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역사에서 아주 특이한 사건 자료를 수집하고 있지요. 한 수녀원 수녀들이 모두 악마에 들씌웠는데, 이건 협잡과 히스테리, 음모로 시작되어 끔찍한 사법살인으로 이어졌다오. 이 사건에는 또 당대 가장 경건한 성직자에 속하는 수렝 수사가 등장하여 원장수녀 잔느한테서 퇴마 작업을 합니다. 사실, 마귀 들렸다는 점 때문에 명성을 누린 이 원장수녀가 모든 재앙의 주범입니다.
이 여인에게 들어앉은 악마를 물리치려고 고군분투하던 중에 수렝 수사가 외려 심리적 질환에 감염됐어요. 즉, 악마들에 사로잡혀 거의 광인 같은 세월을 이십 년 넘게 보냈는데, 그런 광기 속에서도 고결한 성품과 영적 투쟁 덕분에 결국 제 속에 들어앉은 악마를 물리치고, 평온한 노년을 보내면서 총체적 인식(지각)과 더불어 일종의 성스러움까지 얻게 됐습니다. 그리고 영성에 관해 당대 가장 의미 있는 저술을 몇 편 내놓았어요.
잔느의 경우는 ‘특별한 은혜’를 받았다고 이모저모로 과시하고 관상 경지에 이른 성녀 역할을 멋지게 해내며 찬탄과 사랑과 경배까지 받으며 살다가 종내에는 명성과 인기를 잃게 됩니다.
귀신들림과 엑소시즘에 관한 상세한 이야기, 마법사로 낙인찍힌 신부를 화형으로 몰아간 사법 살인, 이에 대한 사회의 반응, 미치광이 취급받는 수도사의 면면 등이 죄다 아주 생생하게 우리 앞에 펼쳐집니다. 특히, 원장수녀와 수렝 수사의 성격이 흥미진진하답니다.」
이건 헉슬리가 1942년 7월 런던에 있는 발행인에게 보낸 편지. 우리가 보게 되듯이 이 스토리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극에서 극을 달린다.
마귀 들린 여인들, 그 불가사의한 현상을 조장하고 이용하는 권력과 엑소시스트들, 그들 편에 선 재판관들, 마법사로 몰려 사법 살인을 당한 성직자.
작가가 역사의 특별한 사건을 대하면서 (오늘날에도 응당 통용되는) 다양한 질문을 상정하고 그 물음들에 답하기 위해 연구한 각종 문헌의 방대함이 실로 놀랍기만 하다. 그 결과, 교리며 신앙, 신비주의, 영성, 초자연적 현상, 심리학, 정신의학, 루이 13세와 리슐리외 시대, 휴머니티 등이 담긴 역사 탐방이 과학적으로 정확하게 재구성된다.
과학적 정확성과 신뢰성이란 본질적으로 예술성 바깥에 있다. 하지만 헉슬리 같은 문필가가 구상한 세계를 그저 ‘있음직하게’ 묘사하는 게 아니라 ‘믿음직하게’ 묘사하고자 하는 경우, 어떤 사건이나 관점을 읽는 이가 수긍하게끔 보이고자 하는 경우… 예술적 실제의 과학적 이면은 미학적 구상의 토대가 된다.
(현상을 이해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데 과학적 중요성을 부여하기 위한) 과학적 구성은 1930년대 이후 명료한 예술적 투영만큼이나 그에게 중요한 과제가 됐다.
영국에 거주하던 때 발표한 작품들이 미학적으로 정연한데 비해 미국 체류 시기 작품들이 문학적 완성과는 거리가 있다는 지적도 바로 그런 배경에서 나오는 것이리라.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의 인생 후기에 나온 픽션이며 에세이들이 더 독특한 맛을 주는 건 아닐까?
그의 텍스트에서 흔히 접하게 되는 ‘과잉 정보’와 ‘교훈적 요소’ 같은 것은 작가로서의 재능이 감소했기 때문이 아니라… 통섭에 대한 갈망이 그만큼 컸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그의 혈관에 과학과 문학의 유전자가 공존하고 있음을 우리가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그는 사람들이 개인적인 존재요 사회적인 존재로서 겪는 공포에서, 미래의 공포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지를 평생 숙고했으며, 그 숙고의 결과를 카프카나 조이스 같은 당대 작가들과는 전혀 다르게 표현했다. 자신을 무엇보다도 지성인으로 내보였다.
그런 측면 때문인가, 자신은 줄거리를 쉽게 궁리하고 살아 있는 형상들을 쉽게 만들 수 있는 ‘진정한 작가’가 아니라고 말하기도 했다. 톨스토이나 도스토옙스키처럼 타고난 작가가 아니라고. 다시 태어난다면 학자가 되고 싶어 할 것이라 했다. 그것도, 어쩌다 상황에 떠밀려 그리 되는 게 아니라 숙명적으로 말이다.
실제로 그는 심리학, 초심리학, 의학, 정신병학, 정신약리학 등의 전문적 심포지엄과 학술 대회들에 거의 전문가 수준으로 참여한 거의 유일한 작가였다.
그가 전문가들 못지않게 연구하고 중시한 심리학, 의학, 생물학을 비롯해 다방면에서 가장 해박한 지식 덕분에 귀신들림과 ‘마녀 사냥’이라는 (지금도 형태를 달리하여 본질적으로는 상존한다 할 수 있는) 문화적 현상을 다양하게 조명하면서 분석한 <루덩의 악마들> 같은 독창적 논픽션이 탄생한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문학과 과학의 공존을 추구했다.
<루덩의 악마들>이 아이디어 면에서 1961년 미셸 푸코가 내놓은 <광기의 역사>의 개념을 앞섰다는 점이 놀랍다.
어떤 이들에겐 헉슬리의 이 텍스트가 술술 읽히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식의 확장과 전환을 갈구한다면, 웬만큼 고생할 가치가 충분하다.
글에도 여러 종류가 있지 않은가. 말랑말랑하여 접하기는 쉽지만 남는 게 별로 없는 글이 있는 반면에, 뭔가 묵직한 게 있어 보이는데 파고들기 쉽지 않은 글도 있다. 헉슬리가 인생 후반에 픽션보다는 에세이와 논픽션에 더 치중한 까닭은 아마도 그 중간 어디쯤을 지향했기 때문일 것이다.
“거의 모든 것에 관해 거의 모든 것을” 말하고 싶어 한 그에게 기존의 문학 장르 개념과 원칙은 외려 거추장스러웠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목표는 단 하나, 독자로 하여금 삶의 다양한 측면을 좀 더 깊숙이 탐구하게끔 단초를 제공하자는 것.
마지막 장편 <섬>에서 픽션이 철학적 에세이며 사회적 비평과 상당히 혼재한다는 인상을 받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 비롯된다.
<루덩의 악마들>에서 그가 동원한 문장들은 거의 시적 수준이다. 압축적이고 깔끔해서 군더더기가 없다는 뜻. 간명함이라는 미덕은 그 본연의 목적 달성 이외에도 미학적인 아름다움까지 선사하지 않는가. (번역문에서는 그 맛을 온전히 살리지 못하는 게 유감이다. 그것이 또 언어 차이에서 비롯되는 번역 한계이고.)
몽테뉴의 <수상록>을 읽으면서 우리는 에세이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 알게 된다. 생각의 자유로운 흐름, 그 생각의 논거로 각종 고전의 든든한 인용, 거기서 나오는 설득력, 우아한 문체, 독자를 끌어들이기 위한 구조적 스타일, 무엇보다도, 달변이나 수사적 효과와는 상관없이 진솔하고 정직한 토로…
헉슬리의 <루덩의 악마들>을 읽으면서 우리는 역사적 일화에 대한 논픽션을 어떻게 써야 할지 생각하게 된다.
일방의 입장과 해석에 치우치지 않고, 아니, 상호 대립적인 해석을 전부 끄집어내고 소개하면서도 역사적 진실에서 전혀 벗어나지 않는 것. 한마디로, 역사가요 스토리텔러, 철학자, 사회비평가, 조사 연구자로서 번쩍이는 재능이 여기 다 녹아 있다. 그것도, 우아하고 알기 쉽게.
몽테뉴는 <수상록>에서 사람이며 사물의 잘 이해되지 않은 것들에 대해 새로운 빛을 던짐으로써, 자신의 지적, 물리적 유기체를 공공의 자산으로 만들었다는 평을 받는다.
<루덩의 악마들>에는 우리 사는 세상을 더 잘 이해하고자 한다면 면밀하게 탐구해야 하는 메시지가 들어 있다. 헉슬리의 박식과 기지와 혜안이 (우리 한국에서도) 공공 자산이 될지 여부는 독자들한테 달린 게 아닌가. 진정한 재능은 특정한 시대와 지역에 국한되지 않는 법.
8
삼백 년이 훨씬 지나 케케묵은 사건에 작가는 왜 주목했던가?
사실, 헉슬리 이전에도 ‘수녀들의 집단 광란’과 이를 빙자한 마녀 재판이라는, 보기 드문 역사적 사건에 많은 이들이 눈길 돌리고 그에 관한 글을 남겼다.
알렉상드르 뒤마를 비롯한 작가들이며 줄 미슐레를 비롯한 역사가들, 샤르코 같은 정신의학자들, 그리고 유럽의 마법과 악마학에 관한 연구자들이 말이다. (‘이야기 역사’라는 틀에서 볼 때, 뒤마가 전통적 이야기체로 썼다면 헉슬리는 이 책에서 현대적 이야기체를 동원했다 하겠다.)
게다가 1980년 <루덩의 마귀 들림>이라는 책을 내놓은 프랑스 역사가요 문화학자 미셸 세르토처럼 우리 시대에 와서도 이 사건을 재조명하는 이들이 끊이지 않는다. 왜?
올더스 헉슬리가 이 책을 쓰고 내던 때는 2차 대전과 홀로코스트라는 잔학무도 이후 냉전이 절정으로 치닫던 시기였다.
소비에트연방에서는 ‘세계주의와 투쟁’이라 불린 부끄러운 캠페인이 펼쳐졌다. 즉, 강력한 징벌 기계가 잠시도 멈추지 않고, 권력은 대중의 의식을 쇼비니즘과 인종주의로 감염시키고자 기를 썼다.
