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내용이 당신 마음에 들었나요? 동의하는 생각은 무엇이고, 반박하고 싶은 게 있다면 왜 그런가요? 역사적 인물들의 경구를 따르고 싶지만, 가로막는 것이 있나요? 여기 소개하는 어떤 조언을 생활에서 적용할 수 없다면, 왜 그렇지요?
* *
-모든 화자의 (연설자, 발언자의) 의무는 진실을 설파하는 것. (플라톤) - 만약 달변가가 되기로 작정했다면, 정의로운 사람이 되고 공정무사에 투철해야 한다. (플라톤)
- 진실을 말하는 것은 의지의 문제라기보다 습관의 문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진실의 목소리는 귀에 거슬린다. (노자)
-웅변가의 최고 가치는 필요한 것을 말하는 것만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말하지 않는 데 있다. (키케로) -가장 좋은 화자는 자신의 말로써 청자들을 일깨우고 만족을 주고 강한 인상을 야기하는 사람이다. (키케로)
-많이 지껄이는 것과 많이 말하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니다. (소포클레스) -최대한 짧게, 아니면 최대한 더 유쾌하게. (플루타르코스)
-누군가가 망상에 빠져 있을 때는 다들 그걸 알아차릴 수 있지만, 그가 거짓말을 할 때는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괴테)
* *
선현들의 사유에 눈길을 돌릴 때 우리에겐 언뜻 이런 의문이 생겨요.
-사람들 앞에서 진실을 말해야 한다는 것에 누가 이견을 달 수 있나?
-위선자요 선동가이면서 과연 진실을 입에 올릴 수 있을까?
- 오늘 한 가지를 확언했다가 내일 상대가 잘못 이해했다면서, “그건 오해에요!” 하고 변명하고 합리화하며 자기가 내뱉은 말을 부정할 수 있나?
-그러면서도 또 다음에는 자유와 양심, 정의, 진실에 대해 열정적으로 허튼소리를 떠벌릴 수 있는 건가?
-실현하기 어려운 줄 알면서도 선거 때면 무지갯빛 공약들을 뻔지르르하게 내놓을 수 있나?
-그러면서 또, 다른 사람들이 써준 원고를 들고 기자회견을 하고, 라디오에 나와 목청을 높이고, 티브이에 출연하여 떠들어댄다? 신념에 차고 진실하고 선량하고 정직한 사람처럼 굴면서? 실제로는 위선적이고 하찮은 것에 노여움 타고 적개심과 복수심만 가득하고 무책임한 사람인데도?
“사람들 앞에 나선 화자의 의무는 진실을 말하는 것”이라는 대명제에 그 누가 어깃장을 놓을 수 있으리까?
나아가 불필요한 것을 떠들지 않을 줄 아는 솜씨가 필요할 뿐!
하지만 셀프컨트롤을 어떻게 해야 하나?
지혜와 논거를 갖추고 감성적으로 말하기를 익히고자 한다면, 관찰과 학습 일지를 쓰라고 권유하는 데도 다 이유가 있습니다.
모든 것을 전부 다 말할 필요는 없어요. 아니, 그래서도 안 돼요.
대화나 연설, 기자회견 등에서 늘 자제력을 유지하며 거짓을 말하지 않고, 동시에 예민한 문제라 하여 회피하지 않고, 다른 이들의 인격을 서툰 말로써 건드리지 않을 줄 알아야 합니다.
때로 “그래, 난 직설적인 사람이야! 생각하는 대로 말하지!” 하면서 있는 그대로를 다 끄집어내는 것이 좋다고 여기는 이들이 있는데, 그렇다면 그들은 적어도 소통에서는 메타언어라든가 완곡어법을 좀 생각해야 할 거예요.
하지만 실제에서는 사람들이 거짓말을 어찌나 밥 먹듯이 하는지,이 러시아 극작가는 진실을 말하는 이가 외려 독특한 사람일 것이라고 이렇게 일침을 놓는군요.
사기꾼과 비열한들은 정직하고 성실한 이들에게도 자기네처럼 대하지만,
정직한 이들은 사기꾼한테도 정직하게 대할 때가 많아요.
그러다 보니 협잡꾼들이 정직한 이들을 이기는 경우가 심심찮게 보이는데,
중요한 것은, 그런 승리는 일시적인 것일 뿐이라는 점입니다.
거짓, 거짓말, 속임수, 사기, 협잡… 비슷한 말을 더 이어 보세요.
당신은 거짓말을 자주 하나요? 자기기만이 가장 끔찍한 일이에요.
세상이 아무리 거짓과 협잡에 물들어 있다 해도,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니!” 하는 말과 마찬가지로,
오직 진실 안에서만 우리는 행복도 맛보고 삶의 의미도 깨치게 될 겁니다!
모든 생각의 표출이요 행동의 시발인, 우리네 말에서 진실을 제한다면 남는 건 무엇일까요?
적지 않은 정치인들은 어찌하여 뻔뻔한 거짓말을 그리도 태연하게 늘어놓는 것일까요?
스피치의 세 기둥이 로고스, 에토스, 파토스라는 것을 우리는 이미 맨 앞의 대화에서 알아봤습니다.
그 중에서 화자의 신뢰도와 진정성을 가리키는 에토스에 관해 이야기를 나눠 봅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법>에서 에토스를 신뢰성이라고 정의하면서 이런 말도 했어요.
“우리는 성품이 좋은 사람들을 더 많이 믿는 것 같다.”
그이는 나중에 에토스의 정의를 좀 더 확대해서
“우리는 우리와 비슷한 누군가의 말에 더 솔깃하게 되는 듯하다”
하고 덧붙였습니다. 이를테면,
나이 차이가 크기보다 비슷한 연령대에 있는 사람의 말이 더 설득력 있게 들린다는 겁니다.
그래서 젊은이들하고는 ‘젊은 언어’로 말할 필요가 생겨요.
고대의 현자께서는 에토스의 정의에 (예를 들어, 정부 대표자 같은) 화자의 권위나 (예를 들어, 어떤 분야 전문가의) 평판 같은 개념은 넣지 않았어요. 그건 그이가 속한 시대에 스피치 역할이 현대에 비해서는 제한적이었기 때문이겠지요.
아주 많은 형식의 스피치가 있고 화자에 대해서도 우리가 많은 것을 알게 되는 오늘날, 에토스 정의에 앞의 두 요소도 포함하는 것이 온당할 겁니다. 즉, 에토스란...
(청중이 인식하는) 신뢰성, (청중과) 유사성, (청중이 인정하는) 권위, (이야깃거리에 관한) 전문 지식 (평판) 같은 네 요소로 정의하면 무난하겠어요.
이제 각각의 특징을 살펴볼까요?
첫째, 에토스는 신뢰성
청중은 자기네가 믿는 사람의 말을 더 잘 받아들입니다.
이야기 주제와 크게 상관없이! 청중이 당신을 믿는다면, 그들은 당신이 하는 말이 거의 다 진실일 것이라고 기대해요. 당신의 도덕성이 훌륭하다고 믿는다면, 당신의 신뢰성은 당연히 커집니다. 이 도덕성은 정직, 윤리, 관용 같은 개념들로 측정이 가능해요.
덧붙여서, 만일 당신이 그런 개념이나 자질과 연계된 조직의 일원이라면 청중이 당신을 믿는 경향은 더 커집니다. 성직자나 소방관을 예로 들면 되겠지요.
둘째, 에토스는 청중과의 유사성
청중은 자기네와 동일시할 수 있거나 비슷하다고 느끼는 사람의 말을 더 쉽게 받아들여요.
앞의 신뢰성이 그렇듯이, 이런 요소 역시 이야기 주제와는 별로 상관이 없어요.
따라서 청중의 어떤 특징을 당신이 공유하고 있다면, 아주 좋아요! 그렇지 않다 해도 청중에게 최대한 맞추면 됩니다. (이건 NLP에서 말하는 matching과 같아요.) 이런 문구를 기억해 두세요.
“당신이 청중과 유사하다면 청중은 당신 생각을 더 편하게 많이 받아들일 것이다.
그것은 한밤중에 문밖에 있는 사람의 목소리를 알아들을 때 당신이 더 쉽게 문을 열어줄 수 있는 것과 똑같다.”
-아, 좋아, 알았어. 근데 청중과 뭘 공유해야 하는 건데?
좋은 궁금증이에요. 이런 면을 들어봅시다.
*나이, 젠더, 문화 -예, 중장년들로 구성된 청중은 젊은 화자보다 나이 지긋한 화자한테서 유사성을 보고 동질감을 더 크게 느낄 것.
*사회적, 경제적 위치 -빈부, 교육, 계층.
*출신 지역 -예를 들어, 도시야, 시골이야?
*커리어나 소속 -청중과 직업이 비슷해? 청중과 같은 조직원?
*개성 -화자는 분석적이야? 감정적? 차가워? 사교적이야?
셋째, 에토스는 권위
(선출된 공직자의) 공식적인 권위나 (달라이 라마의) 도덕적 권위처럼, 화자의 권위가 더 클수록 청중은 더 귀를 기울이고 설득되는 경향이 큽니다. 권위는 화자와 청중의 관계에서 나오며 대체로 인식하기가 상당히 쉬워요.
유형별로는,
--조직적 권위 (CEO, 매니저, 감독),
-정치적 권위 (대통령, 정당 지도자),
-종교적 권위 (신부, 목사, 승려),
-교육적 권위 (교장, 교사, 교수),
-연륜의 권위 (연장자) 같은 것을 봅니다.
한데 흥미로운 점이 있어요. 즉, 모든 화자에게는 (연설자, 발표자, 보고자, 강연자 등에게는) 화자라는 위상에서 나오는 권위가 부여된다는 점.스피치를 할 때, 당신은 종종 청중보다 더 높은 연단이나 무대에 나서고 마이크를 쓰거나 조명을 받기도 합니다. 적어도 그 한때를 통제하는 사람은 당신이고, 그래서 일시적인 권위를 지니게 됩니다.
넷째, 에토스는 평판 (전문 지식)
평판이란 당신이 스피치 주제에 정통하다는 점을 정충이 알고 있을 때 나옵니다.
평판이란 에토스의 네 가지 특징 중에서 얘깃거리와 직결된 것.
당신의 평판은 몇 가지 관련 요소들로 결정됩니다.
*실전 경험 -이 토픽을 몇 해나 연구하고 다루었나?
*토픽이나 개념에 근접성 -개념을 만든 사람이야? 관여했나? 아니면 3자에 더 가까운가?
*실제 성과 -저술, 논문. 블로그, 상품 등을 가지고 있어?
*사회적 인정 -무슨 상을 받았나? 기록을 세웠어?
그렇다면, 에토스의 이 네 가지 특징을 어떻게 검증할 수 있을까요?
에토스는 “당신에게 에토스가 있다, 없다”처럼 체크박스로 평가하기 곤란한 성질의 개념이에요. 그 범주나 습득하는 길이 많다는 것을 감안하면, 차라리 미(美)라는 개념과 더 가깝다고 보는 게 맞을 거예요.
에토스의 네 가지 특징이 어떻게 결합하여 나타나는지, 몇 가지 예를 가지고 살펴봅시다.
*직원들에게 말하는 CEO
CEO에게는 조직 안에서 권위가 생기게 마련이고, 거기에는 흔히 회사에서 몇 년에 걸쳐 쌓아온 성공적 평판이 따라붙습니다. 하지만 그는 대다수 직원들과 썩 유사하지 않을 수도 있어요. 나이가 더 많고, 재산이 더 많고, 어쩌면 더 차갑고 분석적인 타입일지도 몰라요.
그런 단점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다른 직원들과 정직하고 성실하게 소통해 왔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CEO의 신뢰성은 대개 단단한 편입니다.
*국민에게 연설하는 대통령
그 어떤 직업보다도 대통령직에 있는 이의 권위는 더 큽니다. 그의 평판과 신뢰성은 일정 부분 당신의 정치 신념에 좌우될 거예요. 청중(국민)과의 유사성에서는 개인마다 차이가 있어서 높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어요. 설령 유사성이 높다 해도, 결국 그는 정치인이고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 국민 다수와는 거리가 있는 계층에 속합니다.
*학생들에게 말하는 교사
어쩌면 신뢰도가 가장 높을지도 몰라요.
학습을 이끌고 평가를 주관하는 이를 믿지 못하면 어떡하겠어요?
그는 위치와 나이라는 측면에서 청소년들에게 권위도 있어요. 그가 학교에서 10년 넘게 가르쳐 왔다는 것은 전문성이 높다는 뜻이고, 많은 졸업생들한테서 호의적인 평가를 받는다면 평판이 좋다는 뜻이에요. 하지만 그가 나이와 재산, 경력, 혹은 취향에서 학생들과 실제로 비슷하지 않다는 점은 아쉬운 대목이에요.
우리가 살펴본 세 경우의 당사자들은 모두 여러 척도에서 높은 점수를 얻고 있기 때문에 에토스가 상당히 큽니다. 특히 권위와 평판은 종종 밀접하게 연관됩니다. (좋은 평판을 얻기 위해 애쓴 만큼 권위가 생겨요.)
반면에, 에토스를 완벽하게 갖출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왜냐면 에토스를 구성하는 요소들 가운데 상충되는 것이 있으니까. 예를 들어, 어떤 청중에게 당신의 권위가 지극히 높은 경우, 청중은 당신과 동질감을 덜 느끼게 될지도 모르지요.
지금까지 에토스란 무엇인지 함께 생각해 봤습니다.
에토스는 화자들에게 매우 중요해요.
에토스가 높은 화자에게는 청중이 첫마디부터 귀 기울이고 눈길을 집중하지 않습니까? 뭔가 귀중한 얘기가 나올 것이라 기대하여 열심히 들으려 하기 때문이에요. 그런 화자가 청중을 설득하기는 어렵지 않아요. 그런 화자는 혹여 스피치 기법이 좀 숙련되지 못했다 하더라도 가외의 이점을 많이 누리게 됩니다.
파토스나 로고스와 달리, 화자로서 당신의 에토스는 첫마디를 꺼내기 전에 이미 기본적으로 확립돼 있어요. 예를 들어, 스피치 주제에 정통한지 아닌지, 어떤 기업의 최고 경영자인지 아닌지 등. 하지만, 기본적인 것 외에 스피치에서 에토스를 확립하고 증진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잠시 뒤에 알아보지요.
- 아, 잘 하고 있지. ‘채식주의의 이점’이라는 토픽이 있고, 그걸 전달하기 위해 스피치 얼개를 잡고, 관련 자료를 몇 가지 확보하고, 초고를 쓴 뒤 몇 번 다듬고, 거기에 수사법을 동원하여 임팩트까지 보탰어. 이 정도면 연단이나 무대에 나서도 충분한 거 아니야?!
음… 정말 그럴까요? 안타깝게도, 그렇지 않습니다.
- 아니, 왜? 왜 안 된다는 거야?
당신이 심혈을 기울이긴 했지만 그건 종이 위에 적힌 글일 뿐입니다.
청중은 당신이 원고 읽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청중은 당신이 행하는 스피치를 보고 듣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려면 제스처와 무대 동작, 다양한 목소리 같은 요소들을 또 집어넣어야 합니다.
내용이 아무리 흥미진진하다 해도 전달이 단조롭다면 청중에게 수면 가스를 살포하는 것과 매한가지일 겁니다. 그와 달리, 윤기 있는 목소리를 힘차고 다양하게 구사한다면 청중의 귀에는 음악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목소리를 어떻게 구사해야 지루하지 않게 들릴 수 있을까?
여기서 목소리의
크기(Power),
고저(pitch),
속도(pace),
휴지(pause)를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나옵니다.
먼저, 파워는 당신이 내는 목소리의 성량이에요.
