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사(臨死) 경험과 폐-심장 소생술을 연구해 온 Sam Parnia 박사는 뇌에 혈액이 공급되지 않고 뇌에 전기 신호가 없을 때도, 즉, 뇌사 이후에도 의식은 살아남을 수 있다고 믿는다. 그는 사람의 뇌가 빵 덩어리만큼도 활동적이지 못할 때 벌어진 임사체험의 증언을 지난 2008년부터 많이 모았다.
이들 증언에 따르면, 비록 뇌는 심장이 멈춘 뒤 20-30초 만에 정지되기 마련이지만, 심장이 멈추고 나서도 의식적인 분별은 3분 정도 더 유지됐다고 한다.
2. 유체 이탈(遺體 離脫) 경험
유체이탈에 관한, 그러니까 자신의 몸에서 분리되는 체험에 관한 얘기가 간혹 나돌기도 하는데, 대개는 공상이나 환각으로 치부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미국의 가수 팸 레이놀즈가 뇌 수술 중에 겪은 유체이탈에 관해 생생한 증언을 남겼다. 그때 나이 서른다섯. 그녀를 인위적인 혼수상태에 빠뜨리고 몸을 섭씨 15도로 식혔으며, 뇌에 혈액 공급을 사실상 중단했다. 게다가 눈을 가리고 귀에는 외부 소리를 차단하는 귀마개를 넣었다.
한데 그녀는 자기 몸 위에서 맴돌면서 수술을 지켜볼 수 있었다. 그녀의 증언은 아주 생생했다. 누군가가 “그녀의 동맥이 너무 좁아” 하고 말하는 것을 들었으며, 수술실에는 이글스의 <호텔 캘리포니아>가 잔잔히 울렸다고 했다. 그녀의 증언은 의사들이 다 충격을 받을 정도로 아주 정확하고 상세했다.
* Pam Reynolds Lowery (1956—2010).
1991년 신경외과 수술을 받던 중 임사체험을 겪었다.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돌아온 많은 체험 가운데 그녀의 증언은 가장 널리 알려졌으며 독특한 상황 덕분에 잘 기록된 축에 든다. 몇 시간에 걸친 수술 내내 그녀는 면밀한 의료 관찰을 받았다. 일시적으로 뇌가 작동하지 않으면서 혈액 흐름이 끊기는 바람에, 그녀가 임사 상태에 이르게 됐다. 하지만 의식이 돌아온 뒤 그 동안의 일을 세세하게 이야기했으며, 그 정확성을 의료진이 인정했다.
3. 죽은 이들과 만남
임사 경험의 고전적 사례들 중 하나는 이미 죽은 사람들과 저승에서 만나는 것. 연구자인 Bruce Greyson은 사람이 임사 상태에서 보는 것은 그저 또렷한 환각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고 여긴다.
2013년 내놓은 연구 보고에서 그는 임사에 이른 환자들 가운데 (혼수 상태에서) 죽은 일가친척을 만난 이들이 살아 있는 사람들을 만난 이들보다 훨씬 더 많았다고 했다. 더욱이 몇몇 경우에는 어떤 친척이 이미 죽은 줄도 모르면서 그 사람과 저승에서 만나기도 했다는 것이다.
4. 현실의 가장자리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벨기에 신경학자 Steven Laureys는 사람이 죽은 뒤 삶이 있다고 믿지 않는다. 그는 임사체험을 전부 물리적 현상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여긴다. 로레이스와 그의 팀은 임사체험이 꿈이나 환각과 비슷한 것이며 시간이 흐르면서 기억에서 지워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그가 알아낸 결과, 임사의 기억은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싱싱하고 또렷하게 남아 있으며, 때로는 실제 사건들에 관한 기억을 뒤덮어 흐리게 만들기도 한다.
5. 유사성
한 연구에서 학자들이 심장 정지를 겪은 환자 344명에게 소생됐지만 의식은 (거의) 회복하지 못한 한 주일 동안 겪은 것을 설명해 보라고 청했다. 응답자들 가운데 18%는 자신의 경험을 거의 떠올리지 못했고, 8-12%는 임사체험이라는 고전적 사례를 내놓았다.
6. 성격 변화
네덜란드 연구자 Pim van Lommel은 임사를 체험한 사람들의 기억과 감회를 연구했다. 그 결과에 따르면, 많은 이들이 임사체험 이후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났으며 더 행복하고 더 긍정적이며 다른 사람들과 관계가 더 좋아지게 됐다. 임사에 대해 거의 모든 이들이 시간이 흐를수록 자기 삶에 한층 더 긍정적으로 작용한 경험이라고 말했다.
7. 직접적인 기억
미국의 신경외과의 Eben Alexander는 2008년 혼수상태에서 7일을 보낸 뒤, 임사체험에 관한 생각을 달리하게 됐다. 그는 거의 믿기 어려운 것을 보았노라고 밝혔다. 밝은 빛과 거기서 나오는 선율을 보고 들었으며, 장대한 세계로 들어가는 문 같은 것을 목격했는데, 그 안쪽에는 형용하기 어려운 빛깔의 폭포들과 주변으로 날아다니는 나비들이 수백만이나 됐다고 전했다.
하지만 그런 장면들을 보던 시간에 그의 뇌는 완전히 꺼져 있었기 때문에 의식 따위가 있을 리라곤 만무해야 했다. 에벤 의사의 얘기를 많은 이들이 미심쩍게 여겼지만, 만에 하나 그가 거짓을 꾸미는 것이 아니라면 그의 체험과 또 다른 이들의 경험 등을 무시할 필요는 없다.
8. 시각장애인들의 눈뜸
Kenneth Ring과 Sharon Cooper는 시각장애를 안고 태어난 이들이 임사 동안에는 시력을 되찾을 수 있다고 그들 공저에서 설명했다. 두 사람은 임사나 유체이탈을 체험한 맹인 31명을 인터뷰했다. 개중에 14명은 선천적인 시각장애인이었다.
하지만 그들 모두가 그런 체험을 겪는 동안 시각적 이미지를 보았다고 밝혔다. 즉, 빛의 터널이나 죽은 일가친척들을 보았거나, 아니면 자기 몸을 위에서 내려다보았다고 했다.