또 아메리카합중국에서는 매카시즘이 작동하기 시작해 정점에 이르면서 모든 것이 알 만한 시나리오에 따라 진전됐다. 즉, 불온사상 소유자로 낙인찍힌 이들이 일터에서 쫓겨나고 특위에 소환되고 체포되고 숙청되고…
그런 시대 분위기가 작가로 하여금 마녀 사냥이라는 광기를, 또 그 광기의 대표적 사건을 떠올리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집단 히스테리를 유도한 엑소시즘과 잔인한 고문과 사람을 산 채로 불태워 죽인 만행을… 한데, 알고 보니, 그 본질에 악마 따위는 없고 모든 것이 성적 억압과 종교적 과대망상을 이용해 다중을 조종한 정치적 술책과 박해였던 것일 뿐.
대화와 관용과 공존 대신 음모와 조작과 선동과 탄압이 난무하는 사회는
집단 순응적 사고에 물들고 집단 광기에 빠지기 쉽다.
루덩에서 벌어진 맹신과 증오와 폭압의 장면들 이후 삼백여 년이 지났건만 사람들이 얼마나 달라지지 않았는지를 헉슬리는 절감한다. 미래에 대한 장밋빛 환상과 자기기만에 굴하기를 거부한 그가 볼 때…20세기의 독재자와 독재 권력과 선동가들은 교회의 수법을 적용하면서 대중을 조종하고, 사람들은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외상을 입는다. 본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중세와 근세 기독교 세계에서는 마법사와 그 고객을 20세기 ‘공공의 적’처럼 대했다. 즉, 히틀러 치하에서 유대인들을, 스탈린 시대에 자본주의자들을, 아메리카합중국에서 코뮤니스트와 그 동조자들을 대하듯이 말이다. 그들은 외국 열강의 앞잡이 취급을 당했으니, 아무리 좋게 봐도 반애국주의자요 최악의 경우엔 매국노, 이단자, 인민의 적이었다.
지난 시대 이 극히 추상적인 퀴슬링 부류에게 부과된 형벌이 죽음이었듯이, 현대 세계 많은 지역에서 정치적, 세속적 악마 숭배자들을 기다리는 형벌도 죽음인데… 이들을 어떤 나라들에서는 코뮤니스트(빨갱이)라 부르고 또 어떤 나라들에서는 반동주의자라 부른다.」
「하지만 우리 시대에서 뒤돌아보면, 종교의 모든 폐해는 초자연적 현상을 믿지 않아도 무성할 수 있음을 우리는 본다. 또, 확신에 찬 유물론자들이 값싸게 날림으로 내놓은 이상을 절대자라도 되는 양 숭배할 태세가 돼 있으며, 열렬한 휴머니스트들이 사탄 신봉자들을 몰살하는 종교재판관의 열정으로 자기네 적들을 박해할 수 있음도 우리는 본다.
그런 행동 패턴은 까마득한 옛날부터 있어 왔으니, 인간의 그 어떤 신앙보다도 더 오래 됐다. 우리 시대에 악마를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아주 많은 사람들은 사탄의 존재를 하나님만큼이나 확실하게 믿은 선조들처럼 행동하기를 즐긴다. 그들은 자기네 가혹한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자기네 이론들을 도그마로 바꾸고, 자기네 내규를 제 1원리로 격상시키고, 자기네 정치 보스들을 신으로 추앙하고, 자기네한테 동의하지 않는 이들은 모두 악의 화신이라 몰아친다.
상대적인 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지극히 인간적인 것을 신성한 것으로 맹신적으로 바꿈으로써, 그들은 가장 추악한 작업에 탐닉할 토대를 마련한다. 그것도 맑은 양심을 간직하며 지고지순하게 일한다고 확신하면서!
그러다가 작금의 믿음과 신조가 낡아져 다시 터무니없어 보이게 되면 새로운 추세가 만들어질 터이고, 그리하여 태고의 광기가 적법성이네 이상주의네 진짜 종교네 하는 상습적인 가면을 계속 쓰게 될지도 모른다.」
루덩의 집단 광란 사건 이후 사백 년 가까이 지난 지금, 헉슬리 시대 이후 육십여 년 지난 지금, 사람들과 세상은 좀 달라졌을까? (앞에 언급한 닐 포스트먼은 현대인들이 중세 사람들보다 더 나이브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어디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 사회를 돌아보자.
비인간적이고 비문화적이며 폭압과 광기의 결정체라 할 수 있는, 마녀 사냥이나 매카시즘 따위 철 지나고 위험한 유행에서, 21세기 문명사회를 지향하는 우리는 과연 자유로운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이 이 책에 들어 있다. 그것도, 모든 근거를 가지고 아주 확실하게.
누가 귀신들린 수녀들이며, 누가 그랑디에 신부이며, 누가 리슐리외 같은 절대 권력이고 누가 그 권력의 앞잡이이고 엑소시스트들이며, 누가 몇 푼에 팔려 양심을 속이며 위증하는 자들이고, 누가 고용된 판사들이며 누가 사법살인에 연루되기를 거부하는 이들이며, 누가 엑소시즘과 화형에 희희낙락하거나 내심 분개하는 군중인지…
우리 사회 적지 않은 현상과 사건에도 거의 에누리 없이 대입된다. 이것이 바로 ‘역사의 메아리요 교훈’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무심하거나 게을러서 잘 모르거나 둔감할 뿐이지.)
「우리한테, 근본악은 더 이상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적 악이나 경제적 악이 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실증주의자로서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악’이라 부르기 좋아하니까) 그 근본악이 오늘날에는 마법사나 주술사가 아니라 어떤 증오에 빠진 계급이나 민족한테서 추종자들을 찾는다. 사회적 증오의 인과 구조가 바뀌었지만, 그렇다 하여 증오와 불공정이 더 줄어들지는 않았다.」 (본문에서)
헉슬리의 이 이야기를 그저 오래 전 사건들의 파노라마로 치부하고 만다면, 그건 더 큰 메시지를 놓치는 꼴이다. 이건 하나의 거대한 알레고리, 바로 모든 시대 모든 사람들 삶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헉슬리의 이 스토리를 영국 극작가 존 화이트닝이 1961년 희곡으로 각색한 것도, 영국 영화감독 켄 러셀이 1971년 <악마들>이라는 충격적인 필름으로 선보인 것도, 함부르크 국립극장의 의뢰를 받아 폴란드 작곡가 펜데레츠키가 1972년 <루덩의 악마들>이라는 오페라로 구성했으며 유럽 극장들에서 여전히 심심찮게 무대에 올리는 것도... 다 그 메시지가 오늘날에도 고스란히 적용되기 때문이다. (영화와 오페라는 동영상으로 다 나와 있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렇기 때문에, 그런 배경이라든가 바탕에서 헉슬리가 호소하는 바는 아주 단순하다.
「20세기에 사는 우리는 우리 자신을 오르마즈드처럼 맹목적으로 숭배하고 다른 동료들을 악의 원리인 아리만으로 간주함으로써, 이 시대의 악마주의에, 극악무도한 행위에 승리를 안기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악에 대한 생각에 집착하다 보면 사람은 아무리 좋은 의도를 지니고 있다 해도 악이 세상에 더 횡행하게끔 조장하게 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본문에서)
그의 삶에서도 많은 일이 벌어졌다. 30년대 중반 ‘평화서약 연합’의 반전 운동에 적극 가담하고, 이후 나치 치하에서 박해받는 유대인들 인권 수호에도 나섰다.
1937년 아내와 아들을 데리고 역사가요 과학 저술가, 철학자인 제럴드 허드(Heard)와 함께 미국으로 이주했다. 캘리포니아의 온후한 기후가 시력 향상에 도움 될까 기대하는 마음으로 와서, 지역의 지성인들이며 힌두이즘과 불교에 심취한 지식인들과 친분을 맺었다.
주로 로스앤젤레스 남부에서 죽을 때까지 살게 됐는데 처음 한동안은 뉴멕시코 주 타우스라는 마을에 머물기도 했다. D. H. 로렌스가 20년대에 거주한 이후 작가와 화가들의 작업지가 된 여기서 헉슬리는 에세이 <수단과 목적>을 썼다. 현대 문명사회에서 대다수 사람들은 ‘해방, 평화, 정의, 형제애’를 꿈꾸기는 해도 그것을 성취하는 방법에서 뜻을 함께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검증한다.
1938년 크리슈나무르티를 알게 되면서 그 가르침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허드를 통해 동양의 종교와 철학을 연구하는 베단타학파 회원이 되고 이태 뒤 젊은 영국인 소설가 이셔우드를 이 서클에 소개한다. 세 사람은 명상과 채식주의, 아힘사(불살생) 원칙을 비롯해 철학과 종교에서 브라마난다의 폭넓은 지식에 심취하게 됐다.
유럽 문화가 로스앤젤레스에서 아시아 종교를 발견한 것… 그 얼마 뒤에 쓴 에세이 <만년 철학>에서 헉슬리는 널리 알려진 몇몇 신비주의 가르침을 논한다.
에세이스트요 사회비평가로서 과학과 기술이 인간 삶에 미치는 영향 문제를 주로 다루며 내보인 회의적 시각이 적지 않은 독자들한테서 저항감을 야기하기도 했다. 철학적 신비주의와 동양의 가르침, 초심리학 같은 영적 주제에 더욱 몰두하게 됐다.
일부 아카데미 서클에서는 그를 현대 사상의 리더요 당대 최고 수준의 지성인으로 여겼다. 말년에 남긴 언급 하나.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인류의 존재 문제를 숙고하고 삶의 의미를 찾으려 들면서 나는 갖가지 물음에 대한 대답이 딱 하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바로, 우리 각자가 조금만 더 착해지려 애쓰자. 그러면, 다 된다.
로스앤젤레스 시기 이후 내놓은 다섯 편 장편소설 중 첫 번째인 <숱한 여름을 보낸 뒤>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할리우드 백만장자 이야기로, 1939년 픽션 부문에서 영국의 제임스 테이트 블랙 기념상을 받았다. 특유의 위트와 지적 달변이 가득한 이 풍자소설에서 철학적이고 사회적인 이슈들을 거론하는데, 개중 몇몇은 나중에 그의 마지막 장편인 <섬>에서 주된 주제가 된다.
히틀러를 피해 미국으로 몰려든 많은 유럽 작가들이 그랬듯이, 헉슬리도 생계를 위해 할리우드에서 시나리오를 쓰게 됐다. 애니타 루스의 소개로 MGM과 접촉하여 이셔우드와 공동 집필 등으로 여러 편을 썼지만 제대로 빛을 본 것은 <오만과 편견> 정도. 할리우드는 헉슬리의 성향이며 추구하는 바와 잘 안 맞았다.