청자들이 귓바퀴를 나팔처럼 모으지 않고도 쉽게 들을 수 있어야 함은 당연하겠지요? 성량을 높이고 낮추는 자체가 흥미를 끌 수 있어요. 전달하기 원하는 감정에 맞추어서 변화를 주는 겁니다.
예를 들어, 신바람을 전할 때는 자연히 목소리가 커지고, 슬픔을 표할 때는 나직하게 나오겠지요.
물론 넓은 공간에서는 마이크를 씁니다. (마이크 사용법도 따로 익힐 필요가 있어요.) 가능한 한 외부 소음을 차단하고, 그럴 수 없다면 청중과의 간격을 최대한 좁혀야 합니다.
피치는 당신이 내는 목소리 진동수.
대체로 사람들 각자에게는 소프라노나 알토, 테너, 바리톤의 고유한 목소리 피치가 있어요. 하지만 피치를 간간이 바꾸는 것은 스피치 대목들을 구별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차별되는 좋은 방법이기도 합니다.
말하기의 완급을 여러 모로 조절하는 것도 청중의 흥미를 키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요.
일반적으로, 극적인 이야기에서 감정을 키우려면 말의 속도를 높이고, 핵심 어구를 전할 때는 낮춥니다.
페이스에서 가장 흔히 대두되는 문제는 청중이 듣고 소화하기 어려울 정도로 너무 빨리 말하는 것인데, 여기에는 두 가지 잠재 요인이 있습니다. 즉, 일정한 시간에 너무 많은 내용을 전달해야 하거나 하려는 경우, 이는 원고 편집이 부실하다는 반증이기도 한데, 말이 빨라지기 마련입니다. 또 화자가 너무 긴장할 때도 대개 그렇게 됩니다.
휴지에 관해서는 지금까지 여러 번 이야기를 나눴어요.
짧은 휴지를 한 문구나 조항이 끝났다는 신호로 쓸 수 있어요.
청중은 원고에 있는 구두점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이런 휴지가 필요합니다.
긴 휴지를 취함으로써 주요 사항이나 스토리 간에 전환이 이뤄짐을 알릴 수 있어요.
핵심 사항 앞뒤에서 취하는 휴지는 놀라운 완충기 역할을 해요.
미리 취하는 휴지는 이제 당신이 중요한 사항을 언급할 것이라고 청중에게 알리며, 뒤에 취하는 휴지는 지금 막 당신이 말한 것을 청중이 음미하고 소화할 짬을 줍니다.
또 휴지는, 예를 들어 수사적 질문을 던지고 잠깐 기다리는 식으로, 청중과 상호 작용을 높이는 데 쓰이기도 합니다.
자(야옹!), 그러면(멍멍!), 이제 목소리의 4P가운데서 성량과 말 속도, 두 요소가 결합되어 어떤 효과들이 나타나는지 설교를 예로 들어 살펴봅시다. 설교나 강의에서 목소리를 다양하게 다룬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불면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감사할 만큼 밋밋하게 늘어지는 투로 웅얼거리는 목사나 교사들을 접해보지 않은 사람은 아마 없을 거예요.
그런데 단조로운 스피치의 문제들 중 하나는 따분하다는 데서 그치는 게 아니라 청자들의 반감을 살 우려마저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어쩌라고!”)
청중을 끌어들이려면 그들의 감정을 끌어들일 수 있는 방법에 유념할 필요가 생깁니다.
편의상 아래 도표를 봅시다.
여기서 수평선은 말의 속도를 표시해요. 느려 터진 말을 들을 때 우리는 답답하여 몸을 비틀고, 쌩쌩 달리는 말을 듣다 보면 지치기 쉽습니다.
- 그렇다면 그 어딘가 중간 속도가 가장 좋지 않겠어?
그렇게 생각하나요? 음… 꼭 그렇지도 않아요. 그 이유는 잠시 뒤에 알게 될 겁니다.
이 도표에서 수직선은 화자의 성량을 표시해요. 여기서도 또 극단적인 것은 안 좋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어요.
- 거야 당연하지.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할 정도로 목소리가 작으면 짜증이 나고, 목청을 한껏 돋우어 계속 고함치듯 말하면 듣기 거북해서 달아나고 싶단 말이야! 그러니 성량도 중간 정도가 가장 좋은 거 아니겠어?
음, 아쉽게도, 이것 역시 말 속도와 마찬가지로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 도표에서는 두 축이 서로 엇갈리면서 네 가지 사분면이 나와요.
그 네 가지가 설교나 강의를 포함해 모든 스피치에서 다 중요한 부분이 됩니다. 그 각각에 나름대로 역할이 있어요. 즉, 청자들의 관심을 유지하는 것만이 아니라 또한 청자들이 당신과 함께 이야기 여행에 나서고 싶게끔 만들면서 당신의 진정성과 권위를 느끼도록 하는 역할이!
각 사분면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예를 들면서 생각해 보지요. (미국의 스피치 전문가 바덴/Vaden이 든 사례가 흥미롭습니다.)
첫째, 말이 느리고 목소리를 크게 내는 화자는 중요한 요점을 강조하여 전달합니다. 예, 빌 그레이엄 목사의 기도.
둘째, 말이 느리고 목소리를 나직하게 내는 화자에게서는 진정성이 드러나요. 이건 생각이 풍부하고 성실하다는 뜻. 처음 믿음에 들어서서 신앙을 고백하는 이들에게서 많이 볼 수 있어요.
셋째, 말이 빠르고 목소리가 나직한 화자는 거의 숨을 쉬지 않는 듯 보여요. 예수를 봤다고 제자들에게 알리러 이층으로 달려가는 여인들을 상기합시다. “그분은 거기 없었어요! 천사는 그분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셨다고 말했어요! 천사는 선지자의 말씀을 우리에게 상기시켰어요. 메시아는 죄인들에게 인도되어 책형을 받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리라!” 무덤에서 목도한 것에 놀라고, 허겁지겁 달려오느라 숨이 가쁘고, 유대 제사장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숨도 제대로 못 쉬는 바람에, 그들은 아주 나직하지만 매우 빠르게 입을 놀려요. 여기에는 기대가 섞인 흥분이 배어 있어요.
넷째, 말이 빠르고 목소리를 크게 내는 화자의 경우는 어떤가요? 오순절에 베드로가 열한 명의 사도와 함께 서서 소리 높여 외치는 것을 예로 봅시다. “그가 하느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준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나 하느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사도행전 2:23-24) 베드로는 에너지와 활력, 흥분을 내쏟아요. 하지만 이때의 흥분은 무덤에서 달려온 여인들의 흥분과 달라서, 확신을 말하기보다는 믿어 달라고 청합니다.
그러면 설교에서는 어떤 사분면을 쓰는 것이 좋을까요?
그건 설교 주제에 달렸습니다.
느리고 나직한 목소리로 지옥을 말하는 목사는 빠르고 큰 목소리로 지옥을 말하는 목사와 전달하는 것이 전혀 다르겠지요.
바로 목소리 운용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겁니다.
일반적으로 최상의 스피치에는 이 사분면의 요소가 모두 담기고, 그 덕분에 화자는 청자들을 자기 이야기 여행에 데리고 나서게 됩니다. 주의 깊은 목회자는 청자들의 눈길을 사로잡고 이성만큼이나 감정도 끌어들이고, 또 청자들이 메시지를 수용하게끔 설교를 준비하면서 이런 네 가지 말하기 방법을 적절하게 안배하려고 숙고합니다.
1) 권위 있게 말할 대목 2) 믿음성 있게 말할 대목 3) 기대를 가지고 말할 대목 4) 활기차게 말할 대목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명연설 <I have a dream> *미국 대통령 오바마의 정치 스피치 *스티브 잡스의 (통칭) <Stay hungry, stay foolish!> *노무현 대통령의 (통칭)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이건 다 인터넷에서 금방 찾을 수 있어요. (아래 관련 포스트에도 있어요.)
그 하나하나가 다 나름대로 감동을 줄 겁니다.
감상하면서, 화자가 원고에 눈길을 얼마나 돌리는지 주목해 보세요.
이번 #액션을 열심히 수행했다면, 성실한 당신은 저 네 편의 스피치 중에서 뭔가 차이 나는 것이 있음을 분명히 알아차렸을 거예요.
-어라, 가능하면 원고를 읽지 말라고 했는데, 어떤 이는 아예 대놓고 읽잖아! 이게 도대체 무슨 영문이람? 저이가 스피치 기법 하나 모를 리 만무한데!!
그래요. 적절한 의문이에요.
스피치 중에 원고 읽기를 최대한 줄이라고 강력히 권고하는 것이 일반적이긴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더러 있어요.
화자의 애드리브와 자연스러움보다는 텍스트에 충실함이 더 요구되거나 시간이 엄격히 제한된 상황 등에서 그렇습니다.
*아주 격식을 갖춘 행사의 일환으로 발언할 때 (예, 졸업식 축사) *파토스가 특히 강조된 전달에서. (예, 혼인 축사, 송덕문, 조사)
*어휘나 표현에 최대한 신중을 기해야 하는 발언에서. (예, 기업 활동 보고, 민감한 정치 연설, 외교적 발언) *자신의 원고 안에서 다른 이들의 글을 정확하게 인용해야 할 때. (예, 시나 어떤 책의 구절)
*스피치를 철저하게 연습할 시간이 없는 경우. *원고를 작가 등 다른 사람이 쓴 경우. (직접 작성한 것보다 소화하기가 어려우니까.) *스피치에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 원고에 의존하지 않으면 불안한 경우.
'프레젠테이션의 달인’이라 불리는 스티브 잡스가 스탠포드 대학 졸업식 스피치에서는 왜 원고를 읽어 내려갔는지, 이제 수긍이 가지요?
그러나 텍스트를 읽어야 하는 경우에도, 그저 밋밋한 낭독에 머물지 않고 말맛이 생기게끔 하려면?
몇 가지를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원고를 읽기 편하게 준비한다는 것은 기본. 그러려면, 손으로 쓰기보다는 타이핑하여 인쇄하는 것이 좋다. 아무리 좋은 필체로 썼더라도 일그러진 글자 하나가 단상에서 읽을 때는 생각보다 훨씬 더 힘들 수 있으니까.
*활자 크기를 눈에 잘 들어오게끔 정해야 한다.
*줄 간격을 너무 크게 잡으면 읽기에 더 불편하다.
*중간 중간에 소제목을 적절히 배치. 물론 이건 읽는 게 아니지만, 스피치의 이정표가 된다. 또 큰 휴지를 취하라는 신호 역할도 된다.
*하나의 문장이라도 휴지를 표시하기 위해 줄을 바꿀 수 있다. 문장을 작은 덩어리들로 나누고 각 덩어리 사이에 빗금(⁄)으로 표시하여 가벼운 휴지를 넣는다. (chunking)
*특별히 강조를 요하는 단어나 어구를 이탤릭체나 굵은 글자로 표시하면 읽을 때 편할 것. 이런 목적으로 밑줄을 쓰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종이 여백에 참고나 주의 사항을 적어 넣는다. 예를 들어, 빨간 펜으로 ‘숨 들이쉬기’, ‘천천히’, ‘청중을 한 번 둘러보기’ 따위.
어때요, 이런 식으로 원고를 준비하면 읽기에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 다음에, 실제 읽을 때는 또 어떤 점들을 고려해야 할까요?
원고 의존도가 클수록, 화자는 무슨 족쇄나 수갑을 찬 것처럼 신체의 속박을 받기 마련입니다. 연단 뒤에서 두 발을 바닥에 붙박은 채 두 손으로 원고를 쥐고 내내 고개를 꺾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좀 끔찍하지요?
그게 바로 원고 읽기의 폐해입니다.
자연스러운 제스처를 가로막고 몸을 부자연스러운 상태로 잡아두니까요.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최선의 길을 찾아야겠지요?
*될 수 있는 한, 원고를 높은 위치에 놓는다. 연단을 이용할 때는 원고를 너무 낮게 세팅하지 말고, 손에 들고 있을 때도 높이 올리도록 하라. 왜? 왜냐면 설령 눈길이 청자들을 향하지 않더라도 그 비슷하게 보이게 되고, 목소리 내기에도 편하니까. 제임스 흄스(Humes)는 <처칠처럼 말하라, 링컨처럼 서라>에서 스피치 대가들의 비결 중 하나가 원고에서 눈길을 들어 올릴 때만 청중에게 말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만큼 시선 접촉이 중요하다는 뜻.
*제스처를 다 죽이지 말라. 원고 읽는 스피치에서는 손을 쓰고 몸을 놀리기가 상당히 어렵지만, 그래도 당신이 산송장이 결코 아니라는 점을 보여 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청중의 눈길에서 맥이 빠질 것.
*읽으면서도 얼굴 표정을 다양하게 짓는다. 청중이 아니라 원고를 내려다보고 있는데 표정을 다양하게 한들 무슨 소용이 있나? 글쎄,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른 효과가 부수적으로 따른다. 즉, 표정을 좇아 목소리도 다양하게 구사되는 것. 이건 상당히 중요한 점이다. 왜냐면, 원고 읽기에서 필연적인 시선 접촉 부족을 벌충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다양한 목소리 구사니까. 이때 청자들은 당신이 들여다보는 원고에 주목하는 대신 당신이 전하는 메시지에 귀를 기울일 테니까.
하지만! 지금까지 우리가 나눈 얘기는원고나 스크립트를 꼭 읽어야 하는, 드문 경우를 염두에 둔 겁니다. 더 많은 경우에는 가능한 한 피해야 해요.
자전적 이야기 모음인 <미시시피 생활>, 또 만년에 들어 인간 기질을 섬세한 아이러니로 관찰한 기록 <사람이란 무엇인가> 같은 글도 읽어 볼 필요가 있어요.
트웨인은 과학과 기술 문제에 관심이 커서,
자신이 ‘번개에게 명령하는 사람’이라 부른 발명가 테슬라의 실험실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당대 과학적 성취에 대한 해박한 지식은 <아더 왕 궁전의 코네티컷 양키>라는 소설에서 잘 드러납니다.
“마크 트웨인!” 하면 우리한테는 무엇보다도 신선하게 번뜩이는 유머와 풍자, 해학이 떠올라요.
글뿐 아니라 말에서도 그렇습니다. 그이는 사실 아주 매력적이고 잘 나가는 연설가요 강연자이기도 해서, 여기저기서 초빙을 많이 받았어요.
그런 까닭에 소통과 스피치를 연구하는 이들의 눈길을 끕니다.
앞에서도 언급한 인간 탐구를 비롯해 사회와 정치 문제, 문명에 대한 심오한 철학적 (동시에 만년 들어 대단히 비관적인) 고찰 등이 그의 내면세계를 지배한 주제들이었어요.
미국의 제국주의적 팽창을 비판하면서 행한 반전 연설들은 폭넓은 반향을 일으켰지요.
미국의 필리핀 병합에 저항한 반제국주의 연맹에서 선두 역할을 했으며,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미명 하에 침략적인 대외정책을 신랄하게 파헤쳤고, 그런 정책을 고수하려면 성조기를 바꿔야 할 것이라면서 이렇게 비꼬았어요.
“지금 깃발을 그대로 둬도 되겠으나,
단지 흰 띠들을 검은색으로 칠하고 별들 대신에 해골과 뼈다귀들을 그려 넣도록 합시다!”
그이의 공개 연설과 강연 자료 중 많은 것이 안타깝게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어떤 글에서 트웨인은 이렇게 썼더군요.
언젠가 스피치를 끝내고 단상에서 내려오자 한 지인이 의아한 얼굴로 다가와서 물었다. “당신 손톱에 무슨 문제라도 있소? 발언하는 중에 왜 손톱을 하나씩 들여다본 게요?” 그에게 내 비밀을 털어놓지 않을 수 없었다. “아, 그건… 당신한테만 귀띔하는데, 스피치 개요를 잊지 않기 위해 손톱마다 키워드 머리글자를 하나씩 적어 두었기 때문이라오.” 그리고 둘이서 은밀한 웃음을 날렸다.