9. 양자물리학
Robert Lanza 교수의 주장을 따르자면, 우주에서 모든 가능성은 동시에 일어난다. 그러나 ‘관찰자’가 바라보기로 마음먹을 때, 이 모든 가능성들은 우리 세계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가능성으로 줄어든다. 그러므로 시간과 공간, 물질, 기타 모든 것은 오로지 우리네 지각 덕분에 존재하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죽음’ 같은 것들은 더 이상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 아니며 단지 지각의 일부가 될 뿐일 것이다. 실제로 우리가 이 우주에서 죽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해도, 란차 교수의 이론에 의하면, 우리네 생명은 ‘다중 우주에서 다시금 피어나는 영원한 꽃’이 된다.
10. 아이들은 자신의 과거 삶을 기억할 수 있다
Ian Stevenson 박사는 자신의 전생을 기억할 수 있었던 5세 미만 아이들의 경우를 3천 건 이상 연구하고 기록했다. 그 가운데 스리랑카에 있는 소녀는 자기가 살던 도시 이름을 기억하고 자기 가족과 집을 상세하게 이야기했다. 소녀가 한 이야기 30가지 중에서 27가지가 사실인 것으로 나중에 확인됐다. 하지만 소녀의 가족과 친지들 그 누구도 그 도시와 어떤 식으로든 관련이 없었다.
스티븐슨 박사는 또 자신을 죽음에 이르게 한 선천적 결함을 지닌 아이들과 자신의 ‘살해자’가 누구인지 알고서 분노에 빠진 아이들의 경우도 기록으로 남겼다.
하지만 상실이 없는 획득은 없다. 뭔가 하나를 얻으면 다른 뭔가를 놓게 된다. 한쪽 문으로 들어가면서 다른 문은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다. 어떤 문이 더 중요한지를 각자 결정해야 한다. 그리고 상실에서도 또한 뭔가를 얻을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모든 사람의 삶에는 행동 방법이 하루에도 수백 가지씩 일어난다. 어떤 길을 선택하면 다른 길은 더 이상 없을 것이다.)
17. 절반 영역의 법칙
다른 사람과 관계에서 당신의 영역은 절반까지이다.
다른 사람의 행동을 완전히 통제하기란 불가능하다. 그 다른 사람이 움직이지 않을 수 있는데, 그때 그를 대신하여 길을 다 가면서 그를 변화시키기란 불가능하다. (*이 교훈은 대인관계에 해당되는 것인데, 여기서 본질은 파트너를 결코 바꾸거나 개조할 수 없다는 것이다.)
18. 새로운 것을 달리 구성하기
새로운 뭔가를 세우려면 필요한 일이 있다.
1) 낡은 것을 부숴야 한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새로운 것을 세우기 위해 자리를 치우고 시간을 내고 힘을 가동해야 한다.2) 무엇을 세우려 하는지 알아야 한다. 만드는 방법을 모르면서 부숴서는 안 된다. 가는 방향을 알아야 한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달린다면 엉뚱한 곳에 이르게 될 것이다.
(*새로운 뭔가를 들이려면, 낡은 것을 치우거나 무엇을 어디에 둘지 알아야 한다. 무엇을 하며 어디로 가야 하는지 등을 아는 게 중요하다.)
어디로도 항해하지 않는 사람들에겐 순풍에 의미가 없다. - 세네카, 몽테뉴
19. 밸런스의 법칙
자기 생활과 사고방식을 바꾸려 해도 그 동안의 정형화된 행동 타입이 오랫동안 익숙한 생활방식에 사람을 붙잡아 두려 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자신의 삶에서 뭔가를 바꾼다면, 달라진 삶은 균형의 법칙에 따르게 된다. 생각과 행동의 타성 또 자신의 내적 저항과 주변 사람들의 반응 때문에 변화는 대개 천천히 고통스럽게 일어난다.
(*이 법칙은 새로이 달라진 삶에만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형화된 생각과 행동, 스테레오타입, 경험 등으로 인해 변화를 일으키기란 지극히 어렵다.)
20. 상반의 법칙
상반되고 대비되는 것들이 없다면 우리의 삶은 생각도 할 수 없다.
여기엔 탄생과 죽음, 사랑과 증오, 우정과 경쟁, 만남과 이별, 기쁨과 고통, 상실과 획득이 있다.
사람도 모순되고 당착하니, 자기 삶이 안정적이기를 갈구하면서도 동시에 어떤 불만이 그를 앞으로 내몬다. 상충과 모순의 세계에서 인간은 자기 자신과 또 다른 사람들과 또 삶 자체와의 잃어버린 결속을 얻으려 애쓴다. 모든 것에는 시작과 끝이 있다. 이건 지상의 순환이요 삶의 순환이다. 한계에 이른 사물은 자신과 정반대되는 것을 넘어선다. 상반되는 한 쌍이 균형을 유지하고, 한 극단에서 다른 극단으로 넘어섬이 삶의 다양성을 만든다.
뭔가를 이해하기 위해 때론 그것과 상반되는 것을 보고 알 필요가 있다. 상반되는 것의 한 쪽은 다른 쪽이 없이 존재할 수 없다. 낮이 있으려면 밤이 필요한 이치이다.
21. 조화의 법칙
자신 안에서나 세상 어디서든 사람은 하모니를 추구한다.
세상과 조화하려면 먼저 자기 자신과 조화를 이뤄야 한다.
자신에 대한 좋은 태도와 자신을 용인하는 것이 곧 세상이며 사람들이며 자기 영혼과의 조화를 얻는 열쇠이다.
조화를 이루었다 해서 개인 성장에 자극이 될 수 있는 곤경과 갈등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이성과 감정과 행위 간의 하모니… 어쩌면 바로 이게 행복 아닐까?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과 조화를 이루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때 비로소 세상이며 행위, 여러 인생 시스템하고도 조화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22. 선과 악의 법칙
세상은 즐거움만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니다.
