물쭈물 망설이기만 하면 뭘 할 수 있겠냐. 내 제안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니 다른 뭔가를 궁리들 해라. 안 그러면 너희들과 안 놀겠어. 난 뭔가 재미난 짓을 해야 돼. - 카를손이 뾰로통해져서 입술을 삐죽 내밀었습니다. 

    - 잠깐 기다려, 우리가 이제 뭔가를 생각해낼 거야! - 꼬맹이가 애원하듯이 속삭였습니다. 

    그러나 카를손은 단단히 삐치기로 작정했는지 투덜거렸습니다. 

구닐라가 카를손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다.

  - 지금 당장 여기서 날아갈래… 

    세 아이는 카를손이 같이 있으면 재미있을 것임을 알거나 느꼈기 때문에 가지 말라고 입을 모아 설득하기 시작했습니다. 

    카를손이 볼이 부어서 잠시 말없이 앉아 있었어요. 

    - 물론 확실하진 않지만 안 갈 수도 있을 거야. 만약 저 애가… - 카를손이 통통한 손가락으로 구닐라를 가리켰어요. - 내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나의 다정한 카를손” 하고 말해 준다면 말이야.

    구닐라가 기꺼이 카를손을 쓰다듬으며 정겹게 부탁했어요. 

    - 다정한 카를손, 우리랑 같이 있어 줘! 우리가 재미난 일을 꼭 생각해낼게.

    - 좋아. 그렇다면 안 가겠어. 

    아이들이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꼬맹이의 엄마와 아빠는 저녁마다 산보를 나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제 엄마가 현관에서 큰 소리로 알리는군요.

    - 꼬맹이야! 크리스터하고 구닐라가 네 방에서 여덟 시까지 놀아도 좋아. 그 다음에 넌 얼른 잠자리에 드는 거다. 아빠랑 산보에서 돌아오면 엄마가 너한테 들러서 좋은 꿈을 꾸라고 기도해주마.

    그리고 현관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 네 엄마는 왜 내가 몇 시까지 있어도 좋은지는 말하지 않는 거지? - 카를손이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었습니다. - 다들 나를 정 그렇게 홀하게 대한다면, 난 너희들과 안 놀겠어.

    - 넌 있고 싶은 대로 있어도 돼. - 꼬맹이가 얼른 대답했습니다. 

    카를손이 입술을 더 삐죽 내밀었어요. 

    - 나는 왜 다른 애들처럼 정각 여덟 시에 가라고 하지 않는 거냐? - 목소리에 서운함이 잔뜩 담겼어요. - 싫어, 난 그렇게는 못 놀아!

    - 좋아, 엄마한테 부탁해서 너도 여덟 시에 집에 가라고 이르도록 할게. - 꼬맹이가 약속했습니다. - 그래, 뭐하고 놀면 좋을지는 생각했어?

    카를손의 표정이 순식간에 환해졌습니다. 


    - 유령 놀이를 하면서 사람들을 놀래주자. 내가 작은 홑이불 하나로 뭘 할 수 있는지 너희들은 상상도 못할걸. 나 때문에 얼이 쏙 빠지도록 놀란 사람들이 백 원씩 준다면, 난 초콜릿을 산더미처럼 살 수 있을 텐데. 난 세상에서 제일가는 유령이잖아! - 그렇게 말하면서 두 눈을 명랑하게 반짝였습니다. 

    꼬맹이와 크리스터, 구닐라가 유령 놀이를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꼬맹이가 토를 달았어요. 

    - 사람들을 꼭 무섭게 놀랠 필요는 없는데.

    - 느긋하게, 언제나 느긋하게! - 카를손이 대꾸했습니다. - 세상에서 제일가는 유령이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를 너한테 알려주지는 않겠다. 난 모든 이들을 얼이 빠질 정도로 놀라게 할 거지만, 그래도 내가 그랬는지 사람들은 알아차리지도 못할 거야. - 카를손이 꼬맹이 침대로 가서 홑이불을 벗겨냈습니다. - 적당한 물건이야. 유령에게 잘 어울리는 옷을 만들 수 있겠다.


    카를손이 책상 서랍에서 색연필들을 꺼내 홑이불에 무시무시한 얼굴을 그렸습니다. 그러고는 가위를 들더니 꼬맹이가 말릴 새도 없이 재빨리 눈구멍 두 개를 오렸어요. 

    - 홑이불 따위야 하찮은 것이고 일상적인 일이다. 그리고 유령은 주변에서 벌어지는 것을 봐야 해. 안 그러면 여기저기 부딪치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잖아.

    그러고는 홑이불을 머리부터 푹 덮어쓰고 나니, 작고 통통한 두 손만 보이게 됐습니다. 아이들은 그게 홑이불을 덮어쓴 카를손인지 알면서도 좀 놀랐어요. 예파가 미친 듯이 짖어댔습니다. 카를손이 작은 모터를 켜고 샹들리에 주변을 날기 시작하자 (홑이불이 펄럭이면서) 훨씬 더 무섭게 보였습니다. 그건 정말 무시무시한 모습이었어요. 


카를손이 홑이불을 뒤집어쓰고 유령 흉내를 내니 아이들이 놀라다.


    - 난 모터가 달린 작은 유령이다! - 카를손이 외쳤습니다. - 좀 거칠기는 해도 호감 가는 유령이야!

    아이들이 날아다니는 유령을 아무 말 없이 겁먹은 눈으로 바라보기만 했습니다. 예파는 연신 짖어대다가 그만 지치고 말았어요. 

    카를손이 말을 이었습니다. 

    - 대체로 난 비행 중에 윙윙 모터 돌아가는 소리를 아주 좋아하지만, 지금은 유령이니까 소음기를 켜겠다. 바로 이렇게!

    그러고는 소리를 전혀 내지 않으면서 몇 바퀴를 돌았는데, 그러니까 진짜 유령처럼 보이는 겁니다. 

    이제 놀래줄 사람을 찾는 일만 남았습니다.


    - 출입문으로 갈까? 누군가가 건물로 들어서다가 혼비백산하겠지!

    바로 그때 아파트 현관에서 초인종이 울렸어요. 하지만 꼬맹이는 나가보지 않기로 했습니다. 지금 우리 집에 올 사람은 없는데, 뭐!

    그러는 사이에 카를손이 숨을 헐떡이면서 여러 신음소리를 냈습니다.

    아이들이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간단히 설명까지 했습니다.

    - 으스스한 숨소리와 신음소리를 낼 줄 모르는 유령은 가치가 없다. 이건 유령 학교에서 어린 유령들에게 가장 먼저 가르치는 거야

    그렇게 준비하느라고 시간이 적잖이 흘렀습니다. 


    유령을 앞세우고 아이들 셋이 현관문 앞에서 행인들을 놀래려고 계단참으로 나가려고 할 때, 발걸음 소리 같은 게 희미하게 들렸어요. 꼬맹이가 처음엔 엄마와 아빠가 산책 나갔다가 돌아오나 보다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현관문에 달린 우편함 틈새로 누군가가 철사를 쑤셔 넣는 게 아니겠어요? 꼬맹이는 그게 도둑들 짓임을 금방 깨달았습니다. 

    며칠 전 아빠가 엄마한테 신문을 읽어준 것이 떠올랐거든요. 시내에 아파트 도둑들이 아주 많이 나타났다는 기사였어요. 도둑들은 먼저 초인종을 누르고 집안에 아무도 없는 게 확인되면 자물쇠를 부수고 들어가서 귀중품을 훔친다는 겁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깨닫자 꼬맹이가 상당히 놀랐습니다. 크리스터와 구닐라도 꼬맹이만큼이나 놀랐어요. 크리스터는 예파를 꼬맹이 방에 두고 온 것을 무척 아쉽게 여겼어요. 예파가 짖어서 유령 놀이를 망칠까 봐 그렇게 했지요. 그런데 카를손 하나만이 전혀 놀라지 않았습니다.

    - 느긋하게, 언제나 느긋하게! - 카를손이 속삭였어요. - 이런 경우에 유령이 정말 쓸모가 있다. 조용히 식당으로 가자꾸나. 네 아빠는 금붙이와 보석들을 거기에 보관할 테니 말이야. 


    카를손과 꼬맹이, 크리스터, 구닐라가 뒤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식당으로 들어가서 각자 가구 뒤에 숨었습니다. 카를손은 오랜 된 예쁜 찬장으로 기어든 뒤 (엄마는 거기에 식탁보와 냅킨을 두었지요) 어찌어찌 문을 닫았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도둑들이 식당으로 몸을 낮추고 들어오는 바람에 찬장 문을 꼭 닫지는 못했습니다. 꼬맹이가 벽난로 곁에 놓인 소파 밑으로 들어가서 조심스레 코를 내밀고 내다봤습니다. 식당 한가운데 아주 추잡하게 생긴 사람 둘이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아, 이게 누군가요, 바로 필레와 룰레 아닌가요! 


꼬맹이와 동무들이 소파 밑으로 숨다.


    - 돈을 어디 두는지 알아야 돼. - 필레가 쉰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 거야 빤하지, 여기야. - 룰레가 서랍이 많이 달린, 오래 된 장식장을 가리키면서 대꾸했습니다. 

    꼬맹이는 알고 있었어요. 엄마는 그 서랍들 중 하나에 생활비를 넣어두고 다른 서랍에는 할머니가 선사한, 예쁘고 값비싼 반지와 브로치들 또 아빠가 사격대회에서 받은 금메달들을 보관했거든요. 

    ‘그 물건들을 훔쳐 가면 안 되는데.‘ 꼬맹이가 생각했어요.

    - 넌 여기서 찾아봐라. - 필레가 나직이 말했습니다. - 난 주방으로 가서 은제 스푼과 포크들이 있는지 보겠어.

    필레가 사라지고 룰레가 장식장 서랍들을 하나씩 빼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갑자기 신이 나서 휘파람을 불었습니다. 

    ‘돈을 발견한 모양이야.’ 꼬맹이가 생각했습니다. 

    룰레가 다른 서랍을 빼들고는 또 휘파람을 불었습니다. 반지와 브로치들을 본 겁니다. 


    그러나 휘파람 소리가 오래 가지는 못했습니다. 왜냐면 그 순간 찬장 문이 활짝 열리고 소름 끼치는 신음소리를 내면서 유령이 튀어나왔으니까요. 룰레가 고개를 돌려 유령을 보자마자 기겁하여 돼지 멱따는 소리를 내지르면서 돈이며 반지, 브로치 등속을 죄다 바닥에 떨어뜨렸습니다. 


유령으로 변장한 카를손이 도둑 둘을 놀래 쫓아내다.


    유령이 도둑 주변을 뱅뱅 돌면서 신음소리도 내고 탄식하는 소리도 내더니, 갑자기 주방으로 쏜살같이 날았습니다. 일 초도 지나지 않아 주방에서 필레가 뛰쳐나왔어요. 얼굴이 핏기 하나 없이 하얗게 질렸습니다. 


    - 울레, 류령이 있어, 저기! - 필레가 울부짖었어요. 

    사실은 “룰레, 유령이 있어, 저기!” 하고 말하려 했지만, 공포에 질려서 혀가 꼬이다 보니 철자가 바뀌어 나온 겁니다.

    그래요, 놀랄 만도 했지요! 유령이 바짝 뒤쫓아 날아오면서 무시무시한 신음소리와 한숨소리를 내는 바람에 그야말로 숨이 멈출 정도였으니까요. 

    룰레와 필레가 문 쪽으로 달려갔지만, 유령이 도둑들 주변을 감돌며 따라붙었습니다. 둘은 어찌나 무서웠든지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현관을 거쳐 계단참으로 도망쳤습니다. 유령이 그 뒤를 바짝 쫓아 계단 아래로 내몰면서 듣기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 목소리로 몇 번 외쳤습니다.

    - 느긋하게, 언제나 느긋하게! 이제 내 손에 붙잡히면 너희는 더 재미날 거다!

    그러나 잠시 뒤 유령도 힘이 빠져서 식당으로 돌아왔습니다. 꼬맹이가 마룻바닥에 흩어진 돈과 반지, 브로치 등속을 주워서 다시 제 자리에 돌려놓았습니다. 구닐라와 크리스터는 필레가 주방과 식당 사이에서 쩔쩔매다가 떨어뜨린 포크와 스푼을 다 주워 모았습니다.


    - 세상에서 제일가는 유령은 바로 지붕 위에 사는 카를손이다. - 유령이 외치면서 홑이불을 벗었습니다. 

    아이들이 웃었어요. 행복했지요. 그리고 카를손이 한마디 더 했어요.

    - 도둑을 겁줘야 할 때는 유령이 최고다. 그런 사실을 사람들이 안다면, 작고 고약한 유령을 시내에 있는 현금 출납구마다 당장 배치할 거야.

    꼬맹이는 위기를 잘 넘긴 것이 기뻐서 팔짝팔짝 뛰었습니다. 그러면서 한마디 보탰어요. 

    - 사람들이 참 어리석어, 유령을 믿다니 말이야. 웃기는 거지! 아빠 말로는, 초자연적이란 것은 있지도 않대. - 그러면서 그 말을 확인하듯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 저 도둑들은 정말 멍청해. 찬장에서 유령이 튀어나왔다고 생각하다니! 사실, 그건 지붕 위에 사는 카를손이었는데, 하하하. 초자연적인 것이란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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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카를손이 유령 놀이를 하다



꼬맹이가 지붕에 어떻게 올라가게 된 건지를, 다음 날 점심식사 때가 되어서야 부모님이 물었습니다. 

- 다락에 있는 지붕창을 통해 기어 올라간 거니? 

엄마 물음에 꼬맹이가 느긋하게 대답했습니다. 

- 아니, 지붕 위에 사는 카를손과 함께 날아갔어.

엄마와 아빠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서로 마주보았습니다. 

- 자꾸 그렇게 나오면 곤란하다! 그 카를손이라는 사람 때문에 난 정말 미칠 것만 같아! - 엄마 목소리가 높아졌어요. 

- 얘야, 지붕 위에 사는 카를손 같은 건 전혀 없단다. - 아빠도 한마디 얹었습니다.

- 없다고?! 어쨌든 어제는 있었어.

꼬맹이가 고집을 부리자 엄마가 염려하는 빛으로 고개를 저었습니다. 

- 곧 방학이 시작돼 네가 할머니 댁에 가게 되니 다행이구나. 거기서는 카를손이 널 못살게 굴지 않겠지.


그런 계획을 꼬맹이는 전혀 생각도 못했습니다. 여름내 꼬맹이를 시골 할머니한테 보낸다는 겁니다. 그건 두 달 동안 카를손을 못 본다는 뜻이에요. 

물론, 여름에 할머니 집은 아주 좋아. 거기서는 늘 즐거워. 하지만 카를손이… 내가 도시로 돌아올 때 카를손이 지붕 위에서 더 이상 살지 않는다면?

꼬맹이가 식탁에 팔꿈치를 괴고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습니다. 카를손이 없는 생활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 식탁에 팔꿈치 올리면 안 된다는 걸 몰라? 

베탄 누나가 가볍게 나무라는 소리에 꼬맹이가 불퉁거렸습니다.

- 너나 잘 해!

엄마도 누나 편을 드는 것처럼 말하는군요.

- 식탁에서 팔꿈치를 떼라, 꼬맹이. 양배추를 놓아줄까?

- 싫어. 양배추를 먹을 바엔 죽는 게 더 낫지!

- 저런! “고맙지만 안 먹을래요” 하고 말해야지. - 아빠는 가볍게 탄식까지 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억만금 값이 나가는 아이에게 왜 호통만 치는 거지’ 하고 꼬맹이가 생각했지만, 소리 내어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 내가 “양배추를 먹을 바에는 죽는 게 더 낫지” 하고 말하는 건, “고맙지만 안 먹겠어요” 하는 뜻이라는 걸 엄마 아빠가 잘 알잖아.

막내가 항의하자 아빠가 가볍게 타일렀습니다.

- 교양 있는 이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단다. 넌 교양인이 되기를 원하지 않니?

- 아니요, 아빠. 난 아빠 같은 사람이 되고 싶어.

엄마와 보쎄 형과 베탄 누나가 깔깔대고 웃었습니다. 꼬맹이는 식구들이 무엇 때문에 웃는지 몰랐습니다. 그러나 아빠를 두고 웃는다고 생각했지요. 그건 어떡하든 참을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아빠를 똑바로 보면서 다시 말했습니다.

- 응, 난 아빠 같은 사람이 되고 싶어. 아빠는 아주 좋은 분이야!

- 고맙다, 얘야. 근데 정말 양배추를 먹지 않을래? - 아빠 목소리가 한결 더 부드러워졌습니다. 

- 먹지 않을래. 양배추를 먹을 바엔 죽는 게 더 낫지!

- 하지만 이건 몸에 아주 좋은 건데.

엄마 한숨 소리를 들으면서도 꼬맹이가 지지 않았습니다.

- 그럴지도 모르지. 맛이 없는 음식일수록 몸에 좋다는 걸 난 벌써부터 알아차렸어. 왜 비타민은 다 맛없는 것에만 들어 있는 걸까?

- 비타민은 초콜릿과 껌에도 당연히 들어 있어야 돼. - 보쎄 형이 재치를 부렸습니다.

- 아하, 오랜 만에 말 같은 말을 하네. - 꼬맹이가 퉁명스레 대꾸했습니다.


점심 식사가 끝나고 꼬맹이가 자기 방으로 갔습니다. 카를손이 얼른 와 주기 바라는 마음이 간절했어요. 며칠 안에 시골로 떠날 텐데, 그래서 이제 둘은 더 자주 봐야 했습니다.

카를손도 꼬맹이가 자기를 기다린다고 느낀 모양입니다. 꼬맹이가 창문에 코를 박는 순간 번쩍 나타났지 뭡니까. 

- 오늘은 열이 없어? - 꼬맹이가 물었어요.

- 나한테? 열이라고?.. 흠, 난 열이 오른 적이 한 번도 없어! 이건 암시다, 암시.

- 열이 없다고 자기암시를 했단 말이야? - 꼬맹이가 놀라서 물었어요. 

- 아니, 그게 아니라, 나한테 열이 없다고 너에게 암시를 준 거야. - 카를손이 재미있다는 듯이 대답하고 웃으면서 덧붙였습니다. - 알아맞혀 봐라. 세상에서 누가 가장 기발한 착상을 하지?


카를손은 잠시도 한 자리에 있지 않았어요. 얘기를 나누면서 줄곧 방안을 돌아다니고, 손에 잡히는 걸 다 건드리고, 상자들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여닫고, 물건 하나하나를 다 아주 흥미롭게 들여다봤습니다.

- 그래, 오늘은 나한테 열이 전혀 없다. 오늘 난 황소처럼 튼튼하고 가볍게 기분을 전환하고 싶다.

꼬맹이 역시 기분 전환을 마다할 리 없었습니다. 하지만 먼저 아빠와 엄마, 보쎄 형과 베탄 누나가 드디어 카를손을 보게 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야 앞으로는 카를손 얘기가 헛소리라고 손사래를 치지 않을 테니까 말이지요. 

그래서 다급하게 말했습니다.

- 잠깐만 기다려. 금방 돌아올게. 

그러고는 바람처럼 식당으로 달려갔습니다. 보쎄와 베탄은 집에 없었어요. 그건 물론 아주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 대신 엄마와 아빠가 벽난로 곁에 앉아 있었어요. 꼬맹이가 한껏 흥분하여 말했습니다. 


- 엄마, 아빠. 얼른 내 방으로 가 봐요!

카를손에 대해 일단은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미리 알리지 않고 보게 되면 더 좋을 것이라고 여겼거든요.

- 네가 우리랑 같이 앉지 않으련? - 엄마가 제의했습니다. 

그러나 꼬맹이는 엄마 손을 잡아끌었어요. 

- 아니, 엄마 아빠가 내 방에 가야 돼. 거기서 뭔가를 보게 될 거야…

길지 않은 대화가 성공적으로 끝났습니다. 아빠와 엄마가 꼬맹이를 앞세우고 방으로 갔습니다. 꼬맹이가 흐뭇한 마음으로 자기 방문을 활짝 열었지요. 

마침내 엄마와 아빠가 카를손을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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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만 울음을 터뜨릴 뻔했습니다. 그만큼 풀이 죽은 거지요. 바로 얼마 전 식구들을 카를손하고 인사 나누게 하려 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방안이 텅 비어 있었던 겁니다. 

- 그래 우리가 봐야 할 게 뭐니? 

엄마 말에 꼬맹이가 입속말로 웅얼거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 아, 특별한 건 아니고…

다행히도 그 순간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아빠가 전화를 받으러 갔고, 엄마는 오븐에 파이를 넣어둔 것을 기억하고 서둘러 주방으로 갔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꼬맹이가 난처하지 않게 넘길 수 있었습니다. 


풀죽고 화나서 의자에 걸터앉은 꼬맹이

혼자 남게 되자 창가에 앉았어요. 카를손에게 아주 화가 나서, 만일 다시 온다면 한바탕 퍼부어 주겠다고 단단히 마음먹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날아오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옷장 문이 열리고, 거기서 카를손이 천연덕스럽게 나오는 게 아니겠어요? 

꼬맹이가 놀라서 돌처럼 굳었지요.

- 내 옷장 안에서 무슨 짓을 한 거야?

- 거기서 쪼그리고 있었다고 말해야 하나?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닐 거야. 내가 잘못한 게 뭔지 생각했다고 말해야 하나? 그것도 사실이 아닐 거야. 그러면, 선반에 누워서 쉬고 있었다고 말해야 하나? 그래, 그게 사실일 거야! - 카를손이 주저리주저리 떠들었습니다. 

그러는 바람에 꼬맹이는 화가 잔뜩 났었다는 사실을 금방 잊었습니다. 카를손이 나타난 것이 마냥 기쁘기만 했어요.

옷장 문을 열고 빼꼼히 내다보는 카를손

- 이 멋있는 옷장은 숨바꼭질하기에 딱 좋다. 좀 놀아 볼까? 내가 다시 선반에 누울 테니까, 네가 날 찾아라.

그러고는 꼬맹이 대답도 듣지 않고 옷장으로 들어갔어요. 위쪽 선반에 숨으려는지 기어오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 됐어, 이제 찾아라! - 카를손이 소리쳤습니다. 

꼬맹이가 옷장 문을 열고는 선반에 누워 있는 카를손을 금방 보았지요. 그러자 카를손이 고함을 질렀습니다.

- 에이, 넌 아주 마음에 안 든다! 뭐야, 일단 침대 밑이라든지 책상 뒤, 아니면 다른 어디서 조금이라도 찾는 체할 수는 없었냐? 그렇게 나온다면 너랑 더 못 놀지. 퉤, 넌 혐오스러워! 


그때 현관에서 벨 소리가 울리고, 이어서 엄마 목소리가 들려 왔어요.

- 꼬맹이야, 크리스터와 구닐라가 놀러왔구나.

그 소리에 카를손의 기분이 다시 좋아졌어요. 그래서 꼬맹이한테 소곤거렸습니다. 

- 잠깐, 이제 우리가 저 애들한테 장난 좀 치자! 내가 들어가면 옷장 문을 단단히 닫는 거야…

꼬맹이가 옷장 문을 닫자마자 구닐라와 크리스터가 방에 들어섰어요. 


그 아이들도 같은 거리에 살고, 셋은 같은 학급에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꼬맹이는 구닐라가 아주 마음에 들어서, 엄마한테 ‘끔찍하게 예쁜’ 여자애라고 자주 얘기했습니다. 물론 크리스터도 아주 좋아했고, 이마에 난 혹도 이미 용서했답니다. 사실 크리스터하고는 자주 싸우기도 하지만 늘 금방 화해하는 편이에요. 그런데 꼬맹이가 크리스터만이 아니라 거리의 거의 모든 아이들과 싸우면서도, 구닐라를 때린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네가 구닐라를 한 번도 밀어붙인 적이 없다니, 어째서 그렇지?”

언젠가 엄마가 물었을 때 이렇게 대답했어요.

“그 애는 ‘끔찍하게 예뻐서’ 건드릴 일이 없어.”

그렇긴 해도 구닐라가 가끔은 꼬맹이를 아주 화나게 만들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어제 셋이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꼬맹이가 카를손 얘기를 했더니, 구닐라는 깔깔대면서 그건 다 꾸며낸 얘기라고 말하지 뭐에요. 크리스터도 구닐라 말에 고개를 끄덕였고, 그래서 꼬맹이가 홧김에 밀치자 크리스터가 꼬맹이에게 돌멩이를 던진 겁니다. 


그러나 이제 그 아이들은 아무 일 없었던 듯이 꼬맹이한테 놀러왔고, 크리스터는 자기 애완견 예파까지 데리고 왔어요. 예파를 보자 꼬맹이는 어찌나 기쁜지 옷장 속 선반에 누워 있는 카를손도 까맣게 잊고 말았습니다. 예파가 껑충껑충 뛰면서 짖었어요. 


꼬맹이 친구들이 강아지를 데리고 놀러오다.


‘세상에서 강아지보다 더 좋은 건 없어‘ 하고 생각하면서 꼬맹이가 예파를 안고 쓰다듬어 주었습니다. 

크리스터는 한쪽에 서서 꼬맹이가 예파와 친근하게 노는 것을 조용히 지켜보기만 했어요. 예파가 바로 자기 개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꼬맹이가 마음껏 데리고 놀아도 좋다고 생각한 겁니다.

꼬맹이가 예파와 정신없이 노는 중에 구닐라가 쓴웃음을 지으면서 뜬금없이 물었습니다.   

- 근데 지붕 위에 사는, 네 친구 카를손은 어디 있니? 우린 그 사람이 네 방에 있다고 생각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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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야 비로소 꼬맹이는 카를손이 옷장 선반 위에 누워 있다는 것을 기억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카를손이 어떤 장난을 하려고 하는지 전혀 몰랐기 때문에, 그 사실을 크리스터와 구닐라에게 입도 뻥긋하지 않았어요.

- 구닐라, 너는 지붕 위에 사는 카를손을 내가 지어낸 거라고 생각하지? 그 사람은 허깨비라고 어제 네가 말했잖아.

- 물론, 그 사람은 허깨비야. - 구닐라가 냉큼 대답하면서 호호 웃는데, 양쪽에 볼우물이 패였습니다. 

- 만약, 허깨비가 아니라면? - 꼬맹이가 은근하게 물었어요. 

- 하지만 그 사람은 정말 꾸며낸 거잖아! - 크리스터가 대화에 끼어들었습니다.  

- 그렇지 않단 말이야! - 꼬맹이 목소리가 커졌습니다. 


그러고는 이 다툼을 주먹다짐이 아니라 말로 푸는 게 더 나은지, 아니면 크리스터를 그냥 단박에 밀어버리는 게 더 나은지, 생각을 정리하려는 순간, 옷장에서 난데없이 닭 울음소리가 우렁차게 울렸습니다.

꼬-끼-오!

- 어, 이게 무슨 소리야? - 구닐라가 비명을 질렀습니다. 놀라는 바람에 버찌처럼 빨간 입술을 떡 벌렸어요.

꼬-끼-오!

옷장에서 다시 소리가 들리는데, 진짜 수탉들이 우는 것과 똑같았습니다.

- 뭐야, 옷장에서 수탉을 키우니? - 크리스터도 놀랐어요. 

예파가 으르렁대면서 옷장으로 달려들었습니다. 꼬맹이가 깔깔 웃었어요. 어찌나 우습든지 말도 할 수 없었어요. 

꼬-끼-오!

닭소리가 세 번째 울렸습니다. 

- 옷장을 열고 뭐가 있는지 봐야겠어. - 구닐라가 호기심을 보이며 문을 열어젖혔습니다. 

크리스터도 그쪽으로 폴짝 뛰어가서 함께 옷장 안을 들여다봤습니다. 


처음에는 줄줄이 걸려 있는 옷들만 눈에 들어왔지만, 곧 위쪽 선반에서 킥킥대는 소리가 들렸어요. 크리스터와 구닐라가 선반 위에 작고 퉁퉁한 사람이 누워 있는 걸 보게 됐습니다. 그 사람은 한 손으로 머리를 괴고 편하게 누워서 오른쪽 작은 발을 까닥이고 있었습니다. 장난기 많은 두 눈을 반짝거리면서.


옷장 속에 숨어 있던 카를손을 꼬맹이 동무들이 보고 놀라다.


크리스터와 구닐라가 어찌나 놀랐는지 그 사람을 말없이 쳐다보기만 했고, 예파 혼자 계속 나직하게 으르렁거렸습니다. 


구닐라가 정신을 차리고 물었습니다. 

- 이게 누구야?

- 한낱 작은 허깨비일 뿐이다. - 이상한 사람이 대꾸하고는 발을 한층 더 힘차게 까딱거렸습니다. - 나는 누워서 쉬고 있는 작은 판타지야. 간단히 말하면, 허깨비지!

- 이… 이건… - 크리스터가 말을 더듬었습니다. 

- …편하게 누워서 닭소리를 내는 작은 허깨비다. - 그 사람이 말을 받았습니다. 

- 바로 지붕 위에 사는 카를손이야! - 구닐라가 속삭였어요.

- 물론이지, 누가 또 있겠냐! 꼬부랑 할머니가 숨어들어 누워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꼬맹이는 허리가 끊어져라 웃어댔습니다. 넋을 놓고 있는 크리스터와 구닐라가 아주 멍청하게 보였거든요. 

- 이 애들은 벙어리가 됐을 거야. - 꼬맹이가 겨우 입을 뗐습니다.


(카를손이 선반에서 폴짝 뛰어내리더니 구닐라에게 다가가서 뺨을 살짝 꼬집었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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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지붕 위에 사는 카를손 1. 카를손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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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책과 비난 섞지 않고 자기감정 드러내기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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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웰 교수의 머리 23, 2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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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시 낭송

(69) 희곡 읽기

자장가 (a lullaby)

목소리와 여성

7. 카를손이 영리한 개 알베르트와 공연하다

공연 '기적의 밤' (7장 계속)

8. 카를손이 생일에 오다

식구들이 카를손을 보다 (8장 계속)


(5장 계속) 

    둘이 숨을 좀 돌리고 난 뒤 카를손이 물었습니다. 

    - 좀도둑들을 보고 싶냐? 여기 우리 건물 다락방에 일급 좀도둑 두 명이 살고 있다.

    카를손은 그 좀도둑들이 자기 물건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했어요. 꼬맹이가 그 말을 썩 믿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들을 보고 싶었습니다. 

    카를손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다락방 창문에서 말소리와 웃음소리, 고함 따위가 요란하게 뒤엉켜 새나왔습니다.

    - 흠, 아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군! - 카를손이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 저들이 뭣 때문에 저렇게 즐거운 건지 가서 알아보자. 

    카를손과 꼬맹이가 다시 처마를 따라 기었습니다. 다락방까지 이르자 카를손이 고개를 빼들고 창을 들여다봤습니다. 창문에는 커튼이 쳐져 있지만 그 틈새로 방안이 훤히 보였습니다. 