50년대 초 내놓은 논픽션 <루덩의 악마들>은 그의 작품 활동 지평에서 상당히 독특하며 우뚝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 역사적 일화에 대한 눈부시게 상세한 심리 탐구.
인간 지각의 확장과 영성에 (그의 용어로는, 자기초월에) 관한 관심으로 마지막 십년을 거의 다 보냈다.
메스칼린이 뇌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알아보기 위해 1953년 전문의의 관리 하에 직접 실험에 나섰다. 주변 세계 지각에 관한 실험 결과물이 바로 유명한 철학적 에세이 <지각의 문>과 속편 <천국과 지옥>. 이는 보편적 행복의 공식을 찾아내려는 몸부림.
20세기 가장 유명한 디스토피아 소설 <멋진 신세계>의 저자가 이젠 다양한 사이키델릭을 실험하면서 지각의 확장 수단을 찾으려 애썼다. 예전에는 환영을 보는 이들과 신비주의자들과 예언자들한테만 허용된 영역으로, 보통 사람들도 지각을 확장함으로써 들어설 수는 없는 것일까.
<지각의 문>은 60년대 수천 명 급진적 지식인들의 필독서가 됐고, 그 저자는 히피와 사이키델릭 운동의 ‘영적 아버지’가 됐으며, 한 록그룹으로 하여금 ‘The Doors’라는 이름으로 전설이 되게 했다.
이런 흐름에서 헉슬리의 계승자들이 나타났다. 20세기 후반 미국의 주요 작가인 윌리엄 버로우스,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의 작가 켄 키지, 이른바 ‘잃어버린 세대’를 대표하는 톰 클레이튼 울프, 페루 태생으로 <돈 후안의 가르침>의 작가 카를로스 카스타네다 같은 이들.
1955년 아내 마리가 유방암으로 세상을 떴다. 그 직전에 소설 <천재와 여신들>을 발표. 이듬해 이탈리아 출신 바이올리니스트로서 그의 지각 확장 실험을 도와 오던 로라 아처라와 재혼했다.
66세가 되던 1960년 암 진단을 받은 뒤 마지막 장편 <섬>을 쓴다. <멋진 신세계>에서 삶의 극단적인 합리화가 물질적 번영과 더불어 사람들의 정신적 황폐를 초래함으로써 무시무시한 미래 형상을 제시한 작가가 이제 <섬>에서는 동양의 철학과 정신에 눈길을 돌리며 정신적 교착에서 벗어날 출구를 모색한다.
가상의 섬 팔라에서 사람들은 서구 물질문명의 처방에 의존하지 않으며 자유롭고 행복하게 산다. 심오한 철학적 내용이 엽기적인 줄거리와 잘 엮인 <섬>은 헉슬리가 인류에게 남긴 유언.
1962년 인간 잠재력을 주제로 에살렌 대학에서 행한 강연은 이후 ‘인간 잠재력 회복 운동’의 모태가 됐다.
1963년 11월 22일 후두암 때문에 말을 하지 못해서 종이쪽에 적은 글귀로 아내한테 뜻을 알렸다.
‘LSD 100 마이크로그램 피하 주사.’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지각의 문’을 그렇게 장식했다. 아내 로라가 쓴 헉슬리 전기 <이 영원한 순간>을 보면, 그녀는 오전 11시 45분 주사를 놓고 두 시간 뒤 한 번 더 투여했다. 그날 17시 21분 할리우드 집에서 평온하게 영원한 안식처로 떠났다.
그의 죽음에 대한 언론 보도는 그 몇 시간 전에 발생한 케네디 암살과 <나니아 연대기> 작가 C. S. 루이스의 사망 소식에 가려 그의 명성에 비해 크지 못했다.
이 예사롭지 않게 일치한 죽음이 보스턴칼리지 철학 교수 피터 크리프트에게 영감을 주었고, <천국과 지옥 사이 - 죽음 저편 어딘가에서 존 F. 케네디와 C. S. 루이스와 올더스 헉슬리의 대화>라는 장편소설이 나왔다.
6
인간과 사회의 발전 가능한 길들을 모색하며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대열에 들어선 헉슬리는 마지막 장편 <섬>에서 인류 미래에 대한 회의론을 극복했다. 노년 들어 그는 에세이 제목 <지각의 문> 같은 인생 방향에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루덩의 악마들>에 묘사된 것 중 많은 부분은, 헉슬리의 관념에서는, 등장인물들이 잘못된 ‘지각’을 지닌 후과이다. 즉, 탐욕과 두려움과 편협 때문에 잔느와 수녀들이 그랑디에를 상대로 행한 중상비방, 독단적인 교리에 의거하거나 빙자하여 엑소시스트들이 저지른 폭압, 일신의 안위를 위해 조작된 증거마저 인정하며 사법살인을 저지르는 어용 판사들, 독재를 굳히기 위해 종교재판을 부활하려는 목적으로 루덩 현상을 이용하려 한 리슐리외의 속셈 따위는…
모두 헉슬리가 보기엔 이 비극적 사건의 주된 원인이라기보다 부차적인 것이었다.그 모든 바탕에는 그들의 잘못된 지각(인식)이 도사리고 있던 것일 뿐.
가련하고 불행한 그랑디에 신부에 이어 소개되는 장 조셉 수렝 수도사의 스토리는 총체적 인식의 힘이 얼마나 크고 기적 같은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즉, 주변과 만물에 대한 지각이 올바른 경우 영혼뿐 아니라 육신마저 치유될 수 있다는 점!
수렝이 영웅적인 의지를 발휘하여 갖은 유혹과 싸우고 엄격한 금욕을 실천하며 고행하는 동안에도, 매 순간 악령에 들린 듯이 악마들을 믿으며 원장수녀를 치유하려 들면서 정신력을 헛되이 소모하는 동안에는, 그런 젊은 예수회 수사가 헉슬리 눈에는 영적으로 완전치 못하고 잠재적으로 아픈 사람으로 보인다.
수렝이 이십년 가까이 심신증적 마비 상태에서 갖은 고초를 겪은 것은 신과 인간의 관계를 잘못 해석한 데서 비롯된 비정상의 필연적인 귀결로 해석된다.
「사람을 자연과 떨어진 상태에서 묘사하는 시는 사람의 본질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실제로 확고하게 연관된 인간 외적 세계는 무시하고 인간 영혼 안에서만 하나님을 알고자 애쓰는 영성은 거룩한 존재의 충만함을 알 수 없다.」 (본문에서)
하지만 비정상은 결국 바로잡히고, 수렝이 아직은 확신 없는 발길을 낙엽 수북이 쌓인 정원으로 처음 내딛는… 장면은 상징적으로 아주 심오한 의미를 지니며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시험과 시련과 고통을 겪으면서도 살아남았고, 그래서 정신적으로도 치유됐다. 혹은, 헉슬리의 용어를 쓰자면, 올바른 지각을 획득했다.
지각은… 사람이 교회의 독단적 교리에 구속된 상태를 훌훌 떨치고 자연과 하나 된다는 생각을 굳히는 순간부터 올바른 것이 된다. 왜냐하면, 그게 곧 조물주와 합일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니까.
프랑스 실존주의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은 헉슬리에게 강한 영향을 끼친 동시대인으로서, 헉슬리가 만년에 내놓은 작품들을 이해하는 데 아주 중요한 원칙을 세웠다. 즉, 인간과 신의 올바른 관계는 자연을 거스르거나 정복함이 아니라 자연 속에서 생긴다는 것, 바로 이 점을 마르셀이 우리한테 입증했다.
이런 생각들은 <명상의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토마스 트러헌은 조물주가 당신 피조물에 나쁘게 대한다고 여기지 않았다. 거꾸로, 모든 피조물을 통해 조물주를 찬미할 필요가 있으며, 모래알에서 무한한 공간을, 꽃송이에서 영원한 시간을 볼 줄 알아야 한다고 믿었다.
「트러헌이 보기에 백합들과 까마귀들은 인간과 상관없이 ‘하나님 안에서’ 스스로 존재한다. 자, 여기 모래가 있고, 모래 알갱이들 속에서 피어나는 꽃이 있다. 이것들을 사랑스럽게 응시하라. 그러면 그 안에서 영원성도 무한성도 보게 되리니.」 (본문에서)
수렝의 스토리는 마르셀 사상의 몇몇 기초적 명제를 확연하게 보여준다. 즉, 객관적 세계와 우리네 개인적이고 소중한 존재의 세계는 분명히 구분돼야 하며, 가혹한 혼돈 속에 있는 현실 자체가 아니라 주변 현실에 대한 우리네 태도가 중요할 뿐이라는…
삶이란 신비이고, 삶의 여러 신비함은 늘 직관적으로 납득된다. 우리가 도그마에 묶여 있는 한, 설령 그것이 아무리 무조건적 믿음을 주입하는 것이라 해도 삶은 우리네 의지와 따로 놀면서 제대로 살아 보려는 시도조차 용납하지 않는다.
이런 측면에서 헉슬리는 종교의 의미와 바른 신앙생활에 대해서도 일침을 가한다.
「개개인이 자신과 세상에 대해 편협한 생각을 버리도록 돕는다면 종교는 응당 깨달음의 기반을 마련할 것이다. 그러나 종교가 깨달음의 길에서 장애가 될 수도 있으니… 공포와 협량, 의분, 기업애국주의, 십자군 식의 증오 같은 감정을 고무하고 정당화하며, 또 어떤 신학적 개념들과 어떤 신성한 단어들만 중언부언할 때, 그렇다.」 (본문에서)
「선행을 통해 성자와 합일하고 계시에 온유함으로써 성령과 합일하면 성부와도 의식적이고 변모되는 합일이 가능해진다. 이런 합일 상태에서 사물과 현상은 들뜨고 과장된 자아의 프리즘을 통해 감지되는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것으로’, 달리 말해, 최종 정체성에서 모든 존재의 신성한 근간과 관련된 것으로, 인식된다.」
교회 역사가 증명하듯이 수렝은 1665년 행복한 상태로 눈을 감았다. (반면에 천사들의 수녀 잔느는 참회했음에도 불구하고 행복하지 못했다). 이승에서 만물의 질서에 대해 새로운 지각을 얻은 덕분에 그에게 지복이 강림했는지, 우리로서는 확인하기 어렵다. 단지, 수렝의 생각이 헉슬리가 언급한 방향으로 실제 발전했다면, 그는 자신이 섬긴 교회와 힘겨운 갈등을 겪었으리라는 점은 짐작할 수 있다. 교회는, 특히 예수회는, 자연을 죄악의 왕국처럼 간주했기에 모든 감각에 재갈 물리기를 요구했으니까.