세상은 그것에 대한 우리의 관념이며 우리의 갈망에 늘 부합하지는 않는다. 스스로 선을 행할 수 없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행한 선도 소중히 여기지 못할 것이다. 악을 볼 수 없는 이들에겐 악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 상반된 두 가지 가치가 존재하며 이 둘을 구별해야 한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23. 거울의 법칙
주변 사람들의 무엇인가 때문에 짜증이 난다면, 그 짜증나게 하는 요소는 바로 그 사람에게 있다.
혹자가 다른 사람들한테서 듣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은 그 인생 단계에서 그가 가장 들어야 하는 것이다. 타인은 우리에게 거울이 되어 우리가 자신에게서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것을 발견하게 돕는다. 그런 식으로, 다른 사람들의 무엇인가에 짜증이 날 때 그것이 내 안에 있는 것임을 알고 바로잡는다면, 운명이 그 사람에게 그런 거울을 보낼 일은 전혀 없을 것이다.
우리한테 불쾌한 것을 죄다 피하고 우리에게 부정적 감정을 야기하는 자들을 다 피하기만 한다면, 우리는 자기 삶을 바꿀 기회를 놓치고 내적 성장 가능성을 잃는 것이다.
(*사람들과 주변 세상, 감정, 생각, 느낌 등은 다 어떤 사람의 거울 이미지이다. 만약 다른 이들한테 있는 뭔가가 그 사람에게 맞지 않는다면, 이는 곧 자신 안에서 똑같은 것이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따라서 누군가와 사이에 틀이나 장벽을 둘 필요가 없으며, 모든 감정을 분석하는 게 중요하다. 이것이 자기계발이요 향상이니까.)
24. 보완의 법칙
우리가 갖기 원하지만 얼마 안 갖고 있는 것을 줄 수 있는 사람들과 사건, 지식 원천 등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잠재력에 들붙으려고 애쓴다. 우리는 자신을 바깥에서 만든다. 누군가나 무언가를 소유하려는 우리 갈망은 자신의 장점을 알지 못함이요 부정하는 것이며 그런 장점이 있음을 믿지 못함이다.
(*사람은 다 주변 사람들을 통해 자신을 보충하려 들고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되려고’ 한다. 이 법칙으로 보자면, 그런 갈망은 본연의 열등감과 자책으로 야기된다.)
25. 연쇄반응의 법칙
부정적 감정이 드러나도록 놔두는 경우, 불쾌한 경험이 잇따라 나올 것이다.
꿈과 몽상에 빠져 사는 경우, 현실을 환상 세계가 대신할 것이다. 부정적이고 비생산적인 생각의 흐름을 멈추기 어려울 수 있다. 왜냐하면 노심초사하고 긴장하고 고통 받는 데 익숙해지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현실에서, 문제의 적극적 해결에서 멀어지기 때문이다. 거기에 에너지를 더 많이 보탤수록 그건 더 커질 것이다.
우리가 시간을 들이는 생각은 자석처럼 작동해서 비슷한 생각들을 끌어당긴다. 무더기로 밀려드는 안 좋은 생각들보다는 가혹한 생각 하나에 대처하기가 더 쉽다.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면서 우리는 감정적으로 감염되어 그들의 기분과 같아지는 경향이 있다.
(*처음에 품는 생각이 다른 여러 생각의 흐름을 좌우한다. 감정을 조절하고 정돈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26. 억압의 법칙
속으로 억누르거나 부정하는 생각이나 행동이 아주 부적절한 순간에 분출될 수 있다.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억누르거나 속에 쌓아두지 말고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자신을 용인하라, 자신의 좋아하지 않는 측면을 받아들이라, 자신을 비판하지 말라. 자신 안에서 거부되고 부정된 것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면 사람이 내적으로 더 크게 성장한다. 그런 사람은 충만한 삶을 살 수 있다. 우리는 잃어버린 결속을 되찾으려고 애쓸 것이다.
27. 수용의 법칙, 혹은 평온의 법칙
삶 자체는 나쁘지도 않고 좋지도 않다. 우리의 인식이 삶을 좋거나 나쁜 것으로 만든다. 삶은 있는 그대로의 것일 뿐이다. 삶을 수용하고 삶에 기뻐하고 삶을 소중히 여길 필요가 있다. 삶을 믿으라, 당신 이성의 힘과 마음의 지시를 믿으라. 모든 것은 순리대로 될 것이다. (*일어나는 모든 것에 적절하고 차분하게 반응하는 것이 중요하다.)
28. 당신의 인성을 평가하는 법칙
주변 사람들은 자신을 평가하듯이 다른 사람을 사실상 늘 평가한다.
자신을 받아들이고 평가할 필요가 있다.성취 못할 이상적인 자기 이미지나 우상을 만들면 안 된다.
주변 사람들이 당신에 대해 하는 말을 비판 없이 무조건 받아들이면 안 된다. 모든 사람의 애정을 얻으려 애쓰다가 (이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인데!) 당신은 자신의 욕구를 경시하고 자신을 잃고 자신에 대한 존중을 잃을 수 있다.
매사에 완벽한 사람이 될 수는 없다. 당신의 값어치는 당신이 자신을 평가하는 만큼이다. 당신의 자기평가는 어떤가?
(*개인적인 가치는 그 사람이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는지와 동일하다. 남들의 평가는 별반 의미가 없다.)
29. 에너지 교환의 법칙
자신과 세상을 더 많이 알수록 사람은 더 많은 것을 세상에서 취하고 세상에 내줄 수 있다.
운명과 적절하고 공정하게 교환할 줄 알아야 한다. 취하기보다 내주는 것이 더 많은 경우에만 당신 에너지가 소진될 것이다. 누군가한테서 받는 것보다 주는 게 더 많다면, 그 사람이 못마땅하게 보일 수 있다. 세상은 서로 나눌 수 있게 하려고 존재한다.
(*사람이 이상적인 발달과 향상을 이룬다면, 다른 사람들과 정보를 나눌 필요가 있다. 세상 모든 것은 서로 연결돼 있기 때문에, 경험과 감정, 느낌 등을 공유하는 것이 중요하다.)