    - 좀도둑들한테 손님이 왔군. - 카를손이 속삭였어요. 

    꼬맹이도 커튼 틈새로 들여다봤습니다. 방안에는 정말 좀도둑처럼 보이는 사람 둘과 순진하고 어수룩하게 보이는 청년이 하나 앉아 있었습니다. 그 청년 같은 사람들을 꼬맹이는 시골 할머니 집에서 지낼 때 많이 봤지요. 

    -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겠냐? - 카를손이 속삭였어요. - 저 좀도둑들이 뭔가 못된 짓을 꾸미려는 것 같아. 하지만 우리가 가만 내버려두지는 않지… - 그러고는 다시 커튼 틈을 들여다봤습니다. - 난 너하고 내기할 준비가 돼 있다. 저들은 저 빨간 넥타이를 맨 가엾은 청년을 알겨먹을 게 틀림없어!


    좀도둑 둘과 넥타이 맨 청년은 창가에 놓인 작은 탁자에 둘러앉아서 먹고 마시는 참이었습니다.

    좀도둑들은 자기네 손님 어깨를 간간이 툭툭 건드리면서 듣기 좋은 말을 늘어놓았습니다. 

    - 자네를 만나니 우린 참 좋네, 다정한 오스카!

    - 나도 당신들과 알게 돼서 아주 기뻐요. - 오스카가 대답했습니다. - 도시에 처음 올라오게 되면 선량한 친구들이 정말 필요해요. 미덥고 확실한 친구들 말입니다. 그렇지 않고 협잡꾼 따위나 만나게 되면 한순간에 다 털리고 말 거예요.

    그 말에 좀도둑들이 그럴싸하게 맞장구를 쳤습니다. 

    - 암, 그렇고말고. 협잡꾼들 제물이 되는 건 순식간이야. 젊은이, 자네가 필레와 나를 만난 건 정말 운이 좋은 거라구.

    - 자네가 룰레와 나를 만나지 않았다면 곤란하게 됐을 거라는 점은 분명하지. 자, 한 잔 더 마시게.

    필레라고 불린 자가 한마디 거들고는 오스카 어깨를 또 툭 쳤어요.


    그러면서 필레는 꼬맹이가 아주 놀랄 만한 짓을 했습니다. 즉, 오스카의 바지 뒷주머니에 슬그머니 손을 넣어 지갑을 꺼내서 자기 바지 뒷주머니에 슬쩍 집어넣지 뭔가요. 오스카는 전혀 눈치 채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순간에 룰레가 그를 끌어안았으니까요. 룰레가 포옹을 풀었을 때 그의 손아귀에는 오스카의 회중시계가 들려 있었어요. 룰레도 그걸 자기 바지 뒷주머니에 넣었어요. 오스카는 그것도 역시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지붕 위에 사는 카를손이 가만있지 못했습니다. 통통한 손을 커튼 밑으로 조심스레 뻗어 필레의 주머니에서 오스카의 지갑을 꺼냈어요. 필레도 그건 전혀 몰랐어요. 카를손이 다시 커튼 밑으로 통통한 손을 뻗더니 룰레의 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빼냈지요. 룰레도 역시 전혀 눈치 채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몇 분 뒤 룰레와 필레, 오스카가 다시 술잔을 비우고 안주를 집어먹을 때, 필레가 자기 주머니에 손을 넣어 보고는 지갑이 없어진 걸 알았습니다. 그러자 룰레를 사납게 쏘아보면서 말했습니다. 

    - 이봐, 룰레, 잠깐 현관에 나가서 얘기 좀 하자. 뭔가 해명해야겠어. 

    그때 룰레도 자기 주머니를 뒤지고는 시계가 없어진 걸 알았어요. 그리고 역시 사납게 필레를 쳐다보고는 쏘아붙였습니다. 

    - 그래, 나가자! 나도 너하고 얘기 좀 해야겠어.


    필레와 룰레가 현관으로 나가자 가엾은 오스카만 혼자 남았습니다. 그러나 잠시 뒤 혼자 있는 게 심심해서 새 친구들이 무얼 하는지 보러 현관으로 나갔습니다. 

    그러자 카를손이 창턱을 가볍게 뛰어넘어서 지갑을 수프 대접 위에 놓았습니다. 필레와 룰레, 오스카가 이미 수프를 박박 긁어 먹은 뒤였기에 지갑은 젖지 않았어요. 그리고 회중시계는 벽 램프에 걸어 놓았습니다

    걸린 시계가 가볍게 흔들리는 바람에 필레와 룰레, 오스카가 방으로 들어서면서 금방 보게 됐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카를손은 못 봤어요. 그들이 들어서기 직전에 바닥까지 길게 늘어진 식탁보 밑으로 기어들어갔거든요. 식탁 밑으로는 꼬맹이도 기어들었습니다. 무섭긴 하지만 카를손을 그런 위험한 상태에 혼자 두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으니까요. 


꼬맹이와 카를손이 좀도둑들 탁자 밑에 숨다


    - 어, 저것 좀 봐. 내 시계가 램프 위에 걸려 있네! - 오스카가 놀라서 소리쳤습니다. - 어떻게 저기 있게 됐지? - 그러면서 램프로 다가가 시계를 집어서 저고리 주머니에 넣었습니다. - 근데 내 지갑은 또 여기 있어! - 수프 접시를 보고는 오스카가 더욱 놀랐어요. - 거 참, 이상한 일이군!

    룰레와 필레가 꼼짝도 않고 오스카를 쳐다보다가, 입을 모아 외쳤습니다. 

    - 자네네 시골 젊은이들도 빈틈이 없는 것 같네!

    그러고 나서 오스카와 룰레, 필레가 다시 식탁에 둘러앉았습니다. 

    - 이보게, 오스카. - 필레가 말했어요. - 자, 실컷 마시게, 더, 더!

    그리고 셋은 다시 먹고 마시며 서로 어깨를 툭툭 치기 시작했습니다.


    몇 분이 지나 필레가 식탁보를 살짝 들추고 오스카의 지갑을 식탁 밑으로 던졌어요. 아마도 필레는 자기 주머니보다 식탁 밑이 지갑을 두기에 더 안전하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지붕 위에 사는 카를손이 지갑을 들어서 룰레 손에 쥐어준 겁니다. 그러자 룰레가 입을 놀렸습니다. 

    - 필레, 내가 자네를 잘못 생각했어. 자넨 아주 좋은 사람이네.

    또 얼마 지나서 룰레가 식탁보 밑으로 손을 내리더니 시계를 바닥에 던졌습니다. 카를손이 그걸 집어 들고 필레의 발을 툭 건드리더니 그 손에 쥐어 주었습니다. 그러자 필레가 입을 놀렸어요.

    - 룰레, 자네보다 더 믿음직한 동료는 세상에 다시없어!

    그러나 이때 오스카가 고래고래 소리 지르기 시작했습니다.

    - 내 지갑이 어디 갔지? 또 시계는 어디 갔어?!

    그 순간 지갑과 시계가 다시 식탁 밑으로 떨어졌습니다. 필레도 룰레도 현행범으로 붙잡히고 싶지는 않았거든요. 한데 오스카는 이미 정신이 나가서 자기 물건들을 내놓으라고 계속 으르렁댔습니다. 

    그러자 필레가 소리쳤습니다. 

    - 그따위 냄새 나는 지갑을 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어떻게 아나!

    룰레가 한마디 거들고 나섰어요. 

    - 우린 자네의 낡아빠진 회중시계를 보지도 못했어! 자기 물건은 자기가 잘 간수해야지.


    이때 카를손이 마루에서 지갑과 시계를 집어 들어 오스카 손에 쥐어 주었습니다. 오스카가 자기 물건들을 움켜쥐고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 고마워, 다정한 필레, 고마워, 다정한 룰레. 그러나 다음에는 나한테 이런 장난을 치지 마!

    이때 카를손이 있는 힘을 다해서 필레의 발을 걷어찼습니다.

    - 룰레, 너도 대가를 치르게 될 거다! - 필레가 고함을 질렀어요.

    그러는 사이에 카를손이 룰레의 발을 때렸는데, 어찌나 아픈지 금방 죽는 소리가 터졌습니다. 

    - 너, 미쳤냐? 무슨 짓을 하는 거야? - 룰레가 비명을 질렀어요.

    룰레와 필레가 식탁에서 펄떡 일어나 주먹다짐을 벌이는데, 어찌나 사납게 싸우는지 접시들이 다 바닥에 떨어져 깨졌습니다. 그 바람에 오스카가 질겁하여 지갑과 시계를 주머니에 찔러 넣고는 자기 집으로 사라졌습니다. 


    오스카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꼬맹이 역시 갑자기 벌어진 상황에 아주 놀랐지만, 자기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기에 식탁 밑에서 그냥 몸을 웅크리고 있었습니다.

    필레가 룰레보다 힘이 더 셌어요. 룰레의 멱살을 잡아 현관까지 몰아붙이면서 제 딴에는 대가를 치르게 했습니다.

    그때 카를손과 꼬맹이가 재빨리 식탁 밑에서 나왔어요. 카를손이 마루에 흩어진 접시 조각들을 보고서 말했습니다.

    - 접시들이 다 깨지고 수프 대접만 멀쩡하네. 이 가엾은 수프 대접은 얼마나 외로울까!

    그러고는 있는 힘을 다 해서 수프 대접을 바닥에 내동댕이쳤어요. 그리고 둘은 창문으로 달려가서 잽싸게 지붕으로 빠져나갔습니다. 

    곧이어 필레와 룰레가 방으로 돌아왔는데, 필레가 묻는 말이 꼬맹이 귀에까지 들렸습니다. 

    - 이런 멍청한 자식, 지갑과 시계를 도대체 왜 돌려준 거야?

    - 너, 정신 나갔냐? 네놈이 그런 거잖아!

    룰레가 맞서면서 서로 주고받는 욕설을 들으며 카를손이 배가 출렁일 정도로 깔깔댔습니다.

    - 오늘 재미는 이걸로 충분하다!

    꼬맹이도 오늘 장난으로 목구멍까지 배가 불렀습니다


    둘이 손을 잡고 꼬맹이 집 지붕 위에 있는 굴뚝 뒤 작은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날이 캄캄해졌습니다. 둘이 거의 다 왔을 때 사이렌 소리 요란하게 울리면서 소방차가 거리를 질주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 어디서 불이 난 게 분명해. - 꼬맹이가 말했습니다. - 소방차가 지나갔잖아, 들었지?

    - 네 집일 수도 있다. - 은근히 그렇기를 바란다는 투로 카를손이 대꾸했습니다. - 네가 나한테 말만 하면, 내가 소방관들을 기꺼이 도울 거야. 왜냐면 난 세상에서 제일가는 소방관이니까.

    소방차가 건물 현관 앞에서 멈추는 것을 둘이 지붕에서 내려다봤습니다. 소방차 주변에 사람들이 잔뜩 몰려들었어요. 그러나 불은 어디서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소방차에서 지붕까지 아주 기다란 사다리가 재빨리 놓였습니다.


   - 나 때문에 그런 건가?

    꼬맹이가 자기 방에 남겨둔 쪽지를 떠올리고 불안하게 물었습니다. 정말이지 벌써 시간이 많이 늦었어요.

    - 왜 저렇게들 호들갑을 떠는지 모르겠다. 꼬맹이, 네가 잠시 지붕 위에서 돌아다닌다고 해서 마음 졸일 사람이 과연 있을까? - 카를손이 가볍게 짜증을 냈습니다. 

    - 그래, 엄마가. 엄마는 신경이 예민해서…

    꼬맹이가 문득 엄마한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얼른 집에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 소방관들하고 좀 장난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텐데… 

    카를손이 뭔가 일을 또 꾸미려 들었지만, 꼬맹이는 더 이상 기분을 전환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다리에 올라탄 소방관이 지붕에 올라올 때까지 잠자코 서서 기다렸습니다. 

    - 그래, 나도 잠자리에 들 시간이 된 것 같다. - 카를손이 말했어요. - 물론 우리는 아주 차분하게, 대놓고 말하자면 모범적으로 처신했다. 그러나 오늘 아침 나한테 고열이, 30도에서 40도 되는 열이 있었던 걸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자기 작은집을 가리킨 뒤 “잘 가, 꼬맹이!” 하고 외쳤습니다.  

    - 잘 있어, 카를손!

    꼬맹이가 사다리를 타고 올라오는 소방관한테서 눈을 떼지 않고 대꾸했습니다. 

    - 어이, 꼬맹이. - 카를손이 굴뚝 뒤로 모습을 감추기 전에 소리쳤습니다. - 내가 여기 산다고 소방관한테 말하지 마라! 난 세상에서 제일가는 소방관이잖아. 어디선가 화재가 날 때 그들이 날 부르러 올까봐 겁난다.


    소방관이 벌써 지붕 가까이 올라왔습니다. 

    - 꼼짝 말고 그 자리에 있어라! 내 말 들었니. 제 자리에서 움직이지 마라! 이제 올라가서 널 구해줄게.

    꼬맹이는 소방관 아저씨의 경고가 친절하기는 하지만 무의미하다고 생각했어요. 저녁 내내 지붕 위에서 돌아다녔는데, 뭐. 지금도 사다리 쪽으로 몇 발짝을 뗄 수 있어.

    - 아저씨를 우리 엄마가 보냈어요? - 소방관이 손을 잡고 내려갈 때 꼬맹이가 물었습니다.

    - 그래, 물론 네 엄마가 보내셨지. 한데… 내 보기엔 지붕 위에 사내애가 둘이 있는 것 같았는데…

    꼬맹이가 카를손의 부탁을 떠올리고 천연스레 말했습니다.

    - 아니요. 여기에 다른 사내애는 없었어요.


    엄마에겐 정말로 ‘신경증세’가 발동했습니다. 엄마와 아빠, 보쎄 형, 베탄 누나, 또 많은 낯선 사람들이 거리에서 꼬맹이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엄마가 달려와서 꼬맹이를 끌어안았어요. 그리고 웃기도 하고 울기도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아빠가 꼬맹이 손을 꼭 쥐고 집으로 데려갔습니다. 


    - 너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놀랐는지 아냐! - 보쎄 형이 말했습니다. 

    베탄 누나도 눈물을 흘리면서 당부했어요. 

    - 앞으로 다신 그런 짓 하지 마. 기억해, 꼬맹이, 절대 하지 마라!

    꼬맹이를 바로 침대에 누이고 식구들이 다 주변에 모였어요. 마치 꼬맹이 생일인 것처럼 말이지요. 그러나 아빠가 하시는 말씀은 아주 심각했습니다.

    - 우리가 걱정할지 정말 몰랐단 말이니? 엄마가 부들부들 떨며 눈물을 쏟을지 몰랐단 말이야?

    꼬맹이가 침대에서 몸을 웅크리면서 웅얼거렸어요. 

    - 뭐, 그렇게 걱정할 필요 있어?

    엄마가 꼬맹이를 꼭 끌어안고 말했어요. 

    - 생각 좀 해 보렴! 그러다가 지붕에서 떨어지기라도 하면? 너를 잃게 되면 어떡하니?

    - 그러면 식구들이 슬퍼하기나 할 거야?

    - 네가 보기엔 어떨 것 같니? 세상 그 어떤 보물을 준다 해도 우리는 너와 헤어지고 싶지 않단다. 너도 알고 있잖니. - 엄마가 대답했어요.

    - 백만 원을 준다고 해도? - 꼬맹이가 물었습니다. 

    - 억만금을 준다고 해도 너를 잃을 수는 없지!

    - 그러니까, 내가 그렇게 값 비싸단 말이야? - 꼬맹이가 놀랐습니다. 

    - 물론이란다. - 엄마가 대답하고 다시 끌어안았습니다! 


    꼬맹이가 곰곰이 생각했어요. 

    음, 억만금이면 엄청나게 많은 돈이야! 내가 과연 그렇게 비쌀 수 있을까? 강아지를, 진짜 귀여운 강아지를 20만 원만 주면 살 수 있는데…

    - 내 말 좀 들어봐요, 아빠. - 꼬맹이가 갑자기 입을 열었습니다. - 내가 정말 억만금 값이 나간다면, 지금 현금으로 20만 원을 받을 수는 없을까? 귀여운 강아지를 사려고 그래.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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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카를손의 장난


    - 아, 이제 난 기분 좀 전환하고 싶다. - 잠시 뒤에 카를손이 말했습니다. - 지붕을 뛰어다니면서 뭘 할지 생각하자꾸나.

    꼬맹이가 기꺼이 동의했습니다. 둘은 손을 잡고 지붕으로 나왔어요.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했고, 주변은 온통 아주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하늘은 봄에나 볼 수 있는 것처럼 파랗고, 어둠 속에 잠긴 집들은 늘 그렇듯이 뭔가 신비하게 보인 겁니다. 저 아래 꼬맹이가 자주 놀던 공원은 녹색으로 물들어 있고, 마당에서 크는 키 큰 버드나무마다 무성한 나뭇잎들이 놀랍도록 자극적인 냄새를 풍겼어요.


꼬맹이와 카를손이 손을 잡고 지붕 위를 돌아다니다.


    그날 저녁은 지붕 위에서 산책하기에 딱 좋았습니다. 주변에 열린 창문들에서는 별의별 냄새와 소리가 다 흘러나왔어요. 어떤 사람들의 나직한 대화, 아이들 웃음소리와 울음소리, 누군가가 주방에서 딸그락거리며 접시 닦는 소리, 개들이 짖는 소리, 피아노 소리… 어디선가 오토바이가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쏜살같이 지나갔고, 말발굽 소리와 마차 덜컹거리는 소리도 들려왔습니다. 

    꼬맹이가 기분이 좋아져서 한마디 했어요.

    - 만약 지붕으로 다니는 게 얼마나 상쾌한지 알았다면, 사람들은 거리로 다니는 걸 진작 그만뒀을 거야. 여긴 정말 좋아!

    카를손이 꼬맹이 손을 잡으면서 말을 받았습니다. 

    - 그래, 그러면서도 또 아주 위험하다. 떨어지기가 쉬우니까 말이야. 심장이 오그라들 만큼 무서운 곳을 몇 군데 보여주지.


    집들이 서로 바짝 붙어 있기 때문에 지붕에서 지붕으로 마음대로 옮겨 다닐 수 있었습니다. 툭 튀어나온 다락방이며 굴뚝, 모서리 때문에 지붕들이 저마다 아주 기묘한 모양을 띠었습니다. 

    사실 여기서 산책한다는 건 숨이 멎을 정도로 위험했어요. 집들 사이 어떤 데는 널따란 틈이 있어서 하마터면 꼬맹이가 빠질 뻔했습니다. 그러나 꼬맹이 발이 처마에서 미끄러지려는 순간 카를손이 손을 잡아주었지요.

    - 재미있냐? - 카를손이 꼬맹이를 지붕으로 끌어올리면서 큰 소리로 말했어요. - 내가 말한 데가 바로 이런 곳이야. 어때, 더 가 볼래?

    그러나 꼬맹이는 더 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어요. 심장이 너무 세게 두근거리지 뭡니까. 둘은 가파르고 미끄러운 곳들을 따라 걸었기 때문에, 떨어지지 않으려고 손으로 주변 물체를 붙잡고 발을 질질 끌어야 했어요. 근데 카를손은 꼬맹이를 재미나게 하려고 일부러 더 힘든 길을 골랐습니다.


지붕에서 떨어질 뻔한 꼬맹이를 카를손이 붙잡아 올리다.


    - 우리가 좀 명랑해질 시간이 된 것 같다. - 카를손이 말했습니다. - 난 저녁마다 자주 지붕 위로 산책 다니면서 이 다락방에 사는 사람들을 잘 골려주거든. 

    - 어떻게 골리는데? - 꼬맹이가 물었습니다.

    - 여러 사람을 여러 방법으로 골리는 거다. 난 똑같은 장난을 두 번 하는 법이 없어. 생각해 봐라, 세상에서 제일가는 장난꾼이 누구겠니?


    갑자기 어디선가 갓난애가 빽빽 울어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조금 전에도 아기 우는 소리를 꼬맹이가 듣긴 했지만 그 소리는 곧 잦아들었었지요. 갓난애를 누군가가 잠시 얼렀던 모양인데, 이제 다시 울음을 터뜨린 겁니다. 울음소리는 아주 가까운 다락방에서 들려왔고, 왠지 외롭고 측은하게 들렸어요. 


    - 가엾은 아기! - 꼬맹이가 말했어요. - 배가 고파서 그런지도 몰라.

    - 이제 우리가 알아보면 된다. - 카를손이 대꾸했어요. 

    둘은 지붕 가장자리를 따라 엉금엉금 기어서 다락방 창문까지 이르렀습니다. 카를손이 고개를 살짝 빼들고 방안을 조심스레 들여다봤습니다.

    - 완전히 버림받은 아기야. 엄마와 아빠가 저들끼리 바깥에서 나돌아 다니는 게 분명해. - 꼬맹이가 안타깝다는 투로 말했습니다.

    아기는 울다가 지쳤어요. 

    - 느긋하게, 언제나 느긋하게! - 카를손이 창턱 위로 올라서서 씩씩하게 말했습니다. - 지붕 위에 사는 카를손이 나가신다. 세상에서 제일가는 유모가! 


다락방에서 혼자 울고 있는 아기


    꼬맹이는 지붕 위에 혼자 남아 있는 게 싫어서 카를손 뒤를 따라 창문을 넘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만일 아기 부모가 나타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겁이 났습니다. 

    한데 카를손은 아주 느긋했어요. 아기가 누워 있는 작은 침대로 다가가더니 통통한 집게손가락으로 아기 턱을 간질였습니다.  

 

카를손이 아기 턱을 간질이며 어르다.

  - 까꿍, 까꿍, 까꿍! - 장난스럽게 말하고는 꼬맹이한테 몸을 돌려 설명했습니다. - 젖먹이들이 울 때는 다들 늘 이렇게 어른다.

    아기가 놀라서 한순간 울음을 그쳤다가 금방 더 크게 울부짖었어요.

    - 까꿍, 까꿍, 까꿍! - 카를손이 한 번 달래고는 덧붙였어요. - 또 이런 식으로도 다들 갓난애를 달래지…

    그러고는 아기를 안고 몇 번 옆으로 힘차게 흔들었습니다. 

    아기는 그게 좋은 모양이에요. 왜냐면 이가 하나도 없는 입을 벌리고 갑자기 미소를 지었으니까요. 카를손이 아주 자랑스러워했습니다. 

    - 갓난애를 달래는 건 참 쉽다! 세상에서 제일가는 유모는 바로…

    그러나 아기가 다시 우는 바람에 말을 채 맺지 못했습니다.

    - 까꿍, 까꿍, 까꿍! - 카를손이 초조하게 어르면서 여자 아기를 더 세게 흔들기 시작했어요. - 내가 하는 말을 듣고 있니? 까꿍, 까꿍, 까꿍! 무슨 뜻인지 알겠어?

    그러나 아기는 계속 목이 터져라 울어대기만 했습니다. 그러자 꼬맹이가 아기에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 나한테 넘겨 봐. 

    꼬맹이는 갓난애들을 아주 좋아해서 엄마와 아빠한테 여자 동생을 선사해 달라고 몇 번이나 조른 적이 있답니다. 강아지를 사 주지 않겠다면 말이지요.

    꼬맹이가 우는 아기를 받아 포근하게 끌어안았습니다. 

    - 울지 마, 아가야! 넌 착한 사람이잖아…

    아기가 울음을 그치고 눈빛을 반짝이며 꼬맹이를 한참이나 쳐다봤어요. 그러더니 다시 미소를 짓고는 뭔가 나직이 옹알거렸어요.

    - 허어, 나의 “까꿍, 까꿍, 까꿍”이 먹혀든 거다. - 카를손이 우쭐댔습니다. - “까꿍, 까꿍, 까꿍”은 늘 어김없이 효과를 보거든. 천 번이나 확인해 봤지.

    - 그거 흥미로운 걸. 한데 아기 이름이 뭐지? 


    꼬맹이가 물어보면서 집게손가락 끝으로 아기의 작은 볼을 가볍게 토닥였습니다. 카를손이 잠깐 멈칫하더니 금방 대답했습니다. 

    - 귤피야. 여자 아기들 이름은 대개 그렇다. 

    꼬맹이는 여자애 이름이 귤피야라는 걸 들어본 적이 전혀 없었어요. 그러나 세상에서 제일가는 유모가 그렇게 말하니까 정말 그런가보다 하고 말았습니다. 

    - 귤피야 아기야, 뭐가 먹고 싶은 모양이구나. - 자기 집게손가락을 아기가 빨려고 하는 걸 보면서 꼬맹이가 말했습니다.

    - 귤피야가 배고프다면, 여기 소시지와 감자가 있다. - 카를손이 찬장을 들여다보고서 말했어요. - 카를손한테 소시지와 감자가 떨어지지 않는 한, 세상 그 어떤 아기도 굶어 죽는 일은 없다. 

    그러나 꼬맹이는 귤피야가 소시지와 감자를 먹을까 의심스러웠어요. 

 

꼬맹이가 아기를 안고 어르다.

  - 이렇게 어린 아기들은 우유를 먹일 걸. - 꼬맹이가 반대하여 주장했습니다.

    - 그러니까, 넌 세상에서 제일가는 유모가 아기들에게 뭘 먹이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거냐? - 카를손이 발끈했어요. - 하지만 네가 정 우긴다면, 내가 젖소를 구하러 날아갔다 올 수도 있어…

    그러고는 못마땅한 눈길로 창문을 쳐다보더니 한마디 더 했습니다. 

    - 이렇게 작은 창문으로는 젖소를 끌어들이기 어렵겠는데.

    귤피야가 꼬맹이 손가락을 꼭 잡고는 애처롭게 흐느꼈어요. 아기는 정말 배가 고픈 모양입니다. 

    꼬맹이가 찬장을 뒤졌지만 우유는 찾지 못했어요. 소시지 세 조각이 담긴 접시만 나왔습니다.

    - 느긋하게, 언제나 느긋하게! 어디서 우유를 구할 수 있는지 떠올랐다… 어디론가 좀 날아갔다 와야겠어… 금방 돌아올게!


    카를손이 배에 달린 단추를 누르더니 꼬맹이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쏜살같이 창밖으로 날아갔습니다. 

    꼬맹이가 아주 놀랐어요. 만약에 카를손이 여느 때처럼 몇 시간 동안 사라진다면 어떻게 되는 거지? 아기 부모가 돌아와서 꼬맹이 품에 있는 귤피야를 본다면 어떻게 될까?

    그러나 크게 염려하지 않아도 됐습니다. 이번에는 카를손이 오래 기다리도록 하지 않았거든요. 수탉처럼 우쭐거리면서 창문으로 날아들었는데, 흔히 아기들에게 물리는 작은 젖병을 가져온 겁니다. 

    - 이걸 어디서 났지? - 꼬맹이가 놀랐어요.

    - 내가 늘 우유를 얻는 곳에서. 변두리에 있는 아파트 발코니에서.

    - 그렇다면, 이걸 그냥 집어온 거야? - 꼬맹이가 소리쳤어요.

    - 그걸… 잠깐 빌린 거지.

    - 빌렸다고? 언제 돌려줄 건데?

    - 언제가 될지 나도 모르지!

    그 말에 꼬맹이가 카를손을 사나운 눈길로 쏘아봤습니다. 

    그러나 카를손은 그저 손만 홰홰 내둘렀어요.

    - 하찮은 거야, 일상적인 일이야… 그래봤자 허접한 우윳병 하난데 뭐. 거기엔 세쌍둥이를 낳은 가족이 있고, 그 집 발코니 양동이에는 이런 우윳병들이 얼음에 가득 채워져 있단 말이다. 내가 귤피야를 위해 우유를 조금 가져갔다는 걸 알면 그 사람들이 되레 기뻐할 거야.


    귤피야가 앙증맞은 손을 병으로 뻗치고 허둥지둥 빠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어요. 

    - 우유를 얼른 데울게. - 꼬맹이가 아기를 카를손에게 넘겼습니다. 

    카를손이 다시 “까꿍, 까꿍, 까꿍” 하면서 아기를 흔들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꼬맹이가 가스레인지를 켜고 병을 데우기 시작했어요. 


    몇 분 지나서 아기는 요람에 누워 곤하게 잠이 들었습니다. 배가 차서 흡족했으니까요. 꼬맹이가 아기 주변에서 괜스레 부산을 떨었습니다. 

    카를손이 요람을 열심히 흔들면서 큰 소리로 노래했습니다.

    - 까꿍, 까꿍, 까꿍… 까꿍, 까꿍, 까꿍…

    그러나 그렇게 소란을 피워도 아기는 잠을 깨지 않았어요. 많이 먹고 피곤했으니까요. 

    - 이제 여기서 나가기 전에 장난을 좀 치자. - 카를손이 한쪽 눈을 찡긋했습니다.

    그러고는 찬장으로 다가가서 썰어놓은 소시지가 담긴 접시를 꺼냈습니다. 꼬맹이가 놀라서 눈을 휘둥그레 뜬 채 하는 양을 지켜보기만 했습니다. 카를손이 접시에서 한 조각을 집었어요. 


    - 무슨 장난인지 곧 알게 될 거다. - 그러면서 소시지 한 조각을 문손잡이에 걸어 놓았습니다. - 이건 1번이야. - 그렇게 말하면서 흡족한 듯이 고개를 주억거렸습니다. 

카를손이 도자기 비둘기 부리에 소시지 조각을 꽂다.

    그 다음에는 서랍장으로 뛰어갔어요. 그 위에는 예쁜 흰 도자기 비둘기가 놓여 있는데, 꼬맹이가 입을 열기도 전에 그 부리에 소시지 조각이 꽂혔습니다. 

    - 2번이야. - 카를손이 입을 놀렸어요. - 그리고 3번은 귤피야가 받을 거다.

    접시에서 마지막 소시지 조각을 집더니 자고 있는 아기 손에 쥐어 준 겁니다. 그건 사실 아주 우스꽝스럽게 보였어요. 아기가 일어나서 치즈 조각을 집어 손에 쥐고 잠이 들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거지요.

    재미는 있어 보이지만 그래도 꼬맹이가 말렸습니다. 

    - 그건 하지 마, 제발.

    그러나 카를손은 꼬맹이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 느긋하게, 언제나 느긋하게! 우리는 아기를 놔두고 부모가 저녁마다 외출하는 버릇을 고치는 거야. 

    - 어떻게? - 꼬맹이가 놀랐어요. 

    - 벌써 걸음마를 떼고 소시지를 집는 아기를 그 사람들이 앞으로 혼자 놔둘 생각을 하겠냐? 다음에는 아기가 무엇을 집을지 누가 알겠어? 아빠가 교회 갈 때 매는 넥타이가 될 수도 있지.

    그러면서 카를손은 소시지 조각이 아기 손에서 떨어지지 않는지 살펴봤습니다. 

    - 느긋하게, 언제나 느긋하게! 내가 뭘 하는지 난 알고 있다. 난 세상에서 제일가는 유모 아니냐.