헉슬리의 인식에서는 그와 반대로 자연과의 유기적 결합이 정신뿐 아니라 신체 건강의 담보이다. (마르셀의 영향이나 불교철학에서 퍼온 논거들과 함께, 만년에 아주 강하게 몰입한) 이런 사상은 그가 2차 대전 직후 정신적 굴곡을 겪고 나서 발표한 모든 글에 다 배어 있다.
대학 졸업하던 해부터 네 해에 걸쳐 시집을 네 권 냈다. 그 배경에 깔린 비탄이며 신랄함, 냉소주의, 또 거기서 벗어나려는 역설적 품위는 나중에 그가 몰입하게 되는 신비주의며 영적 삶에 대한 전조라 할 수 있겠다. 사실, 청소년기에 겪은 세 가지 사건의 정신적 외상은 (모친이 암으로 사망, 자신의 실명 상태, 작은형의 자살 같은 육체적 고통에 노출된 경험은) 그의 많은 소설에서 종종 인간 정신과 육신의 갈등으로 표출된다.
단편집 <림보>도 발표했지만, 작가로서 이름을 알린 것은 1921년 첫 번째 장편 <크롬 옐로우>. 이건 바로 오톨라인 모렐 부인의 저택과 거기 드나드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 눈부신 대화와 기지 넘치는 세태 비평과 냉소주의가 결합된 문체로 인해 그는 10년 어간에 가장 인기 있는 문학 활동가 축에 든다는 평판을 얻었다.
20년대는 그에게 가장 생산적인 기간일 뿐 아니라 평생 창작과 사상의 정초가 형성된 시기이기도 했다. 시력 때문에 1차 대전 전선에 나가지 못했지만, 많은 동시대인들처럼 전쟁이 야기한 분위기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분위기의 주된 정서는 일정하게 흐르던 시간이 단절된 느낌, 불과 얼마 전까지도 확고하고 영원한 듯 보이던 가치며 토대가 붕괴된 느낌. 전쟁은 경제와 정치, 학문, 문화 등에서 본질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지금 시대와 지나간 시대 사이에 경계가 뚜렷하게 설정되고, 인간과 문명에 대해 지난 시대에 다듬어진 관념들을 더 이상 유지하기 어렵게 됐음을 많은 이들이 분명히 알게 됐다.
그 결과, 다른 세계의 장면을 만들고, 철학이며 미학의 측면에서 새로운 현실에 적절한 의미를 부여하는 방법들을 찾고자 하는 갈망이 나온다. 바로 이 때문에 유럽 문화에서 1920년대는 실험 시대가 된 것.
당대 많은 영국인들처럼 헉슬리에게 새로운 역사 시대의 도래는 무엇보다도 산업 발달과 물질적 번영, 정치적 자유를 이룩한 빅토리아 시대의 종말과 연관됐다.
그렇다면 새 시대는 어떤 것이며, 새 시대의 가능성과 전망은?
이런 물음에 대한 대답이 바로 그의 작품들. 헉슬리는 세태 묘사와 풍자라는 전통에서 머물지 않고, 사회 근간이 무너질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도 함께 내보였다.
그것은 그가 20년대 사상과 관념의 미학적 전투에서 상당히 빨리 제 자리를 찾은 결과이기도 하다. 그의 생각에… 문필은 사회생활의 일부여야 하고, 예술가의 과제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며, 가능한 한 거기에 영향을 미치는 것.
그는 어떤 정치적이나 미학적 운동에 얽매이지 않았으며 그가 평생 접한 동아리의 스펙트럼은 아주 넓었다. 예를 들어, 문인 친구들 중에는 앙리 바르뷔스가 세운 <클라르테 그룹>의 멤버들, T. S. 엘리엇과 버지니아 울프 같은 모더니즘의 기둥들, <신사는 금발을 좋아해>의 애니타 루스 등이 있고, 또 런던 인근 블룸스버리 지역에 살던 당대 지성인, 작가, 화가들의 엘리트 그룹에도 들었다. 여기서 예술비평가 클라이브 벨, 역사가요 전기 작가인 스트레이치 리튼, 소설가 에드워드 포스터, 경제학자 케인즈 등과 교류했다.
1928년 출간된 <연애 대위법>은 헉슬리의 가장 복잡한 소설들 중 하나. 전형적 관념 소설인 이 작품으로 헉슬리는 독일식 철학소설과는 또 다르며 토마스 만의 표현을 빌자면 이른바 ‘지성 소설’이라는 장르의 개척자가 됐다.
20년대 후반 이탈리아에 살면서 친구 같은 선배 D. H. 로렌스와 자주 만났다. 삶에 대한 로렌스의 관점을 아주 높이 샀고, <연애 대위법>에서 가장 이상적인 인물로 묘사한 램피언의 모델이 로렌스였다. 1930년 로렌스가 죽자 그의 편지들을 모아 책으로 내고 나중에 전기를 쓰기도 했다.
테크놀로지의 발달로 기계문명이 판치는 현대사회의 문제점들을… 로렌스가 본능적이고 직관적인 통찰을 통해 대안을 제시하고자 했다면, 헉슬리는 그런 문제들에 대한 진지한 반성과 비판을 작품의 주제로 삼으면서 인간의 본능보다는 지성으로 접근했다.
즉, 현대의 과학기술 문명을 비판하면서도 19세기 전통적 세계관에 대한 맹신으로 퇴행한다거나 안이한 해결책을 제시함으로써 섣부른 낙관주의로 전락하지만은 않는 균형감각을 보여 주었다.
4
30년대 초 지중해 연안 툴롱 인근으로 거처를 옮겨서 쓰고 1932년에 출간돼 헉슬리를 베스트셀러 작가로 굳혔으며 20세기 최고의 미래 소설이 된 <멋진 신세계>는 그의 다섯 번째 장편이요 첫 번째 디스토피아 소설. H. G. 웰스가 <현대 유토피아>, <사람들은 신들을 좋아해> 같은 유토피아 소설에서 과학적 낙관론을 희망차게 제시함에 대한 패러디…
당시 널리 인기 끄는 낙관적 유토피아 소설들과 달리 헉슬리는 소름끼치는 미래상을 제시하려 했다. 여기 등장하는 미개인 청년의 원형은 마거릿 미드의 <사모아의 성년>에서 힌트를 얻었다.
과학과 의학과 기술을 현대인들이 맹목적으로 신뢰하고 그 발전에 의존하다 보면 어떤 끔찍한 결과가 초래되는지를 생생하게 보이고자 했다.
인공 수정으로 동일한 인간을 시험관에서 대량 생산하는 미래 사회를 그림으로써 현대 사회가 암묵적으로 지향하는 관리 사회, 통제국가의 무시무시한 비극적 종말을 예언했는데…
시험관 아기나 유전자 복제를 비롯해 오늘날 의학과 생명공학의 경이적인 성취를 우리가 목격할 때, 그의 예언이 결코 근거 없는 환상이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
올더스 헉슬리는, 과연 예언자인가?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을, 우리는 십년 전 타계한 미국의 미디어 이론가요 문화비평가 닐 포스트먼이 1985년에 내놓은, 우리 시대 미디어 생태 환경에 관해 가장 중요한 텍스트들 중 하나인 <죽는 줄 모르고 즐기는 사람들 Amusing ourselves to death>에서 보게 된다.
「우리는 1984에 주목해 왔다. 그 해가 닥쳤지만 예언은 실현되지 않았고 생각 있는 미국인들은 나직이 흥얼대며 안도했다. 봐, 자유민주주의의 뿌리가 뽑히지 않았네! 테러 같은 것이 있기는 해도 오웰의 악몽이 찾아들지는 않았어!
그러나 오웰의 어두운 예언과 더불어 또 다른 예언이, 똑같이 으스스한 전망이, 있음을 우리는 잊고 있었다. 바로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교양인들도 자칫 간과하기 쉬운데, 헉슬리와 오웰의 어두운 미래 전망은 같은 게 아니었다. 오웰은 우리가 외부 폭압에 억눌릴 것이라 경고한다. 그러나 헉슬리가 예견하기에는… 독재자 때문에 사람들이 자율과 성숙과 역사를 박탈당하지 않는다. 그가 내다본 것처럼… 사람들은 외려 통제받기 좋아하고 테크놀로지를 떠받들며, 그 결과 사유 능력을 잃게 될 것이다.」
오웰과 헉슬리의 예언을 포스트먼이 조목조목 비교하여 결론을 낸다.
「오웰은 서적을 금지할까 두려워했지만, 헉슬리는 서적을 금할 까닭이 없게 될 것을 우려했다. 왜? 왜냐하면 책을 읽으려는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될 테니.
오웰은 우리한테서 정보를 박탈할까 두려워했지만, 헉슬리는 우리가 아예 무감각하게 허투루 대할 만큼 정보가 차고 넘칠 것을 우려했다.
오웰은 (독재자가) 진실을 우리한테 숨길까 두려워했지만, 헉슬리는 무의미한 정보의 바다에 진실이 파묻힐 것을 우려했다.
오웰은 우리 문화가 선택의 자유를 빼앗을까 두려워했지만, 헉슬리는 우리 문화가 허접한 필름과 난잡한 파티, 관능적 유희 따위로 채워져 지질해질 것을 우려했다.
<멋진 신세계>에서 지적하듯이, 시민적 자유를 옹호하는 이들과 합리주의자들은 늘 긴장하여 독재와 폭정에 맞서면서도... “인간에게 재미와 오락에 거의 죽는 줄 모르고 빠져드는 속성이 있다는 점은 감안하지 못했다.”
헉슬리가 또 말하길, 사람들이 <1984>에서는 가해지는 고통에 의해 통제되지만 <멋진 신세계>에서는 제공되는 즐거움에 지배된다. 간단히 말해… 오웰은 우리가 싫어하는 것이 우리를 멸망시킬까 두려워했고, 헉슬리는 우리가 탐닉하는 것이 우리를 멸망시킬까 우려했다.」
닐 포스트먼은 티브이가 자잘한 즐거움인 연예오락을 주지만 교육이나 주요 이슈에 관해 의미 있는 토론은 제공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그가 미국 사회의 미래라는 토론의 틀을 잡기 위해 오웰과 헉슬리의 소설을 동원한 까닭은... 현대 사회가 헉슬리의 끔찍한 예언대로 얼마나 충실하게 좇아가고 있는지에 사람들 눈길을 돌리기 위함이었다.