하지만 그런 방법이 잘 먹히지 않는 경우가 심심찮게 발생했다. 말하기에 몰두하다 보면 어떤 손톱까지 봤는지, 그러니까 다음 차례가 어떤 것인지 헷갈릴 때가 생기는 것이었다. 나는 또 고민했다. 써먹은 손톱의 글자를 지워야 하나? 그렇다면 어떻게? 침을 발라서?
그래, 그것도 방법이야. 하지만 손톱에 침을 바를 때마다 청자들은 무슨 일인지 궁금하게 여기겠지. 내가 스피치보다는 손톱 단장에 더 신경을 쓴다고 여길지도 몰라.
그이의 이런 고백이 실은 상상의 소산이요, 웃자는 얘기일 수도 있을 거예요.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렇게 고심할 정도로 ‘원고 읽어 내리는 스피치’를 꺼렸다는 점입니다.
왜?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각종 형태의 말하기에서 (시종일관 혹은 부분적으로) 원고 읽기에 치중하다 보면, 이런 부정적 현상이 발생하게 되니까요.
*눈길이 원고에 쏠리기 때문에 청중과 시선 연결이 끊길 수밖에 없다. *그런 까닭에, 청중의 피드백을 정확히 알기가 힘들다.
*고개를 숙이고 있기 때문에 목청을 제대로 터뜨리지 못한다. *단어들에 묶이기 때문에 대화체를 구사하기가 어렵게 된다.
*단어나 줄을 건너뛰거나 빠뜨릴 위험이 있고, 그러면 당신 얘기가 멍청하게 들릴 수 있다. *단어들의 울림에 신경 쓰는 대신 단어들을 끄집어내기에 급급한 만큼, 목소리를 다양하게 구사하기가 (즉, 감정이입이) 어렵다.
부연 설명이 필요할까요?
토가를 걸치고 작은 광장에서 일방적으로 사자후를 토하던 옛날과 달리, 오늘날에는 연설이든 강연이든 발표든 쌍방향의 대화 형식을 중시합니다. 그래서 질의응답 기술이 필요하고, 그래서 수사적 질문을 적절하게 활용할 줄 알아야 됩니다.
일상에서 우리는 대화를 어떻게 하지요?
상대방을 바라보면서, 상대의 반응을 살피면서, 매 순간 감정에 잘 어울리도록 어조를 자연스레 바꿔 가며 하지 않습니까?
바로 이런 점을 마크 트웨인은 (대다수 노련한 화자들은) 사람들 앞에서 공식적으로 말할 때도 유지하려고 애쓴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원고라는 족쇄에서 최대한 벗어나고자 했습니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준비된 원고를 그저 읽어 내려가는 것은 스피치에서 권장하지 않는 형식입니다. 한마디로, 처음부터 끝까지 원고에 코를 처박고 읽기만 하는 (거친 표현을 용서하시길!) 화자의 말은 단조롭고 따분하고 지루하며, 그 당사자는 비전문적이고 불성실하고 자칫 어수룩해 보이기 십상입니다.
최소한의 핵심 단어들만 커닝(?)하면서, 마음에서 우러나는 호소와 주장을 기억하여 말할 때…
스피치에 더 큰 생기가 넘치게 됩니다. 에토스와 파토스가 커집니다. 청자들에게 더 확실히 파고들게 됩니다.
언젠가 티브이 뉴스에서 이런 장면을 본 적이 있어요.
서울을 방문한, 일본의 외상 일행과 마주한 자리에서 대한민국의 외교장관이 인사말을 하는데, 고개를 떨어뜨리고 탁자에 놓인 종이쪽에만 계속 눈길을 던진 채 말을 하지 뭡니까.
좀 의아했어요. 왜 그랬을까? 무슨 사정이 있었을까? 예민한 외교적 발언이야 그럴 수 있고 그렇게 해야 한다 해도, 인사말조차 원고에 의존해서 할 수밖에 없는 건가? 아니야, 혹시 보도하는 이가 어쩌다 그렇게 편집한 건지 몰라. (티브이 뉴스 제작에서는 먼저 ‘오디오’를 깔고 그 위에 ‘비디오’를 입힙니다.) 아니, 그렇지도 않은 것 같아. 말과 입놀림이 일치한 것으로 보면, 인사말 위에 다른 화면을 덮은 것이 아닌데…
좀 속상했어요. 우리나라의 큰 위치에 있는 이가 다른 나라의 큰 손님 일행을 환영하여 인사를 하는데, 저렇게 할 수밖에 없나?!
좀 답답했어요. 누군가와 만나 악수하고 인사 나눌 때 우리는 한눈을 팔지 않잖아요? 그렇게 한다면, 그건 결례일 뿐 아니라, 상대방이 이쪽의 진정성에 대해 의구심을 품게 만들어요.
말을 해야 하는 자리와 상황에서 말은 하지 않고 글을 읽는 경우를 우리는 주변에서 심심찮게 목도합니다.
국회 국정감사 현장을 티브이 중계로 보면서 답답하게 여기는 국민들이 많은 것도 바로 그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내용은 차치하고라도 말입니다.
각 기관의, 특히 정당의 대변인들 중에도 직책의 본래 소명에 어울리지 않게 말을 하는 이들이 제법 있어요.
이런 경우 앞에서 열거한 부정적 현상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인터뷰어로서 길지 않은 질문들을 던지면서도 매번 종이에 적은 것을 읽어야 한다면, 보고 듣는 이들에게 좋은 인상을 줄 수 없습니다.
어떤 행사의 진행자로서 대본에만 자꾸 눈길을 돌린다면, 전체 분위기를 솜씨 좋게 이끌기란 기대 난망입니다.
원고를 손수 쓰고, 모든 것을 충분히 생각하고 검토하고, 문장 부호까지 포함해 내용을 다 숙지한 경우에도, 커닝페이퍼(?) 없이 나서기를 저어합니다. 왜 그럴까요?
자신의 기억력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에요.
혹시 중간에 발언 줄거리를 잊지는 않을까, 당황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을 거야, 그러면 어떡하지…
염려와 조바심이 들끓는 바람에 종이쪽을 손안에 쥐지 않으면 뇌에 갈무리해둔 것도 까맣게 잊을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아, 난 본래 기억력이 안 좋아서 아무리 공부해도 소용없어!
-나이를 먹으니까 기억력도 자꾸 떨어지네!
-너무 많은 걸 기억하면 내 뇌가 터져 버리지는 않을까?
그래요, 아주 중요한 인지 기능인 기억에 대해 우리는 관심이 많고 얘기를 자주 나눕니다.
그러면서 잘못된 개념도 많이 지니고 있어요.
바로 앞에 나온 언급들이 다 우리가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심리학자들 연구에 따르면,
기억력은 선천적인 것이 아니며 기억력이 좋지 않다는 것은 단지 뇌의 연결 기능을 활성화하지 못한 것일 뿐이라고 합니다. 말하고 쓰는 것처럼 누구나 습득할 수 있는 능력이며, 근력을 키우듯이 기억력도 키울 수 있다고 합니다. 즉, 방법을 알고 기술을 익히기만 하면 누구나 많은 것을 더 빨리 더 오래 기억할 수 있다고 기억술 전문가들은 말합니다.
사실, 누구나 인정하다시피,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말할 때 좋은 기억력은 아주 필요해요.
어떤 고유명사나 이름, 숫자, 인용구를 적절한 순간에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다면 얼마나 편하겠습니까?
그렇다면 본격적인 기억술 훈련에 들어서지 않고도 우리가 일상에서 간단히 적용할 수 있는 기억력 강화 방법은 없을까?
있어요. 바로 이런 겁니다.
“난 기억력이 안 좋아” 같은 말을 절대 입에 올리지 말아요. 아니, 그런 생각조차 절대 하지 말아요. “아, 나는 전화번호나 숫자를 기억하는 데는 영 젬병이야!” 그렇게 생각하고 말하다 보면 정말 그렇게 됩니다. 어째서? 그 이유는 바로 뒤에서 말씀 드리지요. 그런 말을 하는 대신에 거꾸로 자랑을 하세요.
“난 기억력이 좋아!” “난 용량 큰 정보도 쉽게 외울 수 있어!”
그렇게 두세 주 지나면 당신 기억력은 정말 그렇게 됩니다. 직접 실험해 보세요.
아이들을 봅시다. 아이들이 제 또래들과 어울리면서 이렇게 말하는 걸 우리는 종종 듣습니다.
“난 아주 힘이 세! 난 아주 용감해! 난 이런저런 것을 다 할 수 있다!”
그런 말을 옆에서 들으면서 어른들은 은근히 놀랍니다.
‘아니, 우리 아들이, 딸이 왜 저렇게 ‘뻥‘을 치지? 뭘 믿고 저렇게 큰소리치는 거야?’
대여섯 살 먹은 아이의 부모라면 누구나 그런 경우를 접했을 겁니다.
아이들이 왜 그렇게 입찬소리를 해대는지, 생각해 본 적은 없나요?
아이들은 정말로 그런 사람이 되고 싶은 겁니다.
될 수 있다고 믿으려 하면서 우쭐거리는 거예요.
세파에 시달리면서 일정한 틀에 많이 사로잡힌 어른들과 달리, 아이들은 그 유아적인 특성 때문에 오히려 자신의 잠재력과 가능성을 더 키우게 됩니다.
뒤집어 보자면, 부모와 교사들이 아이들에게 절대 해서는 안 될 말도 있습니다.
“넌 재주가 없어. 아무 것도 못할 거야. 어째 그렇게 지지리도 못 났냐.”
그런 말을 자주 듣는 아이들의 앞날이 어떠리라는 것은 부연할 필요가 없겠지요.
지금까지 우리 이야기를 다른 말로 정리하면,
‘무의식을 이용한 기억력 강화’가 됩니다.
프로이트(1856-1939)가 수행한 연구 덕분에 우리는 무의식의 놀라운 가능성을 알게 됐습니다. 무의식이 사람의 자기계발과 성장에서 지대한 역할을 한다는 것도 알게 됐어요.
자기 암시로써 무의식을 자극하여 기억력을 좋게 하는 방법, 지나치게 간단한가요? 너무 쉬워요?
티브이 출연자들의 말하기를 통해 좋은 점은 배우고 나쁜 점은 물리치면서 당신의 스피치 안목을 키우세요. 예를 들어 이런 식입니다.
* * *
연초에 KBS 2채널에서 박승 선생의 경제 특강을 몇 차례에 걸쳐 방영했어요.
대학 때 부전공으로 경제학 서적들을 좀 들춰본 이후 따로 공부한 적이 없는 나로서는 흥미가 돋았어요. 그런데 그 흥미라는 것이 잘 모르는 분야의 지식을 좀 채운다는 알량한 욕심에서만 발동한 것은 아니에요. 인터넷 시대에 접어들어 웬만한 지식과 정보야 발부리에 차이는 돌멩이들만큼 어디에나 흔하게 널려 있지 않습니까? (단지, 허튼 것들을 조심해야 하고, 그래서 식별할 수 있는 안목을 갖춰야 해요!)
그보다도 더 큰 것은 사람의 목소리를, 말소리를 듣고 싶었던 거예요. 사람을 느끼고 알고 싶었던 겁니다. 더욱이 평소 막연하게나마 호감이 가고 공감이 들고 심정적으로 지지하지만 일면식도 없던 인물이 등장하는 마당에야! 궁금증을 풀 수 있는 기회 아니겠어요?
-그래서?!
하하, 그래서 좋았다는 얘깁니다. (좀 싱겁나요?)
-뭐가 좋았어?!
다 좋았어요. 말하기의 중요한 요소인 내용에 관해서야 내가 더 덧붙일 것은 없어요.
한미 FTA에 대한 언급 중 어떤 대목에서 나로서는 약간의 이견 같은 것이 느껴지기도 했는데, 금방 접었어요.
‘흠, 내가 혹시 선생의 말씀을 잘못 알아들었는지도 모르지.’
이건 화자의 에토스가 높다는 뜻입니다. 에토스가 높을 때, 즉 정통한 권위와 좋은 평판을 지녀 신뢰도가 높을 때 설득력도 덩달아 커집니다. 파토스도 좋은 편이었어요. 열정이야 말할 것도 없고! 딱딱할 수도 있는 경제를 이야기하면서 사용하는 어휘가 적절하고 발음에서도 딱히 꼬집을 게 없어요. 자세와 태도, 자신감, 침착성에서도 별 문제가 없어요. 목소리도 듣기 좋은 편이고, 연단에서 움직임과 제스처, 시선 처리도 괜찮고.
옥에 티라고 한다면…
열정이 큰 탓인지 어조가 전반적으로 약간 높은 편이었어요.
이건 고저, 강약, 완급의 조절 같은 목소리 운용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칩니다. 화자의 호흡과 목에도 부담을 안깁니다. 그래서 간간이 숨을 고르고 목과 목소리를 다듬어야 하는 순간들이 나오게 됩니다. 이런 면은 청자들의 주의를 흩트리는 빌미가 될 수 있습니다.
열정을 다스려야 합니다.
높고 강한 톤으로 일관한다면 듣는 이들이 부담을 느끼기 쉽습니다.
목소리도 더 빨리 피로에 젖습니다.
길고 짧은 휴지를 적절하게 안배하면, 호흡 조절이며 주목 끌기에서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효과가 몇 배 더 커집니다. 이런 기술은 물론 연습과 훈련을 통해서 습득됩니다.
주제가 아무리 진지하다 해도, 아니. 진지한 것일수록, 적절한 유머나 일화를 찾거나 궁리해서 섞을 필요가 있겠지요. 객석에서 간간이 웃음을 터뜨리거나 눈시울을 적시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능한 한 청자들과 더 많이 어울리는 게 좋습니다.
청자라고 해서 일방적으로 듣기만 하는, 소극적 상태에 머물러 있지 않도록 하는 게 좋습니다. ‘우리 이야기’라는 느낌을 지니도록 하는 게 좋습니다. 그래서 질문과 대답과 그에 대한 반응 같은 것에도 시간을 할당할 필요가 있습니다.
* * *
어조며 톤 얘기가 나온 이상 우리가 눈길을 돌리지 않을 수 없게 하는 인물이 있어요.
바로 도올 선생에 관한 얘기인데, 그이가 실행한 많은 티브이 특강을 두고 스피치 비평 작업에 나서 봅시다. 그이의 견식과 내공과 혜안을 두고 우리가 이러니저러니 할 것은 없어요. 다시 말하지만, 소통과 스피치의 기술적 측면에서 접근하는 겁니다.
일반적으로 그이는 스피치 내용 전개에서 초점을 잘 유지합니다.
개인적인 스토리나 조크 같은 것도 더러 동원해요.
청중과의 시선 접촉이 아주 훌륭해요.
제스처며 신체언어가 활발하고 스피치 내용을 보완해요.
철학이라는, 자칫 어렵게만 생각할 수 있는 대상을 편한 어휘를 동원해서 알기 쉽게 설명해요.
한마디로,
그이의 스피치에는 로고스와 에토스, 파토스가 필요한 만큼 다 담겨 있어요. 열정이야 하늘을 찌를 듯 하고! 이건 곧 전달 효과가 좋고, 설득력이 크고, call-to-action이 잘 된다는 뜻이에요.
하지만…
개인 스토리와 조크 비슷한 것을 동원했다고 해서, 내가 아는 한, 청중이 편하게 웃음을 터뜨린 적은 많지 않은 듯싶습니다. 간혹 시선을 어떤 청자에게 너무 오래 고정하는 바람에 그 눈길을 받는 당사자를 당혹스럽게 만드는 경우도 보입니다. 눈길을 잘 맞추는데도 청중과 밀접하게 연결됐다는 느낌이 그리 크지 않습니다.
왜?
일방적이고 좀 고압적으로 보이는 태도와 분위기 때문에?