    바로 그 순간 누군가가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를 듣고 꼬맹이가 놀라서 몸을 움츠리며 속삭였어요.

    - 부모가 온다!  

    - 느긋하게, 언제나 느긋하게! - 카를손이 꼬맹이를 창문 쪽으로 끌었습니다. 


    자물쇠 구멍에 벌써 열쇠가 꽂혔어요. 꼬맹이는 이제 다 끝났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둘은 어찌어찌 지붕으로 기어 나올 수 있었어요. 바로 그와 동시에 문이 활짝 열리고 말소리가 들려왔습니다. 

    - 우리 사랑스러운 수잔나가 혼자 잠이 들었네! - 여자가 말했어요. 

    - 그래, 우리 공주님이 자고 있군. - 남편이 맞장구를 쳤어요. 

    그러나 갑자기 비명이 쌍으로 터졌습니다. 아기가 손에 꼭 쥐고 있는 소시지 조각을 본 게 틀림없어요. 

    하지만 꼬맹이는 세상에서 제일가는 유모가 저지른 장난을 두고 아기 부모가 뭐라고 하는지 더 듣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 유모는 부모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벌써 굴뚝 뒤로 숨어 버렸습니다. 


    (둘이 숨을 좀 돌리고 난 뒤 카를손이 물었습니다. 

    - 좀도둑들을 보고 싶냐? 여기 우리 건물 다락방에 일급 좀도둑 두 명이 살고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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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카를손이 내기를 걸다 



    한번은 꼬맹이가 학교에서 씩씩거리며 집에 왔습니다. 그런데 이마에 혹을 달고 있군요. 엄마는 주방에서 바쁘게 움직이다가, 잠시 뒤 꼬맹이 이마를 보고 예상한 대로 속상한 얼굴을 했습니다.

오늘은 꼬맹이가 씩씩대며 학교에서 돌아왔어요.

    - 가엾은 꼬맹이, 이마가 왜 그렇게 됐니? - 엄마가 물으면서 안아 주었어요.

    - 크리스터가 나한테 돌멩이를 던졌어. - 꼬맹이가 시무룩하게 대답했습니다. 

    - 돌멩이를? 그런 못된 애가 있나! - 엄마 목소리가 높아졌어요. - 왜 엄마한테 곧바로 말하지 않았니?

    꼬맹이가 어깨를 한번 추썩였습니다. 

    - 그래봤자 무슨 소용 있어? 엄마는 돌멩이 던질 줄 모르잖아. 창고 벽도 못 맞히는데.

    - 이런, 얘 좀 봐! 넌 내가 크리스터에게 돌멩이를 던질 거라고 생각하는 거니?

    - 아니면, 그 애한테 뭘 던지고 싶은데? 다른 건 찾지 못할 거고, 어떤 경우라도 돌멩이가 가장 만만하잖아. 


    엄마가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필요하다면 크리스터만 돌멩이를 던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 분명했어요. 그녀가 사랑하는 아들도 더 나은 게 하나 없는 겁니다. 이렇게 착하고 파란 눈을 가진 작은 사내애가 싸움꾼이라니, 어찌 이럴 수가?

    - 말해 보렴, 싸우지 않고 잘 지낼 수는 없는 거니? 무엇이든 사이좋게 뜻을 맞출 수가 있단다. 꼬맹이야, 사실 제대로 상의한다면 합의하지 못할 일은 세상에 없어.

    - 아니, 그런 것들도 있어, 엄마. 예를 들어, 나도 바로 어제 크리스터와 싸웠는데…

    - 그래 봤자 무슨 소용이 있니. 너희들은 주먹다짐이 아니라 말로써 싸움거리를 해결할 수 있었을 거야. 

    꼬맹이가 주방 의자에 걸터앉아서 혹이 난 머리통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습니다. 

    - 그래? 엄마는 그렇게 생각해? - 그렇게 묻고는 찬성하지 못하겠다는 눈빛으로 엄마를 응시했습니다. - 크리스터가 “난 너를 두드려 팰 수 있어” 하고 말했단 말이야. 그렇게 말했다니까. 그래서 내가 “아니, 넌 그렇게 못해” 하고 대꾸했거든. 그런데도 우리가 엄마 말대로 주먹이 아니라 말로 싸움을 해결할 수 있었을까?

    엄마는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몰라서 그만 우물쭈물하고 말았습니다. 싸움꾼 아들은 아주 시무룩하게 앉아 있고, 엄마는 얼른 아들 앞에 핫 초콜릿 잔과 신선한 빵을 내놓으려고 서둘렀습니다. 


    그런 걸 꼬맹이는 아주 좋아했어요. 이미 계단에 올라설 때 막 구운 빵의 달콤한 냄새를 맡았습니다. 엄마가 계피를 넣고 만든 빵 때문에 사는 게 훨씬 더 견딜 만했지요. 

    아주 감사하는 마음으로 꼬맹이가 빵을 한 입 깨물었습니다. 

    빵을 먹는 동안 엄마는 아들 이마에 난 혹에 고약을 붙여 주었어요. 아픈 상처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물었습니다. 

 

꼬맹이가 식탁에 앉아 계피빵을 맛나게 먹다.

  - 근데, 오늘 크리스터하고는 무엇 때문에 싸웠니?

    - 아, 그게 말이야, 크리스터하고 구닐라가 내가 지붕 위에 사는 카를손 얘기를 지어냈다고 하잖아. 꾸며낸 얘기라는 거야.

    - 그게, 맞는 말 아니니? - 엄마가 조심스레 물었습니다.

    꼬맹이가 초콜릿 잔에서 눈을 떼고 엄마를 쏘아봤습니다.

    - 흠, 엄마까지 내 말을 못 믿네! 내가 카를손한테 넌 허깨비가 아니냐고 물었는데…

    - 그래, 그 사람이 뭐라고 하디? - 엄마가 호기심을 보였습니다.

    - 자기가 허깨비라면 세상에서 제일가는 허깨비일 거라고 하더군. 그러나 중요한 건 그 사람은 허깨비가 아니라는 거야. - 꼬맹이가 빵을 또 집었습니다. - 카를손은 오히려 크리스터와 구닐라를 허깨비라고 여기는 걸. 보기 드물게 멍청한 허깨비라고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엄마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습니다. 꼬맹이 상상을 깨려고 드는 게 무의미하다는 걸 안 거지요. 그러다가 결국 한마디 하고 말았습니다.

    - 네가 구닐라나 크리스터와 더 자주 놀고, 카를손 생각은 덜하면 좋을 텐데.

    - 카를손은 나한테 적어도 돌멩이를 던지지는 않아.

    꼬맹이가 웅얼거리면서 이마에 난 혹을 어루만졌어요. 그러다가 문득 뭔가를 기억하고는 엄마한테 다정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 맞아, 오늘 마침내 카를손의 작은집 보러 간다는 걸 잊을 뻔했네!

    그러나 그렇게 말한 걸 금방 후회했어요. ‘엄마한테 이런 얘기를 하다니, 참으로 바보 같은 짓이야!’

    하지만 엄마는 그 말을 평소 꼬맹이가 카를손에 대해 말하는 것보다 특히 더 위험하고 걱정스러운 일로 여기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태평하게 대꾸했어요. 

    - 아, 그거 정말 재미있겠구나.

    만약에 꼬맹이가 한 말을 제대로 알아들었다면, 엄마는 그렇게 태연할 수 없었을 겁니다. 카를손이 어디 살고 있는지 조금만 더 생각했어도!

    꼬맹이가 배를 채워서 기분이 좋아지고 사는 것에 아주 흡족하여 식탁에서 일어났습니다. 이마에 난 혹은 더 이상 아프지 않고, 입에는 맛난 계피 빵을 물고 있고, 주방 창문으로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고, 격자무늬 앞치마를 두른 엄마가 아주 다정해 보였습니다.

    엄마한테 다가가서 통통한 손에 입을 맞추고 말했습니다. 

    - 엄마, 많이많이 사랑해요!

    - 그 말을 들으니 아주 기쁘구나.

    - 그래요… 엄마가 아주 다정하기 때문에 사랑해.


    꼬맹이가 자기 방으로 가서 카를손을 기다렸습니다. 둘은 오늘 함께 지붕에 가기로 했거든요. 그런데 만약 크리스터가 주장하는 대로 카를손이 허깨비라면, 꼬맹이가 어떻게 거기로 갈 수 있을까요.


    “세 시나 네 시쯤, 아니면 다섯 시쯤, 적어도 여섯 시 전에는 너를 데리러 올게.” - 카를손은 지난번에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때 꼬맹이는 카를손이 도대체 언제 오겠다는 건지 이해되지 않아서 재차 물었어요.

    “늦어도 일곱 시를 넘기지는 않겠지만, 여덟 시 전은 아닐 거야… 대충 아홉 시쯤 나를 기다려라, 시계 종이 울린 뒤에.”


    꼬맹이가 거의 저녁 내내 기다렸습니다. 그렇게 마냥 기다리다 보니, 어쩌면 카를손이 실제로 없는 존재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카를손은 그저 꾸며낸 사람일 뿐이라고 믿으려는 순간, 아, 글쎄, 윙윙 귀에 익은 소리가 들리면서 명랑하고 활기 찬 카를손이 방안으로 날아들지 뭡니까!

    - 널 기다리느라고 목이 빠졌어. - 꼬맹이가 말했어요. - 몇 시에 온다고 약속했었지?

    - 난 대충 말했던 거다. 그리고 약속한 대로 됐잖아. 대충 왔으니까 말이야.

    카를손이 그렇게 대꾸하고는 울긋불긋한 물고기들이 헤엄치는 어항으로 가더니, 얼굴을 푹 담그고 어항 물을 꿀꺽꿀꺽 마시기 시작했습니다.


창문으로 날아든 카를손이 어항에 있는 물을 꿀꺽꿀꺽 마시다.


    - 조심해! 내 물고기들! 

    꼬맹이가 소리쳤어요. 카를손이 자칫 물고기를 집어삼키지는 않을까 놀란 겁니다. 

    - 사람에게 열이 있을 때는 물을 많이 마셔야 한다. 그러다가 실수로 물고기를 두서너 마리 삼킨다고 해도, 그건 하찮은 것이고 일상적인 일이다. 

    - 너한테 열이 있다고? - 꼬맹이가 물었습니다.

    - 그렇다니까! 만져 봐라. - 그러면서 꼬맹이 손을 자기 이마에 가져다 댔습니다. 

    그러나 꼬맹이 느낌에는 이마가 뜨겁지 않았어요.

    - 네 체온은 얼만데?

    - 30도에서 40도야, 그것보다 더 떨어지지는 않아!


    꼬맹이는 얼마 전에 홍역을 앓았기 때문에 고열이 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의심쩍다는 투로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어요.

    - 아니야, 내가 보기에 넌 아프지 않아.

    - 오호, 넌 참으로 형편없는 사람이구나! - 카를손이 소리치면서 발을 굴렀어요. - 뭐야, 난 다른 사람들처럼 병이 날 수도 없단 말이냐?

카를손이 꼬맹이 손을 잡아 제 이마에 대다.

    - 그렇다면, 아프고 싶다는 거야?! - 꼬맹이가 깜짝 놀랐습니다. 

    - 물론이다. 사람들은 다 그걸 원해! 난 열이 펄펄 끓어서 침대에 누워 있고 싶어. 네가 병문안을 오고, 난 세상에서 가장 아픈 사람이라고 말할 거다. 뭐 필요한 게 없냐고 네가 물으면, 난 아무 것도 필요 없다고 대답할 거야. 커다란 케이크하고 과자 몇 상자, 산더미 같은 초콜릿, 아주 큰 사탕 봉지 외에는 아무 것도 필요 없다고 대답할 거다! 


    그렇게 말을 마친 뒤 잔뜩 기대 어린 눈으로 꼬맹이를 바라봤습니다. 하지만 꼬맹이는 카를손이 원하는 걸 다 어디서 구해야 할지 몰라서 멍하니 서 있었어요.

    - 너는 내 친엄마가 되어야 해. - 카를손이 계속 입을 놀렸어요. - 나를 달래서 쓴 약을 먹게 하고, 그러면 백 원을 주겠다고 약속하겠지. 넌 내 목을 따스한 목도리로 감싸 줄 거야. 난 목도리가 따갑다고 투덜대면서 백 원을 받고서야 목도리를 두르고 눕기로 할 거야.


    꼬맹이는 정말 카를손의 친엄마가 되고 싶었어요. 한데 그렇게 한다는 것은 저금통을 다 비워야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저금통은 책장에 놓여 있는데, 예쁘고 묵직해요. 

    꼬맹이가 주방으로 달려가 칼을 가져와서 돼지저금통 배를 가르고 백 원짜리 동전들을 꺼내기 시작했습니다. 카를손이 열심히 거들면서 탁자에 동전이 떨어질 때마다 환호성을 내질렀어요. 오백 원짜리 동전들도 떨어졌지만, 카를손은 백 원짜리 동전들에 가장 기뻐했습니다.

    꼬맹이가 이웃 상점으로 달려가서 동전을 다 털어 알사탕과 설탕에 절인 호두와 초콜릿을 샀어요. 있는 돈을 다 점원에게 내줄 때, 그게 강아지를 사려고 모은 돈이었다는 사실을 문득 떠올리고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그러나 금방 생각을 바꿨습니다. ‘카를손의 친엄마가 되기로 한 사람은 강아지를 갖는 사치를 부릴 수 없는 거야.’ 


    단것들을 주머니에 가득 넣고 집으로 돌아오니 엄마와 아빠, 보쎄 형과 베탄 누나가 모두 식당에서 점심 후식으로 커피를 마시고 있었어요. 그러나 꼬맹이에게는 식구들과 함께 앉아 있을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 순간 어떤 생각이 퍼뜩 떠올랐습니다. 

    ‘그래, 식구들을 내 방으로 데리고 가서 카를손을 소개하는 거야.’ 

    하지만 조금 더 생각한 뒤 오늘은 그러지 않는 게 좋겠다고 결정했습니다. 카를손과 지붕으로 가려는 걸 식구들이 가로막을지도 모르니까요. 소개는 다음 기회로 미루는 것이 더 나았습니다.

    꼬맹이가 식탁에 놓인 유리 항아리에서 조개처럼 생긴 편도과자를 몇 개 집었어요. 카를손은 과자도 먹고 싶다고 했으니까요. 그리고 자기 방으로 갔습니다.


    - 정말 오래 기다리게 하는구나! 이렇게 병들고 불쌍한 사람을. - 카를손이 나무라듯이 말했어요.

    - 최대한 서두른 거야. - 꼬맹이가 변명했습니다. - 그리고 얼마나 많이 샀냐면…

    - 그렇다면 동전이 한 닢도 남지 않았단 말이냐? 난 목도리를 두르는 대가로 백 원을 받아야 하는데! - 카를손이 놀라서 말을 가로챘어요

    꼬맹이가 동전 몇 개는 남겼다고 말하면서 달랬습니다. 카를손이 눈빛을 반짝이며 좋아서 펄쩍 뛰었습니다. 

    - 오오, 난 세상에서 제일가는 병자야! 나를 얼른 침대에 눕혀라.

    그때 꼬맹이가 처음으로 이런 생각을 했어요. 

    ‘근데, 난 날 줄 모르는데 어떻게 지붕으로 가지?’

    그런 생각을 읽었나요? 카를손이 힘차게 말했습니다. 

    - 느긋하게, 언제나 느긋하게! 내가 너를 등에 태울 거다. 그리고 “하나, 두울, 셋!” 하면 우리는 날아서 내 집으로 가는 거야. 그러나 조심해라. 손가락이 프로펠러에 끼지 않도록 해야 돼.

    - 나를 지붕까지 실어 나를 힘은 충분한 거야?

    - 보면 알 거야. 이렇게 아프고 가엾은 내가 너를 등에 태우고 절반이나 날아갈 수 있을지 의심이 들 거다. 그러나 궁하면 통한다는 말이 있잖아. 그리고 가다가 기진맥진했다고 느끼면 널 버릴 거야…


    꼬맹이는 자기를 떨어뜨리는 것이 위기에서 벗어나는 좋은 방법은 아니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염려하는 표정을 짓자, 카를손이 위로했어요.

    - 하지만 다 잘 될 거야. 모터가 고장만 나지 않으면.

    - 갑자기 고장 나면? 그러면 우리는 떨어지잖아!

    - 당연히 떨어지지. - 카를손이 느긋하게 말하고는, 곧바로 손을 휘휘 내저으면서 덧붙였습니다. - 그러나 그건 하찮은 것이고 일상적인 일이다!

    꼬맹이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그래, 그건 하찮은 것이며 일상적인 일이야” 하고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엄마와 아빠가 보도록 쪽지를 적어서 책상에 올려놓았습니다. 


난 지붕 위에 사는 카를손 집에 가 있어요.

  

    부모님이 이 쪽지를 보기 전에 돌아오는 게 물론 가장 좋을 거예요. 그러나 만약 어쩌다가 그 이전에 찾게 된다면, 꼬맹이가 어디 있는지 부모님이 아시는 게 더 낫지요. 그렇지 않으면 또 예전 같은 일이 벌어질 수도 있으니까요. 즉, 꼬맹이가 시외에 있는 할머니 댁에 있다가 갑자기 기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온 적이 있었는데, 그때 엄마는 울면서 말했어요. 

    “꼬맹이야, 정 그렇게 기차가 타고 싶었다면 왜 엄마한테 미리 말하지 않았니?”

    그때 꼬맹이는 “혼자 가고 싶어서” 하고 대답했었지요.

    지금도 마찬가집니다. 꼬맹이는 카를손과 함께 지붕에 가고 싶은데, 어느 부모가 그걸 허락하겠어요? 그래서 미리 말하지 않고 가는 게 더 낫고, 만에 하나 자기가 집에 없는 게 드러난다면 쪽지를 써 놓았다는 것으로 변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카를손이 비행 준비를 마쳤습니다. 배에 붙은 단추를 누르자 모터가 윙윙 소리를 냈습니다.

    - 얼른 내 어깨 위로 올라가라. - 카를손이 외쳤어요. - 이제 우리는 날아갈 거야!

    그리고 정말로 둘은 창문을 나와서 위로 올라갔습니다. 

    카를손은 먼저 모터를 시험하려고 가장 가까운 지붕 위에서 작은 원을 그렸어요. 모터는 고르게 잘 돌아가서 꼬맹이가 걱정할 일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카를손이 꼬맹이를 등에 태우고 지붕 위로 날아오르다


    마침내 카를손이 지붕 위에 착륙했습니다.

    - 이제 네가 내 집을 찾을 수 있는지 보자. 어떤 굴뚝 뒤에 있는지 말하지 않을 테니까, 직접 찾아 봐라.

    꼬맹이는 지붕 위에 올라와 본 적이 없었어요. 그러나 어떤 어른이 굴뚝에 맨 밧줄에 몸을 묶고 지붕에서 눈을 쓸어내리는 걸 몇 번 보기는 했습니다. 그 아저씨를 늘 부러워했는데, 이제 자신이 그 행운아가 된 겁니다. 물론 밧줄로 몸을 묶지는 않았고, 이 굴뚝에서 저 굴뚝으로 이동할 때 심장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지만 말입니다


    그러다가 문득 어떤 굴뚝 뒤편에서 정말로 작은집을 보았어요. 녹색 덧문들과 지붕이 달린 작은집은 아주 마음에 들었습니다. 어서 빨리 저 작은집으로 들어가서 기관차들이며 수탉 그림들은 물론이고 거기 있는 것들을 다 제 눈으로 보고 싶었습니다. 

    작은집에는 누가 살고 있는지 다들 알게끔 문패가 붙어 있었어요. 

    꼬맹이가 소리 내어 읽었습니다. 


「지붕 위에 사는 카를손」


    카를손이 문을 활짝 열고는 “환영해, 귀한 카를손, 그리고 꼬맹이도!” 하고 외치면서 먼저 집안으로 달려 들어갔습니다.

    - 난 당장 침대에 누워야 해. 세상에서 가장 아픈 병자니까! 

    그렇게 소리치고는 벽에 붙인 빨간 나무 장의자로 뛰어올랐습니다. 

    꼬맹이가 그 뒤를 따랐습니다. 호기심 때문에 심장이 터지는 것만 같았어요.


    (카를손의 작은집은 아주 아늑했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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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지붕 위에 사는 카를손 1. 카를손과 만나다

자녀와 소통, 어떻게? (1)

도움을 청하지 않는 한 아이 일에 끼어들지 않는다 (5)

사람과 물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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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카를손이 유령 놀이를 하다 (2-1)

공연 '기적의 밤' (7장 계속)

8. 카를손이 생일에 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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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신 할아버지

아이들의 스피치 준비


 

   3. 카를손이 천막 놀이를 하다  



    식구들은 늘 식당 벽난로 곁에서 커피를 마셨습니다. 오늘 저녁도 그랬어요. 바깥에는 화창한 봄기운이 따스하고 보리수나무들이 벌써 작고 끈끈한 녹색 나뭇잎들을 달고 있었지만 말이지요. 

    꼬맹이는 커피를 좋아하지 않는데, 그 대신 난로에서 이글대는 불꽃을 앞에 두고 엄마와 아빠, 보쎄 형, 베탄 누나와 함께 앉아 있기를 아주 좋아했습니다. 


    - 엄마, 잠깐만 돌아서 볼래요? 

    엄마가 벽난로 앞 작은 탁자에 차관이 담긴 쟁반을 내려놓을 때 꼬맹이가 부탁했습니다. 

    - 왜 그러니?

    - 엄마가 안 보는 새에 각설탕을 한 개 갉아먹으려고 그래.

    엄마가 기꺼이 허락했습니다. 어떡하든 꼬맹이를 달래 주어야 했거든요. 아이는 카를손이 급히 사라진 것 때문에 아주 울적했어요. 

    사실, 그렇게 행동하는 건 좋지 않습니다. 블록으로 만든 탑만 덜렁 남겨놓고, 그것도 고기완자를 꼭대기에 얹어놓고 갑자기 사라지다니 말이에요. 


    꼬맹이가 벽난로 곁 좋아하는 자리에, 불꽃과 아주 가까운 자리에 앉았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온 가족이 커피와 차를 마시는 순간이 아마도 하루 중 가장 유쾌한 시간일 겁니다. 이때는 엄마와 아빠하고 평온하게 얘기를 나눌 수 있습니다. 부모님은 꼬맹이가 하는 얘기를 차근차근 다 들어주곤 했어요. 다른 시간에는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았지요. 

    보쎄 형과 베탄 누나가 서로 약 올리면서 ‘무턱대고 통째로 암기하는 방법’에 대해 수다 떠는 걸 듣는 것도 재미났어요. ‘통째로 암기하기’란 1학년인 꼬맹이한테 가장 어려운 수업 준비 방법이었습니다. 

    꼬맹이도 학교생활을 얘기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엄마와 아빠 외에는 꼬맹이 얘기에 흥미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보쎄 형과 베탄 누나는 꼬맹이 얘기에 빙긋빙긋 웃기만 할 뿐이고, 그럴 때면 꼬맹이는 입을 꾹 다물곤 했어요. 형과 누나가 그렇게 깔보듯이 픽픽 웃는데 왜 굳이 입을 놀려야 하나 싶은 거지요. 

    그런 면이 있기는 해도, 보쎄 형과 베탄 누나 역시 꼬맹이를 놀리거나 자극하지 않으려고 애썼습니다. 왜냐하면, 꼬맹이 역시 형과 누나를 보면서 약 올리듯이 웃음을 짓곤 했으니까요. 꼬맹이는 사람을 놀리는 재주가 뛰어났어요. 보쎄 같은 형과 베탄 같은 누나가 있다 보면 누구나 그렇게 될 수밖에 없을 겁니다!


    - 그래, 꼬맹이, 숙제는 다 끝냈니? - 엄마가 물었습니다.

    그런 질문을 꼬맹이가 좋아한다고 말하기는 힘들어요. 그러나 각설탕을 한 개 갉아먹도록 해준 것이 고마워서 꼬맹이는 마음에 들지 않는 대화를 씩씩하게 참기로 마음먹었습니다

    - 물론, 다 했어. - 꼬맹이가 얼굴을 찌푸린 채 대답했습니다.

    하지만 머릿속에는 온통 카를손 생각뿐이었어요. 

    ‘카를손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궁금해 죽겠는데 공부 얘기를 꺼내다니, 이 사람들은 어찌 이리 답답할까!’ 

    - 어떤 숙제를 내주었는데? - 이번에는 아빠가 물었습니다.

    그러자 꼬맹이는 마침내 화가 났습니다. 공부 얘기가 오늘 저녁 끝이 없을 것처럼 보였으니까요. 이 사람들은 공부 얘기만 하려고 지금 벽난로 곁에 이렇게 편안히 앉아 있는 건가!

    - 알파벳 쓰기야. - 꼬맹이가 후루룩 대답했습니다. - 아주 긴 알파벳인데, 난 그걸 알아. 먼저 А가 나온 뒤 다른 철자들이 쭉 이어져.

    꼬맹이가 다시 각설탕을 한 개 쥐고 또 카를손을 생각했습니다. 

    ‘식구들은 내키는 대로 떠들라고 해, 난 카를손만 생각할 거야.’

    꼬맹이 생각을 베탄 누나가 깼습니다. 


    - 왜 그래, 꼬맹이, 내 말을 안 듣는 거야? 오백 원을 벌고 싶지 않니??

    꼬맹이는 처음에 누나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물론 오백 원을 벌고 싶지 않은 건 아니었어요. 그러나 그걸 벌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가 중요한 겁니다.

    - 오백 원은 푼돈이야. - 꼬맹이가 똑 부러지게 대꾸했습니다. - 지금은 물가가 비싸잖아… 누나는 어떻게 생각해? 예를 들어 천 원짜리 아이스크림 값이 얼마 하지?

    - 천 원 한다고 생각해. - 베탄이 묘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어요.

    - 바로 그거야. 누나도 잘 알다시피, 오백 원은 너무 적어.

    - 근데 넌 지금 내가 하려는 얘기가 뭔지도 모르잖니. - 베탄이 말을 이었습니다. - 꼬맹이, 네가 해야 할 일은 없어. 그냥 뭔가를 하지 않으면 되는 거야.

    - 내가 뭘 하지 않아야 된다는 거야?

    - 저녁 내내 식당 문턱을 넘어오지 않는 것.

    - 베탄의 새 남자친구 펠레가 온단 말이야. - 보쎄 형이 끼어들었습니다. 

    꼬맹이가 고개를 끄덕였어요. 

    아, 알겠어, 식구들이 다 교묘하게 계산한 거야. 엄마와 아빠는 영화관에 가고, 보쎄 형은 축구경기 보러 가고, 베탄 누나는 펠레와 식당에서 저녁 내내 비둘기처럼 사랑을 속삭이겠단 말이로군. 그리고 나만 내 방으로 쫓겨나는 거야, 그것도 오백 원이라는 하찮은 보상을 받고… 바로 이게 식구들이 나를 대하는 태도야!


    - 누나 새 남자친구 귀는 어떻게 생겼지? 이전 남자친구처럼 그렇게 축 늘어졌어?

    이건 베탄을 골려 주려고 일부러 흘린 말이었습니다.

    - 들었어요, 엄마? - 베탄이 속상하다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 내가 왜 꼬맹이를 식당으로 못 들어오게 하려는지 엄마도 이해할 거야. 나를 만나러 오는 친구들이 저 꼬맹이 때문에 다 뒷걸음친단 말이에요!

    - 꼬맹이가 앞으로는 그러지 않을 거다. 

    엄마가 썩 자신 없는 투로 말했어요. 엄마는 아이들이 다투는 걸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 아니, 그럴 거야, 분명히 그럴 거야! - 베탄이 제 생각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 저 애가 클라스를 어떻게 내쫓았는지 기억 못해요? 저 애는 클라스를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안 돼, 베탄 누나, 귀가 저렇게 생겨먹어서는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어” 하고 말했단 말이에요. 그런 말을 듣고 클라스가 또 우리 집에 오겠어요?

    - 느긋하게, 언제나 느긋하게! - 꼬맹이가 카를손 말투를 흉내 냈습니다. - 난 내 방에서 조용히 있겠어, 그것도 돈 한 푼 안 받고 말이야. 식구들이 나를 보고 싶지 않다면, 그렇게 돈까지 들일 필요도 없어.

    - 아, 좋은 생각이다. - 베탄이 다짐을 받으려 들었어요. - 그렇다면 저녁 내내 여기로 들어오지 않겠다고 맹세해라.

    - 맹세하지! - 꼬맹이가 대꾸했습니다. - 나한테는 펠레 같은 누나 남자친구들이 전혀 필요하지 않다는 것만 알아 둬. 그 사람들을 안 볼 수만 있다면 오히려 내가 누나한테 오백 원을 줄 수도 있어.


    다들 커피를 마시고 대화를 마무리한 뒤 곧 엄마는 아빠와 극장에 갔고, 보쎄 형은 스타디움으로 달려갔습니다. 

    꼬맹이가 자기 방으로 왔습니다. 그것도 돈 한 푼 안 받고 말이지요. 

자기 방에 돌아온 꼬맹이가 잠시 뒤 방문을 열어 보다.

    얼마 뒤에 방문을 열자 식당 쪽에서 속삭이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어요. 베탄 누나가 남자친구라고 하는 펠레와 수다를 떨고 있는 겁니다. 꼬맹이가 식당 쪽으로 귀를 기울여봤지만 무슨 얘기가 오가는지 잘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창문으로 다가가서 어둠이 덮인 하늘을 쳐다봤습니다. 그리고 크리스터와 구닐라가 놀고 있지는 않나 싶어 거리를 내려다봤어요. 건물 현관 부근에서 사내애들이 떠들며 장난치고 있었습니다. 그 아이들 외에 거리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이 뒤엉켜 싸움을 벌이기 시작했어요. 그걸 꼬맹이가 흥미롭게 지켜보았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싸움은 곧 끝났고, 꼬맹이는 다시 심심하게 됐습니다.


    바로 그때 기묘한 소리가 들렸습니다. 윙윙 작은 모터 돌아가는 소리가 나는 겁니다. 그리고 일 분 지나서 카를손이 창문으로 날아들어 왔습니다. 

    - 안녕, 꼬맹이! - 카를손이 느긋하게 인사를 건넸습니다. 

    - 안녕, 카를손! 도대체 어디 있었던 거야?

    - 뭐라고?..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구나.

    - 넌 내가 엄마, 아빠한테 소개하려고 한 순간에 사라졌잖아. 왜 말도 없이 달아난 거지?

    그 말에 카를손은 화가 난 듯했어요. 허리에 양손을 척 걸치고 언성을 높였습니다. 

    - 내 평생 그런 말은 처음 듣는다! 그렇다면, 뭐야, 나는 내 집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살피지도 못한다는 거냐? 주인은 자기 집을 돌봐야 할 책임이 있는 거야. 내가 집안일을 해야 하는 순간에 네 부모님이 나하고 인사 나누기로 한 것이 내 잘못이야? - 그러면서 방안을 둘러봤습니다. - 근데 내 탑은 어디 갔냐? 누가 내 멋진 탑을 부순 거야? 내 고기 완자는 어디 있어? 