1952년 <루덩의 악마들>이 출간되자 헉슬리의 팬들이 상당히 놀랐다. 왜냐하면, 그는 <크롬 옐로우>, <조커의 댄스>, <연애 대위법> 같은 작품을 잇달아 내놓으면서 다니엘 데포(Defoe)와 스몰레트부터 당대에 이르기까지 영국 문학의 세태 묘사 소설이라는 거대한 전통에서 적법한 계승자로 각인됐으며 유럽에서 작가의 위치를 확고하게 굳혔는데… 이제 내놓은 것이 역사적 사건에 대한, 방대한 논픽션이니 말이다.
노년을 앞두고 작가의 소명을 잊은 것인가?
더욱 놀라운 것은, 그의 트레이드마크라 할 수 있는 예리한 풍자와 공정한 웃음이 <루덩의 악마들>에는 별로 많지 않다는 점. 거꾸로 여기엔… 섬뜩한 종교적 광기, 억압된 성적 욕구, 난잡한 집단 히스테리, 무지와 맹신, 떠들썩한 엑소시즘, 마녀 사냥, 정치 권력의 집요한 음모, 고문과 사법 살인과 화형 따위가 줄거리를 이루고 있다.
이 모든 이야기의 출발과 계기는... 17세기 중엽 프랑스 소도시 루덩의 한 수녀원에서 발생한, 전대미문의 불가사의한 사건.
이 책을 두고 주요 언론의 반응은 이러했다.
“헉슬리는 17세기 마녀 사냥 전성기에서 가장 소름 끼치는 사건들 중 하나를 기교와 박식과 공포를 가지고 재구성했다. <루덩의 악마들>에는 매력과 박식과 직관과 지적 활기가 차고 넘친다.” - 타임
“행위의 모티브 분석과 무의식적인 원인들 설명, 왜곡된 종교적 감정의 폭로, 악마 숭배, 집단 광기, 성적 억압 등에 관한 이 이야기에는 그의 글쓰기에 애초부터 담겨 있는 광채가 모조리 녹아 있다.” - 스펙테이터
“이 책은 헉슬리 최고 작품으로 꼽아도 손색이 없다.” - 가디언
“여태껏 나온 영성 관련 서적들 중 가장 흥미로운 책일지도 모르겠다. 알지도 못하는 성직자를 산 채로 화형에 처하는 데 한 몫을 한 수녀들과 17세기 수녀원의 괴이쩍고 외설한 실제 이야기에서… 헉슬리는 신비주의와 무의식에 관한 정보를 깊고 폭넓게 술술 전달한다.” - 워싱턴 포스트
2
올더스 헉슬리는 조선반도에서 동학농민운동이 불붙던 해 런던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쯤 떨어진 써리 주 고달밍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를 셋째 아들로 본 집안은 그즈음 영국 사회에서 새로이 떠오르는 ‘지적 귀족’. 부계로도 모계로도 저명한 과학자와 작가, 화가들이 있었다.
동물학자인 조부 토마스 헉슬리는 다윈의 동료요 진화론 옹호자로서 영국 교양 계급에 비상한 영향을 끼치며 과학 대중화의 선구자로 명성을 떨쳤다. 셋째 손자를 보고 이듬해에 타계한 그는 그 삼십여 년 전 창조론 옹호자들과 벌인 논쟁에서 멋진 승리를 거뒀다.
“진실을 두려워하는 인간이기보다는 차라리 두 원숭이의 자손이 되는 편이 더 낫겠소!”
그 뒤로 그에겐 ‘다윈의 불독’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부친 레너드는 교사, 저술가, 저널 편집인, 모친 줄리아는 교양 높은 여성으로서 기숙학교를 설립했다.
올더스 헉슬리의 외증조부 토마스 아놀드는 영국 교육체계 확립에 크기 기여한 교육가요 <현대사 강의> 같은 저술을 내놓은 역사가, 영국 국교회의 ‘광교회’ 운동을 주도한 교회 활동가이기도 했다.
또 빅토리아 시대에 두드러진 문학비평가요 문화학자, 시인, 에세이스트인 매튜 아놀드가 헉슬리의 종조부.
과학과 문학을 결합하는 이 대물림은 성장기 올더스에게 거대한 자부심과 사명감의 원천이 됐다. (마지막 에세이 <문학과 과학>에서 두 영역 간의 이해를 호소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미 유년기에 기대와 촉망을 한 몸에 받았다. 그림에 재주 있고, 자연과학에 관심 크며, 시를 지었다.
부친 서재에서 자기형성이 시작됐고, 그의 첫 선생은 어머니였다. 하지만 그 기간은 오래 못 갔다. 의학을 공부하려고 이튼스쿨에 들어가던 해인 열네 살 때 어머니를 암으로 여의었다. 그 이태 뒤 점상각막염에 걸려 18개월 동안 사실상 맹인으로 살았으며, 가문의 전통인 자연과학자나 의사가 되려던 꿈을 접어야 했다.
(일곱 살 많은 큰형 줄리안은 나중에 우생학자로서 20세기 중반 진화론적 종합 이론에서 선도적 인물이 되고, 유네스코 초대 사무총장을 지낸다. 또 이복아우 앤드루는 1963년 생리의학 부문에서 노벨상을 받는다.)
"알려진 것들이 있고 미지의 것들이 있는데, 그 사이에 지각의 문이 있다."
특수 안경을 착용하고 겨우 보이게 된 한쪽 눈으로 책을 읽고 루이 브라유의 점자도 익혔다. 시력 문제에도 불구하고, 1차 대전이 발발하기 한 해 전, 옥스퍼드대학 베일리얼 칼리지에 입학해 영문학을 전공.
손상된 시력을 극복하려는 노력은 이 시기에 가히 초인적이었다. (1942년에 쓴 에세이 <The Art of Seeing>에서 베이츠의 시력 강화법을 열렬히 옹호하는데, 그건 다 직접 경험에서 나온 것.) 치명적인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대학 시절 주변에서는 그를, 특히 지력과 창의력 면에서, 다들 천재로 간주했다.
1916년 22세에 대학을 마친 뒤 부친에게 더 이상 신세지지 않으려고 몇 해 동안 몇몇 가지 일을 했다. 런던 국방부에서 근무하고, 이튼스쿨에서 한 해 프랑스어를 가르쳤다. (에릭 블레어라는 학생은 나중에 조지 오웰이라는 필명으로 이름을 떨친다.)
1차 대전 중 많은 시간을 보낸, 오톨라인 모렐 부인의 가싱턴 농장에서 노동자로 일하며 부인의 친구가 됐다. 이 저택에 D. H. 로렌스, 버트런드 러셀, T. S. 엘리엇 등이 모여 담소 나누고 글을 쓰기도 했다. 미술 평론가 클라이브 벨, 화가 마크 거틀러 등 블룸스버리 멤버들 뿐 아니라 벨기에 망명인 마리 니스도 이 농장에서 만났다. 1919년 그의 아내가 됐다.
몇몇 매거진과 저널에서 편집과 건축, 음악, 연극, 회화, 서적 비평을 담당했다. 첼시 독서클럽 사서로 일했다. 하지만 이런 일들은 다 오래 못 갔다. 20년대 초 문필과 문학이 그의 소명이 됐으니까.
모르는 누군가와 자연스럽고 편하게 얘기 나눈다는 것이 수줍음 많은 이들에겐 놀라운 일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건 자신감 증대에 크게 도움 되며, 나아가서는 <효과적인 소통 방법>의 시작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안면 트고 인사 나누고, 대화를 시작하고 엮어 가는 훈련의 기본 접근법을 알아본다.
# 낯선 사람과 대화하는 실습
먼저, 낯선 사람과 대화하기를 겁낼 필요는 없다.
심각한 문제를 두고 논쟁하는 게 아니지 않는가.
가벼운 말을 건네고 상대방이 하는 말을 듣고 또 내 얘기를 하면서, 몇 마디만 주고받으면 충분하다.
어떤 상황, 어떤 순간에 사람들이 늘 대화하려 드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감안해야겠다. 이건 정상적인 현상이다. 따라서 trial balloon을 띄우듯이, 상대방 의향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방법 1.
상대방이 소통할 의향이 있는지, 그럴 기분인지 아닌지를 짧은 어구나 한 단어로 알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낯선 사람과 함께 승강기에 타게 됐을 때 가장 일반적인 얘기를 꺼낸다.
"날이 갑자기 차가워졌어요" 혹은 "눈이 내릴 것 같네요" 등등.
상대가 응할 기미를 보이지 않으면, 굳이 소통하려 들 필요가 없다.
가벼운 몇 마디를 주고받으려는 시도에 기꺼이 반응하는 이들만 택하면 된다.
이 훈련 역시 난이도를 조금씩 높일 필요가 있다. 승강기에서 잘 아는 이들과 얘기 나누는 것부터 시작한다. 그 다음엔 조금 아는 사람들과, 또 그 다음엔 낯선 사람들과. 승강기에서 대화 엮는 훈련이 웬만큼 됐다면, 이제 (은행 창구 앞이나 상점 등) 줄에 서 있을 때 낯선 사람들과 대화하는 훈련으로 넘어간다.
방법 2.
자신감을 키우고 매끈하며 균형 잡힌 대화 나누는 법을 익히려면, 집에서 따로 더 훈련해야 한다.
어떤 것이든 (하다못해 조반으로 뭘 먹었는지 등) 이야기 주제를 택하여 5-6분 동안 고양이나 애완견, 금붕어를 앞에 두고 신나게 얘기한다. 하다못해 거울한테 신나게 얘기하라.
방법 3.
컴플리멘트는 대화 시작에 늘 좋은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상대방한테서 정말 좋은 점을 찾아내면 자연스러운 컴플리멘트를 끄집어내기 좋다.
상대방의 옷차림이나 헤어스타일이 잘 어울린다고 말하거나, 그 곁에 있는 어린애가 아주 귀엽다고 칭찬하라. (이때 컴플리멘트가 아부처럼 들리게 해선 안 될 일이다.
상점에서 곁에 있는 다른 구매자에게, 이 제품을 잘 아는지, 어떻게 이용하면 좋은지 등을 물어보라. (많은 경우, 상대는 기꺼이 알려줄 것이다.) 카페에서 종업원에게 물으라. "메뉴에 있는 이 음료는 무엇으로 어떻게 만드나요." 판매인들과 얘기 나누며 조언을 청하라. 약국에서 더 효능 좋은 연고를 추천해 달라고 청하라.
묻기만 하고 안 살 것이라 해서 물어보기를 주저하지 말라. 당신이 꼭 물건을 사야 한다고 생각하지 말라.