30. 삶의 의미의 법칙
우리는 공(空)에서 나와 삶의 의미를 찾으려 들다가 다시 공(空)으로 돌아간다.
모든 사람에겐 나름대로 삶의 의미가 있으며, 이는 인생의 여러 단계에서 바뀔 수 있다.
삶의 의미는 어디에 있나? 뭔가를 위해 돌진하는 것인가, 아니면 그냥 사는 것인가? 사실 뭔가를 향해 돌진하다가 우리는 삶 자체를 놓치게 되지 않는가. 즉, 결과를 위해 과정 자체를 잃는 경우가 많다. 어쩌면 삶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삶 자체가 아닌가 싶다.
삶 자체에 포함되어 삶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그때 삶을 다양한 모습으로 인식하게 되고, 그때 삶은 그 본연의 색채로 인간 존재를 채색할 것이다. 삶의 의미를 사람은 자신의 바깥세상에서만 찾을 수 있다. 인생에서 승리하는 사람은 모든 질환과 모든 재앙을 단번에 없애는 처방전을 운명에게 간청하지 않는다.
(*다들 공/空에서 나오며, 오로지 자신 밖에서, 자신의 본질 바깥에서만 삶의 의미를 얻는다. 명상과 자기 인식이 삶의 의미를 깨닫도록 도울 수 있다. 있는 그대로의 삶을 받아들이고 지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추가: 31. 부메랑의 법칙
우주에 내보낸 것은 전부 고대로 되돌아온다. 일이며 말이며 행동이며 그 무엇이든,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죄다 그걸 보낸 사람에게 고스란히 되돌아온다. 일종의 업(業)이요 응보.
성서에도 이르기를,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둘지니.” (고린도 후서 9:6). *교회 노련하고 욕심 많은 목사들이 순진한 신자들에게 헌금 많이 하라고 은근히 압박할 때 종종 인용하는 구절이 아닌가 싶다.
(<백학 Журавли>: 노래말 - 라술 감자토프, 작곡 - 얀 프렌켈, 노래: 그룹 <세레브로>)
우리 곁을 떠난 이들에 대한 그리움이 절절하게 배어 있다.
이 노랫말과 노래와 백학은 러시아에서 전몰장병들을 기리는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시 <백학 cranes>이 나오게 된 배경
러시아연방 다게스탄 공화국의 감자토프 시인이 1960년대 중반 히로시마에 있는 한 일본 소녀의 추모비를 찾았다가 어떤 영감을 떠올린다. 이 소녀는 사다코 사사키, 두 살 때 히로시마에 원자탄이 투하됐고, 이로 인해 백혈병으로 고생하다가 1955년에 12세로 죽었다.
사다코는 병마에서 벗어나리라는 희망을 안고 색종이로 종이학을 접었다. 종이학 천 개를 접으면 소원이 이뤄진다는 믿음은 일본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러시아에도 비슷한 개념이 있고, 다게스탄 사람인 감자토프 시인은 러시아 고전 시가의 번역가로서 그런 개념을 잘 알고 있었다.
감자토프 시인이 일본을 방문하던 기간에 모친 사망 소식을 접한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어머니를 생각했다. 또 2차 대전 때 세바스토폴 전투에서 죽은 형과 행방불명된 다른 형을, 또 그 피범벅 전쟁터에서 돌아오지 못한 다른 가까운 이들도 떠올렸다. 그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나치 군대와 그 동맹인 일본국에 승리를 거둔 것이 아니던가.
그리고 시에서 토로했다. “그렇기 때문에 백학의 외침이, 울음소리가, 어쩌면 아바르어와 까마득한 옛날부터 비슷한 것이 아닐까?” (*아바르어는 까프까즈 산악지대 다게스탄 주민들의 언어이다.) 그에게는 일본의 백학이 아바르의 것과 매한가지였다. (어쩌면, 일본의 백학도, 러시아의 백학도, 아바르의 백학도, 한국의 백학도 감수성 충만하고 마음씨 따스한 이들에겐 다 똑같지 않을까.)
아바르어로 쓴 시가 1968년 러시아로 번역돼 한 저널에 실렸다. 이 시가 가수 마크 번스의 눈길을 끌었다. 단어 몇 개를 수정하고, 얀 프렌켈이 두 달만에 곡을 완성했다.
이 노래가 나오고 몇 년 뒤, 소비에트연방 정부는 2차 대전 격전지마다 비석과 기념물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 중앙에는 날아가는 백학들이 (먼저 떠난 이들의 영혼이) 자리 잡았다. 이 노래의 백학은 전몰장병들을 기리는 상징으로 굳어졌다.
수많은 가수들이 이 노래를 부르고 불렀다. 앞으로도 또 부를 것이다. 좋은 노래는 그렇게 사랑받으면서 점점 더 진화한다. 소개하는 몇 가지 버전을 통해 그 맛이 얼마나 달라지는지 실감할 수 있다.
(노래: 얀 프렌켈, 작곡자)
1995년 드라마 <모래시계>의 주제가로 울려 퍼지면서 많은 한국인들의 심금도 건드렸다. 그 장중하고 애절한 선율로... 하지만 노랫말을 안다면 훨씬 더 큰 감동의 물결에 휩싸이게 된다.
Мне кажется порою, что солдаты, С кровавых не пришедшие полей,
Не в землю нашу полегли когда-то, А превратились в белых журавлей.
Они до сей поры с времен тех дальних Летят и подают нам голоса.
Не потому ль так часто и печально Мы замолкаем, глядя в небеса?
Летит, летит по небу клин усталый, Летит в тумане на исходе дня.
И в том строю есть промежуток малый, Быть может, это место для меня.
Настанет день, и с журавлиной стаей Я поплыву в такой же сизой мгле,
Из-под небес по-птичьи окликая Всех вас, кого оставил на земле.
Мне кажется порою, что солдаты, С кровавых не пришедшие полей,
Не в землю нашу полегли когда-то, А превратились в белых журавлей…
(노래: 요시프 코브존)
THE CRANES
I often sense that our fallen soldiers, who left on battlefields their bloody stains,
did not lay down in their graves for solace – but have been transformed into white-winged cranes.