    꼬맹이가 당황하여 쩔쩔맸습니다.

    - 난… 난, 네가 돌아올 줄 몰랐어.

    - 오호, 그렇군! - 카를손이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 세상에서 제일가는 건축가가 탑을 세우는데, 이게 대체 무슨 꼴이람? 둘레에 담장은 누가 세울 거야? 탑이 영원히 서 있도록 누가 지켜볼 건데? 그런 사람은 아무도 없군! 아니, 그게 아니라 이건 완전히 거꾸로 됐다. 탑을 부수고 깨고, 게다가 고기 완자를 먹어 치우고 말이야! 


고기완자가 사라졌다고 삐친 카를손


    - 하찮은 거야. - 꼬맹이가 대범하게 말했습니다. - 일상적인 일이야! - 그러고는 카를손이 하는 것처럼 손을 내저었어요. - 때로는 낙심할 경우도 있게 마련이야!..    카를손이 한 옆으로 물러나서 낮은 의자에 앉았어요. 볼이 퉁퉁 부어올랐습니다.

    - 허, 말 하나는 그럴싸하게 하는구나! - 카를손이 화난 목소리로 투덜댔습니다. - 부수는 거야 아주 쉽지. 부수고 나서 “일상적인 일이야, 낙담할 필요 없어” 하고 말하다니! 이 가엾은 작은 손으로 탑을 세운 내 심정은 어떨 것 같으냐!

    그러면서 통통한 손을 꼬맹이 코앞에 바짝 들이밀었습니다. 그러고는 다시 작은 의자에 앉았는데, 볼이 더 부어올라서 웅얼거렸습니다. 

    - 난 너무 화가 나. 그냥 미칠 것만 같아!

    꼬맹이가 몹시 당황했어요. 어찌해야 좋을지 모른 체 서 있기만 했어요. 침묵이 오래 갔습니다.


    마침내 카를손이 우울한 목소리로 내뱉었습니다. 

    - 만약 뭔가 작은 선물이라도 받게 되면 난 다시 명랑해질 거야. 사실, 장담은 못하지만, 그래도 나한테 무슨 선물을 한다면 좀 명랑해질 수 있을 텐데…

    꼬맹이가 자기 책상으로 달려가서 소중한 물건들이 들어 있는 서랍을 뒤지기 시작했습니다. 모아둔 우표, 여러 빛깔의 조약돌들, 색연필, 주석 병정들… 

    거기에는 작은 손전등도 있었어요. 그건 꼬맹이가 아주 아끼는 것이었습니다. 

    - 너한테 이걸 선사하면 될까?

    카를손이 손전등을 재빨리 훑어보더니 금방 활기를 띠었습니다. 

    - 그래, 바로 그거야, 내 기분을 바꾸려면 그런 게 필요하다. 물론 내 탑이 훨씬 더 좋지만, 그 손전등을 준다면 좀 명랑해지도록 노력해 보겠다.

    - 그렇다면, 자, 가져.

    - 불은 들어오는 거냐? - 카를손이 손전등 단추를 누르면서 의심쩍게 물었어요. 

    그러고는 “만세! 켜지는구나!” 좋아서 소리를 지르는데, 두 눈에도 불이 반짝 켜졌습니다. 

    - 어두운 가을 저녁 내 작은집으로 돌아갈 때 이 손전등을 켜야겠다. 깜깜한데 가스 배관 같은 것들 사이에서 이제 더 이상 헤매지 않을 거다. - 카를손이 손전등을 쓰다듬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꼬맹이는 아주 기뻤어요. 꼬맹이가 꿈꾸는 것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즉, 한 번만이라도 카를손과 함께 지붕 위를 산책하고 이 손전등이 어둠 속에서 길 밝히는 걸 보는 겁니다.


    - 됐어, 꼬맹이, 난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엄마와 아빠를 불러라, 인사 나누게.

    - 영화관에 가셨어.

    - 나를 만나는 대신 영화관에 갔다고? - 카를손이 놀랐어요. 

    - 그래, 다들 외출했어. 집에는 베탄 누나하고 새 남자친구만 있어. 둘은 지금 식당에 있는데, 난 거기로 가면 안 돼.

    - 무슨 소리냐! - 카를손이 펄쩍 뛰었습니다. - 네가 원하는 곳에 갈 수가 없다고? 흠, 우린 그런 걸 못 참지. 가자!..

    - 하지만 난 맹세까지 했는데…

    - 허어, 맹세 따위야 나도 했다. - 카를손이 말을 가로챘습니다. - 뭔가 옳지 못한 일을 보면 즉시 독수리처럼 달려들겠다고 말이야… 그러니, 지금도 달려들 거다. - 그러면서 꼬맹이에게 다가와 어깨를 툭 쳤습니다. - 근데, 뭘 약속한 거지?

    - 저녁 내내 식당에 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겠다고 했어.

    - 들어간다고 해도 너를 아무도 못 볼 거야. 말해 봐, 너도 베탄의 새 남자친구를 보고 싶은 마음이 있지?

    - 솔직히 말하자면, 아주 보고 싶어! - 꼬맹이가 얼른 대답했습니다. - 예전에 누나는 귀가 축 늘어진 남자애하고 사귀었는데, 새 남자친구 귀는 어떤지 정말 보고 싶어.

    - 나도 그 애 귀를 한 번 봐야겠다. - 카를손이 호기심을 보였습니다. - 잠깐! 뭔가 장난을 꾸며야겠어. 세상에서 제일가는 장난꾸러기가 바로 지붕 위에 사는 카를손 아니냐. 

    그러고는 주변을 주의 깊게 둘러보다가 욧닛을 고갯짓으로 가리키면서 소리쳤습니다. 


    - 그래, 이거다! 우리한테 필요한 건 바로 욧닛이야. 뭔가 궁리하기 시작하면 내 머리에서는 쓸 만한 게 꼭 떠오르거든…

    - 뭘 궁리했는데? - 꼬맹이가 물었습니다. 

    - 넌 저녁 내내 식당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로 약속했다고? 맞아? 하지만 욧닛을 덮어쓰면 네 모습을 아무도 못 볼 거야.

    - 그래… 하지만… - 꼬맹이가 반대하려고 했습니다. 

    - ‘하지만’이라는 말은 하지 마라! - 카를손이 날카롭게 말을 잘랐습니다. - 욧닛을 둘러쓰면 네 모습이 아니라 욧닛만 보이는 거야. 나도 저걸 둘러쓸 거다. 그러면 나도 안 보이는 거지. 물론 베탄한테야 더없이 큰 징벌이겠지만, 거야 자업자득이야. 멍청하니까… 가엾기 짝이 없는 베탄, 날 못 볼 거야!

    카를손이 침대에서 욧닛을 끌어당겨 머리에 덮어쓰고 꼬맹이를 불렀습니다.

    - 이리 와, 얼른 나한테로 와라. 내 천막 안으로 들어와.

    꼬맹이가 카를손이 둘러쓴 욧닛 밑으로 들어갔어요. 둘은 마주보고 좋아서 낄낄댔습니다. 

    - 베탄이 식당에서 천막을 보고 싶지 않다는 말은 하지 않았잖아. 사실 사람들은 천막을 보면 기뻐한다. 그것도 불빛이 어른거리는 천막을 보면 더 그렇지! 


    카를손이 손전등을 켰습니다. 

    꼬맹이는 베탄 누나가 천막을 보고 아주 기뻐할 것이라고는 별로 믿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깜깜한 욧닛 속에서 카를손과 나란히 서서 손전등을 비춘다는 것은 숨 막힐 정도로 멋있고 흥미롭게 보였습니다.

    꼬맹이가 한순간 베탄 누나를 괴롭히지 말고 자기 방에서 천막 놀이를 해도 아주 괜찮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카를손이 그 생각에 크게 반대했습니다.

    - 난 공정하지 못한 것을 가만둘 수 없다. 식당으로 가자, 어떤 대가를 치르는 한이 있어도! 


꼬맹이와 카를손이 욧닛을 뒤집어쓴 채 손전등을 켜고 주방으로 접근하다


    천막이 문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꼬맹이는 카를손 뒤를 따랐어요. 이불 밑에서 작고 통통한 손이 나와서 방문을 조용히 열었습니다. 두툼한 커튼으로 식당과 구분된 현관방으로 천막이 이동했습니다. 

    - 느긋하게, 언제나 느긋하게! - 카를손이 속삭였습니다.


    천막이 현관방을 소리 없이 지나쳐서 커튼 곁에 멈췄습니다. 베탄과 펠레가 중얼거리는 말소리가 좀 더 잘 들렸지만, 제대로 알아듣기는 여전히 어려웠습니다. 식탁 위에 놓인 램프는 꺼져 있었어요. 베탄과 펠레는 어슴푸레한 분위기를 좋아했습니다. 거리에서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으로도 충분한 모양입니다. 

    - 더 잘 됐지, 뭐. - 카를손이 속삭였어요. - 내 손전등 불빛이 어둠 속에서는 더 환하게 보일 거야.

    그러나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 손전등을 일단 껐습니다. 

    - 우리는 불쑥 나타나는 거야, 목이 빠져라 기다리던 깜짝 선물처럼… - 그러면서 카를손이 욧닛 밑에서 킥킥 웃었습니다. 

    천막이 조용히, 아주 조용히 커튼을 젖히고 식당으로 들어섰습니다. 베탄과 펠레는 맞은편 벽 앞에 놓인 작은 소파에 앉아 있었어요. 그들 쪽으로 천막이 살금살금 다가갔습니다.

    - 베탄, 너한테 입맞춤할래. - 사내애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꼬맹이 귀에 들렸습니다.  

    ‘저 펠레라는 남자애는 정말 이상해!’

    - 좋아. - 베탄의 목소리가 들리고, 다시 조용해졌습니다.

    천막이 시커먼 얼룩처럼 소리 없이 마룻바닥을 미끄러졌습니다. 천천히 조금씩 소파 쪽으로 움직였습니다. 소파까지 이제 몇 발짝밖에 남지 않았지만, 베탄과 펠레는 아무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말없이 앉아 있었어요. 

    - 베탄, 이제 네가 나한테 키스해.

    펠레의 수줍은 목소리가 들렸어요. 하지만 대답은 이어지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 순간 손전등이 번쩍이면서 잿빛 어둠을 몰아내고 펠레 얼굴을 비췄으니까요. 

    펠레가 벌떡 일어났어요. 베탄이 외마디소리를 내질렀어요. 그와 동시에 깔깔대는 웃음소리와 현관방 쪽으로 급히 달려가는 발소리가 요란하게 울렸습니다.

    환한 빛에 잠시 눈이 부신 베탄과 펠레는 아무 것도 못 봤지만 웃음소리는 들었습니다. 거침없고 환희에 찬 웃음소리가 커튼 뒤에서 들려온 겁니다. 

    - 이건 내 못된 남동생 짓이야. - 베탄이 화를 내며 설명했습니다. - 이제 내가 쫓아가서 혼내 주겠어!


    꼬맹이는 어찌나 웃었는지 아랫배가 다 아플 정도였습니다.

    - 물론, 베탄이 너한테 키스할 거야! - 아랫배를 움켜쥐며 소리쳤어요. - 왜 너한테 키스하지 않겠어? 베탄은 누구한테나 키스하는걸. 그건 확실해!

    그리고 다시 웃음소리와 더불어 요란한 소음이 울려 퍼졌습니다. 

    정신없이 달아나다가 둘이 부딪쳐서 바닥에 쓰러졌을 때, 카를손이 속삭였습니다.

    - 느긋하게, 언제나 느긋하게!

    꼬맹이는 계속 웃음이 터져 나오려고 했지만 느긋하게 굴려고 무진 애를 썼습니다. 카를손이 바로 앞에서 넘어지는 바람에 덩달아 쓰러져 자기 발과 카를손의 발을 구분할 수가 없었는데, 그것 때문에 또 웃음이 막 터지려는 것이었어요. 하지만 베탄이 금방 따라잡을 수 있었기 때문에 둘은 네 발로 조용히 기었습니다. 그러다가 베탄한테 막 잡힐 뻔한 순간 허겁지겁 꼬맹이 방으로 뛰어들 수 있었습니다. 

    - 느긋하게, 언제나 느긋하게! - 카를손이 이불 밑에서 속삭였습니다. 

    그러면서 짧고 작은 두 발로 북채처럼 마루를 두드리고는, 숨을 돌리자마자 한마디 더 했습니다. 

    - 세상에서 제일 잘 달리는 사람은 바로 지붕 위에 사는 카를손이지!


욧닛을 덮어쓴 꼬맹이와 카를손을 베탄이 잡으려고 쫓아가다


    꼬맹이도 아주 빨리 달릴 줄 알았어요. 사실 지금은 그게 정말 필요했습니다. 베탄한테 막 잡히려는 찰나에 문을 쾅 닫고 겨우 몸을 피한 것이니까요. 베탄이 있는 힘껏 문을 두드리는 동안 카를손이 재빨리 열쇠를 돌리고 명랑하게 웃어댔습니다. 

    - 기다려, 꼬맹이, 널 붙잡고 말 테야! - 베탄이 단단히 화가 났어요. 

    - 어쨌든 내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았잖아! - 문 뒤에서 꼬맹이가 대답했습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웃음소리도 들려왔어요.

    베탄이 불같이 화를 내지 않았다면, 방안에서 둘이 계속 손뼉 치며 크게 웃어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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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과. 부모로서 아이를 도울 때... 

조심해야!  

아이가 큐빅으로 이상한 모양을 만들더라도

 학습의 4가지 결과

아이가 뭔가를 배우고 있다. 학습의 전반적 결산은 몇 가지 부분적 결과로 이뤄질 것이다. 

1) 가장 분명한 첫 번째 결과: 그 학습에서 아이가 얻을 지식, 혹은 습득할 기량

2) 두 번째 결과는 좀 덜 분명해: 이것은 일반적인 학습 능력 훈련, 즉, 자기 자신을 가르치는 능력

3) 학습에서 오는 감정적 흔적: 자신의 역량에 대한 만족이나 불만, 자신감이나 자신 없음

4) 만일 당신이 학습에 참여했다면, 아이와 당신의 상호관계에 대한 흔적: 여기서도 결산은 (서로 만족하여) 긍정적이거나 (서로 점점 불만이 커져) 부정적일 수 있다. 

 

기억하시라. 

부모들은 흔히 첫 번째 결과에만 집중할 위험이 있다. ("다 외웠어?", "익혔어?", "배웠어?")

나머지 세 가지를 절대 잊지 말라. 그것들이 훨씬 더 중요하다.

 

그래서 만일 아이가 큐빅으로 이상한 ‘궁전’을 짓거나, 찰흙으로 개를 도마뱀처럼 빚거나 글자를 삐뚤빼뚤하게 쓰거나 본 영화를 썩 매끄럽게 이야기하지 못한다 해도, 그러나 이때 몰입하거나 집중한다면... 지적하거나 비판하지 말고 수정하지도 말라. 

게다가 아이의 일에 당신이 진정한 관심과 흥미를 드러낸다면, 당신에게도 아이에게도 필수적인 상호 존중과 서로를 수용함이 얼마나 굳어지는지 느낄 것이다. 

 


 

이런 질문이 예상된다. "실수를 지적하지 않고서 어떻게 가르치나?"

맞다, 실수한 당사자가 무엇이 실수인지 아는 것은 유익하고 종종 아주 필요하다. 그러나 실수를 지적하는 것도 아주 조심스럽게 해야 돼

1) 아이의 실수를 일일이 다 지적할 필요는 없어 
2) 실수에 관한 얘기는 아이가 일에 몰두한 순간이 아니라 나중에 조용히 꺼내는 것이 더 좋아
3) 어떤 것이든 지적은 늘 전반적인 용인과 격려를 배경으로 나와야 한다. 

 

누군가의 실수를 지적하는 기술을 우리는 아이들한테서 배울 만하다

무슨 소리냐고? 

‘아이는 자신이 저지르는 실수를 아는 때가 있을까?’ 하고 자문해 보라.

그러면 당신도 동의할 것이...

아이는 자신이 저지른 실수를 아는 때가 많다. 돌마낫적 어린애가 불안정한 걸음걸이를 느끼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이 실수들에 아이는 어떻게 대하나? 

알고 보니, 어른들보다 더 참을성 있게 대한다. 

왜냐하면, 아이는 뭔가를 '아주 잘'은 아니더라도 해낸다는 사실에 이미 만족하니까. 이를테면, 뒤뚱대며 불안하긴 해도 이미 ‘걷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아이는 내일은 더 잘 될 것이라고 예상하고 기대한다! 이에 반해 부모들은 지적을 함으로써 더 좋은 결과를 더 빨리 얻기 원한다. 하지만 역효과를 보는 경우가 더 많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

 

한번은 9세 사내애의 아빠가 고백하길... 

"난 아들이 저지르는 여러 실수에 너무 까다롭게 대한다. 그 결과 아이는 새로운 뭔가를 배울 의욕을 잃고 만다. 한때 우리 둘은 장난감이나 집 모델 조립에 빠진 적이 있어. 이제 아이는 그걸 혼자서도 아주 잘 한다. 하지만 거기에만 들붙고 말았어. 계속 그 조립만 하면서 새로운 것은 전혀 시작하려 들지 않는다. 그러고는 하는 말이... 할 수 없을 거예요, 안 될 거야. 아이가 그렇게 위축된 까닭은 내가 자주 아이를 대놓고 비판했기 때문이 아닌가 여긴다." 

 

아이가 스스로 뭔가를 하는 상황에서 따라야 할 규칙을 당신이 받아들일 준비가 됐기를 기대한다.

이걸 <규칙 1>이라 부르자. 

아이가 도움을 청하지 않는 한, 아이가 하는 일에 끼어들지 말라. 
끼어들지 않음으로써 당신은 아이에게 이런 메시지를 전하는 셈이다. 
“넌 다 잘 할 거야! 넌 물론 해낼 거야!"

 

가정에서 수행할 과제

과제 1

완전하게 해내지는 못해도 본질적으로 아이가 스스로 수습하거나 처리할 수 있는 일들을 생각해 보라. (목록을 작성할 수도 있다).

과제 2

그 목록에서 몇 가지를 골라 낸 뒤, 아이가 그 일을 할 때는 절대 간섭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끝에 가서는 결과에 상관없이 아이의 노력을 인정하라

과제 3

당신 보기에 특히 속상한, 아이의 실수 두세 가지를 떠올리라. 조용한 시간을 찾고 적절한 말투를 동원하여 그 실수들에 대해 아이와 얘기 나누라.

(알림)  Voice Training에 관심 있는 분들은 여기를 참조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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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건 없이 받아들이기'를 가로막는 원인은?  

 

<조건 없는 수용> 원칙을 두고 부모들이 종종 묻는다. 

”아이를 수용한다는 것이 아이한테 절대 화내지 말아야 한다는 뜻인가?“

그렇지는 않다. 그건 아니야.

자신의 부정적 감정을 숨기거나 심지어 쌓아두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금물. 그걸 드러내야 한다.

단지 특별한 방식으로 표현할 필요가 있다. 이에 관해 뒤에 가서 얘기가 많이 나올 것이다.

지금은 일단 이런 준칙을 강조하고 싶다

조건 없이 수용한다 해서 아이한테 절대 화를 내지 말아야 하나?

 ► 아이의 개개 행동이 못마땅한 경우 부모의 불만을 드러낼 수 있다. 단(!) 그 개별 행동에 대한 못마땅함을 드러내는 것이지, 아이 자체를 두고 불만을 보여선 절대 안 된다.

 ► 아이의 어떤 행동을 지적하고 나무랄 수 있다. 즉, 비판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행동에 실린 아이의 감정을(까지) 나무라서는 안 된다. 그것이 아무리 바람직하지 못하거나 (부모가 보기에) ’용납되지 않는‘ 감정이라 해도 그렇다. 그런 감정이 아이한테 생겼다는 것은, 그럴 만한 근거가 있다는 뜻임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아이의 행동에 대한 불만이 누적되거나 체계적인 것이어선 안 된다. 그런 식의 불만은 결국 아이를 받아들이지 않음으로 커지기 쉬우니까. 

 

대체로 부모의 인정을 받지 못하고 부모와 갈등이 심한 한 여고생의 푸념. 

“어른들이 아이들한테 관심과 눈길을 돌려야 한다는 얘기를 신문 같은 데서 종종 읽어요. 하지만 그건 다 헛소리에요. 나와 내 또래들은 우리끼리 있는 시간을 훨씬 더 좋아하니까요. 집으로 돌아가면서도 부모가 집에 없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주말에 집에서 잔소리를 들을 바에는 차라리 학교를 하루 더 가는 게 낫겠어요.” 

 

부모의 인정을 못 받고 갈등 심한 소녀의 바람

 

그렇다면 부모들 심정은 어떤가? 그들은 어떻게 사나? 

그들에게도 비탄과 괴로움이 자녀에 비해 덜하지 않다. 

“이건 사는 게 아니라 고통일 뿐이야…”, 

“집에 가는 게 전쟁터에 나가는 것 같아”, 

“밤마다 잠을 못 이뤘어, 아이 때문에 속상해서 난 계속 울기만 해…”

 

자녀와 부모 양쪽이 그런 극단에 이르렀다 해도, 아직 다 잃은 건 아니다.

내 말을 믿으시라. 부모가 가정에 평화를 되돌릴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하려면 먼저 자기 자신부터 시작해야 한다. 

왜 부모부터? 

왜냐하면, 아이들에 비해 아무래도 어른들에게 지식과 셀프컨트롤 능력과 인생 경험이 더 크고 많으니까. 

물론 부모들한테도 도움이 필요하다. 우리 <자녀와 소통> 코스에서 필요한 도움을 받기 바란다. 

 

부모는 아이를 조건 없이 받아들여야 하며, 그런 면을 또 아이가 잘 알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이젠... 부모 입장에서 그게 잘 안 되는 경우, 무엇 때문에 그런 것인지 알아보자. 

 

* * *

몇몇 이유 가운데 가장 큰 것은 아마도 (앞에서 이미 나온) ‘양육과 가정교육’에 대한 마음가짐 혹은 접근 자세일 것이다.  ‘조건 없는 수용’ 원칙에 대해 한 엄마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데, 다른 많은 부모들의 시각도 크게 다르지 않다.  

“아직 숙제도 다 끝내지 않았는데 어떻게 안아 주겠어요? 아이가 할 일을 다 하고 나면 부모로서도 좋은 얼굴을 지을 수 있어요. 이런 규율을 잡지 않으면, 아이가 자칫 망가질 수도 있단 말이에요.” 

그리고 엄마는 아이한테 뭔가를 비판적으로 지적하고 뭔가 할 일을 상기시키고 뭔가를 하라고 요구하고 나선다.  

 

하지만 엄마의 적극적 관심과 성화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갖가지 핑계를 들이대고 꾸물거리면서 지연 작전으로 대응하리라는 것을 우린 다 알고 있다. 또 마지못해 겨우 하는 공부 상태가 오래 이어져 왔다면, 이젠 엄마의 방침과 요구에 대놓고 저항할 수도 있다.  

 

그러면 엄마는 얼핏 보기엔 합리적인 ‘교육적 관심’에서 악순환에 빠지니,

서로 불만을 품고 긴장이 커지고 갈등이 잦아지게 된다. 

 

엄마의 의도와는 아주 다른 현상이 왜 생기나?

오류는 맨 처음에 있었다.

즉, 규율을 다잡은 뒤에 좋은 관계를 맺는 게 아니라, 좋은 관계를 맺고 거기에 기초하여 규율을 세우는 것인데, 이 엄마의 경우는 순서가 바뀌었다. 이를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뒤에서 다룰 것이다.  

 

지금은 아이를 감정적으로 용인하지 않거나 심지어 밀어내게 만들 수 있는 다른 원인들을 얘기하자.

이 몇몇 다른 원인을 어떤 부모들은 아예 생각도 않고, 또 어떤 부모들은 깨닫고 알면서도 자기 내면의 목소리를 억누르려 애쓴다. 

 

계획에 없이 태어난 아이

 

아이를 감정적으로 수용하지 않게 되는 원인은 적지 않다.

예를 들어 계획하지 않은 아이가 어쩌다 태어났다 싶은 경우에 그럴 수 있다. 부모는 아이를 볼 생각이 없이 ‘자기네 만족’ 위해 살고자 했는데 말이다. 혹은, 아들을 원했는데 딸이 나왔다거나 그 반대의 경우에도 자칫 ‘불수용’으로 치우칠 수 있다. 

또는 엄마가 보기에, 아이가 이혼한 남편을 닮았고 아이의 제스처나 표정 일부가 엄마한테 알게 모르게 불쾌감을 야기하는 경우에도 <조건 없는 수용>이 이뤄지기 쉽지 않겠다. 

 

아이를 조건 없이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숨은 원인이 부모의 과도한 ‘교육적’ 태도에도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자신의 인생 실패나 이루지 못한 꿈을 아이를 통해 대신 채우려 할 때 그렇다.

또는 그 과정에서 부모 자신이 얼마나 필요하고 소중한 존재인지, 또 부모가 얼마나 큰 멍에를 짊어지고 있는지 등을 보여주려는 욕구 따위가 그런 것일 수 있다. 

 

그런 경우 먼저 부모들이 자녀 양육과 가정교육에 관해 상담받을 필요가 있겠다.

그러나 어쨌든 첫걸음을 뗄 수 있고 떼야 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달리 말해, 아이를 조건 없이 수용하기가 어렵다면 그 원인이 무엇인지 스스로 숙고할 필요가 있다.

그다음 단계는 우리가 다루는 과제의 수행일 것이다.  

 

가정에서 수행할 과제 

 

과제 1

당신이 아이를 얼마나 잘 받아들이며 받아들일 수 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하루 동안 이런 면을 점검해 보라. (이삼일이면 더 좋아.) 즉, 아이한테 (기쁨, 반가움, 다정함, 인정, 응원, 격려, 지지 등) 긍정적인 감정을 몇 번이나 표명했나, 또 (질책, 지적, 잔소리, 비판 등) 부정적인 언급을 몇 번이나 건넸나. 

부정적인 언급 횟수가 긍정적인 것과 같거나 더 많다면, 당신의 소통은 과히 좋지 못할 것이다. 

 

과제 2 

잠시 눈을 감은 채 가장 좋은 친구를 (혹은 애인을) 만난다고 마음속에서 그려 보라. 그 사람을 만나 반갑고 그 사람이 당신에게 소중하며 친밀한 존재라는 점을 당신은 어떻게 내보이나? (표현 방식이나 형태를 두루 생각해 본다.) 

 

최고의 친구나 애인을 만날 때 어떤 모습을 보이나

 

이제 그 사람이 당신 자녀라고 여기라.

즉,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오거나 저녁에 마주할 때, 아이를 보아서 반갑다는 표시를 한다.

마음속에서 이모저모로 그려 보셨나?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반갑게 맞이한다

그렇게 일종의 이미지 훈련을 하고 나면 실제로도 마주해서 다른 말을 하고 무슨 질문을 건네기 전에 반갑다는 모습을 내보이기가 더 쉬워질 것이다. 아이와 마주하는 시간을 그런 자세로 몇 분 동안 지속한다면 더 좋겠다. 이 몇 분 동안 조건 없이 받아들임 때문에, 혹시 아이를 버릇없게 만들지는 않을까 겁낼 필요가 없다. 전혀.

 

과제 3

하루에 네 번 이상 아이를 포옹하라. (보통 하는 아침 인사와 잠자리 들기 전 입맞춤은 빼고).

*아이뿐 아니라 다른 성인 가족한테 그렇게 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 

 

과제 4

앞의 두 과제를 수행하면서, 아이의 반응에 주목하라. 자신의 감정 상태에도 주목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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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카를손이 탑을 세우다  




    - 그 사람은 이름이 카를손이고 저 위에, 지붕 위에서 살고 있다고 벌써 말했잖아요. - 꼬맹이가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 그게 뭐 유별난 일인가? 사람들이 자기가 원하는 곳에서 살 수 없단 말이야? 

    엄마가 꼬맹이를 지그시 바라보았어요. 

    - 자꾸 우기지 마라, 꼬맹이. 너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야 해! 그건 진짜 폭발이야. 네가 죽을 수도 있었어! 무슨 짓을 한 건지 정말 이해하지 못하겠단 말이니?

    - 이해는 하지만, 그래도 카를손은 세상에서 제일가는 기관차 전문가야. - 꼬맹이가 대답하고 이번에는 엄마를 찬찬히 쳐다봤어요. 

    세상에서 제일가는 기관차 전문가가 안전판을 검사하자고 할 때 “싫어” 하고 말할 수 없었다는 것을 엄마는 왜 이해하지 못하는 걸까


    꼬맹이 생각을 읽은 것처럼 아빠가 엄하게 말씀하시는군요.

    - 사람은 누구나 자기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한단다. 지붕 위의 카를손인지 뭔지, 있지도 않은 사람한테 잘못을 돌리지 말고.

    - 아니, 있어! - 꼬맹이가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 거기다가 날아다닐 수도 있대요! - 보쎄 형이 약 올리며 말을 받자, 꼬맹이가 거칠게 대꾸했습니다.

    - 정말 날아다닌단 말이야! 다시 날아오면, 그때 직접 봐라!!

    - 내일이라도 날아오면 좋겠다. 지붕 위에 사는 카를손을 내 눈으로 보게 되면, 꼬맹이 너한테 만 원을 주겠어. - 이제는 베탄 누나도 끼어들었습니다. 자기한테는 적지 않은 돈까지 내걸면서 말이지요.

    - 아니, 내일은 못 볼 거야. 내일 그 사람은 모터에 기름칠하러 서비스 센터에 날아가야 하니까.

    - 됐다, 이제 터무니없는 소리는 그만하고, 그 대신 네 책장이 어떤 꼴이 됐는지 보기나 하렴. - 엄마가 가볍게 핀잔을 주었습니다.

    - 카를손은, 그런 건 다 하찮고 일상적인 일이라고 했어! - 그러면서 카를손이 손사래 치는 것과 똑같이 자기 손을 흔들었습니다. 그건 책장에 난 얼룩 때문에 기가 죽을 일은 전혀 없다는 뜻이었지요.


    그러나 꼬맹이의 말도 손짓도 엄마에게는 아무 효과가 없었습니다. 

    엄마 목소리도 이젠 좀 엄격하게 바뀌었어요.

    - 카를손이 그렇게 말했다고? 그렇다면, 좋아, 그 사람한테 분명히 전하렴. 만일 한 번 더 우리 집에 코를 들이밀면, 두고두고 기억날 정도로 내가 뺨을 때려주겠다고 말이야.

    꼬맹이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에서 제일가는 기관차 전문가의 뺨을 엄마가 때리려고 한다는 것이 끔찍하게 보일 뿐이었어요. 

    운 나쁘게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 된 날에는 좋은 것을 기대하지 말아야지요. 