통계를 보면, 상점에 온 사람들 가운데 5%만 물건을 산다고 한다.
게다가 많은 경우, 물건을 더 많이 판다고 해서 보너스가 돌아가는 것도 아니기에, 판매인들은 당신이 뭔가를 사든 안 사든 크게 개의치 않는다.
대화를 지속하는 방법
대화를 활기차게 유지하면서 지속하는 방법에도 나름의 기술이 있다.
그걸 익히고 효과적으로 적용하면 된다. 먼저 가장 간단한 기술 두 가지만 알아보자.
사실, 이 정도만 잘 소화해도 유쾌한 대화 상대라는 평판을 얻기에 충분하다.
방법 1.
육하원칙(六何原則)에 충실한 질문 방법.
사람은 거의 누구나 말하기를 좋아하고, 자기가 하는 말을 상대가 잘 들어주기를 바란다.
누가? 무엇을? 언제? 어디서? 어떻게? 왜? - 육하원칙에 의거한 질문을 던짐으로써 상대방 이야기에 물꼬가 터지게 하면 좋다.
넌 그걸 언제 알았어? 이걸 누가 너한테 선물한 거야? 이걸 어떻게 해낸 건데? 이걸 어디서 찾았어? 왜 이 학교를 택했니?
방법 2.
앵무새 흉내. 당신이 들은 말을 (상대가 한 말을) 반복하는 것도 대화 유지에 아주 좋다.
상대방 얘기의 마지막 2-3단어를 그냥 반복하되, 질문 형식으로 한다.
그러면 상대는 자신의 모놀로그를 계속할 것이고, 당신은 잘 듣기만 하면 된다.
상대방은 당신을 '유쾌한 대화 상대'로 여길 것이 분명하다.
좋은 판매인들은 이런 기법을 알고 널리 이용한다. 그리하여 고객의 진짜 동기를 간파한 뒤 구매하는 쪽으로 노련하게 이끈다. 자신감은 저절로 생기지 않아.
자신의 부족한 점을 채우고 다듬어 가는 작업에서 가장 힘든 점은 - <자신의 편안한 영역>을 벗어나서 움직여야 한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내면의 목소리가 ‘넌 이걸 꼭 해야 돼, 하지만 오늘은 아니야’ 하고 떠들어대기 쉽다.
그 말을 듣지 말라.
의지를 내보이라.
오늘 하루 미루다 보면 내일도 미루게 되기 십상이다.
싸우겠다고 단호하게 결정 내리면 이미 90%는 승리한 것이라고, 무장들은 말한다.
행동에 착수하라, 그 결과에 당신은 곧 놀랄 것.
자신감이란 하다못해 사소한 성취라도 맛본 뒤에야 비로소 나타난다. - Maxwell Maltz (1889-1975)
긍정적인 성과를 직접 거두는 맛을 보기 전에는, 새로운 일이 다 힘겹기 마련이다. 무엇을 시작하든지 모든 일이 다 그렇다.
자전거 배우기, 많은 사람 앞에서 말하는 기술 익히기, 외과 전문의가 되기...
작은 성취 하나하나가 더 큰 성공으로 나아가는 디딤돌이 될 것이다.
그러니 ‘수줍음을 어떻게 극복하지?’ 하고 중얼거리지만 말고, 그런 본보기며 사례를 그냥 따르는 것이다. 작은 것부터 시작하고, 처음에 작은 승리를 몇 가지 이루라. 성공적이며 자신감 충만한 사람이 되는 가장 확실한 길이다.
수줍음이나 소심함, 쭈뼛거림, 축기 따위를 매일 조금씩 털어내는 데, 인내가 필요함은 물론이다. 변화를 위해 자신에게 시간을 좀 들이라. 그리고 자신을 늘 다독이고 칭찬하라. 그러면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두게 될 것이다.
수줍음 타는 사람들에게 가장 큰 고민거리는, 그것이 전반적인 자신감 부족으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 접촉하고 소통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수줍음이나 소심함 따위를 금방 떨치기는 어려우며, 자신감 갖추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간단한 테크닉을 몇 가지 소개한다.
수줍음을 떨치고 자신감을 더 키우고 싶다면, 방법은 단 하나 - 꾸준히 실습하고 실행하는 것.
자신을 연마하는 작업, 어떻게 시작하나
대체로 모든 변화는 생각에서 시작된다. 자신감 강화도 예외가 아니다.
만약 정말로 자신감 충만한 사람이 되기에 관심이 있다면, (낮은) 자기평가를 바꾸고, 다른 사람들이 당신에게 흔히 덧씌우는 낙인을 떼어내야 한다.
날마다 자신이 해낸 것을 기록한다. 즉, <성취 일지>를 작성한다.
자신의 행동과 반응을 면밀하게 살피고 연구하라.
그리고 아주 간단하면서도 가장 중요한 목표 세우는 방법을 익힌다. 즉, <오늘은 어제보다 조금 더 많이 실행하기>.
실습을 제대로 수행하는지 확인하고 박차를 가하기 위해서는 이런 방법을 써도 좋겠다. 오늘 실행하기로 계획한 만큼 작은 물건들을 (구슬, 염주 알, 성냥개비 등을) 한쪽 호주머니에 넣어 두고, 그것을 할 때마다 물건을 다른 주머니로 옮기라.
자신감 강화 방법 – 자신을 연마하는 간단한 기술
아래 제시한 실습은 수줍음 타는 사람들을 위한 것.
어쩌면, 아주 간단한 행위조차 그들에겐 어려워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신감 수준을 더 높여야겠다고 느끼는 이들 누구든 역시 이 실습을 수행할 수 있다.
실습 수행의 일반적 방법 - 더 쉬운 것부터 시작하고, 덜 두려운 것에서 더 겁나는 것으로 서서히 나아가기. 즉, 당신에게 불편함과 거북함을 가장 적게 일으키는 접촉이며 소통부터 시작한다. 그 다음에 좀 더 큰 불편함이 따르는, 조금 더 어려운 과제를 수행하기.
여기 제시하는 실습을 여러 난이도로 실행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집에 데리고 있는 고양이나 개와 접촉으로 시작한 뒤, 아이들을 상대로 한다. (이것 역시 아주 어린애부터 시작하는 게 좋다. 갓난애 - 유치원 - 초교생 - 틴에이저.) 그 다음에 노인들을 상대로 실습한다. (많은 노인들은 외로움을 타기에, 스스로 접촉하고 소통하려 들 것이다.)
그런 뒤에 비로소 ‘난이도를 더 높여서’ 전혀 모르는 사람들을 상대로 실습할 수 있다. 이때도 당신한테 두려움을 일으키지 않는 사람들부터 시작한다. 예를 들어, 택시 기사, 마트 계산원, 각종 서비스 종사원 등.
실습 1. 눈길 맞추기
먼저 습득해야 할 것 - 사람들 눈을 바라보는 방법 익히기. 흔히 장난삼아 자주 하는 ‘눈싸움’을 앞에 기술한 대로 해 보자. 이런 트릭을 이용하면 소심함을 더 쉽게 극복할 수 있다.
수법 1. 가장 간단한 것부터 시작한다. 즉, 상대방 눈을 바라보면서 셋까지 센 뒤 눈길을 돌린다.
수법 2. 상대 눈을 보면서 속으로 말하라. ‘넌 내 마음에 들어.’
이때 내면에서 따스한 느낌이 생기고 얼굴에 가벼운 미소가 피어난다.
속으로 그렇게 말하고 바라보다가 눈길을 돌린다.
이 방법은 상대방을 응시하는 솜씨를 키우는 데 아주 좋다.
수법 3. ‘눈싸움’도 시선 접촉의 두려움을 극복하는 좋은 방법.
이 게임 덕분에 시선 접촉에 아주 빨리 익숙해질 수 있다. 친구들한테 "눈싸움 한번 해 볼래?" 하고 청하라.
더 어려운 버전 - ‘눈싸움’에 대화를 집어넣는다. 이때 초시계가 필요해. 눈길을 짧게 보냈다가 돌리는 것으로 시작한다. (눈길 보내는 시간을 점차 1분까지 늘린다). 그리고 대화를 나누면서도 계속 바라본다.
이런 방법을 꾸준히 실습하여 익숙하게 만든다.
버스나 지하철에서 다른 승객들의 눈을 바라보는 연습을 하라.
그 다음에 응시 대상을 동료들과 직장 상사들로 옮기라. 그런 뒤에 거리에서 모르는 사람들을 상대로 해 본다.
실습 2. 미소
다음 단계는 미소 짓는 법.
사람들한테 아무 말 없이 미소 짓는 법을 연습하라. 여기에도 실습을 쉽게 하는 수법이 있다.
수법 1. 미소 짓는 습관을 굳히는 좋은 방법이 있다.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가 내쉬면서 미소 짓기. 이것을 연습한 뒤, 좀 더 어려운 과제를 수행한다.
즉, 코만이 아니라 두 눈으로도 숨을 내쉰다고 상상하는 것. 그러면 눈에서도 미소가 나타난다.
수법 2. (버스나 지하철, 공원 벤치, 사무실 책상 등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시작하라.
그들을 바라보고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쉬면서 가볍게 미소 짓는다.
수법 3. 이것은 이미 앞의 실습에서 알려진 수법의 반복.
상대방 눈을 바라보면서 속으로 말하라. ‘당신은 내 마음에 들어요.’ 혹은 '난 당신이 좋아요.'
얼굴에 미소가 금방 피어날 것.
수법 4. 계기를 찾으라.
상대한테서 특별하거나 재미나거나 유쾌한 뭔가를 보려고 애쓰라.
그걸 알아내자마자 금방 미소가 떠오를 것.
미소가 나오게 되는 좋은 계기는 우스꽝스러운 말, 귀여운 아이, 당신을 향한 미소 등.
수법 5. 거울 앞에서 훈련하라.
이때 얼굴에 조명이 잘 돼야 한다.
거울 속 자신에게 미소 지으라.
그 다음에는 여러 모로 미소를 지어 보라. (가벼운, 빈정대는, 섹시한, 장난기 섞인, 우울한 미소 등등).
이때 자신의 느낌을 포착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을 아는 법을 익히고, 자기감정을 어떻게 드러내는지 보게 될 것이다. 자신의 느낌을 명확히 인식할 수 있을 때, 미소를 조절하면서 여러 감정을 담을 수 있게 된다. 더 자주 미소 지을수록, 더 쉽게 미소가 나오겠지.
이 실습이 마음에 들었나요?