그럴지도 모릅니다.
신체언어와 제스처, 표정 등이 활발한 상태를 넘어서 과하다 싶습니다.
셀프컨트롤이 필요합니다.
편하고 용이한 어휘는 바람직하지만, 속어나 비어는 역효과를 냅니다. 욕설이야 말할 것도 없고!
이 화자의 스피치에서 요주의 대목은 바로 목소리 운용입니다.
(목소리의 4P에 대해서는 14단원을 보십시오.) 목소리 자체로야 아주 듣기 좋은 것이라고 말하기 어렵지만, 그렇다고 해서 듣기 거북한 것도 아니에요. 듣기에 밋밋하고 단조롭지 않다는 것은 그이의 최대 강점이에요.
그런데 4P 중에서도 특히 피치(Pitch, 음성의 높이)에 주의가 쏠리지 않을 수 없어요. 열정과 의욕 때문이라 싶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소리가 너무 높아요. 어디 그뿐인가요? 절정으로 치달을 때면, 뭐랄까요, 가성 같은 소리를 내면서 정상적인 목소리를 깨는 ‘초 절정 신공’마저 발휘합니다.
궁금증이 일어요. 왜 저런 식으로 말을 하는 거지? 어떤 의도가 있는 걸까? 뭔가 노리는 효과가 있는 건가? 아니면, 한낱 악습관에 불과한 건가?
궁금증이 의아심으로 바뀝니다. 왜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건지 이해가 안 된다는 뜻이에요. 그렇게 하여 무슨 큰 득을 보는 게 아니라 오히려 청자들한테서 거부감을 유발하기 십상이며, 그런 점을 지혜 많은 화자가 모를 리 만무할 텐데, 왜 그러는 건지 알지 못하겠다는 소리지요.
지금 우리 이야기의 주인공께서 언젠가 ‘나꼼수’에 출연해 걸걸하고 걸쭉한 진행자들과 말씀 나누시는 것을 또 듣게 됐어요. 잠시 듣다가 요즘 젊은이들 표현처럼 ‘빵, 터지고’ 말았어요. 왜? 두세 평 됨직한 라디오 스튜디오 안에서 두세 명 상대와 대화를 하는데도 목소리의 높이와 크기며 어조는 이삼백 명 청중을 앞에 두고 말할 때와 별반 다를 바가 없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내 속에서 탄성이 절로 터졌어요. ‘야아, 정말 독보적인 존재로군…’ (물론, 늘 그렇지는 않으리라 믿습니다.)
보이지는 않지만 대화중에 제스처를 썼다면, 제스처 사용도 그런 식이 아니었을까 하고 추정을 합니다. 왜냐하면, 제스처의 폭과 크기는 목소리의 세기며 높이와 대개 비례하니까.
청중 규모에 맞게 목소리와 제스처를 조절한다는 것은 굳이 스피치 기법을 들출 필요도 없이 누구나 알고 수긍하는 상식이 아니겠어요?
<I have a dream>이라는 감동적 연설의 주인공인 마틴 루터 킹이
잠자리에 든 어린 아들에게 책을 읽어 줄 때도 같은 식으로 목소리를 연출했을까요?
사방 툭 트이고 온갖 사람들이 아무렇게나 오가고 뒤섞여 어수선하고 시끄러운 장터에서는, 손님들의 주목을 끌려면 허리띠를 바짝 졸라매고 한껏 목청을 높일 필요가 있겠지요.
침을 튀기고 발을 구르며 요란한 신체언어를 동원할 필요도 있을 거예요.
히틀러에게서 신념과 열정을 빼면 남는 게 그리 많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 신념이 담긴 목소리와 그 열정이 깃든 표정과 제스처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열광했습니까?
그가 대중에게 어떻게 하여 그렇게 강력한 영향을 끼칠 수 있었는지를 규명하려 시도한 끝에 에리히 프롬(1900-1980)은 예닐곱 가지 요인을 듭니다. 개중 하나가 바로
“목소리와 감정적 뉘앙스를 완벽하게 조절하기.”
그렇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점도 생각해 봐야 합니다. 즉, 강연 같은 스피치는, 적지 않은 경우 대중 조작을 노리는 정치 스피치나 시장 장사꾼의 호객 행위와는 목표와 대상과 방식에서 판이하게 다르다는 점을!
게다가 우리에겐 이런 생각도 있어요.
즉, 일반적으로, 학식을 쌓는 것은 수양이며 일종의 수도 행위 같은 것이어서, 학식이 깊고 뛰어난 이들은 성품이 어질어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며, 생각이 깊어 사람들이 자신을 돌아보게 하며, 행동과 말투에서 훈기가 돌아 사람들을 편안케 하며, 눈길과 목소리가 그윽하고 부드러워 사람들이 기쁜 마음으로 바라보고 귀를 기울이게끔 만들기 마련이라는 생각도!! (모스크바에서 공부할 때 그런 학자들을 제법 보고 접했습니다.)
말하기의 3요소를 충분히 갖추고 있다는 이점에도 불구하고, 예를 들어 ‘에토스 키우기’에 비하면 훨씬 더 간단한 작업인 목소리 설비와 운용을 무시하거나 역행함으로써 청자들한테서 거부감이나 냉소를 유발한다면, 아아,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 * *
부처님 일생과 경전에 관한, 또 희망 세상 만들기라는 구호 아래 특히 젊은이들과 소통하는, 법륜 스님의 동영상을 봅니다. 가만가만한 목소리로 부드럽고 듣기 좋게 얘기하면서도 심심찮게 객석에서 웃음이 터지게 하는 화법에 관해서...
그 후보자들을 상대로 앞으로는 언어 검증도 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제기되고 있는, 헌법기관인 대통령 직책을 수행중인 이의 스피치 전반에 관해...
토론을 비롯해 몇몇 티브이 프로그램 진행자들과 뉴스앵커들의 말하기 양태며 장단점에 관해...
또 몇몇 연극배우와 영화배우, 탤런트, 개그맨의 말하기에 관해서도 두루 이야기 나누고 싶지만 너무 길어질까 염려하여 줄이렵니다. 나중에 어디서 어떻게든 적절하다 싶은 기회가 오겠지요.
티브이를 볼 때 이런 우스갯소리가 떠오르지는 않나요? 「“전국의 아나운서들이 내 아내를 잘 알아.” “무슨 소리야??” “아내가 티브이를 하도 자주 보니까!”」
어디서든 어떤 상황에서든 누군가의 발언을 듣거나, 아니면 티브이나 라디오 방송에서 보고 들으며, 이런 질문들을 던지고, 거기에 얼마나 합당한지 따져 보세요.
첫째, 전반적인 분석 대상으로는 스피치 목표, 스피치와 청중의 맥락, 스피치 구성 등
*이 화자가 설정한 목표는 무엇인가? 정보(교육), 설득(촉구), 재미? *전달하려는 핵심 메시지가 뭐지? *이 사람은 왜 이 스피치를 하며, 그렇게 하기에 적당한 인물이야? *이 화자의 목표가 달성됐나? *청중 구성원들과 규모에 어울리는 스피치 기법을 적용했어? *이질적인 정보를 최소화하고 관련된 메시지와 사례, 스토리 등을 조리 있게 엮어서 초점을 명확하게 만들었나?
둘째, 스피치와 직결돼 유심히 봐야 할 점들
*단상이나 청중 앞으로 나서는 동안 화자의 신체언어는 어떠했나? (이 순간의 신체언어는 대개 자신감 정도를 가리킬 것) *청중을 끌어들이기에 좋은 오프닝을 이용했나? 혹은 무미건조하게 입을 열었나? “오늘 이 자리에 서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따위.
*말문을 어떤 식으로 열었나? 개인 스토리로? 조크로? 놀라운 통계 수치로? 대화체로? 인상적인 영상으로? *오프닝에서 스피치 의도를 분명히 드러냈나?
*오프닝이 당신 기억에 남았나? *스피치에 조리와 일관성이 있었나? 즉, 논거와 스토리, 일화 따위가 다 핵심 메시지와 연관됐나?
*논증을 떠받치는 사례나 통계를 제시했나? *이해를 키우기 위해 메타포 같은 수사 장치를 사용했나?
*한 대목에서 다른 대목으로 연결이나 전환이 매끄러웠나? *오프닝과 마찬가지로 결어에서도 새로운 효과를 내는 어휘와 신체언어, 영상물 따위를 사용했나?
*결론이 간명하고 기억에 남았나? 그렇다면, 동기 부여나 행동 촉구가 있었나?
앞에 든 항목들은 화자가 소개를 받고 단상으로 나가서, 서론과 본론, 결론으로 구성된 스피치를 하는 동안 점검할 만한 것이지요. 좀 복잡한가요?
하지만, 이제 스피치 기법이라는 측면에서 분석할 요소도 적지 않아요.
이건 물론 다 우리가 학습하고 훈련하는 것들입니다.
셋째, 노련한 화자들은 다양한 전달 기술을 목표에 맞도록 적시에 적소에서 동원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습니다.
*화자가 열정을 보이고 청중과 잘 연결됐나? 그렇다면 그걸 어떻게 알 수 있나? 청중의 반응은 어떠했지? *유머를 적절하게 구사했나? 웃음이나 눈물을 몇 번 자아냈어?
*이해를 돕고 감정을 돋우고 극적 요소를 주기 위해 필요한 곳에서 휴지를 제대로 취했나? *잘 디자인된 영상 보조물을 적절하게 사용했나? 그것이 핵심 메시지 전달에 도움이 됐나?
*화자가 무대 공간을 잘 활용한 거야? *자세와 태도에서 자신감과 침착성을 보였나? 청중의 주의를 분산시키는 잘못된 습관은 없었어?
*제스처가 자연스럽고 전달하는 내용을 잘 보완했나? *시선을 어떻게 처리했지? 청중과 효과적으로 연결했어? (eye contact)
*목소리가 듣기 좋고 말이 귀에 쏙쏙 들어왔나? *목소리의 크기, 높이 등을 이모저모로 바꾸었나? (4P)
*말의 속도가 다양했나? 답답하다 싶게 느리거나, 알아듣기 어려울 만큼 빠르지는 않았나? *사용하는 어휘가 청중에게 적합했나? (속어와 비어는 물론이고) 전문용어나 은어 따위를 쓰지 않았나?
*호흡과 딕션에 문제는 없었나? *문장들이 짤막하고 이해하기에 쉬웠나?
*이 외에, 당신의 느낌은? 납득하고 설득됐나? 이 화자의 스피치를 다시 듣고 싶어졌나? 화자에게 독특한 생각이나 표현 기법이 있었나?
“누군가로 하여금 내 뜻을 이해하고 동지가 되게 하지 못한 것은, 내 언변이 졸렬한 탓이었어.”
“내가 존중하고 높이 평가하는 친구와 의가 상한 것은, 소통에서 내가 뭔가 실수했기 때문이야.”
그렇게 자신을 나무랍니다.
한데 우리는 누구나 자기 자신에게 오랫동안 꽁하고 화를 품지는 않습니다. 안 그런가요? 그러니까 자신의 행위와 말을 곰곰이 되짚어보고, 앞으로는 그런 실수를 다시 범하지 말자고 다짐하게 됩니다. 곧, 자신의 실수를 통해 배우는 거지요. 단지,분석하고, 대조하고, 사유하고, 자신을 마치 바깥에서 보듯이 관조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자신을 국외에서 보는 법은 어떻게 배우나?
먼저, 발언에 나서면서 청중을 존중하는 태도를 확실히 갖추고, 당신의 그런 자세를 청자들이 느끼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네 많은 정치인들에게는 아쉽게도 다른 이들에 대한 호의적 태도와 남의 의견에 대한 경의가 부족합니다. 어떤 사안을 두고 여러 번 회동하면서도 구체적인 토론보다는 상대방의 자세를 따지고 말꼬리만 붙잡고 늘어지다가 끝내는 경우가 많은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은 아닐까요?
교사들의 경우도 매한가지입니다.학생들을 존중하고, 그들의 가능성을 믿고, 그들에게 기대를 걸고, 무지를 극복하도록 도울 의지를 지닌 이들만이 진정 아이들을 가르치고 키울 수 있습니다.
이번 단원에서는 얘깃거리 선정 방법을 생각해 봅시다.
스피치를 효과적으로 하고 당신 생각과 주장을 청자들이 흥미롭게 받아들이기 원한다면, 토픽을 (또 핵심 메시지를) 신중히 선택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길이가 긴 스피치의 토픽을 어떻게 선정하나?
스피치를 세 가지 기본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는 점은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1. 정보 제공 스피치. 예컨대, 부동산 투자 세미나, 리더십 강좌 등. 2. 동기 부여 스피치. 예컨대, 선거 연설; 투자자들에게 사업 제안 등. 3. 재미 주는 스피치. 예, 동화 구연, 만찬 후 유머 있는 토크, 만담 등.
이 세 가지 중에서 당신 스피치는 어떤 유형에 속하는 것인지를 먼저 정합니다.
이 방향 설정은 준비 과정에서 내려야 하는 많은 다른 결정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까닭에, 전반적인 모티브를 확실히 정하는 것이 중요해요.
핵심 메시지란 발언의 중심 생각이며, 다른 스피치 요소는 모두 이 핵심 메시지를 떠받쳐야 합니다.
즉, 핵심 메시지에는 단문으로 표현할 수 있는 명쾌함과 당신의 열렬한 믿음과 폭넓은 지식이 들어갑니다.
사람들은 흔히 자기네 발언을 청자들이 다 기억할 것이라고 믿고 싶어 해요. 하지만 실제로 청중이 취하는 것은 두어 가지 골갱이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바로 이 핵심 메시지가 청자들 뇌리에 남도록 스피치를 디자인할 필요가 있어요. 그러려면 당신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청중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따져 봐야겠지요.
우리가 연설이나 발표, 구연 따위를 할 때 객석에 있는 청중은 순진한 구경꾼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소통 경로에 필수적인 일부입니다. 화자가 메시지를 아무리 잘 전달한다 해도, 청자들이 그 메시지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스피치는 성공적인 것이라 하기 어렵습니다.
여기서 청중 분석 문제가 또 대두됩니다. 어떤 청자들이 얼마나 되며, 화자인 당신과 어떤 관계이며, 어떤 메시지를 받기 원하는지 살펴야 합니다.
읽기를 잘 하는 사람들은 거의 다 말하기도 잘 합니다. 그러나 읽기가 서툴면서 말을 잘 하기는 거의 불가능할 거예요. 읽기 훈련과 능력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즉, 표현력 있고, 논리적으로 의미를 살리고, 가락이 정확하게, 목소리를 최대한 이용해서 읽기! 여기서 표현력 풍부하게 말하기가 시작됩니다.
<Enemy at the gates>라는 영화를 혹시 보셨나요?
스탈린그라드라는 전략 요충지를 놓고 점령하려는 독일군과 사수하려는 소련군의 치열한 전투를 배경으로, 소련군의 저격수를 둘러싼 이야기가 긴장과 흥미를 돋우면서 박진감 넘치게 펼쳐지지 않습니까?
이 전투에서 패함으로써 독일은 2차 대전에서 패전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는데, 그 이면에 자이쩨프라는 걸출한 스나이퍼가 있었음은 물론이지만 동시에 그를 전쟁 영웅으로 만든 프로파간다 전략이 큰 몫을 했습니다. 이로 인해 히틀러의 정예 군대는 싸울 의욕을 잃었고, 반면에 지원병들로 채워진 소련군은 물자 부족 같은 열악한 상황에서도 사기(士氣)가 드높았습니다.
그는 전쟁 기간 내내 일선의 전황과 정부의 대응 소식 등을 라디오로 전달했는데, 그의 목소리와 파토스가 군인들과 국민에게 불굴의 정신력을 일깨우고 승전 희망을 무한히 고취시켰습니다. 나중에 소련군의 한 장군은 회고록에서 레비탄의 목소리는 1개 사단의 무력과 맞먹는 것이었다고 적습니다.