    꼬맹이는 문득 카를손이 몹시 보고 싶어졌습니다. 활기차고 명랑한 사람. 그 사람은 “불쾌한 일도 다 하찮은 거고 일상적인 일이니까 풀 죽을 일은 전혀 없다” 하고 잘라 말하면서 작고 통통한 손을 익살스럽게 내저었었지요.

    ‘카를손이 과연 다시는 오지 않을 건가?’ - 꼬맹이가 불안한 마음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카를손을 흉내 내어 혼잣말로 중얼거렸습니다. 

    - 느긋하게, 언제나 느긋하게! 카를손은 분명히 약속했어. 그 사람은 믿을만해. 첫눈에 그렇게 보였어. 하루 이틀 지나면 올 거야, 반드시 올 거야.


꼬맹이가 자기 방에 와서 엎드려 책을 보다



    꼬맹이가 자기 방에서 엎드려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때 창밖에서 또 윙윙거리는 듯한 소리가 들리더니, 카를손이 커다란 땅벌처럼 방으로 날아들었습니다. 뭔지 모를 노래를 흥겹게 흥얼대며 천장 밑에서 몇 바퀴 돌았습니다. 벽에 걸린 그림들 곁을 지나칠 때는 더 잘 보려고 속력을 줄인 채 고개를 한쪽으로 갸우뚱 기울이고 두 눈을 가늘게 뜨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어요. 

    - 아름다운 그림들이다. 정말 아름다워! 내 그림들보다는 당연히 좀 떨어지지만.

    꼬맹이가 발딱 일어났습니다. 카를손이 돌아왔다는 사실이 어찌나 반가운지 아무 생각도 없었어요. 


    - 거기, 지붕 위에는 그림들이 많아? - 꼬맹이가 대뜸 물었습니다.

    - 수천 점이나 있다. 한가할 때면 내가 직접 그리기도 하지. 작은 수탉과 새를 비롯해서 예쁜 것들은 다 그린다. 나는 세상에서 수탉을 제일 잘 그리는 사람이야. - 그렇게 말하면서 카를손이 멋지게 한 바퀴 돈 뒤 꼬맹이 곁으로 내려섰습니다.

    - 정말이야? - 꼬맹이가 놀랐어요. - 너하고 지붕 위로 올라가면 안 되겠니? 네 집과 기관차들이며 그림들을 정말 보고 싶어!

    - 물론, 그럴 수 있지. 당연하다. 넌 귀한 손님일 테고… 하지만 다음에 기회가 되면 가자.

    - 아니, 더 빨리 가면 좋겠어! - 꼬맹이가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 느긋하게, 언제나 느긋하게! 난 먼저 내 집을 정돈해야 된다. 하지만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아. 넌 알 거야, 세상에서 제일 빨리 방을 정돈하는 사람이 누구지?

    - 아마도 너겠지. - 꼬맹이가 막연하게 대답했어요.

    - ‘아마도’라고?! - 카를손이 화를 냈습니다. - 넌 아직 ’아마도‘라고 말하는구나! 어떻게 믿지 못한단 말이냐! 지붕 위에 사는 카를손은 세상에서 제일 빨리 방을 정돈하는 기술자다. 이건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이야.

   

카를손이 프로펠러를 돌이면서 벽게 걸린 그림들을 감상하다



    꼬맹이는 카를손이 모든 면에서 ‘세상 제일가는’ 사람임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제일가는 놀이동무임에도 틀림이 없을 거예요. 이걸 꼬맹이는 경험으로 확실히 믿었어요. ‘사실, 크리스터와 구닐라도 좋은 동무들이긴 하지만, 그 애들은 지붕 위에 사는 카를손에 비하면 한참 떨어져!’ 크리스터는 예파라고 부르는 자기 개를 늘 자랑하지요. 그때마다 꼬맹이는 그 애를 몹시 부러워했습니다.

    ‘만일 그 애가 내일 또 예파를 자랑한다면 난 카를손 얘기를 해 주겠어. 지붕 위에 사는 카를손에 비하면 니네 예파는 아무 것도 아니야! 그 애한테 그렇게 말해 줄 테야.’

    하지만 그렇긴 해도 꼬맹이가 세상에서 제일 갖고 싶어 하는 것은 바로 강아지… 

    카를손이 꼬맹이의 생각을 깼습니다. 


    - 지금 우리 기분을 가볍게 바꾸는 것도 좋을 거다. - 그리고 장난기 어린 눈길로 주변을 둘러봤습니다. - 혹시, 너한테 새 기관차를 사주지 않았니?

    꼬맹이가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기관차를 떠올리면서 생각했어요. 

    ‘그래, 지금 카를손이 여기 있을 때, 엄마와 아빠한테 카를손이 실제로 있다는 걸 보여줄 수 있어. 보쎄 형과 베탄 누나도 집에 있다면 자기네 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 거야.’

    - 우리 엄마와 아빠하고 인사 나누고 싶어? - 꼬맹이가 물었어요.

    - 물론이지! 기쁜 일이다! 그분들도 나를 보면 아주 기분이 좋을 걸. 난 아주 잘 생겼고 똑똑하니까… - 카를손이 흡족한 얼굴로 방안에서 두어 걸음 걷다가 덧붙였습니다. - 또, 적당히 통통하니까. 간단히 말해, 원기 왕성한 대장부니까 말이다. 맞아, 나를 알게 되면 네 부모님은 기분이 아주 좋을 거다.


    주방에서 고기완자 튀기는 냄새를 맡고 꼬맹이는 곧 점심 먹을 때가 된다는 걸 알았습니다. 잠시 생각한 끝에, 점심 먹고 나서 카를손을 부모에게 인사시키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소개해서 엄마가 완자 튀기는 걸 방해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게다가 카를손 얘기를 꺼내서 아빠나 엄마가 부서진 기관차와 책장 얼룩을 갑자기 떠올린다면… 그런 대화는 어떡해서라도 막아야 하거든요. 잠시 뒤에 점심 먹으면서 세상에서 제일가는 기관차 전문가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꼬맹이가 엄마와 아빠에게 설명할 겁니다. 또 식구들은 꼬맹이가 왜 자기 방으로 초대하는지 이해할 거예요. 꼬맹이는 이렇게 말할 테니까요. 

    “여러분, 내 방으로 같이 가주시겠어요? 지금 내 방에는 지붕 위에 사는 카를손이 놀러와 있어요.”

    식구들이 얼마나 놀랄까! 그 얼굴들을 보면 얼마나 재미있을까!

   

    카를손이 방안에서 바장이다가 문득 발걸음을 멈췄어요. 얼어붙은 사람처럼 우뚝 서서 사냥개처럼 킁킁 냄새를 맡더니 입을 열었습니다.

    - 이건 고기완자야. 난 육즙이 밴 고기완자를 엄청나게 좋아한다!

    꼬맹이가 당황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카를손이 그렇게 말할 때 대답은 당연히 이렇게 나와야겠지요. “원한다면 가서 우리하고 같이 점심을 먹자.” 그러나 그렇게 말할 수 없었던 겁니다. 엄마와 아빠에게 미리 설명하지 않고 카를손을 점심 식사에 데려가는 건 불가능하니까요. 

    물론, 크리스터와 구닐라를 데려가는 건 다른 문제지요. 그 애들하고는 식구들이 다 식탁에 둘러앉은 뒤에라도 허겁지겁 뛰어들어 “다정한 엄마, 이 얘들한테도 콩 수프와 팬케이크를 주실래요” 하고 말할 수 있으니까요. 

    그러나 전혀 모르는 작고 퉁퉁한 사람을, 그것도 기관차를 폭발시키고 책장 선반에 얼룩을 낸 사람을 점심 식탁에 데려간다… 아니, 그럴 수는 없어!

    하지만 지금 막 카를손은 육즙이 흐르는 맛난 고기완자를 아주 좋아한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니 어떡하든 완자를 대접해야 돼요. 안 그러면 삐쳐서 더 이상 같이 놀지 않겠다고 나올지도… 

    아아, 이제 이 맛난 고기완자가 아주 중요하게 됐습니다! 


    - 잠깐만 기다려. 주방에 가서 완자를 가져올게.

    꼬맹이 말에 카를손이 좋다는 투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러고는 꼬맹이 등 뒤에 대고 소리쳤습니다. 

    - 얼른 가져와라! 그림 감상으로는 배가 차지 않는다!


    꼬맹이가 주방으로 달려갔습니다. 엄마가 격자무늬 앞치마를 두른 채 가스불 앞에 서서 정말로 맛난 완자를 튀기고 있었어요. 커다란 프라이팬을 간간이 들어 올리는데, 그때마다 작은 고깃덩어리들이 보기 좋게 뒤집혔습니다.  

    - 아, 꼬맹이, 너로구나? 곧 점심 먹을 거야.

    엄마의 말에 꼬맹이가 최대한 살랑거리는 말투로 말했습니다.

    - 엄마, 완자를 몇 개만 접시에 담아 주세요. 내 방으로 가져갈래.

    - 얘야, 이제 다들 식탁에 둘러앉을 건데. 

    - 알아요, 하지만 그래도 필요해… 무슨 일인지는 점심 먹고 나서 설명할게요.

    - 그래, 알았다, 알았어. - 엄마가 작은 접시에 완자 여섯 개를 담았습니다. - 자, 받으렴.


    오, 이건 정말 맛난 완자에요! 냄새도 참으로 구수하고 좋은 고기완자답게 불그레하게 잘 튀겨진 것이었어요. 

    꼬맹이가 접시를 두 손에 들고 자기 방으로 조심해서 가져갔습니다.

    - 내가 왔어, 카를손! - 문을 열면서 외쳤지요. 

    그러나 카를손이 없었습니다. 꼬맹이가 접시를 든 채 방 한가운데 서서 사방을 둘러봤어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도 허전한 마음이 들어 기분이 금방 상했습니다.

    - 가버렸네. - 꼬맹이가 중얼거렸어요. - 가버렸어. 





    하지만 갑자기… 어디선가 “삑!” 하고 이상한 소리가 들렸습니다.

    꼬맹이가 고개를 돌렸어요. 침대 위 이불 속에서 작은 덩어리가 꿈틀거리며 삑삑 소리를 내지 뭐에요. 

    삑! 삑!

    그러더니 이불 밑에서 카를손이 장난기 어린 얼굴을 내밀었습니다.

    - 히히! 넌 ‘가버렸네, 가버렸어’ 하고 말했지… 히히히! 한데 그 사람은 떠난 게 아니라, 여기 요렇게 숨어 있었던 거다!

    카를손이 또 삑삑 소리를 냈어요. 


    그러다가 꼬맹이 손에 들린 접시를 보고는 재빨리 배에 달린 단추를 눌렀습니다. 모터가 윙윙 소리를 내자 카를손이 침대에서 접시로 재빨리 날아 내려왔어요. 고기완자를 움켜쥐더니 천장으로 휙 날아 올라가 전등 밑에서 작은 원을 그리고 난 뒤 흡족한 표정으로 먹기 시작했습니다. 

    - 정말 맛난 완자로군! - 카를손이 아주 좋아했어요. - 보기 드물게 맛난 거야! 이건 세상에서 제일가는 완자 전문가가 만들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 그러고는 금방 덧붙였어요. -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점을 너는 물론 알고 있겠지.

    그리고 다시 접시로 급강하해서 완자를 또 집었습니다.

    그 순간 주방에서 엄마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 꼬맹이, 우린 식탁에 앉는다. 얼른 손 씻고 오렴!

    - 난 가야 돼. - 꼬맹이가 접시를 카를손에게 내밀었습니다. - 하지만 금방 돌아올게. 그때까지 기다리고 있겠다고 약속해.

    - 좋아, 기다려 주지. 그러나 여기서 나 혼자 뭘 한담? - 카를손이 꼬맹이 곁으로 내려왔습니다. - 네가 없는 동안, 난 뭔가 재미난 걸 하고 싶다. 기관차 같은 건 더 없니?

    - 없어. 기관차는 더 없지만, 집짓기 장난감은 있어.

    - 어디, 보여 줘라. 


    꼬맹이가 장난감들을 넣어 둔 장에서 집짓기 블록이 들어있는 상자를 꺼냈습니다. 그건 사실 상당히 훌륭한 건축 재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양과 색깔이 제각각인 블록들이 아주 많고, 그것들을 짜 맞추면 어떤 물건이든 만들어낼 수 있으니까요. 


    - 자, 이걸 가지고 놀아. - 꼬맹이가 말했어요. - 이 블록들이면 원하는 걸 다 만들 수 있어. 자동차든 기중기든…

    - 허어, 세상에서 제일가는 건축가가 설마 그런 걸 모르겠냐. - 카를손이 꼬맹이 말을 가로막았어요. - 이런 건축 재료라면 무엇이든 만들 수 있다!

    카를손이 완자 한 개를 또 입에 넣고 블록 상자로 달려들었습니다.

    - 멋있는 걸 하나 만들겠다. - 그러면서 블록들을 다 바닥에 쏟았습니다. - 아주 멋진 걸로…


    꼬맹이는 세상에서 제일가는 건축가의 작업을 지켜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습니다! 하지만 식당으로 가야 했어요. 문턱에서 다시 고개를 돌려 보니, 카를손은 이미 산더미처럼 쌓인 블록들 곁에 앉아서 흥겹게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만세, 만세, 만세!

정말 멋진 놀이야!

난 잘 생기고 똑똑하고 

솜씨 좋고 강한 사람!

난 놀이를 좋아해, 

또…… 먹는 것도 좋아해.


    마지막 구절은 네 번째 완자를 꿀꺽 삼키고 나서 불렀습니다.





    꼬맹이가 식당에 들어서니 엄마와 아빠, 보쎄 형, 베탄 누나는 벌써 식탁에 둘러앉아 있었어요. 꼬맹이가 재빨리 자기 자리에 앉아 냅킨을 목에 두르면서 말했습니다. 

    - 엄마, 나한테 한 가지만 약속해요. 그리고 아빠도.

    - 우리가 너한테 무슨 약속을 해야겠니? - 엄마가 물었습니다.

    - 아니, 먼저 약속해!

    아빠는 아무 것도 모르면서 약속할 수는 없다고 했습니다.

    - 그러다가 네가 또 불쑥 강아지를 사 달라고 조르면?

    - 아니, 강아지가 아니야. 물론, 아빠가 원한다면 강아지를 사준다고 약속해도 좋아! 아, 아니야, 그게 아니야. 이건 전혀 다른 일이고 조금도 위험한 게 아니야. 약속하겠다고 약속해 주세요!

    - 그래, 알겠어, 알겠는데… - 엄마가 대답했어요. 


    - 그럼, 약속한 거야. - 꼬맹이가 기뻐하며 엄마 말을 가로챘습니다. - 뭐냐면, 지붕 위에 사는 카를손에게 기관차 얘기는 꺼내지 않기로…

    - 재미있군. - 베탄 누나가 끼어들었습니다. - 부모님이 카를손과 만날 일이 없는데 어떻게 기관차 얘기를 꺼내거나 말거나 할 수 있다는 거야?

    - 아니, 만나게 될 거야. - 꼬맹이가 느긋하게 대꾸했습니다. - 왜냐면 카를손이 지금 내 방에 있거든!

    - 오, 이런, 정말 환장하겠군! - 보쎄 형이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 카를손이 지금 네 방에 있다는 거냐?

    - 그래, 그렇단 말이야! - 꼬맹이가 우쭐거리는 모습으로 식구들을 쓰윽 둘러봤습니다.

    ‘식사를 더 빨리 끝내기만 한다면, 다들 더 빨리 보게 될 텐데.’ 


    - 카를손과 인사 나누면 우린 아주 즐겁겠구나. - 엄마가 말했어요. 

    - 카를손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 꼬맹이가 대답했습니다.

    마침내 다들 차를 마시고 나자 엄마가 의자에서 일어났습니다. 

    결정적인 순간이 다가온 겁니다.

    - 다 함께 가요. - 꼬맹이가 제의했습니다.

    - 그렇지 않아도 그러려고 한다. - 베탄 누나가 말했습니다. - 카를손이라는 사람을 내 눈으로 보지 않는 한, 난 마음 놓을 수가 없어.

  

    꼬맹이가 앞장섰습니다.

    - 단, 약속은 꼭 지키세요. - 꼬맹이가 자기 방문으로 다가가면서 다짐을 받았어요. - 그러니까, 기관차 얘긴 입도 뻥긋하지 않는 거예요!

    그러고는 문손잡이를 돌렸습니다. 


    하지만 카를손은 보이지 않았어요. 이번에는 정말 그 어디에도 없었어요. 꼬맹이 침대에서 작은 덩어리가 꿈틀대지도 않는 겁니다. 

    그 대신 마룻바닥에 블록으로 만든 탑이 우뚝 서 있었습니다. 아주 높은 탑이었어요. 물론, 카를손은 블록으로 기중기를 비롯해 어떤 물건이라도 만들 수 있었겠지만, 이번에는 블록을 하나씩 쌓아 올려서 가늘고 아주 높은 탑을 만들기만 했군요. 

    그리고 탑 꼭대기는 뭔가로 장식해서 둥근 지붕까지 씌웠는데, 알고 보니 그건 꼭대기에 얹은 작고 둥근 고기완자였습니다. 



    그래요, 이건 꼬맹이에겐 아주 힘겨운 순간이었어요. 엄마는 완자들로 블록 탑을 장식한 것을 당연히 못마땅하게 여겼지요. 그리고 그게 꼬맹이 짓임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 이건 지붕 위에 사는 카를손이…

    꼬맹이가 입을 열었지만, 아빠가 엄격하게 말을 잘랐습니다.

    - 됐다, 꼬맹이. 카를손 어쩌고 하는 헛소리를 우린 더 이상 듣고 싶지 않구나! 

    보쎄 형이 킥킥 웃음을 터뜨렸고, 베탄 누나도 덩달아 웃으면서 한마디 거들었습니다.

    - 카를손이라는 사람은 꾀보인가 봐! 우리가 오는 순간에 자취를 감추다니. 


    풀이 죽은 꼬맹이가 차갑게 식은 완자를 먹고 나서 블록들을 정리했습니다. 카를손에 관해 더 얘기해봤자 지금은 소용이 없었어요.

    ‘카를손이 나한테 아주 못되게 굴었어. 아주 못되게!’

    - 이제 카를손은 잊어버리고 커피를 마시러 가자. - 아빠가 꼬맹이 뺨을 쓰다듬으면서 달랬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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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카를손이 천막 놀이를 하다

엄마 말 안 듣는 아이

아이들의 스피치 준비



꼬맹이와 카를손  


A. 린드그렌 지음 

김성호 번안 



지붕 위의 카를손 영문             지붕 위의 카를손 표지

지붕 위의 카를손 표지               지붕 위의 카를손 표지 러시아어


린드그렌 A. 린드그렌 (1907~2002, 스웨덴 작가, <말괄량이 삐삐> 등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여러 아동 서적의 저자)



1부 

지붕 위에 사는 카를손


    1. 카를손과 만나다


    스톡홀름이라는 도시, 아주 평범한 거리, 아주 평범한 집에 스반테손이라는 성씨의 아주 평범한 스웨덴 가족이 살고 있답니다. 이 가족에는 가장 평범한 아빠와 가장 평범한 엄마, 그리고 가장 평범한 자녀 셋이 있습니다. 아이들은 보쎄와 베탄 그리고 꼬맹이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평범한 사내애 꼬맹이

    “난 아주 평범한 꼬맹이가 아니에요.” 

    설령 꼬맹이가 그렇게 말한다 해도, 그건 물론 사실이 아니랍니다. 왜냐구요? 

    눈이 파랗고 귀는 잘 씻지 않아서 좀 지저분하며 무릎에 구멍 난 바지를 입고 다니는 일곱 살짜리 사내애들이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가요. 그러니 꼬맹이가 가장 평범한 아이라는 건 분명하지요.

    보쎄는 열다섯 살인데 교실 칠판 앞에 서서 문제를 풀기보다는 축구 경기장 정문 앞에서 서성대기를 훨씬 더 좋아하는 걸로 보면, 역시 영락없이 아주 평범한 소년이랍니다.

    베탄은 열네 살, 헤어스타일이 다른 가장 평범한 소녀들과 하나 다를 게 없어요.


    그런데 집안을 통틀어서 전혀 평범하지 않은 존재가 하나 있으니, 바로 카를손입니다. 그는 지붕 위에서 살고 있어요. 그래요, 지붕 위에서 산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이미 평범하지 않은 겁니다. 다른 도시들에서는 혹시 모르겠지만, 스톡홀름에서는 누군가가 지붕 위에서 사는 일이, 그것도 작은 단독 건물 지붕 위에서 사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이 카를손은, 상상해 보세요, 바로 거기서 살고 있는 겁니다.


    카를손은 키가 작고 통통하고 자신만만한 사람인데다가 공중을 윙윙 날아다닐 줄도 알아요. 우리도 누구나 비행기와 헬리콥터를 타면 그럴 수 있긴 한데, 카를손은 제 스스로 날 수 있습니다. 

    배에 붙은 단추를 누르기만 하면 등에서 앙증맞은 모터가 작동하기 시작하지요. 프로펠러가 제대로 돌아갈 때까지 일 분쯤은 꼼짝도 않고 서 있다가, 모터가 완전히 작동하게 되면 위로 솟구쳐서 조금 흔들리기는 해도 점잖은 신사처럼 의젓한 모습으로 날아다닌답니다. 물론, 등에 프로펠러가 달린 신사를 상상할 수 있다면 그렇다는 말이죠. 


지붕 위에 사는 카를손, 저녁이면 현관에 앉아 별을 보다


    카를손은 작은 건물 지붕 위에서 아주 잘 살고 있어요. 저녁마다 현관 계단에 앉아 파이프담배를 빨면서 별들을 바라봅니다. 물론 지붕에서는 창문을 통해 보는 것보다 별들이 더 잘 보여요. 그런데도 지붕에서 사는 사람들이 아주 적다는 건 놀랍기만 하네요. 다른 주민들은 지붕 위에서 산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을 게 분명해요. 그 사람들은 거기에 카를손의 작은 집이 있는 것도 모릅니다. 작은 집이 커다란 굴뚝 뒤에 숨어 있으니까요. 아니, 그것보다도, 어른들은 설령 그 작은 집과 마주쳤다 해도 그런 것에 눈길이나 돌리겠어요?

    언젠가 한번 굴뚝 청소부가 카를손의 작은 집을 우연히 보고는 깜짝 놀라서 중얼거린 적이 있어요.

    “아니, 저게 뭐지… 집인가? 이럴 수가! 지붕 위에 작은 집이 있다니?.. 저런 게 어떻게 여기 있지?”

    그러나 그게 전부에요. 굴뚝을 타고 내려간 뒤에는 작은 집을 까맣게 잊고 말았으니까요. 


    꼬맹이는 카를손과 알게 되어서 아주 기뻤답니다. 카를손이 내려앉자마자 평범하지 않은 모험들이 시작됐거든요. 

    카를손도 꼬맹이와 알게 돼서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었어요. 사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작은 집에서, 그것도 사람들이 전혀 모르는 집에서 혼자 산다는 건 그다지 즐겁지 못하잖아요? 주변으로 날아다닐 때, “안녕, 카를손!” 하고 외치는 사람이 없다면 쓸쓸한 일이니까요.


    집안에서 막내라는 점이 대개는 참 좋지만, 그래도 기분 상해서 풀이 죽는 날도 없지는 않습니다. 바로 그런 날에 꼬맹이와 카를손이 서로 알게 됐습니다. 사실 꼬맹이는 가족의 귀염둥이고, 엄마와 아빠가 종종 응석을 받아주기도 해요. 하지만 그날은 어찌 된 영문인지 전혀 그렇지 못했습니다.

    엄마는 꼬맹이가 또 바지를 뜯어먹었다고 나무라고, 베탄 누나는 “코 좀 닦고 다녀라!” 하고 소리치고, 아빠는 꼬맹이가 학교에서 늦게 돌아왔다고 야단을 치신 거예요. 그냥 야단친 것도 아니고, “길바닥에서 어슬렁거리며 다니는구나!” 하시지 뭡니까. 

    ‘길바닥에서 어슬렁거리며 다니다니!’ 

    어떻게 그런 섭섭한 말씀을 하실 수가! 그러나 아빠는 꼬맹이가 집에 돌아오는 길에 강아지와 마주친 사실을 몰랐습니다

(알림)  Voice Training에 관심 있는 분들은 여기를 참조해 주세요.

    예쁘고 귀여운 강아지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다가와서 킁킁 냄새를 맡으며 자꾸 안기려 들었는데, 하는 짓으로 보자면 마치 꼬맹이의 강아지가 되고 싶다고 말하는 것 같았지요.

    만일 꼬맹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일이었다면, 강아지의 바람은 즉각 이뤄졌을 거예요. 그러나 엄마와 아빠는 집안에서 개를 절대 키우지 못하게 한다는 점이 문제였습니다. 게다가 길모퉁이에서 어떤 아줌마가 불쑥 나타나더니 소리치는 것이었습니다. 

    “리키! 리키! 이리 오렴!”

    그때 꼬맹이는 그 강아지가 결코 자기 것이 될 수 없음을 퍼뜩 깨달았습니다.


    그런 얘기를 듣고서도 식구들이 다 이전처럼 반대하고 나설 때, 꼬맹이는 슬프기까지 했어요. 그래서 시무룩하게 말했습니다

    - 난 평생 강아지 없이 살아야 하나 봐. 보세요, 엄마한테는 아빠가 있고, 보쎄 형과 베탄 누나도 늘 함께 있잖아. 한데 나한테는, 나한테는 아무도 없단 말이야!

    - 그게 무슨 말이니, 소중한 꼬맹이야, 우리가 늘 너랑 같이 있잖니! - 엄마가 부드럽게 달랬습니다.

    - 글쎄, 그럴까… 

    꼬맹이 목소리가 더 구슬프게 들렸어요. 왜냐하면, 문득 자기한테는 정말 세상에 아무도 없는 것 같았으니까요.

    그렇긴 해도 꼬맹이에겐 자기 방이 있고, 그래서 거기로 갔습니다. 


꼬맹이가 시무룩하게 창턱에 기대 강아지를 생각하다


    포근하고 맑은 봄날 저녁이었습니다. 활짝 열린 창문마다 하얀 커튼이 바람에 가볍게 흔들리는데, 마치 저녁 하늘에 막 나타난 작고 희미한 별들과 인사를 나누는 것만 같았어요. 

    꼬맹이가 창턱에 팔꿈치를 걸친 채 거리를 내다보게 됐습니다. 낮에 길에서 마주친 귀여운 강아지를 생각했어요. 그 강아지는 지금 주방에 놓인 작은 광주리 안에 누워 있고 어떤 사내애가, 꼬맹이가 아닌 다른 소년이, 그 곁에 앉아서 털북숭이 머리를 쓰다듬으며 “리키, 넌 정말 훌륭한 강아지야!” 하며 얼러맞추고 있을지도 모르지요.

    꼬맹이가 어린애답지 않게 깊은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그 순간 어디선가 윙윙거리는 소리가 아스라이 들려오는 듯했어요. 그 소리가 점점, 점점 더 커지더니, 아아, 이게 웬 일인가요, 창문 옆으로 통통한 사람이 내려오지 뭡니까. 그건 바로 카를손, 지붕 위에 사는 카를손이었어요. 하지만 그때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꼬맹이가 아직 몰랐답니다.


    카를손은 꼬맹이를 한참 동안 주의 깊게 살펴보더니 더 멀리 날아갔어요. 높이 솟구쳐 지붕 위에서 한 바퀴 빙 돌고는 굴뚝 주변을 이리저리 날다가 다시 창문 쪽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고는 속력을 올려서 진짜 작은 비행기처럼 꼬맹이 곁을 휙 지나쳐서 두 번째로 빙글 돌았어요. 그 다음에는 공중 곡예를 하듯이 한 바퀴 더 도는 거였어요.

    꼬맹이가 꼼짝도 않고 서서 또 무슨 일이 벌어질까 지켜보았습니다. 꼼짝도 하지는 않았지만, 가슴은 두근두근 뛰고 등줄기에 소름까지 돋았습니다. 작고 통통한 사람이 창문 곁으로 날아다닌다는 게 늘 있는 일은 아니잖아요? 

    그러는 사이에 그 사람은 창문 너머에서 속도를 줄이고 창턱과 눈높이를 맞추더니 입을 열었습니다. 


카를손이 창문으로 날아 들어오다.


    - 안녕! 여기 잠깐 내려앉아도 될까?

    - 아, 그래, 괜찮아. - 꼬맹이가 엉겁결에 대답하고 나서 한마디 덧붙였어요. - 날아다니기가 많이 힘든 거야?

    그러자 카를손이 의젓하게 대꾸했습니다. 

    - 나한테는 눈곱만큼도 힘들지 않아. 왜냐면 난 세상에서 제일가는 비행사니까! 그러나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게으름 피우는 사람한테는 날 따라하라고 권할 마음이 없다. 

    꼬맹이는 ‘보릿자루’라는 말에 기분 상할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날아봐야겠다는 생각도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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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름이 뭐지? - 카를손이 물었어요.

    - 꼬맹이. 근데, 진짜 이름은 스반테 스반테손이야.

    - 난 카를손이라고 해. 좀 이상할지 몰라도, 그냥 카를손이다. 반가워, 꼬맹이!

    - 반가워, 카를손! - 꼬맹이도 마주 인사했습니다.

    - 몇 살이니? - 카를손이 또 물었어요.

    - 일곱 살.

    - 어, 딱 좋아. 그럼, 얘기를 계속 나눠 볼까.

    그러고는 작고 통통한 두 발을 하나씩 창턱 너머로 재빨리 들이밀면서 방으로 들어섰습니다. 

    - 그쪽은 몇 살인데? - 꼬맹이도 궁금했어요. 

    카를손은 나이 많이 든 사람치고는 표정이며 말투가 왠지 아주 어린애처럼 보였거든요. 그래서 ‘아저씨’라고 하기가 어색해서 엄마 말투를 흉내 내 ‘그쪽’이라고 부른 겁니다.

    그러자 카를손이 되물었어요.

    - 내가 몇 살이냐고? 나는 가장 원기 왕성한 때에 있는 사내 대장부야. 그 이상은 더 말해 줄 수 없다. 그리고 정감 없이 ‘그쪽’이라고 하지 마라. 나한테 그냥 ‘너’라고 해도 좋아.

    꼬맹이는 원기 왕성한 때에 있는 대장부라는 게 무슨 뜻인지 정확히 몰랐어요. 어쩌면 꼬맹이 자신도 원기 왕성한 때에 있는 대장부인데, 단지 그걸 아직 모르고 있을 뿐인가요? 그래서 조심스럽게 물었습니다. 

    - 몇 살에 가장 원기가 왕성한 건데?

    - 몇 살이 중요하지는 않다! - 카를손이 흡족한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습니다. - 몇 살이든 상관없어. 특히 나로서는 그래. 난 그저 가장 원기 왕성한 때에 있고, 게다가 매력적이며 똑똑하고 적당히 통통한 사람이지!