And we have seen since many years ago: they soar above and send their mournful cry.
We are transfixed with our deepest sorrow becoming speechless as the cranes soar by.
They soar, they soar, exhausted white triangles, and pierce the fog in a spell-bound line…
I spy a gap in their ranks – not for angels. This space, I clearly see, may soon be mine.
The day will come, when I will join the row of birds inside their even flying chain,
and call you, whom I left behind, below, by voice of a slender, white-winged crane.
(노래: 드미뜨리 흐보로스똡스끼)
조금 다른 이야기
이 포스팅은 사실 좀 '충동적으로' 나오게 됐다.
여름 끝물 무렵은 아마도 알프스 북부 지역에서 가장 멋진 시기일 것이다. 이맘때가 되면 나는 엊그제처럼 생생하게 기억나는 순간을 늘 반추하게 된다. 비록 70년이 지난 일이지만 말이다. 그때 난 아직 학교에 들어가지 않았고 글자를 읽을 줄 몰랐던 나이였다고 확신한다.
우리는 다뉴브 강이 흐르는 초원을 자주 거닐었는데, 조심스러운 엄마와 한층 더 조심스러운 이모의 금지에도 불구하고 난 혼자 앞으로 달려가서 강변 관목들 사이에 서 있곤 했다. 머리 위쪽에서 기묘한 금속성 소리가 울리면서 높은 하늘에서 강을 따라 내려오는 야생오리 떼를 자주 보았다.
인간의 감정은 아주 일찍부터 발달해서 죽을 때까지 그대로 남는다.
그때 맛보았던 느낌을 난 이제 다시금 맛본다.
그 오리들이 어디로 날아가는지 몰랐지만, 난 정말 그들과 함께 가고 싶었다. 편력의 갈망이 낭만적으로 가득 차서 어린 가슴과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리고 자신을 창의적으로 표현하려는 갈망이 내 안에서 걷잡을 수 없이 일어났다. 처음으로. 그래, 그게 최초의 경험이었다.
지금도 내 머리 위로 우리의 야생오리들이 높이 날아갈 때면… 어린 시절 품었던 낭만적인 동경과 이상이 다시금 솟아난다. 또 마치 동화 속 이야기처럼, 내가 부르는 소리에 그들이 밑으로 내려올 때면… 어린 시절 꿈이 실제가 된다.
소통의 한 분야로서 요즘 <부모와 자녀의 소통, 어른들과 아이들의 대화>에 관한 원고를 다듬고 있다. 활동성 (적극성), 독자성 추구, 쉽게 몰입하는 성향, 유연성, 예민한 감수성, 풍부한 감정 등 '아이들의 내면세계'를 우리 어른들이 알고 이해하고 장려할 필요가 있다는 대목에서 생생한 사례로 저 회상을 인용하느라고 나왔다.
그러다가... <백학>이 떠올랐다.
‘아, 이 노랫말과 노래를 언젠가 포스팅한 적이 있었는데...’
찾아보니까, 이 블로그엔 없다. 몇 년 전 다른 <밴드>에 올렸더라. 그래서 여기에도 좀 소상하게 소개하게 됐다. 즉흥적으로. ^^
우리네 (사람들의) 생각이란 그렇게 이어진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에크하르트 톨레는 '생각의 흐름'을 차단하는 여러 방법을 제시하는데, 그때의 '생각'이란 물론 '잡생각, 잡념'을 뜻한다.
다른 많은 이들과 마찬가지로 <백학>은 나도 아주 좋아하는 노랫말이요 선율이다. 이 노래를 듣거나 부를 때마다 가슴이 먹먹해진다. 미어진다. 아프다. 하지만 이건 다 긍정적인 아픔이다. 카타르시스. 정화되는...
*노랫말을 우리말로 번역해서 올려야 하는데… 예전에 제법 깔끔하게 다듬고 다듬은 것이 어디로 사라졌다. (자료 보관의 중요성!) 다시 다듬을 생각을 하니까 좀 피곤해진다. 공력을 제법 들여야 하니까! 일단은 영어 번역판으로도 독자들께서 감을 잡으시리라 믿는다. 조만간 우리말 번역을 올려야겠다.
중앙일보의 심 아무개 뉴욕 특파원이 보내와서 지면에 담은 칼럼이, 알고 보니 월스트리트 저널이 그 며칠 전에 실은 사설을 거의 그대로 베낀 것이었더라.이런 사실을 지적당하자 중앙일보는 이 칼럼을 삭제하고 사과문을 올렸으며 해당 특파원의 직무를 정지한 뒤 징계 처분을 논의하고 있다. 하지만 이번 사건은 한 신문사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한국의 모든 언론사가 '관행'으로 행했고 행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특단의 대책이 마련되어야 한다.
여기서 저도 이번 포스트의 골갱이를 미리 말씀드리자면...
한국 여러 방송사들의 외국 주재 특파원이 보내온다는(!) 리포트 열 개 가운데 여덟 개는 국내에서, 서울에 있는 기자들이, 만드는 것이다!
"아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거 말이 되는 소리야?!" 하는 반응이 쉽게 예상됩니다.
말이 되는 소리이고, 실상이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 중동 지역에서 어떤 사건이 터졌는데... 그와 관련된 리포트를 예를 들어 파리나 런던 주재 특파원이 전하는 경우를 심심치 않게 봤을 겁니다.
"어, 돌이켜보니 그러네. 하지만 그게 그렇게 하는 것인 모양이다 싶어 별 생각 없이 지나치곤 했지!" 이런 반응을 보이는 분들은 그나마 감각이 살아 있거나 (좀 거창하게 말하자면) 의식이 깨어 있는 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구요? 왜냐하면 대다수 시청자들은 아무 생각 없이 <정말 그 특파원이라는 사람이 사건 현장에 나가 취재하고 취재원을 만나 인터뷰하고, 그 특파원이 직접 기사를 작성하고 때론 편집도 하고... 해서 제작한 리포트>라고 막연히(!)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른바 특파원들이 보내온다는 리포트의 열 개 가운데 여덟 개쯤이 제작되는 과정은 이렇습니다. 우리 포스트 독자들께서 이해하시기에 편하도록 실례를 하나 들지요. (이 사례는 수많은 아류들 가운데서 최근의 것 하나를 무작위로 고른 것입니다. 다음 링크로 리포트를 보시고, 제가 드리는 설명을 읽으면 금방 감이 잡힐 겁니다. <이란 산 원유 제재 예외 중단...>)
이 특파원의 리포트가 나온 배경과 과정은 분명 이랬을 겁니다.