영화에서는 군대의 사기를 진작하기 위해 정훈장교가 동분서주했다면, 독일군의 침공 이후 내내 후방에서 그런 일을 도맡은 이가 있었습니다. 앞의 제사(題詞)에서 소개한 레비탄이라는 아나운서.
레비탄의 전달 기법과 그에 따른 영향력을 히틀러도 높이 평가했어요. 물론, 이를 갈면서 말이지요. 그래서 레비탄을 자신이 개인적으로 응징해야 할 적수 1호라고 공표하고, 독일군이 모스크바를 점령하는 즉시 가장 먼저 처단하겠다고 다짐했어요. 그리고 이 아나운서의 목에 25만 마르크라는 현상금이 걸리게 될 정도였습니다. (*아래 동영상은 1941년 독일군의 침공을 알리고, 이에 대응하여 선전포고를 하는 라디오 방송입니다.)
“뛰어난 배우는 전화번호부조차 다들 숨죽이고 듣게끔 읽을 줄 알아야 한다”
하고 강조한 레비탄에 관한 이야기가 우리와 거리가 좀 멀게 느껴지나요?
그렇다면 우리와 더 가까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경우를 하나 들겠습니다.
바로 북조선 중앙 텔레비전방송의 리춘희 방송원 (아나운서).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 동지께서 주체 100년 12월 17일 여덟 시 삼십 분 현지 지도의 길에서 급병으로 서거하시었다는 것을 가장 비통한 심정으로” 알리는 그녀의 전달에 파토스는 차고 넘쳤습니다.
비록 우리가 보기에는파토스가 지나치고, 그래서 작위적이고 과장된 면이 강하다 싶지만, 그런 면을 감안하더라도 그이의 파토스가 우리에게도 밀려오는 것을 전부 뿌리치지는 못했을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트위터 이용자한테서 이런 글이 나오겠지요? ‘김정일 사망 소식에 아나운서의 울먹이는 목소리, 저토록 슬픈 보도는 처음이네. 호~’
아래 동영상은 그 뒤 은퇴했다가 다시 등장한 리춘희 방송원이 모습인데, 이 자체가 뉴스거리가 되기도 했었지요?
이미 국내 언론에서 많이 보도했다시피, 리춘희 아나운서에게는 ‘독특한 화술’이 있어요.
그이가 강조하는 면을 볼까요?
“방송할 때 가장 유의하는 것은 보도 성격에 따라 억양과 소리 빛깔, 화술 방법을 바꾸는 것. 기본은 인민들이 받아들이기 쉽고 그들의 사상 감정에 맞는, 그들이 좋아하는 화술 방법으로 보도하는 것”이라고 하네요.
또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위원장에 관련된 보도를 할 때는 “한없이 경건한 마음을 안고 정중히 보도”하고 “원쑤들을 칠 내용과 관련한 보도를 할 때는 증오심을 갖고 언성을 높인다”고 합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앞에서 알아본 파토스요, 파토스를 키우는 방법이요, 파토스를 청자들과 연결하는 기술입니다.
전달 내용 이해,
목소리, 어조,
어감,
휴지,
눈빛,
자세,
제스처,
분위기,
의상…
우리는 누구나 다 레비탄이나 리춘희처럼 텍스트를 파토스가 넘치게끔 읽는 솜씨를 배울 수 있습니다. 그렇게 읽기를 익히고 난 뒤에는, 자신의 이야기도 더 감성적으로 말하고 듣는 이들의 심금을 울릴 수 있게, 즉 자기 말의 영향력을 키우게 될 겁니다.
- 과연 그럴까?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충분히 할 수 있어요!!
좋아하는 산문 작품에서 한 대목을 고르세요.
이왕이면 <춘향전>이나 <심청전> 같은 고전과 오랜 기간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작품들을 권합니다. 이기영, 홍명희, 이문구, 박경리, 최명희, 조정래, 조세희, 김주영, 최인훈… 또 좋은(!) 번역 작품도 괜찮아요.
그걸 하루 반시간이라도 소리 내어 읽으세요. 녹음해야 합니다.
길지 않은 대목을 한 번 읽고 들어봤어요?
그러면 곧 두 번째 읽고 다시 들으세요.
이어서 다음 대목을 읽고 들어요.
한 번 더 녹음하고 들으세요.
마침표, 쉼표, 인용부 같은 문장 부호를 잘 지키면서 읽도록 하세요.
각 문구에서 핵심 단어를 정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논리적인 읽기를 익히기 위해, 어떤 단어를 강조할지 텍스트에 미리 표시해 두세요.
그리고 각 단어의 발음에서 장단을 구분하세요.
우리말을 더듬지 않고 정확하면서도 가락을 실어 맛깔나게 하려면
무엇보다도 이 장단 발음을 확실히 구분하고 잘 지키는 것이 지극히(!) 중요합니다!!
언론인 강상헌 씨는 이렇게 지적하는군요.
「“이 회사는 사원들의 사기를 높이는데 힘을 썼습니다.” TV 방송 여자 진행자의 말, 뭔가 이상하다. 똑똑해 보이던 그 예쁜 얼굴이 달리 보인다. ‘사기’라는 단어의 발음 때문이다. 사기가 가득할 때 개인이나 조직은 성공한다. 한자로는 士氣, 읽을 때는 [사:기]로 ‘사’자를 길게 발음한다. ‘사’를 짧게 발음하면 바로 ‘사기 친다’는 詐欺가 된다. 그 MC는 [사:기]로 읽어야 할 사기(士氣)를 [사기]로 읽어 사기(詐欺)와 헷갈리게 한 것이다.」
흠, 맞는 지적입니다. 맞고말고요!
안타까운 마음에서 ‘똑똑하고 예뻐 보이던 얼굴이 달리 보인다’고 완곡하게 표현했는데, 앞에서 우리가 나눈 식으로 얘기하자면 그 여성 진행자는 자기 블라우스에 벼룩을 한 마리 달고 있는 꼴이 되네요.
다른 사람에게 연민이나 동정심을 유발하는 성질이나 힘, 혹은 어떤 예술작품의 감정적 요소나 주관적 요소를 가리킵니다.
흔히 페이소스라고도 하지요.
그러면 이 파토스가 화자들에게 왜 중요할까요?
공포나 애정, 연민, 분노 따위 모든 감정은 듣는 이들을 강력하게 자극하고 어떤 동기를 부여하는 요소입니다.
우리가 하는 말에 감정적으로 잘 달구어진 청중은 우리의 체험이나 정서를 공유하면서 우리의 주장을 더 잘 수용하고 우리가 하는 행동 촉구에 더 잘 호응할 거예요.
듣는 이들의 감정을 건드리고 감정적으로 호소하는 방법을 익힌다면,
우리의 연설이나 이야기, 주장은 훨씬 더 잘 먹혀들겠지요.
특히 설득 스피치에서 아주 중요합니다.
그러면 화자로서 우리는 청자들의 어떤 감정을 일깨워야 하나요?
간단히 말해, 모든 감정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간단히 생각한다면 문제가 생길지도 모릅니다.
많은 철학자들과 심리학자들이 감정을 일정한 범주로 분류하려고 오랜 세월 시도해 왔어요.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법>에서 감정을 일곱 가지 상반되는 쌍으로 나눕니다.
*분노와 평온
*우의와 적의
*두려움과 자신감
*수치심과 뻔뻔함
*친절과 불친절
*동정과 분개
*선망과 대항
이에 비해 20세기 심리학자 로버트 플루칙(1927-2006)은 열여섯 가지 정서를 제시하는 등 감정 분류가 많이 있는데, 무엇이 확실한 것인지가 우리에게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사실 정확한 분류는 없을지도 몰라요.
그 대신 설득을 염두에 두는 화자들은 (고도의 에토스를 갖춘 상태에서) 이런 점을 목표로 잡아야 할 겁니다. 즉, 여러 가지 정서를 인식하고, 청중의 어떤 정서를 일깨울지 정하고, 그렇게 하는 방법을 익히기.
-청중의 감정을 어떤 것이든 다 건드려야 하나? 만약 기쁨을 느끼게 할 때처럼 혐오가 일도록 만든다면, 청중은 내 견해에 동조할까?
그렇지 않습니다. 건드리는 감정은 발언 맥락에 어울려야 돼요.
토론의 경우, 대체로 우리는 우리 주장과 논적의 주장에 대해 우리가 느끼는 것을 청중도 느끼기를 바랍니다. 즉, 청중이 우리 편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긍정적 정서와 부정적 정서의 차이에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마디로, 경탄이나 기쁨, 존중 같은 긍정적 느낌은 당신의 요구나 설득적인 논증과 결합되어야 하고, 반면에 공포나 경멸, 실망 같은 부정적 감정은 당신 논적의 주장과 연결되도록 합니다.
파토스가 화자들에게 왜 긴요한지, 요약해 볼까요?
파토스란, 청자의 감정을 일깨우고 그 감정을 발언에 전략적으로 연결하는 능력이라고 정리합시다.
이런 파토스를 잘 이용하면, 듣는 이들은 우리가 지닌 감정을 고대로 맛보게 되겠지요. 우리가 전하는 스토리 속의 인물들이 겪은 아픔과 기쁨, 희망, 두려움을 함께 느낄 거예요. 그러면 청자들은 소극적인 상태를 떨치고 우리의 호소와 촉구에 적극 반응할 겁니다.
파토스를 잘 이용하지 못하면, 청중은 자극이나 감흥을 느끼지 못하고, 느낀다 해도 미미할 것이며, 따라서 동기 부여도 잘 안 됩니다. 우리에게 호응하기보다는 오히려 우리의 논리적 주장에서 흠을 찾으려 들 겁니다.
이제 다양한 감정 경로를 통해 스피치에서 강한 파토스를 세우는 방법을 함께 생각해 봅시다.
즉,파토스가 충만하게 말을 하려면?
몇 가지만 알아보지요.
첫째, 정서가 깃든 주제와 주안점들을 고르기.
제한된 발언 시간에 어떤 점들을 포함하고 강조할지, 선택은 늘 우리에게 달려 있어요.
강력한 감정이 실리고 느낌을 야기하는 것들이 필요해요.
예를 들어, 사람들이 스피치 기법을 익혀야 하는 이유 열다섯 가지를 준비했다고 쳐요. 한데 아쉽게도 시간상 서너 가지만 거론할 수 있다면, 어떤 것을 골라야 할까요?
“발언 공포를 정복하라”와 “더 섬세하게 말하는 법을 배우라”,
둘 중에서 어떤 게 더 강한 감정을 일으킬까요?
둘째, 감정 상태를 강조해 주는 단어들을 고르기.
단어들 가운데는 감정적으로 무덤덤한 것도 있고 느낌이 충만한 것도 있어요.
말하기에 유리하게 작용하는 감정에 적합한 어휘를 선택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정치적으로 반대 진영에 속한 폭탄 자살자를 어떻게 칭하는 것이 당신 스피치에 더 잘 어울릴까요? 테러리스트? 순교자?
이건 어렵지 않은 문제입니다.
셋째, 직유와 메타포 같은수사적 장치를 적극 활용하기.
그럴 때 스피치가 더 흥미롭게 되며, 청중이 이미 느낀 감정을 톡톡 건드림으로써 감정 연결이 수월합니다.
예를 들어, 조직폭력배 문제를 거론하면서
“우리 도시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하고 평이하게 언급할 수도 있지만, 그와 달리
“우리 도시에서 암세포들이 커지고 있습니다”
하고 표현할 수도 있어요.
어떤 표현이 청자들 가슴에 더 와 닿고 감정을 더 자극할까요?
아하, 암세포라, 이건 반드시 찾아내서 뿌리 뽑아야 하는 거야…
그 밖에 개인 스토리 구연, 그 스토리텔링과 밀접하게 연관된 유머 구사, 또 추상적인 단어들을 대체하는 영상 자료 동원 따위가 있겠는데, 이때 전달 기법이 감정을 잘 떠받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전달 기술이 뛰어나면 당신이 청중에게서 불러일으키려는 감정이 커지고,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그렇지 못하겠지요. 아니, 도리어 역효과마저 내기가 쉬워요!
가끔 보면 이상한 가수들이 있어요. 노랫말이 애절하고 가락이 구슬픈 노래를 부르면서 입꼬리를 추켜올리고 눈가에 웃음기를 띠는 경우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이해하기 어려워요.
‘이렇게 슬픈 노래를 저렇게 웃음기 머금고 부를 수 있단 말이야?’
이건 전달 테크닉이 노래에 담긴 정서를 잘 다루지 못하는 것일 뿐 아니라, 즉 감정이입이 없을 뿐 아니라, 나아가서 역행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럴 때 감수성 예민한 이들은 당혹감을 느낄 수 있어요. 노래하는 사람이 전하려는 정서가 무엇인지 헷갈려요. ‘슬프다는 거야, 즐겁다는 거야?’ 그럴 때 듣는 이들한테서 적절한 호응을 얻기란 어려울 겁니다.
노래만이 아니라 발표, 이야기, 대화, 전달 등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박영석 산악대장에 관한 비보를 전하면서 얼굴에 웃음을 머금은 사건 때문에 KBS의 한 아나운서가 구설수에 많이 올랐었지요. 물론 의도적인 행동은 아니었을 텐데, 그렇다면 자신이 전달하는 내용의 의미를 모르거나 무심했던 것으로 해석되기 쉽습니다. 마음을 담아야 합니다.
파토스의 목표는 듣는 이들과 감성적으로 연결되고 정서를 공유하는 것임을 기억하십시오.
어떤 감정을 듣는 이들과 나누려면 당신이 먼저 그것을 느껴야 하지 않겠습니까?
파토스를 가지고 청중과 장난을 친다면, 에토스마저 심하게 손상되기 마련입니다. 솔직하고 정직해야 합니다.
이 대목을 목소리 기법으로 보자면, 목소리를 감정에 맞추라는 겁니다.
톤, 크기, 속도 등 목소리 요소에 감정이 실려야 합니다. 예를 들어, 노여움은 크고 도전적 목소리로, 슬픔이나 절망은 낮고 약한 목소리로. 또 낙관이나 흥분 상태에서는 말이 빨라질 수 있겠지요.
목소리뿐 아니라 제스처도 감정과 일치해야 돼요.
우리 몸은 우리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정직한 표현 수단입니다.
사랑이나 기쁨을 말하면서 몸이 마네킹처럼 보여도 될까요? 절망에 빠졌던 사연을 이야기할 때는 어깨가 처질 것이고 웃음 지을 일이 없습니다.
어떤 감정을 청자들이 공유하게 하려면, 그 감정에 걸맞은 목소리와 제스처를 취하면서 눈길을 연결할 필요가 있어요.
감정 상태를 다른 이들과 연결하는 통로는 바로 시선 접촉.
당신에게 절절한 좌절이나 혐오, 기쁨 같은 감정을 당신 말을 듣고 보는 사람이 거울처럼 되돌려 줄 때, 비로소 접속이 가장 이상적으로 설정된 겁니다.
- <아름다운 구속>이라니! 세상에 그런 게 어디 있어? <양들의 침묵>에 나오는 안소니 홉킨스를 봐! 구속복(strait jacket)에 갇혀서 옴짝달싹도 못하잖아? 그런데… 그걸 아름답다고 하다니, 대체 뭘 말하려는 거지?
그래요,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군요.
이렇게 역설적이거나 대조적인 단어들을 결합하여 만든 제목이 실제로 많이 있어요.
논설이나 칼럼 따위 제목으로 평론가들이 즐겨 쓰는 수법이기도 합니다.
<빛과 그림자>, <전쟁과 평화>, <뜨거운 냉전>, <종말의 시작>, <말하기와 침묵하기>, <나쁜 평화가 좋은 분쟁보다 더 낫다> 등등.