    그러고는 꼬맹이 책장으로 다가가서 거기 놓인 장난감 기관차를 꺼냈습니다. 


    - 우리 이걸 한번 움직여 보자.

    그 제안에 꼬맹이가 대답했어요.

    - 아빠가 안 계실 때는 안 돼. 그 기관차를 움직이게 하려면 아빠나 보쎄 형이 있어야 해.

    - 아빠나 보쎄가 있어야 할 수 있겠지만, 지붕 위에 사는 카를손하고도 할 수 있는 거다. 세상에서 제일가는 기관차 전문가는 바로 지붕 위에 사는 카를손이야. 아빠한테 그렇게 전해라!

    그러면서 기관차 옆에 놓인 알코올 병을 잽싸게 들어 작은 연료통에 가득 붓고는 심지에 불을 붙였습니다. 


    카를손이 세상에서 제일가는 기관차 전문가라 해도 알코올을 붓는 건 어째 아주 서툴러서 흘리는 바람에 선반 바닥에 알코올이 잔뜩 고였어요. 그 알코올에 곧 불이 붙어서 반들반들한 표면을 따라 파란 불꽃이 혀를 날름거리며 춤을 추기 시작했지요. 꼬맹이가 놀라서 “앗!” 소리를 지르며 벌떡 일어났습니다. 

    - 느긋하게, 언제나 느긋하게!

    카를손이 통통한 손을 저으며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말했습니다. 

    그러나 꼬맹이는 불꽃을 보고 느긋하게 있을 수가 없었어요. 곁에 있는 걸레로 불꽃을 재빨리 두드렸습니다. 반들반들한 바닥에 흉한 얼룩들이 제법 크게 생겼습니다.

    - 이것 좀 봐, 선반이 엉망이 됐어! 엄마가 뭐라고 하시겠어? 

    꼬맹이가 걱정이 되어 소리쳤습니다.

    - 하찮은 거야, 일상적인 일이다! 책장에 작은 얼룩 몇 점 생겼다고 죽지는 않아. 엄마한테 그렇게 전하렴. - 카를손이 두 눈을 반짝이며 기관차 옆에 무릎을 구부리고 앉았어요. - 이제 기관차가 움직일 거다.

    그리고 몇 초도 지나지 않아서 정말 기관차가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칙, 푹, 칙, 푹…

    기관차가 숨을 헐떡였습니다. 

    아아, 그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기관차들 중에서 가장 멋있고, 카를손은 마치 자기가 그걸 발명한 듯이 자랑스럽고 행복해 보였습니다. 

    - 아, 참, 안전판을 검사해야 된다. - 카를손이 갑자기 생각난 듯 작은 손잡이 하나를 돌렸어요. - 안전판을 검사하지 않으면 사고가 생겨.

    칙-칙-푹-푹… 

    기관차가 점점 더 빠르게 헐떡였습니다. 

    칙칙-푹푹, 칙칙-푹푹!.. 

    마침내 기관차가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전 속력으로 달리게 시작했어요. 카를손의 두 눈이 환하게 빛났습니다. 


    꼬맹이는 책장 얼룩을 더 이상 걱정하지 않게 됐습니다. 자기한테 그런 놀라운 기관차가 있다는 사실에 행복했지요. 어디 그뿐인가요. 세상에서 제일가는 기관차 전문가로서 안전판을 솜씨 좋게 검사한 카를손과 알게 된 것도 행복했습니다.

    - 자, 꼬맹이야, 이게 정말 ‘칙칙-푹푹’이다! 내가 뭐라고 했냐! 세상에서 제일가는 기관차 전문가가…

    그러나 카를손은 말을 채 맺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 순간 “펑!” 하는 소리와 동시에 기관차가 폭발하면서 조각들이 사방으로 튀었으니까요.

    - 기관차가 폭발했다! - 카를손이 신나서 소리쳤습니다. 마치 기관차를 가지고 가장 재미난 마술이라도 부린 것처럼 말이지요. - 와아, 정말 폭발했네! 소리도 엄청나게 컸어! 정말 멋있다! 


장난감 기관차가 폭발해서 산산조각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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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꼬맹이는 카를손처럼 기뻐할 수 없었습니다. 어쩔 줄 몰라 우두커니 서 있는데, 두 눈에는 금방 눈물이 가득 고였어요. 

    꼬맹이가 울음 섞인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 내 기관차… 내 기관차가 산산조각 났어!

    - 하찮은 거야, 일상적인 일이다! - 카를손이 작고 통통한 손을 태연하게 흔들면서 꼬맹이를 달랬어요. - 내가 더 좋은 기관차를 줄게.  

    - 네가 준다고? - 꼬맹이가 놀랐어요.

    - 물론이지. 저 위에, 내 집에는 기관차가 수천 대나 있으니까.

    - 저 위에, 네 집이 어딘데?

    - 저 위에, 지붕 위에 있다, 내 작은 집이.

    - 지붕 위에 네 작은 집이 있다구? 거기에 기관차가 수천 대나 있단 말이야? - 꼬맹이가 되묻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 그래, 이백 대쯤은 될 거야.

    - 야아, 네 작은 집에 가보면 참 좋겠다! - 꼬맹이는 놀랍기도 하고 부럽기도 했어요.

    한데 그 말을 믿기가 어려웠습니다. 지붕 위에 작은 집이 있고, 거기서 카를손이 산다니… 


    하지만 곧 고개를 저으면서 다시 탄성을 질렀습니다.

    - 기관차들이 가득한 집이면 됐어! 그것도 이백 대나 있다니!

    카를손이 목소리를 슬쩍 낮추었습니다.

    - 아, 근데 기관차가 몇 대 남았는지 정확하게 세 보지는 않았어. 그러나 적어도 몇 십 대는 될 거야.

    - 그 중에서 나한테 한 대를 주겠다고?

    - 물론이지!

    - 지금 당장 줘!

    - 아니야, 먼저 기관차들을 좀 살펴보고 무엇보다도 안전판을 검사… 뭐, 그런 거다. 자, 느긋하게, 언제나 느긋하게! 며칠 안에 줄게. 


    꼬맹이가 사방에 흩어진 기관차 조각들을 주우면서 걱정스럽게 중얼거렸습니다.

    - 아빠가 몹시 화내실 텐데.

    카를손이 놀라서 눈썹을 치켜세웠습니다.

    - 겨우 기관차 하나 때문에? 이건 하찮은 거야, 일상적인 일이다. 이런 걸 두고 걱정하다니! 내 말을 아빠한테 전해라. 내가 직접 말할 수도 있지만, 지금은 바빠서 가봐야 하니… 오늘 네 아빠하고 만나지 못할 거야. 난 집으로 날아가서 무슨 일이 있는지 둘러봐야 한다.

    그 말에 꼬맹이가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 네가 여기 와서 정말 좋아. 물론, 기관차는 이렇게… 아, 언젠가 또 여기로 날아올 거야?

    - 느긋하게, 언제나 느긋하게!

    카를손이 다시 주의를 주고는 배에 달린 단추를 눌렀습니다. 


카를손이 플로펠러를 돌려 창문 밖으로 날아가다


    모터가 윙윙 돌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카를손은 꼼짝도 않고 서서 프로펠러가 전 속력으로 돌아갈 때까지 기다렸어요. 그리고 공중으로 날아올라 몇 바퀴 빙빙 맴돌았습니다. 

    - 흠, 모터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군. 기름칠 좀 하려면 서비스센터에 다녀와야겠는걸. 물론 내 손으로도 할 수 있지만, 시간이 없는 게 탈이야… 아무래도 서비스센터에 가야 할까 보다.

    꼬맹이도 그게 더 낫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카를손이 열린 창문으로 날아갔어요. 봄날, 별이 뜨기 시작한 하늘에 작고 통통한 모습이 또렷하게 드러났습니다.

    - 잘 있어, 꼬맹이!

    카를손이 작고 통통한 손을 흔들며 소리치고는 휙 사라졌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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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7. 28. 2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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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녀와 소통, 어떻게 하나?  

 

 

소통이라는 크고 중요한 영역 안에서도 '자녀와 부모 간의 소통'은 또 각별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볼 수 있다. 

심리학자인 율랴 기펜레이터 교수가 이미 이십여 년 전부터 수많은 부모들과 (또 때때로 아이들과) 대화하며 이 주제를 폭넓고 깊게, 무엇보다도 새로운 인본적 시각으로 다뤄 오고 있다. 

그리고 그 결과를 책 시리즈로 펴내 왔다. 

 

자녀와 소통, 어떻게?

 

소통을 공부하는 나에게도 기펜레이터 교수의 시리즈는 자못 흥미로웠다.

몇 년 전부터 보고 다듬은 일부를 우리 블로그 독자들에게 소개한다. 여기에 싣는 포스트들은 기펜레이터 교수의 글을 근간으로 하되 토마스 고든의 <효율적인 부모 트레이닝 P.E.T. Parent Effectiveness Training>, 칼 로저스의 <인격 형성>, 버지니아 사티어의 <당신과 당신 가족: 개인 성장 지침>, 안톤 마카렌코의 '양육 관련 여러 저술' 등을 참고하여 필요한 경우 보충했다. 

 

한데 '부모 자녀 간의 소통'에서도 아이들 내면세계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중요하게 제시되는 것이...

바로 경청 기법이다.

또한 (부모가)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이다.

그리고 이런 분야에 관한 정보는 우리 블로그에 그리 부족하지 않게 실려 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했던가? 

혹은, 이와 좀 상반되는 입장인 듯싶은데... 

“자식에게 매질을 아끼는 자는 제 자식을 미워함이라”고 했던가?[각주:1] 

 

아쉽게도 두 가지 입장 다 (적어도 이제는, 지금 시대에 와서는!) 옳지 못하다.

칼 로저스나 안톤 마카렌코, 기펜레이터 같이, 권위주의적이거나 수직적인 관계가 아니라 (인간 대 인간으로서) 동등하고 수평적인 관계로 '부모자식의 소통'을 바라보는 이들한테는 둘 다 옳지 않다.

그리고 양쪽이 다 '이기는' 길을 제시한다. 

 

앞으로 소개하는 포스트 시리즈를 접하면서 독자들께서는, 

1) 미처 생각도 못하던 생각이나 대목을 접하며 신선한 충격을 맛볼 수 있고 

2) 참인줄로만 여기던 것이 기실은 잘못된 지식임을 알게 되어 자신을 좀 더 다잡는 계기를 얻고 

3) 아이들한테 보내는, 기펜레이터 할머니의 따스하고 인간적이고 민주적인 눈길에 공감하게 될 것이다. 

 

소개말을 이런 '실화'로 맺는다. 놀라지 마시라. 

 

잘 먹어 영양을 고르게 섭취하고 위생과 의료 도움이 좋지만
어른과 (부모와) 소통을 충분히 누리지 못하고 자란 아이는...
심리며 정신의 건강이 튼실하지 못할 뿐 아니라
신체적으로도(!) 잘 발달되지 못한다는 것. 
잘 먹이고 먹는 데도 불구하고 발육이 좋지 못하며 삶에 흥미를 잃는다는 것! 

 

이것은 1차 대전 이후 미국과 유럽에서 유아 사망 사례를 분석해 나온 결과이다. 

 

이른바 '문제아'나 '골칫덩이', '말 안 듣는 아이', '구제 불능 아이'들은 다 가정에서 부모와의 관계가 잘못 엮이고 쌓인 결과이다.

이 매듭을 누가 (먼저) 풀어야 하나.

아이가? 

 

아이와의 관계며 소통에서 평정심을 잃는다 싶을 때마다,

앞으로 소개하는 포스트를 읽고 또 읽으시라.

어디서 무엇이 잘못 됐는지 알게 될 것이다.  

 

차  례

 

1부. 자녀와 소통하는 방법 배우기  

 

  1과. 조건 없이 받아들이기  

  2과. 아이를 도울 때, 정말 조심해야 돼! 

 

  3과. “함께 해볼까?!” 

  4과. 만약 아이가 원치 않으면? 

 

  5과. 아이가 하는 말을 경청하는 방법   

  6과. 아이가 하는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하는 이유

 

  7과. 부모들의 감정은 어떻게 처리해야? 

  8과. 갈등 해소 방법  

 

  9과. 규율과 기강은 어떻게 되나? 

  10과. 우리네 감정의 ‘항아리’    

 

관련 포스트: 

유년기 동경과 백학 (crane)

들을 줄 안다는 것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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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물건

질책과 비난 섞지 않고 자기감정 드러내기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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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에서 침묵하는 이유 5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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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소통에서 삼가야 할 표현들

퍼블릭 스피킹(60) 소통 원칙 몇 가지

(46) 정중한 말씨

목소리 부드럽게 만들기

소통에 등장하는 트릭과 조종

소통에서 말투의 중요성

소통 장벽의 유형과 극복 (1)

신체언어 카드책 11: 눈

소통에서 눈길의 중요성

말로 하는 소통 스킬

야고보서 1장 19절

 

  1. “He that spareth the rod, hateth his son." "초달(楚撻)을 차마 못하는 자, 그 자식을 미워함이니라.” (잠언 13:24) [본문으로]


러시아 공상과학(SF)소설의 효시 

  도웰 교수의 머리  


벨랴예프 지음

김성호 옮김


학술대회에서 마리 로랑이 코른의 비행을 폭로하다




25. 음모자들 


아르망의 작은집이 아르투아 도웰과 아르망, 샤우브, 로랑 등 ‘음모자들’의 본부가 됐다. 전체 회의에서는 로랑이 위험하더라도 자기 아파트로 돌아가는 것으로 결정됐다. 그러나 로랑이 한시 바삐 어머니를 보고 싶어 했기 때문에, 아르망이 로랑 부인에게 가서 부인을 자기 집으로 데려왔다.

딸이 무사한 것을 보자 노부인이 좋아서 어쩔 줄 몰랐다. 아르망이 부인의 팔을 잡아 소파에 앉혔다.

    

모녀가 삼층의 방 두 칸에 자리를 잡았다. 로랑 부인의 기쁨은 하늘을 찌를 듯했지만, 자기 딸의 ‘구원자’인 아르투아 도웰이 여전히 병석에 있다는 사실 하나로 다소 퇴색됐다. 다행히도 그는 독가스 후유증에 그리 오래 시달리지 않았다. 그의 유난히 강건한 신체 기관들도 제 구실을 했다. 


로랑 부인과 딸이 번갈아 병자의 침대 곁을 지켰다. 아르투아 도웰이 로랑 모녀와 아주 친해졌고, 마리 로랑은 그를 지극 정성으로 간호했다. 아버지의 머리를 도울 힘이 없는 로랑이 이제 아들에게 정성을 쏟았다. 적어도 그녀 자신은 그렇게 여겼다. 그러나 간병인의 자리를 마지못해 어머니에게 내주게 된 이유가 따로 있었다. 


아르투아 도웰은 처녀인 그녀의 순진한 상상을 뒤흔든 첫 남자였다. 그와의 앎은 낭만적 상황에서 벌어졌다. 즉, 그는 중세의 기사처럼 그녀를 라위노의 무시무시한 병원에서 구출한 것이다. 그의 부친의 비극적 운명은 그에게도 비극적으로 각인됐다. 그리고 용기와 힘, 젊음 같은 개인적 자질은 거부하기 어려운 매력이 됐다. 

아르투아 도웰 역시 마리 로랑을 정겨운 눈길로 맞이하곤 했다. 그는 자기감정을 더 잘 헤아렸고, 자신의 다정함이 살뜰한 간병인에 대한 병자의 의무만이 아니라는 점을 자신에게 숨기지 않았다. 


젊은 사람들의 다정한 눈길은 주변 사람들에게서 벗어나지 못했다. 로랑 부인은 딸의 선택을 전적으로 용인하는 게 분명한데도 아무 것도 모르는 체했다. 

스포츠에 몰입하면서 여자들을 경멸적으로 대하는 샤우브는 속으로 아르투아를 가엾게 여겼고, 아르망은 남의 행복의 서광을 보면서 무겁게 한숨을 쉬고 자기도 모르게 안젤리카의 매혹적인 몸매를 떠올렸다. 그런데 이제 그 몸통에서 그는 안젤리카가 아니라 브리케의 머리를 더 자주 떠올렸다. 그런 ‘배신’을 두고 자신에게 화를 내기도 했지만, 그게 다 그저 관념연합의 법칙일 뿐이라고 합리화했다. 즉, 브리케의 머리가 어디서나 안젤리카의 몸을 쫓아다닌 것이라고.


아르투아 도웰은 의사가 걸어도 좋다고 허락할 때까지 기다릴 수 없었다. 그러나 아르투아에게는 침대에서 일어나지 않고 말하는 것만 허락됐고, 게다가 주변 사람들에게는 도웰의 폐를 각별히 돌보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아르투아가 자의든 타의든 의장의 역할을 맡게 됐고, 다른 이들의 의견을 경청하고 간략하게 반박하거나 친구들 간의 ‘논쟁’을 요약하게 됐다.

한데 논쟁은 대체로 사나웠다. 아르망과 샤우브가 특히 뜨거웠다. 

라위노와 코른을 어떻게 상대해야 하나? 


샤우브는 왠지 라위노를 제물로 점찍고는 그를 ‘화적처럼 습격’하자는 계획을 키웠다.

“우린 이 개자식을 완전히 죽이지 못했어. 한데 그 개를 없애버려야 해. 그 개의 호흡 자체가 지구를 더럽히고 있어! 내 손으로 그놈의 목을 졸라 죽여야 속이 시원할 거야. 자네는 말하지.” 그가 도웰을 보면서 열을 올렸다. “이 사건을 법정과 형리에게 맡기는 것이 더 좋다고 말이야. 그러나 라위노가 직접 나한테 말한 바로는, 그가 당국을 다 매수하고 있다는 거야.”

“지역 당국일 뿐이겠지.”

도웰이 한마디 보태자 아르망이 제지하고 나섰다.  

“잠깐만, 아르투아, 자네는 아직 말을 하면 안 돼. 해로워. 그리고 샤우브, 자네는 시급한 것을 얘기하게. 라위노쯤이야 우리는 언제든 혼낼 수 있을 거야. 우리의 당면 목표는 코른의 범죄를 폭로하고 도웰 교수의 머리를 찾아내는 것이네. 우린 어떤 방법으로든 코른의 집에 침투해야 돼.”

“근데 어떻게 잠입한단 말이지?”

아르투아가 물었다. 

“어떻게? 강도와 도둑들이 하는 식이지.”

“자네는 가택 침입 강도가 아니잖나. 그것도 기술이 제법 있어야…”

아르망이 잠시 생각하더니 자기 이마를 탁 쳤다. 

“그래, 순회공연에 장을 초대하세나. 브리케가 나를 친구처럼 여기고 그의 직업 비밀을 알려줬거든. 그는 으쓱할 거야! 살면서 유일하게 사리사욕에 사로잡히지 않고 남의 집 자물쇠를 깨는 거지.” 

“한데 그가 그다지 사심이 없지 않다면?

“우리가 그에게 지불하면 돼. 그는 우리에게 길을 내주고 우리가 경찰을 부르기 전에 무대에서 사라지는 거지, 간단하잖나.”

그러나 여기서 아르투아 도웰이 그의 열기를 식혔다. 아르투아가 나직하게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런 낭만적 요소가 지금 경우에는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네. 코른은 라위노한테서 내가 파리에 도착했고 마드무아젤 로랑의 구출에 관여했다는 걸 이미 들어 알고 있을 거야. 그렇기 때문에 난 더 이상 익명으로 다닐 근거가 없는 거야. 이게 첫 번째고, 그 다음엔, 나는... 고인이 된 도웰 교수의 아들이고, 그렇기 때문에 법률가들이 말하는 것처럼 사건에 개입하고 재판과 수색 따위를 요구할 법적 권리를 가지고 있다네.

“또 재판 얘기로군.” 아르망이 무망하다는 듯이 손사래를 쳤다. “자네만 교묘한 법정 공방에 휘말리고, 코른은 교묘하게 빠져 나갈 거야.”

아르투아가 기침을 하다가 가슴 통증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말을 너무 많이 하지 말아요.” 

아르투아 곁에 앉은 로랑 부인이 염려했다. 

“괜찮습니다.” 그가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대답했다. “통증은 이제 사라질 거야…"


그 순간 마리 로랑이 방으로 들어섰는데, 뭔가에 상당히 흥분해 있었다.

“이것 좀 읽어 봐요.” 

그녀가 도웰에게 신문을 내밀었다. 

1면을 장식한 굵은 활자가 눈에 확 들어왔다. 

「코른 교수의 일대 획기적인 발명」

중간 제목은 조금 더 작은 활자로 찍혔다.

「되살아난 사람 머리가 공개된다.」


기사는 내일 저녁 학술대회에서 코른 교수가 소생시킨 사람 머리를 대중에게 공개하면서 그 동안의 연구 결과를 발표할 것이라고 알렸다. 이어서 코른의 연구 이력이 소개되고, 그의 학술적 노고와 그가 시행한 눈부신 수술들이 열거됐다.

첫 기사 아래에는 코른의 자필 서명이 담긴 논문이 실려 있었다. 거기에는 처음에 개를 대상으로 성공하고 이어서 사람의 머리를 되살렸다는 실험 내력이 대략적으로 기술됐다.


로랑이 아르투아 도웰의 표정과 기사를 읽어 내리는 그의 눈길을 긴장한 눈으로 주시했다. 도웰이 겉으로는 태연을 유지했다. 기사 끝에 가서야 얼굴에 서글픈 미소가 나타났다가 곧 사라졌다.

“정말 열 받는 일 아닌가요?” 

아르투아가 말없이 신문을 건네줄 때 마리 로랑이 소리쳤다. 

“이 몹쓸 자는 이 ‘놀라운 발명’에서 당신 부친의 역할을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는군요. 안 돼, 난 그런 짓을 그대로 내버려둘 수 없어요!”

로랑의 두 뺨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코른이 나한테나 당신 아버지한테, 또 몸이 없는 존재라는 지옥을 위해 소생시킨 불행한 머리들에게 가한 짓은 반드시 처벌을 받아야 해요. 그는 법정만이 아니라 공중 앞에서도 책임을 져야 한단 말입니다. 단 한 시간이라도 그가 의기양양하게 굴도록 방치한다면, 그건 가장 큰 불공정일 겁니다.” 

“당신이 원하는 건 뭐지요?”

도웰의 나직한 물음에 마리 로랑이 열을 올렸다.

“그의 대성공을 망치는 거지요! 학술대회에 가서 많은 사람들이 있는 자리에서 그가 살인자요 범죄자, 날강도라는 비난을 그 얼굴에 퍼붓는 거예요!!” 


로랑 부인이 가시방석에 앉은 사람처럼 안절부절못했다. 딸의 신경이 얼마나 크게 악화됐는지를 비로소 이해했다. 온순하고 절제된 딸이 이렇게 분개하는 것을 엄마는 처음 보았다. 로랑 부인이 딸을 달래 보았지만, 딸은 주변에 아무 것도 의식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분노와 복수의 갈망으로 한껏 달아올랐다. 아르망과 샤우브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그녀의 열기와 가라앉지 않는 분노가 다른 이들을 압도했다. 로랑 부인이 간청하는 눈길로 아르투아 도웰을 바라봤다. 그가 그 눈길을 알아차리고 입을 뗐다. 


“마드무아젤 로랑, 당신의 행위는 아무리 고결한 감정에서 나왔다 해도, 무모한…”

그러나 로랑이 그 말을 가로챘다

지혜만큼 가치가 있는 무모함도 있는 법입니다. 내가 무슨 영웅이 되려고 폭로에 나선다는 생각은 마세요. 난 그저 달리 행동할 수 없을 뿐이에요. 나의 도덕적 잣대로는 용납할 수가 없는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당신이 얻는 것은 무얼까요? 검찰 수사관한테 전모를 말할 수도 없지 않나요?”

“아니요, 난 코른이 대중 앞에서 치욕을 맛보기를 원해요! 코른은 다른 이들을 불행에 빠뜨리면서 범죄와 살인으로 자신의 명성을 쌓고 있어요! 내일 그는 영광의 월계관을 쓰기 바라는 겁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에게 합당한 영광을 받아야 해요.

“그런 행동에 난 반댑니다, 마드무아젤 로랑.” 

로랑이 너무 흥분하여 신경계가 깨지지는 않을까 염려하면서 아르투아 도웰이 조용한 소리로 말했다.

“아주 섭섭하군요. 하지만 세상이 다 반대해도 난 그만두지 않을 거예요. 당신은 아직 나를 몰라요!


아르투아 도웰이 미소를 지었다. 젊은 혈기가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발갛게 상기된 뺨을 지닌 마리라는 아가씨가 이제 한층 더 마음에 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염려가 더 커졌다. 


“하지만 그건 깊이 생각하지 않은 행보일 거요. 당신은 큰 위험에 처할 텐데…”

“우리가 그녀를 지키겠네!”

아르망이 타격 준비 완료된 장검을 쥔 것처럼 손을 치켜들면서 외쳤다.

“그래, 우리가 당신을 지켜 주겠어요.”

샤우브가 허공에서 주먹을 휘두르며 우렁찬 목소리로 친구를 곁들었다.

마리 로랑이 그런 지지를 보면서 아르투아를 나무라는 눈길로 쳐다봤다.

“그렇다면 나도 당신을 지지할 겁니다.” 

그의 말에 로랑이 반색을 띠었다. 그러나 곧 표정이 어두워졌다.

“당신은 안 돼요… 아직 건강이 회복되지 않았어요.”

“그래도 난 갈 겁니다.”

“하지만…”

“세상이 다 반대해도 난 이 생각을 저버리지 않을 겁니다. 당신은 아직 나를 몰라요.”

미소를 지으면서 도웰이 그녀가 한 말을 되풀이했다.




26. 상처뿐인 승리 


다음 날 학술 대회를 코앞에 두고 코른이 브리케의 머리를 주도면밀하게 살폈다.

검사를 끝낸 뒤 머리에게 말했다.

“실은, 오늘 저녁 여덟 시에 당신을 청중이 많은 모임에 데리고 갈 거요. 거기서 당신은 말을 하게 될 텐데, 질문을 받으면 간결하게 답변해요. 불필요한 얘기는 삼가고. 알겠소?”

코른이 공기 밸브를 열자 브리케가 쉰 소리를 냈다.

“알았어요. 하지만 내가 부탁한 것은… 제발…”

그녀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코른이 밖으로 나갔다. 


그의 동요가 점점 더 커졌다. 쉽지 않은 과제가 눈앞에 있었다. 바로 학술 대회장으로 머리를 운반하는 것. 아주 작은 충격도 머리의 생명에는 치명적일 수 있었다.

특별히 장치된 자동차가 준비됐다. 진동을 방지하는 바퀴가 달리고 사다리로 옮기는 데 필요한 손잡이가 마련된 특수 탁자 위에 다른 기구들과 함께 머리를 올려놓았다. 마침내 준비가 다 끝났다. 저녁 일곱 시 그들이 거리로 나섰다. 


엄청나게 큰 홀은 눈부신 빛으로 가득했다. 의학계의 백발들과 번쩍이는 대머리들이 검은 프록을 차려 입고 일층 무대 앞의 좌석들을 차지했다. 안경 유리알들이 반짝거렸다. 이층의 칸막이 자리와 계단식 좌석은 의학계와 이리저리 연결된 선택된 청중에게 제공됐다. 


머리 이식에 관한 연구 발표장에 의학계의 원로들이 모이다


귀부인들의 호사한 의상이 보석 장식을 번쩍이면서 세계적인 연주자들이 등장한 콘서트홀을 연상케 했다.

시작을 기다리는 관객들의 절제된 소음이 홀을 채웠다. 


무대 곁에 마련된 작은 탁자들 앞에서 신문기자들이 연필 쥔 손을 부지런히 놀리며 부산을 떨었다. 무대 오른편에는 촬영기 몇 대가 코른의 중대 발표와 살아난 머리의 모든 순간을 필름에 담으려고 눈에 불을 켰다. 무대 위 기다란 테이블 앞에는 학계의 거성들 중에서 명예로운 인사 몇몇이 자리를 잡고 앉았다. 


무대 한가운데에 연단이 우뚝 서 있고, 그 위에 놓인 마이크를 통해 전 세계로 연설이 중개될 터였다. 두 번째 마이크는 브리케의 머리 앞에 놓였다. 그녀는 무대 오른편에 우뚝 솟아 있었다. 정성 들인 화장 덕분에 머리가 의외로 매력적인 분기기마저 띠었으며, 그와 함께 놀라운 장면에 미처 준비되지 않은 관객들이 맛볼 묵직한 인상도 많이 덜어졌다. 간호인과 존이 머리 옆 탁자 곁에 섰다. 


브리케의 머리를 학술대회장에서 소개하다


    마리 로랑과 아르투아 도웰, 아르망, 샤우브가 연단에서 불과 두 발짝 떨어진 맨 앞줄에 앉았다. 샤우브 한 사람만 위장하지 않아서 평소의 모습이었다. 이브닝드레스를 입고 둥근 모자를 쓴 로랑은 코른이 눈을 돌리다가 우연히 알아보지 못하도록 모자챙을 푹 누르고 고개를 낮게 숙였다. 아르투아와 아르망은 변장하고 나타났다. 그들의 검은 볼수염과 콧수염이 아주 근사했다. 일을 더 잘 도모하기 위해 그들은 서로 모르는 사람처럼 행동하기로 했다. 각자 분산된 눈길로 주변을 훑어보면서 말없이 앉아 있었다. 하지만 아르망은 잔뜩 주눅이 든 상태였다. 브리케의 머리를 보고는 거의 숨이 멎을 뻔한 것이다. 


정각 여덟 시 코른이 연단에 올라섰다. 평소보다 얼굴이 창백했지만 아주 당당했다.

청중이 끊이지 않는 박수로 오랫동안 그를 환영했다.

촬영기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신문기자들이 숨을 죽였다. 코른 교수가 자신의 업적이라고 주장하는 발명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그건 형식에서 눈부시고 능숙하게 구성된 스피치였다. 코른은 요절한 도웰 교수가 숨지기 전에 이룩한, 아주 귀중한 작업을 잊지 않고 상기했다. 그러나 고인의 작업에 경의를 표하면서 자신의 ‘소박한 업적’을 말하는 것도 빼먹지 않았다. 모든 발명의 영광이 바로 그에게, 코른 교수에게 속한다는 것을 청중이 추호도 의심하게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그의 스피치가 박수 때문에 몇 번 끊겼다. 수백 명의 귀부인들이 작은 망원경과 오페라글라스를 그가 있는 쪽으로 돌렸다. 남자들의 망원경과 외눈안경들이 역시 적잖은 흥미를 가지고 브리케의 머리로 쏠렸다. 머리는 억지웃음을 짓고 있었다.


코른 교수가 신호를 보내자 간호인이 밸브를 열어 공기를 들여보냈고, 브리케의 머리가 말을 할 수 있게 됐다. 

“기분이 어떤가요?” 

늙은 과학자가 그녀에게 물었다.