1) 이란 산 원유를 둘러싸고 제재를 더욱 강화하겠다는 미국 정부의 방침을 폼페이오 국무장관이 국무부 브리핑룸에서 발표해요.
2) 미국의 AP, UPI, 프랑스의 AFP, 영국의 로이터 등 세계 유수의 통신사들이 즉각 이 뉴스를 전송하는군요.
3) 한국의 통신사(연합뉴스)와 언론사들이 이 뉴스를 받아 번역합니다. (KBS 정도의 방송사는 4대 통신사의 뉴스를 곧장 받지만, 규모 작은 언론사들은 <연합뉴스>가 전해주는 이 뉴스를 받아 자기네 지면에 게재하거나 방송에서 전합니다.)
4) "이란 산 원유 수입 제재와 관련해 그 동안 예외로 두던 것도 없애겠다고 하네! 미국 정부의 이 방침은 그 자체가 굵직한 뉴스거리인데, 여기에 우리 한국도 포함되니까 더 뜨거워졌어. 이런 큰 기사를 단신 처리는 불가하고, 여기 서울에서 국제 뉴스로 전하기에도 모양이 좀 빠지는 것 같아. 그러니까 워싱턴에 얼른 연락해서 리포트 하나 만들어 보내라고 해. AP나 다른 통신사의 기사를 정리해서 보내줘. 거기서 특파원 입으로 리딩하고 '증명사진' 하나 찍어서 다시 송출해 오면 아침뉴스에 내보낼 수 있을 거야. 알았지?"
이른바 '숙직 데스크'의 뉴스 가치 판단과 제작 지시를 미루어 짐작해 봤습니다. 이 짐작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을 거예요.
5) 이 뉴스 제작 지시를 받은 당직 기자가 국제 통신사의 뉴스를 번역한 연합뉴스의 기사를 워싱턴 특파원에게 보냅니다. 그때 이런 얘기를 덧붙였을 겁니다.
"이거 아침 뉴스 시간에 내보내야 돼. 자료 화면은 여기 다 있으니까, 그냥 기사만 리딩하고 어디 거리에 나가서 그쪽 '간지'가 나는 스탠딩 하나 찍어서 보내요. 빨리! 아, 그리고 중국 외교부 대변인 코멘트는 여기서 우리가 넣을 거야. 자막도 물론 다 여기서 처리하고. 오케이? 수고~"
6) 워싱턴 특파원은 서울에서 보내준 기사를 읽어 녹음합니다. 그리고 이제 '정말 중요한 작업'을 하나 하러 나갑니다. '간지'가 나는 '스탠딩' 하나 찍는 일 말이죠. (이게 대다수 한국 특파원들이 하는 대부분의 일이니까, 정말 중요한 작업 아니겠습니까? ^^)
이 리포트에 등장하는 특파원은 미국 국무부가 있는 The Harry S Truman Building 간판 앞에서 '증명사진'을 찍었군요. 마치 이 리포트를 자신이 취재하고 인터뷰하고 기사를 작성하여 제작한 듯한 인상을 풍기려는 듯이 말이지요!
7) 그렇게... 서울에서 보내준 기사를 '리딩/reading'하고 (적어도 폼페이오가 발표할 당시엔) 가보지도 않은 브리핑룸이 있는 국무부 앞 거리에서 '스탠딩' 하나 찍어 (비싼 위성 사용료를 내고, 이게 다 혈세인 것을!) 다시 서울로 송출합니다.
8) 서울에 있는 담당 기자가 특파원의 '귀한 오디오와 증명사진'을 받아 거기에 자료 화면을 입히고 필요한 중국 대변인 코멘트를 넣고, 여기저기 필요한 대목에 자막을 달고... 그렇게 하여 <특파원 리포트> 하나가 태어납니다. (*중국 대변인 코멘트도 다른 수많은 자료 화면들과 마찬가지로 서방 통신사들이 보내주는, 아니, 그들한테 돈을 내고 사는, 것입니다.)
"아니, 정말 이런 거야? 이게 도대체 뭣들 하는 짓이지?" 하고 어처구니없다는 느낌이 분명 솟구쳤을 거예요. 하기야 예전에 제가 일하던 방송사의 '수습 기자들'이 OJT 기간에 국제부에서 야간에 이런 '따까리 일'을 한 뒤 특파원에 대한 환상이 깨졌노라고, 실망했다고 토로한 적도 있으니까요.
저는 20여 년 전에 아무개 상업방송사의 러시아 특파원으로 일한 적이 있습니다. (요즘 나름대로 잘 나간다고 하는 정규재TV의 정규재 씨도 같은 시기에 일했어요.) 이제 중요한 것은... 그때와 (20년이나 지난!) 지금에 이 <한국 언론의 특파원 운용> 시스템은 달라진 게 전혀 없다는 점입니다. 그 골자는...
1) 한국 언론의 특파원은 본연의 특파원 활동을 하지 않는다. (못한다.) 2) 더 나아가, (앞에서 제가 소개한 식의) 이런 특파원 리포트나 활동은 시청자를 기망하는 행위일 뿐이다.
이 포스트의 독자 제위께서도 저 앞 8단계를 읽으면서 (새로운 팩트를 알게 되면서) 허탈함은 물론이고 분노심마저 치솟았을지 모릅니다. [미디어오늘] 손가영 기자의 기사에 달린 댓글들에서도 그런 심정이 역력히 드러나니까요.
그러면... 한국 언론사들의 특파원은 왜 저렇게 무의미한 짓을 하느냐?!(제가 '무의미하다'고 일컫는 것은 특파원의 역할과 일과 활동 차원에서 그렇다는 뜻입니다. 먹고 사는 것으로야 남부럽지 않지요.)