대조와 반의를 이용한 것은 아니지만, <양들의 침묵>이라는 제목 역시 우리의 눈길을 끕니다.
이 제목을 접할 때 당신에게는 어떤 생각이나 느낌, 이미지가 떠오르나요?
제목을 궁리하다 보면 판타지가 커져요.
즉, 일정한 틀에서 벗어나 감성과 생각을 더 자유로이 굴리게 됩니다.
이건 말 잘 하기를 익히고자 하는 이들에게도 아주 필요한 요소입니다.
그렇다면 좋은 스피치 제목은 어떻게 뽑나요?
무엇보다도독창성이 필요하겠지요. 남의 것을 베끼지 않고 자기만의 새롭고 독특한 것을 내놓아야겠어요. ‘모방은 제 2의 창조’라는 말도 있지만, 그것 역시 본래 물건에 뭔가 새로움을 덧붙인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좋은 제목은 스피치 주제나 자료와 밀접한 관계에 있어요. 피라미드 꼭짓점처럼 내용을 다 요약해 끌어당기는 것이면 좋겠지요.
추상적인 것보다 구체적인 것이 좋을 때가 더 많기도 하고. 좋은 제목은 이왕이면 길지 않아야 합니다. (물론 길지만 기억에 남는 제목들도 있긴 해요.)
머리보다 가슴을 겨냥한 제목이 더 친근하고 쉽게 와 닿는 경향이 큽니다. 이른바 메타언어를 동원할 필요도 있어요. ☞ 메타 언어
하지만자료 성격에 따라 제목에 대한 접근에도 차이가 있다는 점을 유념하기 바랍니다. 즉, 문학 작품이나 시, 시사성을 띤 글이나 학술적인 글 등의 제목 뽑기는 조금 다르게 다가들 필요가 있다는 점.
이제 좋은 제목을 뽑기 위해 어쩌면 가장 근본적이고 중요한 문제를 건드리고자 합니다.
곧, 어휘 늘리기!
좋은 제목을 뽑기 위해서 어휘를 늘려야 한다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어휘를 늘리면 좋은 제목을 궁리하는 데도 저절로 도움이 된다는 뜻이에요.
풍부한 어휘는 그 자체로 사람의 지적 발달 상태의 징표니까요.
먼저, 이런 정의를 되새겨봅시다.
“말하기란 여러 활동과 사회적 소통에서 다른 이들에게 작용하려는 목적으로 사람의 생각과 감정과 갈망을 표현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사용되는어휘 덕분에 말이 소통과 전달, 감정 표현, 다른 이들에게 영향 끼치기 따위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다.”
어휘를 통해 우리는 단순히 뭔가를 전할 뿐 아니라 우리가 납득한 현실에 대한 정보를 반영하고 고정하고 보전할 수 있게 됩니다. 바로 이 때문에 말을 사회적 현상이면서 문화의 한 부분이요 요소로 간주합니다.
또, 그런 연유에서, 언어적 소통 문화와 풍부한 어휘를 키움으로써 우리는 소통과 생각의 표현 방법들을 지닐 뿐 아니라 민족문화에 접하고 거대한 정신적 부를 얻게 됩니다.
그런데, 어휘력은 많은 단어를 알고 있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적절하게 활용할 줄도 알아야 비로소
“아, 저이가 구사하는 어휘는 참으로 풍부하고 다양해서 늘 신선한 걸!”
하는 찬사가 나오게 됩니다.
어휘를 구성하는 낱말과 표현에도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 상이한 뜻을 한 몸에 담고 있는 다의어는 그 뜻을 정확이 구분하여 쓴다면, 어휘력 증대에 한몫을 합니다. *동음이의어는 문자 그대로 듣기에는 같지만 뜻이 전혀 다르지요? *반의어는 앞에서 잠깐 나왔다시피 대조와 대비를 강조할 때 많이 씁니다.특수한 문체 효과를 염두에 둔 경우에도 그렇습니다.
*동의어는 같은 개념이나 현상에 다양한 뉘앙스를 줄 수 있습니다. * 우리말에서유음이의어가 좀 골치 아픈 축에 들어요. 발음과 표기에서 혼동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토박이말을 따로 모아 보십시오. 새록새록 재미가 날 겁니다. 당신의 인식 지평이 더 넓어질 겁니다. *신조어는 역사 과정 내내 나타납니다. 사회 관계에서 일어난 변화, 학문과 기술에서 새로운 발견, 새로운 개념들의 출현 따위가 그 원인이에요. 요즘에는 특히 인터넷이나 IT와 관련된 신조어가 많이 등장합니다. *고어는 과거에 한때 쓰였지만 오늘날 다른 말로 바뀌지 않은 말. 어휘에도 응당 생겨났다가 스러지는 숙명이 있습니다.
*차용어나외래어는 살아있는 말에 자연스럽고 적법한 현상이에요. 그 정도가 사회마다 다를 수도 있긴 하지만 말입니다. 우리 한국어는 차용어에 좀 과도하게 개방적인 게 아닌가 싶습니다.가능하면, 최대한, 우리말로 표현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우리말 어휘를 살찌우는 길이기도 하고.
*시, 속담, 격언, 경구, 관용구등은 그 자체로 지혜덩어리, 많이 알고 기억해 두면 삶의 방향을 잡는 데 도움이 될 뿐 아니라 어휘력을 늘리는 데도 크게 기여합니다.
앞의 각 항목을 두고 자세히 얘기 나누고 싶지만, 말이 너무 길어져서 당신을 힘들게 하지 않을까 저어하는 마음이 들어 생략하겠습니다. 그 대신 어휘의 생성과 역할에 관해 좀 더 생각해 보고 이 대목을 마무리하지요.
새로운 단어와 표현이 나타나고, 기존 단어의 의미에 새로운 의미들이 보태지고, 단어의 활용 분야가 넓어짐으로써 어휘는 늘어갑니다. 그런데 이런 변화는 다 회화어라는 대장간에서 단련되고 축적된다고 간주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풍부한 어휘를 위해서는 글말에 비해 규칙이 덜 엄격하고 변형이 많은 회화어가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작가와 시인, 사회평론가들이 마르지 않는 어휘 원천으로서 사람들 간의 자유로운 대화를 주목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에요.
그냥 듣기 위해서는 건강한 청력과 들으려는 마음만 있으면 되지만, 경청 기술을 익히려면 알아두어야 할 것이 제법 있어요.
경청 기법을 익히지 못한 사람이 감수해야 하는 손실은 자못 큽니다.
소통 과정에서 소중한 정보를 아주 많이 잃어요. 제스처와 표정, 억양에서 나오는 정보까지 포함하여 그렇습니다. 그래서 듣기는 하지만 일부에 그치고, 이해는 하지만 일부에 불과하고, 그렇기 때문에 들은 것에 반응은 하지만 적합하지 않은 경우가 허다해요. 사오정이 되기 쉬워요.
정보 상실뿐 아니라, 상대방한테서 호감과 믿음까지 잃으면서 대인관계를 치명적으로 일그러뜨리게 될 가능성도 상당히 높습니다. 어때요, 생각만 해도 끔찍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런 부정적인 측면보다 긍정적인 쪽에서 접근하도록 합시다.
상대방 말을 귀담아듣고 제대로 이해하는 청자들이 누리는 혜택에는 이런 것이 있습니다.
1. 불쾌한 일들을 예방한다. 당신에게 눈길 돌리고 귀 기울이는 이들하고는 오해 따위로 인해 다툴 일이 거의 생기지 않잖아요?
2. 더 통달하게 된다. 주의 깊게 듣고 들은 것을 숙고하면서, 당신은 지식과 인식의 세계를 가장 효과적으로 넓히게 되어요. 정보를 가진 자가 세상을 지배한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3. 다른 이들의 존중을 받게 된다. 당신도 자기 말을 적극적으로 들어주는 사람을 존중하게 되지 않습니까?
4. 필요한 것을 얻게 된다. 당신에게 긴요한 것을 다른 이들한테서 얻는 방법이 있는데, 그걸 배울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경청 또 경청입니다.
5. 상대의 격한 감정을 수습할 수 있다. 분노에 차거나 비탄에 빠진 사람이 하는 말을 공감과 이해를 표하면서 끝까지 지멸있게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상대는 크나큰 만족을 얻게 돼요. 모든 카운슬링의 기본이 이것 아니겠어요?
다른 이들의 말을 경청하는 방법을 배우고 익히십시오.
당신 인생이 송두리째 장밋빛으로 바뀌게 됩니다!
적극적으로 듣고 이해하는 청자들에게는 이런 공통점이 있습니다.
*불필요한 반응을 억제하고 집중하여 듣기
이건 입을 다문 채 주의를 기울이는 솜씨.
상대방 말에 대한 반향과 평가를 최소화함으로써, 상대방의 생각을 흩트리지 않고 말하기를 방해하지 않는 것.
이 점을 잘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아요.
어떤 이들은 자신의 끼어들기가 맞장구를 치는 것이라고 강변하기도 하는데, 그런 경우 그 둘의 차이가 무엇인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자기 생각은 잠시 떠나고 자잘한 반향 없이 상대방 말을 귀담아들을 때, 우리는 상대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또한 많은 정보와 지식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이게 됩니다.
예를 들어, 고객이 편한 상태에서 더 많이 말할 수 있게끔 분위기를 이끄는 것이 훌륭한 판매자가 되는 지름길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고객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왜 필요로 하는 것인지, 구매 계획은 어떤지, 감을 잡고 판매 설계를 세우는 겁니다.
그런데 적지 않은 판매원들은 고객의 생각과 말을 충분히 듣지 않은 채 상품의 장점과 구입 시 이점 따위 설명에만 열을 올립니다. 물론 제 딴에는 고객을 위한 것이라는 생각으로 그렇게 하겠지만, 그 결과 고객들 중 열에 아홉은 질겁하여 달아날 게 분명해요.
집중하여 듣는다는 것이 눈길을 딱딱하게 고정하고 있으란 뜻은 아니에요.
경청하는 내용에 반응을 보일 필요가 있어요. 그건, 간간이 고개를 끄덕이거나 표정에 가벼운 변화를 주거나, “네”, “그래요” 같이 짤막하게 대응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규명하기
어떤 내용이나 사안을 확인하기 위해 화자에게 짧게 말을 거는 것.
“그 대목을 다시 말해줄 수 있어요?”
“그 부분을 설명 좀 해줘.”
“지금 그 말을 내가 제대로 이해했는지 알고 싶어.”
이런 식으로 가볍게 끼어 넣는 질문은 상대의 말을 방해하기보다는 상대가 자기 생각을 더 구체적으로 표명하도록 돕는 것이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기
“달리 말해, 당신은 …이라고 여기는 건가요?”
“당신 말을 내가 제대로 알아들었다면, 그건 …”
이런 행위 역시 상대방 말을 얼마나 정확히 이해했는지 확인하기 위한 것.
이때는 상대의 감정이 아니라 전달하는 의미에 초점을 맞춥니다. 들은 것에서 중요한 것을 간추려 청자 위치에서 다시 표현합니다. 그러나 다시 말하려 하면서 상대의 말을 가로채서는 안 되겠지요. 상대가 휴지를 취할 때가 적절한 순간일 거예요.
*요약하기
이건 상대가 한 말을 정리하는 것.
앞의 두 항목이 부분적으로 필요하다면, 이건 어떤 단락에서, 혹은 전체적 맥락에서, 상대방 말의 압축된 형태요 상대방 생각의 골자를 확인하는 셈이 됩니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마음 가는 대로 살 필요가 있다는 말씀인가요?”
“즉, 우리는 남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이해하면 될까요?”
이렇게 요약하면서,
상대방 뜻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인지 간간이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요약이 틀리지 않다면 상대는 당신의 경청 자세와 이해력에 기쁨과 고마움을 품을 것이고, 혹여 정리가 좀 잘못 됐다 해도 자신의 주된 생각을 흔쾌히 되풀이할 거예요.
*정서 반영
상대의 감정 상태에 중점을 두고 그것을 반영하면서 그의 정서를 이해하고 있음을 내보이는 것.
이건 최대한 부드럽게 표현하는 것이 좋습니다.
“내가 보기에 너는 …을 느끼는 것 같아.”
“당신 심정이 이해가 돼요. (당신과 같은 것을 느껴요.)”
상대방 감정의 크기를 고려할 필요도 있습니다.
“당신은 (많이, 혹은 좀) 힘들어 보이는군요.”
상대의 감정을 얼굴 표정과 제스처, 억양, 사용하는 어휘, 분위기를 통해 이해하도록 애쓰면서, 같은 입장에서 당신이 느끼는 것을 최대한 생생하게 흉중에서 그리는 겁니다.
경청이란 사실 품이 상당히 많이 드는 과정이에요. 심신의 피로도가 높아요. 필요하고 적절한 정보를 선택하면서 우리 뇌에 부하가 많이 걸립니다. 그런 걸 감안하면, 허튼소리나 영양가 없는 얘기는 경청하기를 거부할 권리도 있겠지요.
바둑 티브이를 가끔 시청해요. 한데 ‘…인/한 것으로 보여진다’는 표현이 들릴 때마다 신경이 곤두서곤 합니다. 우리말에 그런 표현은 없으니까요!
그런데 근래에 이 “보여집니다”가 상당히 많이 들려와요. 스포츠 해설에서도, 강연에서도, 시민 인터뷰에서도, 신문 기사에서도, 심지어 뉴스앵커라는 사람의 입에서조차 이런 표현이 자꾸 퍼지고 있지 뭡니까. 오, 맙소사!~
“남들에게 보여지는 면을 중시하는 한국 사회의 실정이…”
“일련의 후보 경선 과정에서 보여졌던 의문점…”
“그건 무척 힘든 일로 보여졌어요.”
왜 이런 그릇된 현상이 생기는 걸까요? 흥미롭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영어 같이 수동태가 능동태 못지않게 자연스레 쓰이는 외국어의 악영향이라고 간단히 규정할 수 있을 거예요. 사대주의가 무의식에 자리 잡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누구나 알고 있듯이, 우리말 수동형은 두 가지 방법으로 만들어집니다.
첫째, 타동사 어간 + ‘이, 히, 리, 기’ 둘째, 타동사 어간 + ‘아/어지다‘
따라서 ‘보여지다, 불리어지다, 쓰여지다, 생각되어지다’ 등은 피동 표현이 중복된 것으로서 피해야 합니다. 그냥 ‘보이다, 불리다, 쓰이다, 생각되다’로 충분하고 자연스러워요.
또 우리말에는 피동형이 활발하지 않기 때문에, 피동형 표현은 꼭 필요한 경우에만 알맞게 사용하는 것이 좋습니다.
따라서 한 공중파 방송에서 들린
“바다오리는 곧 바다로 돌려보내질 방침입니다”는
‘바다오리를 곧 돌려보낼 방침’으로 바꾸고,
바둑 티브이 해설에서 잘 들리는
“강수를 두는 기사들에 의해 잘 두어지는 수법”은
‘강수를 두는 기사들이 잘 두는 (즐겨 쓰는) 수법’으로 바꾸는 것이 우리 어법에 더 적절하겠지요.
이런 그릇된 현상이 생기는 원인으로는 또 우리네 말과 글에 대한 관심이 덜하고 기초가 확고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겁니다. 외국어에, 영어에 들이는 시간과 노력을 우리말에는 쏟지 않습니다.
왜?
(당장에, 현실적으로는) 그래도 되니까.
그렇다면, 그건 또 왜?
흠… 그 다음은 당신께서도 한번 생각해 주십시오. (개개인 수준의 문제, 아니면 국가적 정책 차원의 문제, 어느 쪽에 더 눈길을 돌리렵니까?)
나로서는 이 대목에서 이런 경구 하나만 소개하겠습니다.
모국어를 어떤 자세로 대해야 하는지… 이백여 년 전 볼테르의 언급입니다.