“좋아요. 감사합니다.”

브리케의 목소리는 희미하고 쉰 소리였다. 강하게 불어넣은 공기 흐름이 휘파람 소리를 냈고, 목소리에는 변조라는 게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머리가 말한다는 사실은 청중에게 비상한 인상을 불러일으켰다. 그런 요란한 박수갈채를 세계적인 아티스트들도 늘 받지는 못할 터였다. 그러나 한때 작은 선술집들에서 공연으로 월계관에 심취하던 브리케가 이번에는 피곤하게 눈꺼풀을 내리깔기만 했다. 


로랑이 한층 더 동요하게 됐다. 신경성 발열에 전신이 흔들리기 시작하자, 치아들이 덜덜 떨리지 않게 하려고 윽물었다. 

‘지금이야.’ 

몇 번이나 중얼거렸지만 매번 결단력이 부족했다. 상황이 그녀를 억눌렀다. 매번 순간을 보내고 난 뒤 그녀는 코른 교수가 더 높이 올라갈수록 추락은 더 깊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자신을 달래려고 애썼다.

의학계 거성들의 연설이 시작됐다. 

중견 학자들 중 한 사람인, 머리 허연 노인이 연단으로 나왔다.

그는 희미하고 갈라진 목소리로 코른 교수의 천재적 발명을, 과학의 위력을, 죽음에 대한 승리를, 위대한 과학적 업적이 세상에 선사하는 지성들과 접촉하는 행운에 대해 말했다.


로랑이 가장 덜 기대한 순간에 오랫동안 억눌렸던 분노와 증오의 회오리가 그녀를 사로잡고 터지게 했다. 이미 자신을 통제할 수 없었다.

그녀가 연단으로 뛰어 올랐다. 놀란 노학자를 팩 밀치다시피 하고 그의 자리를 차지했다. 그리고 지독하게 창백한 얼굴과 살인자를 추적하는 푸리아에(*복수의 여신)의 뜨거운 눈길과 헐떡이는 목소리로 종잡을 수 없는 말을 맹렬하게 쏟아냈다. 


그녀가 난데없이 등장하자 홀 안이 들썩거렸다.  

처음 한순간 코른 교수는 당황하여 로랑을 제지하려는 듯이 그녀 쪽으로 자기도 모르게 몸을 움직였다. 그러다가 재빨리 존에게 몸을 돌려 귀에 대고 몇 마디를 속삭였다. 존이 문으로 빠져나갔다. 

아수라장이 된 상태에서 아무도 거기에 눈길을 돌리지 않았다.

학술 대회에 로랑이 기습적으로 등장하여 코른 교수의 비행을 폭로하다

“저 사람을 믿지 말아요!” 로랑이 코른을 가리키면서 절규했다. “그는 도둑에다가 살인자예요! 도웰 교수의 업적을 가로챘단 말입니다! 저 사람이 도웰을 죽였단 말입니다! 지금도 도웰의 머리와 함께 연구를 하고 있어요. 저자는 괴롭히고 고문하여 실험을 계속하도록 강요하고 있어요, 그러고는 그 실험을 자신의 발명처럼 내놓고 있어요… 코른이 자기에게 약물을 투입했다고 도웰이 나한테 직접 말했어요…”


청중은 당황하여 패닉 상태로 바뀌었다. 많은 사람들이 자리에서 상체를 들썩거렸다. 신문기자들 몇 명도 펜을 떨어뜨리고 아연실색하여 돌처럼 굳었다. 촬영 기사만이 촬영기 손잡이를 부지런히 돌렸다, 센세이션을 일으킬 만한 뜻밖의 반전에 기뻐하면서.


코른 교수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얼굴에 연민의 미소를 띤 채 태연하게 서 있었다. 신경성 경련이 로랑의 목구멍을 억누르기만을 기다렸다가, 말이 잠깐 끊긴 틈을 이용해 문가에 서 있는 안내원들에게 위엄 있게 말했다.

“그녀를 데리고 나가시오! 실성한 사람이라는 게 보이지 않는단 말이오?”

안내원들이 로랑 쪽으로 달려왔다. 그러나 그들이 객석 사이로 그녀에게 달려들기 전에, 아르망과 샤우브, 아르투아가 먼저 달려가서 그녀를 복도로 데리고 나왔다. 코른이 일단의 무리를 수상쩍은 눈길로 쏘아보았다. 

복도에서는 로랑을 경찰들이 잡아두려고 했다. 그러나 젊은이들이 그녀를 거리로 데리고 나와 자동차에 태울 수 있었다. 그들이 떠났다.


장내가 다소 진정되자 코른 교수가 연단으로 나가서 ‘비극적인 사건’을 두고 청중에게 사과했다. 

“로랑은 신경과민에다 히스테리가 심한 여성입니다. 내가 인위적으로 살려낸 브리케 시체의 머리와 날마다 접촉하면서 겪어야 했던 체험을 이겨내지 못했습니다. 정신이 부서졌습니다. 미친 거지요…”

이 발언은 쥐 죽은 듯이 조용한 홀에서 울렸다. 

일부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그건 쉬쉬 하는 소리에 묻히고 말았다. 마치 죽음의 바람이 한겨울 웃풍처럼 홀 위에서 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수백 개의 눈들이 이제는 브리케의 머리를 마치 무덤에서 나온 것처럼 경악과 연민으로 바라보았다. … 객석에 앉은 사람들의 기분이 완전히 망가졌다. 많은 사람들이 끝을 보지 않고 자리를 떴다. 곧 다음 연사들이 미리 준비된 스피치를 하고 축전이 소개되고, 코른 교수를 여러 대학과 과학아카데미의 명예 회원이요 박사로 선출한다는 증서들이 낭독됐다. 

대회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코른 교수의 등 뒤로 흑인이 나타나서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브리케의 머리를 되가져갈 준비를 했다. 머리가 지치고 놀라서 금방 생기를 잃었다. 


자동차 안에 혼자 남은 코른 교수가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주먹을 불끈 쥐고 이를 부드득 갈고 욕을 해대는 바람에, 운전수가 몇 번이나 고개를 돌려 물어야 했다. 

“뭐라고 하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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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웰 교수의 머리  


벨랴예프 지음

김성호 옮김


벨랴예프, 도웰 교수의 머리 책 표지




21. 탈주 


그날 밤은 로랑이 라위노 의사의 사설 병원에서 지금까지 보낸 기간 중에 가장 힘든 시간이었다. 시간이 방으로 흘러드는 익숙한 음악처럼 끝없이 지겹게 늘어졌다.

로랑이 창문에서 방문으로 초조하게 왔다 갔다 했다. 복도에서 조심스레 내딛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녀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두근거리다가 얼어붙었다. 하지만 그건 당직 간병인의 발소리였다. 간병인은 문틈으로 들여다보려고 문으로 살금살금 다가들곤 했다. 이백 촉짜리 전구가 밤새 방안을 밝히고 있었다. 라위노 의사는 ‘손봐야 할 환자들’에게는 잠시라도 숙면을 제공하지 않았다. 로랑이 옷도 벗지 않은 채 서둘러 침대에 누워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자는 척했다. 그리고 흔치 않은 일이 그녀에게 생겼다. 


몇 날 밤을 불면으로 시달린 그녀가 깜빡 잠들고 말았다. 그 동안 겪은 일들로 인해 녹초가 될 정도였던 것이다. 잠든 시간은 불과 몇 분에 불과했지만, 그녀에게는 밤이 다 지나간 것 같았다. 놀라서 벌떡 일어나 문가로 달려갔다가 마침 들어서는 아르투아 도웰과 부닥쳤다. 그는 약속을 어기지 않았다. 그녀가 터져 나오려는 환성을 간신히 참았다. 


“서둘러요.” 그가 속삭였다. “간병인이 서쪽 복도에 있어요. 빨리 갑시다.“

그가 그녀의 손을 잡고 조심스레 이끌었다. 잠을 이루지 못하는 환자들의 신음과 비명이 그들의 발소리를 덮어 주었다. 한없이 길기만 한 복도의 끝이 나왔다. 마침내 건물 출구가 나왔다. 

“정원에 경비들이 있지만, 피해서 빠져나갈 거예요…” 

도웰이 로랑을 정원 깊숙한 곳으로 안내하면서 빠른 말로 속삭였다. 

“하지만 개들이…”

“식사 때 남긴 빵과 고기를 계속 먹이면서 개들하고 친해졌어요. 난 여기 온 지 벌써 며칠 되지만, 의심을 사지 않으려고 당신과 접촉을 피했지요.”


정원은 먹물을 뿌린 것처럼 캄캄했다. 그러나 석조 담장을 따라 감옥 주변처럼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세워진 가로등 몇 개가 불빛을 뿜었다. 

“저기 수풀이 있어요... 거기로 갑시다.”

갑자기 도웰이 풀밭에 엎드리면서 로랑의 손을 잡아당겼다. 그녀가 따라서 엎드렸다. 경비원 하나가 탈주자들 곁을 스쳐 지나갔다. 경비원이 사라지자 그들이 담장에 들러붙었다.

어디선가 송아지만한 개 한 마리가 튀어나와 그들에게 뛰어오더니 도웰을 보고 꼬리를 흔들었다. 그가 빵 조각을 던졌다.

“봐요.” 아르투아가 속삭였다. “가장 중요한 일을 조치해 놓았잖아요. 이제 저 담장을 넘기만 하면 됩니다. 내가 도와줄게요.“

“당신은 어떻게 하고요?” 

로랑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도웰이 딱 잘라 말했다.  

“염려 놓으세요. 뒤따라 갈 테니.” 

“담장을 넘은 뒤에는 어떡하지요?” 

“내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다 준비돼 있어요. 자, 체조를 한다고 생각해요.”


도웰이 담장에 붙어서 두 손으로 받쳐 로랑이 꼭대기로 기어오르도록 도왔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경비원 하나가 그녀를 발견하고는 경보를 울렸다. 순식간에 온 정원에 불이 켜졌다. 경비원들과 개들이 서로 부르면서 탈주자들 쪽으로 쏜살같이 달려왔다. 

“뛰어내려요!” 

도웰이 재촉했고, 로랑이 놀라서 외쳤다. 

“당신은?”  

“어서 뛰어내려요!” 

그가 소리를 지르자 로랑이 어쩔 수 없이 뛰어내렸다. 

누군가의 손이 그녀를 받아 안았다.


아르투아 도웰이 껑충 뛰어 손으로 담장 꼭대기를 움켜쥐고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남자 간호사 둘이 그의 발을 붙잡았다. 도웰은 그들을 한 손으로 끌어올릴 정도로 힘이 셌다. 하지만 다른 손이 미끄러지면서 바닥으로 떨어져 간호사들 위로 나뒹굴고 말았다. 


간호사들 추적을 피해 정신병원 담장을 아르투아 도웰


담장 너머에서 시동 걸린 자동차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 

“얼른 떠나게들. 전 속력으로 달려!” 

그가 간호사들과 몸싸움을 벌이면서 소리쳤다. 

자동차가 응답하여 부르릉거리면서 달리는 소리가 들렸다.

“놓아요. 내 발로 가겠소.” 

도웰이 저항을 멈추고 말했다. 

하지만 간호사들은 그를 풀어주지 않았다. 그의 팔을 단단히 움켜쥔 채 병동으로 데려갔다. 현관에 라위노가 가운 차림으로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서 있었다.

그가 간호사들에게 명령했다. 

“독방으로 데려가라. 구속복(Strait jacket)을 입히고!” 


도웰을 창문이 없는 작은 방으로 데려갔다. 사방 벽과 바닥이 매트리스로 덮였다. 환자들이 발작을 일으키면 여기다 집어넣었다. 간호사들이 도웰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들 뒤로 라위노가 독방에 들어섰다. 더 이상 담배는 피우지 않았다. 두 손을 가운 주머니에 찌른 채, 도웰 위로 허리를 굽혀 둥그런 눈으로 쏘아보기 시작했다. 도웰이 그 눈길을 마주보았다. 라위노가 고개를 까닥이자 간호사들이 나갔다. 

도웰에게 입을 열었다.

“당신의 미치광이 시늉은 쓸 만했어, 하지만 나를 속이기는 어렵지. 당신이 여기 온 첫날 난 알아봤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당신의 의도를 짐작하지는 못했어. 당신과 로랑은 이 장난질의 대가를 톡톡히 치를 걸세.”

“당신보다 더 비싸게 치르지는 않을 거요.” 

도웰이 대꾸했다. 라위노가 바퀴벌레 같은 수염을 꿈틀거렸다. 


“위협인가?”

“위협이야.” 

도웰이 간결하게 내뱉었다. 

“나에게 맞서기는 힘들 걸. 당신 같은 애송이들은 상대가 안 돼. 당국에 고발한다고? 소용없네, 친구. 게다가 당국이 급습하기 전에 당신은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 있어. 한데 진짜 이름이 뭔가? 뒤바리는 가명일 테고.”

“아르투아 도웰, 도웰 교수의 아들이오.”

라위노가 놀라는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알게 되어 큰 영광이오.” 그가 당혹감을 감추려고 조롱하는 말투를 취했다. “난 당신의 존경받는 부친과 아는 사이였네.”

“내 손이 묶여 있는 걸 신에게 감사하시오.” 도웰이 쏘아붙였다.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혼 좀 났을 거요. 그리고 내 부친 함자를 함부로 입에 올리지 마시오... 쓰레기 같으니!”

“당신이 아직도 한참이나 단단히 묶여 있을 테니, 신에게 크게 감사해야겠군, 나의 귀한 손님이여!”

라위노가 팩 돌아서서 나갔다. 자물쇠가 덜컥 소리를 냈다. 도웰이 혼자 남았다.

그는 별로 염려하지 않았다. 친구들이 그냥 놓아두지 않고 이 감옥에서 빼낼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자신이 위험한 처지에 빠졌다는 것은 알았다. 

라위노는 도웰과의 싸움 결과에 자신의 사업이 전적으로 좌우될 수 있다는 점을 잘 알아야 했다. 라위노가 대화를 끊고 방에서 훌쩍 나간 데는 이유가 있었다. 심리 파악에 능한 그는 상대가 누구인지 금방 헤아렸고, 종교재판관 식의 재능을 적용하려 들지도 않았다. 아르투아 도웰과는 심리전이나 말이 아니라 단호한 행동으로만 싸워야 했던 것이다.




22. 생사의 기로에서


아르투아가 자신을 묶고 있는 줄의 매듭을 느슨하게 했다. 구속복으로 그를 꽁꽁 덮어씌울 때 일부러 근육을 긴장시켜 부풀렸기 때문에 그게 가능했다. 구속복에서 조금씩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감시를 받고 있었다. 손을 빼려고 하는 순간 자물쇠가 철컥 울리더니 문이 열리고 우악스럽게 생긴 간호사 둘이 들어와서 그를 다시 꽁꽁 묶었다. 이번에는 구속복 위에다 또 가죽 끈으로 칭칭 동였다. 간호사들은 얌전히 굴지 않고 또 밧줄을 풀려고 했다가는 두들겨 맞을 것이라고 을러댔다. 도웰이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들이 나갔다. 


독방에는 창문이 없고 천장에 달린 전깃불이 비추고 있었기 때문에 도웰은 아침이 됐는지 몰랐다. 시간이 더디게 흘렀다. 라위노는 아직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나타나지도 않았다. 목이 말랐다. 곧 심한 공복감을 느꼈다. 그러나 아무도 들어오지 않고 먹을 것과 마실 것도 주지 않았다.

‘굶겨 죽일 작정인가?’ 

배가 몹시 고팠지만 먹을 것을 청하지 않았다. 만일 라위노가 굶겨 죽이기로 했다면, 부탁해봤자 초라한 꼴만 될 터였다.

라위노가 그의 의지력을 시험하는 줄을 도웰은 몰랐다. 그리고 라위노에겐 불만스럽게도 도웰은 이 시험을 이겨냈다


배고픔과 갈증이 심함에도 불구하고 오랜 시간 잠을 못 잔 그가 자기도 모르는 새에 잠이 들었다. 태평하게 쿨쿨 단잠을 잤다. 그것이 라위노에게 새로운 불쾌감을 준다는 것도 전혀 모른 채. 눈부신 램프 불빛도, 라위노의 음악 고문도 도웰에게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그러자 라위노는 의지력이 굳은 기질들에게 쓰는 더 강력한 수단을 동원했다. 

옆방에서 간호사들이 나무 마치로 철판을 두드리고 특별히 제작한 딸랑이를 흔들어 날카로운 소리를 요란하게 내기 시작했다. 그 끔찍한 굉음이 울리면 아무리 단단한 사람도 대개는 잠을 깨고 두려움에 떨면서 주변을 두리번거리곤 했다. 그러나 도웰은 정말 강한 사람인 모양이었다. 여전히 어린애처럼 자고 있었다. 이 흔치 않은 케이스에 라위노마저 혀를 내둘렀다. 


‘경악할 일이군. 저자는 자기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다는 것을 모른단 말인가. 천사들의 나팔소리에도 깨지 않을 거야.’

“됐어, 그만해라!”

그가 간호사들에게 고함을 지르자 지옥의 굉음이 멈췄다. 


그런데 사실 그 끔찍한 굉음 때문에 도웰이 잠에서 깼다는 것을 라위노는 몰랐다. 그러나 강한 의지의 소유자인 도웰은 의식이 퍼뜩 돌아온 순간 자신을 잘 통제하여 한숨 하나 내쉬지 않고 뒤척이지도 않음으로써 자기가 잠에서 깼다는 티를 전혀 내지 않았다.

‘도웰은 물리적으로만 주무를 수 있다.’

그게 라위노가 내린 선고였다. 


한데 도웰은 굉음이 멈추자 다시 진짜 잠이 들어서 저녁까지 내쳐 잤다. 그렇게 한잠을 자고 일어나니 심신이 상쾌하고 기운이 돋았다. 배고픔도 이전보다는 덜 힘들게 느껴졌다. 눈을 뜬 채 누워서 미소를 머금고 문에 난 감시 구멍을 쳐다봤다. 누군가의 둥그런 눈이 안쪽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 있었다. 

적을 자극하려고 아르투아가 일부러 명랑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건 라위노도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그는 자기가 꺾을 수 없는 의지도 있다는 것을 살면서 처음 실감했다. 꽁꽁 묶인 채 고립무원 상태로 바닥에 팽개쳐진 자가 그를 조롱하고 있는 것이다. 방안을 주시하던 눈동자가 사라졌다


눈동자가 사라진 뒤에도 도웰이 계속 노래를 더 크게 불렀다. 그러다가 갑자기 목이 콱 막혔다. 뭔가가 목구멍을 심하게 자극했다. 코를 빼고 킁킁 냄새를 맡았다. 목구멍과 콧구멍이 간질거리고 금방 눈에서 바늘로 찔리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냄새가 더 심해졌다. 

아르투아 도웰의 온몸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죽을 때가 됐음을 깨달았다. 라위노가 화학전을 감행한 것이다. 염소 기체가 방안에 낮게 깔렸다. 도웰은 자신을 옭아매고 있는 가죽 끈과 구속복에서 벗어날 힘이 없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지금은 자기보존 본능이 이성의 논거보다 더 강했다. 믿기 어려운 힘을 동원하여 올가미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질했다. 벌레처럼 온몸을 잔뜩 웅크렸다가 펴고 뱅뱅 돌고 벽에서 벽으로 대굴대굴 굴렀다. 그러나 비명을 지르지 않고 도와 달라고 기도도 않고 이를 윽다문 채 침묵했다. 희미해진 의식은 이미 몸을 통제하지 못했고, 본능 하나가 몸을 보호했다. 

그러는 중에 불빛이 스러지고 도웰은 다시 어디론가 나락으로 떨어졌다. 


머릿결을 건드리는 신선한 바람이 그에게 희미하게나마 의식을 불어넣었다. 그가 비상한 의지력을 끌어 모아 눈을 뜨려고 애썼다. 한순간 어떤 아는 얼굴이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아르망인가...’ 

그러나 경찰 제복을 입고 있었다. 자동차 엔진 소리가 들렸다. 머리가 통증으로 빠개지는 것 같았다. 

‘잠꼬대를 하는 거야, 하지만 아직 살아있다는 뜻이군.’ 

그의 눈꺼풀이 닫혔다가 곧 다시 열렸다. 한낮 햇살에 눈이 몹시 부셨다. 아르투아가 실눈을 떴다. 그때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기분이 어때요?”

아르투아 도웰의 따갑고 화끈거리는 눈꺼풀 위에 물을 적신 솜뭉치가 얹혔다. 눈을 좀 더 크게 뜨고서야 아르투아가 자기를 내려다보고 있는 로랑을 알아보았다. 그가 그녀에게 미소를 짓고 주변으로 눈길을 돌렸다. 한때 브리케가 누워 있던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러니까, 난 아직 안 죽었나요?” 

도웰이 희미한 소리로 물었다. 로랑이 대답했다. 

“다행히 죽지 않았어요. 그러나 죽음 직전까지 갔었지요.” 


옆방에서 급히 움직이는 발소리가 들리더니 곧 아르망이 나타났다. 그가 손을 흔들면서 외쳤다. 

“대화하는 소리를 들었네! 그러니까, 살아났다는 거지? 이보게, 친구! 어떤가?”

“고맙네.” 

도웰이 대답하다가 가슴의 통증을 느끼고 덧붙였다. 

“머리가 아파... 가슴도…”

아르망이 주의를 주었다. 

“말수를 줄이게. 자네한테 해로워. 그 악당 라위노가 자네를 선창(船倉)에 갇힌 쥐처럼 가스로 독살하려고 했지 뭔가. 하지만 우리가 그자의 악행을 참으로 멋지게 막아냈지, 아르투아.”

그러면서 아르망이 의기양양하여 웃음을 터뜨리려 하자 로랑이 나무라는 눈길로 그를 쳐다봤다. 그의 너무 요란한 기쁨이 병자의 평정을 깰까 우려한 것이다. 


“안 그럴게요, 안 그러겠어.” 

그녀의 눈총을 받고서 아르망이 웃음기를 거두었다. 

“이제 자초지종을 들려주겠네. 마드무아젤 로랑을 받아 안고서 기다리다가 자네가 뒤따라 나올 수 없다고 판단했어…”

“자네들... 내가 외치는 소릴 들었나?” 

아르투아가 물었다. 

“들었네. 자넨 입을 다물고 있게! 우리는 라위노가 추격대를 보내기 전에 서둘러 차를 몰았지. 자네하고 격투를 벌이는 통에 그의 개떼가 늦게 출발했어. 그 점에서 자네는 우리가 감쪽같이 사라지는 데 큰 도움을 준 거야. 자네가 거기서 무사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우린 훤히 알고 있었지. 이제 공공연한 싸움이 된 거야. 우린, 그러니까 나하고 샤우브는 최대한 빨리 자네를 도우러 가려고 했네. 하지만 먼저 마드무아젤 로랑을 안전하게 모시고 나서 자네를 구하는 계획을 짜고 행동에 돌입해야 했던 걸세. 자네가 포로로 잡히리라고는 우리가 전혀 예상치 못했으니까… 

우리는 어떻게 하든 석조 담장 안으로 침입해야 했지, 근데 자네도 알다시피 그건 간단한 일이 아니야. 그래서 우린 이렇게 움직이기로 했네. 즉, 나하고 샤우브가 경찰 제복을 입고 자동차를 타고 가서 위생검열 나왔다고 밝힌 거야. 샤우브가 갖가지 관인이 찍힌 명령서까지 작성했어. 다행히 정문에는 늘 지키는 경비가 아니라 간호사 하나가 서 있었는데, 그자는 누구든 안으로 들여놓으려면 사전에 전화를 걸어 알려야 한다고 라위노가 내린 지시를 몰랐던 모양이야. 우리가 유리한 위치를 점한 거야, 그리고…”


“그러니까 그건 잠꼬대가 아니었군…” 아르투아가 말을 가로챘다. “경찰 제복 차림의 자네를 보고 자동차 소리를 들었던 것이 기억나.”

“그래, 그렇지, 자동차에서 신선한 공기를 쐬게 하자 자네가 정신이 든 거야. 하지만 금방 다시 의식을 잃었어. 자, 계속 더 들어보게. 간호사가 문을 열어서 우리가 들어갔네. 나머지 일은 우리 짐작보다는 쉽지 않았지만 그리 어렵지도 않았어. 라위노의 집무실로 우리를 안내하라고 요구했지. 근데 우리의 요구를 받은 두 번째 간호사는 경험이 많은 녀석임이 틀림없네. 그자는 우리를 수상하게 여기고 보고하겠다면서 건물로 들어갔어. 몇 분 뒤 매부리코에 대모테 안경을 걸친 자가 흰 가운을 입고 나오더군…”

“라위노의 조수, 의사 부시야.”

아르망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을 이었다. 

“그는 라위노 의사가 바쁘니 대신 자기가 우리와 얘기 나눌 수 있다고 하더군. 반드시 라위노를 봐야 한다고 내가 고집 부렸지. 부시는 라위노가 중환자를 보고 있기 때문에 지금은 불가능하다고 못을 박는 거야. 그러자 샤우브가 더 길게 생각도 않고 부시의 손을 이렇게 붙잡고...” 

아르망이 자신의 오른손으로 자신의 왼쪽 손목을 쥐었다. 

“이렇게 비틀었네. 비명을 지르는 부시를 남겨두고 우리는 병동으로 들어섰어. 근데, 젠장, 라위노가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있나, 그래서 전전긍긍하던 차에 운 좋게도 그자가 복도 저편에서 걸어오는 거야. 자네를 정신병자라 하고 입원시킬 때 본 적이 있어서 그자임을 금방 알았지. ‘무슨 일입니까?’ 그가 날카롭게 묻더군. 우리는 더 이상 연극할 필요가 없다고 결정하고 라위노에게 다가가서 리볼버를 꺼내 이마에 겨눴어. 그러나 뒤따라온 부시가 그 순간 샤우브의 손목을 내리친 거야. 그 비실비실한 주먹코 늙은이한데서 그런 민첩함이 나오리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나! 그것도 강하게 일격을 가하는 바람에 샤우브가 리볼버를 떨어뜨렸어. 그 틈에 라위노는 내 손을 움켜쥐었지. 그리고 한바탕 소동이 시작됐는데, 그걸 조리 있게 얘기하기도 쉽지는 않을 거야. 


라위노와 부시를 도우러 어느 새 간호사들이 사방에서 몰려들더군. 그자들 수효가 제법 많아서 우리를 간단히 제압할 수도 있었어. 그러나 다행히도 경찰 제복에 많은 자들이 머뭇거리더군. 경찰에 대항하면, 그것도 권력의 대표자에게 물리력을 동원하면 중벌을 받는다는 걸 그자들도 알고 있었던 거야. 라위노가 ‘저자들 제복은 가짜야!’ 하고 아무리 소리쳐도 대다수 간호사들은 그저 지켜보는 입장을 택했고 몇 놈만이 신성불가침의 경찰 제복에 손을 대려고 들었지. 그자들한테는 없는 피스톨이 우리의 두 번째 에이스였네. 아, 우리의 완력과 민첩함, 필사적인 자세도 그에 못지않은 에이스였을 거야. 그래서 양측의 전력이 비슷해진 거지. 


샤우브가 의사 라위노며 부시와 격투를 벌이다.


떨어뜨린 리볼버를 주우려고 샤우브가 허리를 굽히자 간호사 한 놈이 그 위로 올라탔지. 알고 보니 샤우브는 종합 격투기의 대가더군. 등 뒤로 덮친 놈을 떼어낸 뒤 낯짝에 정타를 몇 방 날렸어. 그러면서도 어떤 녀석이 주우려고 손 뻗는 걸 보고 떨어져 있는 리볼버를 발로 가볍게 밀어내기까지 했어. 공정하게 말해서, 샤우브는 아주 냉정하고 침착하게 싸웠네. 

나한테도 간호사 두 녀석이 매달렸어. 샤우브가 없었다면 그 싸움이 어떻게 끝났을지 몰라. 그가 정말 잘 대처했네. 리볼버를 어렵사리 주워 들더니 더 이상 망설이지도 않고 발사했다네. 몇 발에 간호사들의 열기가 팍 수그러들었어. 개중 한 놈이 피 흐르는 어깨를 부여잡으면서 비명을 내지른 뒤로 다른 자들은 삽시간에 자취를 감추고 말았네. 

하지만 라위노는 쉽게 굴하지 않더군. 우리가 양쪽에서 관자놀이에 리볼버를 들이대는데도 그자는 오히려 호통을 치는 거야. ‘나한테도 무기가 있어. 당장 여기서 나가지 않으면 당신들을 쏘라고 지시하겠소!’ 


그러자 샤우브가 영양가 없는 말들은 걷어치우고 라위노의 손목을 비틀기 시작했네. 그 기술을 걸면 고통이 얼마나 심한지, 덩치 큰 깡패들도 하마처럼 울부짖으며 온순하고 고분고분해질 정도야. 라위노의 손목에서 뼈 어긋나는 소리가 들리고 눈에는 눈물이 고이더군. 

그런데도 그자는 여전히 버티지 뭔가. 멀리 떨어져 있는 간호사들에게 계속 소리치는 거야. ‘너희들, 보기만 하고 있냐? 무기를 가져와라!’ 몇 놈이 달려가더군, 무기를 가지러 가는 거겠지. 그리고 다른 몇 놈은 우리한테 슬금슬금 다가들었어. 내가 라위노의 머리통에 대고 있던 리볼버로 그자들을 향해 몇 발 날렸지. 놈들이 다시 기겁하고, 한 놈은 비명을 내지르면서 바닥에 쓰러졌어...”

아르망이 숨을 돌렸다. 


“그래, 정말 화끈했어. 라위노가 견딜 수 없는 고통 때문에 점점 힘이 빠지는데, 샤우브는 손목을 더 세게 비틀었지. 라위노가 안간힘을 다해 봐야 별 수 있나, 결국 아파서 몸을 배배 꼬며 잠긴 목소리로 울부짖더군. ‘원하는 게 뭐요?’ 그래서 내가 그랬지. ‘아르투아 도웰을 당장 내놓아라.’ 그러자 그자는 이를 갈면서 그러더군. ‘난 당연히 당신 얼굴을 알아보았어. 손목 좀 놓아줘, 빌어먹을! 그가 있는 데로 안내할 테니...‘ 


샤우브가 라위노의 손목을 비틀고 아르투아의 행방을 묻다.


샤우브가 벌써 의식을 잃어가는 그자의 손목을 정신이 돌아오게끔 조금씩 풀어 주었어. 라위노가 우리를 자네가 갇혀 있던 독방으로 안내해서 눈짓으로 열쇠를 가리켰지. 내가 문을 열고 라위노와 샤우브와 함께 들어섰어. 참으로 즐겁지 못한 장면이 눈에 들어오는 거야. 포대기에 싸인 갓난애처럼 구속복에 덮인 자네가 마지막 경련을 일으키면서 꿈틀거리는데, 아아, 절반쯤 발에 밟힌 벌레와 다를 바가 없었네. 방안에는 염소 가스가 자욱해서 가슴이 오그라들고 목구멍이 죄어들었다네. 물론 냄새도 지독했지. 