자신감 강화하는 방법을 좀 이해하게 됐나요?
일단 이런 실습으로 훈련하세요. 이 훈련은 지속적으로 수행해야 한다는 점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그러면 다음 단계로 넘어갈 때 이미 어떤 경험이 많이 쌓이겠지요. 그리고 다음 기법들을 쉽게 습득할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이것 때문에 생활에 불편을 겪는 이들이 적지 않다. 결국은 자신감 부재나 부족으로 이어지니까.
수줍음에는 경우에 따라 긍적적인 측면도 없지는 않지만, 대체로 이건 우리가 떨쳐내야 할 인간 속성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그 원인을 파악하고, 극복 방법을 알아 일상에서 조금씩 고쳐 나가면 된다.
그 이전에 <나의 수줍음 정도>는 어떤지 알아보자.
아래에 60개 항목이 있다.
사람들이 느끼고 겪는 주된 두려움을 망라했다.
이건 또 <자기 평가>의 거울이라 할 수 있다.
이걸 살펴보고, 일상의 여러 분야와 구체적인 방향에서 자신의 일반적인 두려움 수준을 판단할 있을 것이다.
여기서 고려할 것은, 두려움에는 우리가 인식하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이 있다는 점.
모든 서술을 주의 깊게 읽으시라.
각각이 당신과 어떻게든 연관되며, 어떤 수준에서는 들어맞을 수 있다.
또는 그렇지 않은 것도 있을지 모른다. 즉, 당신과 무관한 것이 있을 수도 있다.
서술에 100% 동의하면 - 우측에 10점을 매기라. 당신 상황에 딱 맞는다는 뜻이다. 전혀 동의하지 않으면, 0점. 절반쯤 동의하면, 5점. 절반 이상 동의하면 - 수준과 정도에 걸맞게 6, 7, 8, 9점. 절반 이하 동의하면 - 역시 수준과 정도에 걸맞게 4, 3, 2, 1점으로 매기라.
이런 식으로 하면 적절하겠다.
각각의 서술을 읽으면서, 해당되는 경우를 5~10가지 떠올린다. 그리고 그런 경우에 당신 행동이 (느낌이) 얼마나 서술에 부합됐는지 생각하고 결정하는 것. 예를 들어,
여러 사람들과 나눈 대화 10번 가운데 평균 5번에서 나는 당혹감을 맛본다. 10가지 일 가운데 3가지에서 난 리스크를 무릅쓴다. 10번의 밤 가운데 한두 번 악몽을 꿀 수 있다. 등등.
각 서술에서 자기 평가 점수를 매겨 합산한 뒤, 다음 포스트에 소개하는 분석을 보라.
이 테스트는 오로지 자신과 자신의 관심사를 두고 하는 것인 만큼, 자신에게 최대한 객관적으로 대할 필요가 있다. 혹시, 이 테스트에 나오지 않는 두려움이 당신에게 있을지도 모른다. 원한다면, 그런 것들의 점수도 추가하라.
<상황 서술>
1) 아침부터 괜히 풀이 죽어서 자신감 없음을 느끼는 경우가 잦은 편이다.
2) 일반적으로, 뭔가에 억눌리고 묶이고 강제되어 불편하다는 느낌이 크다.
3) 흥분하여 감정이 격앙될 때, 심장 고동이 빨라지고, 호흡이 가쁘게 되며, 떨리고, 식은땀이 나고, 몸이 굳으면서 뭔가 불쾌한 느낌이 생긴다. (하나라도 해당되면, 점수를 매기라.)
4) 사람들과 대화하면서 많이 당황하는 편이다.
5) 여러 분야에서 대체로 위험 부담을 (리스크를) 피하는 경향이 있다.
6) 실패할까 염려가 커서,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 어렵다.
7)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믿을 만하지 못하다고 본다.
8) 나한테 위압적으로 작용하는 사람들이 있다.
9) 시험 치를 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말할 때, 중요한 만남을 앞둘 때, 걱정과 두려움이 들어 동요한다. (하나라도 해당하면, 점수를 매기라.)
10) 자신의 죽음을 겁낸다.
11) (부모, 자녀 등) 가까운 이들의 삶과 건강을 늘 걱정한다.
12) 이유 없이 불안해질 때가 더러 있다.
13) 가끔씩 막 미칠 것 같다는 느낌에 빠진다.
14) 걷잡지 못할 공포 (패닉) 상태를 겪은 적이 있다.
15) 나에게 삶이란 죽음만큼이나 괴롭고 두렵다.
16) 사람이든 사물이든 어떤 대상과 오랫동안 관계 맺기를 피한다.
17) 비행기나 지하철, 버스, 자동차에 타고, 승강기 안에 있는 게 겁난다. (하나라도 해당되면, 점수를 매기라.)
18) 어둠이 무섭고, 불이 없는 공간을 피하며, 지하실이나 동굴에 내려가기를 피한다.
19) (거미, 뱀, 바퀴벌레, 개, 고양이 같은) 동물을 보거나 접하면 걷잡을 수 없는 공포나 혐오에 빠진다. 어떤 사람들도 그렇다.
20) 가까운 이들, 사랑하는 이들과 떨어져 있는 것을 겁낸다, 심지어 길지 않은 동안이라도.
21) 완전히 혼자가 되면 마음이 영 불편하고 힘들다.
22) 밤 11시 넘어 집에 돌아가게 되면, 늘 픽업하거나 배웅해 달라고 부탁한다. (여성 경우)
23) 거리에 있을 때면 시비에 말려들까, 공격이나 강탈, 폭력을 당할까 겁나는 경우가 많다.
24) 여자 친구와 걸을 때, 공격받을 수 있는 곳은 피하려고 한다. (남성 경우)
25) 누군가가 부당하게 얻어맞고 모욕이나 조롱당하는 걸 보면서도 나서지 못한 적이 있다.
26) 누군가가 명백히 거칠게 굴고 무례하게 대하며 공격했는데도 적절히 대응하지 못한 순간을 떠올리면 불쾌해진다.
27) 직장 보스나 교사, 의사, 부모, 경찰 앞에서 두려움을 느낀 적이 있다. (하나라도 해당되면, 점수를 매기라.)
28) 지하도로 들어섰는데 낯선 젊은 남자들이 앉아 있다면, 누군가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함께 가는 편이다.
29) 피 흘리는 모습이나 드러난 상처를 보는 것은 힘들다.
30) 주사, 치과 치료, 귀나 눈 같은 신체 부위의 의료 행위 등을 겁낸다. (하나라도 해당되면, 점수를 매기라.)
31) 섹스를 앞두고 겁낸 적이 있다. 겁낸다.
32) 불안감을 떨치려고 더 많이 먹고 마시고 약물을 복용한다. (하나라도 해당되면 점수를 매기라.)
33) 내 건강 상태를 자주 염려한다.
34) 암이나 에이즈, 심장마비, 뇌졸중 등에 걸릴까 두렵다. (하나라도 해당되면...)
35) 응급 의료 지원을 받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할까 봐 염려한다.
36) 혼자만 있으면, 잠을 설치고 불안하고 마음이 편치 않다.
37) 문을 잠갔는지, 가스와 전등을 껐는지, 필요한 것을 챙겼는지, 몇 번이고 확인하는 일이 생긴다. (하나라도 해당되면 점수를 매기라.)
38) 모든 것이 잘 되게 하려고, 남들이 보기엔 불필요한 행위를 할 때가 더러 있다.
39) 무슨 안 좋은 일이 나한테 생겼다면, 다음부터는 그런 상황과 그런 사람들, 그 일을 연상시키는 것을 죄다 한사코 피한다.
40) 악몽을 꾸며 잠을 잘 못 잔다. (가끔… 종종…)
41)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여 돈과 식량, 옷가지, 물건 등을 비축해 두려 애쓴다. (하나라도 해당되면 점수를 매기라.)
42) 돈이 바닥나는 경우가 생길까 불안해 하며, 충분히 있다 해도 돈을 잘 안 쓴다.
43) (돈, 음식, 담배, 와인 등) 여분이 떨어지면 아주 불안하다. (하나라도 해당되면 점수를 매기라.)
44) 천둥, 폭풍, 지진, 전쟁, 화재 등을 걱정한다.
45) 마법, 저주, 흉안, 악령, 최면술 등을 두려워한다. (하나라도 해당되면 점수를 매기라.)
46) 알지 못할 이유로, 근거가 전혀 없어 보이는데도, 남들과 달리, 두려워하는 뭔가가 (누군가가) 내 삶에 있다. (여하한 물체, 사람, 사건, 존재 등)
47) 현기증, 균형 상실, 의식불명, 수술 때 마취 등을 두려워한다. (하나라도 해당되면 점수를 매기라.)
48) 괜찮다 싶은 어떤 일도 리스크 때문에 착수를 결정하하는 게 무척 힘들다.
49) 나의 여러 생각이 두려울 때가 더러 있다.
50) 다른 사람들 눈에 체면 구기고 모양 빠질까 염려하며, 조롱의 대상이 되는 것은 나에게 치욕적이고 끔찍하다.
51) 근거도 없는, 혹은 근거가 조금 있는 죄책감이나 수치심을 가끔 맛본다.
52) 잘 알며 가까운 사람들하고만 접촉하기를 더 좋아한다.
53) 집에 혼자 있을 때만 아주 안전하게 느낀다.
54) 주변 사람들한테 나는 기본적으로 나쁜 인상을 풍기는 것 같다.
55) 이성과 접촉이나 교제를 최대한 피한다.
56) 주변 사람들 의견과 그들이 내뱉는 말에 신경이 많이 쓴다.
57) 버스나 지하철에서는 다음 내릴 곳을 앞두고 미리 출구 쪽으로 가 있으려고 든다.
58) 나를 빤히 쳐다보면 기분이 나쁘다.
59) 누군가를 사랑하거나 누군가한테 사랑받는 것을 두려워한다.
60) 내가 뭔가를, 누군가를 겁낸다는 것이 겁나며, 두려워하는 상태가 두렵다.
*좀 복잡한가요? 최대한 객관적으로 자신을 평가해 보는 것도 필요한 일입니다. 당신의 경우, 몇 점이 나왔나요?
지구 상 인간의 절반을 차지하는 남자들과 또 다른 절반을 차지하는 여자들 간의 소통은 꽤나 어려운 주제에 속한다.
그 소통은 대체로 원활하지도 못한 편인데, 거기엔 굵직한 이유가 있다.
남자들과 여자들이 상당히 다른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는 <남녀 간 원활한 소통> 문제를 다루기 위해, 먼저 그 차이를 살펴본다.