“웬만한 주요 외국어들을 다 6년이면 습득할 수 있다. 그러나 모국어 공부는 평생 해도 모자란다.”
어떻습니까? 고개를 끄덕였나요, 아니면 가로저었나요?
말하기를 잘 하려면 먼저 듣기를 잘 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로, 외국어를 잘 하려면 먼저 모국어를 잘 해야 한다는 것이 우리 생각입니다. 외국어를 아무리 잘 해도 우리말이 매끄럽지 못하면, 그 재주를 빛내기 어렵다는 뜻이에요.
좋은 번역가로 이윤기, 안정효 같은 이들을 들지 않습니까?
그이들보다 외국어를 더 잘 아는 번역가들이 없단 말인가요?
당신이 가족이나 친구, 지인들과 어울려 작은 동아리에서 사적으로 이야기할 때는 어떻게 말하든 난 굳이 나서서 꼬집고 들추지 않겠어요. 간섭할 권리도, 시간도 없어요. (물론, 그런 경우에도 당신이 지금보다 더 올바르고 듣기 좋고 품위 있게 말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야 굴뚝같지요. 그래서 이런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게 아니겠어요?)
하지만 당신이 교사이거나 강연자, 배우, 가수, 방송 진행자, 정치인 같은 그룹에 속하고, 많은 사람들을 상대로 자주 말하는 직업인이라면, 그런데도 적절한 어휘를 쓰지 않거나 발음을 틀리거나 한다면, 난 방관만 하고 있지 못할 거예요.
안타깝게도, 당신 넥타이나 블라우스 위에서 톡톡 튀는 벼룩과 이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어요.
이들은 빠르게 번지고, 박멸 대상이니까요.
이번 #액션을 위해서 수첩을 하나 따로 준비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채우게 될 테니까요.
수첩에 이런 이름을 붙여도 괜찮겠어요. <잘못 쓰거나 어색하거나 피해야 할 사례>
그리고 이런 식으로 범주를 정하고, 티브이나 라디오, 직장, 학교, 모임… 어디서든 사람들이 하는 말을 잘 듣고 잘못된 것을 일일이 적어 보세요.
1. 잘못 쓰는 (적절하지 않은) 단어와 어구, 표현 2. 번역 투를 쓰는 경우. 그럴 때 우리 어법에 더 어울리는 표현은?
3. 불필요한 (무분별한) 외국어 쪼가리 낱말을 사용하는 경우 4. 그런 외국어(외래어)를 대신할 우리말은?
5. 개념 정립이 필요한 낱말 무리 6. 은어, 비속어, 욕설 따위
7. 말의 품격과 관련된 단어, 어구, 표현 8. 언어를 오염시키는 표현
9. 이상한 존칭, 잘못된 호칭 사용 10. 입말과 글말의 차이
11. 표기상 주의할 단어 12. 중첩되는 말, 군더더기 단어와 음향
13. 비표준어 (사투리, 방언) 14. 틀린 발음
당신이 감을 더 잘 잡도록, 예를 몇 가지 들겠습니다.
1. 공정선거를 치룰까요. → 치르다. 대인배 → 대인. 주구장창 → 주야장천. 입에 개거품을 물고 → 게거품. 행복한 하루 되세요. →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 보내기 바랍니다. 어의가 없어 -> 어이가 없어.
3. 입장 표시를 한 것으로 → 입장을 표시한 것으로
6. 국가와 정부, 정권, 나라를 맥락에 적절하게 사용하는지 따위. 진보, 보수, 수구의 개념과 올바른 적용. 공인과 유명인의 개념, 전기세와 전기 요금의 차이.
7. 안습, 짭새, 대가리, 지랄
8. 뻥치지 마. 쫄지 마.
9. “완전 대박이야!” “완전 멋있어.”
10. 내가 잘 아시는 분이… → 아는 분이. 중국 어선들이 저희 쪽으로 들어오는 것 같습니다. → 우리 쪽으로. 마음 잡수시고요. → 마음먹고요. 부모님 전화가 오시면 → 전화가 오면, 부모님이 전화하시면. 주문하신 커피가 나오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몰라서 저지르는 실수를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언어 감각을 키우는 것이 중요해요.
물론 그런 오류를 피함으로써 당신이 하는 말은 격이 더 커지고 당신 이미지는 더욱 깔끔해집니다.
어떤 사람이 소크라테스에게 자기 아들을 데리고 와서 됨됨이를 좀 살펴보고 웅변술을 (스피치 기법을) 가르쳐 달라고 당부했어요. 소크라테스가 젊은이를 가만히 뜯어보다가 결국 한마디 하고 말았네요.
“말을 좀 해 보게. 그래야 자네가 어떤 사람인지 내 알 수 있지!”
그래요, 이건 사람의 재질이나 교양 수준, 됨됨이 따위를 판단할 수 있는 현명하고 아주 올바른 방법입니다. 고대의 현자는 제자를 들일 때마다 그렇게 요구하곤 했어요.
어떤 사람이 어떻게 말하는지를 보고 들으면서 우리는 그 사람을 웬만큼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가 사용하는 어휘와 말투, 표정, 제스처 등의 의미를 분별할 줄 안다면, 그의 지적 수준, 하는 일, 성향, 나아가서 진정성과 마음씀씀이까지 알아내기에 충분합니다.
교언영색도 여기서는 먹히지 않아요. 걸러낼 줄 아니까요. 그러면, 사기와 협잡에 당할 일도 없겠지요. 나도 이제는 몇 마디 말하는 걸 보고 듣기만 해도 그 사람을 훤히 알 수 있어요.
지금 우리가 나눈 얘기를 뒤집어 보면 이런 뜻이 되기도 합니다.
곧, 우리가 말하는 내용과 투를 보고 들으면서 주변 사람들은 우리에 대한 인상을 ‘우리가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더 깊고 강하게’ 받아 새겨둔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 (문화 수준의 지표인) 말의 정확함과 능숙함이,
- (지적 수준을 가리키는) 말의 내용이, 또
- (개성과 됨됨이를 드러내는) 말의 다른 섬세한 요소들이 다 중요합니다.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1889-1976)는 사람에게 ‘존재의 집’은 자연이 아니라 언어라고 설파합니다.
나아가서, 언어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을 반영할 뿐 아니라 현실을 만들기도 해요.
언어는 사람을 만들기도 해요.
지문이 다 다르듯이, 말투도 (딕션도) 사람마다 다 다르잖습니까?
지문이야 좋고 나쁜 것이 없지만, 말투는 아름답고 흉한 것으로 나눌 수 있어요.
당신은 당신 말을 아름다운 것으로 만들고 싶나요, 아니면 흉한 것으로 만들려고 하나요? 만약 ‘적어도 꼴사납게 만들고 싶은 생각은 없어!’ 하는 마음이 든다면, 이 글을 계속 읽으세요. (제 얘기를 계속 들으세요.)
아쉽게도, 이번 #액션은 긍정이 아니라 부정적 측면에서 접근합니다.
왜냐면 특히 근자에 우리말 파괴 현상이 그 어느 때보다 더 심하게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국어를 파괴하는 이들이 판치는 현실이 슬프다. 세종대왕 때 처음 국어(나라말)라는 개념이 생겼다. 우리말을 중국의 방언쯤으로 치부하고 나라말 세우기에 반대한 최만리를 비롯해 김부식, 일연 등은 국어 발전의 훼방꾼이요 파괴자였다.
그런데 오늘날에도 언어는 정신세계와 아무 상관이 없다면서 한글과 우리 토박이말 쓰기를 반대하는, 현대판 국어 파괴자들이 학계며 정계, 행정계, 언론계에 널리 퍼져 있다. 그들은 영어 공용어 주장, 영어 조기 교육, 영어 창씨개명에 앞장서고, 정부 또한 장려하는 꼴이어서 나라말이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기를 맞고 있다.
어떻습니까?
이 인용문을 읽으면서 당신 가슴에 훈풍이 부나요, 아니면 삭풍이 몰아치나요? 궁금합니다.
의 인용은 한글학회를 오랫동안 이끌어온 허웅(1918-2004) 선생께서 작고하기 얼마 전에 남긴 말씀입니다. 제가 아나운서 ‘초짜’로 우리말 연수회에 참석했을 때, 선생의 입에서 나온 첫마디가 기억나는군요.
“여러분이 양해해주기 바랍니다. 제가 명색이 국어학자인데 경상도 억양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발음 문제는 노력하여 해결했지만, 이 억양은…”
그윽한 음성과 소박하고 단아한 자태가 인상적이었어요.
참다운 학자의 면모를 보았어요.
우리 마음에 누군가가 늘 기억될 때, 그는 죽어도 죽은 게 아닙니다.
우리는 국어학자가 아니에요. 하지만 허웅 선생 말씀대로 ‘이렇게 힘든 현실에서도 우리말을 지키고 빛내기 위해 애쓰는 분들이 있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말 지킴이는 되고 싶어요.
“말이 오르면 나라가 오르고, 말이 내리면 나라가 내린다.” “말이 있는 한 민족이 존재하지만, 말을 빼앗으면 민족도 사라진다.”
나라말에 관한 겁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자기 뜻을 표현하는 데 쓰는 말,
구성원들 간에 원만한 소통을 보장하는 말,
훌륭한 문학을 생성하는 언어에 관한 거예요.
우리 존재를 확인해주는 언어,
우리나라와 우리 공동체를 보전해주는 언어에 관한 거예요.
그런데 그걸 지키고 가꾸자고 과연 떠들어야 하나요?
그걸 국어학자나 시인, 작가, 연설가, 번역가, 배우, 성우, 아나운서 등 전문가나 관계자들만 해야 하나요?
정상적인 시민이요 교양인이라면 누구나 나서는 게 지극히 당연한 일 아닌가요?
중국, 일본, 태국, 베트남, 몽골, 중앙아시아, 아랍권 등지에서 한국어 열풍이 분다면서요? 기분 좋은 현상이에요. 중국어, 영어, 에스파냐어, 러시아어, 프랑스어 등과 함께 세계 공용어 반열에 들어선다면, 그 또한 어깨 으쓱거릴 만한 일 아니겠어요?
그런데! 그런 우리말이 정작 본향에서는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고 있다면…
이 무슨 모순이요 불상사란 말입니까!
나는 프랑스인들을 참으로 멋있는 민족이요 국민으로 봅니다. 주관적인 인상이겠으나, 그들은 독일인들의 합리성과 정확성, 이탈리아인들의 낭만과 예술성을 고루 갖추고 있는 게 아니냐 싶은 겁니다. 프랑스를 몇 차례 드나들기는 했지만 오래 체류했거나 그 사람들을 직접 자세히 알지는 못해요. 그러나 그들이 추구하는 방향과 취하는 행위를 보면 간접적으로나마 판단이 가능해요. 그들에게 박수 보내고 몹시 부럽게 여기는 것 두 가지가 있어요.
첫째, 나치에 동조하고 부역한 민족 반역자들을 확실하게 응징했다는 점.
프랑스인들은 앞으로 혹여 외세에 점령당해 아녀자들까지 다 목숨을 잃는 상황에 처한다 할지라도 조국을 배신하는 자들이 더 이상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런 믿음에서 바로 민족 정기가 나온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둘째, (그런 민족 정기를 유지하고 북돋는 수단인) 자기네 나라말과 전통문화를 지키고 가꾸기에 다들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다는 점.
지성의 전당인 <아카데미 프랑세즈>가 자국어를 다듬고 문화 전통을 유지한다는 목표 아래 설립된 것은 이미 1635년도였어요.
물론 지금 프랑스도 외국어, 특히 영어의 틈입 때문에 골치 아파 해요.
그러나 그들에게는 이 분야에서도 단호함이 있습니다.
이미 십여 년 전부터 자국어 사용을 법으로 의무화했어요.
어디서?
공공 문서, 학위 논문, 매스컴은 물론이고 상업용 간판이나 광고에서! 레스토랑 간판을 영어 같은 외국어로 표기했다면 적지 않은 벌금을 물게 됩니다. 그런 짓을 공무원이 할 경우에는 벌금이 훨씬 더 많아질 뿐 아니라 금고형까지 받을 수도 있어요.
더욱이 눈길을 끄는 것은,
이런 자국어 사용 의무화 법 시행을 프랑스인들 열에 아홉 이상이, 90%가 넘는 이들이 지지하고 있다는 사실이에요.
아아, 얼마나 부러운 사람들입니까!
당신 생각은 어떻습니까? 프랑스인들이 멋있어 보이나요? 아닌가요?
글쎄요, 제 생각에 전부나 일부에서 동의하지 못하겠다는 이들도 분명히 있을 겁니다.
조지 오웰이 깔끔하고 명료한 (영국) 영어 사용을 호소하면서 우려했던 것처럼, 감상적 의고주의(sentimental archaism)에 사로잡혀 있다는 지적이 나올지도 모르겠어요.
조지 오웰(1903-1950)은 이미 오십여 년 전에 <정치와 영어>라는 시평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언어의 타락은 결국 정치와 경제에서 비롯된다는 점이 분명하다. 일부 작가들의 악영향 탓만은 아니다. ...... 현대 영어에는, 특히 영어 글말에는 악습이 가득한데, 사람들이 아무 생각 없이 모방하면서 그 나쁜 것들이 자꾸 확산된다. 하지만 이건 관심을 갖고 노력만 하면 피할 수 있다. 이런 악습에서 벗어나면 사람은 더 명료하게 생각할 수 있고, 명료하게 생각하기는 정치 쇄신에 필요한 첫 행보이다:
오웰은 깨끗하고 좋은 영어를 위한 방법 몇 가지를 제시하는데,
그 중 하나로, 유용한 약어인 i.e., e.g., etc.를 제외하고 라틴어와 그리스어 등의 외래어를 쓸 이유가 전혀 없다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나쁜 글쓰기를 하는 사람들은 그런 외래어를 쓰면 더 위엄 있고 대단해 보이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고 꼬집습니다.
어떻습니까, 지금 우리네 상황과도 비슷한 면이 있지 않나요?
이건 어쩌면 말하기에서 더욱 더 조심해야 할 점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광고에서도 오류가 많이 보여요.
“완전 멋있어!” 부류의 터무니없는 말법을 버젓이 담고,
외래어를 필요 이상으로 남발하고,
심지어 혀짤배기 외국인까지 등장시키고…
그러면 더 멋있어 보인다고 생각하나요?
오늘날 광고가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지는 따로 말할 필요가 없겠지요.
미국의 사회심리학자 스튜어트 브리트(1907-1979)는 이런 비유로 그 중요성을 강조했어요.
“광고 없이 사업을 한다는 것은 어둠 속에서 아가씨들에게 윙크하는 것과 진배없다.”
하지만 광고 산업의 창의적 인물들 중 한 사람인 레오 버넷(1891-1972)의 말처럼
“나쁜 광고 문안이야 어떤 멍청이라도 쓸 수 있지만, 좋은 광고를 훼손하지 않으려면 정녕 재능이 필요”합니다.
광고가 공해 물질이 되지 않게 하려면 우리말을 올바르게 써야 합니다.
이런 이유에서 그렇습니다.
“말이 흐려지면 생각이 흐려지고,
생각이 흐려지면 정신이 흐려지고,
정신이 흐려지면 존재 자체가 흐려진다!”
앞에 소개한 하이데거와 다음 실습의 제사(題詞)로 삼은 톨스토이 같은 대가들의 말씀을 녹여서 만든 구호입니다.
신선한 공기와 따스한 햇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야외에서 사람들을 앞에 두고 말하기는 생각보다 쉽지 않아요. 피크닉이 아니니까요. 그래도 사람들이 야외에 계속 모이는 한, 야외 스피치도 사라지지 않을 거예요.
어떤 경우들이 있을까요?