샤우브가 더 이상 상대하지 않으려고 턱 밑으로 가벼운 펀치를 날리자 의사는 썩은 가마니처럼 바닥에 푹 고꾸라지더군. 우리도 숨 쉬기가 어려워 헐떡거리면서 자네를 빼낸 뒤 문을 쾅 닫았네.”


“라위노는? 그가…”

“헐떡이기는 해도 질식해서 죽지는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지. 하지만 우리가 떠난 뒤에 일꾼들이 그자를 빼냈을 거야… 그 지옥에서 우리가 그래도 무사히 빠져나온 셈이야, 남은 총알을 개들한테 쏠 수밖에 없었던 일만 제외하면… 그리고 자네가 여기 있게 된 거네.”

“내가 의식을 잃은 지 오래 됐나?”

“열 시간. 의사는 자네 맥박과 호흡이 돌아온 뒤 조금 전에 돌아갔는데, 위험한 고비는 넘겼다고 하더군. 이제, 이보게...” 

아르망이 손바닥을 문지르면서 말을 이었다. 

“세상을 벌컥 뒤집어 놓을 만한 재판이 남아 있네. 라위노는 코른 교수와 함께 피고인석에 앉을 거야. 내가 반드시 그렇게 만들고야 말겠네.”

“하지만, 살았든 죽었든, 내 부친의 머리를 먼저 찾아야 해.”

아르투아가 나직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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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웰 교수의 머리 2장

도웰 교수의 머리 1장

도웰 교수의 머리 (소개)



러시아 공상과학(SF)소설의 효시 

  도웰 교수의 머리  


벨랴예프 지음

김성호 옮김


브리케의 머리를 코른 교수가 들여다보다.




19. ‘다루기 힘든 케이스’ 


의사 라위노에게 마리 로랑은 ‘다루기 힘든 케이스’였다. 사실 코른 곁에서 일하는 동안 그녀의 신경계가 상당히 쇠약해졌다. 그럼에도 의지가 흔들리지는 않았다. 이제 그 작업을 라위노가 맡았다. 

그가 로랑의 ‘심리 주무르기’에 본격적으로 착수하는 대신, 일단은 멀리서 주의 깊게 관찰만 했다. 그녀를 일찌감치 무덤으로 보낼 것인지, 아니면 정신 나가게 할 것인지, 코른 교수가 아직 확실한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 여러 모로 보아 라위노의 정신 ‘병원’ 체제에는 후자가 더 적당했다.


로랑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자신의 운명이 최종 확정될 수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죽음 아니면 미친증. 여기서는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그녀에게도 다른 길이 없었다. 그녀는 최소한 미친증과 싸우기 위해 정신력을 다 모았다. 아주 온순하고 순종적이며 겉으로는 평온하게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사람의 심리를 꿰뚫는 재능이 뛰어나고 환자 경험이 많은 라위노를 그걸로 속이기는 어려웠다. 로랑이 온순하게 굴자 라위노는 오히려 더 경계하고 의심했다. 


‘힘든 케이스야.’ 

아침 회진 시간에 로랑을 문진하면서 라위노가 그런 생각을 지우지 못했다. 

“기분이 어때요?” 하고 묻자, 로랑이 “좋아요, 고맙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우리는 환자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지요. 그런데도 상황이 낯설고 상대적으로 자유가 제한되기 때문에 어떤 환자들은 억압된 상태를 느낍니다. 고독감과 우울증에 시달리는 겁니다.”

“고독에는 익숙해졌어요.”

‘속내를 간파하기가 쉽지 않겠어.’ 라위노가 생각하면서 말을 이었다. 

“당신은 본질적으로 다 정상입니다. 신경쇠약 증상만 약하게 보일 뿐이에요. 코른 교수의 말로는, 정상적인 사람에게 몹시 힘겨운 인상을 초래하는 실험에 당신이 참여했다더군요. 당신은 아주 젊어요. 과로와 약간의 노이로제 증상이 있고… 그래서 당신을 아주 소중히 여기는 코른 교수가 여기서 휴식을 취하도록 조치한 거지요…”

“코른 교수에게 고마울 따름입니다.”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기질이야.’ 라위노가 괘씸하게 여겼다. ‘이 젊은 여자를 다른 환자들과 함께 지내도록 해야겠어. 그러면 꿍꿍이속을 더 드러낼지도 모르고, 성격을 더 빨리 알아낼 수 있을 거야.’

그런 계산에서 라위노가 은근하게 제의했다. 

“당신은 너무 오래 앉아 있었습니다. 정원으로 왜 나다니지 않지요? 여기 정원은 아주 좋아요, 정원이라기보다 수십 헥타르에 달하는 공원이라 할 만하지요.”

“산보를 나가지 못하게 하더군요.”

“그래요?” 라위노가 놀란 빛을 띠며 목소리를 높였다. ”내 조수가 실수했군요. 산보가 해로운 환자들도 있지만, 당신은 그런 편이 아닙니다. 나다니세요. 우리 환자들과 알고 지내세요. 흥미로운 이들도 있답니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하지요.”


라위노가 나가자 로랑이 방에서 나와 검은 테가 둘리고 음울한 잿빛으로 칠이 된 기다란 복도를 따라 출구로 향했다. 여기저기 방마다 닫힌 문 안쪽에서 미친 듯이 으르렁대는 소리와 고함소리, 발작적인 웃음소리, 중얼거리는 소리 같은 게 들려왔다.

“오… 오… 오…” 왼쪽에서 들리는 소리에,

“우-우-우… 하-하-하-하.” 오른쪽에서 반응했다.     

‘동물원에 온 것 같아.’ 

로랑이 그 압박하는 상황에 굴하지 않고자 정신을 다잡으려 애썼다. 걸음을 다소 재촉하여 건물 밖으로 나왔다. 정원 깊숙한 곳으로 이어지는 오솔길이 평탄하게 펼쳐졌다. 그 길을 따라 걸었다.


라위노 의사의 ‘시스템’은 여기서도 감지됐다. 주변 모든 것이 음울한 빛을 띠고 있었다. 나무들이라고는 암녹색을 띤 침엽수 일색이고, 등받이가 없는 목제 장의자들은 암회색으로 칠이 됐다. 무엇보다도 꽃밭들을 보고 로랑이 특히 놀랐다. 화단들은 마치 무덤처럼 조성됐는데, 거의 검은색에 가까운 암청색의 오랑캐꽃들이 주종을 이루면서 장례식장의 흰 리본처럼 바깥을 두르고 있었다. 거무튀튀한 측백나무들이 그림을 보충했다.

‘그야말로 공동묘지와 다를 바 없네. 여기 있으면 죽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겠어. 하지만 나를 어쩌지는 못할 거야, 미스터 라위노. 난 당신의 비밀들을 짐작했고 당신의 ’효과‘는 당장 나를 덮치지 못할 거야.’ 

로랑이 그렇게 자신을 추스르고는 ‘무덤 같은 화단들’을 빠르게 지나쳐서 소나무 오솔길로 들어섰다. 사원 기둥 같이 키 큰 나무들이 위로 쭉쭉 뻗어서 암녹색 둥근 지붕들을 덮었다. 소나무들의 우듬지가 고르고 일관된 마른 소리를 냈다.

정원 곳곳에서 잿빛 가운 차림의 환자들이 눈에 띄었다. 

정신병원에 감금된 로랑이 정원을 산책하다.


‘저들 중 누가 미친 사람이고 누가 정상인일까?’ 

그건 그들을 그리 오래 관찰하지 않아도 틀림없이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직 희망을 잃지 않은 이들은 ‘신참’인 로랑을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정신병자들은 희미해진 의식으로 자신에게 몰입했고, 자기네 눈에 들어오지 않는 바깥세상과 단절돼 있었다


길고 허연 턱수염을 달고 키가 크고 마른 노인이 로랑에게 다가왔다. 노인은 무성한 눈썹을 치켜세우며 로랑을 보고는 혼잣말을 계속하는 것처럼 입을 열었다. 

“십일 년까지는 셌지만, 그 다음에는 잊어버렸어. 여기에는 달력이 없고 시간은 정지됐어. 이 오솔길을 얼마나 많이 어슬렁거렸는지 몰라. 이십 년인가, 아니 천년일 수도 있어. 신의 얼굴 앞에서는 하루가 천년 같아. 시간을 종잡기 힘들어. 아가씨, 당신도 여기서 천년 동안 저기 돌담까지 갔다가 다시 천년 동안 되돌아오게 될 거야. 여기서 나갈 수는 없어. 여기로 들어오는 이들이여, 희망은 다 내던지라! 단테가 그러지 않았나, 허허허! (*<신곡>의 ‘지옥’ 편 3연에서). 그런 생각을 안 했다고? 당신은 내가 미쳤다고 생각하오? 난 교활한 사람이야. 여기서는 광인들만 살 권리가 있어. 당신도 나처럼 여기서 나가지 못할 거야. 당신과 나는…” 


환자들의 대화를 엿듣는 것이 업무인 남자 간호사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노인이 말투를 바꾸지 않으면서 능글맞게 눈을 끔뻑였다. 

“나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야, 나의 백일천하는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 무슨 말인지 알겠나?” 

간호사가 멀어지자 그가 던지는 말을 들으면서 로랑이 생각했다.

‘가엾은 사람. 과연 사형선고를 피하려고 미치광이 행세를 하는 걸까? 목숨을 구하려고 위장해야 하는 사람이 나 하나만이 아니구나.’


또 다른 환자가 로랑에게 다가왔다. 검은 염소수염을 단 젊은이가 장방형 원에서 평방근을 도출하는 법에 대해 황당무계한 소리를 지껄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간호사가 로랑 쪽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병원 측에서 이 젊은이는 심하게 감시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가 로랑에게 바짝 다가서더니 침을 튀기면서 더 빠르고 집요하게 입을 놀렸다.

“원이란 무한이야. 원과 같은 면적의 정방형이란 무한대의 면적이지. 잘 들어요. 원의 정방형에서 평방근을 도출하는 것은 무한대에서 평방근을 도출한다는 뜻이야. 이건 N승을 곱한 무한대의 일부가 될 거야, 그런 식으로 정방형도 결정할 수 있을 것… 근데 당신은 내 말을 안 듣고 있군요.” 

갑자기 젊은이가 화를 내면서 로랑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그녀가 손을 빼낸 뒤 자기 방이 있는 병동 쪽으로 뛰다시피 하며 서둘렀다. 현관 가까이 이르러서 라위노 의사와 마주쳤다. 그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로랑이 자기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잠그고 싶었지만 안쪽에는 잠금장치가 없었다. 응대하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문이 열리고 문턱에 라위노 의사가 나타났다.

그의 머리는 여느 때처럼 약간 뒤로 젖혀졌다. 다소 커지고 둥글고 날카로운 퉁방울눈이 안경 너머로 방안을 살폈다. 검은 콧수염과 아래턱에 난 작은 삼각형 수염이 입술과 함께 꿈틀거렸다.

“실례하오, 허락도 없이 들어와서. 의사라는 직분으로는 그럴 수도 있다오…”


의사 라위노는 로랑의 ‘도덕적 가치의 파괴’를 시작할 좋은 순간이 됐다고 판단했다. 그의 무기고에는 아주 여러 가지 작용 수단들이 있었다. 사람 좋아 보이게 하는 진정성과 정중함, 매혹적인 친절함에서부터 거칠음과 냉소적인 솔직함에 이르기까지. 그는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로랑의 평정을 깨기로 작정하고, 그래서 돌연 무례하고 비웃는 말투를 취했다.

“왜 당신은 ‘들어오세요. 난 당신을 부르지 않았어요. 생각에 골똘해서 노크를 못 들었어요.’ 하는 말을 하지 않는 거요? 아니면 그 비슷한 말이라도?”

“아니요, 노크 소리는 들었어요. 그러나 혼자 있고 싶어서 대답하지 않았지요.”

“늘 그렇듯이, 역시 솔직하군요!”

그가 비아냥거리듯이 말했다. 거기에 기분이 상해서 로랑이 한마디 걸쳤다.

“솔직함이란 빈정거리기에 좋은 대상이 아닙니다.” 

‘예상대로 걸려들고 있어.’ 

라위노의 기분이 좋아졌다. 그가 로랑의 맞은편에 무례하게 걸터앉아서 툭 튀어나온 눈알을 미동도 않은 채 뚫어져라 쏘아보았다. 로랑이 그 눈길을 참으려고 했지만 결국 불쾌해졌다. 스스로에게 화가 나서 얼굴을 붉히며 눈을 내리깔고 말았다.

라위노가 여전히 빈정거리는 투로 입을 놀렸다.

“당신은 솔직함이 빈정거리기에 좋은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하는군요. 한데 난 그게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하오. 만일 당신이 정말 자기감정에 충실한 사람이라면, 나를 여기서 내쫓았을 것이오. 왜냐면 나를 미워하니까. 그렇기는 해도 손님을 환대하는 여주인의 친절한 미소를 간직하도록 해 봐요.”

로랑이 퉁명스레 대꾸했다.

“이건… 그저 예의범절일 뿐이에요, 어려서부터 교육받은.”  

“예의범절이 아니라면, 나를 내쫓을 건가요?” 

그러면서 라위노가 난데없이 뾰족한 소리로 깔깔대며 웃음을 터뜨렸다. 


“훌륭해요! 아주 좋아! 예의범절이 솔직함과 일치하지 않는군. 그러니까, 예의범절 때문에 솔직하게 행동할 수 없는 거지요. 이게 첫 번째이고.” 

그가 손가락을 꼽았다. 

“오늘 기분이 어떠냐고 묻자 당신은 ‘아주 좋다’고 대답했지요. 비록 당신의 눈빛에서 나는 당신이 목을 매달 수도 있을 것으로 보았지만. 즉, 그때 당신은 거짓말을 한 거요. 그것도 예의범절에서 나온 건가요?”

로랑이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랐다. 또 거짓말을 하든지, 아니면 감정을 감추고자 한 것이라고 고백해야 했다. 그래서 입을 꾹 다물었다.

라위노가 계속 지껄였다. 

“내가 도와드리지요, 마드무아젤 로랑. 그건, 이렇게 표현해도 된다면, 자기방어를 위한 가장이었어요. 그래요, 안 그래요?” 

“그래요.” 

로랑이 도전적으로 대꾸했다. 

“아하, 당신은 예의를 차리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있소. 이게 첫 번째고, 두 번째로 당신은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있소. 이 대화를 계속한다면 내 손가락이 모자랄까 겁이 나오. 당신은 또 연민 때문에도 거짓말을 했지요. 모친에게 위로의 편지를 쓰지 않았던가요?”


로랑이 깜짝 놀랐다. 라위노가 어떻게 그런 것까지 알고 있단 말인가? 그렇다, 그는 실제로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이것도 그의 시스템의 일환이었다. 그는 정신병자라고 몰아붙이며 환자들을 맡기는 고객들한테 입원 사유며 환자에 관한 정보를 낱낱이 요구하곤 했다. 고객들은 그것이 자기네 이익을 위해서도 불가피함을 인식하고 가장 무서운 비밀들조차 라위노에게 감추지 않았다.


의사 라위노가 로랑의 방으로 와서 심리를 압박한다.


“당신은 훼손된 정의라는 이름으로, 또 죄를 벌하려는 요량으로 코른 교수에게 거짓말을 했소. 당신은 진실을 위해 거짓말을 했어요. 이거야말로 씁쓸한 패러독스가 아니겠소! 일일이 열거하자면, 당신의 진실은 늘 거짓으로 충전돼 온 셈이오.”

라위노가 과녁을 제대로 겨냥했다. 로랑이 잔뜩 축기가 들었다. 자기 인생에서 거짓말이 그렇게 큰 비중을 차지했는지, 아직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정의로운 당신이 이제 짬을 내어 생각해 보시오, 얼마나 죄를 많이 범했는지를. 솔직함으로써 당신이 얻은 것은 무엇이오? 내가 말해 드리지. 바로 이런 감금 상태에 떨어졌을 뿐이오. 그 어떤 힘도, 지상의 힘도 하늘의 힘도, 당신을 여기서 빼내지 못할 거요. 그렇다면 거짓말은? 만약 코른 교수를 악마의 자식이요 거짓의 대가라고 간주한다 해도, 그는 여전히 아주 멀쩡히 존재하고 있는 게 아니오?”

라위노가 로랑에게 눈길을 꽂은 채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처음이니까 이 정도만 해 두자. 일단 장전은 잘 됐어.’ 

스스로 흡족하게 여기면서 작별 인사도 없이 나갔다. 

로랑은 그가 나가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앉은 자리에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그날 저녁 이후 라위노는 예수회 식으로 계속 대화하기 위해 저녁마다 그녀에게 나타났다. 로랑의 도덕적 기반과 더불어 심리를 뒤흔들어 놓기는 라위노가 전문가라고 자부하는 일이었다. 

로랑이 정말로 뼛속까지 고통스러워했다. 나흘째 되는 날 더 이상 참지 못하여 불같은 얼굴로 일어나서 소리쳤다. 

“나가요! 당신은 사람이 아니라 악마야!”

그 장면에 라위노가 진짜 만족감을 맛봤다.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으면서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당신은 좋아지는군요. 이전보다 더 솔직해졌어요.”

“나가라니까요!” 

로랑이 숨을 거칠게 몰아쉬면서 재촉했다. 

‘대단해. 안 나가면 주먹질까지 하겠는걸.’ 

의사가 기분 좋게 휘파람을 불면서 밖으로 나갔다. 


사실, 주먹질까지 할 정도로 로랑의 정신이 극히 혼미해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정신 건강은 심각한 위협에 처했다. 혼자 남게 됐을 때 정신 자락을 쥐는 것도 그리 오래 가지 않을 것임을 인식하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한데 라위노는 결말을 앞당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저녁마다 흐느끼는 노랫소리가 로랑을 쫓아 다녔다. 그건 그녀가 모르는 악기에서 나오는 소리였다. 어디선가 첼로가 통곡하는 듯했다. 소리는 때때로 바이올린의 고음까지 올라갔다가 즉각 높이만이 아니라 음색까지 바뀌어서 마치 맑고 매혹적이지만 슬픔이 절절한 사람 목소리처럼 들리기까지 했다. 가슴을 후비어 파고드는 멜로디는 그렇게 순환하면서 끝도 없이 반복됐다. 

그 음악을 듣고 로랑이 처음에는 좋다고 생각하기까지 했다. 그뿐 아니라 음악이 어찌나 달콤하고 애잔한지, 의아하게 여기기 시작했었다. 어디선가 정말 연주를 하는 건가? 아니면 환청이 커지는 건가? 시간이 흐르고 흘러도 음악은 사람을 홀리는 듯이 똑같은 순환을 되풀이했다. 첼로가 바이올린으로 변하고, 바이올린이 통곡하는 목소리로 바뀌고… 하나의 음정이 반주 안에서 슬프게 울렸다. 한 시간이 지나서 로랑은 음악 소리 따위는 실제로 없으며 단지 자기 머릿속에서만 울리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 구슬픈 가락을 피할 수가 없었다. 귀를 틀어막았지만 음악 소리가 계속 들리는 것 같았다. 첼로, 바이올린, 목소리… 첼로, 바이올린, 목소리…


“저 소리 때문에 정말 미칠 수도 있겠어.” 

로랑이 중얼거렸다. 음악 소리를 막으려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고 혼자 크게 소리 내어 말도 해 보았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다. 그 음악 소리는 꿈에서도 쫓아다녔다. 

자리에 누웠지만 잠을 이루지 못한 채 눈을 뜨고 첼로와 바이올린, 사람 목소리... 첼로와 바이올린, 사람 목소리의 끝없는 반복을 들으면서 생각했다. 

‘사람들이 저렇게 쉴 새 없이 연주하고 노래할 수는 없어. 저건 분명히 기계에서 나오는 소리야… 사악한 힘이 사람을 미몽에 빠뜨리려고 드는 거야.’ 


동이 틀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어서 서둘러 정원으로 달려 나갔다. 그러나 멜로디는 이미 집요한 생각으로 바뀌었다. 로랑은 실제로 울리지 않는 음악 소리를 듣기 시작했다. 단지 정원을 어슬렁거리는 광인들의 비명과 신음, 웃음 따위가 그 소리를 약간 희미하게 할 뿐이었다.




20. 신입 환자 


마리 로랑의 신경계가 서서히 망가져 갔다. 그러다 보니 살면서 처음으로 자살을 생각하게 됐다. 한번은 산보하면서 제 손으로 생을 마감하는 방법을 궁리하기 시작했다. 어찌나 골몰했는지 어떤 광인이 길을 건너 다가오면서 뭐라고 지껄이는 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불가사의는 모르는 게 좋아. 물론 그건 다 감상적인 거지.”

로랑이 놀라서 흠칫 몸을 떨며 상대방을 쳐다봤다. 그 사람도 다른 환자들처럼 잿빛 가운을 걸치고 있었다. 보기 좋은 몸매에 키가 훤칠하고 잘 생기고 늠름한 얼굴이 금방 그녀의 눈길을 끌었다. 

‘새로 온 환자인 모양이야.’ 그녀가 생각했다. ‘면도한 지 닷새도 안 됐네. 한데 이 얼굴을 보니까 왜 누군가가 떠오르는 거지?..‘ 


문득 젊은이가 빠른 말로 속삭였다. 

“당신을 압니다. 마드무아젤 로랑이지요? 당신 어머니 집에서 초상화를 봤어요.”

“나를 어떻게 알지요? 당신은 누군가요?” 

로랑이 놀라서 물었다. 

“세상은 아주 좁아. 나는 내 형제의 형제야. 나의 형제는 나인가?”

젊은이가 소리 높여 외쳤다. 


남자 간호사가 눈에 띄지 않지만 주의 깊게 그를 주시하면서 옆으로 지나갔다. 

간호사가 저만치 사라지자 젊은이가 다시 빠른 말로 속삭였다. 

“나는 아르투아 도웰입니다. 도웰 교수의 아들이지요. 나는 미치지 않았어요. 단지 미친 척하는 것일…”

간호사가 다시 그들 쪽으로 다가왔다. 

아르투아가 갑자기 로랑한테서 멀어지며 외쳤다. 

“나의 죽은 형이 여기 있다네! 네가 나고, 내가 너야. 너는 죽은 뒤 내 안에 들어왔지. 우리는 쌍둥이였어. 그러나 내가 아니라 네가 죽은 거야!!”


로랑이 정신병원에서 아르투아 도웰과 접촉하다


도웰은 그 뜻하지 않은 습격에 놀란 어떤 우울증 환자를 뒤쫓아 갔다. 난폭한 환자가 체수 작고 빈약한 우울증 환자를 건드릴까봐 남자 간호사가 그들 뒤를 또 쫓아갔다. 그렇게 그들이 정원 가장자리까지 달려간 뒤 도웰은 쫓아가던 환자를 포기하고 다시 로랑에게 돌아왔다. 그는 간호사보다 더 빨리 달렸다. 로랑 곁을 지나치면서 도웰이 달리는 속도를 줄이고 하던 말을 끝냈다. 

“당신을 구하려고 여기 온 겁니다. 오늘 밤 탈출을 준비하세요.” 

그리고 한 쪽으로 풀쩍 뛰어가더니 자기를 거들떠보지도 않는 어떤 비정상적인 노파 주변을 맴돌면서 춤을 추었다. 춤을 끝내고는 장의자에 걸터앉아 고개를 푹 숙인 채 생각에 잠겼다.


그의 연기가 어찌나 그럴싸했든지 로랑은 도웰이 정말 미친 사람 흉내만 내는 것인지 의심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미 그녀에게 희망이 생겼다. 그 젊은이가 도웰 교수의 아들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잿빛 환자복과 면도하지 않은 얼굴 때문에 ‘개성이 상당히 죽긴’ 했어도, 부친과 닮았다는 것이 이제 한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는 초상화로 그녀를 알아보았다. 어머니를 찾아갔던 게 분명했다. 그런 일이 다 실제와 비슷했다. 어쨌든 이날 밤 로랑은 잠자리에 들지 않은 채 뜻밖의 구원자를 기다리기로 했다.

구원에 대한 기대가 생기면서 그녀가 용기를 내고 새로운 힘을 얻었다. 마치 끔찍한 악몽을 꾸다가 막 잠이 깬 것만 같았다. 끈질기게 쫓아다니는 노랫소리마저 더 조용해지고 멀리 사라져 허공에서 녹아 없어지게 됐다. 로랑이 음울한 지하실에서 신선한 대기로 막 나온 사람처럼 심호흡을 했다. 삶의 욕망이 예전에는 볼 수 없던 힘으로 갑자기 그녀 안에서 타올랐다. 어찌나 기쁜지 웃음이 나오려고 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조심해야 했다. 


조반을 알리는 종이 울리자 그녀는 짐짓 우울한 얼굴을 하려고 애쓰면서 병동으로 발을 옮겼다. 그건 사실 최근에 늘 짓는 표정이었다.

입구 곁에 여느 때처럼 라위노 의사가 서 있었다. 그는 산책에서 감방으로 돌아오는 죄수들을 감시하는 옥지기처럼 환자들을 지켜보았다. 가운 밑에 숨긴 돌멩이며 찢어진 가운, 환자들의 팔과 얼굴에 할퀸 자국 등 아무리 사소한 것조차 그의 눈길을 피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환자들의 표정을 유독 주의 깊게 살피곤 했다.


로랑이 라위노의 곁을 지나치면서 그를 보지 않으려고 눈길을 내려뜨렸다. 얼른 빠져나가고 싶었다. 그러나 그가 잠깐 그녀를 세우고는 더 예리한 눈길로 얼굴을 들여다봤다.

“기분이 어떻소?” 

“늘 그래요.” 

“이건 또 무엇을 위한 어떤 거짓말이오?”

그녀가 지나가도록 비켜서면서 그가 비아냥거리며 묻고는 뒤에 대고 덧붙였다.

“저녁에 우린 또 얘기를 나눌 거요.”

그녀가 지나간 뒤 그에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울한 얼굴을 기대했건만, 뭔가 들뜬 상태에 있는 것처럼 보인단 말이야. 그녀의 생각과 기분에서 내가 뭔가를 본 것일까? 그게 뭔지 찾아내야지…


그리고 그걸 찾아내기 위해 저녁에 그가 왔다. 그 만남을 로랑이 아주 겁냈다. 잘 견디기만 한다면 이 만남도 마지막이 될 것이다. 만약에 그렇지 못하다면 그녀는 이미 죽은 목숨이었다. 이제 그녀는 라위노 의사를 속으로 ‘대심문관’이라고 불렀다. 사실 몇 백 년 전에 살았다면 그는 그런 칭호를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의 궤변과 꼬치꼬치 파고드는 심문, 예상치 못한 함정 질문들, 심리에 정통한 지식, 그리고 악마 같은 분석 따위를 그녀가 다 두려워했다. 그는 진정 ‘위대한 논리학자’요 현대판 메피스토펠레스였다. 그래서 모든 도덕적 가치를 파괴하고 가장 확고한 진리들을 의심케 하여 약화시키는 재간이 뛰어났다.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파멸되지 않기 위해 그녀는 의지를 다 모아 한마디도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것도 역시 위험한 행보였다. 그건 노골적인 전쟁의 선포요, 공격의 강화를 초래하고야 말 마지막 자기방어의 저항이었다. 그러나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라위노가 와서 여느 때처럼 휘둥그런 눈으로 쏘아보면서 “자, 무엇을 위해 당신은 거짓말을 했지요?” 하고 물었을 때, 로랑은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입술이 굳게 맞물리고 두 눈은 바닥을 향했다. 라위노가 예의 종교재판 식 심문을 개시했다. 로랑의 얼굴이 백짓장처럼 허옇게 됐다가 벌겋게 달아오르기도 했지만, 종내 입을 열지 않았다. 라위노가 인내심을 잃고 성질을 부리기 시작했다. 그건 그에게서 아주 드물게 일어나는 일이었다.


그가 비웃듯이 말했다. 

“침묵은 금이라. 자신의 가치를 다 희생하면서도 당신은 목소리 없는 짐승들과 완전한 백치들의 미덕이라도 간직하고 싶은가 보구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을 거요. 침묵에는 폭발이 뒤따르지. 폭로적 달변의 안전밸브를 열지 않는다면 당신은 증오심으로 폭발할 것이오. 그리고 침묵한다 해서 무슨 의미가 있겠소? 그런다고 내가 당신의 생각을 읽지 못하는 줄 아시오? 당신은 지금 ‘넌 나를 미치게 하려고 들지만 그렇게 안 될 걸.’ 하고 생각하고 있소. 자, 우린 터놓고 얘기하게 될 거요. 그렇게 될 겁니다, 귀여운 아가씨. 사람의 영혼을 망가뜨리기가 나한테는 회중시계를 고장 내는 것보다 더 힘들지 않아요. 이 복잡하지 않은 기계의 부품들을 난 속속들이 알고 있소. 저항하면 할수록, 당신은 광기의 암흑으로 걷잡을 수 없이 더 깊게 빠져들 거요.” 

‘이천 사백 예순 하나, 이천 사백 예순 둘…’ 

라위노가 하는 말을 듣지 않으려고 로랑이 계속 숫자를 헤아렸다.

간병인이 조용히 문을 두드리지 않았다면, 이 고문이 얼마나 길어졌을지 모른다. 

“들어오시오.” 

라위노가 퉁명스레 말했다. 

“7번 병상의 환자가 죽은 것 같아요.”

간병하는 여자가 말했다. 라위노가 마지못해 일어났다. 

“죽는 게 차라리 더 낫지.” 그가 나직하게 투덜거렸다. “내일 우리의 흥미로운 대화를 마칩시다.” 

로랑의 턱을 들어 올리며 말하고는 비웃듯이 코웃음을 치고 나갔다. 


로랑이 무겁게 한숨을 내쉬고 맥없이 탁자 위에 엎어졌다. 

한데 벽 저편에서는 한없이 구슬픈 음악이 벌써 통곡하고 있었다. 그 마력적인 음악의 파워가 얼마나 강한지, 로랑이 자기도 모르게 그런 기분에 젖게 됐다. 아르투아 도웰과 만나기로 한 것도 이젠 그저 병적인 상상의 헛소리로만 보이고, 어떤 투쟁도 소용없는 짓인 것만 같았다. 죽음, 오로지 죽음만이 그녀를 이 고통에서 벗어나게 할 것이다. 그녀가 주변을 두리번거렸고… 그러나 환자들의 자살은 라위노 의사의 시스템에 포함되지 않았다. 여기에는 목매달 것조차 하나 없었다. 불현듯 늙은 어머니 얼굴이 떠올랐다.

‘아니, 안 돼, 이건 아니야, 어머니를 위해서 그렇게 하지는 않을 거야… 비록 이 마지막 밤을… 도웰을 기다리겠어. 만일 그가 오지 못한다면…’ 

더 이상 생각을 달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경우 자기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 온몸으로 감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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