1) 애초에 특파원 역할 설정에 문제가 있어요. 저런 8단계 식의 일을 특파원 역할이라고 보는 한, 언론사들은 문제 의식을 전혀 갖지 못할 겁니다. 실제로도 그렇습니다.
어느 지역에 특파원을 파견할 때, 그 기준은 '그 사람이 거기서 제대로 일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고 있는지'가 아니라, '회사에, 경영진에 얼마나 충실하게 봉사해 왔는지'가 거의 전부니까요. 혹은, 최소한 후자를 더 우선시하니까요. 그 결과... 특파원을 일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 동안 고생 많았으니 나가서 좀 쉬고 대접 받도록' 파견하는 경향이 짙으니까요. (지금도 분명 그럴 겁니다.) ** '회사에, 경영진에 충실한'이란 표현에 유념해 주세요. 시청자나 독자에게 충실한 게 아니에요!
2) 그러다 보니... 특파원 활동의 자질과 역량이 부족한 사람들도 그냥 내보냅니다. 어려울 게 뭐 있겠어요? 저 8단계 식으로 일한다면! 저렇게 하는 일이야 코흘리개들도 다 할 터인데!!
그러면 특파원 활동의 자질은 무엇이겠습니까?제가 보기엔 (아니, 누가 보더라도) 두 가지에요.
1) 취재 능력
2) 현지 언어 구사 능력
그런데... 취재 능력에 대해 거론할 생각을 하니, 좀 우울해지는군요. 취재 능력에 여러 요소가 들어가겠는데, 우린 단적으로 <질문하는 솜씨와 능력> 하나만 보겠습니다. 이게 안 될 때, 안 되는데, 취재가 알차게 될 수 있을까요? 묻는 제가 바보 같이 보일 겁니다. ^^
한데 우리네 기자들의 질문 솜씨나 수준은 어떤가요? 일반 시청자들이 알 길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 수준을 엿보고 짐작케 할 수 있는 진귀한 장면을 많은 이들이 목격하게 된 사건이 하나 있었지요? 다시 한 번 보시지요.
네, 보는 사람 입장에서도 정말 답답하고 민망하고 화나는 장면이었습니다. 오죽하면 몇 년 지난 뒤에도 이런 식의 기사들이 또 나오는 것일까요?
질문을 못하는데 무슨 취재가 되겠습니까? 어불성설이지요.
다음에 현지 언어 구사 능력에 관해 생각해 볼까요?
예를 들어 파리 특파원으로 일하는데 프랑스어 한마디 못하고, 예를 들어 모스크바 주재 특파원으로 일하는데 러시아에 전혀 관심 없었고 러시아어에 깜깜하다면... 이거, 일이 제대로 될까요? 묻는 제가 또 바보 같이 보일 정도 아닌가요? ㅎㅎ
"아, 거야 뭐, 통역을 쓰면 되지 않겠어?!" 하고 반박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럴 수 있어요. 그렇게들 해왔고 하고 있어요. 그런데 그렇게 해서 다른 외국 특파원들과 경쟁에서 이길 수 있겠어요? 아니, 그렇게 거창한 목표는 젖혀 놓고, 제대로 된 정보를 신속하게 국내에 전할 수 있겠어요? 언감생심!
제가 생각하기엔... 외교관이나 상사 주재원 등은 현지 언어를 몰라도 영어 하나만 잘 하면 괜찮습니다. 아니, 오히려 그게 더 나을 거예요. 왜냐면 현지 언어를 아무리 잘 한다 해도 현지인만큼은 불가능하니까 접촉과 교섭에서 불리하지 않겠어요? 하지만... 특파원은 현지 언어를 반드시 잘 해야 합니다. 대통령에서부터 시정잡배에 이르기까지 두루 직접 접해야 하니까요. 또 무엇보다도 언어를 안다는 것은 그 문화를, 그 사회를, 그 사람들을 안다는 뜻이니까요. 잘 알아야 하구요!
이런 측면에서, 우리 이웃인 일본과 중국의 특파원들은 거의 그렇게 합니다. 제대로 일을 합니다. 적어도 제가 일하던 러시아에서 그들은 러시아 사회를 잘 알고 러시아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고 현지 많은 정보원들과 교류도 꾸준하게 유지합니다. 그래서 직접 취재가 가능하며,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이게 진짜 기자요, 이게 정말 특파원 아니겠어요?
또 한 가지 측면은... 제가 예전에 보니까, 예를 들어 CNN 특파원들은 거의 늘 '잠바 차림'에 돌아다니고 취재하고 리포트도 하더군요. 셔츠 소맷자락 걷어붙이고 말이죠. 정확하고 신속한 취재와 리포트 제작에 그만큼 바쁘다는 뜻입니다.
'쎄느 강변에서 버버리 코트 깃 세우고 멋진 넥타이 매고 증명사진 찍을' 만큼 한가하지 않다는 뜻이에요. 물론 크렘린의 대통령 기자회견 같은 자리라면 격에 맞는 복장을 갖춰야겠지요. 하지만 그 외에는 넥타이 매고 양복 입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왜? 왜냐하면, 그럴 시간이 없어요! 일본 특파원들도 마찬가지에요.
그러니... 앞으로 혹시 어떤 티브이 뉴스 프로그램에서 어디에 무슨 특파원이 리포트한다고 나오는데, 양복 잘 빼 입고 멋진 넥타이 두르고 머리 모양 잘 손질하고 나왔다면... '아, 이 사람은 제대로 일하는 특파원이 아니구나, 서울에서 보내주는 기사에 입만 빌려주고 증명사진 하나 찍어 보내는 특파원이구나' 하고 생각하면 거의 틀리지 않을 겁니다. (이건 안목을 확장하는 일입니다.)
이 포스트를 작성하는 데 다섯 시간이 넘게 걸렸습니다. 저로서는 내용으로 보아 별반 재미도 없고, 한편으론 무슨 내부 고발 같기도 하면서 또 한편으론 "그럼, 넌 얼마나 잘 났는데?" 하는 타박을 들을 만도 하다 싶어 며칠 동안 글을 쓸까 말까 망설이던 사안입니다. 그러다가... '그래도 많은 이들이 그 실상을 제대로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에 포스트를 작성하게 된 것인데, 결론은 이렇습니다.