길바닥에 널려 있는 돌멩이도 똑같은 게 하나 없을 정도로 세상 모든 것은 다 제각각으로 다양하다. 그 여러 다양함 가운데 금방 눈에 띄는 것은 바로 남녀 차이. 이건 그저 겉으로 드러나는 젠더 징표들에 국한되는 게 아니다. 알고 보니, 같은 이름의 장기들도 남녀 간에 다소 달리 작동하고, 신진대사 수준이며 호흡 빈도, 심장 고동, 혈액 구성 등이 다 다르다.
그 차이를 이런 면에서 비교해 본다. 이를테면… 지각 특성, 논리, 직관, 기질, 신경계, 관찰력, 적응력, 주변 사람들과 관계, 관심사, 평가, 신체지수, 사유 방식, 적극성, 일과 진취성 측면에서.
여기 비교하는 차이는 물론 평균적이고 전형적인 남자와 여자의 경우를 염두에 두는 것. (어떤 남자보다 남성적인 특징을 갖춘 여자도 더러 있고, 거꾸로 다른 여자보다 더 여성스럽게 보이는 남자도 가끔 있다. 나아가서, 극히 드문 경우지만, 남녀추니가 있기도 하고. 그런 경우들은 다 예외적인 것으로 치부한다.)
지각(인식) 특성
지각 측면에서, 남자에겐 눈으로 보는 것이 중요한 반면에, 여자에겐 말소리의 지각과 관련된 인상이 큰 부분을 차지한다. 그래서 이런 격언도 나온다. “남자는 눈으로 사랑하고, 여자는 귀로 사랑한다.”
지각하는 속도와 두뇌 회전에서는 여자가 남자를 압도한다. 예를 들면, 여자가 남자보다 읽는 속도가 더 빠르며, 읽은 것을 아주 상세하게 더 잘 기술할 줄 안다. 대체로,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더 빨리, 더 잘 기억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직관 (본능, 직감, 육감)
남자들은 상황을 전체적으로 포착하고 평가하는 반면에, 여자들은 디테일에 주목하는 경향이 크다. 예를 들어, 어떤 책을 사겠다고 결정하는 과정에서 남자와 여자는 다르다. 남자들은 대다수가 목차를 꼭 읽는다. 여자는 흔히 몇 쪽을 펼쳐서 무슨 내용이 어떻게 담겨 있는지 훑어본다. 그리고 구입 여부를 결정한다.
디테일에 관심이 크기 때문에 여자가 남자보다 관찰력이 훨씬 더 좋은 것이며, 바로 이런 측면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여성적 직관(직감, 육감)의 바탕인 것. 여자들은 어떤 주장의 근거로 흔히 “내가 그렇게 느끼니까” 하고 말한다. 이런 본능이 틀리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만약 여자가 (어떤 경쟁적인 여성을 두고) "내 느낌에 그녀한테는 남자가 있는 것 같아" 하고 말한다면, 열에 아홉은 들어맞는다. 비록 객관적인 근거를 들이대지는 못한다 해도. <정글 북>의 작자인 키플링(1865~1936)도 이미 지적한 바 있다. "여자의 짐작(직감)은 남자의 확신보다 더 정확해."
디테일에 치중하는 바람에 정작 중요한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경우도 더러 있기는 하다.
– 영희야, 오늘 어디 다녀왔어?
– 대통령 집무실을 구경했어.
– 오, 그래? 거기서 뭘 봤는데?
– 카펫 위에 쥐가 있는 걸 봤지.
하지만 테스트 결과를 보면, 여자가 직감으로 맞추는 확률이 남자의 엄밀한 논리적 분석보다 덜하지 않다고 한다. 시간과 노력을 덜 들이고 그 정도라면, 여성의 직감이 더 우수한 것이 아니겠나.
관찰력
보통 상황에서 관찰력 크다는 것이 여성의 특징. 한데, 스트레스와 위험이 도사린 상황에서 여자는 당황하여 그 뛰어난 관찰력을 잃는다. 반면에, 남자들 경우 위험 상황에서 관찰력이 더 커진다.
여자들은 표정과 제스처, 눈길을 접하면서 상대방을 더 빠르고 쉽게 이해할 수 있으며, 이것이 바로 섬세한 여성적 직감의 본질이다. 그렇기 때문에, 남자는 여자를 속이기가 아주 어렵다. 반면에, 여자는 남자를 아주 쉽게 속인다.
파트너를 잘 속인다고 여기는 남자들은 큰 착각에 빠져 있는 셈이다. 왜? 왜냐하면 여자가 표현하지 않는다 해서 의심도 하지 않는 것이라 여기면 오산이니까. 뭔가 수상하다고 느끼면서도 여자가 아주 종종 침묵하는 까닭은, 남자와 관계가 깨지지 않게 하기 위함일 뿐.
기질
심리학자들 관찰 결과, 남자들에겐 발끈하는 기질이 더 크다. 욱하기 쉬운 기질을 ‘남성적 기질’로 볼 수 있다. 여자의 본질에는 쾌활한 기질과 우울한 기질이 더 어울린다. 기분 상태가 아주 빠르게 바뀐다. ('여자의 변덕'은 바로 이런 기질에서 나오는 것). 대체로 여성은 불행할 때만 공격적인 모습을 취하게 된다. 남자의 단호함과 모험성에 여자의 조심성이 보충되면 이상적이겠지.
감성
대체로 여자가 남자보다 훨씬 더 감성적이다. 남자들은 감정 표출을 스스로 억누르지만, 여자들한테는 그렇게 요구해 봤자 먹히지 않는다.
여자의 기분과 내적 분위기는 변화 폭이 엄청나게 크다. 그래서... "모든 여성은 지상의 천사야" 하는 속담이 있지만, "사악한 여자 앞에서 사탄은 순진한 핏덩어리에 불과해!" 하는 속담도 있는 법.
여성은 할 수 있을 때 웃고, 하고 싶을 때 운다. 어떤 사건들을 여자는 더 개인적인 태도로 대한다. 바로 이런 점들 때문에 여자들에겐 상상력과 판타지가 상당히 발달돼 있다.
여자는 표정을 더 자주 바꾸고, 수십 가지 다양한 감정을 드러낼 줄 안다. 반면에, 남자는 대체로 두 가지만 인식할 수 있다. 혐오와 무관심. 여자들 경우, 입 귀퉁이 주름이 특히 기민하게 움직인다. 삐쭉빼쭉, 씰룩씰룩...
신경계와 적응력
여성 신경계는 덜 견고해. 그래서 어떤 감정 상태에서 다른 쪽으로 빨리 이동한다. 바뀌는 상황에 적응하는 능력에서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뛰어나다.
애정에 대한 태도
여자도 남자도 상대방에 담겨 있는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 여자는 남자가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에 남자를 사랑하고, 남자는 섹스의 만족을 주기 때문에 여자를 사랑한다. 남자와 하룻밤을 보내기 전에 여자는 자기를 그가 사랑하는지 알기 원하는데, 남자는 하룻밤을 보내고 나서야 자신이 여자를 사랑하는지 알 수 있다.
이건 다 왜냐하면, 여자한테는 사랑이 목적이고 섹스는 수단인데 남자에겐 그 반대이기 때문이다. 남자한테는 섹스가 목적이고 사랑은 수단인 것.
여자는 많은 것을 원하지만, 한 남자한테서 원한다. 남자는 한 가지를 원하지만, 여러 여자한테서 원한다. 여자는 사랑을 고백하기보다 사랑에 빠지기가 더 쉽다. 남자는 사랑하기보다 사랑을 고백하기가 더 쉽다.
"남자들은 자기네가 존중하는 여자들을 대개 사랑하고, 여자들은 자기네가 사랑하는 남자만 존중한다." (끌류쳅스끼, 러시아 역사가).
(물리력 이외에) 다른 신체 변수들
여자들은 손재주, 지각 속도, 반응, 말 속도, 촉각에서 남자들을 압도한다. 남자들은 운동 기능 조정과 공간 감각이 여자들보다 더 뛰어나다.
여자들은 남자보다 두 배쯤 덜 앓는다. 비록 건강을 더 염려하고, 어디가 시원찮다고 훨씬 더 많이 하소하지만. 여자들이 평균 7-15년 더 오래 산다. (원인은 생략).
여자들 경우 기형이 더 적고, 발육 부진 경우가 덜하다.
자살자들 경우 여자가 남자보다 3-4배 더 적다.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아픔을 더 잘 견디며, 단조롭고 반복되며 재미없는 일도 더 잘 해낸다.
남자들에겐 흔히 (코, 구강, 후두 등의) 전정기관이 더 잘 발달돼 있다. 이 때문에 여자들은 대중교통수단에서 등지고 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며, 진행 방향으로 난 자리를 좋아한다.
관심사
남자들은 업적과 모험, 움직이는 일, 테크놀로지, 과학, 발명에 더 관심 많다.
여자들은 집안 일과 미적인 활동, (아이와 병자 등) 약자들을 도와야 하는 일에 관심이 더 많다.
남자들이 더 젠체하고 공격적이고 고집스럽고 용감하며, 매너와 말과 감정에서 더 날카롭다.
여자들이 더 섬세하고, 동정심 많고, 수줍어하며 더 감성적이다.
추가하자면, 남자들이 정치에 더 관심 많아.
주변 사람들과 관계
여자들은 인간관계를 더 섬세하게 지각하고, 관계의 뉘앙스에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 남자들에게 목적 달성과 성공 욕구가 더 강하다면, 여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주변과의 관계. 주변 사람들에게 눈길 돌림은 진정한 여성다움의 가장 매력적인 특징 중 하나. 남자는 누군가의 눈물 젖은 눈이나 떨리는 입술, 입맛 상실, 평소와 달리 말 없음을 알아차리지 못할 수 있어. 여자한테는 그런 걸 감추지 못한다.
여자들이 상대방 얼굴을 훨씬 더 잘 읽고, 상대방 기분을 더 섬세하게 포착하며, 훨씬 더 민감하다. (신체언어에 남자들보다 훨씬 더 뛰어나다. 협상 활동에서 더 유리하다.) 남자들은 더 공격적이고, 여자들은 사소한 마찰을 더 자주 빚는다.
여자한테는 주변 사람과 관계가 크게 중요하기 때문에, 여자의 말은 남자에 비해 더 완전하고 복잡하다. 대체로 여자들은 문법과 언어에서 더 강하다. 원인은 언어를 담당하는 좌뇌가 더 발달했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