*옥외에서 치르는 혼례식에서 주례를 서거나 사회를 보는 경우
*해변 바비큐 파티에서 건배사
*여름 행사에서 동료들에게 한마디
*리본 커팅 행사에서 축사
*스포츠 팀에게 격려사
*야외 정치 집회에서 지지자들에게 연설 등 제법 많아요.
야외에서 하는 스피치에 유리한 점이라면 무엇을 꼽을 수 있을까요?
아, 조명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네, 그렇군요. 그건 분명히 좋은 측면이라고 하겠어요.
반면에 화자에게 불리한 점이 제법 많습니다.
먼저, 의자에 앉아 있는 청중이야 상관없지만 저 뒤에서 옆에서 서성이는 사람들이 있어요. 개와 고양이들이 어슬렁거리기도 하는군요. 또 공간은 사방으로 툭 터였어요. 천장도 없지요. 이런 것들이 다 청중의 주의를 흩트리는 복병입니다. 화자로서는 눈길을 끌어 모아야 하는데!
눈길뿐 아니라 청각 작용에도 난관이 닥칩니다.
아무리 좋은 마이크와 확성기를 쓴다 해도 외부의 별의별 소리를 다 압도하기는 힘들어요. 개가 짖고 자동차들이 오가고 사이렌이 울리고 비행기가 지나가고 심지어 바람소리까지… 화자가 내는 소리의 질이 실내에 비해 현저하게 떨어질 수밖에.
그런 까닭에 스피치에서 중시하는 대화 형식과도 멀어지게 됩니다. 주목을 끌어야 하는데…
어떤 계획된 행사의 일부가 아니라면, 스피치 자체는 물론이고 당신 쪽으로 사람들이 눈길 돌리게 하는 것조차 어려울 수도 있어요.
어떻게 한담?
*사람들을 최대한 가까이 모으라. 실내보다 바깥에서 사람들은 긴장을 풀어 좀 더 느슨하기 마련. 집중력이 떨어지는 건 당연하다. 가까이 모음으로써, 스피치를 더 편하게 듣게 하고 시선을 더 많이 접촉하여 청중과 연결을 키운다.
*조금 더 높은 위치를 차지하라. 연단이 있으면 좋은데, 대개는 없다. 당신과 당신 제스처가 더 잘 보이게 하는 방법을 궁리하라. 바위 위에, 혹은 그루터기나 의자 위로 올라선다.
*더 크게 말하라. 작고 맥없는 목소리라면 야외에서는 아주 애를 먹을 것. 평소 목소리를 단련할 필요가 있다. 필요하다면 메가폰이나 마이크를 이용한다.
*큰 제스처를 쓰라.
*청중이 햇빛을 정면으로 대하게 하지 말라. 태양이 측면에 있게 하거나, 차라리 당신이 태양과 마주하도록 위치를 잡는 게 더 낫다. 이런 면에서, 햇빛이 강할 때보다는 구름 살짝 낀 날이 더 좋다.
이 말에는 선사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이원론적 개념이 들어 있어요. (즉, 심신 이원론. 인간 = 정신 + 육체).
하지만 심리학에서는 우리네 감정과 생각이, 곧 정신이라 불리는 것이 대뇌 신경세포들이 활발하게 활동한 결과일 뿐이라는 생각이 굳어졌어요. 이런 일원론적 개념을 오늘날 많은 연구자들이 수긍합니다.
그들 의견에 따르면,
뇌의 정신적 기능은 신체 기관에서 벌어지는 물질적 과정이라고 설명하는 수밖에 없답니다. (즉, 정신 = 뇌의 작용)
예를 들어,
망막이나 시신경이 손상돼 눈이 먼 사람에게는 시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시각적 상상이 보존됩니다. 한데, 망막에서 시신경을 거쳐 들어오는 빛의 자극을 수용하는 시각중추가 파괴됐다면, 이런 경우를 정신맹(精神盲)이라고 부르는데, 시각이 정상이라 해도 빛을 느끼지 못할 뿐 아니라 시각적 형상과 회상도 다 없어집니다. 정신맹에서는 시력이 아예 없었던 것처럼 사라집니다.
이렇게 뇌의 시각 담당 부위가 기능하지 않으면 사람은 이전에 본 대상들이 어떻게 보였는지 전혀 기억할 수 없어요.
또한 뇌의 담당 부위가 손상될 때 다른 관련 지각들도 잃게 되는 걸 보면,
우리네 모든 감각은 뇌에서 벌어지는 적극적 과정이 아닌가 싶어요.
일원론적 개념에서 볼 때, 우리네 정신적 체험은 모두 신체 움직임에 반영됩니다.
그런데 우리 내면 상태는
거기에 상응하는 신체 움직임의 원인이나 결과가 아니라 신체 움직임과 일치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사람들 앞에서 말하면서 불안에 떨 때,
이 체험은 근육 긴장, 내용과 무관한 제스처, 청자들이 아니라 벽이나 바닥이나 천장으로 돌리는 눈길, 맥없고 떨리는 목소리 따위 신체 움직임들로 나타나지 않습니까?
또 혈관에서 아드레날린 같은 호르몬의 증가, 더 빨라지는 심장 고동, 혈압 변화, 얼굴에 홍조, 식은땀, 동공 크기 변화 등과 같은, 자기 의지와 상관없는 반사적 움직임들에서도 나타납니다. (이렇게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으면서 사람 의지와 상관없는 신체 변화를 잡아내는 것이 거짓말 탐지기 아니겠어요?)
우리 내면 상태와 거기에 상응하는 신체 움직임은 서로 별개의 것이 아니에요.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결론을 끄집어내게 됩니다.
“신체 움직임을 통제하여, 그에 상응하는 내면 상태를 조절할 수 있다.”
물론, 의지와 무관한 움직임을 조절하기란 어려워요.
예를 들어, 심장 박동 수를 우리 의지로 조절할 수는 없어요.
하지만 의지에 따르는 움직임들은 우리가 의식적으로 통제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런 까닭에서 자신감 증대의 한 처방은 이렇습니다.
“여러 자신감 징표를 드러내고 자신 있게 처신하라. 그러면 자신감을 느낄 것이다.”
처음에야 이 여러 징표를 의식적으로 다뤄야 하겠지만, 자꾸 하다 보면 오래 가지 않아 익숙해질 겁니다.
그렇다면, 이 징표들이란 무엇인가?
그것들을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느끼지요. 우리가 훤히 알고 있는 겁니다.
말은 시각과 청각, 두 감각 기관으로 수용되지 않습니까?
따라서 사람들 앞에서 말할 때 자신감의 징표들은 시각적인 것과 청각적인 것으로 나눌 수 있어요.
시각적 징표로 어떤 면을 들 수 있을까요?
*반듯하고 늠름한 자세 *청자들의 눈을 직시하고 잠깐 동안 시선 고정 (한 지점에서 2초 이상 머물지 않으면 두리번거리는 듯 보이겠지요.) *말의 내용과 어울리는 편하고 자연스러운 제스처 *근육들의 불필요한 긴장 없애기
청각적 징표로는?
*뒷줄까지 들릴 만큼 충분히 크고 고른 목소리 (목소리가 떨리면 조금만 더 크게 내 보세요. 대개 떨림이 사라져요.) *자신감이 밴 어조 (차분한 상태에서 어떤 감정 채색에 이르기까지) *말을 자주 더듬지 않고, 쓸데없이 휴지를 취하지 않기 (그런 것이 생기면 말 속도를 줄이고 생각할 시간을 잠시 가지세요. 사라질 거예요.) ★ 휴지(pause) 취하기
이런 징표들을 늘 염두에 두고
대화에서부터 연설에 이르기까지 모든 형태의 소통에서 활용한다면,
이 징표들을 머잖아 체득하게 될 겁니다.
발언은, 처음 단어들을 말하기 위해 입을 여는 순간이 아니라, 자신 있는 행동을 사전에 조율하는 것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되새겨 볼까요?
자신감 징표들을 내보이라, 그러면 자신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당신이 해야 할 일은 이렇습니다.
어떤 것이든 짤막한 텍스트를 하나 쥐고 거울 앞에 서서 (혹은, 실습 멤버들 앞에 나와 서서) 저 자신감 징표들을 하나씩 의식적으로 취하고 내보이는 연습을 여러 번 반복하세요.
기대에 부응하고 의혹을 불식하기 위해, 흥미롭고 유익한 정보와 생각거리를 제공하려고 나는 부심하고 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함께 해 볼까요?
당신 손에 들린 책과 종이, 당신의 펑퍼짐한 엉덩이를 받치고 있는 의자, 간간이 입에 가져다대는 찻잔 따위는 다 사람이 만든 것임을 당신은 잘 알고 있어요. 얼핏 보기엔 그래요.
하지만 이상할지 모르지만, 사람은 창조자나 창안자가 될 수 없습니다.
- 아니, 이게 무슨 황당한 소리야? 말이 되는 얘기를 해야지!
당신의 불같은 반박이 귀청을 때리는 듯싶군요. 성질을 누그러뜨리고 조금만 더 들어 보세요.
인간은 이미 만들어져 있는 것들을 조합하고 개조해서 이용하는 것일 뿐이에요.
종이를 구성하는 원자들을 사람이 만들었을까요?
“모든 물체는 원자로 돼 있다”
하고 처음 주장한 고대 그리스 철학자 데모크리토스나, 질량 보존 법칙을 발견한 영국 과학자 돌턴이 원자를 만들었나요?
인간이 등장하기 이전에 벌써 종이와 컴퓨터와 자동차 따위는 다 상이한 형태로 자연에 존재했다고 생각하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류의 새로운 발명과 발견은 전부 이미 만들어져 있던 겁니다. 단지 기존의 것에서 불필요한 부분을 제거하여 새로운 모습들을 드러내기만 했을 뿐이에요.
“하찮은 돌덩어리로 어떻게 이런 걸작을 만들 수 있었단 말입니까?” 감탄하여 던지는 물음에 미켈란젤로는 이렇게 대꾸했어요. “이 형상은 처음부터 화강암 안에 있었다오. 나는 그저 불필요한 부분들을 깎아냈을 뿐…”
네, 지금 제가 하는 얘기의 골자가 바로 미켈란젤로의 대답에 있어요.
그이는 돌을 쪼아서 사람 형상을 만든 것이 아니라 본래 거기 있던 것을 찾아서 끄집어낸 겁니다.
부모가 자식을 만들었다고 말하기도 엄밀한 의미에서는 불가능해요.
왜냐면 부모들이 아기의 유전자 형성 과정과 이후 신체기관 발달을 관장한 게 아니니까. 부모들은 그저 짧은 쾌락을 맛보았을 뿐이며, 나머지는 다 자연이 그들 뒤에서 알아서 수행한 겁니다.
알고 보면, 우리네 머릿속에서 맴도는 생각도 원칙적으로는 새로운 것이 전혀 없어요.
우리가 말하는 ‘새로운 생각’이라는 것도 전부 기존 생각들을 달리 짜 맞춘 것일 뿐이니까.
이렇듯, 우리 인간은 우리가 좌우할 수도 폐기할 수도 없는 ‘우주 법칙’에 묶여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만유인력 법칙을 없앨 수 있나요?
불가능해요. 그냥 그 법칙에 맞출 수밖에 없어요.
작용과 반작용, 관성, 인과관계 따위 역시 우리가 항거할 수 없는 자연 법칙 아니겠어요?
참으로 비감할지 모르나, 우리 정직하게 인정합시다.
“인간은 자연의 지배자가 아니라, 자연 법칙의 포로일 뿐이야!”
하지만 그렇게 인정한다고 해서 우울하게 여길 일만은 아닙니다.
사람은 창조자는 아닐지라도 이 세상을 바꿀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의 가능성에 한계가 있다손 치더라도, 그 가능성은 우리 상상을 초월할 만큼 거대합니다.
우리 각자의 안에는 위대한 사람이 들어 있어요.
그 위대한 사람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우리는 거의 누구나 석가모니가 될 수 있고 칭기즈칸이 될 수 있고, 레오나르도 다빈치도, 이순신도, 푸슈킨, 베토벤, 슈바이처, 아인슈타인, 에디슨, 간디, 링컨, 호치민, 김구, 만델라도 될 수 있어요.
그러나 그 위대한 사람은 우리네 많은 사람들 안에서 그저 잠자고 있을 뿐이고, 그렇기 때문에 목표를 향해 돌격하기 전에 먼저 그 위대한 사람을 일깨워야 하고, 그렇게 하려면…
바로 자기 자신을 믿어야 하는 겁니다. 곧,
“자기 자신을 믿고, 자신만만한 사람이 되어라. 그러면 당신은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큰 사람이 될 수 있다.” 바로 이것이, 소통 기량과 스피치 기법 향상을 포함하여 무슨 일에서든 성공에 필수적인 으뜸 법칙입니다. 비록 간단하지만 아주 중요한 법칙!!
자신감이 없으면 사는 데 많이 피곤하잖아요?
좋아하는 일 대신 흥미 없는 일에 삶을 소모하고, 낮은 급료를 받고, 다른 사람들이 벌써 거쳐 간 위치를 몇 년이나 지키고 앉아 있고… 이건 대개 자신감 부족으로 인해 벌어지는 현상입니다. 또 면접에서, 법정 심리에서, 각종 대화에서 당차게 임하기보다 주뼛거리며 파김치가 되는 것도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자신감 없음은…
우유부단, 숫기 없음, 소심함, 주눅, 축기 따위는 다
우리가 목표를 달성하는 데 있어 걸림돌이요 훼방꾼일 뿐이에요.
이건 당신이 세상을 정복하는 걸 가로막는 배신자에요.
그렇다면, 그런 걸림돌을 어떻게 물리쳐야 하나?
비록 식은 죽 먹듯 되는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필요하다면 해야겠지요.
간단하면서도 중요한 행보 두 가지를 소개합니다.
첫째, 그걸 온 마음으로 갈구하는 거예요!
이런 구절을 곰곰이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만약 뭔가를 간절히 원한다면 그걸 할 수 있다는 뜻이고,
만약 뭔가를 할 수 없다면 그걸 간절히 원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자신에게 그냥 말하세요.
“나는 자신감 넘치는 사람이 되고 싶어!”
그리고 그걸 진심으로 갈망하세요.
갈망하기 위해서는, 자신감이 (소심함도 그렇고)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획득되는 특질이라는 걸 알고, 소심함에서 탈출하는 것이 막연히 생각하는 것만큼 어렵지 않다는 것을 믿어야 해요.
그리고 진정 갈망한다는 것은 머릿속이 아니라 실제에서 다음 행보로 나아갈 준비를 한다는 뜻입니다.
두 번째 행보, 자신감을 키우기 위해서는 뭔가를 실제로 해야 합니다!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데 자신감이 없는 상태를 떨치기 위한 실용적 처방들 가운데 효과가 좋은 것 두 가지를 살펴봅시다.
하나는, 소통과 스피치의 실제 경험 쌓기.
이건 아주 간단하면서도 대단히 미더운 처방이에요.
실습하다 보면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면서도 차분해지는 습관이 생길 겁니다.
직장이나 학교, 혹은 어디서든 여러 사람 앞에서 공개적으로 발언할 기회가 심심찮게 있다면, 당신은 운이 좋은 겁니다. 왜냐면 많은 사람들에게는 그런 기회가 별로 없기 때문에 어디 다른 곳에서 일부러 찾아야 하니까.
만약 당신에게 말할 거리가 있다면, 일어나서 말하세요.
기회를 놓치지 말라는 부탁이에요!
이런 점도 알아 두십시오.
즉, 당신의 그런 발언 각각은 거기서 그냥 그치고 마는 게 아니라 쌓여서 경험이 된다는 점.
그렇게 몇 번 말하기에 적극 뛰어들다 보면 자신감이 더 생기면서, 나중에는 어색하고 거북함이 아니라 만족감을 얻게 됩니다.
지긋지긋한 자신감 부재에서 벗어나기 위해 대다수 사람들에게는 실제 경험을 쌓는 것으로 충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