이제 '눈 가리고 아옹하는' 시대는 지나갔다. 끝났다. 지금 같은 식의 특파원 리포트는 더 이상 만들지 말라. 이건 시청자들을 우롱하는 짓이다. 기만이요 사기와 다름없는 일이다.
당신이 보지 않고 듣지 않은 일을 당신이 직접 보고 들은 것처럼 말하고 전해서는 안 된다. 이런 짓은 허풍선이나 사기꾼이 즐겨 취하는 수법이다. 언론이 그래도 되는 것인가? "폼페이오는 제재를 강화한다고 밝혔습니다." 이게 아니다. "폼페이오는 제재를 강화한다고 밝힌 것으로 AP통신이 전했습니다, 혹은, AP통신에 따르면, 폼페이오는 제재를 강화한다고 밝혔습니다." 이렇게 해야 정직한 인용이 된다.
앞에서 소개한 KBS 워싱턴 특파원의 리포트 같은 경우, 특파원의 취재 흔적이 그 어디에도 없잖아요? 국무부 브리핑룸에 앉아 폼페이오의 발표를 들은 것도 아니요, 중국 대변인 코멘트를 들은 것도 아닙니다. 더욱이 워싱턴에서 한국 정부의 입장을 취재했을 리는 만무하고. 그런데... 그 모든 것을 마치 자신이 취재한 것 같은 분위기를 잡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이것은 표절이고 도적질이고 범법 행위입니다. (다른 대다수 특파원들 경우에도 대동소이합니다. 이것을 한국 언론에서는 '관행'이라 부르는 모양입니다.)
신문 특파원의 표절 사건으로 시작해서 방송 특파원의 리포트 얘기만 하니까 좀 이상한가요? 하지만, 본질은 똑같습니다. (입말과 글말의 본질이 똑같듯이 말이죠. ^^) 저 중앙일보 뉴욕 특파원이 월스트리트 저널의 사설을 거의 베껴서 자신의 칼럼인 양 서울에 보냈는데 (이런 점을 서울 본사에서는 물론, 당연히, 알고 있었을 겁니다)... 제가 짐작하기엔 그 번역마저도 특파원이 직접 한 것은 아니고 유학생에게 맡겼을 것이라고 봅니다. (만에 하나, 제 지레짐작이 틀렸음이 드러난다면 즉각 사과하고 수정할 용의가 있습니다.)
한 가지만 더...
특파원의 리포트 열 개 가운데 여덟 개 정도가 실제로는 서울에서 제작하는 것이라면, 나머지 2할 정도는 특파원이 현지에서 직접 취재해 보도하는 것인가? 그렇게 볼 수 있어요. 한데 그것조차도 현지의 우리 교민들이나 기업 얘기, 아니면 한국에서 간 정치인이나 고위 공직자들 얘기가 대부분입니다. 특파원이 주재하는 나라의 문화나 사회, 사람들에 대한 feature story 같은 것은 엄두도 못 냅니다.
왜냐하면, 그 나라와 사회를 잘 모르니까, 애초에 관심도 없었으니까, 어쩌다가 좋은 자리가 나서 그냥 부임한 것일 뿐이니까... 이런 경우가 태반입니다. 그러니 일이 제대로 되겠습니까? 아니, 앞에서 제가 소개한 8단계 식의 일이야 해내겠지요. 하지만, 그게 무슨 특파원의 역할이란 말인가요? 소가 웃을 노릇입니다. 그런데 지금 한국의 언론사는 다들(!)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언론사 사주나 경영진은 만약 어떤 직원이 (기자가) 애를 많이 썼고 포상과 위로를 해주고 싶다면 특파원이란 이름으로 내보낼 것이 아니라 연수를 보내든지 다른 보상 방법을 마련해야 할 겁니다. 지금처럼 계속한다면 '특파원은 저런 건가 봐, 저렇게 일하는 건가 봐' 하고 잘못 된 개념과 정의를 잘 모르는 이들에게 심어줄 우려가 있으니까요. 이건 형사 범죄는 아니라 해도, 윤리와 양심에 어긋나는 행위입니다.
이제 '무늬만 특파원'인 시대는 지났습니다. 시청자들을 농락하는 짓은 이제 접어야 할 때가 됐습니다. 아니, 지났습니다. 특파원 파견 인력을 키워서 제대로 활용하든지, 아니면 외국 통신사 기사를 인용하는 것이라고 정직하게 밝히고 보도를 하든지 해야 합니다.
인력을 제대로 키우고 대접해야 젊은이들이 제대로 된 공부를 열심히 할 겁니다. 줄만 잘 서면 만사 오케이인 시대는 이제 저물었습니다. 그렇게 해서는 더 이상 회사도 국가도 개인도 발전 못하고 성장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국제사회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일들을 서방 통신사의 시각이 아니라 우리 한국 기자의, 한국 특파원의 시각으로 접근하고 해석하고 적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게 본래 특파원의 역할 아니겠어요? 서방의 기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 이웃인 일본과 중국의 특파원들은 거의 다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못 믿겠다면, 저 오바마 기자회견에서 불쑥 튀어나온 중국의 루이 청강 기자를 보십시오. 당당하고 적극적이면서도 예의를 잃지 않고 있습니다. 천하의 오바마로 하여금 말을 더듬게 만들 정도에요. 이게 바로 기자요, 특파원입니다.
글이 많이 길어졌습니다.
마감 시한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닌데 이 포스트에 대한 심리적 압박에서 벗어나고 싶어 서두른 감이 있습니다. 그래서 글이 좀 거칠다는 느낌이 있습니다. 퇴고를 몇 번 해야겠습니다.
이 글 가운데 만에 하나 제 생각에 잘못 된 부분이 있어서 전-현직 특파원이나 언론계 종사자 어떤 분이든 지적해 주신다면, 확인하고 기꺼이 수정하겠습니다.